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8 정월 대보름 잡아 먹은 신종 코르나 바이러스
2.3 중앙-기호
순천이 지옥으로 변한 그날
불도저 윤석열의 ‘낯선 잔꾀’
이상문학상 ‘# 업무 거부’ 작가들 해시태그 보이콧 선언
전태일 열사 50주년 반드시 해결해야할 노동 과제는
선관위가 미래한국당의 정당등록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
이념·세대·성 대결 갈수록 심각…
역사의 더께/아비규환1]잠시 한눈판 사이 뼈만 남은 아기시신
작년 한 해, 신문은 이런 오보를 정정했다
최근 5년 원양어업 업체 줄고 매출액·당기순이익은 늘어나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24)불쾌하다고?…맞아, 그걸 노렸어! 자본주의 질서에 한 방 날리다
신종 코로나 ‘변종’ 나왔다… 인간 간 전염서 변이 일으킨 듯
[소수정당에 너무 높은 국회 문턱 | ① 선거운동 금지] 비례후보 연설 못하게 막아놔
│② 많은 기탁금] "총선 출마하려면 1500만원 내라"
③ 정치적 표현자유 차단] 유권자가 후보자 지지표시 못한다고?
30년 만에 재심, 전교조 북침설 교육의 진실은?
공방 속 조선일보·한겨레 팩트체크, 품격 달라-신종 코로나 관련 팩트체크
TV조선 ‘미스터트롯’ 종편 시청률 신기록, 의미는
'성장 없는 번영' 가능할까 … 뉴요커(미국 시사주간지 ), 다양한 찬반 의견 소개
뉴트로, 즐거움으로 통하다
‘요즘 옛날’ 뜯어보기 뉴트로 백과사전
‘요즘 옛날’에 빠진 세대별 동상이몽은
뉴트로엔 세대별 결핍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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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햘 장도리 2.3~2.7
순천이 지옥으로 변한 그날
여순사건 재심에서 72년만에 무죄... 진실위에 기록된 한맺힌 증언
지난 20일 여순사건 당시 무장봉기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군사재판에서 처형된 장환봉씨에 대한 재심재판에서 사후 72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여순사건은 국군14연대가 제주4.3사건 당시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여순사건으로 최소 수천 명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장환봉의 딸 장경자는 지난 2006년 아버지가 1948년 여순사건으로 무고하게 학살되었다며 필자가 한때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1948년 부친이 학살 당했을 당시 장경자씨는 3살의 어린아이였다.
지난 2008년 1월 24일은 울산보도연맹사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이른 아침 필자는 울산보도연맹사건 추모식에 참여하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는 진실위 직원 외에 여러 민간인학살 유족회 회원들이 있었다. 그날 버스 내 옆자리에 앉은 이가 바로 고 장환봉의 딸 장경자 선생이었다.
버스에서 장경자 선생에게 나는 지난 1980년대 철도기관사 생활을 했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부친도 철도기관사였는데 1948년 여순사건 때 억울하게 학살 당했다고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그는 기막힌 자신의 인생역정을 줄줄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울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들의 대화는 이렇게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게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들의 그 대화로부터 약 1년이 지난 2009년 3월 2일 여순사건은 진실위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그리고 이 진실위 결정을 바탕으로 장경자 선생은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신청했고, 결국 그의 부친이 억울하게 학살된 지 72년 만에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그럼 1948년 여수 순천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아버지를 사살 후 불태웠다
▲ 여순사건 당시 ⓒ 진실위 자료사진
장경자 선생 외 19명은 1948년 10월 22일부터 1950년 1월 2일까지 국군 3연대ㆍ12연대 외 진압군과 순천경찰이 자신의 부친 장환봉 외 민간인을 반군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연행해 매산여고 담벼락 길, 이수중학교 부근 공동묘지, 구랑실재 등지에서 구타해 학살한 후 시신을 소각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3년간의 조사 끝에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1948년 11월 20일경 순천경찰은 순천철도국 기관사 장환봉을 체포해 철도국 창고에 감금했다. 그리고 1948년 11월 30일경 군경이 장환봉 외 감금되어 있던 30∼40명을 조곡동 죽도봉에서 사살 후 그들의 시신을 불에 태웠다.
장환봉 외에도 438명은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 순천시내 일대에서 국군 제2연대 그리고 순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사살 되었다. 특별히 국군 제2연대 부대원들은 순천 진압작전부터 1949년 초까지 순천시내 민간인을 연행하여 북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고문조사한 후 학교 건물 뒤편에서 집단 사살했다.
국군 제3연대 부대원들은 순천진압작전 이후 1949년 초까지 순천농림중학교와 순천 철도국에 주둔하면서 순천거주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살하거나, 연행해 고문조사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역, 낙안면 등지에서 위법적으로 사살했다.
국군 제4연대는 순천진압작전과 1949년 토벌작전 과정에서 순천시 남국민학교와 풍덕동 옛 펄프공장 등지에 주둔하면서 순천시내에서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4연대는 민간인들을 주둔지로 연행해 고문조사한 뒤 사살했다.
국군 제12연대는 1948년 10월 하순, 1949년 1월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구례읍 등에 주둔하면서, 순천시내 등지에서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제12연대는 주둔지와 북국민학교ㆍ황전지서 등지로 민간인을 연행해 조사한 후, 인근 순천농림중학교 등지에서 사살했다. 또한 이들은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한 후, 마을 인근에서 민간인을 사살했다. 특히 12연대 지휘관들은 소심한 부하에게 즉결처분을 지시하거나, 난폭한 부하에게 대검으로 민간인의 목을 베라고 한 뒤 총에 걸고 다니게 하는 등 야만적 행위를 자행했다.
국군 제15연대는 순천 탈환 이후부터 1949년에 걸쳐 순천남초등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등지에 주둔하면서, 순천 전 지역을 대상으로 마을을 수색하고 주민을 소개했다. 그 과정에서 가옥을 소각한 뒤, 민간인들을 연행해 불법적으로 집단사살 했다. 특히 15연대는 친인척들에게 반군 협조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척살하도록 교사하거나, 민간인을 살상해 전과를 허위보고하는 등의 행위를 자행했다.
한편, 순천경찰서 경찰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말까지 사찰계를 중심으로 관내 반군토벌 및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본서나 읍면별 지서로 연행해 고문조사한 뒤 불법적으로 사살했다.
모진 고문과 구타
당시 민간인들 중에는 반군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사살된 희생자들도 있었다. 희생자의 연행과정을 목격한 김태옥은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여순사건 당시 두월리 무도마을에 산사람들이 내려와 밥을 해달라 해 해코지할까 두려워 마을사람들이 밥을 해줬다. 1949년 2월 12일 쌍암지서 경찰들은 반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마을주민 4명을 쌍암지서로 연행했다. 그리고 주민들에 대한 모진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다. 다음날 1949년 2월 13일 쌍암지서 경찰들은 끌려간 4명을 지서에서 살해했다. 그래서 희생자 유족들은 인부들이 말을 끄는 수레에 시신들을 실어 수습해왔다.
이 외에도 당시 승주읍 유흥리에선 딸을 겁탈하려던 경찰을 가로막던 어머니가 사살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희생자 유족 조현규는 훗날 진실위에서 당시상황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1949년 8월 11일 마을의 남자들이 나무를 베러 산에 간 사이 쌍암지서 순경들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을 소집했다. 경찰이 집집마다 돌며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유흥리 463번지 조아무개의 집에 순경이 들어와 어머니 장순심을 집 밖으로 나가라고 위협했다. 딸의 위험을 직감한 장순심이 순경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순경이 모녀에게 총을 쏘았다. 장순심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딸 조아무개는 총알을 맞고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
당시 어머니를 순경의 총탄에 잃고 평생 장애인이 된 딸 조아무개 역시 훗날 진실위에서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진술했다.
그때가 49년 음력으로 7월 여름 더울 때였어요. 제가 열여섯 살이었는데. 마을엔 노인들하고 여자들만 있었는데, 산판일(벌목)에 안 나간 남자들이 있는지 찾으러 왔다고 나중에 들었어요. 우리 집에는 어머니와 저만 있었는데 순경 한 명이 집에 들어왔어요. 마당에서 순경이 어머니만 나오라고 어머니를 밀어냈어요. 어머니가 저만 남겨두고는 못 나가겠다고 마당에서 버텼어요. 그러니까 그 순경이 어머니를 총으로 쐈어요. 그리고 제가 서 있었는데 저를 한 방 쐈어요. 저는 총을 맞고 쓰러졌어요. 오른쪽 허벅다리에 맞았는데 총알이 살을 뚫고 나갔어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나서 한참 질뚝질뚝 걸었어요. 음력 7월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음력으로 4월생인 막냇동생이 있었어요. 100일도 안 된 아기였는데 어머니가 죽고 나서 젖을 못 먹어 그해 음력 11월에 죽었어요. 저를 쏜 그 사람 얼굴을 기억 못해요. 검은색 경찰 옷을 입었는데. 제가 서 있다가 총에 맞고 쓰러졌는데. 어떻게 됐는지 정신도 없고 기억도 안 나요.
판교리의 경우 참고인 강서봉은 이렇게 진술했다.
서면 판교리 거주 순천 매산중학교 학생 최승수(당시 19세), 최승모(당시 17세)가 1949년 10월 18일경 글을 잘 쓴다는 이유로 반군에게 끌려가 산속에서 삐라 작성을 했다. 이후 서면지서 경찰들에게 체포된 최승수, 최승모는 구타와 고문 끝에, 서면 용담골 뒤 대장굴 부근에서 사살되었다.
당시 군대의 진압작전을 목격한 참고인 이아무개는 이렇게 진술했다.
진압군이 순천에 들어와 길거리에 있는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총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시내 중심지에서는 특정한 집단학살 장소가 있어서 거기서만 학살된 것이 아니라, 시내 곳곳의 후미지고 으슥한 장소이면 거의 학살장소였다. 진압군이 들어온 지 2∼3일 후에도 진압군을 반군으로 오인해 환영하는 농민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모두 사살했다.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사살되었다
당시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과정을 목격한 참고인 장아무개는 이렇게 진술했다.
제8관구 경찰청 부청장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맘 같아선 너희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다'며 이를 갈았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군경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심사를 할 수 없었다. 군용팬티를 입거나,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반군협력자로 몰려 사살되었다.
아버지의 학살을 목격했던 희생자 유족 김관은 이렇게 진술했다.
시계방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편이었는데 14연대가 도움을 요청했다. 요구를 거절하면 개죽음을 당하니 어쩔 수 없이 밥을 해주었다. 그런데 순천이 진압된 후 아버지는 순천경찰들에게 연행되어 순천 성동국민학교 옆 공터에서 사살됐다.
유족 최두용은 9남매 중 본인을 비롯해 4남매만 살고 5남매가 부모와 함께 죽었다. 큰형이 반군에게 끌려 산으로 간 뒤 가족이 죽음을 당했다. 유족 최두용은 이렇게 진술했다.
여순사건이 난 후 큰형이 산에 끌려간 뒤 경찰들이 와서 집에 불을 질러서 이 집 저 집 전전했어요. 이후 경찰들이 와 부친을 물에 처넣고 밟고 때린 다음 끌고 갔어요. 며칠 후에 광주형무소로 끌려가, 6ㆍ25가 터지자 죽었어요. 모친은 부친 면회를 갔다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에게 죽창으로 맞아 왼쪽 팔이 잘린 채 사살됐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은 이모네 집으로 밥을 얻어먹으러 가는 길에 지서 앞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고, 다른 형제들도 경찰한테 죽었어요.
국군15연대 2대대 12중대 소속 참고인 김아무개는 이렇게 진술했다.
반군협조자 사살 뒤에 손가락, 귀, 목을 잘라서 허위로 전과를 보고했다.
국군 4연대 1대대 4중대 소속 참고인 조아무개는 이렇게 진술했다.
마산 15연대가 4연대와 함께 순천, 보성, 담양, 장성 등 진압 및 토벌작전지역에서 반군에게 식량 등을 제공한 마을을 포위한 뒤,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 마을주민 전부를 모이게 해, 많은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한 일이 있었다.
시신을 거리에 전시했다
당시 상사지서 의용경찰 이아무개는 이렇게 진술했다.
서북청년단들은 대검으로 척살을 많이 했다. 이북 출신들은 가족을 대살하는 등 가혹하게 처리했다.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사살 후 가족에게 통보해 밤에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다. 죄질이 악질인 경우 시신을 거리에 전시하기도 했다.
진실위는 여순사건의 조사결과 439명의 희생자 신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48년 10월 말에서 1950년 2월까지 순천지역 여순사건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희생자 수는 약 2000여 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정확한 피해규모는 파악할 수 없었다.
또한 진실위는 여순사건이 현지 토벌작전 지휘관의 명령 아래 발생했지만, 최종적 감독책임은 국방부,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판단했다. 또한 경찰 최상급기관인 당시 내무부 치안국이 여순사건과 관련해 직접 명령을 내렸거나 보고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지휘 및 관리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김성수(wadans) / 오마이뉴스
불도저 윤석열의 ‘낯선 잔꾀’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13명 기소… 내부회의 가장한 수사팀 ‘짬짜미 회의’
윤석열 검찰총장이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관련자 13명의 무더기 기소를 지시한 과정은 그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냈다. 수사를 시작하면 상대가 누구든 반드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불도저’ 기질은 익히 봐왔던 모습이다. 하지만 내부의 반대 의견을 누르기 위해 ‘잔꾀’를 부리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이성윤 지검장 반발 무마용 요식 회의
윤 총장은 1월29일 송철호(71) 울산시장, 황운하(58) 전 울산지방경찰청장, 백원우(54)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등 전·현직 공무원 13명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기에 앞서 내부회의를 열었다. 앞서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기소 여부를 두고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충돌했던 것을 염두에 둔 조처였다. 윤 총장은 이 지검장이 “(최 비서관) 소환 조사 뒤 기소해야 한다”며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총장에게 ‘이의제기서’까지 제출했지만 이를 무시한 채 송경호 서울중앙지검 3차장에게 최 비서관을 기소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두고 검찰 안팎에서 논란이 일자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관련자에 대한 기소 결정은 정당한 절차를 거쳤음을 보여주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 회의는 일종의 ‘짬짜미’였다. 회의 참석자를 보면 사실상 수사팀 회의였다. 윤 총장과 이성윤 지검장을 제외하고 대검에선 구본선 대검차장, 배용원 공공수사부장, 임현 공공수사정책관, 김성훈 공안수사지원과장이 참석했고 서울중앙지검에선 신봉수 2차장, 김태은 공공수사2부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이번 수사의 실무 및 지휘 라인에 있는 간부로 윤 총장과 함께 수사팀으로부터 수사 상황을 보고받고 의견을 조율해왔다. 따라서 이날 회의는 윤 총장이 수사 지휘부와 이미 기소를 결정해놓고 기소에 반대하는 이성윤 지검장에게 이를 ‘통보’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이 지검장은 황운하 전 청장을 소환 조사도 없이 기소하는 등 무리한 측면이 있다고 반대했다). 애초부터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회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사 무관’ 간부들 의견 청취 관례 깨
역대 검찰총장은 내부 의견을 듣는 통로로 주로 ‘대검 부장(검사장)회의’를 활용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처리할 때 수사와 무관한 부서의 간부들로부터 ‘수사에 오염되지 않은’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회의는 수사 지휘 라인이 아닌 간부들로부터 수사팀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약점’을 잡아내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윤 총장은 대검 부장회의는 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앞서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과 관련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기소에 반대했던 심재철 반부패·강력부장을 의식한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성윤 지검장은 이날 회의에서 “외부 위원들로 구성된 전문수사자문단에 기소 여부를 맡기자”는 의견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문수사자문단 회의는 법무부가 최강욱 비서관 기소 논란과 관련해 일선 검찰에 공문을 내려보내 “적극 활용하라”고 지시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 총장과 대검 간부들은 “수사팀원 30명이 일치된 의견을 낸데다 사안의 복잡성과 전문성, 보안 유지 필요성 등을 고려할 때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묵살했다. 이 지검장의 의견은 회의록에 ‘이견’으로 게재됐다.
전문수사자문단 회의는 2018년 5월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를 두고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과 양부남 수사단장(현 부산고검장)이 충돌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였다. 양 단장은 문 총장이 애초 수사에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해놓고 대검 간부의 수사 개입 혐의가 드러나자 약속을 뒤집고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다며 반발했다. 이에 대해 문 총장은 변호사와 법학 교수 등으로 구성된 외부 전문가들에게 대검 간부의 기소 여부를 맡기자고 양 단장에게 제안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검찰 관계자는 “대검 간부회의 등 내부회의를 해봤자 국민들이 믿어주지 않을 테니 아예 외부 전문가들에게 맡기자는 게 문 총장의 뜻이었다”고 말했다.
외부 자문단은 대검과 수사단이 회의를 거쳐 구성했다. 자문단은 12시간 가까운 마라톤회의 끝에 대검 간부 등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다”며 문 총장의 손을 들어줬다. 문 총장은 수사단의 ‘항명’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견이 발생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한 과정이고, 이견을 조화롭게 해결해나가는 과정도 민주주의의 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사단’을 해체시킨 인사 때 임명된 구본선 대검차장과 배용원 공공수사부장이 기소에 동의한 것을 두고도 뒷말이 나온다. 보수언론은 이를 근거로 이성윤 지검장의 ‘나홀로 반대’를 부당한 것으로 몰아갔다. 기소가 정당한데도 이 지검장이 청와대를 의식해 기소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구 차장과 배 부장이 윤 총장과 함께 수사팀으로부터 매일 보고를 받고 의견을 조율해왔기 때문에 윤 총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총장을 보좌하는 차장과 이번 수사 책임자인 공공수사부장이 그날 회의에서 반대했다면 그게 더 큰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총장 ‘내 검사 아니면 못 믿는다’ 메시지
이번 기소는 2월3일 단행될 중간간부 인사로 수사팀원 상당수가 교체되기 전에 수사를 마무리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만큼 윤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에 새롭게 임명되는 중간간부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기소는 윤 총장이 자기와 함께 일했던 검사들이 아니면 믿지 못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이상문학상 ‘# 업무 거부’ 작가들 해시태그 보이콧 선언
소설가 김금희 비롯 작가들 수상거부, 윤이형 절필에 연대선언 이어져…문학사상사 침묵
문학사상사의 이상문학상 불공정계약 파문이 '문학사상사 업무 거부' 선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설가 김금희의 폭로를 비롯해 올해 수상 선정자들이 수상을 거부하고 지난해 수상자인 윤이형은 절필을 선언하면서, 과거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와 월간지 기고자를 비롯한 동료 작가들이 줄이어 SNS를 통해 연대하고 나섰다.
불공정 파문은 이상문학상 운영 출판사인 문학사상사가 수상자에게 저작권 양도를 요구해온 계약 관행이 지난달 초 세간에 알려지며 시작됐다. 작가들과 문학사상사가 낸 입장을 종합하면 문학사상사는 그간 이상문학상 수상 동의서에서 수상작의 저작권을 3년 동안 양도할 것을 요구해왔다. 또 작가가 개인 단편소설집을 낼 때 수상작은 표제작으로 쓸 수 없고 다른 단행본에도 수록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문학사상사는 이에 이의를 제기한 작가들만 일부 조항에 한해 삭제해왔다.
김금희는 지난달 4일 트위터에 “어제 모 상의 수상후보작이 됐다는 전화를 받고 1차적으로는 기쁜 마음이었다. 그런데 오후에 계약서를 전달받고 참담해졌고 수정요구를 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금희는 시정과 사과를 요구하며 “제발 다음해에 선정 전화를 받는 작가는 그의 저작권을 '양도'할 일이 없기를, (저작권) 사용을 그의 노동에 당연하게 '허락'하며 격려받은 기분으로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올해 수상자인 작가 최은영과 이기호도 이후 같은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지난해 대상을 받은 윤이형 작가는 지난달 31일 항의의 뜻에서 절필을 선언했다. 그는 앞서 28일 절필을 선언한 배경에 대해 트위터에서 “이상문학상을 돌려드리고 싶다. 부당함과 불공정함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돌려드릴 방법이 없다. 나는 이미 상금을 받았고 그 상에 따라오는 부수적 이익들을 모두 받아 누렸다. 더불어 저작권 개념에 대한 인식 미비로 양도 문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내 작품을 그 일에서 떼어낼 수도 없게 됐다. 그래서 그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문학사상사는 논란이 커지자 지난 6일 예정됐던 이상문학상 수상작 발표 기자회견을 무기한 연기한 채 공식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문학사상사는 “원래 대상 수상자에게만 요구했던 조건인데 직원의 실수로 우수상 계약에도 포함됐다”는 입장을 밝힌 사실이 알려지며 제대로 된 시정과 공식 사과 요구에 부딪혔다.
▲작가들의 트위터 “문학사상사 업무 거부” 해시태그 선언.
▲독자들의 트위터 “문학사상사 보이콧” 해시태그 선언.
과거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와 월간 문학사상 기고자들을 비롯한 작가들이 이후 소셜미디어에서 줄이어 업무 거부를 선언하고 있다.
2008년 대상을 받은 작가 권여선은 1일 자신의 트위터에 “문학사상사 업무 거부” 해시태그를 달고 “윤이형 작가님의 글을 읽고 깊이 반성한다. 기수상자로서 관행이란 말 앞에 모든 절차를 안이하게 수용한 내가 부끄럽다”며 “문학사상사는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바닥부터 새롭게 바꿔나가라”고 밝혔다. 현재까지 구병모, 권창섭, 오은, 이원석, 장류진, 조해진, 강혜빈, 황정은 등 작가와 월간지 문학사상에 연재해온 이원영 동물행동학자 등 수십명이 업무 거부에 동참한다고 밝혔다.
