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창비 펴냄 |2002.07
원제Korean workers : the culture and politics of class formation
저자 : 구해근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 웨스턴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하와이 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목차
1장 서론: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2장 산업화와 노동자의 출현
초기 노동의 무력화/ 수출지향적 산업화와 노동체제/ 노동력의 프롤레타리아트화/ 농업 부문의 변화/ 산업노동자들의 공간적 집중/ 결론
3장 한국 기업에서의 노동과 권위
손쉬운 적응/ 공장에서의 장시간 노동과 힘든 일/ 재생산 문제/ 노동시장과 임금/ 가부장제적·전제주의적 권위/ 결론
4장 순교자, 여성노동자와 교회
자주노조를 위한 투쟁/ 교회와 민주노조운동/ 동일방직노조 투쟁/ 노동자투쟁의 외부화/ YH무역 노동자투쟁/ 여성노동자 노조활동의 원천/ 1970년대 노동운동에서 성(性)의 문제/ 결론
5장 노동자와 학생
정치적 억압과 노동투쟁의 정치화/ 노동자-학생 연대/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연대파업/ 연대투쟁의 사회적 기반/ 두 명의 학생 출신 노동자/ 결론
6장 노동자 정체성과 의식
천한 노동자/ 교육이데올로기의 힘/ 성적 억압/ 한(恨), 불의에 대한 의식/ 계급언어/ 민중운동/ 노동계급 문화와 제도의 성장/ 결론
7장 거대한 노동공세
노동자대투쟁/ 노동자대투쟁의 자연발생적 성격/ 현대노동자투쟁/ 연대의 탄생/ 노동운동에서 여성의 주변화/ 결론
8장 기로에 선 노동계급
국가와 자본의 공세/ 노동운동의 후퇴와 전진/ 총파업/ 경제위기의 충격/ 노동계급의 내적 분화/ 사라져가는 골리앗 노동자/ 결론
책속으로
근면한 성격과 자기 희생,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 깊은 인내심, 더 잘살아보기 위해 귾임없이 노력하는 정신, 그리고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깊은 恨(한) 등은 내가 연구한 한국 노동자들의 삶을 관통해온 동일한 주제들이다. (p.15)
계급이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톰슨은 "나는 계급을 '구조(structure)'라고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범주(category)'로도 보지 않는다. 나는 계급을 인간관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그리고 발생해온 것이 입증되는) 현상으로 본다"고 말하고 있다. 톰슨의 계급개념은 구조적 조건에 의해서 계급이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보다 인간 행위자의 역할, 즉 계급을 "만들어내는" 자아활동을 더 우선시한다. 그가 웅변하듯이 "계급은 자신들의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정의 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것이 계급의 유일한 정의이다" (p.30)
공장노동자들은 산업전사, 산업의 역군, 수출의 기수로 불렸다. 산업전사라는 명칭은 국가가 산업노동자들의 정체성을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외국 경쟁자들과의 경제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군인들로 정의하려는 의도를 대변한다. 또한 노사관계는 상호신뢰와 전체를 위한 개인적 희생을 강조하는 가족관계와 자주 동일시 되었다.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일을 내 일같이"라는 국가가 만든 구호는 한국의 공장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고 전국의 거의 모든 공장 정문에 게시되었다. 또한 정부는 관영 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전통적인 유교윤리인 근면 ․ 충성 ․ 노사화합을 전파했다.(p.35)
국가는 현장 노사관계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970~80년대에 한국 정부는 노골적으로 친자본적 ․ 반노동적 태도로 노사관계에 접근했다. 정부는 경영자측이 관습적으로 노동법을 위반하는 것은 묵인하면서도, 노동쟁의 조짐을 탄압하는 데는 신속하고 무자비했다. 심한 노동권 유린에 대해 정부의 보호를 요청하는 노동자들의 호소는 무시당한 반면 노동조합 결성을 막기 위한 기업의 정부 개입 요청은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자연적으로 노동자 의식의 정치화가 촉진되었다. 국가권력의 자본가 계급적 성격을 인식하는 것이 너무나 쉬웠고, 특히 노동자들이 자주노조 결성의 중요성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을 확립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p.45)
1971~80년 사이에 한국경제는 연평균 7.8%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고, 제조업 부문의 성장은 14.8%에 달하였다. 1인당 GNP도 1971년 289달러에서 1980년 1,592달러로 급증하였다. 또한 이러한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한국의 기업들, 특히 가족소유의 재벌회사들은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재벌그룹들은 1970년대 후반기 중화학공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종합상사를 통해 수출과 수입에서 독점권을 행사함으로써 토한 땅투기와 다른 상업투자를 통하여 엄청난 규모의 자본축적을 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말 재벌기업들은 한국경제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공고화했다. 재벌집단들로의 자본집중은 점점 심화되어 1980년에는 30대 재벌기업이 전체 상품수출의 36%를 차지하였고, 전체 고용자의 22.4%를 고용할 정도로 성장하였다.(p.58)
자본의 집중은 한국 산업조직에서 이중구조를 초래했다. 한국경제의 핵심은 약 30개의 재벌에 의해서 대표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놀라운 속도로 재벌집단으로 자본이 집중되기 시작해서 1985년에는 10대 재벌집단이 전체 판매액의 30.2%와 전체 고용의 11.7%를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상위 30개 재벌집단이 전체 판매액의 40.2%와 전체 고용의 17.6%를 차지했다.(p.68)
1966~75년 사이에 약 510만명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 하였고, 1975~84년 사이에 또 590만명이 도시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두 합쳐서 약 1.100만명의 농촌인구가 수출주도형 산업화시기에 도시로 이주한 것인데, 이는 매년 4.7%의 농촌 인구가 농촌을 떠난 셈이 된다.(p.70)
