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일기/ 최미랑 지음/ 오월의봄 펴냄 / 2021.02.
저자 : 최미랑 경향신문 기자. 세상 온갖 일에 다 관심이 있어 이 직업을 택했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기사도 많이 썼지만 누구든지 더 나아질 가능성은 있다고 믿는 편이다. 모두 자기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그 가능성을 키우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몸을 써서 무언가를 배우고 작은 깨달음을 축적해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목차
프롤로그 무슨 먹는 얘기를 하겠다고5
1. 나는 먹고, 너는 죽고: 씹고 뜯고 맛보는 동안에
달구14
꽃게의 저주24
문어36
인간과 짐승46
모기 가루 학교와 뒤주의 공포54
반야심경62
2. 식탁 뒤 숨은 마음: 서로 빚지며 먹는다는 것
언니들 마음70
주류 감각과 이방인 감각82
채소를 생으로 먹으면 사람이 죽습니다98
가족의 외식106
모두의 배 속 사정이 제각각 다른데도120
3. 나메살따구 말고: 즐거운 상상과 무한한 가능성
무엇이 걱정인가, 바게트가 있는데132
대방어와 고통 없는 밥상140
흑염소와 채개장150
흥, 내가 맛없는 것 먹고 살 것 같은가156
피드 관리164
4. 허기와 부름 사이: 밥값 아닌 밥상을 위하여
배고픔에 대하여170
영혼의 보약, 혼밥180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184
죽이나 수프는 아니니까190
옥상의 상추196
에필로그 욕망의 재구성207
도움받은 책210
출판사 서평
나는 먹고, 너는 죽고……
: 내가 씹고 뜯고 맛보는 동안에
“미안하다고 하면 그만인 걸까. 견디는 방식, 견디기 위해 나보다 약한 것을 이용하는 방식, 그러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고기를 먹은 날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죄책감으로 끝이 났다. 회사에서 종일 털린 영혼을 간간한 양념에 푹 절은 KFC 치킨으로 회복한 어느 날엔가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견디는 방식, 견디기 위해 나보다 약한 것을 이용하는 방식, 그러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여기서 달아나면 겁쟁이가 되는 걸까?”
이때로부터 열흘쯤 지났을까,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다. 푸지게, 맛있게 먹고 죄책감에 눈물 흘리는 그 오랜 패턴에서 나를 구출하기로 한 것이다.
“마당에서 닭목을 잡아 비틀고 가마솥에 담가 털 뽑았다는 어른들의 시대도 다 지나가고 지금 우리는 닭을 컨베이어벨트에 거꾸로 매달아 뎅겅뎅겅 목 베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예로부터 먹던 것이니 잡아먹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인류세를 살아가는 인간은 이미 전과 같이 먹고 있지 않으며 전과 같이 먹어야 할 이유도 없다고 답하고 싶다.”
“동물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와 농촌을 구분하고 흙을 아스팔트로 덮고 오염된 내 집 공기를 공기청정기로 정화하며 살아간다 해도 우리와 가축, 야생동물, 식물과 미생물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채식은 무엇보다 ‘더 많이 더 많이’를 외치는 세계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기름진 것, 좋은 것, 비싼 것을 탐하면 탐할수록 나는 나를 더 착취할 수밖에 없다. 처음 채식을 결심하게 된 건 윤리적 동기에서였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방황과 혼돈의 순간을 담담히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이 선택이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방법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메살따구 말고
: 즐거운 상상과 무한한 가능성
아직까지도 세상은 ‘고기를 먹지 않는’ 일상을 재미도 영양가도 없는 따분하고 금욕적인 무엇으로 상상한다. 그러니까 ‘채식’이란 건 그저 지독하게 맛없는 것을 건강상의 이유 혹은 윤리적인 이유로 감내하는 실천인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의 편견이 아닐까? 꼭 ‘나메살따구’(남의 살)를 씹어야 훌륭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는 믿음, 누군가를 대접할 땐 꼭 ‘피를 봐야’ 한다는 문화적 고정관념 같은 것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순 없는 걸까.
“육식을 줄이는 것은 다른 종을 착취하지 않고 공존하는 일과,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들 또는 혹시 있게 될지 모를 자손의 미래를 지키는 것 둘 다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부디 모두 원래의 먹던 방식만 고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하던 대로 하고 싶은 게으른 관성과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을 ‘자연스럽다’ ‘필수적이다’ 같은 말로 포장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기를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많이 있다.”
《섭식일기》를 통해 널리 공유하고 싶은 건, 세간의 편견과 달리 채식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며, 즐겁고도 창발적인 상상력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고기 없이도 얼마든지 맛있는 음식을 탐하고 욕망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더 창의적이고 더 맛있는 것을 개발해낼 수 있다는 걸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채식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인간이 만든 이 다채로운 문화, 원칙과 융통성, 잔머리와 끼 부림의 총합인 그것, ‘레시피’를 잃는 것이 솔직히 겁이 났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보면, 육식 중심으로 쏠리게 되면서 우리가 외면한, 그놈의 고기에 가려져 저평가된 장구한 역사의 식문화는 아깝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 채식을 지향하는 것은 짐승을 착취해 돈 버는 자본이 밀어낸 맛있는 것들을 되찾아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채식 요리를 익히는 재미라는 건, ‘무엇은 어떠해야 한다’를 깨나가는 과정 자체인 것 같다.
“버터와 우유 없이 어떻게 고소하고 바삭한 파이를 만들어내지?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움은 또 어떻고? 나는 이제 노루궁뎅이버섯탕과 양배추스테이크, 배추찜, 쑥버무리를 탐낸다. 탐구할 영역이 널려 있다는 것에 매일 감동한다. 치킨을 보면 생각한다. 이 맛있는 튀김옷 안에 버섯이 있으면 어떨까, 왜 안 될까, 최강의 식감을 개발해내고 싶다.”
“기름 넘치는 최상급 소고기를 사서 어떻게 그 값이 안 아깝게 먹을까 고민하는 건 별 재미가 없다. 그런 재료를 안 쓰고, 값싸고 흔한 재료로 어떻게 맛있는 걸 만들어낼까 하는 문제가 더 도전적이다. 창의성이란 무한정의 자유가 아니라 적절한 제약 조건이 있을 때 발휘되는 것 아닌가.”
식탁 뒤 숨겨진 마음을 찾아
: 먹을 것 내어주는 분들을 생각하며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의 문제만큼 중요한 게 또 있다.
하루하루 나만의 ‘섭식일기’를 써내려가며 먹을 것을 내어주는 분들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날부터 “시커먼 새벽에 나와 돼지와 소 사체를 해체하는 정육점 사장님”과 “하루 몇 마리 생선 목을 땄는지 알 수 없을 수산시장의 노동자분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이뿐인가. 외식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껴 보겠다고 여행가는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지지고 볶고, 그렇게 한 음식을 보자기에 바리바리 싸 챙기는 엄마, “나무틀에 얹힌 무거운 돌솥 몇 개씩”을 겹쳐 나르면서도 금새 또 새로운 반찬으로 새 상을 차려주시는 식당 언니들의 “프로페셔널리즘”엔 언제나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음식만큼이나 놀라운 게 언니들의 손놀림이었다. 큰 냄비에 가스불을 붙여놓고 방에 앉아 있으면 언니들이 먼저 전복을 싹싹 썰어 한입에 쏙쏙 들어가게 해주고 우리가 그것을 먹는 동안에 문어를 슥슥 잘라주었다. 이 모든 것을 낼름낼름 받아먹는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이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나의 선택, 지금껏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 나의 채식 생활은 전부 이분들에게 빚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젠 밥 먹을 때 “남의 먹을 것을 제 것처럼 살뜰하게 챙기는 분들”의 그 수고로움을 잊지 않으려 한다. 밥상 위를 장식한 온갖 음식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것을 말이다.
책속으로
비행기가 멈추고 모두가 못 가는 시절이 오자 그만 알아버렸다. 언제 모자라서 문제된 적 있었나. 항상 넘쳐나는 게 문제였던 것이다.--- p.6
섭식은 살생을 동반한다. 먹어야 사는 동물이자 유사 창조주의 지위에 오른 인간으로서 거대한 순환의 고리에서 내가 어디 위치하는지 둘러보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7
엄마의 지원이 없었어도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세월아 네월아, 흐르는 물에 채소를 잎잎이 씻어 데쳐 무치는 그런 노동을 엄마가 대신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허구한 날 서브웨이 베지 샌드위치(치즈 빼고 생양파 빼고)만 먹는 신세 아니었을까.--- p.73~74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영감을 받아 비건 레시피를 창조해내는 것을 구경하면 무척 재밌다. 박막례의 오징어비빔국수 레시피를 응용한 ‘가짜 오징어국수’, 컬리플라워를 잘라 닭봉처럼 만들어낸 ‘버팔로 컬리플라워윙’ 같은 것들. 고기를 멀리한다면서 왜 고기 맛을 따라 하는지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또한 인류가 축적한 문화의 일부인데 재밌고 즐겁고 맛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무엇인가.--- p.161
그놈의 소고기, 이제 나에게 충분히 사줄 수 있다. 하지만 영혼의 충족감은 소고기로 달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싶다. --- p.208
우리가 행사하는 ‘폭력’의 종류를 되묻다
불교의 아침은 오전 3시에 시작한다. 운판, 목어, 법고, 범종 등 사물로 그 시작을 알린다. 하늘을 나는 새를 깨우는 운판, 물에 사는 짐승을 깨우는 목어(휴대용 목어가 우리가 아는 목탁이다), 가축과 짐승을 깨우는 법고(북), 지상에 머무는 중생을 깨우는 범종(대종) 등 사물을 울려 만물을 깨운다. 농악기로 연주하는 전통문화 사물놀이에서 ‘사물’의 기원이 불교의 사물이라는 말도 있다.