독자들도 ‘#문학사상사_독자_보이콧’을 해시태그로 내걸고 대거 문학사상사 출판 도서 불매운동에 나서 문학사상사의 공식 입장이 나오기까지 파문이 확산할 전망이다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전태일 열사 50주년 반드시 해결해야할 노동 과제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20년 핵심의제 발표 “정부의지 후퇴에 최초 선정”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올해의 10대 노동의제’를 발표했다. 정부의 후퇴한 노동개혁 의지에 촉구 목소리를 높인다는 취지다. 죽음의 외주와 금지와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등 ‘죽지 않고 일할’ 노동기본권 확보 등 세부 과제가 여기에 포함됐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2일 보도자료를 내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 몸을 불사른 지 50주년이자 20대가 끝나고 21대 국회가 열리는 2020년을 맞아 올해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를 모아 10대 의제와 세부과제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연구소 측은 “우리 연구소 차원에선 최초로, 문재인 정부 노동개혁 의지가 뒷걸음질하고 있다는 판단에 강하게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선정했다”고 덧붙였다.
‘건강하게 일할 권리’가 주요 의제 가운데 시급 과제로 꼽힌다.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등 시대에 뒤처진 노동 법제도 시정이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명시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주요 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법정노동시간 제한과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 연차휴가, 부당해고 제한과 구제신청, 직장 내 괴롭힘 금지 등이다.
연구소는 “5인 미만 사업장 근기법 적용 제외는 1998년 시행령 개정 때 영세사업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사용자에게 사업장 쪼개기 유인을 줬고 22년이 지난 오늘 397만명이 법적용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1일 11시간 최소 휴식시간제 도입과 급증하는 초단시간 노동자에 근로기준법 적용도 ‘건강하게 일할 권리’ 의제로 꼽혔다.
죽음의 외주화 금지와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 등 ‘죽지 않고 일할 권리’도 핵심 의제다. 연구소에 따르면 사망 만인율(노동자 1만명 당 산업재해 사망자)은 2016년 0.96%에서 2018년 1.12%까지 매해 증가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업무상 재해 사망자가 855명으로 전년보다 116명 줄었다고 홍보했으나,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1171명으로 더 크게(178명) 늘었다.
연구소는 “죽음의 외주화를 막으려면 유해·위험작업과 생명·안전업무의 외주화를 금지해야야 한다.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유해한 작업의 도급금지 규정을 구체화했지만 지나치게 좁다”고 했다.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6년 간 3명 이상 산재로 숨진 사건에서 사망자의 85%, 부상자의 89%가 하도급 업체에서 나왔다. 연구소는 “중대재해를 막으려면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과 처벌, 원청의 공동사용자 책임 부과가 필수”라고 덧붙였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최저임금 공약을 못 지켜 송구하다”며 사실상 포기 선언한 임금격차 축소도 시급 의제다. 연구소는 “2017년 대통령선거 때 민주당과 정의당, 바른정당은 2020년,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이 2022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을 공약했다. 공약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이행할지 분명히 해야 한다”며 “2022년에 달성하려면 매해 700원(8%)가량 인상해야 한다”고 했다.
최저임금의 7배 안으로 최고임금 상한을 정하고, 이를 넘어서는 소득에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최고임금제 도입과 종합소득세 최고한계세율 인상’도 임금격차 축소 과제다. 이외에 △산별교섭 촉진과 단체협약 효력확장 △공동근로복지기금 또는 사회연대기금 조성 △성별, 고용형태별 임금공시제 도입도 포함됐다.
연구소는 이외에 10대 핵심 의제와 세부과제로 △상시ㆍ지속 일자리는 정규직 직접고용(상시ㆍ지속 일자리 판정 기준 재정비 등) △노조 할 권리(ILO 기본협약 비준) △특수고용ㆍ플랫폼 노동자 권리 보호(노동자성 판단기준 법제화 등) △차별과 괴롭힘 받지 않고 일할 권리(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등)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사회 안전망(기초연금 수급자격 완화 등) △일터민주주의 강화(노동이사제 도입 등) △노동법원 신설 등을 선정했다.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선관위가 미래한국당의 정당등록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
[기고] 위성정당은 헌법이 보호하는 진성정당이 아니다
한국당이 자기몸통에서 깃털 하나를 뽑아내고 후~ 입김을 불어넣은즉 위성정당이 잉태되었다더라. 그 이름을 비례한국당으로 붙였다가 미래한국당으로 바꿨다더라. 5천 명의 당적을 통째로 오려붙이길 거듭하며 창당서류를 급조하였다더라. 미래한국당으로 위장 간판을 단 한국당의 2중대가 마침내 세상에 나오자 정치권은 정당설립자유를 노래하며 우왕좌왕했다더라. 곧 총선 경주가 시작하였다더라.
여기서 다른 정당은 모두 1당1각으로 콩콩거리고 가는 데 한국당만 1당2각으로 성큼성큼 내달렸다더라. 덕분에 한국당이 좋은 성적을 올려 개헌 저지 의석을 넘어 패스트트랙 저지 의석마저 확보하였다더라. 촛불개헌과 촛불개혁을 목 빼고 기다리던 국민이 뒤늦게 후회막급이었다더라. 그 후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나는 데 제법 세월이 지났다더라. 나는 혹시라도 이런 사설로 시작하는 창작판소리 ‘한국당 꼼수 대첩가’가 나올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한국당은 공공연하게 위성정당 서류창당을 마무리 중이다
지난1월13일 중앙선관위는 한국당의 위성정당 창당과 관련해서 유사당명 사용금지를 결정했으나 위성정당 창당의 적법여부에 대해선 여태까지 공식안건으로 다룬 적이 없다. 일단 합법성의 외관을 부여받은 한국당은 하루 만에 위성정당 이름을 미래한국당으로 바꾸며 서류창당 작업을 서둘러 이제 중앙당창당만 남겨두고 있다. 선관위는 한국당의 위성정당 창당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기정사실화를 돕고 있다. 한국당에 우호적인 조중동매 중앙일간지와 조중동매 종편TV도 미래한국당 창당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효과예측과 전망을 쏟아낼 뿐이다.
한국당은 위성 종이정당의 창당과정을 조금도 거리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위성정당 창당이 한국당의 공식 총선전략으로 채택돼 당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 등 지도부의 결정과 독려 속에서 추진되기 때문이다. 물의를 빚자 바로 바꿨지만 실무책임을 맡은 한국당사무부총장은 자기아내를 첫 창당준비위 대표로 신고했었다. 창준위 소재지로는 자유한국당 서울주소를 써냈다. 부산시당 창당대회에선 자유한국당의 ‘자유’를 가리고 ‘미래’를 덧댄 재활용 플랭카드가 중앙단상을 장식했다. 어차피 선관위용 서류만 만들어내자는 생각이라 창당대회는 요식행위에 맞춰 초스피드로 진행된다. 축제분위기나 격정연설 따위는 약에 쓸래도 없다.
어떤 국민이 이런 일련의 작태를 정상적인 창당과정으로 볼까. 살다 살다 제1야당의 분신변장 창당 쇼까지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21세기도 20년이나 지난 백주대낮에 때 아닌 위성정당 소동을 지켜보는 마음은 참담하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국회를 통과한 연동형선거법이 능멸 받고 빛이 바래는 모습에 씁쓸하기 그지없다. 한국당이 끝까지 능멸하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민주당 등 4+1 연동형선거법 산파역들의 무책임에도 공분이 치민다. 마땅히 중앙선관위가 나서서, 위성정당은 정당법상의 정당이 갖춰야하는 자주독자성을 못 갖춰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위성정당 창당 쇼를 중단시켰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의 선관위는 지금까지도 위성정당의 적법성 판단을 회피한다.
법질서는 탈법행위 꼼수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선관위가 아무리 눈감아줘도, 미래한국당이 비례의석용 자유한국당이라는 사실이 바뀌진 않는다. 자유한국당이라는 동일정당의 후보들이 지역구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간판으로, 정당투표에서는 미래한국당 간판으로 출마한다는 사실도 바뀌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의 위장 분당을 뻔히 지켜보는 국민들은 정신분열이 올 지경이다. 자유한국당의 분신변장 창당꼼수 앞에 법질서는 정녕 속수무책인가? 다른 정당들은 모두 한발로 뛰는데 혼자서만 두발로 뛰어가서 남의 몫으로 책정된 상금까지 가로채겠다는 한국당의 불공정선거의지를 원천 차단할 법원칙이 정녕 없다는 말인가? 그럴 리 없다. 법질서는 겉으로 보기만큼 성기질 않다. 탈법행위를 솎아내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지 않다. 원칙이라는 이름의 불문율과 종합적인 체계해석이 도처에서 브레이크를 걸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글에서 정당은 공공연하게 분신정당이나 위성정당, 종이정당을 만들 자유가 없으며 이것이 헌법의 불문율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유설립주의와 형식심사주의 등 일련의 정당보호법리는 모두 자주성과 독자성을 갖춘 진성정당을 염두에 두고 발전해왔기 때문에 자주성과 독자성이 없는 분신정당과 위성정당, 종이정당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미래한국당은 분신정당과 위성정당, 종이정당의 속성을 다 갖추고 있으므로 법의 보호대상이 아니라 금지대상으로서 선관위가 정당등록을 받아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법무부장관의 위헌정당해산심판청구? 법리와 전망
민주주의국가에서 정당설립과 정당활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맞다. 우리나라에서도 법무부장관의 심판청구로 헌법재판소가 해산결정을 내리지 않는 이상 정당을 강제로 해산시킬 합법적 방법은 없다. 두터운 정당보호를 위해 창당과정 중에도 동일하다고 해석된다. 미래한국당을 상대로 법무부장관이 헌법재판소에 위헌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해야한다는 주장이 SNS에서 심심치 않게 개진되는 이유다. 헌법상 법무부장관은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할 때만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한국당은 1당2간판으로 총선에 임해 개정선거법상의 연동성 제약을 면탈하고 비례의석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래한국당 창당에 나섰다. 만약 한국당의 위성정당 전술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면 법무부장관이 정당해산심판청구권여부를 검토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본래 헌법재판소의 위헌정당해산심판제도는 폭력혁명주의정당, 파시스트정당, 인종주의정당 등 민주공화국 헌법의 관점에서 위험성과 폭발력이 강한 극단적 이념정당들을 솎아낼 목적으로 마련됐다. 이들과 달리 두어 달 시한부 종이정당에 지나지 않는 미래한국당 해산에 위헌정당해산제도를 원용하는 걸 주저하게 되는 이유다. 호미로 할 일에 쟁기를 동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다.
탈법목적의 위성정당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다
개정선거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위성정당 창당을 민주적 기본질서 위배행위로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정당자유설립주의와 복수정당제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진성정당을 전제한다. 자주성과 독자성이 전무한 위성정당은 자유설립주의의 보호대상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생겨도 국민의 정치의사 형성에 기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체제를 분류할 때에도 위성정당은 중요하지 않다. 위성정당이 아무리 많아도 진성정당이 하나면 1당 독재체제고 둘이면 복수정당체제로 분류된다. 아무도 위성정당을 복수정당체제의 정당한 구성원, 즉, 진성정당으로 쳐주지 않는다.
한국당이 그러듯이 공당이 탈법행위를 공개적으로 감행하며 지지자들의 탈법행위 가담을 호소하는 행태도 민주적 기본질서의 당연한 일부인 공당의 헌법준수의무에 위배된다. 공당은 입법과정에서 아무리 치열하게 반대투쟁을 벌였더라도 법이 제정되는 순간부터 일단 법에 승복하고 법 개정운동을 벌여야지 지지자들에게 탈법행위를 선동하며 법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정당의 헌법존중의무가 요구하는 바다. 요컨대, 개정선거법 면탈목적의 위성정당 창당과 운영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
만약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미래한국당을 상대로 정당해산심판청구권 행사여부를 검토한다고 가정해보자. 현실적으로는 민주당 대표 출신 법무부장관이 미래한국당 해산심판청구권한을 행사할 경우 총선을 앞두고 야당탄압논란과 선거개입시비를 불러일으켜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다. 총선이 끝나면 사정이 달라질까? 비례의원까지 주렁주렁 달린 미래한국당에 정당해산심판청구권을 행사하는 순간 현 정권은 집권후반기 내내 한국당의 협력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총선결과 한국당이 위성정당의 비례의석 덕분에 제1당이 되거나 패스트트랙 단독저지의석을 확보하는 위기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뽑아들기 어려운 카드라고 할 수 있다.
선관위의 정당등록거부가 해법이다
실은 선관위도 창당준비위 결성신고를 접수하지 않거나 정당등록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창당과정 중의 정당을 사실상 해산할 수 있다. 사법기관도 아닌 선관위 결정으로 헌재결정에 의한 정당해산과 동일한 효과를 내기 때문에 이 권한은 몹시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엄격하고 신중하게, 또한 최후적으로만 인정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설립의 자유가 빈말이 되고 헌재의 정당해산심판권이 창당이후로만 제한되기 때문이다. 같은 취지로 정당법도 정당설립의 “형식적 요건을 구비하는 한” 선관위가 정당등록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구별이 필요하다. 미래한국당처럼 자타공인 위성정당에 대해서는 자유설립주의나 형식심사주의 등 진성정당을 염두에 두고 발전된 일련의 강력한 정당보호법리가 적용될 여지가 없다. 진성정당은 최대한 보호하되 독자성의 실질을 조금도 갖추지 못한 위성정당은 처음부터 정당행세를 못하게 막아야 한다. 요컨대, 법리적으로는 진성정당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어긋나면 헌법재판소를 통해 정당해산을 추진하되 독자성이 없는 위성정당에 대해서는 선관위가 창당시점에 정당등록을 거부하는 게 바람직하다.
선관위는 헌법기관답게 법원칙에 충실하라
중앙선관위는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지 2년8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근혜 정권 시절의 보수성향 위원들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매우 이례적인 헌법기관이다. 2014년3월과 15년 박근혜정권의 한가운데서 임명된 위원 4인과 2인의 6년 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다. 이 가운데 국회 몫 민주당 추천 1인만 빼고 확실한 보수성향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 두 달여 만에 지명권을 행사한 권순일 위원장도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키드로 소문난 확실한 보수성향이다. 지명당시 모든 대법관이 똑같은 조건이라 불가피했다. 아직도 6대3으로 보수우위 선관위지만 금년3월에 위원들 넷이 바뀌면 역전된다. 위성정당으로 판을 뒤흔들 생각을 할 때 한국당지도부는 당분간 선관위의 인적구성이 보수우위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선관위가 위성정당 자체를 문제 삼진 않을 것으로 낙관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앙선관위가 지금과 같은 구성이 아니라면 과연 위성정당의 위헌불법여부를 정면에서 다루지 않고 고작 유사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선에서 그쳤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보수성향 중앙선관위원들의 팔이 한국당 쪽으로 일제히 굽었다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물론 위성정당 창당이 정당자유설립권의 권리남용에 해당하는지, 공당이 탈법행위에 앞장서고 지지자들의 가담을 호소해도 되는지는 선관위원의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법원칙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위성정당문제 뿐 아니라 모의선거교육문제에서도 한국당의 입장과 궤를 같이해온 선관위의 최근 행태는 선관위의 현재 인적 구성을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중앙선관위는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선관위원을 3인씩 지명해서 구성하는 독립헌법기관이다. 겉보기와 달리 실제로는 인적 구성에서 여권프리미엄이 무지 강하다. 대통령 몫 3인과 여당추천 국회 몫 1인, 그리고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 몫 3인이 대체로 비슷한 정치성향을 갖기 때문이다. 만약 논쟁적인 사안에서 선관위원이 정치성향을 앞세워 판단할 경우 결과는 대체로 집권세력이 7대2로 우세하게 돼있다. 선관위원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더더욱 법원칙을 판단기준으로 삼아야한다. 이것이 선관위원에게 주어진 최상급의 정치중립의무가 요구하는 바다. 중앙선관위원들은 과연 자주성과 차별성이 전무하고 탈법목적으로 급조된 1회용 위성정당마저도 헌법과 정당법의 보호대상이 되는지를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자문자답해보기 바란다.
유권자 심판에 맡기자는 주장은 진성정당에만 유효하다
이쯤에서 유권자심판론, 즉, 나쁜 정당으로 의심되더라도 등록거부나 정당해산을 최대한 피하고 유권자의 심판에 맡기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을 검토해보자. 나쁜 정당도 표로 심판해서 사라지거나 쪼그라지게 놔두면 되지 굳이 공권력을 동원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진성정당에나 통하지 위성정당엔 통하지 않는다. 위성정당이 받을 표는 위성정당을 보고 찍은 표가 아니라 배후의 진성정당을 보고 찍은 표다. 진성정당과 달리 위성정당에 대해선 표의 심판이 이뤄질 방법이 없다.
분명히 하자. 미래한국당은 간판만 미래한국당일 뿐 실질은 100% 자유한국당이다. 한국당 지지자들과 일반국민들은 미래한국당이 비례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잠시 간판만 바꿔달은 자유한국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한국당이 획득할 정당투표는 100% 자유한국당 표일 뿐 미래한국당 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정당투표에서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정당은 미래한국당이 아니라 자유한국당이다. 미래한국당을 놓고 총선에서 국민심판을 받으면 된다고 두둔하는 얘기는 하지말자. 어떻게 봐도 지금은 선관위가 나서야 할 시점이다.
선관위, 미래한국당의 정당등록을 거부하라
정당설립의 자유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중대한 한 축으로 최대한 보장해야 마땅하다. 정당법은 정당의 개념을 첫째, “국민의 이익을 위해” 정책과 후보를 내고, 둘째, “국민의 정치의사” 형성에 참여하는 “국민의 자발적인 조직”으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서 헌법과 정당법의 보호를 받는 진성정당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정치의사에 참여하는 국민의 자발적 조직을 일컫는다. 이러한 정당은 당연히 다른 정당에 대해 창당이념과 정강정책, 지도자와 지지기반, 현안입장 등에서 나름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갖는다.
미래한국당은 경우가 다르다. 미래한국당은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한국당의 이익을 위해 급조된 한국당의 2중대다. 국민의 자발적 조직이 아니라 한국당의 결정에 따라 간판만 바꿔 단 위장 분신조직이다. 한국당의 분신 아바타로서 정당법의 정당개념이 상정하는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정당이 아니다. 한국당도 미래한국당은 자기들과 한뜻으로 움직이는 “위성정당”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선관위가 미래한국당 창당을 정당설립자유법리로 옹호하거나 묵인할 수 없는 이유다.
선관위는 위성정당은 정당설립자유법리에 의해 보호받는 정당법상의 정당이 될 수 없어서 정당등록을 받아줄 수 없다고 선언해야 한다. 이때 선관위는 위성정당 금지법리는 정당법의 불문율이라는 점과 위성정당은 정당의 개념요건을 못 갖췄기 때문에 시정보완대상이 아니라 등록거부대상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다시 말해서 등록거부 사유가 시정과 보완이 가능한 창당서류요건 미비에 있지 않고 시정과 보완이 불가능한 정당개념요건 불비, 즉, 위성정당성 자체에 있음을 선언해야 한다.
위성정당 금지법리가 정당법의 불문율이라는 사실은 정당법의 유사당명 금지법리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정당법이 유사당명 사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유권자의 혼동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신생정당이 유사당명을 내거는 이유는 많은 경우 기성정당과 별다른 독자성과 차별성이 없는 유사정당이기 때문이다. 유사당명 사용금지를 유사정당 창당금지로 이해해도 무방한 이유다. 그렇다면 유사정당보다 더 자주성과 차별성이 없는 복제 위성정당이나 분신 위성정당을 정당법이 허용할 리 만무하다고 봐야 한다.
4+1협의체, 위성정당금지법안을 공동발의하고 여론전에 나서라
미래한국당에 대해선 선관위가 위와 같은 법해석을 통해 정당등록을 거부하는 게 최선의 대응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거법개정을 이뤄낸 민주당, 바른미래당, 정의당 등 4+1정당이 개정선거법을 무력화할 임박한 위협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고 있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직무유기다. 실은 선거법개정의 막판협상국면에서 4+1의 누구라도 위성정당금지조항을 내놓았더라면 미래한국당 따위가 등장하진 않았을 게다. 당시 위성정당금지조문이 제출됐더라면 4+1의 최종합의안에 반영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법내용으로 보나, 법감정으로 보나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당연한 원칙규범이기 때문이다.