1984년 거의 과반수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서울, 인천과 경기도의 주변도시를 포함하는 수도권에서 일했고, 다른 40%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부산과 대구 두 도시를 포함하는 영남지역에서 일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발달로 울산 ․ 마산 ․ 창원 ․ 구미 ․ 옥포 같은 새로운 산업도시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이들 도시와 다른 지역에서도 제조업체 공장들은 대부분 산업지구 혹은 공업단지로 지정된 일부 지역에서 집중되어 세워졌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 경인지역에 12개 공업단지가 있었고, 여기에 192,000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었다.(p.75)
한국에서도 자본가들은 의식적으로 기업에서 가부장제적인 권위관계를 재생산하고자 했고, 가족적 가치관에 호소해서 노동자들의 복종과 충성을 얻어내고자 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을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에서 가장 요구되는 노동력 유형인 순종적이고 복종적이며, 부지런하고 끈기있고 또한 노동자들의 시민권에 무감한 노동력으로 사회화하는 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가족체제는 수출산업을 위해서 바람직한 노동력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데 장애가 되기 보다는 핵심적인 기제로 기능했다.(p.81)
한국군을 미군에 비해서 뚜렷하게 더 권위주의적이고 통제적이며 폭력지향적인 조직으로 만들었다. 개인들의 헌법적 권리에 대한 일상적인 무시, 비합리적인 요구와 힘든 규울의 강제, 상관의 ㅁ여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끊임없는 언어적 ․ 육체적 체벌 등은 한국 군조직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이와 똑같은 모습들이 한국 기업에서 재현되었다.(p.106)
노동자들의 연대와 계급의식 고취를 위해 교회가 후원한 가장 중요한 사업은 소그룹활동이었다. 근처 공장에서 선발된 6~8명의 노동자들은 샛별 ․ 소나무 ․ 청년클럽 ․ 승리 ․ 다이아몬드 ․ 소띠모임 등의 이름을 가진 소규모 비공식집단들을 결성했다. (p.119)
한국노총이 항상 어용기관으로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노총 산하 일부 산별노조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했고, 전국 섬유노동조합의 보호하에 1970년대 일부 독립노조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1972년 유신체제가 수립되고 나서 한국노총과 산별노조들은 정부의 꼭두각시 기관이 되었다.(p.122)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세계노동운동 역사상 유례가 없는 놀랍고 극적인 저항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날 오후 수백명의 전투경찰이 공장안으로 진입했다. 짙은 청색 복장을 하고 완전무장한 전투경찰의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일부 여성들은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전투경찰이 노동자들엑 다가오기 시작하자, 파업중인 여성들은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고, 거의 알몸의 상태에서 전투경찰 앞에 섰다. (p.126)
소위 반대파라 하는 남자 조합원들, 반대파가 되었을 때는 반대파가 되어야 햇던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집행부가 제 구실을 못한다든가, 지부장이 능력이 부족하다던가 하는 이유가 당연히 있어야 할텐데, 저들에겐 아무런 이유도 까닭도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꿈도 이상도 자기주장도 권리의식도 없었다. 회사에서 일도 안시키고 술도 주고 밥도 주고 교대로 잠도 재워주고 게다가 잘한다 잘한다 추켜세워 주기까지 하고, 정상적으로 일할 때보다 몸도 훨씬 편하니까 그저 저러고 있을 뿐이었다. (p.131)
한국 노동계급운동은 전두환정권 첫 1년 동안 더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표면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유지되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학생 ․ 노동자 ․ 재야집단 들이 1980년의 패배에 대해서, 광주학살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미래전략에 대해서 숙고하였다.(p.156)
1980년대 초기 학생운동가 써클에서는 격렬한 이념논쟁이 있었고 이 논쟁으로부터 노학연대(勞學連帶)가 급진적 학생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전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1983년부터 1986년 사이 한 해 수백명씩 많은 학생드리 공장으로 들어갔다. 죠지 오글은 1980년대 중반 3천여명 혹은 그 이상의 대학생들이 공장으로 들어갔다고 추정했다. …… 이 학생들의 절반 정도가 여학생이라고 말했다. 그들 대부분은 수도권 산업중심지인 인천 ․ 부평 ․ 안양에 있는 중소제조업체에 취업했고 극히 일부가 울산 ․ 마산 ․ 창원 같은 해안의 중화학공업지역으로 들어갔다.(p.161)
노동자들은 대중매체에서 자신들을 "단지 무식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권리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허수아비"처럼 그리는 것에 분개했다. 한 노동자는 분노에 차서 "우리를 눈 뜨게 한 것은 '선동'도 '배후조종'도 아닌 바로 우리가 처한 비참한 현실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주장했다. (p.175)
첫째 최소한의 노동조건에 관한 요구였다. 육체적으로 견뎌낼 수 있는 노동시간, 안전한 노동환경, 과도하지 않은 초과노동, 최소한 매주 하루의 휴식, 그리고 적절한 임금이었다. …… 노사관계의 개선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고용주와 경영자들의 노동자들에 대한 태도 변활르 의미한다. (p.187)
한국의 정치경제 풍토에서 교육은 부(富)나 정치권력보다 더 큰 도덕적 위엄을 지녔다. 전통적 계급체계(양반 대 상민)에 기초한 사회적 위계가 정당성을 상실하고 직업적 위계의 신분질서는 모호해졌지만, 학력에 기초한 사회적 위계는 변하지 않고 실제로 더 강화된 채 유지 되었다. 신분상승을 위한 거의 모든 경쟁이 교육에 의존하게 됐고, 신분적 우위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신분 하락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모두 학력을 신분평가의 주된 기준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p.193)
