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어울리기/서평

4천년의 농부

이성근 2023. 4. 27. 01:43

4천년의 농부 유기농업의 원류-중국ㆍ한국ㆍ일본 프랭클린 히람 킹,곽민영 (옮긴이)들녘2006-02

 

프랭클린 히람 킹 (Franklin Hiram King) -미국 농림부 토양관리국장을 지냈다. 1848~1911. 이 책은 미국 농림부 토양관리국장을 지낸 저자가 1909년 중국과 한국, 일본을 여행하면서 이들 나라의 유기농법을 눈으로 보고 쓴 답사 보고서이자 그의 유작이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 극에 달했던 20세기 초, 저자는 저개발국에 지나지 않았던 동양 3국을 돌면서 4천 년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면서도 땅을 비옥하게 유지해온 그들의 지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저자가 발견한 동양적 가치는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할뿐더러 정작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상들의 지혜에 저자보다 더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을 보지도 못한 채 곧 타계하고, 부인 킹 여사가 출간하게 되었다.

 

 

목차

들어가는 글

 

1. 일본을 일별하다

2. 중국, 무덤의 땅

3. 홍콩과 광둥

4. 서강을 따라

5. 운하와 땅고르기

6. 보통 사람들의 풍습

7. 연료 문제와 건축, 섬유

8. 땅을 밟다

9. 쓰레기의 활용

10. 산둥 지방

11. 시공간을 최대로 이용하는 동양인

12. 동양의 쌀 문화

13. 비단 문화

14. 차 산업

15. 톈진에 대하여

16. 만주와 한국

17. 다시 일본으로

 

옮기고 나서

찾아보기

 

출판사 리뷰

* 중국과 한국, 일본은 4천 년이나 지속해온 유기농업의 원조

화학비료가 국내에 처음 들어왔을 때 농부들은 그것을 금비(金肥) 또는 단비() 라 불렀다. 쌀같이 흰색의 요소비료 한 숟가락만 물에 타서 작물에 뿌려주면 작물이 쑥쑥 자랐다. 금처럼 귀하고 설탕같이 달아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그러한 까닭에 냄새 나는 퇴비나 두엄은 미개하고 더러운 비료라 멀리하기 시작했다. 화학비료를 만든 서구에서는 그 이전에도 퇴비의 원재료인 똥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차에 이제는 똥을 더 강물이나 호수나 바다에 버렸다. 화학비료의 등장으로 더럽고 냄새나는 똥을 멀리멀리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똥을 가깝게 두고 사는 이 동양 3국을 답사하며 파리가 거의 없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반면 인분을 물로 씻어버리고 그마저 멀리멀리 버리는 미국에선 늘 식탁에서 파리채를 들고 밥을 먹어야 했다고 한다. 저자는 거의 답사가 끝날 무렵 그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 정체는 바로 퇴비 만들기였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서양에선 100년 이상 농사를 지으면 당연히 땅이 황폐해지는 것으로 알았다. 화학비료가 만들어지고부터 그 속도나 강도는 더했다. 그런데 4천 년 넘게 농사를 지어온 중국과 한국, 일본에선 희한하게도 땅이 비옥하기만 사실이 저자는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한 밭에 작물 하나가 아닌, 적어도 세네 작물이 이어서, 또는 동시에 자라고 있어 작물이 심어져 있지 않은 맨땅을 볼 수 없는 것을 지은이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 비밀의 열쇠 가운데 가장 으뜸은 바로 똥이었다.

 

말하자면 똥을 비롯해 땅에서 나는 것은 모두 다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있었다. 4천 년 넘게 영속적인 농사를 지어온 이 농부들은 4천 년 동안 늘 변함없이 똥을 훌륭한 유기질 퇴비로 만들어 땅으로 되돌려보냈다. 똥만이 아니었다. 먹다 남은 모든 것은 흙으로 돌려보냈고, 못 먹는 것의 부산물은 다 연료로 되돌려졌다. 연료로 쓰고 남은 재는 또 거름으로 재활용되었다.

 

똥 다음의 열쇠는 물이었다. 몬순 기후의 특징으로 이들 나라는 여름이 고온다습하여 연간 강수량의 대부분이 일시에 집중되는데도 이들은 그 많은 물을 가두는 기술이 탁월했다. 논과 수로가 그 기술의 백미였다. 특히 중국은 고대의 순임금과 우임금 시절부터 치수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려 시골 구석구석까지 거미줄처럼 수로를 만들었다. 수로의 바닥에 펄흙이 쌓이면 퍼내어 훌륭한 거름의 재료로 썼다. 경사진 산이든 평야이든 논을 계단식이나 작은 규모로 만들어 논의 담수력를 최대화했다. 이렇게 지표수를 잘 가두어두면 지하수 자원도 절로 보전된다. 이런 물의 관리야말로 흙의 황폐화, 사막화를 막는 최대 비밀의 열쇠였다.

 

마지막으로 이 오래된 농부들의 노하우는 콩을 비롯한 콩과식물의 활용이었다. 공기 중의 질소를 비료로 만드는 마법의 힘을 가진 콩과식물은 콩과 같은 먹는 작물만이 아니라 자운영 같은 잡초 식물도 있다. 자운영은 봄에 논에서 꽃을 만개하는 대표적인 콩과 녹비( V)식물이다. 꽃이 만개하면 그 모습도 장관이지만 이를 갈아엎어 벼 모내기를 하면 거름을 적게 주어도 잘 자란다.

 

이런 지혜와 훌륭한 노하우를 가진 이 지역 농부들을 미개하다고 폄하해온 서양문명에 대해서 저자는 실로 회한의 부끄러움을 표현한다.

 

 

* 유기농업은 서양에서 배울 게 아니라 우리 전통농업에서 배워야 한다

서양의 농업이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밀농사와 목축에 있다. 저온다습한 지중해성 기후는 겨울에 비가 많이 내려 밀?보리 농사를 풍요롭게 한다. 반면 여름이 건조하여 벼농사는 되질 않는다. 대신에 목초지가 풍성하다. 넓은 목초는 목축의 발전을 가져와 밀에서 모자라는 단백질을 쉽게 보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가축은 작물보다 더욱 쉽게 흙을 사막으로 만든다. 곡물은 같은 양을 가축이 먹어 우유나 고기를 만드는 것보다 5배나 많게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다고 저자는 홉킨스의 땅의 비옥함과 영구적인 농업에서 다음의 말(234)을 인용하고 있다.

 

곡물 1000부셀(1부셀=2, 36리터)은 같은 양을 사용해 만든 우유나 고기보다 5배는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적어도 5배 이상의 가치가 있다.

 

밀농사가 벼농사보다 물을 가두지 못한다는 것을 둘째치더라도, 흙을 비옥하게 해주는 콩농사에 비해 목축은 숲과 땅을 수탈하는 전형적인 사막화 농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밀농사와 목축에서 발생한 이집트 문명의 나일강가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가가 사막화된 것은 결코 이와 무관치 않다.

 

반면 우리의 논농사와 콩농사는 흙을 비옥하게 하여 저자가 말한 대로 4천 년이 넘어 한 곳의 땅에서 농사를 지어도 그 흙은 계속 비옥하기만 하다. 화학비료도 없이, 농약도 없이, 제초제도 없이 말이다. 그러니 동양3, 즉 우리의 전통농법이야말로 유기농업의 원조요, 바이블인 것이다.

 

그럼에도 30년 정도 된 최근의 한국 유기농법이 일본을 거쳐온 서양의 기술이었다는 것을 알면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서 몇천 년 동안 일궈온 지혜와 기술이 있음에도 말이다.

 

낯선 미국인이 100여 년 전에 이 지역에 들어와 감동과 놀라움에 금치 못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지만, 우리는 이 미국인이 부끄러워하는 동양인들에 대한 그들의 편견보다 어쩌면 더 강력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동양적인 가치와 기술들을 우리는 얼마나 우리 스스로 평가절하하고 미신적인 것들로 치부하고 말았는가? 그런 우리 자신과 100년 전의 이 책의 저자를 비교하면 참으로 낯을 들기도 민망한 일이다.

 

해방 후 똥으로 거름을 만들고 있던 어느 시골마을을 시찰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똥냄새에 코를 쥐어 잡으며 이 미개한 농법을 버리고 어서 우리도 서양처럼 깨끗한 화학비료를 써야 한다고 끌탕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부터 우리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이니 전 국민이 우리 것이라면 우리 스스로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고, 미국 것이라면 뭐든지 좋은 것으로 여겼던 참으로 부끄러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다. 사실 지금도 그런 모습들이 과거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근본으로 볼 때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으리라.

 

역자 : 곽민영

숙명여대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세계일보> 사회부·정치부와 <동아일보> 국제부·위크엔드팀을 거쳐 현재 경제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다.

 

책이 나오게 된 뒷 이야기

옮긴이인 <동아일보>의 곽민영 기자는 먼저 똥 살리기, 땅 살리기(녹색평론사)라는 책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 책의 저자와 전화 인터뷰를 하며 어떻게 똥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냐는 질문을 하자, 4천 년의 농부라는 바로 이 책을 소개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똥 농사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 곽 기자는 이 책을 찾아냈고 출판사와 뜻이 맞아 번역 작업에 곧 들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 농사책을 꾸준히 내온 출판사라 농사용어와 구체적인 농사 얘기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농사를 모르고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과 말이 참으로 많았다.

 

옮긴이는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할 즈음 첫애를 낳았고, 마지막 교정을 할 즈음 둘째를 낳았다. 옮긴이로서도 참으로 뜻이 깊은 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책 저자의 열정적인 답사와 노력은 더욱 감동적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지은이의 꼼꼼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직접 자를 들고 다니며 복잡하게 이어지는 사이짓기(간작) 작물들의 간격을 꼼꼼히 자로 재고 시장에서 파는 물건값도 일일이 적는 등 대단한 기록 정신을 발휘하며 답사를 다녔다. 미국의 농림부 관료라는 공무원 신분에서 저자의 말마따나 미개하다는 편견으로 보았을 이 동양 3국을 살펴보겠다고 한 것도 당시 상황으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자세다. 하여튼 오랜 고생 끝에 원고는 다 썼지만 끝내 지은이는 책을 보지 못했다. 유작이 된 것이다.