위성정당금지원칙은 헌법과 정당법에 명문의 규정이 없었어도 계속해서 불문율로 존재해왔다고 할 수 있다. 정당법상의 정당개념요건도 위성정당을 원천 배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바른미래당, 정의당 등 4+1정당들이 명문의 금지조항을 당장 공동 발의하는 건 현 상황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한국당을 제외한 4+1정당들의 대표와 소속의원(재적과반수)이 위성정당은 금지대상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을 국민과 선관위에 분명하게 알릴 수 있다. 4+1이 위성정당금지법리를 공유하고 한국당에 십자포화를 집중하면 강한 금지여론이 일어날 수 있다. 둘째, 법안공동발의를 계기로 압도적인 위성정당금지여론을 조성하는 데 성공할 경우 4+1은 한국당의 막판포기를 이끌어내고 민주당의 막판편승을 막아낼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선관위에도 엄청난 국민여론의 압력이 가해져서 선관위가 움직이기도 쉽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특정정당을 위한, 특정정당에 의한, 특정정당의 위성정당 창당은 헌법과 정당법, 개정선거법이 결단코 용인할 수 없는 탈법목적의 권리남용행위다. 설마하니 2020년의 대한민국 법질서가 분신변장술을 동원한 특정정당의 탈법행위에 속아 넘어갈 만큼 멍청하진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선거 및 정당 전문 헌법기관인 중앙선관위가 하루바삐 나서서 이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선관위는 지금에라도 한국당의 ‘위성정당’ 전술이 정당한 권리행사인지 부당한 권리남용인지, 미래한국당이 정당법상의 정당개념에 부합하는 진성정당인지, 위장정당인지를 지체 없이 판단해야 한다. 물론 이건 드물게 ‘답정너’ 문제이긴 하다. 4+1정당도 하루바삐 위성정당 금지법안을 공동발의하고 위성정당 금지여론 확산에 팔을 걷어붙임으로써 선관위의 위성정당 불허판정과 한국당의 위성정당 포기선언을 이끌어내야 한다.
두말할 것 없다. 개인의 위장전입도 최장 3년의 징역형으로 엄벌하는 대한민국의 법질서가 최소한 5천명의 당원을 위성정당으로 위장전입시켜 비례의석을 도둑질하겠다는 한국당의 놀부 심보에 더 이상 농락당할 수는 없다. 미래한국당은 다음 주중으로 중앙당 창당을 마치고 중앙선관위에 정당등록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때 중앙선관위가 위성정당의 실질을 꿰뚫어보고 정당등록을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민주적 선거질서 교란행위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소박한 믿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 곽노현 징검다리교육동동체 이사장 / 프레시안
이념·세대·성 대결 갈수록 심각…
조국 사태’ 두 쪽 난 사회의 민낯 드러내 / 10명 중 6명 “朴정부 때보다 갈등 늘어” / 88%가 “이념 갈등 심각한 수준” 답변 / 朴 탄핵갈등 극심 2016년보다 높은 비율 / 韓 사회통합수준 OECD 국가 ‘최하위권’ / 스웨덴 수준 개선 땐 GDP 200조 늘어 /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정파성 갖는 한계” / 전문가 “국회 차원 갈등관리위 만들어야
지난해 ‘조국 사태’는 극단의 대결 정치와 진영·이념 갈등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분열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경자년(庚子年) 새해에도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갈등과 대립 양상은 여전하다. 서울 광화문광장 등 주요 도심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이념·계층·세대·남녀 관련 각종 집회가 끊이지 않는다. 이 와중에 21대 국회의원을 뽑는 4월 총선은 반목과 대립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 공산이 크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0일 취임사에서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예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며 큰소리쳤던 장면이 무색할 지경이다. 실제로 문재인정부 들어 각종 사회 갈등이 더 첨예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현 정부 들어 이념·남녀 갈등 더 첨예해져”
시민단체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가 지난해 12월27∼30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9 한국인의 공공갈등 의식조사’ 결과가 대표적이다. 전임 정부 대비 갈등 증감 정도를 묻는 문항에 응답자의 59.6%가 “늘었다”고 답했다. 같은 조사에서 문재인정부 1년차(22.9%)와 2년차(52.4%)에 비교해 크게 증가한 것이다.
특히 보수·진보 진영 간 이념 갈등은 더욱 격화하는 양상이다. 갈등해소센터의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이념 갈등의 심각성 인식률은 88.4%였다. 2018년보다 5.6%포인트 증가했으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찬반 대립이 극심했던 2016년(84.8%)보다도 높다.
국가승인통계인 ‘2018년 사회통합 실태조사’(한국행정연구원) 결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 2018년 한국사회의 이념 갈등 심각도 비율은 87.3%. “(약간·매우) 심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2017년(88.0%)보다는 줄었지만 전 정부 2년차인 2014년(85.2%)보다는 늘었다. 이념 갈등만이 아니다. 세대 갈등은 2014년 62.3%에서 2018년 64.4%로, 남녀 갈등은 47.3%에서 52.0%로 늘었다. 갈등해소센터의 2019년 조사에서도 세대·남녀 갈등은 각각 65.7%와 45.0%로, 5년 전보다 각각 1.7%포인트, 14.3%포인트 늘었다.
이런 사회 갈등을 부추긴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주로 정치권과 언론이 지목된다. 갈등해소센터에 따르면 ‘집단 사회갈등에 책임이 있는 집단’을 꼽아달라’(복수응답)는 문항에 응답자의 93.1%는 ‘국회’를, 90.5%는 ‘언론’을 지목했다. 이어 중앙정부(83.8%), 법조계(79.2%), 지방정부(75.6%), 노동계(74.3%) 등의 순이었다.
물론 다원화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사회 갈등은 불가피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당연한 측면도 있지만 문제는 갈등의 내용과 결과가 대부분 나쁘다는 것이다. 이강원 갈등해소센터 소장은 “민주화 사회에서 공공 갈등은 필연적”이라며 “하지만 갈등이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양상으로 장기화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정파적… 초정파 기구 설치해야”
한국사회의 갈등은 세계적으로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이념적 대립지수와 계층 간 지니계수 등 6개 갈등요인과 정부 신뢰도, 대의제 등 11개 갈등관리 지표를 종합평가한 행정연구원의 사회갈등지수를 통해 본 우리의 사회통합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OECD 36∼37개 회원국 중 2005년 31위(1.082), 2010년 32위(0.984), 2015년 32위(1.025)를 차지했다.
박준 행정연구원 사회조사센터 소장은 “경제·사회구조개혁과 정치개혁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슈에 대한 입법이 갈등으로 지연될 경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우리의 갈등지수가 스웨덴 수준(0.210)으로 감소할 경우 국내총생산(GDP) 증가규모는 200조원에 육박한다는 게 연구원 측 분석이다.
소모적 사회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중재 그룹으로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부가 우선 지목된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신년 기자회견에서 “소통과 협치, 통합과 같은 것이 참으로 절실한데 현실은 너무나 거꾸로 가고 있다”며 “상당 부분은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사회 통합의 첫 단추는 어디서 끼워야 할까. 가치나 이해가 중립적인 전문가 그룹이 주축이 된 독립 기구를 중심으로 공론의 장이 조성되는 게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갈등해소센터는 “사회 갈등 해소에 공론화가 기여한다는 의견이 60.5%”라고 밝혔다.
2014년 ‘공무원연금개혁을 위한 국민대타협기구’와 같은 여·야·정, 전문가가 참여하는 ‘국회 입법갈등관리위원회’ 신설을 제안했던 박준 소장은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정파성을 갖는다”며 “갈등관리위원회는 중립성 확보를 위해 국회의장 직속 기구로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진 국회미래연구원장도 같은 생각이다. 박 원장은 “한국의 정치 지형은 협상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보다 협상 판을 깨는 게 더 유리한 구조”라며 “첨예한 사회 갈등 이슈에 대해 중립적인 판단을 내리고 이해 당사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공론화위원회가 국회 내에 설치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역사의 더께/아비규환1]잠시 한눈판 사이 뼈만 남은 아기시신
"조카가 산에서 큰 딸 정아의 시신을 찾아내었다. 목이 반 넘게 잘린 채로 바위 사이에 넘어져 있었다. 차고 있었던 패도(작은 칼)가 그래로 있고 손이 평소와 똑같구나."
경남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선비 정경운(1556~1610)이 쓴 <고대일록>은 임진왜란의 참혹한 실상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정경운은 정유재란의 난리통 속에서 맏딸을 잃는다.
1597년(선조 30) 8월 조선을 다시 침범한 왜군은 곧바로 함양 지방을 급습한다. 다음은 <고대일록>의 내용이다. "다른 길로 몰래 다가온 왜적 10여 명이 갑자기 큰소리로 부르짖고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쳐들어 왔다. 그러자 한꺼번에 달아나던 사람들이 산골짜기에서 넘어져서 굴렀다. 들고 온 재물도 버려두고 몸만 피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날이 저물 무렵에 다시 모여 가족들을 찾아보니 큰 딸과 막내 딸, 노비 3명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왜적이 물러난 것을 기다려 정경운은 정신없이 딸들을 찾기 시작했다. "혼자서 딸을 찾아서 백운산(함양과 전북 장수 사이에 있는 산)계곡을 돌아 다녔다. … (중략) … 막내딸 단아는 다행히 계집종의 도움으로 살아 있었다."
그러나 장녀 정아는 끝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야 만다. 왜적에게 욕을 당할까 걱정해 아버지에게서 패도를 받은 이후로 한 번도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았던 딸이다. 왜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일부러 몰골을 추하게 했던 것이다.
정경운은 왜군에 무참히 살해당한 딸을 시신을 부여안고 "의복을 모조리 잃어 버렸으니 시신을 싸맬 천 조차도 없구나. 우리 딸이 불쌍해서 울음을 그칠 수가 없다"라고 절규했다.
포로로 일본에 끌려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해 조선으로 되돌아온 강항(1567~1618)도 아비규환의 참상을 낱낱이 보고한다. 강황은 서인의 사상적 원류인 우계 성혼의 제자로 전주에서 개최된 별시 문과에 급제해 전쟁 전 공조좌랑, 형조좌랑(정6품 관직)의 벼슬을 지냈다.
그가 쓴 <간양록>에 의하면, 강항은 재침한 왜군을 피해 식솔들을 이끌고 피난가던 중 왜선에 발각된다. 모두 왜군에 죽지 않기 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둘째 형과 자신의 자식 둘이 물에 빠져 죽는다. <간양록>은 "어린 자식 용과 딸 애생이 밀려드는 파도에 휩쓸려 `으악, 으악, 칵, 칵-` 기막힌 울음소리를 내다가 그만 물 속에 삼켜지고 말았다"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2. 아이들. 잭 런던. 20세기 초. 미국 헌팅턴도서관. 아이들은 궁핍해 보이지만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어린이들이다
자식까지 잃은 강항은 체념했다. 체포된 직후 통역을 통해 적에게 "왜 죽이지 않는 것이냐"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왜군은 "사모(관모)를 쓰고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 관원이 아니더냐. 묶어서 일본으로 보낼 것"이라고 답했다.
일본으로 잡혀가는 과정도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겨우 여덟 살이었던 조카가 갈증이 나 바닷물을 들이켰다가 설사를 하자 왜군이 성가시다는 듯 아이를 바다에 집어 던져 버렸다. 조카는 바다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아버지!, 아버지!"를 외치다 처참하게 죽어갔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걸리면 극형에 처해졌다. 전라좌병영 우후(虞候·종3품의 무관) 역시 강항처럼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간양록>에 의하면, 우후는 병사 몇몇과 함께 배를 마련해 탈출을 기도했다. 곧바로 왜군이 뒤쫓아 왔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 우후는 칼을 꺼내 자신의 배를 관통시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왜군들은 죽은 우후와 그 일행을 데려와 모두 수레에 걸어 갈갈이 찢어 버렸다.
강항도 여섯 번이나 탈출을 시도해서 매번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한 일본 승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간양록>은 회고한다. 강항은 일본에 억류돼 있는 동안 일본 주자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에게 주자학을 전수해줬다.
설상가상 곳곳에서 전염병이 창궐했다. 전염병을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고대일록>은 선조 26년(1593) 5월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맡아 동분서주하던 학봉 김성일(1538~1593)이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기술했다.
"김성일이 진주에서 사망했다. 그는 강직하고 방정하며 정직해 권세에 맞서다가 뭇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다. … (중략)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초유사가 되었다. 뿔뿔이 흩어진 병졸들을 불러모아 의병부대에 모일 것을 권장했다. 한 지방을 막고 흉악한 적 무리들의 칼끝을 차단 하니 여러 고을 사람들의 그에게 의지함이 실로 컸다. 그런 중 전염병에 걸려 진주에서 사망하니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탄식하며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정경운은 자신의 딸도 전염병으로 잃었다. <고대일록>은 "막내 딸이 요절하였다. 전염병에 걸려 오한과 설사로 고생하다 죽으니 슬프기만 하구나"라고 써내려 갔다.
사진3. 강황의 선인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던 강항은 포로생활의 참상을 기록한 `간양록`을 남겼다.
사진설명사진3. 강황의 선인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던 강항은 포로생활의 참상을 기록한 `간양록`을 남겼다.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못해 흉년이 되풀이 되면서 백성들은 최악의 기아에 허덕였다. 점잖은 체 하던 양반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구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함양의 선비 정경운은 <고대일록>에서 "시장에서 양식을 구걸하였다. 얼굴이 이렇게나 두꺼울 수 있는 것인가. 부끄러워 마치 시장판에서 매를 맞는 것 같으니 곤궁함에 마음이 상하는구나"라며 비통해했다. 배고픔 앞에서는 체면이고 뭐고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고대일록>은 "정사연을 만나 개령·김산(경북 김천)에서 난리를 겪고 있는 궁인(宮人) 등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말을 들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라고 놀라면서 "오늘의 세상이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인 지 혼자서 한탄하였다"고 넋두리를 했다.
임진왜란 수습을 총괄한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저술한 <징비록>의 기록도 다르지 않다. <징비록>은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였고 전염병이 창궐해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고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됐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고 개탄했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도 전쟁이 길어지면서 식인 행위가 만연했다고 진술한다. 이에 따르면, 개성의 한 백성이 한 살배기 아이를 길가에 내려놓고 잠시 쉬는 사이 두 사람이 아이를 훔쳐 달아났다. 그들을 끝까지 쫓아가니 아이는 이미 끓는 물속에서 푹 삶아져 죽어 있었다.
범인들을 묶어 관아로 끌고 가 실상을 고하였다. 죄인들이 자백을 하지 않자 죽은 아이를 증거로 제시하려고 찾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죽은 아이는 뼈만 남아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나졸들이 배가 고파 죽음을 무릅쓰고 아이를 먹어치워 버린 것이었다. -계속-
[배한철기자][ⓒ 매일경제
작년 한 해, 신문은 이런 오보를 정정했다
[민언련 신문모니터위원회 보고서] 2019년 '바로잡습니다' 살펴봤더니
▲ "재발 방지 약속"을 "재발 약속"으로 잘못 쓴 2019년 1월 7일자 <중앙일보> 사설 ⓒ 중앙일보
2019년 1월 7일자 <중앙일보> 사설 "누구를, 무엇을 위한 한‧일 갈등인가"는 '레이더 공방'에 대한 한국과 일본 정부의 대응을 비판했습니다. 한국 군함이 화기관제 레이다를 쏘았다는 공방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었는데요. 사설은 "정확한 사실을 밝혀 한국에서 화기관제 레이더를 조사한 게 맞는다면 정식으로 사과하고 재발을 약속하면 끝날 사안이다"라고 썼습니다.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 되는데, '재발'을 약속하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 사설은 사실 작고 황당한 실수입니다. 그러나 언론 보도에는 이처럼 황당한 실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대한 내용이 사실과 달라,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오보도 많습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신문모니터위원회는 작년 한 해 신문에서 어떤 오보가 있었는지를 모니터했습니다. 오보는 2019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언론사에서 발행한 정정보도 기사 '바로잡습니다'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정정 보도는 인쇄 매체와 방송 등 미디어에서 편파, 허위, 과장 기사가 보도되었을 경우 그것을 진실로 정정하는 보도입니다.
가장 정정보도가 많은 언론사는 <조선일보>
▲ 2019년 언론사별 정정보도 횟수(지면 "바로잡습니다"기준) ⓒ 민주언론시민연합
가장 정정보도가 많았던 언론사는 <조선일보>입니다. 작년 한 해 주요 일간지에서 나온 정정보도 건수는 총 69건이었습니다. 그 중 <조선일보>가 23건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2위는 <중앙일보>(14건), 3위는 <한겨레>(13건), 4위는 <한국일보>(11건)입니다.
정정보도가 적다고 실수나 허위·왜곡보도가 적은 것은 아닙니다. 언론사들이 자사의 모든 오보를 정정보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정보도가 많다고 잘못된 언론사인 것은 아니고, 반대로 정정보도가 적다고 반드시 좋은 언론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언론사의 모든 오보를 다 찾을 수는 없기에 정정보도를 기준으로 조사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로또 번호를 잘못 기재하는 것부터 특정 작가의 성 정체성에 대한 언급까지, 언론사들의 오보 범위는 다양했습니다.
언론사들이 가장 많이 한 실수는 단순 표기 실수였습니다. 전체 69건 중 38건으로 절반 이상이 단순 표기 실수였습니다. 단순 표기 실수는 이름이나 숫자를 잘못 표기하는 등의 실수를 의미합니다. 그다음으로는 사실 확인 미진이 26건으로 2위, 인용 오류가 4건으로 3위를 차지했습니다. 69건의 정정보도 중 6건의 보도가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을 받았습니다. 6건 중 4건은 사실 확인 미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으로, 8억 6000만 달러는 8600억 달러로
▲ "단순 표기 실수" 유형 2019년 언론사별 정정보도 횟수(지면 "바로잡습니다" 기준) ⓒ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사들이 한 실수를 유형별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단순 표기 실수를 가장 많이 한 언론사는 <한국일보>입니다. 단순 표기 실수 오보 38건 중 11건은 <한국일보> 보도입니다. 2위는 10건의 단순 표기 실수를 한 <조선일보>, 3위는 9건의 실수를 한 <한겨레>입니다. <중앙일보>는 5건, <경향신문><서울경제><한국경제>는 각각 1건의 단순 표기 실수를 했습니다.
민언련 신문모니터위원회에서 분류한 단순 표기 실수 유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물이나 직함, 회사명을 잘못 표기한 경우는 이름 표기 실수로 분류하였습니다.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하는데, 재발을 약속한다고 하거나, 같은 단락을 2번 게재하는 등 황당한 실수를 한 경우는 실수로 분류하였습니다.
그 이외 숫자를 잘못 표기한 경우 숫자 오류로, 취재원이 정보를 잘못 전달한 경우는 취재원의 실수로, 날짜를 잘못 표기한 경우는 정보 오류로, 지명을 잘못 표기한 경우에는 지명 표기 오류로 분류했습니다. 맞춤법을 틀리면 맞춤법 표기 오류로 분류했습니다.
▲ 생존해 있는 손명순 여사를 고인으로 표기한 2019년 2월 18일자 <한겨레> ⓒ 한겨레
언론사들이 가장 많이 한 단순 표기 실수는 이름 표기였습니다. 전체 38건의 오류 중 18건을 차지합니다. <한겨레>는 "YS의 5.18 바로세우기. 망언으로 허문 한국당"(2019/2/18, 현재 삭제됨)에서 고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를 '고 손명순 여사'로 표기했습니다. 손명순 여사는 살아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한국일보> 논설위원 칼럼 "지평선/조국의 '애국'과 '이적'"(2019/7/22)에서 조국 전 민정수석을 정무수석이라고 표기하는 등 여러 가지 실수가 있었습니다.
단순 실수 및 숫자 표기 오류도 많았습니다. 전체 38건의 정정보도 중 9건이 단순 실수, 7건이 숫자 표기 오류입니다. 기사에서 숫자는 주로 취재대상의 규모를 짐작게 하는 데 쓰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겨레>는 "프리즘/동맹의 '갑질'"(2018/12/31) 기사에서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이 달러 환산 시 8600억 달러라고 표기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분담금은 8억 6000만 달러였습니다.
잘못된 사실로 취재 대상 비판
▲ "사실확인 오류" 유형 2019년 언론사별 정정보도 횟수(지면 "바로잡습니다" 기준) ⓒ 민주언론시민연합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나온 보도는 사실 확인 오류로 분류하였습니다. 잘못된 사실을 가장 많이 보도한 언론사는 <조선일보>였습니다. 전체 26건 중 11건이 <조선일보>의 사실관계 오보입니다. 그 뒤를 <중앙일보>가 7건으로 2위, <한겨레>가 4건으로 3위를 차지했습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보도들은 취재대상과 독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특히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종종 취재대상을 비판하는 데 쓰이기도 해 문제입니다. <조선일보>는 "공공기관 성과급 반납시켜 모은 돈 505억, 사회적협동조합에 6억, 한겨레 신문에 2억"(2019/10/24) 기사에서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한겨레 신문 장학사업'에 2억 3000만 원을 썼다고 보도했습니다.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친정권 단체들에 기형적 지원을 하는 데 쓰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공공상생연대기금의 해명자료 "보도자료/2019.10.14.(월)자 <조선일보> 기사 관련 설명"(10/14)과 <한겨레> 보도 "장학사업 없는데 '장학사업에 2억' 한겨레, 조선일보에 정정보도 요청"(10/15)에서 확인된 사실에 따르면, 2억은 공공기관 비정규직 및 저임금 노동자와 그 자녀들의 장학사업을 위해 쓰인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2200만 원 정도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공공상생연대기금이 공동주최한 토론회 비용으로 쓰인 돈이었습니다.
정확한 확인 없이 게재한 통신사 사진
▲ 42년 전 사고 사진을 잘못 게재한 2019년 6월 1일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사진과 관련된 오보도 있었습니다. <조선일보>는 "9.11 악몽에 떤 뉴욕 시민들… 맨해튼 51층 건물 옥상에 헬기 불시착"(2019/6/12) 사진 보도에서 뉴욕 맨해튼 악사(AXA)빌딩 옥상에 불시착한 헬기라며 파손된 헬기가 있는 사진을 사용했지만, 사진의 파손된 헬기는 1977년 5월 16일 뉴욕 맨해튼 팬암 빌딩 옥상에 불시착한 헬기였습니다.