1980년대 파업에서 자주 불러진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들 수 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재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작업복에 실려간 꽃다운 이내 청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노동자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노동자의 아들이다
아 다시 못 올 흐러간 내 청춘
작업복에 실려간 꽃다운 이내 청춘
내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내 청춘 다 갔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작업복에 실려간 꽃다운 이내 청춘 (p.205)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이전에 발생한 노동쟁의와는 달랐다. 1987년 그 이듬해, 노동자들은 불만을 표출하고 더 높은 임금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장기적인 이해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적 수단을 획득하는 데에도 그에 못지않은 관심을 가졌다. 노동조합 설립이 그들의 최우선 관심사였다. 노조가 존재하던 곳에서는 어용노조를 자주노조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격렬한 노사갈등이 발생한 거의 모든 공장에서 투쟁의 핵심사항은 경영자들이 새로 설립한 노동조합 도는 어용노조를 대신할 민주노조를 인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강력한 노동조합의식은 의심할 여지없이 과거 투쟁의 결과였다. (p.232)
개별 사업장에서의 노조조직운동은 빠르게 그룹 차원의 연대투쟁으로 발전했다. 1987년 8월 8일 11개 사업장 노조대표들이 모여서 현대 그룹 노동조합협의회(현노협)를 결성하였다. (p.240)
두 번째 현대노동자투쟁은 1988년 말 현대중공업에서 일어났다. 이 해의 노사분규는 단체협약과 4명의 해고 노조지도자들의 복직문제를 둘러 싸고 진행되었다. (p.243)
노동자와 경영진 사이의 격렬한 대립은 1989년 봄까지 지속되었다. 파업기간이 길어지자, 노동자들과 경영진 사이, 친경영 노동자들과 반경영 노동자들 사이에 폭력이 난무하였다. 다른 많은 사업장도 그랬던 것처럼, 현대중공업 경영진은 과리직 사원, 공장경비원, 용역폭력배로 구성된 구사대를 조직하고 소극적인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이 조직을 활용하였다.(p.245)
골리앗투쟁으로 알려진 세 번재 현대노동자투쟁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를 둘러싸고 현대중공업에서 다시 발생했다. 1990년 1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제 5대 노조집행부를 선출하였다.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임기는 2년이었지만, 2년 반 동안 5번이나 지도부가 교체된 것은 파업중 노조지도부가 구속됐거나 노조지도부 내에 갈등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노조 운동이 전개되면서, 대부분의 현대노조들은 내부적으로 기업 단위를 넘어선 계급연대와 억압적 노동정책 개혁을 위한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전투적 민주파와, 집단행동을 당면한 기업 수준의 목표에 한정하고자 하는 좀더 온건한 실리파로 나뉘어 있었다. 현대 중공업 노조는 급진적인 조합원들이 지배적이었지만, 현대 자동차 노조는 좀더 온건하고 실용주의적인 노선의 지도부가 이끌고 있었다. (p.247)
1987년 11월, 노동법을 개정하고 노조 설립과 단체협상을 용이하게 하였다. 국가는 노조운동을 어느정도 허용하면서도, 복수노조 금지조항과 제3자 개입 금지조항의 철폐는 거부하였다. (p.269)
전노협 결성 한달 전인 1989년 12월, 경제단체 협의회(경단협)가 결성되었다. 경단협이 추진한 최초의 주요 정책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었다. 노조의 재정상태가 빈약했기 때문에(조합비는 노조원 월 임금의 2%를 초과할 수 없었다) 이 정책은 고용주의 노동비용을 절약해 줄 뿐만 아니라 파업에 대한 효과적인 재제로 기능했다. 노조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부터 이 정책은 점차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p.270)
1990년대 나타난 다물이데올로기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이념교육에서 자주활용되었다. 단군사상에서 도출된 상대적으로 새로운 이 이데올로기는 강한 민족주의적 ․ 국수주의적 성격을 지녔다. 다물민족주의는 한국이 고대에 만주를 포함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는 점과 선조들이 빛나는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물 미족주의는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국가와 경제가 항상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국제체제에서 차지하는 위태로운 위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작은 불만, 작은 분노, 작은 슬픔에서 벗어나 역사를 이루는 주체세력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p.273)
1989년부터 전체적인 노조조직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통계는 중요한 반대경향을 감추고 있다. 좀더 신중한 분석에 의하면 조합원수의 감소는 세계화된 경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노동집약적 ․ 소규모 경공업에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잇다. 노동집약적 부문의 많은 소규모 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이전했다. 대조적으로 대기업 노조의 조합원수는 변함없는 수준을 유지했다. 1989년 말 50~99명을 고용한 소규모 기업들에서 노조조직률이 9.5%였던 반면, 300명 이상을 고용한 기업들의 노조조직률은 60%였다. 이런 자료들은 1990년대 초대규모 제조업체에서 노조조직률이 포화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중소기업의 노조조직 및 조직력 강화가 퇴보한 것은 국가의 반노조정책보다는 이들 기업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p.277)
세습중산층 사회, 그리고 새로운 노동운동의 미래
[번역] 구해근 전 하와이대 사회학 교수 인터뷰
이 글은 지난달 19일 플랫폼C(☞바로가기 : 구해근, "노동자들의 고통으로 일궈진 경제 기적을 찬양할 순 없다")에 게재됐다. 의역 주의. 편집자.