새벽예불에서 사물로 동물과 사람을 깨운다는 말을 듣고 이런 상상을 했다. 생명들을 깨우는 순서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먼저 목어를 쳐서 물속 생물을 깨우고 그 다음 운판을 쳐서 새를 깨운 뒤, 법고를 쳐서 네발 달린 짐승을 깨우고 맨 마지막에 범종을 쳐 인간을 깨운다고 생각했다. 불교라면, 먹이사슬의 말단에 있는 이들을 먼저 깨우고 상위 포식자를 나중에 깨워 ‘약한 짐승이 자다가 억울하게 먹히는 일은 없게 하지 않을까’하는 상상이었다.
승려였던 불교 관계자 몇에게 이런 ‘상상’에 대해 물었다. 결론은 ‘그런 해석은 처음 듣는다’에 가까웠다. 일단 사물에는 각각 그만의 뜻이 있었고 사찰마다 사물을 치는 순서가 달랐다. 범종을 치는 행위는 지옥문을 여는 의미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내 상상의 맥락과 맞지 않았다.
다만 종이나 목탁 등을 칠 때, 처음엔 슬쩍 건들고 점점 소리를 키워간다고 했다. 무생물인 나무나 쇠 역시도 깜짝 놀라지 않겠냐는 설명이었다. 듣는 생명체들도 자다가 갑자기 놀라지 않겠냐는 뜻으로 들렸다. 여하튼 이러한 상상으로 동물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봤다는 점에선 만족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다분히 수직적이다. 인간은 동물을 조련해 사용하거나 키워서 잡아먹는다. 인간은 동물을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을까. 생명을 ‘고기’로 상품화하는 건 윤리적으로 괜찮을까. 먹고 살기 위해 동물의 자율성을 박탈하는 건 필요악일까. 인간은 생태계에서 어디쯤 위치할까. 인간은 어디까지 먹을 수 있고 무엇을 먹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런 이들을 위한 책이 있다. 최미랑 경향신문 기자가 쓴 ‘섭식일기’다.
최 기자는 (잡아먹히는) 동물에 대해 고민한 과정을 책에 담았다. 고기를 먹던 시절의 일상에서 고기를 끊어가는 과정을 담은 기록물이다. ‘채식주의자가 채식하는 이유를 적은 책’이라고 요약하기엔 건조하다. 메를로 퐁티가 말했듯 우린 ‘순진무구함’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뿐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진 한 폭력(살생)은 숙명이기 때문이다. ‘무얼 먹을까’라는 질문은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문제다.
‘어차피 짐승은 잡아먹힌다’는 문장은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에서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는 건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닭을 먹기 위한 목적으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하게 닭장에 밀어 넣고 알을 채취하다가 원하는 시점에 죽여서 판매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표현하긴 부적절하지 않나.
인간은 ‘인간을 수단화하지 않아야 한다’고 (겉으로는) 주장하지만 ‘동물을 수단화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인간은 고등어를 물‘고기’로 부르며 고등어 두‘마리’를 한‘손’으로 세어가며 사고팔 자격이 있을까. 고등어를 한‘명’처럼 대한다면 그들이 물 밖에서 숨 막혀 죽어갈 때 고통을 한번쯤 생각하지 않을까.
저자는 우리가 어디까지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지 질문한다. 이미 일부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는 ‘문어와 낙지, 쭈꾸미 등을 산 채로 끓는 물에 넣는 일’은 관둘 수 있나. 소가 먹는 곡물을 다른 대륙에서 굶고 있는 다른 인간들에게 분배하고 소고기 소비를 줄일 수 있나. 2008년 미국산 소고기 파동 때 소고기 수입을 국력의 문제로 생각했지만 고기를 생산하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돌아본 걸까. 고기를 만들기 위해 공기가 오염됐는데 미세먼지에 삼겹살이 좋다고 홍보하는 게 모순적이진 않나. 고기를 먹지 않고 사는 삶은 가능한가.
이 책은 “어떤 사회에서 ‘주류’ 혹은 ‘다수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83쪽) 못 느껴본 사람이라면 통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란 늘 유무언의 질문에 시달리며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채식을 선택한 이들도 질문공세에 시달린다. 저자는 수산시장에서 겨울 제철인 방어회를 먹고 나와 ‘어제 먹은 잔치국수 국물에 희생된 멸치는 괜찮고 커다란 방어는 안 괜찮은가’란 질문에 괴로워했고(144쪽), ‘고기는 왜 안 먹게 됐느냐’는 질문(117쪽)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에 대한 묘한 시선을 받곤 한다.
그렇지만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질문공세에 시달리진 않는다. 그 돼지가 어떤 유통과정을 거쳤는지 확인하셨나요? 그 돼지는 어떻게 길러졌는지 아시나요? 그 돼지가 얼마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키워졌는지 보셨나요? 넓은 바다에 헤엄치다 좁은 수족관에 가두는 게 불쌍하진 않나요?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일기처럼 나열한 듯 보이지만 동물을 ‘고기’로만 대하는 사회에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책의 주제와 달리 글의 전체적 분위기는 무겁지 않고 저자의 즐거운 상상과 경험으로 채워져있다. 가족과 일에 대해 많은 이들이 겪는 경험에서 조금씩 다른 생각과 판단을 했을 뿐이다. 홍은전 활동가가 추천사에서 말했듯 “타자를 존중하기로 마음먹고 매일 실천하던 사람이 자기 자신도 존중하게 돼버렸다는 이야기”이면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은 깨달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한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세계의 끝 씨앗 창고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이야기 저자 캐리 파울러|역자 허형은|마농지 |2021.02
2016년 노틸러스 북어워드 생태·환경 부문 금상 수상
CARY FOWLER-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설립 전 과정을 이끈 주인공이다. 저장고 건립을 제안하고 계획안을 작성해 실제 프로젝트로 발전시켰으며, 타당성 조사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지금은 스발바르 종자저장고 운영을 총괄하는 국제자문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다. 1990년대에는 유엔이 최초로 실시한 세계 작물다양성 실태 조사를 총괄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주관한 ‘식량과 농업을 위한 식물유전자원 보전 및 지속가능한 이용을 위한 지구행동계획’의 초안을 마련하고 국가 간 협상을 조율했는데, 150개국이 이 안을 채택했다. 스웨덴 웁살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노르웨이 생명과학대학 교수, 세계작물다양성재단 대표, 국제식량농업발전위원회 위원, 국제생물다양성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현재 스탠퍼드대학 객원연구원, 로즈대학 이사회 부의장, 러시아 농업과학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안 노벨상으로 불리는 바른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 하인츠상, 바빌로프 훈장을 받았다.
목차
추천의 말 |서문
1장 스발바르, 세계의 지붕을 여행하다
2장 종자와 식량
수집과 보전|소실과 위험|작물다양성의 중요성과 활용
3장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계획|건설
4장 저장고 안으로
운영 정책과 관행|관리 체계와 재정|첫 종자 반출
5장 우리 모두의 일
부록 1 참고 자료
부록 2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설립 및 운영에 관여한 기관과 개인
감사의 말|사진과 지도 출처|옮긴이의 말
출판사 서평
빙하 위에 지은 ‘종말의 날’ 저장고
세상의 모든 씨앗을 품다, 인류의 미래를 담다
인간이 거주하는 곳 중 북극점에 가장 가까운(북위 74~81도) 노르웨이령 스발바르제도. 면적의 60퍼센트가 빙하이며 1년에 77일은 극야, 127일은 백야가 이어지는 곳. 이 스발바르에서도 외딴 바위산에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가 있다. 영구동토층 암반에 130미터의 터널을 뚫고 지은, 소행성 충돌에도 견딜 내진설계와 5중 잠금장치에 영하 18도가 유지되는 이 요새는 전 세계의 종자를 보관하는 시설이다. 자연재해와 (핵)전쟁, 테러… 무엇보다 기후위기로 인한 식물 멸종에 대비해 인류의 먹거리와 작물다양성을 보호하는 ‘씨앗 방주’로, ‘종말의 날 저장고’라고도 불린다. 세계 각국에서 맡긴 100만 종 이상 5억 개가 넘는 종자 샘플을 보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북한도 이곳에 씨앗을 보냈고, 2015년에는 시리아 내전에 의한 종자 손실로 설립 후 첫 종자 반출이 있었다.
마법처럼 아름답지만 뼈가 시리도록 춥고 황량한 곳에 왜 거대한 씨앗 창고가 지어졌을까? 불가능해 보였던 프로젝트는 어떻게 현실이 되었을까? 어디서 온 어떤 종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보관되어 있나? 이 종자들을 보존하는 게 왜 중요한가? 이곳은 어떻게 이용되고 무엇을 성취할까? 《세계의 끝 씨앗 창고》는 아이디어 단계부터 건립과 운영까지 저장고의 모든 과정을 이끈 캐리 파울러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책이다. 파울러는 첫 삽을 뜬 순간부터 완공까지, 녹색 판유리들이 반짝이는 입구에서 냉각장치가 가동되는 보관실까지, 그리고 운영 방식과 재정 구조 등 빙하의 절경 한가운데 자리한 저장고의 구석구석과 그 안팎에서 분투해온 ‘사람’들의 모습을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서사가 있는 이야기로 재현해냈다.
다가올 위기에 대비해 ‘뭐라도 해보려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지어 올린 씨앗 창고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작물다양성 보전’을 향한다.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종자 획일화와 기후변화는 식량 위기와 생태계 위기를 불러왔다. 이 책은 인류는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자연을 압도해서는 안 되며, 농업의 토대이자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인 작물다양성을 지켜내야 한다고 호소한다. 소실되고 있는 작물다양성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으며,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인류의 절박한 현실에 대한 우아하고 실용적인 대응이다.