<조선일보>는 정정보도문에서 "AP 통신에서 해당 사고와 관련해 11일에 참고용으로 전송한 자료사진"이었다며 "신문 제작 과정에서 자료사진임을 확인하지 않고 전날 발생한 사고 사진으로 오인해 42년 전 사고 사진을 잘못 게재했다"며 사과했습니다.
통신사 사진을 정확히 확인하지 않아 일어난 사고는 또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2019년 6월 1일 자 사진보도입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일어났던 유람선 사고를 사진으로 보도하면서, <조선일보>는 '피해자 가족이 피해자의 조카가 써 보낸 편지를 들고 있다'라고 사진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사진 속 손은 연합뉴스 기자의 손이었습니다. 통신사의 사진을 명확한 팩트체크 없이 보도하는 것을 넘어 사건에 대한 언론사의 상상력까지 덧붙인 것입니다.
때로는 말을, 때로는 사람을 왜곡
인용 오류는 총 4건이었습니다. 그중 2건은 <조선일보>, 나머지 2건은 <중앙일보>의 보도입니다. 인용 오류는 주로 인용자의 말을 왜곡하는 형태로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일보>의 2019년 4월 19일 자 "경실련 토론회 '민주당, 중남미형 좌파 정당'"(현재 삭제됨) 기사가 그 예입니다. 해당 기사는 박상인 경실련 재벌개혁본부장이 여당을 가리켜 '중남미형 좌파 정당'이라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박상인 본부장은 "한국이 근본적인 개혁을 못할 경우, 좌파는 재정을 풀어서, 우파는 규제를 풀어서 번갈아 집권하고 주기적으로 경제 위기를 맞는 중남미형 국가가 될 수 있다"라며 "이대로 가면 더불어민주당은 중남미형 좌파정당, 자유한국당은 중남미형 우파 정당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한국 정치 구도가 중남미형 정치 구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왜곡하여 여당을 '중남미형 좌파 정당'으로 낙인찍는 보도를 한 것입니다.
▲ 성적 지향을 밝힌 적이 없는 작가를 "커밍아웃한 게이 작가"로 소개했다가 바로잡은 <중앙일보> ⓒ 중앙일보
인용자의 말뿐만 아니라 인용자를 왜곡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중앙일보>는 "문장으로 읽는 책 –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2019/8/8)기사에서 박상영 작가를 커밍아웃한 게이 작가라고 보도했습니다. 자신이 '성 소수자'라고 공식 발표를 한 적이 없는 작가를 '게이 작가'라 보도한 것입니다.
이에 박상영 작가는 자신의 SNS를 통해 "퀴어 소설을 쓴다는 이유로 성 정체성과 관련해 불편한 시선을 받고 있다"라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오보는 개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사실 확인 오류부터 사람을 왜곡하는 보도까지, 오보는 언론사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트립니다. 팩트체크가 미흡한 언론사 보도 구조의 방증이기도 합니다. 언론사의 실수는 독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취재원과 독자에게 피해를 줍니다. 특히 뉴스의 소비속도가 빨라지고 기사의 지속성이 짧은 지금의 언론 환경에서는 잘못 나간 기사를 바로잡기 힘들어 더더욱 작은 오류도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에는 언론사들이 철저한 검증을 바탕으로 실수를 줄이기 바랍니다.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2019/1/1~2019/12/31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한겨레, 서울경제, 한국경제 지면에 보도된 '바로잡습니다' 기사와 원본 기사들
공시형(ccdm1984) / 오마이뉴스
최근 5년 원양어업 업체 줄고 매출액·당기순이익은 늘어나
2018년 기준 해수부 조사 결과
최근 5년간 원양어업에 종사하는 기업체와 어선·종사자 수는 꾸준히 감소했지만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은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원양산업협회(KOFA) 해외수산협력센터는 최근 해양수산부 주관으로 발간한 ‘2019년 원양어업 통계조사’ 보고서에서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3일 밝혔다. 이번 통계연보에는 2018년 기준으로 원양어업의 업체·어선, 생산·수출, 종사자, 재무 현황 등 원양부문 주요 통계를 수록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원양어업 허가를 받은 기업체는 2014년 75곳에 달했으나 2015년 67곳, 2016년 51곳, 2017년 44곳, 2018년 43곳으로 해마다 줄었다. 허가 받은 업체 중 실제 조업에 나선 곳도 2014년 54곳에서 2018년 42곳으로 감소했다.
허가받은 어선 척수는 2014년 333척에 이르렀으나 2015년 289척, 2016년 255척, 2017년 221척, 2018년 214척으로 줄었고 실제 조업에 나선 어선도 2014년 261척에서 2018년 211척으로 감소했다. 원양어업 종사자는 2014년 1만1364명에서 2018년 9984명으로, 생산량도 같은 기간 66만9140t에서 46만2125t으로 줄었다.
반면 매출액은 전반적으로 상승세를 보였다. 2014년 3조2087억 원에 달하던 매출액은 2015년 3조2416억 원, 2016년 3조4863억 원, 2017년 3조9012억 원, 2018년 3조6683억 원으로 해마다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당기순이익은 2014년 258억 원에서 2018년 1652억 원으로 6.4배가 향상됐다.
한편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실제 조업 기준으로 단독과 합작을 포함한 원양어업 총규모는 67개사, 260척이었으며 생산량은 87만7731t이었다. 원양어업 생산량 중 어류(연체동물 갑각류 제외)는 76만6549t으로 우리나라 전체 어류 생산량의 47.2%를 차지해 연근해 어업이나 양식 어업보다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원양산업종합정보시스템(http://www.ofis.or.kr) 정보광장 통계자료 메뉴에서 내려 받을 수 있다.
국제신문 유정환 기자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24)불쾌하다고?…맞아, 그걸 노렸어! 자본주의 질서에 한 방 날리다
초현실주의와 마네킹
일본 사진작가 가타야마 마리는 희귀성 장애를 가진 자신의 몸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한다. 패치워크 직물, 장식된 쿠션과 옷을 자신의 육체와 바느질로 결합하거나 배치한다. 자신의 육체를 이질적 혼종의 존재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세상의 편견에 구속되지 않고 사물화된 육체를 넘어선다.
■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바뀌는 ‘불쾌한 골짜기’
유사인간에 생기는 호감도
비호감으로 떨어지는 ‘언캐니 밸리’
초현실주의자, 마네킹에 대한 불쾌감 예술에 도입
프로이트 “밀랍인형 등 유사인간 사물들
삶과 죽음의 혼란 일으키며 일종의 쾌감 줘”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1970년 인간이 유사인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 이론을 발표했다. 밀랍인형과 같은 유사인간을 보고 생기는 호감과 비호감의 그래프를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즉 ‘불쾌한 골짜기’라 했다. 그래프로 볼 때 그 대상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인간을 닮으면 호감도가 곤두박질친다. 곧 그것에 익숙해지면서 비호감은 호감으로 바뀌는 골짜기형 그래프선을 만든다. 인간을 그대로 닮은 인형과 로봇들이 쏟아지는 오늘날, 그래서 많은 제작자들은 ‘불쾌한 골짜기’에서 보이는 불쾌감에서 쾌감으로 바뀌는 그 지점에 신경 쓰고 있다.
프로이트는 가장 불쾌한 사물로 “밀랍인형, 마네킹, 자동인형”을 꼽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런 사물들이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비인간을 결합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일종의 혼란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 감정에서 일부 사람들은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혼란’의 감정이 유년기에 느꼈던 “실명, 거세, 죽음”에 대한 불안과 그 속에서도 살고자 발버둥 치던 원초적인 감정이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유사인간 사물들이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혼란’을 일으키면서 일종의 쾌감을 준다는 것. 만약 ‘불쾌(언캐니)’에 대한 프로이트 이론이 맞는다면, 마네킹이나 휴머노이드의 일차적 목표는 인간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불쾌함이 유쾌함으로 전환되는 또 다른 쾌감도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 ‘패션인형’에서 마네킹으로
아직 패션 카탈로그가 없던 14세기부터, 왕실 간에 최신 유행 패션을 과시하기 위해 인형이 교환되었다. 특히 프랑스 왕 앙리 4세(1553~1610) 때 이 ‘패션 인형’이 그의 약혼녀 마리아 데 메디치(1575~1642)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프랑스 패션 스타일로 꾸며진 이 인형은 피렌체의 새 신부가 혼수 장만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또한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 시기에 베르사유 궁정의 최신 패션 경향을 반영해 일상복은 작은 인형으로, 만찬용 고급 의상은 큰 인형으로 재현돼 매달 유럽의 궁정에 보내졌다. 나무나 석고로 만들어진 몸통에 유리 눈을 박고 머리는 실제 머리카락을 지니고 팔다리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패션 인형’을 통해 파리 스타일이 유럽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유럽 각국 사람들은 이 인형을 보기 위해 관람료를 지불해야 했으며 장인들은 고액을 지불하면서까지 이 인형을 가져다가 옷 치수를 재고 패턴을 유지한 채 고객의 몸에 맞게 의상을 제작했다. 그런데 영국 사람들은 프랑스의 ‘패션 인형’을 그들 나름대로 새롭게 변용해 발전시켰다. 18세기 영국에 있었던 ‘패션 인형’의 모습이 화가 조지프 라이트(Joseph Wright, 1734~1797)의 ‘고양이 옷 입히기(Two Girls Dressing a Kitten by Candlelight)’에 나타난다. 우측 하단에 누워 있는 인형은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프랑스산 ‘패션 인형’이다. 마네킹이 등장하는 19세기 이전까지 ‘패션 인형’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20세기 더 이상 마네킹에 거부감 안 느껴
사물이 인간의 대체물로 다시 맹종케 해
초현실주의자들 과감하게 톱·망치 꺼내
사지 절단하고 이질적 재료 다시 이어 붙여
합리화된 자본주의에 불쾌감 선사
1900년대 윈도 디스플레이에 유행 패션이 전시되면서 마네킹이 일반화되었다. 이 마네킹은 거북함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 모양이나 크기가 인간 신체와 거의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신 마네킹이 사용되지 않다가, 1920년대에 마네킹에 친숙해지자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밀랍으로 제작된 이 마네킹은 그 말랑말랑한 피부 질감이 시각적으로 느껴지면서 친근감이 더해졌다.
■ 초현실주의의 등장과 육체의 사물화
마네킹에 대한 불쾌감과 쾌감을 예술계에 계획적으로 도입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다. ‘초현실주의(Surrealisme)’라는 용어를 처음 도입한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는 마네킹을 모티프로 한 일련의 시들을 썼다. 또한 아폴리네르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1888~1978)와 그의 동생 알베르토 사비니오(1891~1952) 역시 마네킹을 회화의 주제로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1891~1976)는 ‘신부의 해부학’(1921)을, 사진작가인 한스 벨머(1902~1975)는 기형적인 마네킹들의 사진집 <인형>(1934)을 내기도 했다. 초현실주의 작품에는 온통 마네킹들이 넘쳐났다.
20세기 초에 초현실주의자들이 등장한 이유가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기계는 장인의 도구이자 보조물이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기계는 인간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인간이 스마트기기를 만들었지만 그 작동원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기계를 다룰 수가 없어서 기계의 작동 방식에 자신을 맞추는 것과 같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이 기계(의 작동 방식)를 닮아가고 기계는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인간은 기계의 도구이자 기계의 보조물이라는 자각이 시작되었다.
사실 우리는 마네킹을 볼 때마다 인간의 육체를 사물(상품)로 개조하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인간을 모방해 유행 패션과 헤어스타일, 메이크업까지 잔뜩 갖춘 이상적인 마네킹을 만들었지만, 한편으론 사람이 마네킹을 모방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신체를 직접 만들어 나가는 것도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를 들어,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다이어트를 하며 자신이 입는 옷의 색상 조화에 신경을 쓰는 것도 사실은 자신의 이상적 모습에 육체를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근사한 마네킹이나 모델의 몸매를 따라 하는 것은 주체성을 잃고 육체가 사물이 되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당시 마네킹은 인간의 모방품일 뿐만 아니라 끔찍한 대체물도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로봇이 우리 인간과 똑같아지는 것이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사물처럼 취급되는 것은 아닌지 서글프기도 하다.
독일의 대표적 초현실주의 화가인 막스 에른스트의 ‘신부의 해부학’(1921·왼쪽 사진)과 이탈리아의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헥토르와 안드로마케’(1912). 이들은 마네킹을 작품의 모티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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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이 된 육체를 넘어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불쾌가 유쾌로 넘어가는 그 지점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들은 패션계에서 친근하게 사용되던 마네킹이 다시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나무, 금속, 플라스틱, 유리, 털 등 다양한 재질로 마네킹 부위를 제작해 절단하고, 때로는 다른 물질들과 결합시켜 ‘혼종’의 형태로 만들었다.
이들이 이렇듯 불쾌한 것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 작성한 <초현실주의 선언문>(1924)에 잘 나타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토대로 의술을 펼친 군의관이기도 했던 시인 브르통은 선언문에서 마네킹과 ‘경이(merveilleux)’를 연결시키고 있다. 육체의 사물화인 마네킹을 보면서 인간은 불쾌하고 섬뜩하게 느낀다. 하지만 생명성과 물질성이 섞여 있는 그 마네킹으로부터 어떤 ‘경이로움’을 보게 된다. 불쾌한 것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삶과 죽음, 또는 생명과 물질이 뒤섞인 혼란에서 오는 쾌감이었다. 브르통은 이것을 유쾌한 감정이자 아름다움이라 여겼다.
어떤 끔찍한 충격은 억누르기만 할 수 없는 법이다. 개인은 그 감정을 억누르고 있지만 불안과 공포를 일으킨 사물은 마음에 남아 있다. 공포심을 주었던 대상은 일반적으로 반복되면서 우리를 괴롭히는데, 이것을 ‘반복 강박’ 또는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사물이 재등장할 때 불안감은 잦아들고 어떤 쾌감이 생기는데, 이것을 ‘언캐니’라고 한다. 이 단어를 ‘불쾌한’이라고 번역하면 또 다른 매혹적인 감정의 내포를 담지 못하기 때문에 외래어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한 ‘불쾌한 골짜기’에서 비호감으로 하락했던 선호도가 다시 호감으로 바뀌는 곳이 바로 ‘언캐니’의 지점이다. 요즘 한창인 각종 좀비류 문화 콘텐츠들을 볼 때 좀비는 처음에는 굉장히 거북한 존재이지만 무엇인가 다른 감정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브르통이나 프로이트의 설명처럼 ‘불쾌함’이 쾌감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좀비가 생명과 죽음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존재, 그러니까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이중적 혼종의 존재가 오히려 더 많은 매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삶과 죽음의 이중성을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기계 상품 속에서 보았다. 그들은 마네킹을 보면서 이런 이중성을 직관적으로 느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20세기 사람들이 어느덧 마네킹에 익숙해져 어떤 거부감도 없게 되자, 과감하게 톱과 망치를 들었다. 마네킹이 인간의 상징물로 옷을 입히는 도구가 아닌 이상, 또 그 사물이 인간의 대체물이 되어 인간을 맹종케 하는 이상 ‘토막 절단’을 계획한 것이다. 마네킹의 사지를 절단하고 이질적인 재료로 다시 이어 붙였다. 이들이 예술에 가한 새로운 버전은 “토막 절단(dismemberment)이 곧 구축”임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절단된 마네킹을 통해 이들은 합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 다시 불쾌감을 선사한 것이다.
■ 우리의 상처를 승화시키는 예술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자신의 육체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전시한 작가가 있다. 가타야마 마리(1987~)는 패치워크 직물, 장식된 쿠션과 옷을 자신의 육체와 결합하거나 배치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 다리와 손에 영향을 미치는 희귀성 장애를 갖고 태어난 그녀는 결국 아홉 살에 다리를 절단하고 보조기를 차고 생활했다. 기성복을 입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익숙해진 실과 바늘로 화려한 옷과 장식품들을 만든 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전시관에서 이질적인 재질로 그녀의 몸과 배열되거나 착용된 그의 사진 작품들을 보았을 때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학비를 벌기 위해 재즈바에서 노래를 불렀던 가타야마는 손님에게 “여자가 하이힐을 신지 못하면 더 이상 여자가 아니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의족에 맞는 하이힐을 제작해 보란 듯이 걸었다. 이것 때문에 ‘하이힐 프로젝트’가 탄생했다고 한다.
인간은 삶과 죽음이 뒤섞인 존재를 통해 경이로움을 느낀다. 자신 속에 갖고 있는 두 요소 중 죽음의 성질을 계속 억누르면 죽음은 자아로부터 분리되어 저승사자 내지 유령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육체의 사물화를 넘어서려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노력은 이 죽음에 직면해 그것을 승화하는 어떤 정신세계를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 하나의 예가 마네킹을 절단해 새롭게 배치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우리는 거기서 일종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 시대보다 더 상품화된 우리 육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가타야마는 자신에 대한 세상의 편견에 구속되지 않고 죽음과도 같은 육체, 사물화된 육체를 넘어서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육체를 이질적인 혼종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과거 모든 흔적들을 승화시켜 불쾌를 유쾌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상품이 되어버린 우리의 육체를 극복하기 위해 가타야마처럼 자신의 몸을 꿰매 작품을 만드는 바느질을 하고 싶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마네킹에서 느꼈을 그런 ‘경이로움’을 직접 체험하고 싶다
신종 코로나 ‘변종’ 나왔다… 인간 간 전염서 변이 일으킨 듯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신종 코로나)의 변종이 발견됐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4일 보도했다. 신종 코로나가 인간 간 전염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신종 코로나의 변종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변종 바이러스가 신종 코로나 완치 환자를 다시 감염시키거나 현재 사용 중인 검진 장비를 회피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SCMP에 따르면 상하이 파스퇴르연구소 연구진은 최근 중국 광둥성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신종 코로나 감염 가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가시적인(striking) 변종이 나타난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바이러스가 가족 간에 전파되면서 상당한 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됐다.
바이러스는 항상 변이를 겪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바이러스의 행동 양식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동의(synonymous) 변이 또는 침묵(silent) 변이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비동의(non-synonymous) 변의는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속성을 바꿈으로써 다른 환경에서도 적응 가능토록 할 수 있다.
파스퇴르연구소는 연구 대상 가족에게서 검출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서 두 건의 비동의 변의를 발견했다. 연구진은 지난달 말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에서 “이번 사례는 바이러스의 진화가 인간 대(對) 인간 전염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바이러스의 변이, 진화, 적응 과정을 면밀히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파스퇴르연구소는 최근 한 달 동안 중국 전역에서 신종 코로나의 비동의 변의 사례를 17건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신종 코로나가 얼마나 빠르게 변이를 겪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를 알아내려면 신종 코로나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해야 하는데 분석 작업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신종 코로나의 유전자 길이가 사촌격인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등 다른 바이러스보다 훨씬 길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는 염기쌍이 3만 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변이를 일으킨 신종 코로나가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확실치 않다. 중국 정부의 신종 코로나 대응에 자문을 맡은 추하이보 난징 동난대학 중증의료센터 교수는 “(변종 바이러스가) 반복적 감염을 일으킬 것이라는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만 이론적 차원에서는 변종 바이러스가 완치 환자를 다시 감염시키거나 검진 장비에서 발견되지 않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네소타대학 연구진은 최근 공개한 논문에서 특정 지점에 변이가 나타난 바이러스가 인간 호흡기 세포에 더욱 쉽게 흡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소수정당에 너무 높은 국회 문턱 | ① 선거운동 금지] 비례후보 연설 못하게 막아놔
위헌심판 청구 '3전 4기'
2016년 5명 재판관 위헌의견
소수정당의 국회 입성 문턱을 낮춘 것으로 평가되는 연동형비례대표제를 도입해놓고도 공직선거법은 여전히 비례대표후보자들의 연설과 대담을 못하게 막아놔 소수정당의 선거운동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0일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내일신문과의 통화에서 "비례대표후보자가 연설이나 대담을 못하게 하는 현 법률은 소수정당의 선거운동을 어렵게 만드는 대목"이라며 "지역구에 후보를 내는 경우 비례대표를 운동원으로 등록시켜 공개장소에서의 선거운동이나 대담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지역구에 후보를 많이 내지 못하는 소수정당의 경우엔 비례대표들이 아예 대외 연설을 통한 선거운동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1월14일 헌법재판소에 공직선거법 79조 1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며 "지역구 후보가 없는 지역에서 소수정당은 선거홍보물을 보내는 것 외에는 사실상 선거운동이 제한된다"고 강조했다. 선거광고는 자금력이 약한 소수정당엔 '그림에 떡'인데다 방송 토론은 국회의원수가 5명 이상인 정당만 허용돼 현행 규정이 소수정당에 크게 불리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2016년 9명 중 다수 위헌의견 = 비례대표후보자 연설 금지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3번이나 심의해 합헌 판결을 내렸다. 2004년과 2012년에 접수돼 2006년과 2013년에 판결이 내려졌고 2015년에 제기한 위헌심판 청구에 대해서는 2016년 12월 29일에 결론이 나왔다.
