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악화로 배가 뜨지 않았다.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지난 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밤새 생각했던 것 ... 실행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베낭은 민박집에 두고 곧장 섬 일주에 들었다.
민박집 바로 뒷편 집 담장과 지붕이 기막히다.
마을의 집들은 대개가 담장 끝에 처마가 물렸다. 바람의 피해를 최소화 히기 위함이었다.
개방된 공간과 마을의 존재와 돌담은 편안함 그 자체였다.
섬을 일주하며 가장 많이 많나는 식물중에 한종이 모시풀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오동정 할 수 있다.
모시풀속 Boehmeria
1. 잎은 互生.
2. 가지와 葉柄에 長毛 밀생, 잎은 난상 원형. 圓錐花序는 頭狀花序로 구성 -------- 1. 모시풀
2. 가지와 엽병에 短毛 밀생, 잎은 광난형. 원추화서는 짧은 穗狀花序로 구성 ----- 2. 섬모시풀
1. 잎은 對生.
3. 잎은 난형-타원형, 掌狀 缺刻이 없다. 화서가 가지를 치지 않는다.
4. 잎은 끝이 3개로 깊게 갈라진다 -------------------------------------- 3. 거북꼬리
4. 잎은 끝이 갈라지지 않는다.
5. 거치의 아랫변이 윗변의 2배이하이다 ------------------------------- 4. 좀깨잎나무
5. 거치의 아랫변이 윗변의 2배이상이다.
6. 잎 양면에 털이 적다. 암꽃 花筒 上部에 有毛 ----------------------- 5. 긴잎모시풀
6. 잎 양면에 털이 많다. 암꽃 화통 全面에 유모.
7. 잎의 거치는 비슷한 크기이다 ------------------------------------- 6. 왕모시풀
7. 잎의 거치는 서로 다른 크기이다. 흔히 끝의 것은 중거치 -------------- 7. 왜모시풀
3. 잎은 난형-원형, 장상 결각이 진다. 화서가 가지를 친다 ------------------- 8. 개모시풀
1. 모시풀 B. nivea (L.) Gaudich. 재배 및 귀화
2. 섬모시풀 B. nipponivea Koidz. 홍도 등 남쪽 섬
3. 거북꼬리 B. tricuspis Makino 계곡의 숲가 또는 음지
4. 좀깨잎나무 B. spicata Thunb. 산골짝 시내, 돌담, 숲가
5. 긴잎모시풀 B. sieboldiana Bl. 산지
6. 왕모시풀 B. pannosa Nakai et Satake 남쪽 바닷가
7. 왜모시풀 B. longispica Steud. 중부이남의 산지
8. 개모시풀 B. platanifolia Fr. et Sav. 숲가장자리
할미질빵도 자주 보였다. 북구항이 내려다 보인다. 포구에서 둘레길 삼거리 까지는 약 300m
첫 방문지 고운 설풍 방파제까지는 약 1.1km
두미도를 한바퀴 일주하는 둘길은 지난 2007년 11월 249명의 토지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개통됐고 지금처럼 콘크리트를 깐 것은 최근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남북 다합쳐 69가구 94명의 인구에 불괴한데 토지 소유자는 두 배이상이란 것이다. 섬이 외지인의 땅으로 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인생의 처음과 끝, 알고 싶다면 두미도로 떠나라!
“연화세계를 알려거든 세존께 물어보라(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
이 경전의 말씀은 어쩌면 삶의 진리를 알고 싶으면 스승님께 물어보라는 뜻이겠지요. 통영 인근 바다에는 누가 기획하기라도 한 것처럼 경전의 문구와 아귀가 딱 맞는 섬들이 있습니다. 욕지도, 연화도, 세존도, 그리고 두미도.
옛날 섬들은 유배지인 동시에 이상향이자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온갖 수탈에 시달리던 육지 사람들에게는 지배자들을 피해 숨어살기 딱 좋은 낙토였다. 통영의 작은 섬, 두미도에서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이 발견된 것도 그 증거입니다. 두미도는 불국토를 꿈꾸던 이들이 모여 살던 이상향의 섬이었을 것입니다. 연화세계를, 삶의 진리를 찾다가 마침내 도달했던 섬.