스발바르, 문명의 가장자리에 일군 작은 공동체
“이 차가운 환경에서 인간은 더 따뜻해진다.”
책을 펼치면 100여 장의 사진이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저장고 설립 과정 기록을 담당했던 마리 테프레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 짐 리처드슨이 스발바르와 저장고의 면면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얼어붙은 땅에 마음을 빼앗긴 두 예술가의 시선은 숨이 멎도록 아름다운 바다와 산과 빙하의 파노라마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그 장엄한 아름다움이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발바르의 주 거주지인 롱위에아르뷔엔에는 2,200여 명이 살고 있다. 세계 최북단 병원, 최북단 유치원, 최북단 술집, 최북단 신문, 최북단 밴드가 있는 곳. 악천후가 계속되면 신선한 과일이나 우유가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곳. 유모차를 끌고 산책할 때도 북극곰을 쫓아버릴 총이나 조명탄을 들고 나서는 곳. 주민들은 그냥 적응하고 살아간다. 북극에 대한 사랑으로 문명의 가장자리에 일군 작은 공동체는 “서로 잘 협조한다. 격의 없이 군다. 규칙을 엄수하느라 뭘 못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떻게든 일이 되게 한다. 그래야만 하니까”. 이들은 종자저장고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알려주려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감시자들이기도 하다.
생각의 씨앗을 현실로 만든 사람들, 뭐라도 해본다는 것의 위대함
“이 책은 종자저장고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한 모든 이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다.”
기획 단계에서 논의된 장소는 스발바르의 폐광 갱도였다. 파울러가 이 구상을 밝혔을 때 탄광노동자 크리스토페르센은 턱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탄층에서 좀 떨어진 단단한 바위에 터널을 뚫어요. 거긴 가스도 없고, 불도 안 나고, 무너질 일도 없어요. 영구히 버텨줄 견고한 구조물을 만들라는 겁니다.” 아이디어가 진행 궤도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타당성 조사가 끝나자 파울러는 노르웨이 외무부로 가서 결과를 브리핑했다. “이 종자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연자원이라는 말씀이시죠? 스발바르가 최적의 장소고요?” “그렇습니다.” “그런 제안을 저희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파울러는 순간 전류가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노르웨이 정부는 900만 달러에 이르는 건설 비용 전액을 부담하고 세계작물다양성재단, 북유럽 유전자원센터와 함께 종자저장고 설립, 운영 주체가 되었다.
설계를 맡은 핀란드 건축가 쇠데르만은 건물 외형이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랐다. “비밀은 비밀인데 모두를 위한 비밀”처럼 느껴지는 건물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기술적 문제에 더 집중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그게 더 중요하니까.
“여기서 일하는 거 어때요?” 건설 현장의 스웨덴 청년은 숭고한 대답을 기대한 파울러의 질문에 무심히 답했다. “어, 다른 현장에서 일하는 거랑 똑같아요.” 그러고는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여러 국가가 힘을 합쳐 이런 일을 해낼 때도 됐다는 것이었다. 파울러는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이런 조용한 자부심을 보았다.
얼어붙은 산속에 씨앗을 보관하는 방을 짓는다는 건 SF에 가까운 발상이었을 것이다.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든 것은 “누구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해야 한다”고 나선 이들의 열정이었다.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파울러는 선의와 신뢰, 연대와 끈기로 지구적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힘을 모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헌신을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로 증언한다. 그리고 저장고 설립, 운영에 관여한 모든 개인과 기관의 이름을 부록에 밝혀놓았다.
전 세계 종자은행의 백업 드라이브를 만들다
“종자저장고의 서비스는 은행 안전금고 서비스와 비슷하다.”
2008년 2월 완공된 스발바르 종자저장고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1,750개 종자은행들의 백업 시스템이다. 유전자 침식, 즉 각국의 농경지와 종자은행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물다양성 소실에 대비해 고유 품종의 ‘중복 표본’을 위탁받아 보관한다. 2020년 기준 100만 종 이상 5억 개가 넘는 종자를 보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스발바르 저장고에 44작물 23,185자원의 토종 종자를 위탁했다.)
전 세계 작물 유전자의 다양성을 보전하는 시설인 만큼 완벽한 보안을 추구한다. 저장실은 입구에서 수평으로 130미터, 수직으로는 산 정상에서 60미터 이상 내려간 지점에 있다. 냉각장치가 고장 나도 외부 기온이 영하 5도를 유지하는 영구동토층, 핵폭발과 소행성 충돌 등을 고려한 설계, 이중 삼중의 보안 시스템, 이곳에서의 군사행동을 금지한 스발바르조약 등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스발바르 저장고에는 수돗물이 안 나오고, 상주하는 직원도 없다. 안전과 지속성을 위해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밀봉된 채 잊힌 타임캡슐”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비용과 위험을 줄이되, 주기적인 점검과 원격 시스템으로 치밀하게 관리한다. 이곳에서 밀폐된 상자 속 포일 봉투에 냉동 상태로 들어 있는 씨앗들은 노르웨이 정부 소유가 아니다. 소유권은 종자를 위탁한 유전자은행들에 있으며, 종자가 반출되는 경우는 원래의 소유주에게 돌아갈 때뿐이다.
첫 종자 반출의 계기는 시리아 내전이었다. 시리아 알레포의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ICARDA는 주요 작물들의 최대 규모 종자 컬렉션을 보유한 기관인데, 반군이 이곳을 장악하면서 종자 공급 기능이 마비되었다. ICARDA는 스발바르에 보관해둔 종자 표본을 인출해 모로코와 레바논에 유전자은행을 재건했다. 최초의 종자 반출은 국제종자저장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 셈이지만, 파울러는 씁쓸한 사건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번이 스발바르 종자저장고를 애초의 건립 목적에 따라 이용하는 마지막 사례이기를 모두가 바란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작물다양성이 사라지면 미래도 사라진다
“스발바르 종자저장고의 사명은 우리 농작물의 다양성을 영구히 보호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같은 작물을 재배하고 같은 품종을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이후 육종법 개발과 농업의 세계화, 기업화가 작물다양성 소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FAO에 따르면 20세기 동안 세계 작물 품종의 75%가 사라졌다. 일부 핵심 작물, 단일 품종의 지배력이 커지고 유전자 기반이 점점 더 협소해지고 있다.
다양성이 사라지면 위기에 취약해진다. 더욱이 기후변화는 농업 생산 시스템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불확실성과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금세기 중반 90억에 도달할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파울러는 작물의 진화, 환경에 대한 적응은 작물다양성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즉 더 온난해진 기후에 적응하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병충해에 맞설 새 품종을 만들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종자 표본, 그 안에 함유된 유전자 형질에 달려 있다. 씨앗은 문명의 토대이며, 작물다양성은 농업의 토대이자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최대한 많은 작물다양
책속으로
단단한 바위를 파내 만든 130미터의 긴 터널 끝에 인류의 소중한 보물, 지금껏 수집한 세계 최대 규모이자 최고로 다양한 종자 샘플로 가득 찬 방이 있다. 종자 개수만 해도 무려 5억 개가 넘는다.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 기후변화가 식량 생산성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전 세계 작물다양성을 위협하고 있는 시점에,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수백만 종에 이르는 고유 작물을 확실히 보전하기 위해 인류가 내디딘 위대한 한 걸음을 상징한다.--- p.17
롱위에아르뷔엔에 있는 거의 모든 것에 세계 최북단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최북단 술집, 최북단 병원, 최북단 유치원, 최북단 신문, 최북단 택시 서비스, 최북단 우체국, 최북단 수영장, 최북단 밴드 등이 있다. 북극에 대한 사랑으로 한데 모이고, 보통은 한정된 시간 동안 문명의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공동체에서 어울리기에 서로 잘 협조한다. 격의 없이 군다. 서로 돕는다. 규칙을 엄수하느라 뭘 못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떻게든 일이 되게 한다. 그래야만 하니까. 이 차가운 환경에서 인간은 더 따뜻해진다.--- p.40
현장팀에 키가 훌쩍 큰 금발의 스웨덴 청년이 있었는데, 하루는 입구 비계목으로 쓸 목재를 나르다가 걸음을 멈추고 나와 얘기를 나눴다. “여기서 일하는 거 어때요?” 내심 종자저장고의 설립 목적에 어울리는 숭고한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어, 다른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거랑 똑같아요.” 청년은 주변에 널린 폐자재와 기계를 무심히 가리키며 대꾸했다. 그러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저한테는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일거리이기도 해요.” 여러 국가가 힘을 합쳐 이런 긍정적인 일을 해낼 때도 됐다는 것이었다. 그가 보인 태도와 조용한 자부심을 나는 이후에도 현장을 오가며 모든 사람들에게서 목격했다.
--- p.124
위탁 기관들이 상자 하나하나에 식별 라벨과 로고를 부착해 보낸 덕에,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종자 보호 노력에 동참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아주 폭넓은 지정학적, 정치적 스펙트럼이 드러난다. 미국과 러시아의 유전자은행에서 보낸 종자들. 대한민국에서 보내온 상자들. 그 옆에 나란히 보관된 북한에서 보내온 어두운 자홍색의 묵직한 나무 상자들.
--- p.136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회의주의를 토대로 지어지지 않았다. ‘종말의 날’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손에 건설되지도 않았다. 낙관주의자들과 실용주의자들, 인류와 작물이 다가올 변화에 더 잘 대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보존하려고 뭐든 해보려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시설을 지어 올렸다. 이런 노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건 아니면 허점투성이라고 생각하건, 이제 여러분도 이를 발전시키거나 바로잡기 위해 뭐라도 하기를 촉구한다. 살아 숨 쉬는 이 유산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단정 짓지 말기를 바란다. 바로 당신의 책임이니까. 아니,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 p.162
빙하 위에 지은 '씨앗 창고'···우리의 미래를 지킬 수 있을까?
