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여름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낮에는 업무수행이 어렵다. 사무실에는 에어컨이 없다. 있기는 한데 설치를 포기 했다. 120여평을 돌릴려면 이래저래 비용이 들뿐 아니라 사무공간만 칸 막이를 세워 냉방시킨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에서였지만 지난해 여름과 올 여름 더위를 겪어면서 그 생각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그래서 내년 여름은 설치를 해 볼 작정이다만 현 사무실을 유지 할 지가 불확실하다.
사는 기 싶지 않다.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한다. 사무실에 원하는 만큼의 인력이 둘 수 없는 현실도 그렇거니와 그 부족분을 혼자서 쳐 낼려니 주말이며 저녁있는 삶은 기대할 수없다. 최소한의 사무인력이 있긴 하지만 그의 역할은 총무회계와 그야말로 단순 사무보조 기능일 뿐이다. 좋게 생각하면 그 마저도 없으면 이란 것과 반면 그의 역할과 기능이 더 확대 되기를 바라는 바램이 존재하는 것이다.
언급했듯 한낮에는 불어 오는 바람 조차도 텁텁하다. 아래층에서 뽑아 내는 에어컨의 실외기 열을 고스라니 받기 때문이다. 해서 선풍기가 바람을 일으키지만 크게 시원함을 느낄 수없다. 그래서 업무 효율을 높이는 방도로서 가끔 눈 뜨자 말자 출근한다. 새벽이다. 그리고 심야에 퇴근한다.
이 맹하에 떼로 노래부르는 생명은 매미 뿐이다. 그 소음이 실로 크다.
오후 여섯를 지나는 시각 사무실 한켠의 풍경이다. 팔손이 중심의 식물이라 반그늘에서도 충분히 생육히 가능하기에 배치시켰는데 이 게절에 목마르기는 사람이나 식물 다 똑같다. 이틀 주기로 물을 준다. 보다 햇볕이 많은 쪽의 창가식물들은 거의 매일 물을 준다. 식구들이기 때문이다. 일에 쫒기거나 출장 갔다오면 지쳐서 축 늘어진 식물들의 신음소리가 자욱하다. 서둘러 물을 주면 그제사 살았다는 듯 쳐진 잎을 세우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런 것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들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나 아니면 저들에게 물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말복 저녁 어머니께서 전화를 주셨다. 이 여름에 부모님들은 아들딸네를 불러 백숙을 먹인다. 옻닭과 옻을 넣지 않은 그냥 백숙이지만 자식들이 그 부름에 열일 제치고 달려가기란 싶지 않다. 가장 참석율이 저조한 것은 우리집이다. 아내도 3교대로 일하다 보니 맞추기가 싶지 않고 더욱이 아들이란 놈은 세상 일을 저 혼자 다 하는 것 마냥 늘 바쁘다. 그런만큼 죄송스러웠고 그래서 말복의 부름에는 무조건 예하고 갔다.
사실 별 것 없다. 그냥 나들어도 자식이기 때문에 이 여름 더위 잘 이겨내라고 보양식을 먹이고 싶은 것과, 자식도 그 마음 익히 알아 같이 닭다리를 뜯고 옻국물 마시고 오는 것이다. 자식은 또 그냥 올 수가 없어 지갑을 털어 몇 푼이라도 어머니며 아버지 호주머니에 찔러 주고는 본가를 나서는 것이다. 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더위 극복하는 것 이상의 마음을 편케 하기 때문이다.
간만에 집으로 곧장 오지 않고 돌산마을을 돌아 옛 살던 마을을 향해 걸었다. 건물의 높고 낮음이 삶에도 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 도시다. 때로 그 격차가 너무 커 저항하고싶은 때가 많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지만 가진 것의 유무에 따라 차별이 일상화되고, 업신여김과 '갑질'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높고 낮음의 집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 내는 불빛은 사람을 현혹할 만큼 괜찮은 그림이다.