 

그토록 꼼꼼하게 관찰했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은 생생하게 지금 우리 상황에서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거름을 만들었으며, 밭은 어떻게 갈고 작물을 심었는지, 사이짓기를 할 때 작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주었는지, 다음 작물 심기 전에 기존 작물 사이에다 거름을 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매우 실용적인 워크북(Work book)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강점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엿볼 수 있는 200컷이 넘는 사진들과 농사 외에 그 시대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민속생활 자료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이 귀한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선을 보인 것은 여러 사람들의 우리 농업에 대한 애정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위생 제일주의, 서양 문물 만능주의라는 기치 아래, 몇천 년 동안 이어져온 우리 조상의 지혜를 송두리째 버리고 우리의 땅과 농업을 황폐화시키는 데 앞장서온 조국 근대화라는 화려한 이면에 숨어 있는 그 진실은 과연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귀한 사료적 가치로서의 이 책을 덮는 순간 느끼는 회한을 몇몇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사치로 치부될까 두렵다.

 

흙의 반란

인체는 곧 흙의 성분이다. 모든 생명은 흙이 키우는 식물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200여 년 간 각종 오염물질과 공해, 그리고 무분별한 서식지 파괴로 흙의 미생물이 소멸했거나 감소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성분을 식물로부터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기후위기의 닥쳐올 재앙을 체감하고 있다.

 

30억 년 전부터 칠흑 같은 공간에서 지구 생태계를 지켜온 박테리아(세균), 방선균(放線菌, 세균과 사상균의 중간 형태), 사상균(絲狀菌, 곰팡이) 등 그 수를 헤아릴 없는 미생물의 제국(帝國), 그 제국의 성원(成員)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생태계 파괴의 주범인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흙에 귀를 기울여 보면 들리는 저들의 아우성과 분노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까? 인류 대 멸종을 향해 시작된 흙의 반란이 우리 앞에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dust of ground)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7

 

100년 전, 화학비료에 반기를 들고 조선에 온 미국의 토양과학자

한 뼘은 됨직한 긴 인중(人中) 위로 무성하게 자란 콧수염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턱수염을 손끝으로 더듬던 미국의 토양과학자 플랭클린 히람 킹(1848~1911)은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의자에 대고 깊숙이 들어간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서 위스콘신 화이트워터 주립 사범학교를 다니던 시절과 1888년에서 1902년까지 14년간 위스콘신-메이슨 대학에서 농업물리학 교수를 하고, 1902~1904년까지 미 농무부 토양국 토양관리부에서 일했던 과거사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동안 물리학을 농업에 적용하는 연구와 교육을 통해 토양물리학의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토양과학자로서 볼 때 인공 화학비료는 흙을 망치는 원인이라고 그토록 강조했건만 세상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려준다는 화학비료에 미쳐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대로 가면 토양의 미생물 생태계의 교란이 오고, 농토는 황폐화되어 지속적인 농업자체가 불가능할 터였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사하고 인류의 생존조차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과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상은 의술이 발달하고 위생상태가 좋아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농지의 규모가 줄어 농작물 수확량은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화학자들은 한정된 토지에서 수확량을 많이 거둘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는데 그러다가 1840년 독일의 화학자인 리비히가 처음으로 해결의 문을 열었다.

 

리비히는 어떤 땅에서는 식물이 잘 자라는데 다른 땅에서 왜 그렇지 않은가?”하는 의문을 품고 흙을 연구한 결과, 질소, 인산, 칼륨이 충분히 녹아 있는 흙에서 식물이 잘 자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뼛가루에 황산을 넣어 수용성 인산(물에 녹는 인산)을 만들어 흙에 뿌려 보고 식물이 훨씬 크고 튼튼하게 자란다는 것을 보여줬다.

 

화학비료는 흙속 미생물의 독약

리비히의 연구를 바탕으로 화학비료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1843년에 로이스와 길버트가 최초의 화학비료인 과인산석회를 만들었고, 1900년대 초에는 질소비료와 칼륨비료가 개발돼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런 화학비료는 잘 숙성된 거름이나 퇴비에 비해 물에 잘 녹아서 흙에 뿌려 주기만 하면 단번에 식물 뿌리에 의해 흡수되었다. 하지만 토양 과학자였던 그의 생각은 반대였다. 당장은 수확량을 늘려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화학비료는 지속적으로 쓸 경우 흙속의 미생물을 죽여 생태계를 파괴하는 독극물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화학비료의 주성분은 황산암모늄, 염화암모늄, 황산칼륨, 염화칼륨 등으로 이런 성분의 비료를 뿌려주면 식물은 성장에 도움이 되는 암모니아나 칼륨 같은 영양물질을 뿌리로 흡수할 뿐, 황산이나 염소같이 산성을 띤 나머지 물질은 흙속에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은 산성화로 인해 마치 동맥경화에 걸린 듯이 단단해지고 수분이 줄어들어 작물이 자랄 수가 없이 황폐(荒廢)한다. 이로 인해 흙속의 이로운 미생물은 죽고 해로운 미생물만 생겨나니, 식물이 걸핏하면 병충해와 질병의 피해를 입게 되는데 화학비료나 잘못된 퇴비를 쓰면 반드시 농약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화학비료 반대론자였던 그가 미 농무부 토양국으로부터 해고를 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비료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수확량 증대를 가져와야 한다는 당시 미 농무부 토양 국장, Milton Whitnesy와는 다른 의견을 가졌으니까 말이다. 그는 화학비료의 성능을 앞세우는 그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화학비료가 아닌 자연농법에 대한 책을 써서, 흙 속의 미생물과의 상생을 통해서야 만이 건강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세상에 전파하고 싶었다. 하지만 화학비료를 통한 농업 생산량 증산이 대세인 미국이나 유럽에서 자신의 이론을 입증할 만한 농가(農家)를 찾기가 어려웠다.

 

조선의 똥오줌 농사에서 대안을 찾다

그는 무릎을 쳤다. “그래, 맞아. 동양 3, 한국, 중국, 일본으로 가자, 그 나라엔 아직 화학비료가 없질 않은가. 4천년이상 자연 퇴비로만 농사를 지어오고 있으니, 그들 농부들이야말로 내가 주장하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가서 농사짓는 법을 보고 오자

 

그가 책을 쓰다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해가 1909, 그의 나이 61살 때였다. 당시 교통수단이라야 선박과 기차 뿐이었고, 기차가 다니지 않는 농촌은 걸어가야 했고, 운이 좋으면 가마를 구해 타고 다녀야 하던 시절. 요즘 같이 편리한 세상이라도 여행보험을 70살까지만 받아주는 걸 감안한다면 그의 동양3국 농업 답사 여행은 반은 모험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중국은 1900년 의화단 운동 이후 열강의 침입이 한층 강화되고 있었고, 대중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군주제 운동으로 발전했다. 쑨원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가운데 반청(反淸)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합병 통치한다는 경술국치 협정이 맺어지기 한 해 전이었다.

 

그는 3국 정세에 신경 쓰지 않았다. 흙과 작물, 그리고 농법은 오히려 그들 3국이 근대화를 이루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국민이 먹고사는 식량의 문제였다. 농부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 혹은 통역자를 대동하고 농부들과 대화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1909, 시애틀 항을 떠난 그는 9개월간 배와 기차로 이동하고 때로는 걷거나 가마를 타고, 3국의 농촌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농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고, 그들의 농사짓는 방식을 기록했다.

 

그는 생애에 걸쳐 모두 7권의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이 바로 동양 3국을 여행하고 나서 쓴 Farmers of Forty Centuries, or Permanent Agriculture in China, Korea, and Japan-4천년 동안의 농부들, 또는, 중국, 조선, 그리고 일본에서의 지속가능한 농업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3년 뒤, 1911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내인 Carrie Baker King여사가 완성시켜 그가 죽은 해에 출간 됐다. 이 책은 오늘날 유기농업 혹은 지속가능한 농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양 3국의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자연농법에 대한 그의 소신에 찬 여행보고서다.

 

유기농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Northbourne()은 이 책이야말로 농업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전이라고 했다.

 

흙에서 온 것을 소중히 쓰고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는 순환농업

그는 동양3국 농부들로부터 자연에서 얻은 모든 것을 소중히 쓰고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고 있는 지혜를 확인했다고 했다. 그들 농부들이야말로 서양식 무기질비료나 화학물질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도 오로지 자연에 가까운 농사를 지어 5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것도 1인당 20에이커(1에이커는 4,047=1224, 20에이커는 24천 평이 넘는다)나 되는 넓은 땅을 가진 미국 농부들과 달리, 겨우 1인 당 2에이커(2천 평~) 안팎의 땅을 가지고 매년 농사를 지으면서도 먹고 살고, 비옥한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그들 농부들의 자연 순환농법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가 조선농부들의 똥오줌(인분과 가축 분) 농사를 으뜸의 지혜로 쳤다. 똥오줌을 발효시켜 원래 흙에서 온 것을 다시 흙속의 미생물에게 되돌려 주는 방식이야말로 흙을 살리면서 4천 년간 이어온 생명농업의 진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토양 과학자였다. 똥오줌을 그대로 버리면 크나큰 오염원이지만 퇴비 발효 과정을 통해 땅에 되돌려 보내면서 흙속의 미생물과 상생을 꾀하는 천혜의 자원으로 만드는 조선 농부들의 지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는 똥에는 천연 질소와 칼륨, 인이 풍부하게 담긴 소중한 것인데 미국과 유럽은 위생을 운운하며 자연에 내다버리는 것을 능사로 여긴다며 한탄했다.