서평 ②캐리 파울러 <세계의 끝 씨앗 창고>
지난 5월 중국의 ‘영웅’이 숨을 거뒀다. 농학자 위안룽핑(袁隆平, 1930~2021). 그는 1970년대 초 중국 최남단 하이난섬의 야생벼를 이용해 수확량이 20% 늘어난 잡종벼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아프리카, 인도 등 많은 나라들이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안룽핑과 그의 제자들이 개발한 잡종벼를 도입하고 기술을 배웠다. 그가 사망한 날, 유엔경제사회국(UNDESA)이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오늘 우리는 진정한 식량 영웅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중국의 과학자 위안룽핑은 최초의 잡종벼를 개발해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했습니다. 그는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기아 종식’이라는 그의 유산과 사명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 롱위에아르뷔엔에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소’. 사암으로 이뤄진 플라토베르게 산의 바위를 뚫어 창고를 만들었다. 입구 위 반짝이는 사각형은 노르웨이 예술가 뒤베네 산네가 디자인한 조명 작품 ‘영속적 파급’이다. 유리와 금속을 여러겹 덧대고 뒤에는 200개의 광섬유 케이블을 설치해 푸르스름한 녹색 빛을 내도록 했다. | 마농지 제공
녹색혁명기에 활약했던 ‘식량 영웅’들이 있다. 다수확 밀 개발에 성공한 미국의 농학자 노먼 볼로그(Norman Ernest Borlaug, 1914~2009)가 대표적이다. 노먼 볼로그는 멕시코의 국제옥수수밀연구소(CIMMYT)에서 엄청난 양의 이삭을 맺고도 잘 쓰러지지 않는 밀 품종을 연구 중이었는데, 키 작은 일본의 개량종 ‘농림10호’를 이용해 쓰러지지 않는 다수확 품종 ‘소노라64호’를 만들었다. 농림10호의 작은 키는 한국의 토종 ‘앉은뱅이밀’에서 유래한 형질이다.
미국에 노먼 볼로그, 중국에 위안룽핑이 있다면, 한국에는 허문회 교수(1927~2010)가 있다. 그는 일본 훗카이도 지방의 쌀 ‘유라카’와 대만의 개량종 쌀 ‘TN1’, 그리고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개발한 다수확 품종 ‘IR8’을 교잡해 ‘통일벼(IR667)’를 만들었다. 일각에서는 녹색혁명기에 만들어진 ‘기적의 작물들’에 대한 성과가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특히 당시 한국이나 중국처럼 권위적인 정권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육종가들이 ‘국민 영웅’으로 키워졌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지만, 이들의 연구가 식량 생산을 늘리고 기아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추장’이 된 한국인도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사용되는 카사바가 1970년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로 수확량이 감소해 많은 이들이 굶주리게 되자,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의 한상기 박사가 병해에 강한 새 품종을 만들어냈다. 그는 카사바 원산지인 브라질에서 야생종을 도입해, 재배종과 교배해서 개량종을 만들었다. 나이지리아 이키레 마을 사람들은 그를 명예직이 아닌, 진짜 추장으로 추대했다.
책 <세계의 끝 씨앗 창고> 표지
1950년~1970년대에 이런 '식량 영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앉은뱅이밀’ ‘야생종 쌀’ ‘야생 카사바’ 등 지구 상에 다양한 종자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학자 캐리 파울러가 쓴 ‘세계의 끝 씨앗창고’는 종자와 종자가 가진 유전자원을 남기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을 조명하고, 빙하가 어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에 거대한 종자 저장고를 만들게 된 이야기를 다룬다. 캐리 파울러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프로젝트를 직접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농업과학자들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세계를 휩쓸던 현대식 개량종자, 소위 ‘녹색혁명’ 때 등장한 품종들이 재래 품종들을 대거 대체하면서 멸종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중략) 한때 얼마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했고, 얼마나 많은 다양성이 소실됐 건, 남은 다양성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먼 미래까지 농업을 유지해야 한다.”(p.90)
야생종은 재래종에 밀려났고, 재래종은 개량종에 자리를 내줬다. 캐리 파울러의 연구에 따르면, 1800년대 미국에서 재배된 콩 578종 가운데 1983년까지 남아있는 콩은 32종에 불과했다. 양배추는 544종에서 28종으로, 당근은 287종에서 21종으로, 호박은 341종에서 40종으로 줄었다. 개량종에 의해 밀려난 재래종과 야생종은 더이상 찾을 수 조차 없다. 태국에서는 1975년부터 20년동안 야생벼 자생지 다섯곳을 조사했는데, 1990년에 자생지 4곳이 완전히 소멸했다. 국내 토종 종자 연구의 권위자인 안완식 박사도 비슷한 연구를 했는데, 1985년 국내 182개 농촌 지역에서 5171종의 재래종을 재배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8년 뒤인 1993년 다시 조사해보니 남아있는 건 908종에 불과했다. 벼는 22종 중 4종, 오이는 14종 중 1종, 밀은 22종 중 4종, 감자는 44종 중 3종만 남았다.
Jametlene Reskp/Unsplash 이미지
심각한 질병이 발생해 사라진 종자도 있다. 사라진 작물들이 어떤 모양이고, 어떤 맛이었는지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다. 예컨대 우리가 마트에서 구입하는 바나나는 모두 ‘캐번디쉬 바나나’이다. 1950년대까지 전세계 식탁을 점령했다가 파나마병으로 사라진 ‘그로미셀 바나나’보다 맛은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로미셀의 맛을 아는 사람이 한국에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캐리 파울러가 정작 우려하는 건 잊혀진 맛이나 모양 따위가 아니다. 그는 사라진 종자가 가진 형질이 언젠가 우리를 구원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1920년대까지 재배됐던 ‘안솔트 배(Ansault Pear)’는 ‘과육이 훌륭하다. 다른 어떤 품종보다 고소한 풍미가 좋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 독특하면서 섬세한 향이 이 배를 최상의 품질로 만들어 준다’라는 극찬(1922년 책 <뉴욕의 배>)을 받았지만 더 이상 재배되지 않는다. “안솔트가 어쩌다 멸종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전자 조합이 이상적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특정 질병에 취약했거나 운송이나 저장이 유독 까다로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안솔트의 특질들이, 우리 세대에까지 전해졌다면 오늘날 현대 품종으로 개량됐을 형질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중략) 소실된 형질은 어쩌면 재난급의 흉작, 혹은 더 심각한 사태가 닥쳤을 때 해당 작물을 보호해줄 형질이었을지도 모른다.”(p.84)
한국의 농촌진흥청 같은 각국의 농업연구기관들은 이런 이유로 저마다 종자은행(유전자은행)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운영 이슈가 많았다. 녹색혁명의 상징적인 기관인 국제옥수수밀연구소(CIMMYT)는 종자은행에 보관한 옥수수 씨앗의 절반 이상이 발아가 되지 않았다. 저장 전에 제대로 건조되지 않았거나 전력이 끊겨 냉각시설이 멈추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2011년 타이의 유전자은행이 홍수로 침수됐을 때는 벼 종자 2만 종이 사라졌다. 아프리카 부룬디의 종자은행은 1990년대 전쟁 등으로 초토화됐다. 종자표본 8만 개를 보유한 이탈리아 바리의 유전자은행은 2004년 7월 냉각장치가 고장나면서 영하 20도였던 내부온도가 22도까지 치솟았다. 수리하는 데 몇달이 걸렸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있는 스발바르 제도의 험준한 절벽들. 무수히 많은 새들이 집으로 삼고 있는데, 수천 년에 걸쳐 새똥으로 비옥해진 부분에 식물이 자란다. | 마농지 제공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전경 | 마농지 제공
2008년 2월 영구동토층인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산 속에 ‘국제종자저장고’가 만들어졌다. 전세계 종자은행들이 자신들이 보유한 같은 종자들(중복표본)을 스발바르로 보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지질학적으로 안정적이고 고도가 높아 해수면 상승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스발바르에 시설을 지으면 영구동토층을 십분 활용할 수 잇엇다. 스발바르의 영구동토는 천연 냉동고가 돼 주는데, 이는 장기 보존의 핵심 요건에도 부합한다. 기계장치를 이용하면 국제 표준인 영하 18도까지 냉각시킬 수 있다. 냉각 시스템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수리 보수될 때까지 영구동토가 종자를 냉동 상태로 유지하는 데 적절한 보조 장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입구에서 130미터 가랑 뻗어 있는 터널을 따라 영구 동토 안으로 들어가면, 총 세 개의 저장실이 있다. 모두 표본 450만 종을 수용할 수 있다. 충분한 크기라고 한다. 아직 저장실 한 곳도 다 채우지 못했다. 두 곳은 비어있다.
