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저자 에드워드 올비|역자 강유나 민음사, 2010
원제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저자 에드워드 올비는 1928년 3월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나 생후 두 주만에 리드 A. 올비에게 입양되었다.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 밸리포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훗날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무대가 되는 트리니티 신학대학을 다니다 퇴학당한다. 양부모와 결별 후 뉴욕에 자리를 잡고 다양한 일을 하며 온갖 장르의 글을 쓰다 손턴 와일더에게 희곡에 전념하라는 충고를 듣는다. 서른 살이 되던 1958년에 세 주 만에 완성한 '동물원 이야기'를 호평 속에 상연하고 1960년 버넌 라이스 기념상을 받았다. 이후 유럽 부조리극과는 다른 미국식 부조리극을 표방한 ' 모래 상자'와 '미국의 꿈' 등의 단만극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며 당시 싹트고 있던 오프브로드웨이 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1963년 10월 브로드웨이 빌리 로즈 극장에서 상연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가 대중과 극단으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고 토니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의 주요한 극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지금까지 700회 가까이 상연된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처드 버튼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여러 작품을 발표했고 그중 '미묘한 균형'과 '바닷가 풍경'으로 두 차례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004~2005년에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가 브로드웨이에서 재상연되면서, 극작가로서의 평생 업적을 기리는 토니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목차
1막 재미난 게임
2막 발푸르기스의 밤
3막 귀신쫓기
작품해설
작가연보
1962년에 공연된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의 첫 장편희곡이다. 이 작품으로 올비는 본격적인 극작가로서의 위치에 올랐다. 뉴잉글랜드 지방의 조그만 대학 캠퍼스에 있는 주택의 거실을 배경으로 하며,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평범한 부부들이다. 남편은 무능력한 대학교수인 조지이고 아내는 대학총장의 딸 마사이다. 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고함을 지르며 싸워댄다. 이들 부부의 집에 젊은 교수 니크와 부인 하니가 초대된다. 잡담이 시작되고 조지의 역사학과 니크의 생물학이 언쟁한다. 마사는 조지의 무능함을 잔인할 만큼 공격하고 이들의 언쟁은 하니의 구토로 중단된다.
하니의 상상임신과 구토증, 지나친 음주로 인한 추태로 무대는 서서히 혼돈으로 빠져든다. 마사는 니크에게 접근하고 하니는 취기로 추태를 부리며 조지는 독서에 열중한다. 그 때 종소리가 나면서 광란의 수라장은 중단되고 조지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환각에 빠진다. 조지는 아들의 죽음을 알리고 니크와 하니가 퇴장하면서 광란은 끝난다. 조지와 마사는 자신들이 꾸민 이 유희의 결말을 음미한다.
끝에 조지가 부른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의 의미는 "누가 환각없는 삶을 두려워 하랴"이다. 이상주의를 상실하여 불안한 부부는 밤의 유희에 빠져들고 인간의 온갖 허위와 마성을 노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달과 아들과 종소리는 이들의 광란과 상반되는 이상이자 현실에 대한 경종을 의미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국에서 1950년대 말은 변혁의 시기였다. 전쟁영웅이었던 아이젠하우어의 시대가 가거 뉴프런티어 정신을 표방하는 케네디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진보적인 가치들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소비주의가 정당화해 주었던 1950년대의 공허한 물질주의는 비난받게 되었다. 사회를 이끌어갈 정치적 ,도덕적 원리가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다. 대중적이고 상업주의적인 연극의 본산인 브로드웨이에서 벗어난 오프브로드웨이에서 Jack Gelber, Jack Richardson, Edward Albee 등의 젊은 작가들이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연극을 모색하였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소산이었다. 이들은 Arthur Miller와 Tennessee Williams 이후 침체되어 있던 미국 연극의 재건을 위해 독창적, 도전적, 실험적인 국을 추구하였고 극의 사회적 유용성을 극대화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가톨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김세인 문학석사 학위논문 –에드워드 올비 작품에 나타난 가족상 中 2005.12)
교수 부부들의 하룻밤으로 드러난 가족의 민낯
[서평] 에드워드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50년대와 60년대에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 에드워드 올비는 미국을 대표하는 희곡 작가 중 한 명이다. 불우하고 방황하는 유년기를 보냈으나 뛰어난 재능 덕분에 주변의 추천으로 희곡 작가로 데뷔하게 되었고, 이후 수차례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브로드웨이를 화제로 물들였다. 그는 유럽과 다른 미국만의 부조리극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그런 의지의 결과물로 탄생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퓰리처상 수상이 결정되었으나 그 내용 때문에 위원회에서 상의 수여를 거부, 심사위원 과반 이상이 항의 사퇴하는 파란을 불러 일으켰을 정도로 이 작품의 화제성과 문제의식은 당시 60년대 미국 사회에 있어 대단한 것이었다.