이 글은 2월17일자 중국의 <펑파이신문(澎湃新闻)>에 게재된 구해근 전 하와이대 사회학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원제는 '具海根:我无法在劳工困境中赞扬韩国经济奇迹'로, 인터뷰 속에서 구 전 교수의 말에서 따왔다. 구 전 교수는 우리에게는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펴냄, 2002)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학자다.
이 인터뷰에서 구 전 교수는 자신의 학문 연구 궤적에 관해 개인적이면서도 한국 사회의 맥락과 얽힌 과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학문적 관심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영세 자영업자에서 한국 노동자 계급으로, 그리고 최근 중산층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한다.
또 지난해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고민해야 할 점을 제시하며, 나아가 동아시아(특히 한국) 노동자운동의 국제적 관심이 여전히 서구에 도움을 갈구하는 방향으로만 남아있는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구 전 교수의 이러한 분석은 한국의 사회운동이 뼈아프게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다.
구 전 교수가 제기한 쟁점 중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가 던지는 화두만큼은 충분히 토론하고 논쟁할 가치가 있기에 이 인터뷰를 소개한다. 최대한 맥락을 통해 뜻을 전달하려 했으나 영어로 인터뷰한 내용을 중국어로 풀어 쓴 기사를 다시 번역했기 때문에 학술적 용어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정확할 수 있다. 역주.
질문 : 샤오위(晓宇) 옥스포드대 정치학 박사
인터뷰 : 구해근 전 하와이대 사회학 교수
번역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전태일 열사 동상. ⓒ연합뉴스
서울 중구 명동 인근의 을지로에는 사나운 불길에 휩싸인 청년의 그림이 이따금씩 나타난다. 이곳엔 청계천을 마주하고 전태일 기념관이 있다. 한국 노동자 운동의 상징적인 곳이다.
1970년, 당시 22세의 전태일은 노동자 대표로서 자본과 정부를 대상으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협상을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손에 쥐고 평화시장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노동자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길 희망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긴 그는 그 시대 노동 항쟁과 운동의 촉진제가 됐다.
2020년은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지 50주기가 된 해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새로운 노동운동과 개혁의 상징으로 삼았다.
동아시아 경제의 번영과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들은 다시 전무후무하고 혹독한 정세를 마주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둘러싼 공적 담론 역시 날이 갈수록 왜곡되고 있다. 중국의 배달 노동자들이 '시스템에 갇혀' 있을 때, 한국의 배달 노동자들 역시 알고리즘의 억압 아래서 빈번하게 사고를 겪고 있다.
한국의 라이더유니온과 택배노조, 중국의 라이더연맹(骑手联盟) 등 배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혹은 상호협력 네트워크)이 한국과 중국 양국에 출현했다. 중국의 IT빅테크 기업에서 청년들이 급사할 때 한국의 택배노조는 분류 작업으로 인해 과로사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해 파업을 일으켰다.
다른 지역에 비해 동아시아 내의 횡적 연합은 꽤나 긴박해보인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당대 생산 방식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경제는 날로 발전하고 데이터 기술은 '미래형 경제시스템'을 보급하고 있는데, 과로와 네이줜(内卷; 내권; involution, 질적 발전 없는 양적 성장)은 대체 왜 일상이 되었는가? 국가별 시스템이 만들어진 과정은 다르지만, 오늘날 경제구조에서 노동자들이 마주하는 곤경과 주변화의 추세는 같다. 그렇다면 노동자 권리를 위한 노동운동은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하나.
[※역주 : '네이줜(内卷)'이란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사회를 참여·관찰한 뒤 내놓은 저서 <농업의 내향적 정교화(Agricultural Involution)>(일조각 펴냄)에서 제시한 'involution'이란 개념에서 유래했다.
역사학자 프라센지트 두아라는 저서 <Culture, Power, and the State: Rural Society in North China, 1900-1942>에서 '근대 중국 역사의 바퀴가 안으로 퇴행(involution/内卷)했다'고 묘사하면서 이 개념을 사용했다.
이 개념은 다시 지난해 인류학자 샹뱌오(项飙)가 중국 내 진보언론인 <펑파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하면서 지식사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샹바오는 "중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조직화되지 않으면, 집정당(여당. 중국의 공산당을 의미)의 고강도 통제와 내수 활성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기(네이줜)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순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펑파이신문>이 구 전 교수를 찾았다. 구 전 교수는 세계적인 사회학자로, 동아시아 노동운동 연구의 선구자 중 한명이다.
구 전 교수는 10년에 걸쳐 완성한 저서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권위주의 정부와 보수적인 유교 문화 속에서 냉전 시대의 한국이 어떻게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노동운동을 탄생시켰는지, 그리고 뜨거웠던 노동운동의 열기가 왜 1990년대에 이르러 쇠락했는지 분석했다.
최근 그는 전세계 신흥 중산층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2011년의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내건 '1% 대 99%'라는 슬로건에서 시작해 '10%/90%'의 틀을 제시하여 현재의 소득 분화를 분석했다.