산 표면의 입구에서 터널을 따라 130미터 정도 들어가면 저장실이 나온다. | 마농지 제공
저자 캐리 파울러가 저장실에 보관된 종자 박스들을 바라보고 있다. | 마농지 제공
저장실을 둘러본 캐리 파울러는 이렇게 말했다. “선반 사이의 통로를 돌아다니면 경이로운 동시에 긍정적 확신이 느껴진다. 위탁 기관들이 상자 하나한에 식별 라벨과 로고를 부착해 보낸 덕에,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종자 보호 노력에 동참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아주 폭넓은 지정학적, 정치적 스펙트럼이 드러난다. 미국과 러시아의 유전자은행에서 보낸 종자들. 대한민국에서 보내온 상자들. 그 옆에 나란히 보관된 북한에서 보내온 어두운 자홍색의 묵직한 나무 상자들…” (p.136)
이곳에는 종자회사가 소유한 종자나, GMO 종자는 한 알도 없다. 종자회사들은 유통하면 돈을 벌어다주는 자신들의 종자를 굳이 북극권 냉동창고에 보관할 이유가 없었고, GMO 종자의 경우, 노르웨이 법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GMO 종자의 반입과 저장을 일체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 캐리 파울러(앞)와 동료 올라 베스테니엔이 새로 도착한 종자를 저장실 선반에 올리고 있다. | 마농지 제공
이 책의 백미는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ICARDA)에서 온 종자에 대해 다룬 부분이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시리아의 알레포에 본부를 뒀던 ICARDA에서 당시 보관 중이던 종자의 중복 표본들을 스발바르로 보냈다. 총 11만 6000종, 종자 수로는 5800만 개에 달했다. "우리는 아랍권 다른 나라들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데 동의했지만, 시리아와 ICARDA 컬렉션은 그 소용돌이를 비켜 갈 거라고 장담했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가능한 한 빨리 스발바르에 예치하도록 했다. '만일을 대비해'가 스발바르 종자저장고의 존재 이유 아닌가." (p.155)
몇 달 후 시리아에서 전쟁이 터졌다. ICARDA 연구원들은 수십년간 연구해 온 종자들을 빼내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다. 내전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다. ICARDA는 2015년 모로코와 레바논으로 이전하면서 스발바르에 위탁했던 종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최초의 종자반출은 분명 획기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씁쓸한 순간이기도 하다. 보험용 위탁분을 실제로 사용하게 되는 상황은 아무도 바라지 않느다. 이번이 스발바르 종자저장고를 애초의 건립 목적에 따라 이용하는 마지막 사례이기를 모두가 바란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p.156)
책은 170페이지 정도로 양이 많지 않은 편이다. 사진이 많아서 금방 읽는다. 좀더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하자면, 종자 다양성의 중요성을 실제 바나나 산업 사례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바나나: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덴 쾌펠 지음, 절판), 우리 식탁에 올라가는 먹거리와 종자들의 산지를 찾아가는 <밥상위의 세계>(남지원 등 지음, 글항아리) 등이 있다. 전세계 종자를 수집하고 연구했던 바빌로프의 이야기를 담은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게리 폴 나브한 지음, 절판), <바빌로프 20세기 최고의 식량학자>(피터 프링글 지음, 절판), 함경남도 흥남의 비료공장부터 통일벼 개발까지의 역사를 쉽게 설명한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김태호 지음, 들녘), 세계 작물의 9대 기원지를 소개하는 <작물의 고향>(한상기 지음, 에피스테메) 등도 추천한다. 농업과 먹거리에 관련한 국내 책들은 많지 않고 대부분 절판됐다.
얼음으로 뒤덮힌 세계의 끝에 ‘씨앗 창고’라는 보험을 들었으니 이제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100년 뒤 스발바르의 냉동창고에서 씨앗을 꺼냈을 때, 그 씨앗이 새로운 기후에서 싹을 틔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씨앗은 창고가 아닌, 땅에 뿌어졌을 때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 진화한다. 어쩌면 답은 냉동창고가 아닌 땅에 있는 게 아닐까. 캐리 파울러는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 한다. "살아 숨 쉬는 이 유산이 나 아닌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단정 짓지 말기를 바란다. 바로 당신의 책임이니까. 아니,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p.162) 결국은 우리의 미래를 스발바르의 저장고에만 맡겨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다음 편에서는 이 종자들을 키우고, 모으고, 빌려 주는 또다른 ‘영웅’들에 대한 책들을 소개하려 한다.
●글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빅 치킨 : 항생제는 농업과 식생활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최고 영예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공중보건·세계 보건·식량 정책 분야 전문 언론인이자 작가로 각종 저널리즘 상을 수상했다. 브랜다이스 대학교 슈스터 탐사보도 연구소(Schuster Institute for Investigative Journalism) 선임연구원이기도 하다.
목차
머리말
1부 닭은 어쩌다 중요해졌나
01 질병, 그리고 운 나쁜 해
02 화학을 통해 더 나은 삶을
03 빵 가격에 육류를
04 내성이 시작되다
05 문제를 밝혀내다
2부 닭은 어쩌다 위험해졌나
06 증거로서 유행병
07 교배종의 개가
08 오염의 대가
09 예측 불허의 위험
3부 닭은 어떻게 달라졌나
10 작음의 가치
11 협동을 선택하다
12 가축우리의 관점
13 시장이 입을 열다
14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
맺음말
감사의 글
주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항생제’를 통해본 현대 세계사
인류가 직면한 또 하나의 심각하고도 긴급한 ‘항생제 내성’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2016년 9월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맨해튼의 동편을 수놓은 초고층 건물들 간의 공간은 후텁지근했지만 현대적인 유엔 건물 안의 공기는 서늘하고 쾌적했다. 유럽식 디자인의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들과 실용적인 단화를 신은 여성들이 193개국 정부의 대표와 대사 들이 연례총회를 위해 모여 있는 회의실들을 분주히 오갔다. 연례총회는 보통 온건한 모임이다. 논의가 차분하고 추상적이며 무기 협약이나 국경 논쟁에 관한 세목으로 채워지는 게 보통인 것이다. 하지만 그날 아침에는 그 건물에 활기찬 에너지가 감돌았다. 그 일만 아니라면 결코 거기에 발을 들여놓을 성싶지 않은 일군의 방문객이 밀고 들어온 것이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유엔은 막 세계적인 항생제 내성 문제를 다루려 하고 있었다. 그 위협을 탐구하기 위한 ‘고위급 회담’을 개최한 것이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유엔 연례총회에서는 건강 문제를 다룬 적이 거의 없었다. 건강 문제가 안건이 된 것은 1945년 유엔이 창립된 이래 딱 세 번뿐이었다. 첫 번째는 암 같은 만성 질환으로 세계가 떠안게 되는 부담을 따져보기 위해, 두 번째는 에볼라의 출현에 대응하기 위해, 세 번째는 에이즈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전 세계적으로 내성균이 왜 문제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했고, 그 문제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시급한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유엔은 그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이 무르익을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지 않았다. 먼저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다.
유엔타워 3층에 자리한 천장이 높고 세련된 신탁통치이사회 회의장(Trusteeship Chamber)에서 유엔의 최고위 관료인 사무총장 반기문이 마이크를 향해 몸을 숙였다.
“존경하는 각국의 각료, 대사, 신사숙녀 여러분! 항균물질 내성이 인간의 건강, 지속가능한 식품 생산과 개발에 근원적이고도 장기적인 위협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도시와 농촌, 병원과 농장과 지역사회를 막론하고 전 세계 모든 지역이 마주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협하는 감염으로부터 인간과 동물을 보호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 전문가 위원회가 항균물질 내성과 관련한 복잡한 사항들을 잘 정리해 제시하고 빈국이든 부국이든 간에 70개국 정부의 대표들이 우려를 나타내는 발언을 쏟아낸 뒤였다. 유엔 총회 회원국들은 투표를 통해 즉각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새로운 내성균 감염에 관한 감시·감독 체제를 개선하고 신약의 연구와 개발을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각국 정부가 항생제 사용을 규제하고 얼마나 변화를 진척시켰는지에 관해 2018년 다시 보고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계획을 즉시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니터할 국제 조정 기구를 마련해달라고 유엔에 주문했다. 수십 년 전 에이즈와 관련해 진행한 과정과 유사했다.
각국 정부가 투표를 통해 채택한 선언서는 항생제 내성을 ‘가장 심각하고 가장 긴급한 국제적 위험’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에게 그 위협을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과학자와 전략가 들에게는 개가를 올린 날이었다. 여전히 미진한 감도 없지는 않았다. 그 선언서가 기금을 조성하지도 사용한도를 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엔 총회는 항생제 내성 문제를 심각한 국제적 위험으로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연설할 때마다 발언할 때마다 농장에서의 항생제 과용이 의약품의 오남용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경고에 대해 이제야 비로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농장에서의 항생제 사용, 그리고 그를 통제해야 할 필요성이 마침내 전 세계적 의제로 떠올랐다.
이처럼 유엔은 몇 년 전부터 항생제 내성의 위험을 국제적 위험으로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각국 대표들이 연설할 때나 발언할 때마다 농장의 항생제 과용이 의약품의 오남용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경고에 이제야 비로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농장의 항생제 사용, 그리고 그것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이 전 세계적 의제로 떠오른 것이다.