 

그는 한 연구결과를 들어, “미국과 영국인들은 1년에 국민 100만 명이 질소 5794300~1200만 파운드, 칼륨 1881900~4151000파운드, 777200~3057600파운드를 바다와 강, 또는 호수, 지하수에 내다버릴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니 한심하지 않은가. 우리는 내다버리는 배설물 처리법을 우리 문명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썼다.

 

파리 떼가 없는 조선의 똥거름 퇴비기술

동양 3국의 농부들은 오늘날에도 집집마다, 농촌 마을마다, 심지어 177만 명이 반경 4마일(1마일=1.6km)안에 인구가 몰려 살고 있는 한커우와 우창, 한양(漢陽,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도 배설물을 열심히 모으고 있었다.

 

이렇게 땅으로 되돌려 주는 배설물은 성인 4억 명이 1년에 15만 톤의 인(), 376000톤의 칼륨, 1158000톤의 질소 등 총 18200만 톤이 넘을 것이라고 그는 추정했다.

 

더구나 똥오줌을 재활용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여행길 도중에 똥거름으로 인한 파리 떼를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한 그는 그 이유를 여행의 막바지에 가서야 알아차렸다면서, “모든 배설물은 쓰임새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항상 잘 관리감독하기 때문에 파리의 부화장소 자체를 파괴하는 효과를 내고 있었다. 나라가 앞장서서 배설물의 위생적인 처리 문제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위생관리가 철저하다는 미국에서는 지금도 똥오줌 농사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파리 떼로 골치를 썩이고 있다. 그렇다면 왜 동양3국의 똥오줌 농사에선 파리가 끓지 않았을까? 그가 본 것은 우리들이 흔히 아는 시골냄새-인분냄새가 나는 거름이 아니었던 것일까?

 

사실 제대로 숙성이 된 똥오줌 퇴비에선 향긋한 흙냄새가 난다. 인분 냄새가 나는 퇴비는 숙성이 잘못된 경우다. 그러니까 그가 조선에서 보았던 퇴비는 제대로 발효된 것이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퇴비 악취가 심하다고 알고 있지만 완전 분해가 되어 숙성을 제대로 시킨 고품질의 유기질 자연 비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생물에 의해 탄소가 적절히 분해되고, 발생하는 가스가 사라져, 퇴비 내의 탄소와 질소의 비율이 아주 잘 맞춰지고, 퇴비 자체의 유기물들이 잘 분해됐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똥오줌 퇴비에선 향긋한 흙냄새

그가 조선에서 본 것은 아마 풀을 베어다가 쌓아두고 인분을 뿌려 발효시키는 증분법(蒸糞法)이었던 것 같다. 그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18세기 말 다산 정약용과 비견되는 조선의 최고 지성으로 풍석 서유구(1764~1845)라는 분이 있다.

 

그 분이 쓴 조선 최대 백과사전이 임원경제지인데 이 책에 똥오줌 퇴비를 비롯한 흙 살리기의 퇴비 경제학이 꼼꼼하게 기술되어 있다. 만약 그가 이 책을 보았더라면 조선의 자연퇴비기술 수준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증분법은 띠풀로 뒷간을 만들어 처마는 낮게 하여 바람과 비를 막고 여기에 불을 때고 얻은 재, 키로 까불러서 얻은 껍질과 쭉정이, 볏짚이나 낙엽 등을 안에 넣고 띠풀 집을 얽어매고 덮개를 덮어서 똥의 기운으로 발효시킨다고 했다.

 

우리의 전통농업에서 중시한 증분법에 의한 퇴비에 파리가 끓지 않는 것은 퇴비가 발효되는 동안 발생하는 높은 온도(60~70)에 의해 벌레가 사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좋은 퇴비를 만들기가 어려워서 어설프게 숙성된 똥을 밭에 뿌릴 때가 많았다. 시골에 갔을 때 풍기는 악취를 시골의 냄새라고 하면서 웃어넘기지만 사실 미숙 퇴비를 썼기 때문이다. 베테랑 농부는 그런 퇴비를 만들지도 않고 쓰지도 않았다.

 

그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부엌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를 젖지 않도록 헛간에 모아두고 카리(K)성분의 비료로 사용하기도 하며, 부엌의 설거지물을 받아 두엄(가축분과 볏짚을 혼합한 퇴비) 위에 뿌려 발효를 촉진하고 있었다.

 

농부들이 화학비료를 선호하는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냄새가 덜하고, 퇴비를 만드는 노력이 적게 든다는 점일 것이다.

 

화학비료 투여 20여 년 만에 시작된 흙의 복수

하지만 그가 극찬해 마지않던 동양식 농법은 100년 만에 설 자리를 잃었다. 기계와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생산량과 수익 위주의 서구식 농법에 의해 완전히 밀려났다.

그런데 그 결과는 지금 어떤가? 농업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농토는 동맥경화를 앓는 환자처럼 흙이 딱딱해지는 경화(硬化)현상이 심각하고, 농약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흙속의 미생물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어 가는 중이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낭비적인 오물 생산자다. 인간은 그의 손길이 닿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그 자신까지도 황폐화시켰다. 그의 파괴의 빗자루는 세대를 거치면서 통제력을 잃었고, 모든 생명의 토대가 되는 땅의 비옥함을 앗아가 향후 수백 년 정도 밖에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그의 말처럼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세계의 농토가 몸살을 앓고 있다.

 

더구나 농산물의 수확량이 늘어났다지만 그로 인해 파괴된 흙의 생태계로 인해 인간이 식물에서 섭취해야 할 모든 영양소의 함유량이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36, 미국 상원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농토에 투여해 온지 20여 년 만에 미 국민의 99%가 심각한 미네랄 부족 상태라고 발표했다. 과일과 야채를 아무리 먹어도 필수적인 영양 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네랄을 공급하는 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관행농업으로 인한 지력(地力) 상실과 기후위기로 우리나라 지역특산 농산물의 한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지역 특산물과 역사 유적지 등을 브랜드로 만들어온 각 지역의 지역적 특징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다른 지역과 차별화 된 브랜드를 만들어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을까?

20세기 초 미국에 화학비료가 도입되자 흙의 생태계를 파괴한다면서 반기를 들었던 미국의 토양과학자 플랭클린 히람 킹(1848~1911)113년 전인 1909년 미국을 떠나 화학비료 없이 4천 년간 지속가능한 농사를 대대손손 지어온 조선의 자연생태농업을 답사하고 돌아갔다

 

미국은 그의 예언대로 흙속의 미네랄이 고갈되고 병충해가 들끓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농무부는 1929동양식물원정대를 파견해 뿌리에서 스스로 질소비료를 만드는 콩 종자를 조선에서 무려 3천점 이상을 수집해 돌아오게 함으로써 화학 비료와 농약이 필요 없는 새로운 작물 개발을 꿈꿨다.

 

농업의 황금기를 거친 뒤 미네랄이 고갈되고 병충해가 닥친 미국

조선 고종 26(1889). 고종은 식량난으로 식량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防穀令)을 선포했다. 하지만 고종 21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고 있었던 미국은 조선이 방곡령을 선포한 그해 워싱턴 DC에 농무부를 설립하고 식량 증산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20세기 초부터 본격화된 화학비료 농법에 힘입어 1910~1914년 동안 농업의 황금기(golden age)를 구가하며 세계 최대 농산물 생산국과 수출국으로써의 위상을 확립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로부터 10여 년 후 화학비료를 사용한 농경지에서 비료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병충해가 만연해 수백만 에이커의 농작물이 공격을 당했다. 농무부가 생긴 이래,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이상 현상으로 비료 과용에 의한 흙의 생태계가 교란되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강한 의심이 만연해 있었다.

그랬다. 식물은 흙 속 미생물과 공생하면서 병충해를 물리치는 방제 물질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화학비료가 사용되면서 식물의 성장이 빨라지고 생산성은 좋아졌지만 그럴수록 식물의 자생력이 떨어졌다. 비료의 독성물질이 흙 속에 잔류하면서 흙이 산성으로 바뀌고, 흙이 산성으로 바뀌면 미생물이 살 수 없게 돼 자생력을 키우지 못한 식물은 병충해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병충해는 이렇게 자생력이 떨어진 식물을 귀신처럼 찾아냈다.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할수록 흙의 상태가 나빠지고, 흙이 안 좋아지면 미생물이 죽고, 미생물이 소멸하면 식물은 자생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니 비료를 주면 줄수록 병충해가 기승을 떨어 농약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화학비료와 농약은 같이 가야만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화학비료의 사용량을 줄이는 대신 수많은 농약을 개발해 대처했다. 문제는 농약이 병충해만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 흙과 농작물, 심지어 인체까지 유독한 피해를 주었다.

 

1930년대와 40년대는 비소와 납 계열의 살충제도 광범하게 살포됐다. 이렇게 수백만 에이커의 농경지가 다량의 비료와 농약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으니, 자연히 흙 심(흙의 생산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파괴된 흙의 생태계를 살려라! 흙속의 질소고정 박테리아의 발견

그렇다면 어째서 화학비료와 농약은 흙의 생태계를, 다시 말해 미생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것일까? 비료의 3대 요소인 질소, 인산, 칼륨 중에서도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질소비료의 예를 들어보자.