그의 비판적 시선은 '초조한 부유층'이란 화두로 심화되는 계급 불평등 문제로 확대됐다. 퇴임하고 4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아침마다 도서관으로 가 연구를 하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10년 걸쳐 차기 연구 저작을 집필하고 있다. 낮은 톤으로 고전적 사회계급 이론들을 파헤치는 그의 지향은 단순히 '비(非)서방'의 시각을 갖는 것에 있지 않다. 변화하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대항을 묘사하기 위해 정밀한 실증적 기초를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인터뷰 중 그는 종종 중국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이라며 "나는 한국의 상황에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고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오늘날 어떤 나라의 경험도 완벽하게 독특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쇠락
펑파이신문(펑파이) : 미국에 오래 있었다. 1940년대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인데 어떻게 1960~70년대 미국으로 가 학자가 됐나.
구해근 : 1960년 대학생들이 이끈 4·19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신입생이었던 나도 참여했다. 이 운동이 나에게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됐다.
나는 이전부터 사회 불평등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집안 환경 때문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농촌에서 도시로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누나는 나보다 똑똑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했다.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에서 자랐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을 알았다. 노동자들이 고생하며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성실하게 일하는데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현실에 큰 문제의식을 느꼈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어 사회학과를 선택했다. 졸업 후에는 <중앙일보>에 입사해 2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그런데 내 대학 교수님은 내가 꼭 학술 연구를 하길 바랐다. 내 경제 상황을 알고 캐나다의 브리티시콜롬비아대에 장학금을 받고 석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줬다. 그 교수님 덕분에 60년대 말에 출국하게 됐다.
석사 과정 후엔 미국의 노스웨스턴대에서 장학금을 받고 박사 과정을 밟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아무도 한국의 노동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노스웨스턴대에 1969년부터 73년까지 있었는데, 그 사이인 1970년에 전태일 분신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는 박정희정권 시기라 언론이 이 사건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없었다. 나는 신문 속에서 짧은 문장만으로 이 사건을 찾아냈다. 그후에 한국에서 기자를 하던 친구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당시에는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 문제에 대한 논문을 쓸 수가 없었고, 대신 한국의 개인 상공업자들에 대해 썼다. [※역주 : 구 전 교수의 박사 논문은 <Occupational Situs and Social Stratification in a Developing Society (1974) 개발사회에서의 직업의 위치와 사회적 계층화>이다. 1975년에는 미국사회학회에서 <Small Entrepreneurship in a Developing Society: Patterns of Labor Absorption and Social Mobility 개발사회에서의 영세자영업자의 역할 : 노동몰입과 사회이동의 패턴>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랐다. 당시 미국 사회학계에서는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서방 국가에서 스스로를 고용하는 경우가 적었다. 반면 중국 등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노점상 등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 부분이 나중에 '비공식 경제(Informal Economy)'라는 이름으로 경제학의 중요한 영역이 됐다.
1970년대에 아시아 경제는 아주 빠르게 발전했다. 특히 '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亚洲四小龙)'이 있었다. 당시 나는 정치경제학에서의 계층 문제에 관해 연구했다. 대만과 한국의 토지개혁과 계급 변화에 관한 연구였다. 이 연구로 인해 작은 성취가 있었고, 연구를 계속해나갈 수가 있다.
펑파이 : 박사 학위를 딴 후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다 나중에서야 노동자 문제 연구를 시작했다는 건 생각지 못했다.
구해근 : 80년대 초에 한국에 한 번 갔다. 그때 우연히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를 찾았다. 진보적인 교회와 학생 리더들이 조직한 야학에 모인 여성 노동자들이 쓴 거였다. 그들은 모두 농촌에서 상경했고, 돈을 벌어 집안 생계를 지탱하기 위해 온 거였다. 노동조건은 아주 열악했다. 매일 12시간에서 14시간씩 일했다. 하지만 여전히도 공부를 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야학에 참가한 거다.
대학생 조직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를 지하에서 출판하는 방식으로 발행했다. 나는 이와 같은 자료들을 하와이대로 가져갔다. 사회의 불공정함을 스스로 알고 있긴 했지만, 노동자들이 몸으로 겪은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을 읽으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고,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엔 일종의 강렬한 죄책감을 느꼈다.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학생들, 지식인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연대를 '노학연대'라고 불렀다. 퇴학하거나 휴학한 대학생들이 공장에 들어갔다. [인터뷰어 : 1980년대 운동을 목적으로 공장에 진입한 학생들은 약 3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고작해야 나는 미국에서 편안하게 조교수나 하면서 한국의 경제 기적에 대해 쓰고 있구나!' 그 일기들을 읽었을 때, 나는 최소한 이걸 번역해서 전 세계가 한국 노동자들의 처지를 알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학생들이 민주화운동과 정치에 관해 쓴 글들이 많았는데 노동자 계급의 시각에서 출판된 것은 적은 편이었다.
죄책감과 정치적 양심 외에 학술적인 포부도 있었다. 당시 수업에서 흐리멍텅하게 톰슨(Thompson)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을 읽고 있었다. 의심할 바 없는 대가의 저작이었다. 나도 나중에 이런 책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를 발견한 후에 더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었고, 해외에서 한국 노동자 운동을 연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항쟁을 사회운동적 시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어느 정도 편협한 것이기도 하다. 그 뒤에는 노동자들이 독립적 계급이 되어 경제적인 의식과 단결의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 즉 노동자계급의 형성이 있다. '한국의 문화 환경 속에서 형성된 노동자계급은 영국이나 미국의 역사 과정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점이 바로 나의 학술적 출발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인도주의적 관심에서 노동연구를 시작한 것이지, 마르크스주의나 좌파적인 입장처럼 노동자계급은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 게 아닌 셈이다.