2014년 9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내성을 국가적 우선순위로 삼고, 정부 산하의 상설 전문가조직, 즉 ‘항생제 내성균을 퇴치하기 위한 대통령 자문회의(Presidential Advisory Council on Combating Antibiotic-Resistant Bacteria)’를 새로 구축한다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그 무렵 영국에서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골드만삭스의 전직 수석경제학자 짐 오닐 경(Lord Jim O’Neill)에게 의견을 요청했고, 오닐 경은 ‘항균물질 내성에 관한 검토(Review on Antimicrobial Resistance)’라는 단체를 꾸려 내성에 의한 전 세계적인 사망자 수 추정치를 얻었다. “해마다 세계적으로 70만 명 숨지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1000만 명으로 불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2015년 초에 나온 두 번째 수치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이른바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의 육류와 항생제 소비에 대한 전망치를 추정해 내놓았는데, 만약 그들이 농업의 관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공장형 농장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불어나 15년 뒤 항생제를 지금보다 3분의 2 더 쓰게 될 것, 즉 전 세계적으로 10만 5596톤이나 소비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들은 2030년이 되면 중국이 세계에서 생산하는 모든 항생제의 30퍼센트를 그 나라의 육용 동물에게 투여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은 새로운 항생제와 진단법을 개발할 것, 그리고 ‘가축에게 항생제를 좀더 분별력 있게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2016년 5월 세계보건기구 이사회 소속의 194개 회원국은 내성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달, 일본에서 열린 G7은 내성을 국제적 우선사항으로 다뤄야 함을 확실히 했다. 유엔 총회가 개최되기 2주 전, G20 정상회담―그해는 지상 최대의 항생제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이 의장국이었다―은 “항생제 내성이 공중보건, 성장과 국제경제의 안정성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항생제 내성 문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지구온난화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
책 제목 ‘빅 치킨(Big Chicken)’은 사족 없이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대번에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게 해준다. 세계적인 거대 제약회사를 지칭하는 용어 ‘빅 파마(Big Pharma)’처럼 말이다. 빅 치킨은 공장형 집중사육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거대 가금기업을 일컫는 것이자, 그 기업들이 생산하는 빠르게 성장하고 가슴살이 두둑한 일명 뻥튀기 닭을 지칭하는 용어다. 그러니까 이 책은 한마디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빅 치킨이 등장하게 된 경위, 빅 치킨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에 맞선 성찰적 노력의 결실을 담아낸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치킨너겟을 다시는 종전과 같은 눈길로 바라볼 수 없게 되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평한 이가 있는데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 대다수 사람들은 매일이다시피 닭고기를 소비하면서도 과연 닭이 어떻게 사육되고 도살·가공되어 우리 식탁에 오르는지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공장형 가금 사육장·자동화한 도살 가공 공장의 광경을 담은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갓 부화한 병아리들이 컨베이어벨트에서 이리저리 치이면서 얼떨떨하고 곤욕스럽게 생을 시작하는 모습, 비위생적인 공장형 양계장에서 사육되는 건강하지 않아 보이는 닭들의 처연한 모습, 도살 무게에 이르러 산 채로 발목 족쇄에 거꾸로 매달린 채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서서히 그 본연의 종착점인 닭고기로 변신해가는 광경 등을 볼 수 있다. 일단 이 모든 과정이 거의 완전하게 자동화되어 있다는 사실, 기계장치가 정교하고 아름답게(?) 작동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맞추기 위해서는 닭이 몸무게며 신장이 일정한 제품처럼 사육되어야 한다는 것도 일면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가장 주된 감정은 역시 불편함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한층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항생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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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는 우리가 어쩌다 항생제를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또 거기에 의문을 품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쩌다 산업형 닭고기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또 그를 재고해보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마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산업화의 전개 과정을 닭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처럼 읽힌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기계화·속도와 효율·일관성과 획일성 따위를 중시하는 산업화가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환경 파괴와 오염·전통적 가치의 붕괴·소수 거대기업의 독과점에 따른 중소 규모 혹은 독립적 기업의 몰락·공동체 지향적인 감수성의 파괴 등 숱한 부작용이 드러났으며,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뒤따르는 과정 말이다. 저자는 닭의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항생제 덕분이고,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역시 농장에서 상시 사용하는 항생제가 내성을 키움으로써 인간 건강에 뜻하지 않은 위험을 안겨주었다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암이나 심장병, 당뇨병 같은 생활습관형 질환보다 외상에 따른 감염에 의해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어이없이 목숨을 잃는 사례가 훨씬 더 많았다. 1943년 페니실린이 보급됨에 따라 항생제 시대가 열리면서 이런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사형선고나 다름없던 전염병을 며칠 만에 물리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항생제를 기적의 약물이라 부르며 열렬히 환호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7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는 ‘(항생제가 듣지 않는) 항생제 이후 시대’를 우려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항생제 출현으로 인한 이점들을 흥청망청 소비한 데 따른 대가다. 그 대가는 바로 항생제 내성이었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은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향한 공격에 맞서 새로운 방어 시스템을 갖춰나가는 데 성공한 적자(適者)들이다. 세균 역시 자신을 공격하는 항생제에 대항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이 그때껏 해오던 방식으로 응수했다. 우리 인간은 그간 세균과 일종의 뜀틀 게임, 즉 군비 경쟁을 벌여왔다. 즉 인간이 약물을 내놓으면 유기체는 거기에 내성을 키우고, 인간이 그에 맞서는 신약을 개발하면 세균은 또다시 거기에 내성을 갖추는 과정이 끊임없이 되풀이된 것이다. 항생제 오남용으로 슈퍼버그가 등장하면서 웬만한 신약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
항생제 내성은 자연에 맞서려 한 인간에게 내린 자연의 엄중한 경고처럼 보인다. 항생제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관행을 멈추지 않으면 계속 세균의 맷집만 키워주는 꼴이고, 인간은 신약 개발을 통해서는 결코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재간이 없다. 언제나 진화가 승리를 거두기 때문이다. 내성이 생기지 않는 약은 지금껏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제약회사는 신약을 한 가지 개발하려면 10∼15년의 시간과 1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데 기껏 그렇게 한 보람도 없이 내성이 나타나는 통에 약물이 순식간에 쓸모없어지는 과정을 거듭 겪으면서 신약을 개발할 의욕마저 잃은 상태다. 세균이 너무 빠른 시간 내에 내성을 키우는 바람에 항생제 제조가 더는 이익을 내지 못하는 구조라 판단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질병 치료에는 치명적인 결론이다.
이는 인간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내성은 자연선택이 이뤄지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진화의 필연적 산물이지만, 그 과정을 앞당긴 책임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인간은 꼭 필요하지도 않은 순간에 항생제를 사용함으로써 세균에게 우리가 만든 방어벽을 뚫을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제공해주었다. 항생제를 인간 치료용으로 남발한 것도 문제지만, 한층 더 심각한 것은 육용 동물의 성장을 촉진하고 그들의 비위생적 공장형 축사에 번질지도 모를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상시적으로 퍼부은 일이었음이 드러났다. 미국에서 시판되는 항생제의 80퍼센트,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항생제의 절반 이상을 인간이 아닌 가축이 소비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초래될지 모를 결과를 면밀히 따져보지도 않은 채 마구잡이로 말이다. 페니실린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었으며,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상당수 항생제를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다고 한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은 노벨상을 수상하기 몇 달 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가투약(self-medication)에서 가장 잘못되기 쉬운 결과는 바로 극소량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감염을 퇴치하지도 못하면서 페니실린에 저항하도록 미생물들을 학습시키게 된다. 수많은 페니실린 내성균이 이종교배를 통해 번식하여 다른 개체들에게 전파됨으로써 마침내 폐렴이나 패혈증 환자에까지 닿는다. 결국 페니실린은 그들을 구제할 수 없다.
이처럼 페니실린 치료로 장난을 친 생각 없는 자들은 페니실린 내성균에 의해 감염되어 죽음에 이른 사람들에게 도의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러한 폐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사람들은 예지력 있는 그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고, 그 결과 우리는 끝내 그가 우려하던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무분별하게 그 약물의 단물을 빨아먹다가 ‘항생제 이후 시대’의 도래를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그 흐름에 제동을 걸거나 적어도 그 속도를 늦추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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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는 항생제를 토대로 구축된 전통적인 가금 생산방식이라는 거대한 벽에 균열을 내는 여러 층위, 여러 수준의 시도를 다룬다. 일군의 농부들은 내성균으로 세상을 병들게 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값싼 단백질을 세상에 내놓으려 한 어느 과학자의 결론이 애당초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과학자·정부관료·소비자·요리사의 지원에 힘입어 항생제 내성 없이 가금을 생산하는 것도, 환경 파괴 없이 집중 사육농법을 실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다각도로 보여주었다. 기꺼이 항생제를 포기한 네덜란드 농부들, 퍼듀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기업은 성장 촉진제나 예방적 용도의 항생제를 쓰지 않고도 산업 규모의 생산이 가능함을 입증해 보였다. 마이자두르와 루에, 화이트오크의 성공은 소규모 또는 중간 규모의 농장도 새로 재편된 육류 경제에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속 성장 닭 품종으로 돌아선 홀푸즈는 항생제를 배제하면 가금 생산에서 다양성을 되살릴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새로운 모델들은 네덜란드에서처럼 첨단기술을 접목한 것일 수도, 라벨루즈 농장의 제3세계 버전 같은 저집중 시스템 위에 구축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시도는 항생제를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겠다, 즉 동물을 살찌우거나 막연히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플 때 치료하는 용도로만 쓰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이야말로 항생제가 인간의 질병 치료에 쓰일 수 있는, 그리고 항생제를 사용하면서도 내성의 위험을 낮출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맺음말 말미에 이렇게 덧붙임으로써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항생제 내성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기후변화 문제와 흡사하다. 첫째, 수백 만 명에 이르는 개인들의 의사결정에 따라 수십 년 동안 조성되었으며 산업계의 조치들에 의해 강화된 심각한 위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둘째,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아시아 등에서 부상하고 있는 신흥경제국이 서구 선진국과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미 공장형 농업으로 값싼 단백질을 누려본 지구의 4분의 1은 이제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4분의 3은 그 기회를 누려보지도 못한 채 포기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북극곰이 물에 빠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형광등을 사는 것 같은 개인적 실천만 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후변화 문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항생제 내성과 관련해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세균의 무자비한 진화 속도가 우리에게 그렇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방대한 문헌 연구와 발로 뛴 성실한 취재의 결실임을 짐작케 하는 부분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 참고문헌과 감사의 글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탐사 보도가 자칫 빠지기 쉬운 선정성을 경계하고자 치열하게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저자가 모든 쪽마다 근거를 가지거나 관찰 결과에 입각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우리는 수십 쪽에 걸친 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책에 실명이 공개된 농부들, 그들이 가금을 비롯한 육용 동물을 키우는 농장의 모습은 유튜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면면을 떠올리면서 본문을 읽노라면 그 내용이 훨씬 더 실감 나게 다가올 것이다
마린 맥케나는 말한다. “닭은 산업화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육류고 머잖아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찾는 육류로 자리 잡을 것이다. 닭 산업을 바꾸는 노력은 지구의 육류 경제와 그것이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토지 이용, 물 이용, 쓰레기 처리, 자원 소비, 노동의 역할, 동물권리의 개념, 그리고 지상에 살아가는 수십 억 인구의 식생활―을 바꾸는 일이다.” 현대판 업턴 싱클레어라는 그녀에 대한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본문중에서
이 책은 일맥상통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룬다. 첫째, 우리는 어쩌다 항생제를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또 거기에 의문을 품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쩌다 산업형 닭고기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또 그를 재고해보게 되었는가? 둘째, 저간의 인류 역사는 식량 생산 방법을 결정하면서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나는 여남은 주와 여러 나라로 멀리 여행을 다니면서 농부를 비롯해, 화학자, 법조인, 역사가, 미생물학자, 관료, 질병 조사관, 정치인, 요리사, 멋진 프랑스의 가금 판매상 들을 두루 만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 p.15)
내약제 감염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 스포츠 선수, 피어싱하는 10대,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사람 등 일반인들이 나날의 온갖 부분에서 흔히 겪을 수 있다. 내약제균은 흔하긴 하지만 악화 일로를 걷는 심각한 위협이다. 그 세균은 매년 적어도 70만 명―특히 미국 2만 3000명, 유럽 2만 5000명, 인도 6만 3000명의 아기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원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항생제균은 수백 만 건의 질병―미국에서만 매년 200만 건―을 일으키며, 수십 억 달러의 의료비를 지출하도록 만들고, 임금을 줄이고, 국가 생산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2050년이 되면 항생제 내성은 세계적으로 매년 100조에 이르는 비용을 발생시키고, 100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망자를 낼 것으로 추정된다.