2016년 판결에서 박한철 김이수 이진성 안창호 강일원 등 5명의 재판관은 "비례대표국회의원후보자에게 지역구국회의원 후보자와 달리 공개장소에서의 연설·대담 등을 허용하지 않는 연설 등 금지조항이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선거운동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비례대표국회의원 선거에서 소수정당 내지 신생정당이 자신의 정강·정책을 알리기 위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선거운동방법은 극히 일부로 제한된다 할 것"이라며 "정당의 규모와 인지도에 관계없이 유권자를 접하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또 "공개장소에서의 연설·대담에 의한 선거운동은 후보자의 연설 등을 듣기 위해 일정한 장소로 모이는 유권자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후보자가 가정 등에 직접 방문해 유권자를 만나는 호별방문보다 불법이나 과열 양상의 우려가 적어 효율적인 홍보수단이라 할 수 있다"며 "연설 등 금지조항은 기회 자체를 전면적으로 박탈하고 있으므로 침해의 최소성 원칙에 위반된다"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특정지역구에 어떤 정당이 추천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가 없는 경우에 한하여 그 지역구에 해당 정당 소속의 비례대표 국회의원후보자 중에서 연설, 대담을 할 수 있는 사람 1인을 대표 연설·대담자로 등록하도록 한 다음 공개장소에서 연설·대담을 하도록 한다면 선거분위기를 지나치게 과열하지 않으면서 모든 정당에게 기존의 정치영향력이나 인지도 등과 관계없이 정당을 홍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연설 전면적 박탈, 과잉금지원칙 위반" = 헌법재판관 5명은 결국 "방송연설, 신문광고 등에 할당된 지면이나 참여인원 횟수 시간적 범위 등이 법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고 광고 등의 수단을 고액의 비용을 요하므로 지지율이 낮거나 소속 국회의수가 적고 재정상태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신생정당이나 소수정당은 사실상 활용하기 어렵다"며 "연설 등 금지조항은 비례대표후보자의 연설, 대담 기회 자체를 전면적으로 박탈하고 있어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선거운동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명 중 6명이상이 찬성해야 위헌결정이 내려지므로 5명만 위헌의견에 손을 들어 합헌 결정이 나왔다. 판시문에서는 "연설 등 금지조항에 대하여는 재판관 4인이 합헌의견, 재판관 5인이 위헌의견으로 비록 위헌의견이 다수이긴 하나 헌법소원 인용결정을 위한 심판 정족수에는 미달하므로 심판청구를 기각한다"고 했다.
◆달라진 상황 = 3차례의 합헌 판결에도 하승수 위원장은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을 중요한 '선례변경'의 이유로 지목했다. 지난 28일 통과한 연동형비례대표제는 다양한 의견이 의정활동에 반영되고 정확한 민심을 비례대표 선거에 적용된다는 취지를 고려할 때 과거와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지난 2016년 결정문에는 "비례대표 선거의 성격이나 방식 자체가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으므로 선례를 변경한 만한 사정변경이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지만 이번 판결은 바뀔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편 하 위원장은 헌재가 지난달 28일에 인터넷언론사에 대해 선거일 전 90일부터 선거일까지 후보자 명의의 칼럼 등을 게재하는 것을 제한하는 '인터넷선거보도 심의기준 등에 관한 규정'이 과잉금지원칙에 반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결정한 부분에 주목했다. 헌재의 과잉금지에 대한 반대입장이 강하다는 분석이다.
하 위원장은 "청구한 지 1년여 지났고 선거를 앞두고 있어 조만간 헌재 결정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최근 헌재의 판결을 보면 과잉금지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는 부분이 많아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② 많은 기탁금] "총선 출마하려면 1500만원 내라"
헌재 "거대정당 일방 유리"
"과잉금지 위반" 위헌 판결
미국 등 기탁금 제도 없어
소수정당의 이름으로 21대 총선에 출마하는 도전자들의 참가비(기탁금)부담이 만만치 않다.
지역구 출마자가 내야 하는 비용이 무려 1500만원이다. 비례대표 출마자의 기탁금도 1500만원이었으나 너무 많다는 이유로 위헌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선거 참가비는 '후보 난립'을 막기 위한 장치다. 21대 국회에서 사상처음으로 연동형비례대표제를 도입, 다양한 이해를 의정활동에 반영하려는 의도와 크게 엇갈리는 대목이다. 게다가 주요 선진국에서는 기탁금제도 자체가 아예 없거나 소액만 받고 있어 우리나라가 과도한 장벽을 쳐 놓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31일 국회 행안위에 따르면 기탁금 액수에 대한 개정안이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의원, 전선미 의원, 정의당 윤소하 의원에 의해 각각 제출됐으며 자유한국당 김세연 의원외 1명의 소개로 들어온 청원이 있다.
현재 국회의원 기탁금은 1500만원이다. 이에 대해 김태년 의원은 지역구 출마자에 대해서는 500만원으로 낮추고 비례대표 출마자에 대한 기탁금 제도는 없애자고 주장했다. 윤소하 의원은 150만원으로, 청원자는 100만원으로 하향조정할 것을 제안했다. 진선미 의원은 비례대표 출마자의 기탁금만 15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낮추자고 했다.
전문위원실에서는 "현행 기탁금의 액수가 지나치게 과다해 기탁금을 납부할 재력이 부족한 사람이 공직선거에 입후보하기가 어려워 공무담임권을 행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인식하에 재력이 부족한 사람, 신인정치인이 공직선거에 진입하기 위한 장벽을 낮추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헌재의 판단은 = 2016년 헌법재판소는 비례대표국회의원 출마자의 기탁금이 너무 많다는 위헌심판 청구건에 대해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정당활동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며 위헌판결을 내렸다.
헌재는 "고액의 기탁금은 거대정당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다양해진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여 사표를 양산하는 다수대표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비례대표제의 취지에도 반하는 것"이라며 "비례대표 기탁금 조항은 침해의 최소성 원칙에 위반되며 공익보다 제한되는 정당활동의 자유 등의 불이익이 크므로 법익의 균형성 원칙에도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탁금 액수가 지나치게 과다하여 정당활동의 자유 등을 침해해 위헌이나 그 적정성 액수는 비례대표국민회의원 선거의 성격, 방식, 이에 관한 선거관리업무와 비용의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입법자가 정책적으로 정함이 바람직하다"며 "헌법불합치결정을 하고 그 적용을 중지한다"고 밝혔다. 그러고는 "입법자가 2018년 6월 30일까지 개정하지 아니하면 그 효력을 상실하고 법원 기타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위 법률조항의 적용을 중지하도록 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세계적으로 너무 높은 우리나라 기탁금 = 국회는 현재 계류돼 있는 4개의 법안을 심의, 비례대표 기탁금을 하향조정해야 한다. 우리나라 기탁금이 과도하게 많다는 점에 하향압박이 약하지 않다.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멕시코 브라질 필리핀엔 아예 기탁금 납부제도가 없고 우리나라보다 많은 나라는 터키(3564만원), 일본(3000만원) 정도다.
따라서 녹색당은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기탁금도 낮춰야 한다며 위헌심판을 청구했다. 신생정당이나 정치신인은 기탁금과 선거비용을 그대로 홀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다. 소수정당은 정부로부터 국고보조금 지원도 받기 어렵다. "돈이 없으면 선거에 나갈 수없고 정당도 후보를 낼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주장이다.
비례대표 기탁금 조항의 위헌의견을 제시한 이정미 이진성 안창호 재판관은 "정당 난립을 방지한다는 (기탁금 조항의) 목적은 오늘날 정당제 민주주의 아래에서의 정당의 기능 및 그 엄격한 설립절차와 등록요건 등에 비추어 볼 때 그 입법 목적이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며 "정당이 주로 선거운동의 주체가 되고 선거운동방법도 제한되므로 등록되는 후보자 수의 증가가 곧바로 선거운동의 무분별한 과열 혼탁 및 선거관리업무 비용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추측도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③ 정치적 표현자유 차단] 유권자가 후보자 지지표시 못한다고?
손팻말·배지·옷 등 차단
선거법 90·93조 폐지 여론
"정치표현 자유 보장해야"
과열금지를 이유로 유권자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선거법 90조와 93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치적 표현이 자유 제한은 곧바로 자금력이나 지지자 동원력이 떨어지는 소수정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소수정당은 자원봉사자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들의 참여가 봉쇄되는 부분이 많다.
총선 100일 앞으로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100일 앞둔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선관위 사이버공정선거지원단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더불어민주당 유승희 의원의 선거법 개정안과 자유한국당 김세연의원 외 1인의 청원은 선거법 90조 삭제를 담았고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90조 중 옥외시설물에 대해서만 제한을 한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소개한 청원은 시설물 등의 설치제한 기간을 '선거일전 60일부터 선거일까지'로 축소하고 제한요건인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를 '선거운동을 위하여'로 고칠 것을 요구했다.
유승희 의원과 윤소하 의원과 함께 앞의 두 청원은 선거법 93조의 삭제를 주장했다. 행안위는 "현행 공직선거법 제 90조와 제93조는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누구든지 법에 개별적으로 규정된 방법을 제외하고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시설물 등의 설치를 금지하고(90조) 선거에 영향을 미칠 목적의 인쇄물 등을 이용한 정치적 의사표현을 규제하고 있다(93조)"고 소개했다.
90조에서는 화환 풍선 간판 현수막 애드벌룬 기구류 또는 선전탑 등 광고물이나 광고시설을 설치하거나 진열, 게시, 배부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표찰이나 표시물 착용·배부나 후보자 상징 인형이나 마스코트 등 상징물 제작·판매도 차단하고 있다.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거나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이 나타내는 광고, 인사장, 벽보, 사진, 문서·도화, 인쇄물이나 녹음·녹화테이프 등을 배부, 상영도 막아놓았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손팻말이나 차량스티커 등을 통해 자원봉사자들이 선거운동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어 소수정당의 선거운동방식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면서 "거대 정당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차별에 해당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회 행안위 전문위원실에서는 검토보고서를 통해 "선거운동기간 전 선거운동에 이르지 않는 행위는 다소 선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더라도 정치적 표현의 자유로서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개정안 및 청원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90조와 93조 폐지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중앙선관위는 "현재는 선거운동기간 개시 전에 누구든지 시설물, 인쇄물 등을 활용한 선거운동이 제한되고 선거일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목적의 시설물이나 인쇄물 등을 통해 정치적 의사표현을 할 수 없다"면서 "선거운동 전에는 누구든지 선거운동에 이르지 않는 범위에서 시설물, 인쇄물 등을 활용해 정치, 선거에 관한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도록 현행 90조와 93조를 폐지해야 한다"며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상시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유권자는 소품과 손팻말 옷 모자 장갑 풍선 배지 등 표시물을 활용하거나 자신의 주택 또는 승용차에 표시물을 부착, 게시하는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다만 중앙선관위는 "시설물이나 인쇄물 기재 내용과 행위가 선거운동에 이를 경우엔 현행법 사전선거운동 금지 규정을 적용하고 후보자는 선거비용제한액의 총액 범위에서 자유로운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다한 비용 지출을 초래하거나 도시의 미관풍치를 해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합리적으로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회 행안위도 "규제폐지로 예상되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과다한 비용지출을 초래하거나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일정크기 이상 시설물, 현수막, 광고, 벽보 등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규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대선기간에 후보자의 입장을 현수막에 게시하고 후보자의 정책을 캠페인하면서 후보자 사진을 포스터에 부착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 조사를 받았다"면서 "선거법이 유권자의 정치참여를 가로막으며 구시대로 회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30년 만에 재심, 전교조 북침설 교육의 진실은?
“학생과 교사, 스승과 제자가 법정에서 진위를 다투는 아픔이 있었거든요.”
청주 상당고 강성호 교사는 지난 31년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 강성호 교사는 1989년 대학을 졸업하고 충북 제원고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은 지 불과 석 달만에 구속됐다.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수업시간에 “6.25는 남침이 아니라 미군이 먼저 침략했다, 북한도 잘 산다”는 등 북한을 찬양하는 교육을 했다는 것이다.
강 교사는 수업도중 경찰에 강제 연행된 뒤 1999년 복직될 때까지 10년간 교단을 떠나야 했다.
강 교사가 구속되던 1989년 5월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출범을 앞두고 교사들이 줄줄이 구속됐던 시기다. 전교조 결성에 앞장선 교사들에게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여론을 호도하는 방법으로 전교조 결성을 막기 위해서였다.
5월 24일 서울 인덕공고 조태훈 교사는 1년전 술자리에서 동료 교사에게 북침설을 말했다는 이유로, 26일 경북 영주 동산여중 이수찬 교사는 한 여학생이 김일성을 만나보고 싶다고 쓴 낙서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각각 재판에 넘겨졌다.
조태훈 교사와 이수찬 교사는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승소했지만, 강성호 교사는 대법원에서 유죄가 최종 확정됐다.
30년의 세월동안 수형번호 279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있었던 강 교사는 지난해 비로소 용기를 냈다. 법원의 재심 신청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기로 한 것이다.
뉴스타파는 강성호 교사의 재판기록 일체를 입수해, 사건의 진실을 추적했다.
# 의혹 1
경찰은 범행날짜를 이미 알고 있었다.
충북 제천경찰서가 1989년 5월 19일 작성한 수사보고서에는 강성호 교사의 범행 날짜가 각각 같은해 4월 11일과 4월 25일로 적시됐다.
그러나 뉴스타파 취재결과 수사보고서가 작성된 날까지 경찰이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한 5명중 어느 누구도 범행 날짜를 정확히 증언하지 못했다.
5월 18일 조사를 받은 제원고 육성회장 노모씨와 유 모 부회장은 정확한 날짜를 모른다고 답했고, 김 모 총무는 북침설 교육 얘기를 전혀 들어본 적 없다고 했다.
5월 19일 경찰에 출석한 제원고 최모 교장은 강성호 교사의 이른바 의식화 교육에 대해 구체적인 날짜를 대며 진술했지만 정작 북침설 교육 날짜에 대해서는 3월 21일부터 5월 2일 사이라고 뭉뚱그렸다. 북침설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한 학생을 직접 면담했던 제원고 신 모 교감 역시 3월초부터 4월말까지라고 말했을 뿐 구체적인 범행날짜를 밝히진 못했다.
경찰이 범행 날짜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을 확보한 것은 수사보고서를 작성한 다음날이었다.
제원고 학생이 5월 20일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뒤 담임교사와 함께 경찰서에 출두, 지난 4월 11일과 4월 25일 각각 북침설과 북한 찬양 교육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이 학생의 증언이 나오기 전에 이미 범행 날짜를 알고 있었다는 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 의혹 2
북침설 교육, 학교측은 왜 사실 확인을 안 했나?
강성호 교사와 함께 제원고에서 근무했던 김성장 교사는 당시 상황을 정리해 기록했고, 이 기록물은 1990년 책으로 발간됐다. 이 책에는 당시 2학년 7반 담임교사였던 신 모씨는 강성호 교사가 경찰에 체포된 5월 24일 학생들에게 북침설 교육을 받았는지 여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신 교사가 북침설 교육을 처음 들은 것은 일주일 전인 5월 18일 점심무렵.
2학년 7반 이미연(가명, 이하 학생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 학생은 친구 이영자와 함께 이성 문제 등을 상담하다 수업시간에 북침설을 교육받았다고 말했다. 신 교사는 학생주임 교사를 따로 불러 의논한 뒤 최모 교장과 신모 교감에게 보고했다. 교장은 교감에게 사실 확인을 지시했고, 신 교감은 이미순 학생만 불러 면담했다.
5월 18일 오후부터 5월 24일 오전까지 일주일간 이 학교 교장과 교감, 신 교사 중 어느 누구도 강성호 교사는 물론 다른 학생들에게 북침설 교육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
31년이 세월이 흘러 최 모 교장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신 교감의 근황도 알 수 없었다. 수소문끝에 신 교사가 충북 제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고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문자메시지로 질문 했지만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동료 교사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될 때까지 교장과 교감, 담임교사 모두 쉬쉬하며 제대로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것이 이 사건의 두번째 의문이다.
# 의혹 3
359명을 이긴 7명의 증언
강성호 교사가 구속된 다음날 제원고 학생들은 운동장에 나와 집단 시위를 벌였다. 당시 수학여행을 떠나 학교에 없었던 1학년을 제외하고 2.3학년 학생들이 모두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강성호 교사로부터 북침설 교육을 받은 사실이 없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쓰고,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강 교사의 무죄를 주장하며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한 한 학생은 359명. 반면 북침설 교육을 받았다고 진술한 학생은 2학년 7반의 7명에 불과했다.
뉴스타파는 북침설 교육을 들었다는 학생들이 경찰과 검찰, 법정에서 각각 진술한 기록을 꼼꼼히 따져봤다. 이미연 학생은 경찰조사에서 북침설 교육을 직접 듣고 옆에 있던 김은희에게 “이북이 남한을 침범했다고 배웠는데 (강 교사는)미군이 먼저 이북을 침범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것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영자 학생은 처음에는 북침설 교육을 직접 들었다고 했다가 나중에 강 교사와의 대질 신문에서 “이미연과 김은희가 하는 대화를 듣고 북침설 교육을 받게 된 것을 알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정작 김은희의 진술은 달랐다. 김은희는 “남침이다 북침이다 하는 이야기를 직접 듣지는 못했고, 그 시간에 옆자리에 앉은 이미연과 이영자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서로의 증언이 서로 엇갈려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 어려운 상황.
그런데 이들의 진술이 모두 거짓이었다.
김은희 학생이 북침설 교육을 했다는 그날 학교를 결석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실에 없던 학생과 서로 얘기를 주고 받았다고 거짓 증언을 한 것.
결석했던 학생이 경찰서에 출석해 위증한 경우는 또 있었다. 김숙희는 “ 강 선생님이 사진첩을 가지고 와 한장한장 넘겨가며 ‘북한도 많이 발전해 잘 살고 있다. 금강산 백두산 사진을 보여주며 너희도 통일이 되면 이런 곳으로 신혼여행을 갈 수 있다’고 말했다”며 당시 수업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이날 출석부에는 이 학생이 결석한 것으로 돼 있었다.
이명자 학생은 검찰 조사에서 북침설 교육을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가 석달 뒤 법정에 출석해서는 북침설 교육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다.
북침설 교육을 받았다고 진술했던 이하영 학생은 옆 친구가 쓴 자술서를 베껴 쓴 사실이 들통나기도 했다. 이처럼 강성호 교사로부터 북침설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학생들 진술에 일관성이 없었다. 하지만 법원은 이들 7명의 주장을 절대 다수인 349명의 목소리보다 더 중요한 증거로 채택했다.
# 의혹 4
왜 경찰은 강성호 교사를 불법 체포했나?
19일 작성된 경찰의 수사보고서는 강성호 교사의 범죄행위를 입증하기 위해 불온 서적과 사진 책자 등에 대해 사전 압수 수색 영장이 필요하다고 적시했다.
하지만 압수수색 영장은 발부되지 않았다.
대신 담당 검사는 수사를 개시하되 혐의 유무를 명확히 한 후 재지휘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경찰은 체포영장 없이 강성호 교사를 연행해 구금했고, 압수수색 영장 없이 강 교사의 책과 사진첩을 무단으로 압수했다. 경찰이 불법으로 입수한 책자는 강씨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활용됐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강성호 교사의 책 10권을 일일이 나열하며 평소 불온한 사상을 갖고 있는 강 교사가 북침설 교육 등 북한의 주장에 동조 찬양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특히 감자씨와 볍씨의 통일이야기가 미군을 몰아내고 반민족적 반민주적 세력과의 치열한 투쟁과정을 통해 통일을 이뤄야한다는 내용을 담았다고 지적했다. 뉴스타파가 국회도서관의 협조를 얻어 경찰이 압수한 서적과 동일한 출판본을 찾아 검증했다. 재판부 지적과는 달리 통일에 대한 학생들의 글과 북한 실상을 이해하는 글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게다가 경찰청 산하 공안문제연구소는 이 책이 “북한당국에 대해 실체를 오인하게 만드는 문제점은 있으나 용공적이라 할수는 없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당시 제천 경찰서는 경찰청 산하 공안문제연구소에 불온 유인물에 대한 감정을 의뢰했다.
공안문제연구소는 현재 경찰대학 산하 치안정책연구소로 간판을 바꿔달고 더이상 불온 서적에 대한 이적성 여부를 감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2천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용공서적 감별사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당시 경찰이 감정을 의뢰한 책자는 모두 17권. 공안문제연구소는 ‘찢겨진 산하’ 단 한 권에 대해서만 용공성이 있다고 판단했을뿐 나머지 16권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감정했다.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강성호 교사를 소위 말하는 의식화교사의 증거로 나열한 10권의 책 중 9권은 이른바 불온 서적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일관성 없는 학생들의 증언와 함량 미달의 증거로 강 교사는 자신도 모르게 빨갱이 교사가 됐다.
그리고 다시 교단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지난해 5월 강 교사는 청주지법에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지난 11월 재심 결정을 내렸다. 재심 첫 공판이 열린 지난 1월 30일 그는 다시 법정에 섰다. 31년전 법정에 출두하면서 그가 손바닥에 썼던 진실과 승리를 입증하기 위해서다. 황일송/ 뉴스타파
공방 속 조선일보·한겨레 팩트체크, 품격 달라
[아침신문 솎아보기] 조선일보 마스크 300만장 지원, 한겨레 역학조사관 부족 원인 각각 팩트체크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6일자 아침신문에 신종 코로나 관련 팩트체크 기사를 썼다. 조선일보는 중국에 마스크 300만장 지원 이야기를 팩트체크 했고, 한겨레는 자유한국당이 채용을 막아 역학조사관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팩트체크했다. 두 신문의 팩트체크를 통해 누가 더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지 알아본다.
