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주홀산(1106m)은 산세가 빼어나다. 그런데 누군가 말한 것처럼 자세히 보면 여인이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는 형상이다. 언제고 한번 올라 보고 싶은 산이 주훌산이다. 그 산자락을 다녀올 기회가 주말에 있었다.
새재길 좌우로는 주흘산(1075m)과 조령산(1026m), 부봉, 영봉, 마패봉 등이 에워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소백산맥의 한 부분을 이루는 이러한 봉우리들 사이의 협곡으로 새재길이 나 있으며 정상에서 충청북도와 경계선을 형성하고 있다.
새재에는 관문이 셋 있다. 옛 영남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길을 따라, 문경 쪽으로부터 수안보를 향해 주흘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1관문, 조곡관이란 현판이 걸린 제2관문, 조령관이라 불리는 제3관문이 차례로 놓여 있다. 제1관문부터 제2관문까지는 3.0㎞, 제2관문에서 제3관문까지는 3.5㎞, 합하면 6.5㎞로 10리에 5리를 가고도 조금 더 가야 하는 길이다. 새재를 넘는 길은 영남사람들이 서울 가는 방향대로 문경 쪽에서 수안보로 가는 방법이 있고, 반대로 서울에서 문경으로 오는 방향으로 수안보에서부터 넘는 방법이 있다. 문경에서 수안보로 가는 1—2—3 관문 차례는 오르막길이고, 그 반대는 내리막길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1708년에 세워졌다. 세 관문 가운데 제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양옆으로 버텨선 성축도 비교적 온전하며 개울물이 흐르는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수구문(水口門)까지 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성벽 동쪽에는 높직한 곳에 끼어 있는 큰 돌에 글씨가 있으니, ‘康熙 辛丑’ 곧 경종 원년(1721)에 별장 이인성이 개축했다고 새겨져 있다. 그 아래쪽에는 석수의 우두머리인 도석수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이라는 이름자도 있다. 이들의 지휘 아래 수많은 석수들과 역부들이 돌을 뜨고, 나르고, 정으로 쪼고, 네 귀를 맞추어 엇물리게 쌓아 지금처럼 견고한 성벽을 이루었을 것이다. 저 성돌 하나하나에 그들의 땀방울이 스며 있으리라. 이 새김글말고도 주흘관 성벽에는 개축 기록이 여기저기 있다. 무진년이라는 각자는 영조 28년(1748)의 일이다.
또 경진, 병술이라는 간지는 고종 17년(1880)과 고종 23년(1886)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또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성축을 개수한 것은 무엇을 막으려 함이었을까. 문경관문에는 1728년 이인좌의 난 때와 1871년 경북 영해의 동학교도 이필제를 붙잡았을 때 군사가 대규모로 주둔했었다. 또 그뒤의 일이지만 제 2, 3관문은 1907년에 국권을 되찾자고 일어선 의병들을 토벌하는 토벌대에 의해 훼손된 적도 있다.(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새재는 충청북도 괴산군의 연풍면과 문경시 문경읍의 경계에 위치하는 고개이다(고도:642m). 북쪽 마역봉(925m)과 남쪽 조령산(1,026m) 사이 말안장 모습의 지형에 만들어진 고개이다. 이 고개는 조선 시대에 영남 지방에서 서울에 이르는 영남대로 상에 위치한 고개로, 영남을 벗어나는 마지막 고개이다. 일제강점기에 이화령에서 충주 수안보로 통하는 3번 국도가 뚫린 후 새재길은 옛길로 남게 되었는데, 1981년 이 고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문경 2관문과 1관문 사진:
『고려사지리지』(상주)에서는 이 조령을 '초점(草岾)'이라고 불렀는데, 길이 험한 요해처 세 곳으로 초점(草岾) · 이화현(伊火峴) · 관갑천(串岬遷)을 꼽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연풍)에서도 여전히 '초점(草岾)'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현 동북쪽 15리 경상도 문경현 경계에 있는데 험하고 막힌 요해지(要害地)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지도서』(연풍)에서는 연풍현의 관애(關隘:요새지)로 이화현 · 계립현 · 주현과 더불어 조령을 꼽고 있다.