 

중년 이후 운동으로 근육(筋肉)을 단련하려면 아미노산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미노산은 단백질을 만드는 기본 재료이고, 단백질은 근육의 주성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미노산을 합성하는 데는 많은 질소가 들어간다. 사람은 고기와 달걀, 두부 같은 음식을 통해 아미노산을 얻지만, 식물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상당수 미생물도 아미노산을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

 

식물이나 미생물이 아미노산을 만들려면 질소가 필요하다. 이런 질소는 공기 중에 80% 정도 함유되어 있는데, 모두 삼중결합으로-두 개의 질소 원자가 각각 3개의 전자를 내놓으면서 서로 단단하게 뭉쳐있다. 쉽게 말해서 둘 사이가 너무나 돈독해서 다른 사람과 교제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단짝이기 이기에 식물이나 미생물은 이들의 결속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래서 식물과 일부 미생물은 흙 속에 녹아 있는-이를 이온이라고 생각하자-질산이온(NO-), 혹은 암모늄 이온(NH+)과 같은 질소화합물에서 질소를 얻는다. 그렇다면 질소화합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그 답의 실마리는 1885, 네덜란드의 미생물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마르니투스 베이제린크(1851~1931)는 공기 중에 함유된 질소 기체(N)를 얻어 암모니아(NH)를 만드는 박테리아(세균), 이른바 질소고정 세균-앞으로는 질고세라 부르자’-이라는 녀석들을 흙에서 찾아낸 것이다. 엄지와 검지를 꽉 눌렀을 때 그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전자 현미경으로 겨우 볼 수 있는 크기의 녀석들은 아교로 들러붙는 나무 조각처럼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질소의 결합을 끊고, 수소 원자를 붙여 암모니아를 만든다.

 

수십억 마리 흙속 미생물이 소금 뿌린 미꾸라지처럼 죽는 이유

질고세가 만든 암모니아는 다른 세균들의 먹이가 된다. 녀석들은 우리가 밥을 먹고 일을 보듯이 암모니아를 먹고 질산염을 배설한다. 식물은 바로 이 물질을 통해 식물은 질소를 취해 아미노산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콩과 같은 일부 식물은 아예 질고세를 자기 몸 안으로 받아들여 키운다. 콩 뿌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뿌리혹을 봤는가? 뿌리혹이 바로 질고세가 묵는 사랑방이다. 식물은 자기 뿌리 주변으로 특정 화합물을 분비해서 질고세를 유혹한다.

 

식물은 질고세오케이사인을 보내면 뿌리 모양을 바꿔 막으로 둘러싸 방을 만들어 질고세가 들어와 살게 한다. ‘질고세들은 부지런히 질소를 고정해 암모니아를 만든다. 만약 나무가 보기에 농땡이를 부리는 질고세가 있다면 바로 방을 폐쇄해 버린다. 이처럼 식물과 흙 속의 세균이 상생하며 질소공장을 운영하는 걸 인위적으로 돕는 물질이 질소비료다.

 

질소비료는 1905년 프리츠 하버(1868~1940)의 인공 질소 고정법이 발명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유명한 화학회사 바스프(BASF)의 화학자 카를 보슈(1874~1940)와 함께 하버-보슈질소비료 생산법을 개발해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한 공로로 1918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질소비료는 황산암모늄(유안), 요소, 질산암모늄, 염화암모늄 석회질소 등의 형태를 띤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식물은 모든 비료의 성분을 모두 흡수하지 않고 질소만 흡수할 뿐이어서, 나머지 황산이나 염소 같은-산성 물질이 흙 속에 그대로 남아 흙을 산성으로 만들거나 염류(鹽類) 집적을 일으킨다. 특히 질산염은 물에 잘 녹기 때문에 빗물에 씻겨 지하수와 하천을 오염시킨다.

 

염류집적이라고 할 때 염()이라는 단어는 소금이라기 보다는 산성을 띠는 황산, 질산, 그리고 탄산 등과 같은 물질이 칼륨, 암모니아, 마그네슘, 칼슘 등과 같은 알칼리성 물질과 붙어 만들어지는 여러 화합물을 일컫는다. 종류가 많아서 뭉뚱그려 염류(鹽類)라고 하는데 흙에 축적되면 뿌리 생장이 저조하고, 뿌리가 시원치 않아 생육에 문제가 생긴다. 유용한 미생물이 살 수 없는 흙이기 때문이다.

 

흙 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 눈으로 관찰할 수 없으니,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소금으로 해감할 때 미꾸라지가 몸을 뒤틀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흙이 산성화되어 있거나 염류집적이 일어나면, 아마도 수십억 마리의 미생물들이 그처럼 죽어갈 것이다.

 

화학비료가 필요 없는 새로운 작물로 각광을 받은 조선의 콩

1927, 미국 농무부는 마침 1년간 중국 만주에서 두 번째로 식물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팔레몬 도르세(Palemon H. Dorsett, 1862~1943)로부터 화학비료의 피해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다 식물 스스로 질소비료를 만드는 콩이라는 작물을 들여와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있었다.

 

지금처럼 우리가 비료와 농약을 계속 쓴다면 수확량을 늘리기는 커녕 머지않아 흙은 망가져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오. 농경지가 망가지면 미국인의 생명과 건강을 지길 수

없는 건 당연하고, 지구의 대 멸종, 세상이 끝장날 거란 말이오.”

 

그의 말을 듣던 농무부의 한 관료가 너무 지나친 우려 아닌가요?”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런 말에 굽힐 그가 아니었다. “우려요? 우려는 무슨 우려, 죽느냐 사느냐에 관한 문제요. 지금 우리 농경지에서 병충해가 들끓고 있는 걸 보고도 모르겠소이까? 지금 당장 화학비료 사용량을 줄이고 동양에서처럼 자연퇴비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가 물을 한 잔 마시고 나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조사했듯이 동북아시아에서 자라는 콩을 들여와 심어야 합니다. 콩은 스스로 천연 질소비료를 만듭니다. 비료를 줄 필요도 없고,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콩에는 뿌리

혹박테리아가 있고, 그게 천연 질소 공장이라는 건 오래전에 밝혀졌잖소. 그런 동양의 콩 종자를 우리나라에 들여와서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곡류를 생산하고, 그런 콩 종자와 다른 작물을 교배해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도 병충해의 피해 없이 자랄 수 있는 새로운 작물을 만들어야 하는 게 우리가 살길이외다.”

 

그는 또 만주를 둘러보다 보니, 조선이 콩의 원산지인 것 같았다면서 일본의 지배 아래 있지만, 조선은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비료 없이 지속 가능한 농사를 지어오고 있소. 그들이 콩을 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조선을 포함한 동양 3국의 콩 종자를 수집할 원정대를 당장 꾸려야 합니다고 했다.

콩 종자를 확보하라! 동양농업탐험대의 결성

29살 때인 1891, 미 농무부 식물 병리과 직원으로 들어온 그는 농무부에서만 30년 넘게 잔뼈가 굵은 농업생산과 식물병리에 관한 전문가이자 관료였다. 그런 그는 60대였는데도 불구하고 만주를 두 번이나 답사했다. 이미 브라질, 파나마 등 북남미 지역 해외 식물 탐험 원정을 했을 정도였다. 그가 해외 식물 탐사 원정을 자주 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불행을 잊어보기 위한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35살 때인 1907, 부인과 장녀를 잃었다. 2년 뒤에 작은딸마저 떠나보내야 했다. 더구나 그가 2차 만주 식물 탐험을 끝내고 귀국한 1927, 1차 원정에 동행했던 외아들도 그해 10월 세상을 떠났으니, 그는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미쳐버릴 만큼 극도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을 듯했다.

 

1929218, 그는 농무부 사료 작물과에 근무하는 모르세(William Joseph (Bill) Morse, 1884~1959)와 동양농업탐험대(Oriental Agriculture Exploration Expedition)를 꾸렸다. 그리고 혼자 몸이 된 자신의 며느리 Ruth B Dorsett와 모르세의 부인 에드나(Edna), 그리고 그들 부부의 딸인 마가렛(Magaret)을 대원으로 삼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났다. 그들은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유해 1929226, 일본 요코하마를 향해 돛을 올려 같은 해 319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도쿄로 이동한 그들은 그곳에 원정대 본부를 차리고, 통역과 조수로 일본인 N. Suyetake을 합류시켰다.

 

원정대의 콩 종자 수집 활동은 4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1021일에 조선으로 왔다. 조선에서 그들은 저명한 러시아의 식물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Niklai Ivanovich)를 만나, 그와 함께 수원농림시험장을 방문하는 동안 수백 종의 콩 종자를 얻었다.

 

수원농림시험장 등 조선에서만 수천종의 콩을 얻은 미국의 동양농업탐험대

그들은 같은 해 1211일 도쿄로 돌아와 이듬해 19303월 말까지 원정대의 주 업무를 일본의 콩(대두) 산업 연구와 조사에 집중하는 가운데 3월에 오늘날 대련항(大連港, 러시아어로 달니이Дальний, 중국어로 뤼다旅大, 일본어로 료준旅順)에 도착해 만주 지역의 콩 산업을 답사하고 종자를 수집하려 했다. (대련항은 당시 만주의 콩이 모이는 집산지로 콩기름을 짜서 전 세계로 수출하는 항구였다. 필자 주)

 

그러나 도르세는 거기에서 지병이 도져 양쪽 폐렴 진단을 받고 탐사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미 농무부는 그에게 베이징으로 가서 의료 치료를 받으라는 명령서를 보냈다. 그가 의료 치료를 위해 베이징으로 떠나자, 모르세는 혼자 1930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만주와 한국을 다니면서 콩 산업을 조사하고 특히 조선에서 수천 종의 콩 종자를 수집했다. 그가 일본, 한국, 만주 등지에서 보낸 기간은 총 2년여. 조선에서 보낸 기간은 이 중 겨우 2달이 채 안 된다. 그런데도 조선에서 많은 콩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를 가도 열리고 있는 장터가 있어서 콩을 수집하기가 수월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모르세는 그 기간에 독일의 콩 전문가이며 종자 수집가인 Lene Muller를 만났고, 콩 연구로 유명한 중국 하얼빈의 자연사 박물관 소속의 B.W. Skvortzow도 알게 됐다. 한편 베이징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도르세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persimmon)을 보존하는 실험을 했다. (그가 어떤 실험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곶감이나 감식초 만드는 실험이 아니었을까? 필자 주)

 

그는 19314월 그의 며느리와 함께 중국 베이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보다 앞서 모르세는 19301218일 일본으로 돌아와 탐험대의 행정 일을 마저 처리하고 1931217일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이들은 대략 9천 종의 신규 식물자료를 발굴해 워싱턴 DC의 미국 농무부, 식물 산업국(Bureau of Plant Industry)으로 보냈고 이들이 보낸 자료는 외국식물도입부서(Division of Foreign Plant Introduction)가 발간한 재고자산 목록에 기재돼 있다.

