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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오래된 미래

의령 두곡저수지·신포마을 느티나무

by 이성근 2023. 7. 25.

비어가는 마을에 나무마저 위태로운데땅속에 묻힌 천년나무

[의령 느티나무]의령 두곡저수지·신포마을 느티나무

2023 713일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저수지 앞 느티나무 노거수 두 그루 아래가 어두컴컴하다. 김양진 기자

 

느티나무는 여름이 되면 봄부터 모았던 에너지로 또 한 번 햇가지(여름 순)를 힘차게 밀어낸다. 포물선을 그리며 동서남북으로 고루 뻗은 햇가지가 출렁출렁. 양옆으로 연한 빛깔의 햇잎이 돋아, 덥수룩한 머리(수관)가 유난히 밝다. 봄에 한 번만 새 가지를 내는 보통 나무보다 빨리 자라는 건 당연한 일. 건강 체질이라 수백 년에서 천 년 이상 장수한다. 그래서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느티나무 고목은 우리나라 곳곳에 참 흔했다. 마을 어귀엔 어김없이 정자나무로 느티나무가 있었다. 빽빽한 잎으로 넉넉한 그늘을 만든 덕에 누구나 모였고, 이야기가 피어났다. 그땐 매미 소리도 참 우렁찼다.

의령 두곡저수지 앞 느티나무의 2m 정도 굵기의 가지들. 100년 전 둑을 축조할 때 5m 이상 흙이 쌓아 올려져 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김양진 기자

 

열 사람이 손을 뻗어야 닿는 천년나무

여기 원래 60여 가구 마을이 있었는데, 일본강점기인 1910년대 쌀을 늘린다고 둑이 만들어지면서 물에 잠겼다고 해요. 남쪽으로 함안 대산(), 북쪽으로 의령 신반(), 동쪽으로 창녕 남지()로 드나드는 길목이라고 삼걸(삼거리)마을, 세 산에 둘러싸였다고 삼산마을이라고 했어요. 이 둑 안쪽을 웃삼걸마을, 이 바깥쪽을 아래삼걸마을이라고 불렀지요. 두 마을의 경계에 당산나무 네 그루가 있었어요. 마을만 희생된 게 아니라 수백 살 된 나무 두 그루도 베어지고 둑이 만들어지면서 둥치는 물에 잠겼어요. 원래 열 사람이 손을 뻗어야 겨우 닿는 굵기라서 천년나무라고 불렀죠. 제가 어릴 때도 이 밑동을 둥그나무(동구나무)라고 불렀어요. 밑동이 얼마나 넓었는지, 저수지 위로 밑동이 드러나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그 위에서 목욕하고 빨래하고 낚시했지요.”

 

2023 713일 오전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저수지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난 동곡 법사(64·전 김해화엄불교회관 태림원 원장)가 돌이켰다.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삼걸마을(삼산마을)은 현재 두곡천 아래 두곡리에 편입돼 이름도 희미해진 상태다. 동곡 법사는 한산당 화엄 스님(1925~2001)을 은사로 모셨다.

 

남은 두 그루 중 더 큰 한 그루를 살펴봤다. 곧게 자란 뒤 사방으로 가지를 뻗는 여느 느티나무와는 달랐다. 땅과 맞닿은 부분에서 1.5~2m 굵기의 가지 6개가 뻗어 있었다. 둑 축조 때 남아 있는 느티나무 줄기도 2층 높이 정도의 흙으로 덮였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따지면 턱밑까지 파묻혀 100년가량 살았다는 얘기다.

 

현장을 찾은 박정기 노거수를 찾는 사람들 대표활동가는 잎의 크기가 작고 나무껍질이 제대로 벗겨지지 않고 말라 죽은 가지가 많으며 여름 순이 생기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생육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고 진단했다. 이런 점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두 나무의 보호수 지정을 군청에 건의하려 한다. 박 활동가는 과거 이 네 그루가 웃상그리마을 들머리에 숲을 이뤄 입구(동구나무) 구실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나무는 잔뿌리를 지표면 30 이내에 뻗어 호흡한다. 흙을 높게 덮는 복토는 나무를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일이다. 정이품송(충북 보은), 용문사 은행나무(경기기 양평) 등이 대표적인 복토 피해 사례로 꼽힌다.

 

그런데도 이날 이 억센 두 고목나무의 촘촘한 수관(나무의 잎과 가지)은 비탈을 따라 20m 이상 늘어져 아래는 어두컴컴했다. 옛 위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둘 다 키가 약 18m였다. 땅속에 묻힌 가슴높이 둘레는 8.5~9m 정도로, 수령은 300~500살 정도로 추정된다.

그래픽 장한나

 

논은 줄었지만 둑은 되레 높아졌다는 게 참.”

전부 일급 논이었는데.” 함께 마을을 한 바퀴 돌던 동곡 법사가 잡초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빈집이 절반가량, 잡초가 무성한 묵힌 논도 수두룩했다. 이제 부산 등 도시에서 귀촌한 가구를 합쳐도 마을엔 10여 가구만이 있을 뿐이다. 동곡 법사가 2016년 이 마을로 귀향했을 때 8명이던 90살 이상 어르신도 이제 그의 부친 이종윤(100) 옹을 비롯해 2명뿐이다. 올 사람이 없어 마을 경로당이 문을 걸어 잠근 지도 벌써 3. 이종윤 옹을 찾아 천년나무에 관해 물었다. 귀가 어두운 이 옹은 무슨 나무? () 세월이 지겹다고 말했다.

 

이렇게 마을도 농업도 쇠락해가지만 2011~2012년 한국농어촌공사는 안전 우려 때문에 두곡저수지의 둑을 1.5m가량 높였다. 동곡 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논은 줄었지만 둑은 되레 높아졌다는 게 참.”