펑파이 : 그런 배경이 선생님의 연구 성과를 다면화시키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사회운동과 정치투쟁의 시각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의 시대적·지역적 경험으로서 전통적인 사회계급이론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말이다.
선생님은 주로 국가와 문화라는 포인트를 제시했다. 권위주의 정부의 강력한 개입 속에서 외자 유치와 공적 자금 투입으로 자본 투자가 이뤄졌고, 그런 과정에서 경제발전이 이뤄졌다. 그리고 유교문화의 '경청'과 '복종'이라는 훈육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억압 때문에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노동자운동 문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구해근 : 동아시아나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모델에서 국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아시아의 경험과 초기 공업화 국가를 구분케 한다. 박정희정권에서 전두환정권에 이르는 시기 한국은 수출지향의 국가자본주의를 유지했고, 정부는 끊임없이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을 탄압했다. 아주 노골적인 친자본·반노동자의 입장을 드러냈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형성되고, 노동자운동이 촉진됐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은 일단 사회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퇴학당하고 취직도 못했다.
국가권력은 이런 힘을 투항시키지 못했다.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게 결국 단결해서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1970년대에 시작된 노동조합이나 학생운동, 산업선교운동들이 서로 연맹을 결성하게 된 거다. 그것이 소위 '민중운동'의 기초가 된 거다. 당시 그것은 '무산계급혁명'보다 더 가능성이 있었고, 광범위한 지지도 받고 있었다.
문화에 대한 관심 역시 톰슨에게서 얻었다. 톰슨의 관점은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관점과는 좀 달랐다. 그가 말한 '계급'은 경제구조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는 개인이 삶의 경험을 통해 반응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계급문화의 지위를 형성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한국 노동자들의 각성은 오랫동안 지배해온 유교 문화, 특히 '교육' 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마주하면서 사회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노동자들과 인터뷰하면서 나는 그들이 '교육'과 '소실'에 민감하다는 걸 알았다.
경제적 착취 이상으로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이로 인해 정신적 경멸과 수모를 겪는다. 육체노동을 예로 들면, 흔히 '더럽다'거나 '냄새난다'라는 이미지가 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공순이'나 '공돌이', 혹은 '노가다'라는 경시의 칭호를 붙인다.
관건은 노동자들의 이러한 문화적 지위를 어떻게 바꾸느냐다. 교회 활동과 야학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1980년대의 독립 노동조합 중 '문화행동' 공연을 전담하는 단체들이 있었는데, 여기서 노동자계급은 불평등으로 인한 '한'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인터뷰어 : '한'은 한국인들의 국민정서와 정신기질이다.]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드러낸 거다.
1987년 전국 총파업이나 1990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노동자들이 골리앗 크레인 위로 올라가며 나타난 '산업전사'의 이미지는 일종의 불복종, 자존감 넘치는 노동자라는 지위였다.
ⓒ연합뉴스
펑파이 : 이런 저항은 역사의 유산인가 아니면 산업화의 새로운 현상인가? 또 선생님은 한국의 노동자계급에 대해 분석하며 노동자운동 초기 여성 노동자들이 선봉에 있었고 이들이 노동자운동을 주도하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구해근 : 역사가 반복된다는 관점에서 한국 사회에는 뿌리 깊은 저항의 정신이 있다고 본다. 한국은 큰 나라들 사이에 껴 있는 데다 외세의 개입을 경험해왔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는 설령 저항이 쓸모없다 하더라도 부당한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깊은 감정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강한 국가(strong state)가 있어도 사회적인 '갈등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전통이 존재해왔다.
산업화 시기 국가의 탄압은 이러한 저항문화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 국가는 자본의 편에 서서 노동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공산주의'로 몰아 탄압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은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에서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는 세계 노동자운동에서도 아주 보기 드물다.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모여 있었고, 생활적인 연계가 긴밀했다. 같은 지역이나 학교 출신의 여성 노동자들이 한 공장으로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처우는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떨어졌고, 노동을 통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도 낮았다. 이렇다 보니 그들의 투쟁성이 만들어진 거다.
또 진보적인 교회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는 여성 노동운동가들에게 보호막을 제공했다. 당시엔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을 남성 노동자들이 탄압하기도 했다. 때때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노동조합에 와해와 반발을 부추기기도 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노동자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한국 산업구조가 중공업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중공업에 주로 종사하는 남성 노동자들이 그 수나 중요성에 있어서 노동자운동에서 우세를 점하게 됐다. 그로 인해 노동자운동의 성격 역시도 남성화되고 준군사화됐다.
펑파이 : 냉전 시기에 한국 교회의 확장 과정에서도 여성들의 참여와 리더십이 두드러졌다. 당시에는 남성들이 집집마다 방문을 다니면 지하 결사 조직으로 의심받았다. 반면 여성들은 '비정치적'으로 비춰지는 경향이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와서는 여성의 역할도 줄었지만, 전반적으로 노동자운동이 쇠락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노동문화운동이 약해졌다. 노조는 더이상 다양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호하지 못했다. 파트타임 일자리,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산으로 노동자들은 다시 주변화되고 더 낮은 곳으로 내몰리고 있다.
구해근 : 1990년대 초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썼을 때만 해도 나는 노동자운동의 발전에 크게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 이후에 노동조합은 보수적으로 변했다. 많은 활동가들이 이런 모습에 실망했다. 노동자계급이 독립적인 주체가 되고 노동운동이 문화운동의 모습으로 자리잡을 때 한국 경제가 금융위기라는 중상을 입었다. 국제통화기구(IMF)의 구제정책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1998년 정부 주도로 노동운동을 중재하는 노사정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때 노동계 대표로 참여한 민주노총은 자본 측과 협상하며 고용 안정을 크게 양보했다. 대규모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받아들였다.