 

병충해에 강했던 조선의 콩, 신품종 개발의 원조가 되다

전체 식물자료 가운데 원정대가 수집한 콩이 총 4471점으로 조선의 것이 3379(76%) 일본이 579(13%), 만주 513(11%)이었다. 이들은 조선에서 모은 자료와 사진만으로도 훌륭한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라고 놀라워했다. 실제로 이런 종자로부터 신규 종자가 개발되었고, 품종 개량이 시도되었다. 또한, 이들이 수집한 콩 가운데는 원산지에서 멸종된, 혹은 멸종되어 가는 것도 있어서 멸종된 종자나 멸종 위기종의 유전자를 보존하는 역할도 했다.

 

탐험대가 식물표본집에 압착해 보낸 종()들도 당시의 상태 그대로 국립 식물표본실에 저장되어 있다. 이들은 곤충, 국내 출판물, 콩 제품, 대나무 제품들, 동영상 필름, 그리고 모으거나 찍은 3천여 장의 사진도 가지고 왔는데 아쉽게도 사진의 절반 이상은 어디서 모았는지, 어디서 찍었는지가 불분명하다.

원정대가 수집한 콩은 미국의 줄기세포로 분류되어, 오늘날 국립 식물 생식세포 시스템(National Plant Germplasm System)에 의해 범세계적으로 연구가 될 수 있도록 관리하고 있다. 특히 원정대가 수집한 품종을 토대로 특성이 있는 품종을 개량해서 현재 전 세계의 식품원료로 공급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콩은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콩 종자이다-필자 주)

 

특히 원정대가 가져온 콩은 수많은 식물 병해충에 저항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콩의 특성을 이용해 다른 식물과 교배하여 비료와 농약이 필요 없는 미래 작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도르세의 주장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한편 모르세는 원정 이후 미국 대두 협회 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는 등 미국에서 콩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미 상원, ‘흙의 미네랄 결핍선언과 흙의 보전에 관한 법을 제정

이들이 콩 종자를 가지고 와서 비료와 농약 농사를 비판했던 탓일까? 1936, 미국 의회는 흙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면서, 처음으로 토양보전과 국내할당법(Soil Conservation and Domestic Allotment Act)’을 제정했다. 아울러 같은 해 미 상원은 과도한 비료의 사용으로 우리의 농토에는 미네랄이 없다면서 그런 흙에서 자란 과일, 채소, 곡식 등은 아무리 먹어도 몸에 도움이 안 된다는 흙의 미네랄 결핍 선언을 했다.

 

그러니까 비료와 농약을 쓰기 전에 사과 하나만 먹어도 인체에 필요한 충분한 미네랄을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이나 당시에도) 15개 이상을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식물의 미네랄 결핍으로 미국인의 99%가 미네랄 부족으로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고 미 상원은 밝혔다.

 

미네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110가지의 원소 중 인체의 96.5 %를 차지하는 산소(65%), 탄소(18%), 수소(10%), 질소(3.5%)를 제외한 나머지 3.5%(칼슘1.5%, 1%, 기타1%)의 모든 원소를 말한다. 주로 우리 몸의 뼈·치아 구성, 혈액 속 산소 운반, 소화·삼투압 조절 등 몸속에서 다양한 일에 관여하는데 체내에서 합성이 안 돼 식물()로부터 섭취해야 한다.

 

195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1994)은 모든 질병이 한두 가지 미네랄 결핍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칼슘은 수축기 혈압을 낮추고, 마그네슘은 고혈압 치료에 역할을 하며, 칼륨은 혈압에 영향을 주는 등 미네랄이 부족하면 수백 가지의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현대 의학은 밝히고 있다.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다고? 그럼 흙부터 살려야 한다

오늘날 수를 셀 수 없이 만나는 각종 미네랄 제품이나 건강보조식품은 아마도 지구촌의 흙 속에 미네랄이 고갈되어 있고 흙 속 미생물의 생태계가 파괴되어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일까? 필자가 요즘 먹는 과일, 채소, 그리고 곡식의 맛이 예전과 다르다. 싱겁고 밋밋하다. 최근 먹었던 사과가 그랬고, 상추도 풀을 먹는 것처럼 쌉쌀한 맛이 없었다. 그렇지 않은 농산물도 많겠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까지 동양 3국을 돌아보고 예견했던 흙 속 미생물들의 반란은 지금도 어느 나라, 어느 농경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흙에 귀를 기울여 보면, 그들의 비명과 아우성이 쟁쟁하게 들려온다. 지금까지 인류가 알아낸 흙 속 미생물은 전체의 0.1%에 불과하다. 페니실린, 폐렴 치료제에 이어 최근 흙 속 미생물을 이용해 암세포만 공격해 죽이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처럼 인류를 질병에서 구할 실마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흙 속 미생물에 있지만, 99.9%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

 

 

흙의 반란이 시작됐다

지구의 탄소 불균형이 기후위기의 원인

이산화탄소, 메테인(methane, 독일어 메탄의 영어 발음), 오존과 이산화질소 등으로 구성된 온실 가스는 지난 수백년 동안 흙과 물에서 자연적인 과정을 거치며 대기로 내뿜어졌다가 다시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원천지로 돌아오는 순환을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방출과 흡수가 균형을 유지할 정도의 온실 가스가 원천지로 돌아가는 한,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변화 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대기 중에는 일정한 수준의 온실 가스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태양 복사열이 우주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서 지구의 온도를 높일 수 있고, 그로인해 지구는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씨를 만들어낼 힘을 얻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지구는 1년 내내 얼어붙어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대기 중 가스가 얼마나 있느냐를 표시하는 데는 ppm이라는 단위를 사용합니다. ppm이란 백만분의 1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물체나 물을 1이라고 했을 때, 이 속에 백만분의 1만큼의 오염물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기후위기 이전에는 질소, 산소, 아르곤 등 대기의 주요 성분의 총량은 999ppm, 이산화탄소는 280ppm이하 (0.03%이하)로 유지됐습니다.

 

하지만 만 3~4천 년 전 농경이 시작됐을 때 인류는 벌채, 개간, 그리고 흙을 갈아엎으면서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켰습니다.

 

실제로 이산화탄소와 메탄이 급격하게 상승했던 때가 수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농경 산업이 시작되고부터였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200여 년 전부터 화석연료 사용과 급격한 산업화와 농업의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자 온실가스 배출량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원천지로 되돌아가는 온실가스의 양보다 새로 발생하는 가스의 양이 많아지며 대기중에 이산화탄소가 400ppm 수준을 넘어서게 됐습니다.

 

과학자들은 기후위기로 인한 6차 인류대멸종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의 400ppm350ppm으로 낮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산업화 이전 수준인 280ppm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았지만 난상 토론 끝에 350ppm으로 결정됐습니다.

 

농업전문가가 빠진 IPCC 총회

이산화탄소는 대부분 산소로 이루어져 있고 4분의 1만이 탄소입니다. 정확히 27.3%입니다. 그래서 이산화탄소 1ppm속에는 2.125Gt(기가 톤)의 탄소가 들어있습니다.

 

기가 톤이라 하니 머리가 띵 하시지요. 뭐 어려운 건 아닙니다. 1기가 톤은 10억 톤이니까 이산화탄소 1ppm속에는 약 21억 톤이 넘는 탄소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감이 오지 않지요? 21억 톤은 대략 고체 흑연 1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해하기 쉽게 높이 1km, 가로 1km, 세로 1km의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을 떠올려 봅시다. 떠올랐나요? 제가 묻겠습니다.

 

이산화탄소 1ppm가 운데 탄소의 무게는 얼마라고요? , 그렇습니다. 아까 제가 이산화탄소 400ppm350ppm으로 줄여야 한다고 했지요?

 

그럼 얼마를 줄여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50ppm을 뚝 떼어다가, 그러니까 높이 50km, 가로 50km, 세로 50km의 거대한 빌딩과 맞먹는 탄소를 포집해 어딘가에 저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최근 스위스에서 열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58차 총회에는 세계 195개국에서 650명의 대표단이 참여했습니다. 대단한 규모지요?

 

우리나라에서는 IPCC 주 관 부처인 기상청 외에 외교부, 환경부, 국립기상과학원, 한국 환경연구원,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에너지 경제연구원, 국립수산과학원, 극지연구소, 한국 환경공단, APEC 기후센터 등이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농업 관련기관이나 관계자는 없었습니다. 저는 한숨이 나왔습니다. 왜냐고요?

 

UN이 있다고 국제간 전쟁을 막을 수 없듯이 전문가들이 모여 탄소배출 대책을 논의한다고 해서 기온상승 문제가 해결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농업의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왜 그런지 설명하겠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일 당장 지구의 모든 온실가스 배출을 중단시켰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탄소중립이 이뤄진 것인가요? 유감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직 대기 중에 그동안 우리가 배출한 400ppm이상의 이산화탄소가 남아있기 때문이죠. 언뜻 이해가 안 되신다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잉여탄소 50ppm에 지구의 운명이 달렸다

 

밤톨만한 혹이 몸에 솟았고 이 혹은 점점 주먹크기로 커졌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제거수술을 했는데 원래의 밤톨만한 혹을 남겨두고 주먹만큼만 도려내고 냈다면 혹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탄소중립도 그런 이치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탄소를 제거하고 나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400ppm350ppm으로 만들기 위해 당장 50ppm의 잉여탄소를 저장할 어딘가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곳이 어딜까요?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물-바다는 어떨까요? 사실 바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38조 톤의 어마어마한 탄소를 저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다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ph농도가 계속 떨어져 해초와 플랑크톤을 포함해 해양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잉여탄소 저장을 운운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흙은 어떨까요? 흙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흙은 탄소가 발생한 원천지이면서 탄소를 필요로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농지개간과 경작(耕作)으로 전 세계 토양에서 136기가톤(Gt)의 탄소가 배출됐다고 합니다. 감이 잘 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중요한 것은 그 수치가 아니라, 토양이 함유할 수 있는 탄소의 양입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의 흙 표면 30cm안에 대략 700Gt(기가톤)의 탄소가 저장되어 있고, 흙 표면을 90cm 이상으 로 잡으면 1500Gt(기가 톤)이 저장돼 있었다고 합니다.