의령(경남)=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느티나무 한 그루가 숲으로 컸지만열매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을까

2023 713일 경남 의령군 칠곡면 신포마을 느티나무 노거수. 2m 넘는 아름드리 줄기가 땅을 기어가며 자랐다. 김양진 기자

 

큰 나무가 많기 때문일까.(의령군엔 세간리 은행나무, 현고수 느티나무, 백곡리 감나무, 성황리 소나무 등 천연기념물 노거수가 네 그루나 있다.) 동곡 법사 말을 들어보면 이쪽 지역에서 난 인물도 많다. 두곡천을 따라 박사만 50명이 넘고, 영화 <말모이>의 실제 인물인 이극로(1893~1978)는 아래쪽 두곡리 출신이다. 삼산마을의 도로명주소도 고루’(이극로의 호)에서 딴 고루로. 또 이 마을 북쪽으로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1552~1617)와 독립운동 실업가 안희제(1885~1943)의 생가가, 서쪽으로 삼성 창업자 이병철(1910~1987)의 생가가 있다.

 

큰 나무가 있는 마을에 큰 인물이 난다고 합니다. 산을 사랑하고 나무를 사랑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있다면, 인심이 좋고 교육을 잘 받았을 테지요. 마을에 주민을 잘 이끄는 어른이 있고 지도자가 있다는 얘기고요. 나무를 훼손하면 벌 받는다고 하는 얘기도 마찬가집니다. 6·25 때 땔감이 모자랐는데 전국에 그 큰 정자나무들이 어떻게 살아남았겠습니까.(지금도 전국에 100살 이상 된 보호수 13856그루 가운데 느티나무가 7278그루로 52.5%에 이른다.) 나무는 주변을 절토·복토하고 아스팔트를 덮는 등 개발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100~200년 나무에 손대지 않도록 가르친 덕망 있는 어른들이 있었고, 큰 나무를 신령스러운 당산나무라고,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친 거죠. 그런 마을에 인재가 난다는 건 꼭 비과학적이라고 할 순 없겠지요.” 이경준 서울대 명예교수(임학)는 이렇게 설명했다.

 

숲 토양의 빗물 흡수 능력(도시 토양의 25, 국립산림과학원 2020년 조사)이 좋아, 주변에 나무가 많으면 홍수가 방지되고 농사도 잘된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비어가는 마을에 나무마저 위태로운 이 땅에 인물이 계속 날 수 있을까. 의령군 인구는 25806(2023 6월 기준)으로 경남 지역에서 가장 적다.

 

큰 나무 있는 마을서 큰 인물 나는 까닭

갖은 일을 겪은 삼산마을 느티나무와 달리, 잘 자란 느티나무의 고유 수형이 잘 드러난 고목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같은 날 삼산마을에서 차로 서쪽으로 40분가량 가면 신포마을(칠곡면)에 다다른다.

 

!”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한 그루가 그 자체로 숲이었다. 사방으로 고르고 넓게 수관을 뻗은 고목나무 구름 한 폭이 서 있었다. 논밭 한가운데 있는 나무는 영락없는 정자나무였다. 안쪽으로 들어가보니, 2m 넘는 굵은 가지 3개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 애썼던 것이 평범한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미 햇빛을 차지한 위쪽 가지를 피해 팔(가지)을 뻗었다. 그렇게 물과 양분이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 번 오갔다. 여기에 마을 주민들의 보호도 보탬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지금의 웅장한 신목이 됐다.  24m, 가슴높이 둘레 8.4m, 잎과 가지가 뻗은 수관 폭은 무려 가로세로 45m에 이르렀다.(박정기 활동가 측정) 때마침 매미들이 볼륨을 높였다.

 

언제 심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김녕 김씨가 정착해 집성촌을 이룬 게 560년 전이라 그때 심은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이렇게 가지가 완전히 내려오진 않았는데,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점차 내려와 지금은 저렇게 땅에 닿았네요.”(이규용(66) 신포마을 이장)

 

그런데 이규용 이장의 말을 들어보니, 신포마을도 개발 압력을 무탈하게 넘긴 것은 아니었다. 마을 어귀의 300살 된 동구나무 팽나무 두 그루도 이 느티나무와 함께 당산나무로 섬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길을 확장하고 포장하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20여 년 전 말라 죽었다. 가구수도 1970~1980년대 100여 가구에서 현재는 42가구로 절반 이상 줄었다. 그럼에도 나무를 신성시하는 정서는 여전하다. 이 이장은 어려서부터 저 나무를 함부로 하면 해가 돌아온다고 해서 우리 마을에 저 나무에 손대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사한 가지를 모아둬도 주민들이 일절 가져가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신포마을 느티나무. 2m 넘는 아름드리 줄기가 땅을 기어가며 자랐다. 김양진 기자

신포마을 느티나무. 2m 넘는 아름드리 줄기가 땅을 기어가며 자랐다. 김양진 기자

 

사람 많은 도시에서 느티나무가 살기란

나무 지킬 마음은 있어도 사람이 없는 농촌과 달리, 도시에서는 또 다른 이유로 느티나무가 살기 팍팍하다. 너른 수관 탓에 건물에, 전봇대에, 차량 통행에 치인다고 곧게 자라는 벚나무·이팝나무로 대체되기 일쑤다.

 

열매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머리와 어깨와 다리에/ 가지와 줄기에/ 주렁주렁 달았다가는/ 별 많은 밤을 골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떼어 온 고을에 뿌리는/ 우리 동네 늙은 느티나무들 신경림, ‘우리 동네 느티나무들 일부분

의령(경남)=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