(/ p.27)
항생제 시대 초기부터 이 약물은 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식용으로 사육되는 동물에게 투여된 것이다. 미국에서 시판되는 항생제의 80퍼센트,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항생제의 절반 이상을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 소비하고 있다. 고기로 팔려나갈 운명인 동물은 상시적으로 사료와 식수를 통해 항생제를 제공받는데, 그 대부분은 인간에게 사용될 때와 달리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항생제는 식용 동물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때보다 더 빨리 무게를 늘리도록 하거나 밀집된 축산 환경에 취약한 질병에 걸리지 않게끔 예방하는 데 쓰이고 있다. 이런 목적으로 소비되는 항생제의 약 3분의 2는 인간 질병 치료에 쓰이기도 하는 화합물이다. 이는 가축 사육에 쓰인 약물에 내성이 생기면 결국 인간이 그 약물을 사용할 때의 유용성마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 p.29)
그것은 육류가 상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저장법으로, 어느 지역에서 오직 몇 개의 도계장만 사용이 허락된 특수 인증을 보장하는 독점적 공정이었다. 그것은 현대적이고 과학적이었으며 육류의 판매 방식을 바꿔가고 있었다.
기실 비밀은 바로 항생제였다. 애크러나이징은 레덜리의 모기업 아메리칸사이안아미드의 발명품이었다. 그것은 성장 촉진제, 우리에 퍼지는 질병으로부터 동물을 보호하는 예방적 용도에 더한 클로르테트라사이클린(그 기업이 오레오마이신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은 약물)의 또 다른 용법이었다. 애크러나이징은 그 약물을 살아 있는 닭에게 투여하는 대신 닭을 도살하고 내장을 빼낸 다음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애크러나이징 했다고 광고하는 닭은(나중에는 생선도) 도살되는 동안 희석한 항생제 용액에 담근 것이었다. 그 용액에는 육류에 얇은 막을 씌울 정도의 약물이 들어 있었다. 그 막은 닭이 판매용으로 포장되고 소매점의 냉장고에 진열되고 그리고 마침내 각 가정의 주방에 닿을 때까지 남아서, 계육을 상하게 만들 소지가 있는 세균이 표면에서 자라지 못하도록 막아주었다. 이 같은 처리법이 노리는 목적은 날고기의 유통기한을 며칠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에서 한참 벗어난 몇 주, 혹은 최대 한 달까지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 p.86)
동물건강연구소는 농업에―즉 성장 촉진제로, 혹은 질병의 예방 및 치료 목적으로―사용한 항생제는 모두 1780만 파운드인데, 그중 성장 촉진제로 쓰인 것은 300만 파운드에 그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걱정하는과학자모임이 작성한 문서는 더 자세했다. 그에 따르면, 매년 항생제를 소는 인간에게 쓰는 것보다 많은 370만 파운드를 투여받는다. 돼지는 1040만 파운드, 그리고 수효가 가장 많지만 수명이 가장 짧은 동물인 닭은 1050만 파운드를 투여받고 있었다. 만약 인간용 약물이 이 정도 용량으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위법으로 간주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로지 성장 촉진이나 질병 예방을 위해 쓰였다 뿐 질병 치료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생제 내성을 일으키는 위험을 감수할지 말지와 관련한 비용-이익 분석에서 그 용량은 이익은 없으면서 오로지 비용만 발생시켰다.
(/ p.170)
FDA 규정이 강제성을 띠고 기업들이 자기네가 한 약속을 지킨다면 육류 생산에서 항생제를 배제함으로써 항생제 사용이 농장 작업자와 농장 주변에 사는 이웃들에게 가하는 위협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성균을 계속 환경에 보태주는 일13이며 대사 작용으로 변형되지 않은 항생제들이 강 유역에 흘러드는 일, 훼손되지 않은 화합물이 세균의 진화를 부추기고 인간의 미생물군유전체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일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육류 생산에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내성을 지닌 식품매개 질환의 발생 건수, 그리고 그만큼 내성 유전자―그를 보유한 식품매개 병원균에서 벗어나 플라스미드에 의해 여기저기 이동해 본래 살아가던 농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약제 감염을 일으킨다―가 제기하는 소리 없는 위협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 p.354)
만약 항생제 포기가 진정으로 성공한다면 그로써 도모해야 할 결과는 바로 닭 생산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닭의 유전적 특성뿐 아니라 농장의 크기며 지속가능성, 가격, 맛 등에서도 저마다 다채로움을 추구하는 일 말이다. 자문위원의 보고서에나 적혀 있을 법한 정말이지 근사하고 훌륭한 가치다. 하지만 닭은 산업화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육류고 머잖아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찾는 육류로 자리 잡을 것이다. 닭 산업을 바꾸는 노력은 지구의 육류 경제와 그것이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토지 이용, 물 이용, 쓰레기 처리, 자원 소비, 노동의 역할, 동물권리의 개념, 그리고 지상에 살아가는 수십 억 인구의 식생활―을 바꾸는 일이다.
(/ p.356)
'빅 치킨'을 보면 '하림 닭고기'가 보인다
메린 매케나 <빅 치킨>
‘치킨’의 메카는 미국 델마버 지역(Delmarva Peninsula)이다. 미국 동부에 툭 튀어나온 반도인데, 델라웨어주·메릴랜드주·버지니아주 등을 포함한다. ‘델마버’라는 이름이 이들 주의 앞자를 따서 나왔다. 원래 농가들이 닭을 키운 건 닭고기가 아닌, 달걀 때문이었다. 닭고기는 달걀을 더이상 낳지 못하는 노계나, 가끔씩 부화한 수평아리를 조금 키워 고기용으로 파는 정도였다. 닭고기는 달걀 생산의 부산물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닭을 처음부터 ‘고기용 닭(육계)’으로 키우기 시작한 건 델마버 지역의 달걀 생산자인 세실 스틸(Cecile Steele)이란 여성 농부였다. 세실이 1923년 달걀 부화장에 산란용 암평아리 50마리를 주문했는데, 부화장에서 실수로 500마리를 보낸 게 시작이었다. 그는 암평아리를 모두 길러서 고기로 판매하기로 했다. 닭고기를 1파운드당 60센트를 받고 시장에 넘겼는데, 당시 노계 닭고기의 5배에 달하는 가격이었다. 세실이 ‘육계’를 전문으로 키워 성공하자 이웃들도 그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10년도 되지 않아 델마버 반도의 육계 농가는 500여 곳으로 늘었다.
사진 출처 Jason Leung / Unsplash
지질학계에서는 ‘신생대 제 4기 홀로세’에 속하는 지금의 시대를 ‘인류세(인류의 시대)’로 등재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먼 미래에 ‘인류세 지층’에서는 닭 뼈 화석이 나올 거라는 주장(얀 잘라시에비치 영국 레스터대학 교수)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메린 매케나의 책 <빅 치킨>(에코리브르)은 ‘육계’가 인류세를 대표할 정도로 전지구적으로 성장하게 된 이유들을 하나씩 살핀다. 델마버 지역의 육계 농가부터, 제약사 연구소, 육가공 기업, 병원, 최근 늘기 시작한 동물복지 농장까지 종횡무진한다.