 

토양, 그러니까 흙이 어마어마한 탄소 보유능력을 가졌다면 그동안 배출한 탄소도 얼마든지 다시 포집해 저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리해야 할 대기 중의 잉여탄소 50ppm 정도는 얼마든지 저장하고도 남는다는 말입니다.

비료와 농약의 관행농업에서 자연 순환적 유기농업으로 바꿔야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 로 50ppm의 잉여탄소를 흙 속에 저장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그 방식은 많은 비용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방식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의 협조가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 앞에 선 것도 바로 농부가, 아니 농업이 세상을 바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살충제, 인공적인 비료와 질이 떨어지는 퇴비, 무거운 농기계가 토양을 훼손해 많은 온실가스를 방출시키며 집약적인 농사를 계속하다 보면 부식(腐植, 유기물이 상당기간 분해된 것), 점토(粘土)의 구조물을 무너뜨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유기물을 노출시켜 토양 미생물이 먹고 나서 생기는 이산화탄소 가스 배출을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과 같은 관행농업은 땅 심을 떨어뜨려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 나가듯이 흙속에 있어야 할 탄소를 대기로 방출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관행 농업과 토지난개발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체의 31%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말입니다. 그래서 배출량을 줄이고 제가 앞서 말씀드린 50ppm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흙에 저장하려면 화학비료 이전의 전통적 유기농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강한 토양일수록 이산화탄소 저장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제가 뭐라고 했지요? . 그렇습니다. 흙이 살아야 지구가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행농법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흙의 영양을 고갈시키지 않고 어떻게 반만년 동안 기름진 땅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을까요? 이산화탄소를 흙에 저장하려면 그런 우리 조상들의 농법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유기농업의 원조는 한반도

그럼 120년 전 1900년대 초로 돌아가 보십시다. 한 뼘은 됨직한 긴 인중(人中) 위로 무성하게 자란 콧수염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턱수염을 가진 미국의 토양과학자 프랭클린 히람 킹(18 4 8~1911)이란 분입니다.

 

그는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서 위스콘신 화이트워터 주립 사범학교를 다녔고, 1888년에서 1902년까지 14년간 위스콘신-메이슨 대학에서 농업물리학 교수를 역임하고, 1902~1904년까지 미 농무부 토양국 토양관리부로 자리를 옮겨 일하며 토양물리학의 아버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당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화학비료 농업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토양의 미생물 생태계를 교란하고, 흙을 황폐화시켜 지속적인 농업을 불가능하게 한다면서 자신의 상관인 Milton Whitnesy 농무부 토양 국장에 맞선것이지요.

 

사실 그가 태어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은 의술이 발달하고 위생상태가 좋아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으나, 농작물 수확량이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화학자들은 수확량을 늘릴 수 있는 화학비료를 개발해 널리 보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해고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농가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나이 61살 때 그러니까 1909년 동양 3, 즉 한 국, 중 국, 일본으 로 가서 비료 농업의 부당성을 입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교통수단이라야 선박과 기차뿐이었고, 농촌지역은 걸어서 다녀야 했는데 그는 모험에 가까운 답사여행을 위해 그해 시애틀 항을 출발했습니다. 그는 9개월간 세 나라의 많은 농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고, 농사짓는 방식을 기록하면서, “동양 세 나라 농부들은 이 자연에서 얻은 모든 것을 소중히 쓰고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는 자연 순환농법으로 5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먹여 살리고 있다며 감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똥오줌(인분과 가축 분)농사를 짓는 조선 농부에 그는 가장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흙에서 나온 것을 다시 흙으로 되돌려 주는 조선 농부들의 순환 농법에 주 목했던 것입니다.

똥오줌을 재활용하고 있지만 파리떼를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한 그는 똥에는 천연 질소와 칼륨, 인이 풍부하게 담긴 소중한 것인데, 미국과 유럽은 위생을 운운하며 자연에 내다버리는 것을 능사로 여긴다며 조선을 본받지 못하는 조국을 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의 농부가 4천 년간 대대손손 기름진 농토를 유지하는 비결이 거기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 답사여행을 쓴 것이Farmers of Forty Centuries, or Permanent Agriculture in China, Korea, and Japan-4천년 동안의 농부들, 또는, 중국, 조선, 그리고 일본에서의 지속가능한 농업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그가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3년 뒤인 1911년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Carrie Baker King 여사가 완성했고, 이듬해 책으로 출간 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농업정치가, 풍석 서유구를 아시나요?

유기농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Northbourne()은 이 책을 보고, 농업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유기농업의 고전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의 농법을 유기농업의 원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히람 킹 박사였지만 우리나라에 다산 정약용과 비견(比肩)되는 농업의 이론과 실무를 갖춘 조선의 최고 농정가(農政家)이자 저술가인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란 출중한 인물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분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아마 모르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그의 영정(影幀)은 경기도 남양주 다산 정약용 생가 옆에 있는 실학박물관 2층 구석 진열장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가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얼굴이 길쭉하고 콧잔등과 미간, 그리고 이마에 마마자국 같은 점이 보이고, 전체적인 인상은 제가 느끼기에 깐깐해 보였습니다. 그는 1806, 작은아버지 서형수가 김달순 옥사에 연루돼 유배를 가게 되자 자진해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경기도 파주 장단으로 내려와 아들과 함께 10여년 간 농사를 짓고 임진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임원경제지라는 거대한 책을 썼습니다. 아들은 저술의 피로가 원인이 돼 도중에 죽었습니다. 당시 아들을 잃은 그는 저술원고를 집어 던지면서 자기가 아들을 죽게 했다며 몸부림 쳤습니다.

 

그러던 중 1823년 작은아버지 서형수가 사망하고 죄인의 명단에서 제명되자 다시 복직해 전라관찰사 등 관직을 그만둘 때까지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기록함으로써 모든 관료들의 모범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가 저술한 임원경제지제대로 된 똥오줌 퇴비에선 향긋한 흙냄새가 나는 조선의 자연퇴비제조법을 상세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증분법(蒸糞法)도 그 중 하나입니다. 증분법은 띠 풀로 뒷간을 만들어 처마는 낮게 해 바람과 비를 막고 여기에 불을 때고 얻은 재, 키로 까불러서 얻은 껍질과 쭉정이, 볏짚이나 낙엽 등을 안에 넣고 띠풀 집을 얽어매고 덮개를 덮어서 똥의 기운으로 발효시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파리가 끓지 않는 것은 퇴비가 발효되는 동안 높은 온도(60~70)에 의해 벌레가 사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악취를 시골의 냄새라고 하면서 웃어넘기지만 그것은 미숙 퇴비를 썼기 때문입니다. 베테랑 농부라면 그런 퇴비를 만들지도 않고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다간 오히려 흙을 죽이니까요.

 

미국 동양농업탐험대가 수집한 조선의 콩 종자

이번에는 미국으 로 건너가 보겠습니다. 1920~1930년대 미국은 세계 최고의 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농업은 히람 킹 박사가 예언한대로 화학비료의 심각한 부작용을 앓고 있었습니다.

 

비료로 인해 작물의 자생력이 떨어져 병충해의 공격에 무방비였고,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던 것입니다.

 

미국 농무부는 19292, 중국과 만주에서 식물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팔레몬 도르세(Palemon H. Dorsett, 1862~1943)에게 농무부 사료 작물과에 근무하는 모르세(William Joseph (Bill) Morse, 1884~1959)와 함께 비료와 농약 없이 자라는 동양의 콩 종자를 수집하도록 동양농업탐험대(Oriental Agriculture Exploration Expedition)를 꾸리도록 했습니다.

 

탐험대장격인 도르세는 189129살의 나이로 미 농무부 식물 병리과 직원으로 들어와 30년 넘게 잔뼈가 굵은 농업 생산과 식물병리에 관한 전문가이자 관료였습니다. 그는 당시 60대였는데도 불구하고 만주를 두 번이나 답사했으며, 브라질, 파나마 등 북 남미 지역 해외 식물 탐험 원정을 했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해외원정은 아마도 개인적인 불행을 잊어보기 위한 측면도 있었을 겁니다. 35살 때인 1907년 부인과 장녀를 잃었고 2년 뒤에 작은딸마저 떠나보내야 했으며 그가 2차 만주 식물 탐험을 끝내고 귀국한 1927년에는 1차 원정에 동행했던 외아들마저 세상을 떠나보내야 했으니까요.

 

누군들 그런 상황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서는 미쳐버리지 않을까요?

그는 1929218, 혼자 몸이 된 자신의 며느리 Ruth B Dorsett와 모르세의 부인 에드나(Edna), 그리고 그들 부부의 딸인 마가렛(Magaret)을 대원으로 삼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났습니다.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유해 그들은 1929319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습니다. 도쿄로 이동한 그들은 그곳에 원정대 본부를 차리고 4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에서부터 콩 종자 수집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조선으로는 1021일에 왔습니다.

그들은 당시 조선에서 저명한 러시아의 식물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Niklai Ivanovich)를 만나 함께 수원농림시험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수백 종의 콩 종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원정 도중 도르세가 지병인 폐렴을 치료받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자 혼자 남게 된 모르세는 1930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만주와 한국을 다니면서 콩 산업을 조사했고, 특히 이 기간에 조선에서만 수천 종의 콩 종자를 수집했습니다. 그가 일본, 한국, 만주 등지에서 보낸 기간은 총 2년여. 조선에서 보낸 기간은 겨우 2달이 채 안 되는데도 조선에서 그렇게 많은 콩 종자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를 가도 장이 열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모르세는 그때 콩 전문가이자 종자 수집가인 독일의 Lene Muller를 만났으며, 콩 연구로 유명한 중국 하얼빈의 자연사 박물관 소속의 B.W. Skvortzow도 알게 됐습니다.

