이것은 사회적 사기인가, 개인적 범죄인가
1. 같은 범죄, 다른 해석
2019년 프랑스에서는 한 불법 연금 수령 사건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사건의 범인은 70대 여성으로 25년 동안 사망한 어머니의 퇴직 연금을 부당하게 수령했다 덜미를 잡혔고, 그녀는 징역 15개월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약 20만 유로(한화 약 2억 9천만 원)를 갚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 여성에게 부여된 죄명은 ‘사회적 사기’(fraude sociale)다. ‘사회적 사기’는 프랑스에서 가장 골치 아픈 범죄이자 정기적으로 다루어지는 정치 논쟁 중 하나로, 프랑스 정부는 오래전부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 중이다. 해결방안이 어떻게 도출되든 간에 그것의 최종 목적은 사회적 사기 근절과 세금 환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건의 초점은 주로 ‘부당 수령’, ‘세금’, ‘국민의 의무’에 맞추어져 있으며, 이른바 범인의 신상 털기와 같은 사적 이야기는 크게 이슈화되지 않는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위와 유사한 부당 연금 수령 사건이 발생했다. 2023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40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가 사망했음에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채 2년이 넘게 시신을 자신의 집에 유기하고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연금을 부당하게 수령하다 현행범으로 체포, 구속된 사건이었다.
대부분 언론은 이 사건을 ‘백골 시신 방치 사건’이라고 명명했고, 사람들은 그녀를 돈 때문에 부모의 시신을 방치한 ‘천벌 받을 몹쓸 인간’으로 불렀다. 법은 그녀를 시신유기 혐의를 씌웠고, 대중은 그녀의 엽기적인 행위와 함께 패륜, 백골, 시신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녀의 안타까운 사정이 노인 빈곤, 고립과 같은 사회적 문제와 연결되면서 범죄의 핵심이 사회적 비극으로 바뀌는 듯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시선은 확장되지 못했고, 여전히 가난한 개인이 돈을 위해 부모의 시신을 유기한 범죄라는 프레임에서 머무르는 데 그쳤다.
두 사건 모두 연금의 수령을 부당하게 노린 범죄라는 점에서 같지만, 이를 바라보는 프랑스와 한국의 관점과 해석은 다르다. 한쪽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사회적 사기로, 다른 한쪽은 개인의 일탈 행위로 해석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 ‘패륜아’라는 낙인까지 더해지는데, 이는 가족중심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언제든지 추방의 명분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치명적인 것이기도 하다.
사실 법적 처벌만큼이나 두려운 건 사회적 처벌이다. 그러나 사회적 처벌은 수위도 공소시효도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대중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지지 전까지는 수시로 소환되어야 하고 어떤 비난이라도 기꺼이 감당해야 하며 ‘죄인답게’ 행동해야 한다. 이 처벌에서 벗어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
문미순의 장편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살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살기 위해 돌봄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2. 이들의 겨울이 추운 이유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한 줄로 요약하면 두 주인공 명주와 준성이 죽은 부모 앞으로 지급된 연금을 부당하게 수령하고 그 돈으로 겨울을 지낸 이야기다. 두 주인공의 끝이 어떠할지 예상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이들이 불법 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법의 처벌을 받아 대가를 치른 동시에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며 반성하는 것.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런 예상을 완전히 거부하고 다른 방식으로 해피엔딩을 이끌어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낯설다. 하지만 이 낯섦을 불행이 아닌 다행이라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고통을 지내온 ‘방식’이 우리가 고통을 견디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이 꿈꾸는 미래와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결국 같은 결을 하고 있다는 연대감 때문이다.
문미순,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나무옆의자, 2023
쉰 살의 명주는 병든 어머니, 이혼 경력, 철없는 딸, 아픔 몸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명주를 더 길고 깊은 가난으로 이끈다. 어머니의 명의로 된 아파트에 살며 어머니 이름으로 지급되는 유족 연금과 기초연금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명주에게 어머니는 생계 수단 그 자체였다. 그런 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죽던 날, 통장에 입금된 연금 액수를 확인한 명주는 어머니의 죽음을 조금 미루기로 한다. 이 돈은 엄마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긴 풍요와 여유라는 믿음으로, 죽은 사람이 산 사람 살려준다는 심정으로.
또 다른 주인공 준성은 낮에는 알코올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돌보고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일한다. 아버지 이름으로 지급되는 국민연금과 대리운전으로 번 금액을 합쳐 백만 원 정도 되는 돈이 한 달 수입의 전부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는 준성은 소속이 있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진짜’ 노동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당장 타인 돌봄이 필요한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어 진짜 노동자가 될 기회를 놓치거나 미루는 것이 부지기수다. 비밀만 한 언덕도, 알량한 스펙조차 없는 상에서 1인분의 삶을 살아내야 동시에 병든 아버지의 삶까지 책임져야 하는 건 준성에게 형벌에 가까웠다.