통영보다는 남해나 삼천포가 더 가까운 두미도는 개발이 덜 되어 통영의 다른 섬들보다 옛스런 풍경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섬 둘레를 따라 길이 나 있는 두미도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보며 걸을 수 있는 최상의 트레일입니다. -프레시안 -
통영의 섬이지만 생활권은 삼천포로 이어지고
긴 항해 끝에 여객선은 두미도 북구에 나그네를 내려준 뒤 통영으로 회항한다. 오늘 북구 마을에 내린 사람은 도합 여섯. 주민 두 사람과 나그네, 사내아이 하나를 데려온 부모는 낚시가방을 멨다. 뱃머리 어느 집앞, 줄에 널려 말라가는 도다리를 구경하는데 노인 한 분이 말을 건다.
"어디서 오셨소?"
"멀리서 왔습니다."
"혼자서 오셨소?"
"예."
서해안의 섬들에서는 좀처럼 먼저 말을 걸어오는 주민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말을 붙여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섬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외지인이 드문 낙도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남해안은 작은 섬이라도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아무래도 분단 상황에 기인한 바가 큰 듯하다. 특히나 서해 북단의 섬들은 오랜 세월 극도의 군사적 긴장 상태에 있었으니 그 피해의식이 클 것이다.
두미도는 해안선 11km의 작은 섬이지만 섬의 산은 높다. 섬 중앙의 천황봉(467m) 기슭에 마을들이 위태롭게 들어서 있다. 두미 북구마을도 급경사에 집들이 층계마다 서있는 형국이다. 마을을 오르는 길이 곧 등산로처럼 가파르다. 몇 그루 밀감나무에서는 거두지 않은 밀감들이 그대로 말라간다. 노지 밀감은 신맛이 강하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손도 대지 않고 버려둔 것이다. 신 것을 좋아하는 나그네는 밀감을 따서 허겁지겁 배를 채운다. 마을의 산 중턱쯤에 붉은 벽돌건물 한 채가 언뜻 보인다. 마을의 당집이라도 되는 걸까. 풀숲을 헤치고 건물에 들어서 보니 옛날 디젤발전소 건물이다. 해저케이블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발전소는 폐쇄됐다.
두미도에는 60여 호의 주민들이 산다. 남구와 북구에 각각 반씩 나뉘어 살지만 마을은 북구가 약간 더 크다. 고기잡이가 주업이다. 파도를 막아줄 지형이 없어 양식업은 불가능하다. 주민의 80% 이상이 노인들이니 농사를 짓기 어렵다. 비탈 밭에 경운기가 들어갈 수 없어 섬에 두 마리뿐인 소로 밭을 갈기도 하지만 그도 여의치 않으면 괭이로 직접 일궈야 한다. 농사의 고통이 심하니 겨우 마늘이나 고구마를 심어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정도다.
두미도는 통영시에 속한 섬이지만 주변의 욕지도나 노대도 사람들과 달리 섬사람들의 생활권은 삼천포다. 통영보다 삼천포가 더 가까워서만이 아니다. 100여 년 전, 남해 출신 사람들이 처음 두미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남해 사람들은 또 대처인 삼천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두미 섬사람들도 자연히 삼천포로 핏줄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5일장도 삼천포장을 보러 가고 수산물도 삼천포에 가서 판매한다. 삼천포는 4, 9장. 5일장 날에는 통영에서 오는 여객선이 삼천포까지 항로를 이어준다. 결혼식도 남해나 삼천포에서 한다. 아이들 교육도 삼천포에서 시킨다.
통일신라 때 금동불상이 발견된 섬
지금은 섬에 절이 없지만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불교신자다. 교회가 있어도 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욕지도나 노대도 주민 80% 이상이 기독교 신자인 것과는 정반대다. 민박집 주인은 돌아가신 어른들에게 두미도(頭尾島)가 본래 둔미(屯彌)섬이었다고 들었다 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기사에도 둔미도(芚彌島)란 이름이 등장한다. 두미도 이전에는 섬의 이름이 둔미도였던 것이다. 둔미도란 ‘미륵이 머물다간 섬’이란 뜻이다.