정치권 공방 따라 한겨레와 조선일보 팩트체크 눈길
조선일보는 6일 4면 “[팩트 체크] ‘중국에 마스크 300만장’ 띄워놓고, 논란 일자 가짜뉴스라는 정부” 기사에서 “정부·여당이 ‘중국에 마스크 300만장 지원’을 ‘가짜 뉴스’ 표현까지 써가며 연일 부인하고 있다”며 관련 여야 공방 과정을 짚었다. 조선일보는 “당초 마스크 지원 사실을 발표한 당사자는 정부였다. 이후 마스크 가격 폭등과 품귀 현상이 벌어지자 민간단체에 책임을 떠넘긴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정부 지원 300만장 가짜 뉴스’ 진원지로 정부를 지목했다. 정부가 지난달 28일 공식 보도자료에서 “정부는 마스크, 방호복 등 의료구호 물품을 전세기편으로 중국에 전달하는 등 협력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발표했다는 것. 조선일보는 “당시 자료엔 ‘민간’이란 단어 자체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발표와 맞물려 마스크값이 폭등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대통령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국민이 묻고 있다”고 하자 정부 자료에 ‘민간’이 처음 등장했다는 것. 조선은 “외교부는 1월 30일 보도자료에서 ‘민관이 협력해, 마스크 200만장, 의료용 마스크 100만장을 중국에 지원한다’고 했다. 300만장이란 숫자도 이때 처음 나왔다”고 강조했다.
또 조선일보는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마스크 지원은 한·중 민간기업과 유학생이 추진한 일로, 200만장이 목표이며 이 중 전달된 물량은 12만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발언을 두고도 “그의 반박은 사실과 달랐다. 외교부에 따르면 4일까지 중국으로 넘어간 마스크가 150만장이다. ‘민간단체 목표치’도 200만장이 아닌 300만장이다. 더욱이 마스크를 중국에 보낸 단체는 모두 박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회장을 맡고 있다. ‘순수 민간 지원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지적도 나온다”고 썼다.
▲조선일보 4면
친절하고 꼼꼼한 팩트체크 결론은 교묘한 색깔론
조선일보의 팩트체크는 친절하고 꼼꼼했다. 팩트체크 기사 하단에 “마스크 中지원, 정부는 민간이 했다지만… 주도한 이는 ‘친중’ 박정 與의원”이란 제목의 기사까지 배치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중국에 마스크 300만장을 보내는 것을 주도한 곳은 중국유학교우총연합회와 우한대(武漢大)한국총동문회다. 두 단체 회장은 모두 박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맡고 있다. 마스크 지원 과정에서 박 의원이 정부로부터 전세기 등을 통한 마스크 운송 지원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졌다”고 썼다.
또 조선일보는 “박 의원은 과거에도 지나친 친중(親中) 활동으로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며 “작년 3월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은 불참하고, 이후 열린 ‘북한군·중공군 추모제’에는 참석해 비판을 받았다”고 색깔론까지 갖다 붙였다.
한겨레, 역학조사관 부족 원인 ‘여당 책임’도 지적
한겨레도 이날 11면에 “[뉴스AS] 역학조사관 줄어든 게 한국당 때문이라고요?”라는 제목의 팩트체크 기사를 실었다. 한겨레는 이 기사에서 역학조사관 줄어든 게 한국당 때문이라는 “주장은 절반의 진실입니다”라며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았다.
한겨레는 “여당에선 자유한국당 등 야당의 반대로 역학조사관이 충분히 증원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정춘숙 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30일 낸 보도자료를 소개했다. 이 보도자료에 따르면 2018년 예산안 심의 당시 보건복지부가 역학조사관을 포함한 각급 검역소 현장검역 인력 45명 증원 예산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정부안의 절반에 못 미치는 20명만 증원하는 예산안이 통과됐다.
한겨레는 정춘숙 의원실 관계자 말을 빌려 “국회 속기록엔 검역 인원 자체를 줄이자는 말은 없지만, 야당이 정부의 공무원 증원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검역 인원 충원도 막힌 것”이라고 전하면서 “이 주장은 절반의 진실”이라고 진단했다.
▲한겨레 11면
한겨레는 “역학조사관은 보건복지부에 소속된 ‘중앙 역학조사관’과 ‘시·도 광역단체 소속 역학조사관’으로 나뉘는데, 보건복지부 예산 감액은 17개 시·도 소속 역학조사관 충원과 무관하다”고 지적했다. 광역단체 소속 역학조사관은 시·도지사가 채용하고 광역단체 예산에서 급여를 주는데 전국 17개 시·도 소속 역학조사관 숫자는 메르스 사태 직후인 2016년 51명보다 6명이 줄었다. 한겨레는 “이 역시 공무원 증원에 반대하며 예산을 깎은 야당만의 책임일까요?”라고 반문했다. 대구와 경북을 빼면 모든 지역의 단체장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이기 때문.
한겨레는 “광역단체의 예산을 심의해야 할 광역의회 역시 지난해 지방선거 뒤 대부분 여당이 승기를 쥐고 있다. 방역예산 삭감의 책임을 놓고 ‘남탓’을 할 자격은 여야 모두에게 없다는 뜻”이라며 “여야 모두 정치 공방보단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라며 여야 모두에게 역학조사관 채용 부족의 책임을 돌렸다.
제3국 방역망 구멍, 트럼프와 펠로시 갈등도 주요 지면 배치
6일 주요 일간지 1면은 중국이 아닌 태국과 싱가포르를 다녀온 신종 코로나 확진자 소식에 제3국 감염을 통한 검역망 구멍을 지적했다. 특히 태국 여행을 다녀온 16번째 환자가 딸이 입원한 광주 소재 병실에 머물면서 최소 272명과 접촉하면서 중국에만 집중한 검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6번째 환자는 증상이 나타난 초기에 보건소와 질병관리본부 콜센터에 신종 코로나 검사 가능 여부를 문의했지만 중국 방문 이력이 없다는 이유로 검사를 받지 못했다.
이날 주요 일간지 1면을 장식한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뒤에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 원고를 찢는 장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원 본회의장에 들어서면서 펠로시 의장이 악수를 청했지만 거절했다.
▲국민일보 1면
▲경향신문 1면
▲동아일보 1면
한겨레 “태국서 왔다고 검사 거부”… 조선일보 “병원이 뚫린다”
한겨례는 1면 머리기사에서 16번째 환자를 두고 “광주 광산구 보건소와 질병관리본부 콜센터는 지난달 27일께 이 환자가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문의 받았는데도, 중국에 다녀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종 코로나 검사를 받게 하지 않았다. 중국이 아닌 제3국 입국자에 대한 보건당국의 경직된 대응이 방역체계의 구멍을 키운 셈”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도 1면 머리기사에서 “일본과 태국에 이어 싱가포르를 방문한 확진 환자까지 나오면서 그간 중국에 초점을 맞춰온 국가 검역망에 커다란 허점이 드러난 셈이다. 중국인들의 왕래가 잦은 동남아 지역 여행객과 이들 국가를 거쳐 온 외국인들을 두루 체크할 수 있는 새로운 검역 및 방역 시스템을 도입하고 나아가 입국자 제한을 적용하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도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확진된 국내 환자들이 제 발로 병원을 찾아갔다가 ‘검사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 조기 격리 및 확진에 실패한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의 말을 빌려 “중국 밖에서도 감염 사례가 계속 보고되고 있는데 일단 ‘중국 다녀오셨어요?’라고 기계적으로 지침을 적용한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 1면 머리기사
김용욱 기자 yuk@mediatoday.co.kr
TV조선 ‘미스터트롯’ 종편 시청률 신기록, 의미는
1월30일 방송분 25.7%로 JTBC ‘스카이캐슬’ 넘어서…‘TV조선=고령화 채널’이라는 약점, 트로트 장르와 접목되며 강점으로
25.7%다. TV조선 예능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이 지난달 30일 5회 방송에서 종합편성채널 시청률(닐슨코리아 전국 유료방송가구 기준) 신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열풍을 일으켰던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기록한 종편 최고시청률 23.8%를 뛰어넘었다. 2011년 12월1일 개국 이래로 예능과는 거리가 먼 시사·보도중심 채널로 인식되어온 TV조선이 예능으로 시청률 신기록을 세운 대목은 상징적이다. 조선일보는 2월1일자 사보에서 “종편 역사를 새로 썼다”고 자평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10시 편성된 ‘미스터트롯’은 트로트 경연을 통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전작인 ‘내일은 미스트롯’에서 성별이 바뀐 속편이다. ‘미스터트롯’은 지난 4회 방송분에서 ‘미스트롯’의 최고 시청률(18.1%)를 뛰어넘었다. 과거 엠넷 ‘프로듀스101’ 시즌1이 성공한 뒤 성별만 바뀐 시즌2가 대성공한 것처럼 일종의 계단효과를 보고 있다. TV조선은 설 연휴 첫날이던 지난달 24일 ‘설날엔 미스터트롯’을 220분 편성하며 입소문을 늘렸다.
▲TV조선 '미스터트롯'.
‘미스터트롯’ 기획을 맡은 TV조선 서혜진 국장은 사보를 통해 “모두 시청자들의 힘”이라며 “원조 트로트 오디션답게 시청자들의 성원에 보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서혜진 국장은 SBS에서 ‘스타킹’·‘K-팝스타’·‘동상이몽’ 등을 연출했다. ‘미스터트롯’의 성공과 관련, 시청률조사업체 관계자는 “시청자들은 이제 보도프로그램 외에는 채널을 가리지 않는다”고 전하며 “한국 사회가 급격히 고령화되면서 고령층을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8월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739만4000여명으로 전체 인구의 14.8%를 차지했다. 노령화지수도 114.1로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한국의 중위 연령도 43.1세로 전년보다 0.7살 늙었다. 50세~64세 인구비율도 23.3%로 높다. 국내 50세 이상 인구는 국민의 38.1%인데, 이들은 고정형TV에 대한 충성도가 20~49세에 비해 매우 높다. ‘미스터트롯’은 늙어가는 TV, 특히 고령층이 많은 TV조선의 주 시청자층을 고려한 장르 선택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미디어오늘이 닐슨코리아의 도움을 받아 ‘미스터트롯’ 1~5회 시청자 구성비를 분석한 결과 60세 이상 시청자가 평균 43%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50세~59세 시청자 비중도 27.8%였다. ‘미스터트롯’의 시청자 10명 중 7명은 50대 이상 중장년층인 셈이다. 이는 TV조선의 평균적인 시청층 연령 비중이다. TV조선은 지상파에 머물던 중장년층 시청자까지 끌어오는 전략으로 신기록을 세운 셈인데, 지상파·종편 통틀어 중장년층 시청자 비중이 가장 높다는 약점을 오히려 활용해 강점으로 바꿔냈다.
▲TV조선 '미스터트롯'의 한 장면.
서혜진 국장 같은 지상파PD들의 종편행도 보편화되며 이제는 제작수준의 차이도 느끼기 어려워졌다. 지상파의 한 예능PD는 “트로트 장르는 그동안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등한시해왔다. 리스크에 대한 부담도 있어서 지상파 PD들은 기존 포맷을 버리고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며 “지금은 ‘미스터트롯’이나 채널A ‘도시어부’ 등 오히려 종편이 새로운 포맷에 도전해 성공하고 있다. 지상파가 위기의식을 갖고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MBC ‘놀면 뭐하니?’의 트로트 신인 ‘유산슬’과 같은 성공사례가 일례다.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성장 없는 번영' 가능할까 … 뉴요커(미국 시사주간지 ), 다양한 찬반 의견 소개
주변부였던 '성장 비판론' 점차 공감대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 최신호에 따르면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 문제점에 대한 저술을 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미래학에 푹 빠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라는 글에서 2030년이 되면 자본투자와 기술발전이 인간의 삶의 수준을 8배 올리고, 사회는 부유해져 사람들이 1주에 15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레저와 기타 비경제적 목적의 활동을 누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더 부유해지고자 하는 갈증이 사라지면서 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약간 구역질나는 병적상태로 인식될 것"이라고 썼다.
그가 꿈꾼 사회로의 전환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각국 경제정책 집행가들은 여전히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케인스의 예측이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로부터 1세기 뒤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6배 이상 높아졌다. 그리고 더 많은 상품을 만들거나 소비하는 것이 과연 지속가능하냐는 논쟁이 해가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좌파 진영을 중심으로 '탈성장'(degrowth) 운동도 벌어졌다. 주요 선진국들이 GDP와 관련해 제로 성장 또는 마이너스 성장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
바르셀로나자치대학 생태경제학자인 히오르고스 칼리스는 지난해 초 발간된 저서 '탈성장'에서 "우리가 재화를 더 빨리 생산하고 소비할수록 환경에 더 큰 해를 입힌다"며 "케이크를 들고 있으면서 동시에 먹을 수는 없다. 인류가 지구의 생명부양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으려면, 글로벌 경제의 성장률을 낮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체코계 캐나다인으로 환경과학자인 바츨라프 스밀은 지난해 9월 저서 '성장 : 미생물에서 거대도시까지'에서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문명과 생물권의 상호협력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경제학자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지속성장의 이야기를 독점적으로 제공하면서 정부와 기업의 결정을 성장 일변도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제성장에 대한 생태학적 비판은 한때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이젠 점차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지난해 9월 UN이 주최한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스웨덴의 환경운동가인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는 "인류는 대량멸종 초입에 들어섰다. 우리의 이야기는 전부 돈과 영원한 경제성장 동화에 맞춰져 있다. 얼마나 끔찍한가"라고 주장했다.
탈성장 운동은 학술논문이나 회의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일부 지지자들은 화석연료 산업뿐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 전체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장시대 이후 자본주의'를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체제에서는 이익을 위한 생산은 지속되지만 경제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재조직된다. 영국 서리대 지속가능개발 교수인 팀 잭슨은 2016년말 발간 저서 '성장 없는 번영 : 미래 경제를 위한 기초'에서 "서구 국가들은 시장을 겨냥한 대량생산 체제에서 돌봄과 교육, 수공예 등 자원집약도가 낮은 지역서비스 체제로 경제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산 패턴은 물론 사회적 가치에서 변화가 얼마나 클지 인식하면서도 "끊임없이 많은 상품을 축적하지 않아도 인류는 번영할 수 있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며 낙관적인 기조를 유지한다.
주류학계에서도 성장신화 도전
주류경제학계에서도 경제성장 교리는 도전 받고 있다. 환경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201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MIT 교수들이자 부부인 아브히지트 바네르지와 에스테르 뒤플로는 지난해 11월 발간한 저서 '어려운 시기의 좋은 경제학'(Good Economics for Hard Times)에서 GDP 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인류의 복지가 향상된다는 보장이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을 경우 더욱 그렇다. 나아가 GDP 성장을 추구하는 건 때로 비생산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우리 이론이나 데이터 어느 것을 보더라도, 가장 높은 1인당 GDP가 마냥 바람직한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바네르지와 뒤플로는 정부가 가난한 공동체를 상대로 어떤 정책으로 개입해야 효과를 보는지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쌓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무작위 통제실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라며 "정부는 성장이라는 신기루를 좇기보다 효과가 입증된 특정 조치에 집중해야 한다. 한 사회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보험이나 교육, 사회적 발전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정책 등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미국 등 선진국에서 레이건-대처 시대 이후 경제성장을 잘못 추구한 탓에 불평등과 사망률,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됐다며 "경제성장의 과실이 엘리트에 주로 집중되면서 사회적 재난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다고 경제성장을 반대하는 건 아니다. 바네르지와 뒤플로 교수는 최근 포린어페어스 기고에서 "1990년 이래 하루 1.90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극빈곤층이 20억명에서 약 700만명으로 크게 줄었다"며 "GDP가 점진적으로 높아지면 사람들의 소득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학교와 병원, 의약품, 소득이전 등을 늘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특히 선진국의 경우 GDP 성장을 둔화시키는 정책들이 오히려 사회에 혜택일 수 있다. 특히 성장의 과실을 더욱 광범위하게 나누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고 지적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들도 '탈성장론자'(slowthers)로 분류할 수 있다.
휴스턴대 경제학 교수로 지난달 '완전한 성장 : 장기 침체가 성공한 경제인 이유'(Fully Grown: Why a Stagnant Economy Is a Sign of Success)를 펴낸 디트리히 볼라드 역시 그렇다. 그의 책 부제가 암시하듯, 선진국 경제성장의 둔화는 걱정할 게 아니다.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의 1인당 GDP는 연 3% 이상 상승했다. 2000년 이후엔 약 2%로 낮아졌다. 성장 둔화의 현상은 종종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로 인식된다. 하버드대 경제학자이자 전직 재무장관인 로렌스 서머스가 만든 용어다.
하지만 볼라드 교수는 성장둔화가 부유하고 산업적으로 발전한 사회에선 적합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성장 회의론자와 달리, 그는 환경 우려나 불평등 고조, GDP의 단점 등을 이유로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성장둔화가 정통 경제학의 핵심 개념인 '개인의 선택'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라고 설명한다.
볼라드는 MIT의 저명한 교수 로버트 솔로가 1950년대 개발한 수학적 기법을 사용해 경제성장의 원천을 세부적으로 해체한다. 여성들도 직장에 나가야 한다는 운동은 노동공급의 일시적 증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나서 다른 흐름이 등장해 성장률 곡선을 끌어내렸다. 볼라드 교수에 따르면 미국 등의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시민들은 일하는 데 시간을 덜 쓰고 핵가족 형태를 갖게 됐다. 임금 상승과 피임약 도입에 따른 결과다. 노동력 확대가 감소할 때 GDP 성장은 둔화된다. 볼라드 교수는 "하지만 이를 실패라고 볼 수 없다"며 "여성 권리가 신장되고 경제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최근 GDP 성장률 둔화의 약 2/3는 노동투입 성장률의 감소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게 볼라드의 입장이다. 그는 옷이나 자동차, 가구 등 눈에 보이는 상품에 대한 소비 패턴이 육아나 교육, 헬스케어 등 서비스 소비로 전환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1950년 서비스 소비지출이 미국 GDP에서 40%를 차지했다면, 현재는 70%를 넘어선다. 노동집약적 경향이 있는 서비스 산업은 공장에 기반한 상품 제조 산업보다 일반적으로 더 낮은 생산성 성장을 보인다. 머리를 손질하는 이발사보다 미용가위를 만드는 공장이 효율성 개선 여지가 더 큰 법이다.
생산성 증가는 GDP 성장의 주요 요소다. 따라서 서비스 비중 확대에 따라 경제성장은 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역시 실패로 보기 어렵다. 볼라드는 "결국 경제활동이 상품보다 서비스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을 성공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며 "우리는 그동안 물건을 만드는 데 매우 생산적이었다. 그래서 서비스에 지출할 우리의 돈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이를 종합하면 노동력 성장이 줄어들고 서비스 경제로 전환되면서 경제성장은 둔화된다. 볼라드 교수는 자본투자 하락, 무역분쟁 증가, 불평등 심화, 기술진보 감소, 독점의 강화 등 때문에 경제성장이 둔화한다는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선택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라며 "성장 둔화는 결국 거대한 경제적 성공에 대한 최적의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성장둔화는 우리의 선택
볼라드 교수의 분석은 주요 선진국들이 인구 노령화를 겪게 되면 자연스럽게 경제성장률이 둔화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1990년대 일본에서 처음 시작된 패턴이다. 하지만 2% 성장률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미국이 2%로 계속 성장한다면, 2055년엔 현재보다 2배 큰 경제규모가 된다. 1세기 뒤엔 거의 8배에 육박한다. 다른 부유한 국가들 역시 복리로 성장하고 개발도상국들이 그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면, 22세기 말쯤 전 세계 GDP는 지금보다 최소 50배, 최대 100배 늘어난다.
문제는 그같은 시나리오가 환경적으로도 지속가능하냐는 것. 유럽의 많은 국가나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미 대선에 나선 모든 민주당 후보 등 '녹색성장' 지지자들은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적절한 정책과 지속적인 기술 진보 덕분에 탄소배출과 천연자원 소비를 줄이면서도 경제성장과 번영을 계속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학자와 정부 관료, 기업 대표 등이 모여 만든 '글로벌 녹색성장기구'는 2018년 보고서에서 "우리는 새로운 경제시대 초입에 있다. 기술의 급격한 혁신, 지속가능한 인프라 투자, 자원 생산성 향상 등이 상호연관해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시대다. 우리는 강하고 지속가능하며 균형적이고 포용적인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판단은 '절대적 탈동조화'(absolute decoupling)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것이다. 탄소배출을 줄이면서도 GDP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개념이다. 환경경제학자인 알렉스 보웬과 캐머런 헵번은 "2050년이 되면 화석연료보다 신재생에너지가 더 저렴해지면서 절대적 탈동조화가 상대적으로 쉬운 과제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들은 녹색기술에 대한 과학적 연구, 화석연료에 대한 높은 세금 등을 지지하지만 경제성장을 멈춰야 한다는 것엔 반대한다. 이들은 "성장을 멈추자는 건 환경적 관점에서도 비생산적"이라며 "경제침체가 오면 환경친화적 생산양식을 채택하려 노력하는 정부와 기업들이 이를 포기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탄소배출 공식 수치는 절대적 탈동조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국 경제학자로, 2018년 3월 '도넛 경제학 : 21세기 경제학자처럼 생각하는 7가지 방법'을 쓴 케이트 레이워스에 따르면 2000~2013년 영국의 GDP는 27% 성장했다. 반면 탄소배출량은 9% 줄었다. 이 패턴은 미국에서도 비슷했다. GDP는 올랐고, 탄소배출은 줄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탄소배출량은 2014~2016년 정체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흐름은 지속되지 않았다. '글로벌카본프로젝트'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전 세계 탄소배출량은 매해 상승했다.