 

그들 원정대가 수집한 콩은 총 4471, 이 중 조선의 콩 종자가 3379(76%) 일본이 579(13%), 만주 513(11%)이었습니다. 콩의 종주국 조선, 병충해에 강한 종자가 많아 그는 조선에서 모은 자료와 사진만으로도 훌륭한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라고 놀라워했습니다. 이들은 대략 9천 종의 신규 식물자료를 발굴했는데 이를 워싱턴 DC의 미국 농무부, 식물 산업국(Bureau of Plant Industry)으로 보냈으며 이들이 보낸 자료는 외국식물도입부(Division of Foreign Plant Introduction)가 발간한 재고 자산 목록에 기재돼 있습니다

 

탐험대가 식물 표본으로 압착해 보낸 종자(鍾子)도 당시의 상태 그대로 국립 식물표본실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곤충, 국내 출판물, 콩 제품, 대나무 제품들, 동영상 필름, 그리고 모으거나 찍은 3천여 장의 사진도 가지고 왔는데 아쉽게도 사진의 절반 이상은 어디서 모았는지, 어디서 찍었는지가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원정대가 수집한 콩은 미국의 줄기세포로 분류되어, 현재 국립 식물 생식세포 시스템(National Plant Germplasm System)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정대가 수집한 우리나라 콩은 수많은 식물 병해충에 저항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콩의 특성을 이용해 다른 식물과 교배하여 비료와 농약이 필요 없는 미래작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모르세는 그 덕분에 미국 대두 협회 회장을 3번이나 역임했고, 미국에서 콩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활동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콩의 종주국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하여튼 비료 농업으로 세계 최고의 농업생산성을 구가 했던 미국이었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1936년 미국 의회는 더 이상 흙을 망가뜨리는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면서 토양보전과 국내할당법(Soil Conservation and Domestic Allotment Act)’을 제정하기에 이르렀으니까요.

특히 같은 해 미 상원은 과도한 비료의 사용으로 미국농토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에 미네랄이 함유돼 있지 않고, 이로 인해 미국인의 99%가 미네랄 부족으로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미네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110가지의 원소 중 인체의 96.5%를 차지하 는 산소(65%), 탄소(18%), 수소(10%), 질소(3.5%)를 제외한 나머지 3.5%(칼슘1.5%, 1%, 기타1%)의 모든 원소를 말합니다. 주로 우리 몸의 뼈·치아 구성, 혈액 속 산소 운반, 소화·삼투압 조절 등 몸속에서 다양한 일에 관여하는데 체내에서 합성이 안 돼 식물로부터 섭취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뭐라고 했지요? 반드시 살아있는 식물로부터 미네랄을 섭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연이 그러하니 조제된 건강보조식품을 드실 때는 신중하게 판단하시라는 겁니다. 아무리 먹어도 몸에서 흡수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195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1994)은 모든 질병이 한두 가지 미네랄 결핍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테면, 칼슘은 수축기 혈압을 낮추고, 마그네슘은 고혈압 치료에 역할을 하며, 칼륨은 혈압에 영향을 주는 등 미네랄이 부족하면 수백 가지의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현대 의학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범벅이 된 흙에는 미네랄이 고갈됐다고 하니, 그런 흙에서 자란 식물은 아무리 먹어도 소용이 없겠네요.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지속가능한 경영은 우리나라 농부의 아이디어

최근 30억 달러(42000억 원) 규모의 회사 지분 전액을 비영리재단과 환경단체에 기부한 친환경 기업 미국의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를 아시는지요?

 

이 브랜드 창업자인 이본 쉬나드(Yvon Chouinard, 1938~)는 등반가이자 환경운 동가로도 유명하지요. 그는 1973년 친환경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를 창업한 후 2021년 기준 매출 15억 달러(19,567억 원)의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시켰습니다.

 

매출의 1%를 기부하는 이른바 지구세(Earth Tax)’를 실천하며 1996년부터 모든 면제품을 유기농 목화로 만드는 친환경 의류 기업으로 유명합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그런 그가 그런 아이디어를 우리나라 농민으로부터 얻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징집 명령을 받고 1962년 미사일 시스템 정비공으로 한국에 파병됐다. 그러나 나는 장교에게 경례하는 것도 잊고 단정치 못한 모습에 단식 투쟁을 하거나 약간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하는 등 계속 말썽을 부렸다. 그러자 군은 나를 민간인과 일하는 곳으로 보냈다. 거기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매일 발전기를 돌리는 일이었다.

 

나는 한 친구에게 돈을 주고 그 일을 맡기고 작업장을 몰래 빠져나와 한국인 등반가들과 함께 서울 북한산의 암벽등반을 했다. 그때 암벽 밑으로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대대손손 똑같은 농토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결이 뭘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지속가능한 경영은 그때 한국의 농민에게서 배운 것인지 모른다.”

저도 잘 몰랐습니다. 아니 잊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유기농업의 원조라는 것을 말이죠. 그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잉여탄소를 포집해서 토양에 저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널리스트이니까, 저장 방법은 이 분야 전문가 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지구를 살리는 생태경제의 등대, 구례의 흙 살리기 운동

다만 저는 지금까지 소개해 드린 대로, 우리나라 조상들의 자연 순환적 유기농법을 오늘 에 되살려보자는 것입니다. 120년 전 그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현대의 발달된 과학과 농업기술을 융합합시다. 그러면 흙을 살려 탄소를 저장하면서도 고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젊은이들이 몰려들게 할 수 있는 K-하이브리드 농업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들녘에 나가면 메뚜기를 잡고, 개구리를 잡아 제가 키우는 닭에도 먹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논에 그렇게 많던 미꾸라지, 뱀이며 논에서 울던 뜸부기 소리도 사라졌고 강남 갔던 제비의 90%이상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30대 때 북한산에 올라가서 오이를 먹으면 그 향이 퍼져나가 사람들이 모두 저를 쳐다봤습니다만, 요즘 오이는 구례산을 제외하고 오이의 향이 사라졌습니다. 상추는 풀을 씹는 듯하고, 사과나 배는 옛날 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지금 먹는 것이 거의 다 그렇습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병원과 의사는 자꾸 늘어나는데 환자는 줄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요? 저는 이 모든것의 원인은 흙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M이코니미뉴스 윤영무 본부장

어쩌면 지금 필요한 옛 농사 이야기 전희식 저자()들녘 · 201707

사람 땅 작물 모두 돌보는 전통 농사살림

 

저자 전희식은 글 쓰는 농부. 생태영성운동가. 1958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다. 도시에 살다가 1994년부터 전라북도 완주, 2006년부터 장수에서 농사짓고 산다. 농민단체와 생명평화단체, 채식과 명상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치매 어머니를 모신 이야기를 담은 똥꽃, 엄마하고 나하고를 비롯하여 농사생활의 생태적 각성과 우리 농업문제에 대한 통찰을 담은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 시골집 고쳐 살기, 삶을 일깨우는 시골살이, 아름다운 후퇴, 소농은 혁명이다를 썼다. 그리고 어린이 책 하늘이의 시골일기도 있다.

 

목차

저자의 말 005

추천하는 말 009

 

1부 겨울철

하나, 짧아지는 동짓날 밤 020

, 지붕개량 잔치 030

, 문풍지 우는 소리는 찾아온 님의 노크 038

, 사람 밥값이 개 밥값만 못한 세상 046

다섯, 소 며칠 굶어도 머슴은 팽팽 놀던 그날 054

 

2부 봄철

하나, 머슴은 초당방, 주인은 사랑방에서 쑥덕쑥덕 064

, 눈이 희끗거리는 3, 농사의 시작 074

, 태교처럼 중요한 씨앗 관리 082

, 물못자리 없이도 벼농사를 짓다니! 092

다섯, 일렁이던 보리밭이 되살아날까 100

여섯, 초목이 무성하니 벌레들도 살판났구나 108

 

3부 여름철

하나, 사람을 위한 노동음료 118

, 양기가 가장 센 때에 모를 심는다 124

, 논 거름 장만하고 밭에는 북주기 132

, 삼 농사 짓고 한여름에 삼굿하기 140

다섯, 들밥 먹던 시절 생각나네 148

여섯, 배추는 입추, 무는 처서 156

일곱, 여름철 농사재난, 양상이 달라졌다 164

 

4부 가을철

하나, 파종과 수확을 동시에9월의 연장들 174

, 천둥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병 182

, 가실에 보자 190

, 배고픈 농민 먹여 살리는 보리농사 198

다섯, 겨울 들머리에서 김장하고 세사 지내고 206

여섯, 고구마밥 할까 감자밥 할까 216

 

도움을 준 책 223

 

출판사 서평

자연을 소진하는 탓에 내일이 불안한 시대

우리에겐 옛 농부들의 슬기가 필요하다!

 

수확은 늘었는데 왜 농부는 여전히 가난할까.

농약을 뿌리는데 왜 해충 피해는 더 심해지는 걸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왜 사람은 약해지는 걸까.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농사의 양상이 달라졌다. 농사법의 발달하면서 소출이 늘어 풍요로워 보이지만, 어쩐지 병들고 공허한 시대, 문제는 사람만 잘 사는 세상은 없다는 데 있다. 자연이 함께 건강해야 터전과 미래가 존재하는 법이다. 글 쓰는 농부이자 생태영성운동가인 저자 전희식은 이 책에 전통 농사법과 농촌 문화, 옛 농부들의 살림 이야기를 계절별로 구성해 담았다. 누군가에겐 향수를 느끼며 곱씹을 만한 추억을, 누군가에겐 현재 고민하고 있는 농사 문제를 해결할 만한 방도를 떠오르게 한다.

