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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by 이성근 2014. 5. 17.

 

                                                ▲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바 일루즈 지음, 박형신·권오헌 옮김, 이학사 펴냄). ⓒ이학사

 

돈에 중독된 사회, 사랑과 '밀회'하는 진짜 이유

[프레시안 books] 에바 일루즈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저명한 문화사회학자 에바 일루즈(Eval Illouz)의 책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박형신·권오헌 옮김, 이학사 펴냄)는 1997년에 처음 출간된 『Consuming the Romantic Utopia: Love and the Cultural Contradictions of Capitalism』의 한국어 번역본이다. 두 명의 국내 문화사회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한 이 책은 한국에 번역 소개된 일루즈의 저서들인 <감정 자본주의: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Cold Intimacy: Making Emotinoal Capitalism, 2007 한국어판 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 2010) <사랑은 왜 아픈가>(Warum Liebe weh tut, 2011 한국어판 김희상 옮김, 돌베개 펴냄, 2013) 등 보다 먼저 쓰인 것이지만 한국에는 가장 나중에 소개되었다.

 

2000년에 미국 사회학 협회에서 시상하는 감정사회학 부문 '최고의 저서상'을 수상했을 만큼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가 받았던 관심과 그것이 끼친 반향이 컸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제라도 한국 독자들에게 보다 가까이 소개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표지도 영어 원서 표지보다 훨씬 예쁘고 내용을 더 잘 상징해 주고 있어 보인다. 540여 쪽(영어 원서는 350여 쪽이지만 한국어본보다 인쇄된 글씨가 작다)이라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학술서이지만 일반 독자들도 서론을 꼼꼼하게 읽고 저자의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파악한 후 본문을 읽는다면 술술 잘 읽힐 수 있는 책이다. 특히 본문은 광고 이미지, 영화, 소설, 자전 서사, 자기 계발서, 잡지 칼럼, 인터뷰 내용 등을 다루며 저자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 흥미롭고 쉽게 읽힌다.

 

이 책에서 저자가 기본적으로 하고자 하는 작업은 이 책의 부제에서도 드러나듯 '사랑과 자본주의가 가진 문화적 모순'을 들춰내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저자는 제목에서 다루고 있듯이 낭만, 유토피아, 소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리해 제시하고 이를 통해 낭만적 사랑과 소비자본주의의 얽힘 관계를 상세하고 비판적으로 들춰내고 있다.

 

2012년 12월, 한국에서는 연애 상대가 없는 일군의 청년들이 '솔로대첩'이라는 행사를 벌인 적이 있다. '88만원' 저임금에 묶여버린 세대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 개의 것들 중 하나가 연애이고 한국 사회의 문제는 연애라는 프레임을 통해, 즉, '연애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나쁘다'는 분석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지난 13일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그날 종영한 드라마 <밀회>에서 상류층의 삶을 욕망하여 그 안에서 그들과 함께 악행을 저지르며 부와 지위를 누리고 살던 중년의 한 기혼 여자가 자신을 사랑한 가난하고 순수한 미혼의 어린 청년이 자신에게 보여준 '정성과 존중'에 감동하여 자신의 악행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장면을 보며 감동에 젖기도 했을 것이다.(아마도 이윤 추구 논리만이 횡행하는 탐욕사회가 부른 최근의 대참사로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는 특히나 필요했던 이야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사회적 세계가 경제적 이해관계라는 음울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사랑은 예술과 종교처럼 사회적 세계를 부정하는 최고의 장소"라는 글이 인용되고 있는 맥락도 이와 유사해 보인다.

 

 

 

                                                    ▲ 드라마 <밀회> 중. ⓒJTBC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일찍이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사유재산과 이윤 동기로 점철된 자본주의적 인간관계를 비판하면서 이해관계와 사랑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을 때만이 진정하고 완전한 인간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를 정신분석학과 결합해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마르쿠제도 '쾌락 원칙'에 근거해 작동하는 성애적 욕망이 자본주의적 생산체계를 움직이는 '현실 원칙'에 종속되어 있음을 비판하며 성애의 해방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에리히 프롬도 사랑이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교환과 동일하게 다뤄지는 현실을 비판하며 사랑의 복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들이 사랑을 정치적 쟁점으로서 조명하고 이것을 정치적 비판의 장으로 들여놓는 데에 성공하였고 당시 비판적 지식인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문제의식과 통찰력이 대중의 사랑 표현을 변화시키거나 신화로서의 사랑을 해체시키지는 못했음을 지적한다.

 

 

                                                 ▲ 에리히 프롬.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왜 낭만적 사랑과 그것을 수반하는 신화들은 우리의 집합적 상상력을 이토록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가? 도대체 왜 그것은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어 보이는 현실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로서 작동하는가?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저자는 이에 대답하기 위해 성(性)과 사랑의 정치학에 주목하였던 이전의 학자들이 하지 않았던 작업에 도전한다.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사랑과 자본주의가 가진 문화적 모순'을,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세계와 얽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는 그 영역을 촘촘하고 세밀하게 살피는 작업을 통해서 말이다.

 

이 작업들 끝에 저자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리고 있다.  