탄소배출량 정체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침체로 인한 일시적 부산물일 수 있다. 또 석탄에서 천연가스로 전환된 것도 이유일 수 있다. 다시 반복될 성질은 아니다. UN과 수많은 기후관련 단체들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각국이 2030년까지 생산할 화석연료는, 2016년 파리 기후변화회의에서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2℃ 이내로 제한한다'는 약속에 비춰보면 50% 이상 많다. 1.5℃ 이하로 제한한다는 기준에서 보면, 120% 이상 많은 화석연료가 생산될 전망이다.
바르셀로나자치대 히오르고스 칼리스 교수와 런던 골드스미스대 인류학자인 제이슨 히켈은 최근 녹색성장에 대한 검토논문에서 "녹색성장은 잘못된 목표"라며 "각국 정부는 전략적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녹색성장은 대안이 될 수 있나
그같은 전략적 대안이 사회적 분열을 초래하지 않고도 안착할 수 있을까. 경제학자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봤다. 옥스포드대 경제학자인 윌프레드 베커만은 1974년 '경제성장을 옹호한다'라는 책에서 "경제성장이 정책 목표에서 폐기된다면, 민주주의 역시 폐기될 것"이라며 "의도적인 비성장 전략이 한 사회에 정치적, 사회적 전환을 요구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에 따른 비용은 막대하다"고 지적했다. 베커만은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에 맞서는 차원에서 책을 썼다. 성장의 한계는 '부문별한 GDP 성장정책이 화석연료와 산업용 금속을 고갈시키면서 세상을 재앙으로 이끌 것'이라고 경고의 내용을 담았다. 전 세계적 호응을 얻은 보고서였다. 베커만은 "성장의 한계 저자들이 더 청정하면서도 덜 자원집약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기술과 시장체제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 녹색성장 옹호자들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기술 낙관론을 찬성하느냐 여부를 떠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 탈성장 전략은 선진국의 경우 분배 갈등 문제를, 개발도상국의 경우 빈곤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론상 GDP가 점진적으로 확대되면 한 사회 내 모든 그룹은 삶의 수준이 동시에 상승하는 걸 볼 수 있다. 베커만 교수는 "경제 성장이 갈등을 막는 핵심요소"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성장이 폐기된다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승자와 패자를 대립시키는 일이 된다. 지난 수십년 간 많은 서구 국가들에서 경제성장 둔화가 정치적 양극화와 맞물렸다는 사실은 베커만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탈성장론자 일부는 분배 갈등이 일자리 공유와 소득 이전 등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캐나다 요크대 환경경제학 명예교수인 피터 A. 빅터는 10년 전 다양한 시나리오를 가정해 캐나다 경제 상황을 알아보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었다. 탈성장 시나리오를 가정할 경우 캐나다의 1인당 GDP는 30년에 걸쳐 약 50% 하락했다. 하지만 이를 상쇄하는 정책, 즉 일자리 공유나 재분배를 위한 소득 이전, 성인 재교육 프로그램 등을 도입하는 것을 가정했다. 빅터 교수는 2011년 결과 발표 보고서에서 "실험 결과 실업률과 인간빈곤지수, GDP 대비 부채비율이 크게 감소했다. 온난화 가스 배출은 약 80% 감소했다. GDP 하락과 상당히 무거운 탄소세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보다 최근에 들어선 바르셀로나자치대 칼리스 교수 등 탈성장론자들이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일정 수준의 최저생활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미국 민주당 진보성향 정치인들은 지난해 '그린 뉴딜' 정책을 발표했다. 2050년까지 탄소배출 없는 경제를 만들자는 것으로, 그 방법으로 연방정부의 일자리 보장 정책과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 등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린 뉴딜 정책 지지자들은 탈성장보다는 녹색성장에 가까운 입장이다. 일부에서는 "그린 뉴딜 정책은 결국 경제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비용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장 회의론자들에게 또 다른 도전과제가 있다. 전 세계 빈곤문제를 어떻게 줄일까다. 중국과 인도가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에 편입하면서 수백만명의 극빈곤층이 구제됐다. 두 나라는 저렴한 상품과 서비스를 선진국들에 수출했다. 그 과정에서 농촌에서 도시로의 대량 이주가 있었고, 노동착취 현장이 만연해졌고, 환경오염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궁극적 결과는 소득 상승이었다. 곳곳에서 새로운 중산층이 출현했다. 만약 주요 선진 산업국들이 소비를 줄이고 지역공동체 사회로 재조직된다면, 방글라데시나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이 만드는 부품과 기기 등을 누가 구매해줄 것인가.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면서 최근 급격히 GDP가 높아지는 에티오피아나 가나 르완다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질까. 탈성장론자들은 이런 의문에 아직 확실한 답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탈성장의 숙제는 '분배와 빈곤'
환경 위협의 규모, 빈곤 국가의 구제 등을 고려하면 녹생성장 정책이 유일한 답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방점이 어디에 찍히느냐가 중요하다. '성장'인가 '녹색'인가. '도넛 경제학'을 쓴 케이트 레이워스는 "장기적 경제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환경친화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녹색'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쓸 수 있는 정책들은 많다는 지적이다. 우선 주요 선진국들이 파리기후협약 목표를 지키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신재생에너지에 투자하고 석탄발전소를 폐쇄하는 한편 탄소세를 도입해 화석연료 사용을 점차 줄여야 한다는 것.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인 이안 패리는 "탄소 1톤을 배출할 때마다 35달러의 탄세소를 매긴다면, 휘발유 가격은 약 10% 오르고 전기료는 25% 상승한다"며 "그러면 중국과 인도 영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파리협약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탄소세가 도입되면 정부의 세수는 크게 늘어난다. 늘어난 세수로 녹색금융에 투자하거나 다른 세금을 줄여줄 수 있다. 아니면 탄소배당금 형식으로 시민들에게 나눠줄 수도 있다.
에너지 효율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메사추세츠대 경제학자인 로버트 폴린은 2018년 격월간지 '뉴레프트리뷰' 기고에서 에너지 효율성과 관련해 취할 수 있는 여러가지 조치를 제안했다. 열손실을 줄이기 위해 낡은 건물을 단열하는 것, 자동차 연비를 개선하는 것, 대중교통을 확대하는 것, 산업 부문에서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 등이다. 미국의 여러 주정부를 도와 그린 뉴딜 정책을 입안한 그는 "에너지 효율성을 확대하는 투자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효율성이라는 정의 자체만으로 에너지 소비자들은 돈을 절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GDP 성장 둔화의 효과를 개선하기 위해 일자리 공유와 보편적 기본소득과 같은 정책들 역시 고려돼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AI)이 거대한 일자리를 앗아간다는 경고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그런 조치들이 절실해진다. 영국 '신경제재단'(NEF)은 주당 노동시간을 35시간에서 21시간으로 줄이기 위해 표준 근로일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캐나다 요크대 빅터 교수의 모델링 또는 케인스의 1930년 논문과 유사한 내용이다.
이런 제안의 전제는 고율의 세금이다. 특히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한다. 하지만 소득재분배는 특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뉴요커는 "저성장 세계에서는 성장의 과실이 보다 공평하게 분배돼야 한다"며 "베커만의 주장처럼 그렇지 않다면 그 결과는 재앙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뉴트로, 즐거움으로 통하다
[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바야흐로 ‘뉴트로 전성시대’다. 마케팅의 만능키로 유통업계를 점령한 것은 물론이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세대불문, 대한민국을 강타한 뉴트로의 참 매력은 무엇일까. 사진 한국경제DB
1980~1990년대 추억이 줄줄이 강제 소환되고 있다. 회식자리엔 파란 병 진로소주가 돌아왔고, 1990년대 가수 양준일은 데뷔 28년 만에 첫 팬미팅 무대를 밟았으며, 영어 간판으로 도배됐던 번화가에는 ‘00다방’, ‘00식당’, ‘00상회’ 등 복고풍 간판과 1980~1990년대 스트리트 패션이 거리를 수놓고 있다. 레트로(복고)의 재탕인가. 아니다. 뉴트로의 탄생이다.
[위에서부터) 가수 양준일, 참이슬 백팩, 진로이즈백]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인 뉴트로는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복고를 즐기는 행위는 끊임없이 되풀이돼 왔다. 특히, 경기가 좋지 않을 때마다 소비자들의 기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 마케팅은 흥행공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현재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와 Z세대(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의 뒤를 잇는 세대)가 열광하는 뉴트로는 기존 레트로 열풍과는 그 결이 다르다. 뉴트로 유행의 핵심은 ‘새로움’과 ‘즐거움’이다. 이 트렌드를 소비하는 주체는 과거의 것을 이미 경험한 중장년층이 아닌 1020세대다. 이전의 복고 열풍인 ‘레트로’가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과거의 것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과거의 것을 새로운 것으로 인식해 즐기는 것이다.
그 흐름은 패션업계에서 가장 먼저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출시된 휠라의 ‘디스럽터2’다. 20년 전 처음 선보였던 거칠고 투박한 운동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2017년 출시한 디스럽터2는 출시 1년 만에 국내에서만 100만 족이 팔리며 단숨에 10~20대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재까지 국내에서만 180만 족 이상이 판매됐고, 전 세계 판매량도 1000만 족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신발 전문 매체 풋웨어뉴스는 ‘2018 올해의 신발’로 디스럽터2를 선정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2000년대 이후 이른바 ‘국민운동화’로 군림했던 컨버스 운동화에 실증을 느끼던 밀레니얼 세대에게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색다른 감성과 멋을 선사한 것이 주요했다는 평이다.
이에 대해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트렌드의 핵심은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에 가까웠다”며 “얼마나 기존의 것과 다르고, 새로운지가 트렌드의 기준이었다면 지금의 ‘뉴트로’ 현상은 그와 다른 선상에 있는데 그 배경에는 더 이상 ‘완전히 새로운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즉, 자기 개성이 강한 밀레니얼·Z세대들에겐 자발적으로 트렌드를 찾아내는 개인의 능력이 중요한데, 새로움의 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기존에 경험하지 못했던 옛 감성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것.
강 연구원은 “2000년대 초반까지의 트렌드는 여전히 소수 트렌드세터에 의해 주도되고, 대중이 그것을 따라가는 형태였다면, 지금은 각자의 개성을 부각하는 개인들이 자신만의 맥락에서 트렌드를 발견하고 정의하거나 선언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며 “뉴트로는 트렌드가 형성되는 패러다임의 인식 변화와 트렌드를 만들어 가는 주체들의 인식 변화가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유희와 추억을 교감하다
비단, 뉴트로에 열광하는 것은 1020세대만은 아니다. 3050세대 역시 잊고 지냈던 추억들을 곱씹으며 향수를 느끼고 있다. 어른들의 음악으로 치부됐던 트로트가 부활했고, 1980~1990년대 유행했던 음악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흘러나온다.
JTBC 프로그램 <슈가맨>을 즐겨 본다는 박지민(47) 씨는 “시즌1부터 <슈가맨>을 가족들과 즐겨 본다. 10대 시절 좋아했던 가수들을 다시 만나고, 음악을 듣다 보면 잊고 지낸 추억에 흠뻑 빠지게 돼 즐겁다”며 “무엇보다 유년기 시절의 노래를 자녀들과 공유할 수 있어서 좋고, 젊은 친구들이 옛 노래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걸 보는 것도 재밌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그러면서 “가수 양준일의 경우 <슈가맨>에 출연하기 전부터 아이들이 ‘요즘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아저씨인데 아빠도 아느냐’고 물어봤다”며 “예전에 레트로는 특정 세대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다면, 현재 뉴트로는 기성세대가 미처 몰랐던 과거의 조각들을 1020세대들이 발견하고,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향유하는 방식은 달라도 본질이 같다면 세대 간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박 씨의 말처럼 뉴트로는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 다양한 세대를 끌어안는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을까.
그간 우리나라는 극심한 세대 갈등을 앓아 왔다. 청년들의 상당수가 기성세대를 ‘꼰대’로 폄하하고,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근성’이 없다며 혀를 찬다. 이에 대해 임홍택 작가는 저서 <90년대생이 온다>에서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기점으로 멈춰 버린 에스컬레이터와 이를 대신한 유리계단 위에서 우리 모두에게는 여유라는 단어 대신 조급함과 억울함만이 생겨났다”고 했다.
모두가 억울한 세상에서는 특별히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 사회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수년째 한국의 청년들은 장기간 저성장의 그늘 아래에서 살인적인 취업난에 허덕이고, 조기퇴직 후 안정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지 못하는 중장년층에게도 100세 시대의 미래는 암담하기만 하다. 이런 흐름 속에 상대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담보돼야 할 대화나 소통은 어쩌면 ‘그림의 떡’에 불과할 뿐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8년 10월 발간한 ‘노인인권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노인들 중 청장년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절반(51.5%)을 웃돌았다. 노인과 청장년 간 갈등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노인 비율도 44.3%에 달한다. 청장년 역시 10명 중 9명은 노인과 소통하는 걸 어려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니 세대 간 소통은 묘연할 뿐이다. 어쩌면 뉴트로가 한 철 유행이 아닌, 지속 가능한 메가트렌드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이 지점이지 않을까.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 전 세대가 공감하되, 각자의 개성을 향유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필요해 보인다.
강 연구원은 세대 간 가교로써 뉴트로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뉴트로가 세대를 잇고 단절됐던 대화를 이어가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이 한쪽 세대가 주도하는 방향으로만 간다면 그 대화가 지속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온라인 탑골공원’이나 ‘양준일 신드롬’ 같은 경우, 중장년층보다 1020세대에서 더 열광하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요.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 중장년층의 인생선배, 혹은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자, 이거 한 번 봐봐. 엄마, 아빠가 이렇게나 힙한 시간을 보냈다’라고 제안해서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거죠.
망망대해와 같은 인터넷에서 1020대가 우연히 발견하곤 ‘어, 의외로 멋진 구석이 있는데?’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렸다는 데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공통분모를 두고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얼마든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대안이 됩니다.
하지만 이걸 특정한 세대의 소유물이라 가정하고, 뭔가 가르치기 시작하거나 틀렸다고 지적하는 등 자신이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 대화는 지속되기 어려울 겁니다. 뉴트로가 누구의 소유이냐를 따지지 말고, 함께 공감하고 열광한다면 얼마든지 세대와 세대를 잇는 가교가 될 것이라 봅니다.”
‘요즘 옛날’ 뜯어보기 뉴트로 백과사전
뉴트로(new-tro):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일컫는 말.
뉴트로가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모순된 이 단어를 한 줄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 어느새 하나의 장르이자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한 뉴트로가 궁금한 이들을 위해 ㄱ부터 ㅎ까지 뉴트로와 관련된 배경지식을 압축 정리했다. 이른바 ‘뉴트로 백과사전’.
<ㄱ> 기억
레트로의 출발점은 ‘기억’이다. 지난날의 향수에 호소해 과거를 파는 것이다. 흔히 추억은 아름답게 기억된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노아의 할아버지인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장수한 인물인데, 그는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회상할 때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미화된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 우리는 이를 ‘므두셀라 증후군’이라고 한다. 중장년층이 소비하는 레트로는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한다.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 즉 향수병을 말이다.
그런데 뉴트로의 출발점은 다르다. 1020세대에게 1980~1990년대의 기억은 없다. 본인들이 경험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색다름에 끌려 과거를 뒤지고 있는 것, 그게 바로 뉴트로다. 책 <트렌드 코리아 2020>은 뉴트로에 대해 이같이 설명한다. “뉴트로는 과거를 파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빌려 현재를 파는 것이다. 즉, 뉴트로는 재현이 아니라 해석이다.”
<ㄴ> 넥스트
뉴트로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기존의 레트로처럼 반짝 유행에서 그칠까. 전문가들은 뉴트로가 레트로처럼 매번 돌아오는 트렌드가 아닌 하나의 장르이자 문화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라 개성의 영역에서 현대인에게 또 하나의 정체성과 취향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뉴트로의 넥스트는 복고에 얼마나 더 가치 있는 해석과 창조의 결과를 창출해 낼 것이냐가 결정할 것이다.
<ㄷ> 디지털
뉴트로의 시발점. 뉴트로의 알맹이는 아날로그이지만, 이를 전파하고 알리는 기능은 디지털이 한다. 뉴트로는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감성의 결합물인 셈이다. 젊은이들은 레트로 감성이 풍기는 패션, 식품, 거리, 음식 등 모든 것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다. 과거의 낡은 스타일이 낯설고 신선하게 느껴지면서 그들 사이에 소비가 반복된다. 젊은이들의 SNS 문화가 음지에 있던 아날로그 문화를 양지로 끌어올린 셈이다.
이 디지털 플랫폼의 중추가 바로 영상 플랫폼인 유튜브다. 유튜브 세대인 1020세대에게 콘텐츠 선정의 가장 큰 기준은 ‘재미’다. 방송사는 이미 흥행에 성공한 옛 TV 프로그램을 유튜브에 소환하기 시작했다. 가족형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음악 프로그램 <인기가요> 등이 대표적이다.
<ㄹ> 리사이클링
과거의 것을 다시 활용하는 리사이클링(재활용)은 그 단어 그대로 곧 뉴트로를 의미한다. 뉴트로는 패션이나 오락에만 그 쓰임새가 있는 게 아니다. 도시재생이란 더 광범위한 측면에서도 뉴트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낡은 것을 허물고 파괴해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탄생할 대상으로 재활용하는 것이다.
낡은 도심인 서울 중구 을지로 역시 낙후된 지역으로 대표되는 곳이지만, 최근에는 ‘힙지로’란 별칭을 얻으며 젊은이들이 찾는 거리로 재탄생했다. 건축 분야에서도 리사이클링이 대세인데, 외면받았던 낡은 건축물에 기능과 디자인을 새롭게 입혀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재활용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해서 ‘업사이클링(upcycling)’으로 불리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낡은 목욕탕을 안경점으로 재탄생시킨 ‘젠틀몬스터’가 업사이클링의 대표적인 사례로 통한다.
<ㅁ> 밀레니얼 세대
‘뉴트로’를 이끄는 주축 세대다. 1982~2000년 초반 사이에 태어난 신세대를 일컫는 말로,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전환점에 태어났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디지털에 매우 익숙하며 SNS 활용에 능숙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
밀레니얼 세대의 전 세대들이 아날로그를 바탕으로 디지털을 경험했다면, 이들에게 아날로그는 처음 경험하는 미지의 영역이자 신비의 세계란 점에서 큰 차이를 갖는다. 남다른 개성을 추구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개인의 만족도를 보다 중시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르며, 이들과 관련된 다양한 마케팅이 확산하고 있다.
<ㅂ> 불황
흔히 복고의 원인으로 ‘불황’을 꼽는다. ‘불황에 복고가 통한다’는 속설처럼, 불황기에 사람들은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찾고 그 안에서 심리적인 위안을 얻기 때문에 불황의 골이 깊을수록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 마케팅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이에 뉴트로 분석 시에도 ‘불황’은 빠지지 않는 키워드 중 하나다.
특히 뉴트로의 주축인 밀레니얼 세대가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누렸던 부모 세대(베이비부머 세대)들보다 가난한 세대란 점에서 이 같은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한경 머니의 설문조사 결과는 이러한 가설을 뒤집는다. 1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로 100명씩 총 500명에게 ‘뉴트로에 대한 인식조사’를 진행한 결과, 뉴트로를 이끄는 1020세대의 과반(평균 60.6%)은 ‘과거의 것이 좋아서’란 답을 택했다. 이어 과거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19.4%),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서(7.8%), 현실이 재미가 없어서(4.9%) 순이다(이상 1020세대 평균치). 현실에 대한 불만이 아닌 과거에 대한 동경으로 젊은 세대가 뉴트로를 좇았다는 것이다.
<ㅅ> 상표
뉴트로의 인기를 가장 빠르게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상표다. 신규 상표들의 출원 현황에서 뉴트로의 바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뉴트로 감성이 10~20대의 젊은 소비층에게 관심을 끌면서 복고풍 이름을 가진 음식점 등의 상표출원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스쿱당, 미묘당, 만가옥, 술또옥 등과 같이 표장에 음식점을 나타내는 접미사인 ‘당’, ‘옥’을 붙인 상표가 대표적이다. 출원이 가장 두드러지게 증가한 것은 ‘○○당’ 상표다.
최근 10년간(2009~2018년)의 상표출원을 분석한 결과 2009년부터 2013년까지 118건의 상표가 출원됐던 것이 2014년부터 2018년까지는 288건이 출원돼 2.4배 증가했다. ‘옥’을 포함한 상표도 같은 기간 167건 출원됐던 것이 317건으로 1.9배가량 늘어났다. 이 밖에도 ‘식당’이나 ‘상회’를 포함하는 상표도 2014년 이후 큰 폭으로 출원이 증가하고 있다. 식당 상표, 상회 상표는 최근 5년(2014~2018년)간 각각 548건과 120건이 출원됐다.
<ㅇ> 을지로
뉴트로의 정의를 한눈에 보여 주는 오프라인 공간. 을지로2·3·4가 등 한때 제조업의 메카였던 구도심 뒷골목이 뉴트로 열풍으로 재탄생하며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오래된 가게, 오랜 점포는 낡은 외관을 그대로 가져가되, 내부에 새로움을 담음으로써 ‘요즘 옛날’의 모습을 시각화한다. 허름한 철물점과 오래된 인쇄점포의 간판을 그대로 걸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현대적 감성의 카페와 주점이 자리하는 식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이른바 ‘힙지로(힙+을지로)’로 불린다.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서울 성동구 성수동·종로구 익선동, 동인천 개항로 등 전국 방방곡곡에 뉴트로 공간을 확대 생산하고 있다.