두 주인공이 살아내기 위해 선택했던 부당 연금 수령이라는 결과 앞에는 독박 돌봄, 빈곤, 고립과 소외라는 거대한 사회적 담론이 괄호로 묶여 있다. 물론 이것들이 불법과 위법을 상쇄시킬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 괄호를 농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하는 건 그 시선이 다음에 오는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돌봄으로 얻은 대가는 부모 이름으로 지급된 연금이 전부다. 혹자는 부모 등에 빨대 꽂을 생각을 하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일해서 돈을 벌라고 조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돌봄은 타인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거부하거나 미룰 수 없는 것이다. 이들 부모의 생사(生死)는 전적으로 두 사람의 돌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금은 당사자들에게 지급된 생계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돌봄 노동자가 자신의 삶과 지위, 그리고 사회로 나갈 기회를 포기하는 대신 받은 보상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연금은 두 인물을 고립과 소외를 이끈 독약이기도 하다. 만약 이들에게 연금이 아닌 다른 사회적 안전망이 있었더라면,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전망이 있었더라면 명주도 준성도 부모의 사망을 숨기고, 자신을 고립시키 비극은 경험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 측면에서 ’진천 할아버지‘의 존재는 명주와 명주 어머니, 나아가 준성 모두에게 귀한 존재다. 부모의 죽음을 숨기고 유기한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명주에게 진천할아버지는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한다. 물론 그 접촉의 최종 목적은 명주의 어머니지만 그녀가 없다고 해도 진천할아버지는 명주라는 매개체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세상을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진천할아버지의 돌봄은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겁다. 거리를 둔 돌봄이기에 적당히 가볍고, 마음을 헤아리는 돌봄이기에 적당히 무겁다.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진천할아버지의 관심을 ‘주책맞은’ 노년의 로맨스에서 ‘애틋한 돌봄’으로 이해하는 순간, 명주는 타인을 향한 진천할아버지의 진심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비로소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마음을 준성에게 이어간다. 준성 역시 명주의 관심, 진심어린 도움으로 두려움에 차라리 세상으로부터 단절하고자 했던 마음을 접고 대신 세상과 싸워보기로 다짐한다.
갑자기 마주친 몸집이 집채만 한 곰과 한바탕 싸움이라도 한 듯 가슴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가슴속에서는 오라고, 어떤 운명도 상대해줄 테니 오라고 나지막이 속삭이고 있었다. 준성은 지금 바닥으로 떨어진 제 인생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인생을 아버지의 방식대로 살아냈듯이, 준성은 제 나름의 방식으로 싸워가고 있다고.(밑줄-인용자)
현실에서 이들의 범죄는 법의 응징을 받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소설은 이들에게 어떤 응징도 하지 않고 도리어 해피엔딩을 선사한다. 사실 이 결말보다 더한 판타지는 없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법을 피했다고 공정하지 못하다고, 패륜을 저지른 이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처벌을 적용해야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이야기는 소설에서나 가능한 것 아니겠냐며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3. 겨울에 더 간절한 온기(溫氣)
돌봄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 취약 빈곤계층, 그리고 부모의 죽음을 숨기고 부당하게 연금을 수령한 명주와 준성을 어떤 이름으로 호명하고 또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처벌할 것인지는 오로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달렸다. 명주나 준성이 처한 상황이 비록 개인적, 개별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들이 선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 배경에는 사회적 구조와 환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 안에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선택권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 지역, 민족, 국가에 따라 그 양과 질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법의 처벌을 받지 않을뿐더러 마음을 다해 돌봤던 부모의 시신을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곳에 모신다. 게다가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까지 한다. 지긋지긋한 돌봄으로부터 해방된 줄 알았던 그들에게 또 다른 돌봄의 대상이 생긴 셈이다. 명주와 준성이 만드는 이야기의 결말은 낭만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이것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아니냐며 변명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을 숨길 수 없다.
명주와 준성이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온몸으로 부모를 돌봐온 사람들이라는 것에는 의심이 없다. 두 사람이 두려워 한 건 돌봄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만큼이나 돌봄 행위가 종료되었을 때 남겨질 비루한 자기 자신이었을 테다. 타인을 돌보느라 자신을 돌보는 시간도, 여유도 방법도 잃어버린 자기 자신 말이다. 홀로 남은 이들에 지금 필요한 건 고생했다는 위로와 괜찮다는 위안일 것이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리고 그들과 같은 세계를 이고 있는 구성원으로서, 나 역시 그들이 겪었던 돌봄과 소외를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무력한 개인으로서 그들 앞에 놓일 미래가 부디 불행하지 않았으면,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비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비추어 본다. /장윤미(문화평론가)2024.02.05
*프랑스 연금 부당 수령 관련 기사
*인천 백골 시신 방치 사건 관련 기사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5151616011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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