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교육진흥원 옥상에서 북쪽 방향으로 바라본 경관이다. 오래된 소나무( 최소 150년 이상 추정) 몇 그루를 확인했다. 소나무들의 분포지는 평생교육원진흥원 바로 뒷편 2 그루와 금강공원 교차로입구에서 금강공원 관리사무소 앞 260여 m에 약 20 그루가 금강공원로와 주변 주택가 골목에 있다.
일대는 주택재개발정비사업지구로 조만간 변화를 예고있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골목골목이 유서 깊은 곳이지만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예전에는 일대를 금산마을이라 하였다. 금산마을은 온천1동에 있었던 자연마을로, 1899년까지만 해도 금산 마을을 금정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금정리(金井里)라고 불리기도 했다. 1832년에 편찬한『동래부읍지』방리조에 따르면 “금산리(金山里)는 서면에 속해 있었고, 관문(官門)에서 6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한다.
그리고 1904년에 편찬된『동래군가호안』에 의하면 서상면(西上面) 관내에 금산리(金山里)가 있었고 호수는 37호에 정․ 김․ 박씨 등 성씨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금산 마을은 미남동, 화촌동, 북면의 소정동 일부와 합쳐져 동래군 동래면 온천리에 편입되었다. 1942년 10월 경상남도 부산부 동래출장소 온천정(溫泉町), 1949년 8월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출장소 온천동, 1957년 1월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이 되었다. 1959년 2월 온천동의 행정동을 온천 1동과 온천 2동으로 나눌 때 온천 1동에 속하였고, 1963년 1월 부산직할시 동래구 온천동, 1995년 1월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금산 마을이 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온정(溫井)이 알려져 온천욕을 하면 아픈 사람의 몸을 치유해 주는 특효가 있기로 유명했고, 고려·조선 시대에도 많은 왕실 종친과 양반 문인들이 왕래했다.
온천동(溫泉洞)의 지명은 이곳의 동래 온천에서 비롯되었다. 온천동을 지칭하는 명칭은 『삼국유사(三國遺事)』[1145]에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萇山國)의 온정(溫井)에서 목욕을 하고 경주로 돌아오던 길에……”라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서 등장하고 있다.
한편 이웃한 동래별장(東萊別莊)은 일제강점기 부산 제일의 땅부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가 지은 하자마별장(迫間別莊)으로 하자마탕원이라 불렀다. 1924년 9월 10일 조선총독부 시정(始政) 20년 기념박람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을 때 일본 왕족인 한원궁(閑院宮)이 부산에 와서 동래온천장 하자마별장에서 자고 갔던 기록이 있다.
<하자마>는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 경상남도회부의장, 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고, 부산토지주식회사 사장, 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좌지우지하였다.
당시 부산에는 그와 같은 일본인 자본가들이 곳곳에 별장을 짓고 관광과 유흥을 즐겼다. 온천장에서 유명했던 여관 중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봉래관(蓬萊館·농심호텔의 전신), 대지여관(大池旅館) 등이 있었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9월에 미군이 부산에 진주하면서 하자마별장에는 경상남도 양산․ 밀양․ 울산 등지를 관할하는 경상남도 제3지구 미군정청이 군정사무를 보는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지금의 동래별장이란 이름은 한국전쟁 당시 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면서 유래되었다.
1742년(영조 18)에 동래부사 김석일이 동래부사청 동헌 앞에 세운 조선 후기 전형적인 관아의 문루이다. 1895년(고종 32)에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으로 승격함에 따라 포정사라고도 하였다. 1920년대까지 원래의 자리인 동래시장 입구(현 수안파출소 맞은편)에 있었으나, 이후 일제의 시가지 정리계획이라는 명분에 의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금의 금강공원 입구로 옮겨졌다. 이후 2014년 동래구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인근 토지들을 매입하여 원래의 위치로 복귀하였다.
1930년대 현재의 금강공원로로 옮겨진 망미루 모습. 좌측의 소나무는 현재에도 보인다.
겸재 정선 동래성 전도 남쪽으로 난 이층 누각(남문-무우루無憂樓)이 현재 동래시장이 위치한 곳이며 향교는 현재 자리와 같다. 동래성은 본디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성으로, 1387년(고려 우왕13) 김해부사로 있던 박위(朴葳)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1447년(세종29) 동래현령 김시로(金時露)가 높이 13척, 둘레 3,090척에 이르는 성으로 개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1731년(영조7) 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다시 확장·보수하였다. 이때의 성 둘레는 1만7,291척(약 3.8km), 높이 17척이었고, 1870년(고종7)에는 성벽과 문루(門樓)도 확장되었다. 동문에는 지희루, 서문에는 심성루, 남문에는 무우루, 암문에는 은일루가 각각 있었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 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을 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비계획 등으로 평지에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 모습이 남았는데, 성내에 북문·인생문·동장대·서장대·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성벽도 부분적으로 복원·보수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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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 동래성은 왜적 방어의 최전방 기지로서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성을 둘러가면서 세워진 망루의 모습이 성내의 관아 건물과 함께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900년대 동래장날 풍경으로 오른쪽 누각이 정원루요 왼쪽이 식파루다.
평생교육진흥원 뒷편 주택가에 있는 소나무 . 생육환경이 썩 좋지 않음에도 6층 높이의 수고로 건재하다. 약 3m정도에서 기부에서 두 갈래로 줄기가 갈라지며 4~5중간 큰 가지를 펼치고 있다.
Time Is Tight - Booker T & The M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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