첫째, 사랑이 이토록 오래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유토피아를 경험하기 위한 특권적 장소"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은 성스러운 것의 경험과 강한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원래 그러한 경험은 종교의 영역이었으나 과학이 종교의 힘을 대신하게 된 근대 이후에는 문화의 다른 영역, 즉, 사랑의 영역으로 경험의 장소가 이동해 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낭만적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테마들은 자본주의가 발흥하기 이전에 이미 등장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낭만적 사랑은 법, 도덕, 혹은 친족과 혼인질서를 위협하는 전복적 힘으로 인식되었다. 근대 이전의 규범적 가치관은 "두 파트너의 재산이 어느 지점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 공평한 결혼"이 '이상적 결혼'이라 여겨지도록 했고 이런 가운데 부의 대물림과 사회적 재생산의 전략을 보호해 왔는데, 낭만적 사랑은 이에 저항하고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인물들은 "열정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선언하고, "젠더, 계급 또는 국가와 같은 제도와 권위에 도전"해 왔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합리적인 계산속을 가지지 않으며, 부에 대해 초연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낭만적 사랑은 '위반의 아우라'를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지고의 가치'라는 자리를 점하게 되었다. 우리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 혹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에서 사랑에 빠져 권위와 질서를 위반하는 인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낭만적 사랑은 집단의 요구를 넘어서서, 때로는 그러한 요구에 반하여 '개인의 권리'를 관철시키는 장이 된다. 즉, "유토피아적인 개인 주권 모델"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낭만적 사랑이 자본주의적인 '소유적 개인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자본주의적 세계관에서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도덕적 개인주의'를 구축하고 칭송해 왔음을 지적한다. 낭만적 사랑은 자본주의에 선행해 등장했지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제들과 공명하는 두 개의 주요한 모티프를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가 바로 '집단 주권'과 대비되는 '개인 주권'이고 이것은 '도덕적 개인주의'를 통해 발휘되어 온 것이다.

 

중요한 다른 하나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 구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해관계와 감상 간의 구분, 이기심과 사욕 없음 간의 구분"과 관련된다. 낭만적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 사회적, 경제적 이해관계보다 우위에 있고, 무상이 이익의 우위에 있으며, 풍요가 궁핍의 우위에 있음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이때 사랑은 "사심 없는 증여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관계'가 이해관계에 기반한 인간관계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언하면서, 개인의 영혼과 육체의 융합을 찬양하고 대안적 사회질서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따라서 사랑은 다시 한 번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의 질서를 초월하는 '위반의 아우라'를 갖게 되고 현재의 질서를 초월하는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는 동시에 그것을 요구하는 위치"를 점하게 된다.

 

저자는 이처럼 낭만적 사랑은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고 때로는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사회질서에 반하는 의례를 상징적으로 재연하고 동시에 개인의 우위성을 재확인하기 때문에, "강력한 유토피아적 전망의 초석이 되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본다.

 

앞서 자신이 던진 질문들에 대한 저자의 두 번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역설적이게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낭만적 사랑은 '숭배의 대상'이기를 중단하고 세속화의 길을 걷는다. 그리하여 사랑은 그것이 갖는 실질적인 내용으로부터 독립적인 것, 즉, '의례'의 속성을 취하게 된다. 즉, 사랑은 "풍요, 개인주의, 창조적 자기실현이라는 강력한 집합적 유토피아에 일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테마와 이미지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소비 의례를 주기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통해 경험"되는 것으로 변형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이제 사랑이라는 '낭만적 유토피아'는 '소비'를 통해 존속하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화와 경제는 서로를 상호적으로 구성한다. 일종의 문화적 관행인 낭만적 사랑은 점점 더 시장에 의해 틀지어지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적이고 탈근대적인 문화는 여가와 자연을 소비함으로써 생산윤리에 기반을 둔 질서를 위반할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이것 또한 강력한 사랑의 유토피아를 표현한다. 여가 소비에 포함된 의미들은 노동, 돈, 교환이 설정한 조건들을 일시적으로 전복한다. 이처럼 낭만적 사랑의 관행은 생산 영역의 가치와 대립하는 위반 의례를 포함하고 개인적 자유를 찬양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의례들이 결국 시장에 기초해 있을 수밖에 없음으로 인해 낭만적 사랑의 유토피아 또한 시장에 기초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상품은 이제 낭만적 결속에 너무나도 깊이 침투하여 낭만적 만남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고 의식되지 않는 영혼"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문화는 낮에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가 되기를 요구하고, 밤에는 흥청망청 쾌락에 열을 올리는 소비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생산 영역과 소비 영역 간의 이러한 문화적 모순은 근대적 의미의 낭만적 사랑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순은 현대의 낭만적 사랑의 관행들에 세심하게 반영되어 있다. 낭만적 사랑은 후기 자본주의의 모순들, 즉, 소비 영역과 생산 영역 간의 모순, 탈근대적 무질서와 여전히 강력히 유지되고 있는 청교도적 노동 윤리 간의 모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공평한 풍요라는 유토피아와 '구별 짓기'를 통해 계급을 유지시키려는 동력 간의 모순을 결합하고 응축하는 장이다.