 

지금이야말로 옛 농부들의 지혜를 구해야 할 때

우리 시대에 농사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금의 농사는 계절과 무관하게 24시간 365일 쉼 없이 돌아가는 고도화된 공정에 지나지 않는다. 농사의 목적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농업에 기계와 화학이 도입되면서 덩달아 농촌 문화와 생활 방식 또한 180도 변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옛 농부들에게 농사란 돈벌이가 아닌 자급자족하는 삶을 꾸리고 만남과 교류를 형성하는 장이었다.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삶,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꾀해야만 했다.

저자는 농업이 이렇게까지 피폐해지고 몰락한원인을 우리가 활용할 자원이 앞으로도 영속 가능하리라보는 인간의 어리석은 태도에서 찾았다. 당장의 수익에만 급급하여 자연을 소진하는 인류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옛 지혜를 되짚어보고 현재 우리가 지닌 자연을 회복하고 보존하는 삶을 꾀하는노력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희망일지 모른다. 사람과 땅, 작물 모두를 건강하게 길러냈던 전통 농사살림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농촌의 몰락

1970년대 중반부터 농업의 주산단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정부는 농약지원, 비료지원, 농기계도입지원, 경지정리, 시설하우스, 각종 정책지원금 등을 제공하며 집약성, 생산성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농부들을 몰아붙였다. 실제 농업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트랙터, 콤바인 등 각종 농기계와 화학 약품이 도입되었다. 덕분에 자급자족에 지나지 않았던 수확량이 대폭 늘어나 농사는 하나의 산업 분야로 성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풍년에도 농민들이 죽어간다. 1994년 우루과이 협상을 필두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나가면서 값싼 해외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국내 상품은 가격 경쟁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미 쌀값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개 사룟값만도 못한상태에 이르렀다. 올해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 기자회견에서 기존의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쳐 재협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농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사람뿐 아니라 자연도 신음한다. 어찌된 일인지 농약을 쓰기 전보다 해충 피해가 극심해졌고, 인공 비료 때문에 토양의 통기성과 배수성, 물리적 구조 등이 심각하게 훼손되어흙은 죽어버렸다.

 

무얼 잃었는지조차 잊어버린 현실

지금이야 승용이앙기로 모를 심지만, 기계가 없던 시절엔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었다. 허리를 굽혀가며 논매기를 하며 벼를 길러내니 농사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웃끼리 함께 들밥 먹어가며 품앗이를 했고, 명절이면 으레 계모지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은행나무잎이나 솔갈비로 잡초를 억제하고 마구간이나 뒷간 거름을 삭혀 뿌리니 작물과 땅이 건강했다. 농사는 날씨와 조상의 지혜가 중요했기에 액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인 세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보리밭 밟기, 밀살이 등 지금은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옛 농촌의 모습들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저자 전희식은 지금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선인들의 농촌 풍경과 생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는 정확한 기록을 위해 저자와 열 살 차이 나는 동네 형님과 아흔여섯 되신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어른들의 생생한 구술을 모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중요한 농서들을 참고하였다고 말한다.

이 책은 계절별로 1장씩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봄이 아닌 겨울에서 시작하여 가을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다. 겨울부터 1년 농사 준비를 시작하는 농촌의 순환 과정을 안다면 이치에 맞는 구성이라 볼 수 있다.

 

책 속으로

쉽게들 100년 후를 이야기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추정 가능한 사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옛 지혜를 되짚어보고 현재 우리가 지닌 자연을 회복하고 보존하는 삶을 꾀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인간의 존엄과 신성을 지키는 일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자연과 멀어질수록 탈인간화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가 180도 뒤집어진다고 해도 자급 농사, 자연주의 삶이라는 흐름은 맥을 계속 이어가리라 본다. _6

 

해방 직후 잉여농산물로 한국 농업을 초토화시킨 미국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는 유상판매로 기조를 바꿨다. 정부는 주산단지를 조성해서 고추, 마늘, , 사과 등 단일경작 농사를 급격히 늘렸고 우리 농업은 일손, 자금, 유통, 생산 등 모든 분야에 있어 외부 의존도가 크게 높아져버렸다. 1970년대 말부터 미국의 농산물 수입 자유화 압력이 가중되었고 각종 농업 관련 국제 협약들은 또 다른 을사늑약이 되었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의 소 파동은 세계 농업 체계의 하부 단위가 된 농업파괴범들이 준동하는 계기가 되었다._50

 

설 명절에 열흘씩이나 먹고 논다니까 일은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이해하면 큰 오산이다. 불리한 처지에 있거나 발언권이 적은 사람들은 평소 꺼내기 힘들었던 얘기들을 이때 풀어놓는다. 명절 밥상에서 나누는 얘기는 서로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한다. 특히 집성촌의 경우 타성받이 사람들이 설 명절 때 할 얘기 다 하는 경우가 많다. 머슴들도 설 명절 때 이른바 연봉협상을 시작한다. 한 해 머슴살이 하고 받는 새경을 나락 열 섬에서 한 말을 더 올리자 말자 얘기가 무성한 게 설 명절 때다. 주인들은 주인들끼리 입을 맞추고 머슴들은 머슴들끼리 모여서 새경의 기준을 정한 뒤 협상을 시도한다._58

 

고추밭에 막대기 꽂고, 줄 치고, 비닐 씌우는 작업은 1974~1975년 전후로 생긴 것이다. 개량종자가 나오고 비닐이 공급되면서 농사가 확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화학비료와 농약이 농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는데 최근 학계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 농촌의 급격한 변화를 주도한 새마을운동은 미국의 동남아시아 개발 전략과 한반도 안보 전략에 따른 기획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말 안보 취약지구에 건설된 전략촌이 그 효시다. 종적인 관의 주도성과 마을 단위의 감시 체제를 강화하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_77

 

농사짓기 참 쉬워졌다. 논농사가 너무나 쉬워져서 시골 할머니가 휴대전화 하나면 수십 마지기 논농사가 가능할 정도다. 로터리에 모심기와 농약 치기, 타작이 전화 한 통이면 전부 가능하다. 그러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으니 바로 쌀 스트레스다. 이 말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개념이다. 볍씨 단계부터 소독이라는 이름으로 농약에 절고 흙 한 톨 없이 허공 선반 위에서 자라는 육묘 단계는 심한 쌀 스트레스의 시작이다. 이후에는 굉음을 내는 고속 승용이앙기에 매달렸다가 기계에 말려들어가 정신없이 땅속에 꽂혀 자란다. 쌀이 받는 스트레스 총량은 엄청나게 클 것이다. 물못자리 논에 무릎까지 꿇고 정성스레 모를 쪄서 짚으로 모춤(서너 움큼씩 묶은 볏모)을 묶어 키우는 건 어떨까. 농부들의 농요를 듣고 자라는 쌀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한 포기 한 포기 못줄 따라 반듯하게 손으로 심겨져 자라는 쌀과 어찌 같겠는가._95

포텐거 박사는 고양이를 2개의 집단으로 나누어

첫번째 집단에는 생식, 자연식을 먹이고

두번째 집단에는 통조림, 가공식품 같은 것들을 먹였다.

 

그 결과 생식과 자연식을 먹은 고양이들은 2,3,4 세대를 거치면서 별 이상없이 건강하게 살아갔지만통조림, 가공식품같은 것들을 먹인 두번째 집단은

이미 2세대에서 발육저하와 질병대처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3세대에서는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중심을 잡지 못하는 장애가 발생했으며

4세대에서는 암 등 악성질환과 불임으로 인해 대를 이어갈 새끼가 거의 없어 실험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 뒤 포텐거 박사는 두번째 집단의 생존한 고양이들에게 생식, 자연식을 먹이기 시작했는데 세대를 거치며 다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50 여년 전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 이라는 책에서 향후 암환자가 급증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무릇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체의 필수성분인 (0.25%를 차지하는)'' 을 함유하고 있다

황은 인체조직의 구성성분으로 근육, , 신장, 뇌의 단백질, 피부조직, 손발톱의 구성물질로

체내 황 성분이 부족하면 머리카락이 갈라지거나 손발톱이 부서지는데,

황 성분은 체내에서 췌장호르몬인 인슐린의 보조효소 역할을 해서 당뇨를 개선시키고

체내 독성물질과 결합 체외배출시키며 간의 담즙 분비에 도움을 주며 정자를 건강하게 만들며 양기를 회복시킨다고

무릇의 중요한 효능중의 하나가 어혈을 제거하고 혈전을 분해 배출시키며 고지혈증의 탁한 피를 맑게 해준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해독작용이 이루어지고 한편 강심작용이 있어 심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원활한 혈액순환이 이루어 지도록 한다.

 

맵고 아린맛때문에 소금물에 데친 뒤 찬물에 우려 나물이나 조림으로 식용

 

환삼덩굴은 양약보다 훨씬 뛰어난 고혈압 치료효능을 가지고 있는데요.

혈압을 지속적으로 낮춰주고 재발위험을 없애 고혈압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데,

혈관 속 노폐물과 콜레스테롤을 배출해서 각종 심혈관질환을 예방, 치료할 수 있으며

고혈압으로 인한 두통이나 머리가 무거운 증상을 개선하고 수면장애, 시력장애, 손발저림, 이명, 언어장애 등이 대부분 개선됩니다.

 

뿌리까지 전초를 말려 하루 15~30g(생초 60~90g)을 달이거나 생즙을 내어 하루 세번 복용하면 며칠이면 혈압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웬만한 고혈압은 한달이면 완치가 가능하다고

 

국수나무는 천연인슐린 성분을 함유해서 혈당을 조절하고 혈당수치를 내려주어

당뇨에 매우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이용방법은 연중 줄기와 가지를 채취해 말려서 하루 15~20g을 물 1리터에 달여 수시로 마시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