부산의 대표적 산동네로 알려진 돌산마을 혹은 문현동 벽화마을은 거주민의 정착이 그야말로 투쟁의 결과였다. 철거반에 의해 담벼락이 허물어져 내리고 지붕이 뜯갸나나기를 반복하면서 버틴 세월이었다. 그것도 공동묘지에서의 주거였다. 시방도 벽화마을 골목 곳곳이며 누군가의 앞 마당에는 무덤이 버젓히 있다. 해서 죽은자와 산자의 동거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죽은자의 탈 세상속 두 발 뻗고 누운 자유처럼 이 마을 주민의 밤도 두발 뻗고 하루의 피로를 푸는 밤이기를
전포동과 문현동 경계부에 들어선 저 고층의 건물은 부산 금융자본의 상징이다. 들어설 때부터 달갑지 않았다. 들어서고서도 황령산과 어깨를 견주고 섰다는 것이 보기 싫었다. 어처구니없는 노릇은 금융자본에 대해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간직하고 있지만 때로 뭔 행사를 기획하면서 그들의 후원을 기대하는 것이다. 비슷한 양상이 여러 가지로 펼쳐 진다. 내 본 마음은 감추고 행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겉으로 웃으며 손을 내민담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한겨레 사설] 가계빚 1400조원 시대에 앉아서 떼돈 번 은행들
가계부채가 6월 말 기준 1400조원에 육박한 가운데, 시중은행들이 6년 만에 최대 이익을 냈다. 돈을 많이 번 게 문제될 일은 아니다. 다만 은행들이 앞다퉈 손쉬운 주택담보대출에 치중하면서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시중자금이 생산적 분야가 아닌 부동산으로 흘러 국가경제 전반에 부담을 주는 게 문제다.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은행들이 공공성은 외면한 채 ‘전당포식 영업’을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감독원이 8일 발표한 ‘국내 은행의 2017년 상반기 영업실적’을 보면, 신한·케이비국민·케이이비하나·우리 등 6개 시중은행의 올해 상반기 순이익이 4조6천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3조4천억원)보다 35% 증가했다. 현대건설 주식 매각이라는 특별이익(3조1천억원)이 발생한 2011년 상반기의 6조9천억원 이후 최대다. 대출이자와 예금이자의 차이인 예대마진 확대를 통해 이자이익을 늘린 덕분이다. 지난해 12월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이후 대출이자는 최대한 올리고 예금이자는 낮추는 방식으로 수익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이자이익으로 10조원을 남겼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6일 기자간담회에서 은행들의 영업 관행을 “전당포식 영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1990년대만 해도 가계대출을 전담했던 국민은행과 다른 은행의 영업 방식에 차이가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국민은행화했다”며 “주택담보대출을 통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영업 행태가 ‘경제적 공해’를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전체 은행 대출에서 가계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8%에서 지난해 43%로 급증했다. 금융당국은 앞으로 혁신적 중소기업 등 생산적 분야에 자금이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금융시스템을 정비할 방침이다.
정부가 관여해서가 아니라, 은행 스스로 변해야 한다. 케이뱅크에 이어 지난달 27일 출범한 인터넷은행 카카오뱅크가 8일 200만번째 계좌를 개설했다. 2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전체 은행의 지난해 비대면 계좌 개설 건수 15만건의 13배를 넘는 실적을 올렸다. 금융에 정보기술을 접목해 시중은행보다 대출이자는 낮고 예금이자는 높은 상품을 내놓은 게 주효했다.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이자 장사’에 안주해서는 더이상 살아남기 힘들어진 세상이 온 것이다. 17. 8.9
황령산 자락에 켜켜이 들어고 있는 저 고층의 아파트들이 없으면 우리는 정녕 살 수가 없는 것일까
누군가는 저들의 이익추구에 편승하거나 동반해서 벌어 먹고 살고 있고, 또 그의 존재 속에 그의 식솔이 더불어 살면서 한 시대를 공유하고 있다.
어둠속에 자리 잡은 통일동산 역시 앞 좌우 사방이 아파트 건설에 포위되어 있다. 일 이년 후면 저 풍경도 사라진다. 산자락이 사라진다는 것은 거기 숲에 의지하여 살던 숫한 생명들의 쫒겨남이다. 실제 통일동산에 경동건설이 아파트 신축공사를 벌이며 숲을 베어내고 산자락을 허문 뒤 나타난 현상은 해마다 봄과 여름 사이 숲에서 들려오던 호랑쥐바퀴며 소쩍새 울음은 사라졌다. 그들은 내가 내땅에 아파트 짓겠다데 뭐가 잘못됐냐고 했다. 그 기막힌 당당함과 도도함에 치를 떨었다. 오냐 알겠다고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마음에 각을 세웠다.
골목을 내려서면, 30여 년 전 아니 헤아려 보니 얼추 40년 전 쯤 세들어 살던 장씨 댁이다. 남해가 고향이라고 했든가. 주인집 아주머니를 닮아 유난히 눈이 컸던 장씨집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 보다 나이 많았던 형과 누나외 나머지 3명은 내 아래였다. 그리고 세들어 살던 옆 칸에 자식 셋을 키우던 사람들이 둥근 마당을 공유했다.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할 때까지 한 사오년 살았나, ... 그 시절의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 온다.
이 간선도로를 통해 문현 로터리를 오가던 시내버스를 타러 다녔다. 버스를 이용한다는 것는 최소한 열 정거장 이상일 경우였고 대부분은 걸어서 다녔다. 심지어 광안리나 더 멀리 까지도
그 길에 재개발이 이루어 지고 있다.
문현3동은 신흥주거지로서 그 시절의 중산층 동네였다. 흔적이 남아 있는 골목과 1~2층 규모의 주택의 형태는 얼마 없다. 대부분 임대 소득이나 분양을 통해 이익을 노린 집장사들에 의해 동네의 그림이 달라졌고, 현재 진행형이다.
바람이 길을 잃었다. 집집이 에어컨을 돌리고 있었다.
Il Cielo In Una Stanza - Franco Sim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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