임진왜란 뒤 경상도에서 서울로 통하는 요충지인 조령에 조령제1관문(주흘관), 조령제2관문(조곡관), 조령제3관문(조령관)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제3관문인 조령관이 위치하는 곳이 조령이다. 『해동지도』(연풍)에는 문경현과의 경계에 조령성문이라 해서 이 조령관이 그려져 있다. 『구한말지형도』, 『조선지형도』에도 조령관이 표기되어 있다.
조령은 우리말로 새재라고도 불리는데, 이 지명유래는 여러 가지이다. 하나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에서 왔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고려사지리지』 등에서 초점(草岾)이라 하였으므로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에서 왔다는 설, 또 하나는 조령보다 먼저 생겨난 북쪽의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릿재(伊火峴) 사이에 있는 고개라 해서 붙여졌다는 설, 마지막으로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2.)
동래에서 한양까지 가는 고개는 추풍령과 문경새재, 죽령이 있었다. 문경새재가 열나흘 길로 가장 빨랐고 추풍령은 보름 길, 죽령은 열여섯 길이 걸렸다고 한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들은 유독 문경새재를 고집했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죽죽 미끄러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경(聞慶)이라는 지명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가 있어 선비들은 이 길을 더욱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의하면 "낙동강은 그 근원이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黃地)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 북쪽 초점(草岾)에서 나오며, 하나는 순홍 소백산에서 나와서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문경 초점은 문경새재의 옛 지명이다
문경새재에는 숙박시설로 조령원(鳥嶺院) 교귀정(交龜亭) 관문(關門) 등이 있다. 새재의 산세가 험준한데다가 도적과 호랑이의 출몰이 빈번하여 날이 저물면 넘어 다니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지역의 토박이들이 부르는 꾸꾸리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 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움직였다고 한다.
마애비를 지나면 ‘交龜亭址’라는 표지를 만나게 된다. 떠나가는 관찰사와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장소로 즐겨 이용했다고 한다. 교귀정(交龜亭)의 건립은 문경관문이 설치된 시기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1484년(성종 15)의 일이었다. 현감 신승명이 8선녀가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팔왕폭포(용추)의 아름다운 풍광에 이끌려 건립했다고 한다.
金時習1435(세종17년)~1493(성종24)
유조령 숙촌가 踰鳥嶺 宿村家
嶺分南北與東西 <조령은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로 나누는데>
路入靑山縹緲中 <그 길은 청산 아득한 곳으로 들어가네.>
春好嶺南歸不得 <이 좋은 봄 날 남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서>
鷓鴣啼盡五更風 <저 두견새 울음만 밤이 다 가도록 바람결에 실려 온다네.>
이이(李珥ㆍ1536~1584)
새재에서 묵다 宿鳥領
험 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 우는데
산 자락 주점은 길 조차 가물 가물,
산 새는 바람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지고 돌아간다.
야윈 말 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피곤 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잠 못 드는 긴 밤 적 막도 깊은데
싸늘한 달 빛만 사립 짝에 얼 비치네.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정약용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눈 덮인 칡덩굴엔 마른 잎 붙어 있네.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손곡 이달
鳥嶺聞杜鵑有感
隴坂漫漫隴水悲 <산은 끝없이 넓고 골짜기 물 구슬퍼 우는데>
旅人南去馬行遲 <나그네 남으로 가려니 말도 더디 움직이네.>
辭家正欲懷吾土 <집을 떠나니 정말 내 고향으로 가고 싶은데>
入峽那堪聽子規 <골짜기로 들어서니 두견새 울음 더욱 애절해>
千嶂不分雲起處 <뭇 봉우리들 구름 이는 곳 구분키 어렵고>
數聲猶苦月沈時 <달 기울 때 몇 가락 소리 더욱 괴롭네.>
杜陵無限傷心事 <두릉에서의 한없이 근심스러운 일들이여>
直道泣州別有時 <울며 곧장 길을 가면서 이별 할 때 마을에서 시를 지었네.>
류성룡(柳成龍)<1542년(중종37) ~ 1607년(선조40)>
宿鳥嶺村店 (새재에서 묵다)
林風起 溪響生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졸졸졸 냇물 소리 들려오네.
幽懷正遞 山月自分明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산 위에 뜬 달은 밝기도 해라.
浮世身如寄 殘年病轉 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늘그막 병치레 끊이질 않네.
南來還北去 簪笏愧虛名 고향에 왔다가 서울로 가는 길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구나.
신중현 소울리듬퍼레이드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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