“연화세계를 알려거든 세존께 물어보라(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
두미도 인근에는 이 불교경전에서 비롯된 지명들의 섬들이 늘어서 있다. 욕지도, 연화도, 세존도, 그리고 두미도. 두미(頭尾)든 둔미(屯彌)든 모두 불교와 연관이 깊다. 두미도는 연화도 등과 함께 불교문화의 자장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섬인 것만은 명확하다. 1937년 두미도의 감로봉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불상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회수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남해 금산에서 세존도, 두미도, 욕지, 연화도를 거쳐 미륵도까지 남해의 섬들은 이미 신라 때부터 불국토를 지향했던 것이다.
4일, 삼천포 5일장이 있는 날이라 섬은 아침부터 부산하다. 통영에서 들어온 배가 섬사람들을 삼천포장까지 실어다 주고 장을 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실어올 것이다. 민박집 안주인도 객의 아침 밥상을 차려놓고 장을 보러 갔다. 바깥주인은 고기잡이 나갔다. 이번 겨울 두미도에서는 도다리와 물메기가 많이 잡힌다.
마을회관 앞에는 ‘두미개척100주년기념비’가 서 있다. 1996년에 세워졌으니 그로부터 또 십 수 년이 지났다. 오랫동안 비워졌던 섬에 다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세월이 그리 길지 않다. 여러 섬들을 다녀보니 유행처럼 섬마다 선호하는 비석들이 다르다. 어떤 섬은 유난히 선정비나 공덕비가 많고 어떤 섬은 열녀비가 많다. 또 어떤 섬은 효자비가 많다. 비석은 그 섬이 중요시하는 가치의 표현이거나 권력 관계의 지표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건너자 길 옆에 ‘두미개척60주년비’가 낡아간다. 욕지도에도 ‘개척기념비’가 있었다. 이 근방 섬사람들의 중심 가치는 개척정신인 듯하다.
작년에 칠십, 올해 육십, 할머니는 나이를 거꾸로 드시고
하천 옆 양지녘에 할머니 한 분이 칼을 들고 그물 손질을 한다. 할머니는 로프에 붙은 그물을 긁어낸다. 찢겨진 그물을 뜯어낸 뒤 로프를 재활용하기 위해서다.
"어디서 왔소?"
"아주 멀리서 왔습니다."
"구경하러 왔습니까? 친척집에 왔습니까?"
"그냥 구경삼아 왔어요. 할머니."
"우리 집에도 오라고 하고 싶지만 메느리도 있고 아들도 있으니 내 맘대로 못합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여기는 뭐 바닷가하고 산이니 구경할 데가 별로 없어요. 밥은 사자셨소?"
"예, 할머니. 할머니는 여기가 고향이세요?"
"등 너머. 대판이라고, 여서 멉니다. 산 넘어야지. 옛날에 이 마을로 시집 왔습니다. 전엔 거기도 많이들 살았는데 지금은 안 삽니다. 여도 이젠 빈 집이 많아. 좋은 학교도 있었는데 다 뿌사져 빌고."
이 외진 섬에서 할머니는 또 어떤 세월을 살아오셨던 것일까.
"밭일 하고, 옛날에는 밭 메고, 베 짜고, 삼 삼고, 모시 삼고, 배 짜. 옛날에는 옷을 호빡 길쌈 해가 안 해 입었습니까. 보리 갈아 도구탱이 찍어가 밥 해먹고, 밀 심어서 국시 해먹고 개떡 해먹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힘들다고 농사일 안 하재. 바다 배 타고 다니면서 고기나 잡어 폴고."
할머니는 섬에서는 큰아들 며느리랑 함께 산다. 아들 둘, 딸 둘은 부산에 산다.
"부산에는 자주 가세요?"
"젊어서는 자주 갔는데 요즈음은 잘 못가요. 거기 가면 돈 많이 들어."
"할머니 연세는 어찌 되세요?"
"육십입니다."
"에이 할머니도 참."
"작년에 칠십이었으니께."
"그럼 재작년에는 팔십이셨겠네요?"
"예."
"해마다 나이가 줄어드시는군요?"