이후 한국의 산업구조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재벌의 분화가 가속화됐고 동시에 대기업 노조와 자본의 관계는 모호해졌다. 대기업 노조는 비정규직 고용 활성화를 묵인했다. 자본은 일정 수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착취할 수 있게 됐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자신들의 고용 안정성을 위해 긴장 관계에 있던 노사관계의 항쟁을 다른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전이시킨 셈이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기업들은 경영 전략과 방법을 바꾼다. 노조를 거부하고 이들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복지 향상을 통해 노사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 노동자들의 처우와 복지를 향상해 노사관계의 긴장을 완화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 안정적이고 쾌적한 생활을 영위하게 됐고, (보수 정치인들과 언론이 말하는) '귀족 노조'가 됐다.
더욱이 과거 정치운동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연대했던 대학생들과 사회단체들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나 다른 이슈들로 관심을 돌리면서 사회적 항쟁을 목적으로 한 노동자운동은 후퇴한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은 직접적인 정당 지지도 없고 제대로 된 대표도 없다.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을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2000년 초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과거 노동자운동을 이끌었던 리더들은 고급 아파트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다녔다. 그들은 나에게 '교수님 죄송해요. 우리는 이제 다들 중산층이 됐네요'라고 했다. 나는 '미안할 건 없어요. 이념과 입장만 잊지 않으면 되죠'라고 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이 이미 초기에 가졌던 자신의 신념을 잊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10% 대 90% : 귀족 중산계급의 근심
펑파이 : 전통적인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모두 '대표성의 위기'에 빠진 것 같다. 그들이 대표해야 할 조직들과 점차 멀어지고 있다. 이는 유럽의 좌익정당들에서도 볼 수 있는 점이다. 노동자계급 내부가 분화됐다. 이들을 다시 하나의 공동체나 공동 이익의 추구를 통해 통합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은 국제노동자연맹을 조직했고, 국경을 초월한 계급의식과 단결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몇몇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과거와 같은 국제 노동운동 간의 연대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한 나라 안에서 노조를 만드는 것조차 힘들다. [인터뷰어 : 예외적 사례 중 하나를 언급하자면, 2010-2011년 한진중공업 파업 과정에서 한국과 필리핀의 노동조합이 서로 연대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구해근 : 이러한 노동의 분화가 내가 중산층 연구로 방향을 전환한 이유다.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흐름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중산층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중산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단순하다. 중국, 인도, 혹은 과거의 한국처럼 '경제가 성장하면 중산층이 늘어난다'는 식의 막연한 패러다임만 존재한다. 정부 역시 '새로운 중산층의 증가가 정권의 정치적인 안정성을 뒷받침한다'는 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과 미국 같은 탈산업 국가처럼 쇠락할 거라 우려한다. 이런 관점으로는 중산층 내의 분화를 살펴볼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하는 경제 분화는 '1% 대 99%'를 전제로 한다. 월가 점령 운동을 계기로 널리 퍼진 슬로건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를 보면 모든 중산층의 수입이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 상위 10%나 20%의 자산은 증가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10%를 더 많이 봐야 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계급성은 무엇인지.
내 관점에 이 10%에 속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중·고급의 관리자층, 엔지니어이거나 컨설턴트일 것이다. 이들은 본래의 중산층 신분에서 이탈하는 중이거나, 스스로를 일반적인 중산층과는 다른 소비문화와 교육문화를 만드는 주된 힘으로 보고, 세계화 과정에서 기득권의 지위를 얻었다. 과거 문화의 흐름을 주도해온 기존 중산층에 비해 이들 신흥 중산층은 물질주의라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이 나라들, 그러니까 신흥 중산층의 물질주의적 풍토를 형성한 신흥국들은 하나같이 경제 성장을 거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중산'의 정의를 주로 경제 지표를 통해 짐작한다.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자 경제는 불안정하다. 부유한 중산층은 그들의 지위를 지키고 싶어하며 이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어한다. 이와 같은 안정감이 작동하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문화는 현재 세습중산층[※역주 : 편의상 원문이 '权贵中产'이라고 표기한 것을 '세습중산층'으로 번역함]의 특징이 되고 있다.
나는 이 세습중산층이 어떻게 기존 중산층에서 벗어나 더 많은 특권을 쟁취해나갈지 주목하고 있다.
한국은 최근 '조국 사태'가 있었다. 과거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보수화되어 제도의 일부가 됐다. 이들을 '강남 좌파'라고 풍자하는데 민주와 평등을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귀족이 돼 안락한 경제적 지위와 특권을 누리게 된 거다. 이들은 과거의 '공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역량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통적인 노조와 이른바 '진보 정부'로부터 사실상 동시에 버림받았다. 이런 현상의 책임 일부는 신흥 세습중산층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펑파이 : 세습중산층은 불안과 권태로 가득한 계급이다. 그들의 생활 수준은 향상됐고, 다른 계층과의 격차는 점차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날 뿐이다. 이 계층은 부의 축적을 통해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구해근 : 이들의 깊은 불안감은 이들을 둘러싼 경제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이들의 특권은 그 시대에 팽배했던 기회주의에 편승해 얻은 것으로 불안정하다는 특성이 있다.