 

소비자본주의는 마치 소비를 민주화시킨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지만 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계급 간, 계층 간 불평등은 이제 소비를 통해 수행되는 낭만적 사랑으로 이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낭만적 사랑은 시장으로부터의 '안식처'가 되기는커녕, 후기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과 긴밀히 공모하고 있는 하나의 문화적 관행이 되었다.

 

이것은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현장일까? 저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일루즈는 시장과 상품이라는 표현이 궁극적으로 그러한 표현을 초월할 필요를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시장과 상품의 사회라고 한다면 당장 이 영역 안에서라도 낭만적 사랑의 관계가 평등한 협상과 공평한 책임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선은 최대한 노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근대 이전의 사랑의 형식과 내용과 비교했을 때 근대 이후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있겠지만 동시에 얻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관계에서의 영원한 헌신과 안정성과 같은 것을 잃어버렸을지라도 그 대가로 삶에 대한 통제력과 자기 인식, 그리고 성 불평등의 완화와 같은 것을 얻었다. 그렇다면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보다 더 잘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사랑과 사회의 운명을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보다 많이 확보하는 길을 만들어 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관심을 쏟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는 이처럼 감정과 경제, 문화와 경제가 교차하는 지점들, 사랑과 자본주의가 교차하며 공모하는 지점들을 개인, 유토피아, 노동과 소비 등의 열쇳말을 통해 촘촘히 살펴봄으로써 사랑의 신화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돌입한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랑과 소비, 사랑과 노동의 불협화음을 보다 넓고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훌륭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단,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 <현대 사회의 성·사랑·에로티시즘>(앤소니 기든스 지음, 배은경·황정미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첫째, 사랑을 역사적이고 문화적으로 통찰하는 과정에서 여러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앤소니 기든스(<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친밀성의 구조변동>(배은경·황정미 옮김, 새물결 펴냄))나 니클라스 루만(<열정으로서의 사랑: 친밀성의 코드화>(권기돈 외 옮김, 새물결 펴냄))과 같은 주요 사회학자들도 사랑이 역사적으로 여러 형태를 지녀왔다는 점을 인지하고 다뤄왔다. 특히, 서구 문화에서의 '궁정연애'와 '기사도적 사랑'이라는 형식을 빌려 전개되었던 '열정적 사랑'의 양태나 가정을 꾸리고 건사하는 과업을 이루는 동업자로서의 애정과 상호 연대감이 중요한 요소였던 '동반자적 사랑'의 양태, 근대적 개인의 자아실현 서사와 젠더 관념 및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에 충실하도록 구성되고 실현되어 온 '낭만적 사랑'의 양태, 젠더화된 성적 각본이나 성별 분업을 전제함 없이, 유일하고 영원한 헌신적 관계에 대한 강박 관념없이, 상호 존중과 개방성을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 '합류적 사랑'의 양태 등은 그동안 소개되고 분석되어 온 중요한 개념들이다.

 

그것은 사랑을 생물학적 반응으로 보는 관점에서 떼어 내 그것을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구성물로서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이로써 그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는 이러한 선행된 성찰이 제시하는 주요한 내용을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나― 누락하고 있고 특히 사랑과 낭만적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 씀으로써 곳곳에서 불필요한 혼동을 주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둘째, 낭만적 사랑의 양식은 몇 가지 역사적으로 형성된 문화적 전제를 가정하고 있는 양식이다. 그것은 자기 완결체로서의 자아를 가진 개인, 젠더화된 두 개의 성(남성과 여성), 성적 각본과 성별 분업, 이성애 그리고 결혼 등이다.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는 사랑과 후기자본주의와의 관계를 들춰내는 데에 집중하였고 이를 훌륭히 해내기는 하였지만 이를 위해 사랑을 이성애적 각본에만 치중하여 바라봄으로써 사랑에 관한 이성애 중심주의를 관습적으로 재생산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물론, 어떤 작업이건 선택한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배제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랑과 성 담론에서 중요한 성찰의 지점으로 다뤄져 온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도 표명하지 않은 점은 주지할 점으로 보인다.

 

셋째, 낭만적 사랑의 양식에 전제되어 있는 것들과 그것이 소비 양태를 통해 향유되는 방식 모두에서 젠더화된 개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효과는 상이할 것이다. 예를 들어, 생계부양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사람과 가사노동과 출산, 양육, 돌봄 노동을 책임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낭만적 사랑의 양식에서 기대하고 또 기대되는 방식은 상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이 부분은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

 

이것은 데이트에서 누가 밥값을 내고 찻값을 내는지, 기념일에 누가 누구에게 어느 정도의 선물을 주어야 하는지, 결혼을 하게 되면 누가 집 장만을 해야 하고 누가 살림살이를 장만해야 하는지, 누가 생계를 책임지고 누가 가사를 책임져야하는지 등이 여전히 이성애적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갑론을박되고 또 그것이 '건어물녀', '골드미스', '된장녀', '김치녀' 등 여성 혐오적 용어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아쉬운 점으로 보인다.

(박이은실 한신대학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