"그래도 서른 될라먼 아직 멀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를 거꾸로 드신다. 마침내 0살이 되면 할머니는 이승을 하직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두미도 자생 겹동백을 만난 행운
폐교된 초등학교를 지나 두미 남구로 간다. 북구에서 남구로 가는 길은 산길이다. 남쪽 섬의 가을이나 겨울 산길을 갈 때는 도시락이 없어도 좋다. 운이 나쁘지만 않다면 산열매나 과일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어선이나 여객선을 이용하니 굳이 몇 개의 고개를 넘어 산길을 다니는 주민은 없다. 옛길은 뭍에서 온 여행자들이나 다니는 잊혀진 길이 되었다. 산길의 중간에 있는 마을은 마을 전체가 폐가다. 폐촌이 된 것이다. 섬을 떠나 뭍으로 간 사람들, 이승을 아주 떠나간 사람들.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고향은 없다.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감나무에 감이 익어도 더 이상 감을 딸 사람이 없다는 뜻일까. 옛 집터 감나무에는 홍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나그네는 감을 따 점심 공양을 한다. 산에 먹을 것이 풍성한지 새들도 잘 익은 홍시만 더러 파먹었을 뿐 나머지는 입도 대지 않았다. 맛난 것부터 찾는 성정은 사람이나 새가 다르지 않다. 단 열매들이 사라지고 나면 저 감들도 새들의 요긴한 식량이 될 것이다. 옛 마을의 집들은 허물어지고 사람은 떠났어도 오늘도 마을 앞 바다로 배들은 무시로 오고 간다.
세 개의 고개를 지나서야 두미 남구마을이다. 남구마을도 절벽에 매달린 꿀벌집처럼 온통 비탈진 언덕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초입부터 동백이 지천이다. 보기 드문 백동백도 꽃이 피었다. 변종인 백동백은 씨앗을 심으면 다시 붉은 꽃이 핀다. 꺾꽂이를 해야만 흰 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전설 같은 자생 겹동백을 만났다. 이런 행운이 있을까. 토종의 자생 겹동백을 만나기란 자생 흰동백 보기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원예용인 개량종 겹동백은 꽃이 풍성하지만 동백이라 이름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격이 떨어진다. 토종 홑동백은 시들지 않고 절정에서 통으로 뚝 떨어진다. 하지만 개량종 겹동백은 꽃이 필 때만 잠깐 화려할 뿐 시들시들하다가 이내 갈가리 찢겨지며 떨어진다.
도대체 동백 특유의 절조와 단아함이란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꽃 시절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그 비루함이 안쓰러울 정도다. 그런 까닭에 겹동백이 보이면 나그네는 서둘러 눈을 돌리고는 한다. 하지만 오늘 이 섬의 자생 겹동백은 겹동백에 대한 편견을 일시에 날려버린다. 홑동백에 뒤지지 않는 기품과 결기가 느껴진다. 마을사람들이 뒷산에 자생하는 고목 동백나무 가지를 꺾어다 삽목으로 심었던 것이라 한다. 이 자생 겹동백은 흰동백처럼 홑동백의 변이종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겹꽃을 피우지만 홑동백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꽃 시절에 대한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생의 절정에서 온몸으로 떨어지는 자생 겹동백. 온몸을 던져 스러지는 그 결기, 그 절조, 그게 진짜 동백이다. 그게 진짜 겨울의 심장이다. 오늘 나그네는 자생 겹동백의 자태에 반해 쉬이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두미 남구마을은 동백나무 고목들이 방풍림을 이루어 마을의 안녕을 지킨다.
▲보물처럼 진귀한 자생 겹동백 Ⓒ섬학교
방파제 안 부두에서는 어장을 보고 온 내외가 배 위에서 생선을 분류 중이다. 부부는 삼천포에 살면서 어장철에만 여자의 친정이 있는 두미도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다. 광어나 도다리, 간재미 따위 생선은 배의 바닥에 넣어 살리고 물메기는 배를 따서 손질한다. 선창가는 온통 줄에 걸려 말라가는 물메기 천지다. 물메기는 말린 것이 더 맛있다고 여자가 알려준다.
광주리에 담긴 물메기 한 마리,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눈을 꿈뻑거린다. 여자는 꿈틀거리는 물메기의 머리에 칼을 꽂아 숨통을 아주 끊어버린다. 등줄기를 따라 칼집을 넣고 내장을 파낸다. 물메기 손질이 끝나자 내외는 활어를 싣고 삼천포로 떠난다. 호위병처럼 갈매기들이 뒤따른다. 늙은 친정어미는 홀로 남아 할복한 물메기들을 널어 말릴 것이다. 그렇게 또 한 세월이 간다.
섬학교 2018년 11월 3(토)∼4(일)일, 제76강 <통영 두미도>강제윤 교장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출처: 프레시안 201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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