세습중산층은 '파티션'[※역주 : 원문에서는 隔断, 여기서는 사회로부터의 특권적 단절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에 사로잡혀 있고, 구획화된 아파트단지[※역주 : 원문에서는 중국식 기초 주거·행정단위 社区. 실제로는 중산층의 gated community를 뜻하는 것으로 보임] 안에 갇혀 있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사립학교나 해외 유학 보낸다. 자신들만의 사회 규범을 새롭게 세우고 다른 계층과 더 구분되길 바란다. 이런 특징은 교육 문제에서 두드러진다. 교육의 질적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이른바 '엘리트 교육'을 통해 '엘리트 그룹'을 만들고 그 안에 모인다. 자녀 유학을 이유로 '기러기 아빠', '철새 가족'이 생겨나는 이유다.
'파티션'을 추구하고, 비용도 따지지 않고 교육에 투자하는 것만으로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다. 이런 점은 세습중산층의 인식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자기 세대에 쌓아온 특권을 다음 세대에게 이전할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영국 사회학자 필립 브라운(Philip Brown)이 말했던 '기회 함정'(opportunity trap)이다. [인터뷰어 : '기회 격차 opportunity gap'는 계층별로 가질 수 있는 사회적 기회가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기회 함정'은 여기서 나아가 그 격차를 메우기 위한 조치가 오히려 실업과 기회의 부족을 야기하는 것이다. 가령 고등교육을 보급했지만 문학 박사의 수는 늘고 일자리는 적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다음 세대에 대한 투자가 계속되면서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학을 다녀온 아이들이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모와 함께 사는 거다. 부모는 계속해서 결혼 등 자녀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중산층은 이런 악순환이 불평등을 증폭시키고, 다음 세대의 입지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펑파이 : 중산층의 어려움은 과거 노동운동처럼 뚜렷한 항쟁의 맥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정 부분 이런 억압은 스스로 가중시킨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자기희생'을 통해 상황을 변화시키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이 생기는 거다.
한국의 문화예술 작품은 주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 <기생충>처럼 말이다. 이런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고 있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 그러니까 '글로벌 의식'과 연합에 있어서 '각성'이 필요한가? 노동자들이 자신의 상황이 세계 경제 구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다.)
구해근 :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이다. 한국 문화예술계가 현실에 관심을 가진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까지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중산계급의 상황은 대부분 그들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됐고 그것은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사적이고 보수적인 심리는 1990년대의 산업 변화와 구조조정 때문이다.
1980년대 전에 흥했던 노동자운동은 정의감과 분노의 단결에 기초했으나 이는 노동자계급의식과 조직이 확립되기 전에 해체됐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간절하게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중산층의 의식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일부는 부유한 중산층이 되기도 했다. 과거 노동자들은 바깥 세계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부인하는 것에 분노했다.
그러나 소수의 노동자가 상위의 중산층이 된 후에는 달라졌다. 중산층이 된 이들의 욕망은 현 상황과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 역시 노동자계급운동의 요구와 노선이 상대적으로 '단순'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중산층이 된 사람들의 이익과 요구는 분화되고,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아까 '글로벌 의식'을 얘기했다. 노동자운동에 글로벌 의식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모습은 여전히 유럽과 미국의 운동에서 목소리를 듣고 지지를 얻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서구 진보 세력에게 인정받는 게 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강조는 역자]
▲ LG트윈타워 1층 로비에서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 ⓒ정치하는 엄마들
펑파이 : 현 상황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원문 反弹)에는 일종의 '국가주의'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불안정한 경제에서 갇힌 사람들은 국가를 글로벌 경제가 가져온 위기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줄 보호막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예컨대 신흥 자본이나 전통적 재벌 자본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을 때 노동자들은 국가가 개입해 문제를 해결할 거라 믿는다.
이는 곧 다가올 미래의 문제에도 해당한다. 자동화의 보급에 따라서 특히나 적극적으로 보유한 신기술을 확대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육체노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이른바 '포스트 노동'의 시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구해근 : 국가주의 경향이 커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국가의 함의는 과거 몇 년 동안 크게 달라졌다. 국가가 스스로 개입하는 것인지, 아니면 외부 요인이 국가가 개입하게 하는 건지 따져봐야 한다.
'노동이 사라지느냐'는 사회학에서도 뜨거운 토론 주제다. 나는 노동이 그 자체로 소멸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노동이 사라진다'는 말 속의 '노동'은 주로 육체노동을 가리키는데 우선 이는 육체노동을 도태된 것, 저급한 것이라고 보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일'이 아니거나 실제로 생산이 없는 활동이라 하더라도 직업이 되고 높은 보수를 받기도 한다.
앞으로의 노동운동의 방향을 이야기하자면, 지금은 노동자 조직과 시민단체로 나누어 이야기해야 한다. 후자는 노동보다 젠더나 환경 의제에 더 관심이 많다. 단시간 내에 통합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과거 노동자들의 격렬한 항쟁 전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노동운동은 앞서 언급했던 긱 노동자(gig worker)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투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새로운 노동운동은 새로운 노동조합 모델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장기간의 파업과 단식 투쟁, 강력한 투쟁성, 그리고 여성들이 주도한다는 등의 전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일찍이 노동자운동의 발전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변화들은 우리를 고무시킨다. 좀 더 상세한 자료를 찾고 싶지만, 나는 나이가 이미 많이 들어서 현장을 따라다니며 이런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 이 부분은 미래의 학자들이 풀어줄 거라고 생각한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번역)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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