극의 구성은 매우 간단하다. 한 시골의 작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조지와 총장의 딸 마사 부부는 새로 대학에 부임한 젊은 생물학 교수 닉과 그의 아내를 늦은 밤 파티가 끝난 뒤 자신들의 집으로 초청한다. 다음날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그들 네 사람이 펼치는 다양한 대화와 '게임'들이 바로 극의 내용 전부이다.
이처럼 간단한 틀 아래에서 에드워드는 당시 미국 사회가 정치,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 걸쳐 가장 굳건하고 중요한 가치로 수호하고 있던 '건강한 가족'의 신화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와 현모양처인 어머니, 그리고 그들 사이의 자식과 함께 만들어지는 화목한 분위기. 당장 오늘날에도 미국은 비록 여러 베리에이션이 존재할지언정 여전히 할리우드영화들과 TV 예능프로, 그리고 정치인의 입을 통해 이같은 이상적 가족관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그만큼 이 '건강한 가족'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상징과도 같은 가치이다. 그런데 지금보다도 2, 3세대 이전에 이 같은 가치에 대한 정면도전이 나타났고 그것이 대중들에게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에드워드가 작중에서 미국식 가족주의를 해체하는 방식은 다분히 은유적이고 폭력적이다. 극의 전개 내내 분위기는 긴장감을 극도로 조여오고, 매 순간이 눈을 찌푸릴 만큼 폭력적이거나 무의미하게 단절되어 있다. 처음 네 사람이 술잔을 들어올릴 때부터 이들 사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조성되는데, 두 쌍의 부부가 각기 서로 감추는 비밀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하지만 극의 결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이에 대한 직접적 폭로는 제한된다.
대신 '주인장 욕보이기', '안주인 올라타기' 등의 언어적/성적 폭력이 '게임'의 형태로 이들 사이에서 구현된다. 그 과정을 통해 점차 각자의 내면에, 그리고 부부라는 관계 아래에 감춰지고 억눌려 있던 뒤틀림이 하나씩 관객들에게 폭로되는 것이다. 그 정점은 조지-마사 부부가 키워오고 있다고 '말해졌던' 스무살이 갓 넘는 외동아들이 허구의 존재였음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거기서 정점으로 치닫던 분위기는 급속히 무너져내리고, 배우들은 막을 마무리한다.
이들 각자는 출세에 대한 야망, 성(性)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어릴적 부모와의 파괴적 경험, 그리고 유년기 때부터 이어져온 아버지의 억압 등 저마다 큰 어둠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어둠은 가족이라는 둥지 아래에서 치유되기는커녕 도리어 악화되고 뒤틀려버린다.
부부관계가 순수한 사랑이 아닌 '수단'으로서 이루어졌고 그것을 양자 모두 애써 외면한 채로 표면적 소통만을 시행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작가는 술과 폭력, 음란을 동원해 이들의 일상적 행위와 사고를 뒤흔들고 이를 통해 맨얼굴을 드러내 보이는 기법을 사용한다.
태초부터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만들어내고 신봉할 수 있는 가치는 '소중한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이 어떠하든 그러한 가족의 신화를 만들어내고 확산시키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과제여야만 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세일즈맨의 죽음>, <달려라, 토끼> 등에 이어 이 같은 상황에 대한 대표적인 도전이었고, 대중들의 폭발적 반응은 그것에 대한 동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60여 년이 지났지만 에드워드가 폭로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스크린과 대형 미디어가 '가족'에 대한 목소리를 독점하며 다른 목소리들은 이전보다 더 묻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가 여전히 빛을 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고전이라는 점,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될 때 언젠가 등장할 제 2의 에드워드, 또 다른 이단아를 기다리는 재미를 품을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미국의 해결되지 않은 현재가 또 어떤 모습의 문학적 거장을 탄생시킬지 기대된다/조우인 오마이뉴스 17.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