육계의 신성한 땅이 미국에선 델마버라면, 한국에선 전라북도를 꼽을 수 있다. 국내 육계 산업에도 유사한 ‘창업 신화’가 있다. 전북 익산의 한 초등학생 소년이 외할머니로부터 선물받은 병아리 10마리를 키웠고, 고등학생이 됐을 때는 4000마리로 불어났다는 하림그룹 창업자 김홍국 회장 이야기다. 닭고기로 한국 시장을 평정한 하림이 2011년 델마버의 육계업체 ‘앨런패밀리 푸드’를 인수한 건, 김 대표가 나폴레옹의 20개 모자 중 하나를 소유했다는 사실보다 더 상징적인 일이다. <빅 치킨>에서 메린 매케나는 “델마버 지역이 닭고기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인근 뉴욕의 유대인 덕분”이라고 말한다. “육계는 진정한 안식일 요리를 필요로 하던 유대인 공동체에 썩 잘 들어맞았고, 결국 그 도시에 닭고기를 대주는 일은 델마버 반도의 닭고기 생산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 노릇을 했다.”(P.65)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정부가 델마버 지역의 닭고기를 전량 미군에 공급하기 시작하자, 시장에서는 미국 남부 지역 육계들이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남부 조지아주에서 사료 가게를 운영하던 제시 주얼(Jesse Jewell)은 병아리와 사료를 농가에 외상으로 제공하고, 농가가 닭을 다 키우면 그 닭을 가져와 시장에 내다팔았다. 닭을 판 수익 중 일부만 닭을 키운 농가에 전달했다. 이런 식으로 기업이 병아리 선별 및 제공, 사료 공급, 유통 등 육계 사육에 필요한 대부분의 수단을 제공하고, 농가는 땅과 노동력만 투입해 육계를 키워내는 모델을 요즘 시대에는 ‘수직계열화’라고 부른다. 일찌감치 수직계열화에 성공한 조지아주는 델마버를 제치고 현재 미국 육계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새로운 계약이 이뤄진 초기 몇 년 동안은 이윤이 났다. 사람들은 ‘조지아주 북부가 텍사스주보다 캐딜락을 소유한 사람이 더 많다’는 즐거운 농담을 던지곤 했을 정도다.”(P. 71)
국내에서 제시 주얼의 수직계열화 모델을 도입해 성공한 기업이 바로 하림이다. 농가에게는 농장 운영 비용을 줄이고, 위험 부담도 낮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기업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문제도 있다. 실제로 일부 육계 농가와 하림은 수 년간 이 문제로 다퉜고, 하림의 회장이 국회 국정감사장에 불려나오기도 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고기용 닭을 대규모로 키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 델마버 지역의 여성농부 세실 스틸(오른쪽) | Delmarva‘s Chicken Industry: 75 Years of Progress 캡쳐
사진 출처 JBS / Unsplash
값싼 고기의 보급을 위해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미래의 닭’ 콘테스트를 벌였다. 같은 기간 동안에 어떤 닭이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가를 보는 대회다. 교배종과 순종 닭들이 출품됐다. 1948년 델마버 지역의 델라웨어 대학에서 열린 1회 대회에서는 뉴햄프셔종과 코니시종을 교배한 닭을 출품한 캘리포니아 농부 찰스 반트레스(Charles Vantress)가 우승했다. 그는 3년 뒤에도 또다른 교배종을 출품해 우승했다. 당시 86일 동안 사육한 닭이 평균 2.5파운드(1134g)정도였는데, 찰스 반트레스의 닭은 3.5 파운드(1588g)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농가에서는 교배종이 순종을 밀어냈다. 요즘 육계들은 47일 만에 6파운드(2722g)에 도달한다. 찰스 반트레스의 유산을 물려받은 업체가 현재 세계적인 육종계 회사 ‘코브-반트레스’이다. 닭의 가슴살을 너무 키워서 닭들이 뒤뚱뒤뚱 다닌다는 일명 ‘스모 닭’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코브 500’ ‘코브 700’ 같은 교배종 닭들에 대해 이 회사는 이렇게 광고한다. “엄청나게 많은 가슴살을 생산해요(Outstanding breast meat yield)”
<빅 치킨>을 읽다보면 우리가 먹는 닭들은 어떤 종일지 궁금해진다. 하림은 코브-반트레스사에서 ‘원종계(할머니가 될 암탉) 병아리’을 수입한다. 이 수입 병아리가 성장해 평균 40마리의 종계 병아리(엄마가 될 암탉)를 낳고, 종계 병아리가 커서 100~120마리의 육계 병아리를 낳는다. 육계 병아리는 부화해서 30~35일 동안 성장한 뒤 닭고기로 판매된다. 하림 외에도 ‘삼화원종’, ‘한국원종’, ‘사조화인’ 같은 종계업체들 모두 외국의 원종계를 수입해 종계를 만든다. 우리가 수입하는 브라질산 냉동 닭고기 역시 코브-반트레스 같은 육종계 기업이 생산한 ‘스모 닭’에서 나왔다. “젠장, 그들은 세상의 모든 닭을 자기들 것과 똑같이 만들어버렸어요.” 메린 매케나가 만난 미국 농부의 말이다.
코브-반트레스사의 코브 700 품종. | 코브-반트레스 홈페이지 캡쳐
저자는 육계가 이런 식으로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항생제가 있다고 말한다. 항생제는 동물의 질병 감염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성장촉진제’로도 쓰인다. 항생제가 동물의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사실을 알아낸 건 ‘오레오마이신(테트라사이클린 종류의 항생제)’을 개발한 제약업체 ‘아메리칸사이안아미드’ 였다. (책 <백래시>에서 고소득 직종에 지원하려는 여성들에게 ‘화학물질 때문에 위험하니, 지원하려면 불임수술을 받으라’고 요구했다는 제약사가 바로 이 아메리칸사이안아미드다.)
아메리칸사이안아미드의 래덜 연구소에서 근무했던 토마스 주크스는 닭의 성장을 돕는 비타민B 합성을 연구하던 학자였다. 항생제 오레오마이신을 만드는 과정 중에 발생한 발효찌꺼기가 연구소에서 키우던 닭의 사료에 들어가면서 닭의 몸집이 커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아메리칸사이안아미드는 쓰레기로 버려지던 발효 잔여물을 말려서 농부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항생제가 동물 사료에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1950년 4월10일 뉴욕타임스 1면에 ‘경이로운 약물 오레오마이신, 성장률 50% 증가(Wonder Drug Aureomycin Found to Spur Growth 50%)’라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에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시장에서 팔린 동물 항생제. 테트라사이클린계 항생제의 비중이 매우 높은데, 2015년 이후 줄어드는 추세다. | 미국 FDA의 2019 Summary Report on Antimicrobials Sold or Distributed for Use in Food-Producing Animals (2020.12)
<빅 치킨>은 테트라사이클린 등 항생제가 동물에게 남용되면서,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바이러스가 결국 인간을 공격한다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테트라사이클린계 항생제는 한국 및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항생제이기도 하다. 한국은 2011년 7월부터 동물 사료에 항생제를 넣는 걸 금지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농가에서는 ‘치료 목적’ 등으로 많은 양의 항생제를 사용하고 있다. 동물용 항생제 관련 국내 데이터는 내용이 빈약한 편이다. 반면 미국이 모으고 있는 항생제 데이터의 질은 놀라울 정도다. 동물용 항생제 판매량은 물론, 어떤 가축에게 얼마만큼의 항생제가 사용됐는지 등을 매년 조사해 공개한다. (현재 최신 통계는 2020년 12월에 나온 2019년 데이터이다. 위 사진 참조.)
<빅 치킨>은 육계산업을 변화시키려는 업체들도 소개한다. 글로벌 육가공업체 퍼듀(Perdue)는 무항생제 육계를 시장에 내놓고, 짧은 생애주기를 가진 닭에게 ‘백신’을 맞힌다. 코브-반트레스의 ‘스모 닭’이 아닌, 토종 닭을 키워 육계로 출하하는 농가들도 있다. 하지만 이 틈새가 과연 육계 산업의 견고한 시스템을 무너뜨릴 균열인지, 아니면 곧 덮혀 없어질 미세한 금에 불과한 건지는 이 책만 봐서는 아리송한 면이 있다. 저자는 기업형 육계 시스템 안에서 성장한 닭에 대한 먹거리 안전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계열화로 성장한 육계 시스템 자체를 허물려고 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얼마든지 건강한 먹거리가 나올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사진출처 William Moreland/ Unsplah
<빅 치킨>의 미덕은 ‘팩트’다. 한글 번역본은 500페이지가 넘지만 그중 100여 페이지가 참고자료와 주석일 정도로 사실 검증이 충실하게 이뤄졌다. 1950년대 이후 벌어진 일들은 직접 작가가 해당 기업이나 농민, 학자들을 만나 취재했다. 다양한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이리저리 조합해 풀어내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내용이 과장되거나 자극적으로 흐를 여지가 있는데 <빅 치킨>은 그런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면서도 충분히 재밌다. 취재한 내용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상세하기 때문인 듯 싶다.
<빅 치킨>을 읽다보면 10년 전 출판된 폴 로버츠의 역작 <식량의 종말>이 극적인 요소를 넣으려 좀 무리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예컨대 <식량의 종말>의 첫 단락은 토마스 주크스의 발견을 이렇게 전한다. “1940년대 후반, 뉴욕 오렌지타운 근처 허드슨 강가에서 낚시꾼들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낚은 송어는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해마다 송어 몸집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문제의 물고기가 잡힌 곳이 아메리칸사이안아미드의 레덜 연구소 부근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순전한 자연 현상인지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중략) 연구소 책임자였던 생물학자이자 비타민 영양학 전문가 토마스 주크스는 이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겨 조사해보기로 했다.” <빅 치킨>이 전한 내용보다는 확실히 좀더 극적이다.
한국의 치킨 산업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 이들에게는, 조금 오래된 책들이지만 <닭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김재민, 시대의창), <대한민국 치킨전>(정은정, 따비출판사), <고기로 태어나서>(한승태, 시대의창) 등을 추천한다.
●글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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