<ㅈ> 재출시
뉴트로는 소비 트렌드를 주도하며 유통업계의 판을 뒤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추억 속 물건이 된 과거의 국민 물병 ‘델몬트 유리병’이 젊은이들의 ‘핫템’이 되면서 2019년 한정 패키지로 재출시됐으며, 하이트진로는 1970~1980년대의 라벨 디자인을 복원·재해석해 출시한 ‘진로’ 제품으로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옛 감성을 새롭게 재해석한 상품들은 30~40대에게는 향수를 자극하고, 젊은 세대에겐 신선하고 새로운 제품으로 인식되며 전 세대에 통한다는 장점이 있다.
매출 효과도 톡톡하다. 온라인 유통업체인 위메프에 따르면 올 2019년 1월 1일~10월 31일 기간 동안 복고 트렌드 관련 상품 판매량은 전년 대비 급증했다. 1990년대 배우 김희선이 유행시킨 헤어 액세서리 ‘곱창밴드’ 판매량은 446% 증가했으며, 실핀과 똑딱핀 매출도 각각 133%, 48% 상승했다. 식품에서도 복고 열풍이 불었다. 배달음식 애플리케이션인 요기요에 따르면 지난해 최고의 신규 배달음식 메뉴 1위는 ‘꽈배기’였다. 전년 대비 2430% 주문 수가 증가하며 폭발적인 신규 인기 메뉴로 떠올랐다. 뉴트로 트렌드가 자연스럽게 배달 앱 주문에도 반영돼 과거에 대중적으로 즐겨 왔던 메뉴들이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ㅊ> 차별화
뉴트로 마케팅의 성공 포인트는 ‘차별화’에 있다. 뉴트로는 경험하지 못한 옛것에 젊은 층들이 열광한다는 점에서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와는 성격이 다르다. 기존의 복고와 차별화해 등장한 문화 현상이란 것이다. 본인만의 차별화된 개성 표현에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의 수요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상충하는 2개의 가치를 접목하며 탄생한 뉴트로가 충족시키는 것이다.
<ㅋ> 커뮤니케이션
뉴트로는 단순히 기성세대의 추억 소비, 1020세대의 복고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세대 간 교감과 세대 통합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소위 ‘586세대’, ‘X세대’,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 간 끝나지 않는 갈등은 연령과 집단 간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관이 충돌하며 일어나는 현상이다. 전세대가 그다음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하는 현상이 계속되면서 세대 간 교집합을 만들어 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뉴트로가 등장했다. 2018년 최고의 화제작인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연령별 관객 비중은 20대 32.5%, 30대 25.9%, 40대 24.4%, 50대 이상 13.6%로 고르게 분포됐다. 부모 손을 잡고 극장을 찾은 청소년들도 줄을 이었다. 영화를 본 딸은 엄마에게 당대의 그룹 퀸에 대해, 프레디 머큐리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단순히 기성세대의 추억 소비를 넘어 세대 간 교감과 세대 통합을 이끈 것이다. 가수 양준일과 김완선, LP판과 카세트테이프, 할머니집에서 보던 유리병과 일력….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뉴트로의 힘. 세대를 잇는 오작교의 등장은 계속되고 있다.
<ㅌ> 탑골공원(온라인)
2019년 생겨난 신조어.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인 유튜브를 통해 1980~1990년대 유행한 TV 쇼 프로그램인 , 등이 다시 실시간 재생(스트리밍)되면서 이 공간을 즐기는 이들이 채널을 지칭할 때 쓴다. 유튜브의 주 시청자인 1020세대가 오래된 1980~1990년대 문화를 보고 즐기면서, 노인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탑골공원에 이를 빗댄 것이다. 탑골공원은 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공원으로 중장년층, 노년층이 주 유동인구다. 1020세대는 당시 유행가요를 보고 듣는 것을 넘어 유튜브 채널 안에서 실시간으로 서로 소통하며 온라인 세상에서의 ‘아고다’를 실현하고 있다.
온라인 탑골공원의 스타는 다양하다. 최근 제2의 전성기를 걷고 있는 가수 양준일이 대표적인 온라인 탑골공원의 스타. 가수 빅뱅의 지드래곤(GD)과 비슷한 용모와 차림새로 ‘탑골 GD’란 별칭을 얻으며 1020세대가 사랑하는 가수로 떠올랐다. 가수 김완선 역시 온라인 탑골공원의 수혜자다. 그의 히트곡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지난해에는 에버랜드와 협업해 동일 곡의 뮤직비디오 재촬영에 나서기도 했다.
<ㅍ> 패션
음악, 영화, 드라마, 음식, 생활소품, 건축양식…. 어느 하나 뉴트로가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단연 시발점은 패션이다. 커다란 로고, 원색 컬러, 애니멀 프린트, 통 큰 바지 등 현재 뉴트로의 대상이 되는 오리지널 스타일은 1990년대 길거리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이 같은 스타일이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색다름을 제공하면서 뉴트로 패션이 지난해 부터 거리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1969년에 처음 등장한 아디다스 ‘슈퍼스타’, 1990년대 출시된 나이키의 ‘에어맥스’의 최근 주 소비층은 1020세대다. 한물 간 브랜드로 불렸던 휠라와 명품 브랜드 구찌도 뉴트로와 함께 화려하게 부활했다. 특히 뉴트로 패션 아이템 중 하나인 어글리슈즈(투박한 모양의 밑창이 두꺼운 신발)의 인기를 견인한 휠라가 대표적인 뉴트로의 수혜자다.
휠라가 1998년 출시 모델인 디스럽터를 복각해 2017년 내놓은 디스럽터2는 지난 2018년 미국의 한 신발 전문 매체가 발표한 ‘2018 올해의 신발’에 선정될 정도로 전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지난해 5월에는 휠라 홀딩스의 주가가 52주 신고가를 경신할 만큼 성장했다. 1020세대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는 온라인 패션 스토어 무신사 또한 2020년을 이끌어 나갈 신진 디자이너 오디션의 콘셉트로 ‘뉴트로’를 내세웠다. 뉴트로 패션은 이미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ㅎ> 힙
‘힙하다’, ‘힙지로’, ‘힙패션’…. ‘힙’을 빼놓고 뉴트로를 논할 수 있을까. ‘힙하다’란 표현은 영어 ‘hip’과 ‘하다’를 합친 신조어다. 이 정체불명의 단어가 이제는 어디에 붙여 놔도 통용될 만큼 널리 쓰이고 있다. 히프는 엉덩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영어권에서는 ‘최근의 사정에 밝은’이란 뜻의 ‘hep’과 유사하게 ‘최신 유행이나 세상 물정에 밝은’을 뜻하는 슬랭으로 사용된다.
이른바 힙에 행위자를 뜻하는 접미사인 ‘-ster’를 붙이면 ‘힙스터’가 되는데, 유행을 따르지 않고 서브컬처를 지지하는 이들을 지칭할 때 쓴다. 즉, 2030세대 젊은이들에게 뉴트로란 주류가 아닌 서브컬처이자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로써 그 자체로 ‘힙’한 감성을 갖는다. 을지로가 ‘힙지로’가 되고, 1990년대 가수 양준일이 ‘힙스터’가 되는 바로 그 지점을 들여다보면 ‘힙’을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옛날’에 빠진 세대별 동상이몽은
1980년대에 빠진 1020세대. 4050세대는 이 상황이 그저 재미있고 신기하다. 넘을 수 없던 세대 간의 벽. ‘뉴트로’가 그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지구상 모든 전쟁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이 하나 있다면, 바로 ‘세대전쟁’이 아닐까. 늘 청춘 같았던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요즘 애들은 말이야” 하며 꼰대가 돼 간다는 것에 서글픔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최근 1~2년 사이 새로운 조류가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요즘 옛날’로 표현되는 새로운 복고, 뉴트로(new+retro)다. 이는 기성세대가 자신이 경험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을 경험해 보지 못한 젊은 세대가 ‘옛날’에 열광하는 기묘한 문화다.
전문가들은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되는 요즘, 뉴트로가 세대 화합을 여는 키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는 어떨까.
한경 머니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모바일 리서치 전문 업체인 오픈서베이를 통해 지난 1월 14일 하루 동안 10~50대 남녀 500명(남녀, 세대 동수)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표본오차 ±4.38%, 신뢰수준 95%)를 실시했다. 1020세대가 체험하고 있는 뉴트로, 이를 바라보는 4050세대의 뉴트로는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1980년대, 같은 시간을 꿈꾸는 1050세대
“당신은 뉴트로 문화를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난해는 그야말로 뉴트로의 물결이었다. 근·현대사의 굴곡을 안은 서울 중구 을지로가 젊은이들의 성지로 부활했으며, 할머니 댁에서나 봄직한 일력, 유리컵들이 젊은층의 ‘핫’한 소비 제품으로 떠올랐다. 10대부터 30대까지 집어삼킨 뉴트로에 전 세대의 관심이 쏟아진 것은 당연지사.
얼마나 많은 이들이 뉴트로 문화를 접했을까.
1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로 100명씩 총 500명에게 뉴트로 문화를 접한 경험이 있는지 묻자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55.2%로 과반을 차지했다. 트렌드를 주도한 이는 20대로, 응답자 중 70.9%가 “뉴트로 문화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반면 50대에게 뉴트로는 생소한 문화였다. 응답자 중 59.0%가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다만 ‘없다’고 답한 응답자 중 절반을 넘는 59.3%가 “뉴트로 문화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뉴트로를 바라보는 인식에서도 세대 간 미묘한 차이가 나타났다. 10대부터 50대까지 전 응답자의 75.7%가 ‘재미있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50대 응답자에게서만 기타 의견(9.8%)이 나왔다. 이들은 ‘그때 그랬었지’ 하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옛날 생각이 난다 등 흥미보다는 과거 회상을 선택했다.
최근 갑자기 생겨난 이 기묘한 현상에 반응은 어땠을까. 그간 미디어에서는 뉴트로 트렌드가 경기 불황 등 현실에 대한 시대적 절망을 품고 있다고 분석하는 경향이 많았지만, 설문 결과는 이를 뒤집는다. 뉴트로를 이끄는 1020세대의 과반(평균 60.6%)은 “과거의 것이 좋아서”란 답을 택했다. 이어 “과거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19.4%),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서”(7.8%), “현실이 재미없어서”(4.9%) 순으로 나타났다(이상 1020세대 평균치). 현실에 대한 불만이 아닌 과거에 대한 동경으로 젊은 세대가 뉴트로를 좇았다는 것이다.
뉴트로의 타임머신은 어느 시대를 집중적으로 소환했을까. 가장 소환하고 싶은 시대를 묻자 전체의 35.6%가 1990년대를 선택했다. 이어 1980년대(27.4%), 2000년대(15.0%) 순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응답자들의 최다 득표가 1990년대를 향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나이 차가 큰 10대(27.8%)와 50대(33.0%)는 1980년대에 표를 몰아줬다. 당시 10대였던 지금의 50대와 오늘날의 10대가 각각 그리운 옛날, 신비한 오늘로서 40년 전인 1980년대를 선택한 셈이다.
20대 45.6% “기성세대 이해하는 것과 관계없다”
뉴트로란 기묘한 타임머신을 통해 그 시간을 공유하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뉴트로 문화를 통해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지” 묻자 전체의 58.0%는 “기성세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란 응답을 선택했다. 그러나 “기성세대를 이해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응답 역시 41.6%나 됐다.
특히 세대 간 응답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기성세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란 문항에는 50대(65.0%)의 응답률이 다른 집단 대비 높은 반면 “기성세대를 이해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란 응답은 상대적으로 20대(45.6%)에게서 높게 나타났다. 뉴트로는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이라는 정의를 설문 결과가 보여 준 셈이다. 설문에 참여한 26세 남성 A씨는 “뉴트로 문화를 통해서 기성세대를 이해하는 것은 좀 어렵다고 본다”며 “뉴트로는 과거와 현재가 합쳐진 하나의 새로운 장르다”라고 전했다.
반면 기성세대는 뉴트로를 통해 세대 간 단절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보였다.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의 옛 문화를 꺼내들어 다시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동일한 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 좋다”는 응답률이 평균 72.2%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특히 40대의 긍정적인 응답 비율이 78.0%로 다른 집단의 응답률을 크게 상회했다.
물론 과거를 모르는 1020세대들이 옛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대해 낯선 느낌을 받는 이들도 있었다. 50대의 경우 68.0%가 “동일한 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 좋다”를 택했지만, “전혀 다른 문화로 여겨진다”를 택한 이들도 31.0%를 차지했다.
이는 다른 집단(평균 26.8%) 대비 높은 응답률이다. 50세 여성 응답자 B씨는 “참 희한한 일”이라며 “그 나이 그때의 감성이 같아 생기는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뉴트로 문화를 통해 기성세대를 이해하는 것보다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며 “같은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뉴트로를 통해 얻는 감정도 세대별 이견을 보였다. 1020세대의 경우 ‘즐거움’을 택한 이들이 평균 22.5%로 다른 집단의 응답률을 크게 앞섰지만, 4050세대의 경우 평균 5.0%만이 ‘즐거움’을 택했다. 대신에 ‘추억’을 선택한 이들이 64.5%로 가장 높게 나왔다. 4050세대에게 과거는 지난날의 향수인 레트로라면, 1020세대에게 과거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신선한 뉴트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 준 결과다.
뉴트로로 세대 간 공감대를 느끼는 감정 역시 기성세대가 더 컸다. 뉴트로를 통해 세대 간 공감대를 느낀다는 이들은 50대가 23.0%로 가장 높게 나왔다. 10대와 20대의 응답률이 12.4%, 12.6%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수치다.
뉴트로는 잠깐 스쳐가는 찰나의 유행일까. 책 <트렌드 코리아 2020>의 저자 김난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공저)은 “뉴트로는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다”라며 “개성의 영역에서 현대인에게 또 하나의 정체성과 취향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설문 결과 역시 이와 동일했다. “앞으로 뉴트로 문화가 지속 성행할 것이라고 보는가”란 질문에 “오래 갈 것이다”라는 보기를 선택한 것이 71.4%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뉴트로 문화를 향유하는 20대(74.8%), 10대(75.3%)의 응답률이 다른 집단 대비 높았으며,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를 선택한 이들은 상대적으로 50대(39.0%) 응답자에게서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설문조사 기간: 2020년 1월 14일
설문조사 응답자 수: 500명(남녀, 세대 동수)
뉴트로엔 세대별 결핍이 숨어 있다
그 골목은 비좁고 낡았으며 기름 냄새가 났다. 골목 안에서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인쇄기 소음이 멈추지 않았다. 30년 전, 그 골목은 언제나 사람으로 붐볐고 마스터 인쇄를 찍어 내는 열기와 잉크 냄새가 섞인 공기는 차가운 겨울에도 하얀 김을 내뿜었다. 지금, 한결 한산해진 그 골목 안에서는 오후 6시만 되면 온갖 빛깔의 네온사인이 켜진다.
1990년대의 홍콩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스튜디오 까페에는 ‘모모삼림(某某森林)’이라 쓰인 붉은 등이 현란하다. 모든 식재료를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했다는 와인바 앞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옮겨 온 것 같은 부처의 흉상이 놓여 있다. 낡은 철제문을 열고 들어가면 30촉 백열등 같은 아슴아슴한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이 확실한 주광색 발광다이오드(LED) 효과는 가게 안으로 들어온 손님들을 순식간에 30년 전으로 이끈다.
문 밖에는 한겨울에도 봄바람처럼 화사한 옷차림에 손바닥만 한 핸드백을 든 젊은 여성들과 멀쑥하게 차려 입고 핸드메이드 코트를 걸친 채 강렬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젊은 남성들이 연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장사진을 치고 있다. 흰 간판에 황금색 캘리그라피 간판이 붙어 있는 푸른 문의 레스토랑 안에서 파는 건 삼겹살과 곱창이다.
[위에서부터)을지로에 오래된 다방. 익선동.]
요즘 서울 중구 을지로에서는 이런 세기말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을지로만이 아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이나 성동구 성수동, 종로구 익선동 등 곳곳에서 불쑥 등장한 ‘핫 플레이스’들에서 21세기의 젊은 세대는 이처럼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즐기고 있다.
응답하라, 1990년대
2019년의 마지막 하루, 서울 어느 대학의 이벤트 홀에서는 1991년에 데뷔한 어떤 가수의 팬 미팅이 열렸다. 그는 1990년대 한국 가요계에서 거의 철저하게 외면돼 ‘너무 고생한’ 이력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다. 유튜브를 통해 새롭게 조명된 이 ‘시간여행자’는 이제는 흘러간 과거가 돼 버린 1990년대를 전혀 다르게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유튜브 동영상 아래서는 ‘1991년에 태어난 내가 1991년에 데뷔한 가수에게 빠지다니’ , ‘1990년대의 GD다’ , ‘왜 30년이나 먼저 태어나셨나요?’ 라는 댓글들이 눈길을 끈다. 한 케이블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미국 플로리다의 한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가족과 평범한 삶을 살던 그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연말 팬 미팅을 진행하는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2019년 최후의 신드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수 양준일에 대한 이야기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뉴트로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이 첫 번째 사례는 아니다.
레트로라는 유행어가 패션과 건축을 포함한 예술 및 대중문화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쯤 전의 일이다. 밀레니엄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 가고 2000년의 고비를 넘기면서 ‘복고풍’이라는 말이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유행에서의 ‘복고’란 늘 있는 일이었다. 유행은 언제나 돌고 돈다고 하지 않던가. 30년 전에도 엄마가 젊을 때 입던 옷을 수선해서 입는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있었다. 그런데 이 ‘복고’는 조금 다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써 스무 해 가까이 지칠 줄 모르고 경신되고 있다. ‘복고’의 촌스러움과 선을 그으며 ‘레트로’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뉴트로’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회고(retrospective)’라는 말에 어원을 두는 ‘레트로(retro)’ 개념은 사전적으로 ‘과거의 모양, 정치, 사상, 제도, 풍습 따위로 돌아가거나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그대로 좇아 하려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정의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종 주간지와 패션 잡지에서는 이 단어가 간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레트로 룩’, ‘레트로 풍’, ‘레트로 패션’ 등 패션에 극히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보였던 이 유행어는 ‘레트로 마케팅’과 연관되면서 이제 전 사회적인 한 가지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1997, 1994, 1988로 이어지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대한 뜨거운 반향은 우리 사회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라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품고 있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은 대한민국이 만성적인 적자를 벗어나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비상하던 시절이었다.
[위에서부터)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오비맥주, OB라거 ‘뉴트로’ 제품.]
삶 자체는 여전히 비루하고 조악하고 어수선했을지언정 눈앞에는 언제나 장밋빛으로 물드는 환상적인 비전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도 유행 중인 레트로의 근원에는 ‘1990’이라는 원형이 존재한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1990년대는 확실히 새로운 기원으로 꼽힌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이식된 것’이었던 현대적 의미의 대중문화가 드디어 우리 고유의 색깔을 띠기 시작한 시기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팝과 엔카, 할리우드 영화와 재패니메이션이 아니어도 좋은 ‘나의 취향’이란 것이 시나브로 만들어지는 시대였다. 2020년에 이르러 이처럼 1990년대는 어느덧 우리의 ‘옛것이지만 좋은 것(Oldies, but goodies)’이 돼 가고 있다.
노스탤지어 또는 시뮬라크르
옛것을 그리워하는 ‘복고(復古)’적인 취향으로서 레트로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향수(鄕愁, nostalgia)와 연관된다. 이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향수’는 돌이킬 수 없는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관련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 찬란했던 순간의 재현은 한층 더 아름답게 각인된다.
이미 경험된 것에 대한 신뢰와 가장 찬란한 순간의 조우는 ‘과거에 대한 미화’로 귀결됐다.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대부분 이러한 트렌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문화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21세기의 첫 10년이 과거를 바라보는 ‘거대한 재탕의 시대’였다고 비평했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인의 ‘레트로토피아’에 대한 기대는 불투명하고 암울한 미래에 대한 반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어떤 대상(未來)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사라진 현재는 과거를 소환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 좋은 것보다는 차라리 이미 알고 있는 나쁜 것이 낫다는 생각이 복고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스베틀라나 보임 하버드대 비교문학 교수는 “향수란 상실과 전이의 감정”이며 “자신의 판타지와 교감하는 로맨스이기도 하다”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향수병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일시적인 질병에서 치유할 수 없는 현대 조건으로 바뀌었다”며 “20세기는 미래의 유토피아로 시작해 향수로 끝났다”라는 말로 오늘날을 ‘향수라는 이름의 세계적인 유행병의 시대’로 진단한다. 현실과 상상을 혼재하게 만들고, 과거와 현재를 뒤섞이게 만드는 이 트렌드는 이제 우리를 원본 없는 복제가 더 실재처럼 느껴지는 시대로 우리를 이끈다.
옛것의 실재를 기억하고 있는 세대가 레트로를 향유하는 것은 자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상화된 ‘봄’이 산들바람과 따사로운 봄볕과 분홍 꽃바람으로 포샵이 되는 것과는 달리 실재의 봄은 훨씬 더 불안정하고 스산하고 황사와 미세먼지로 고통받는 것처럼, 우리의 찬란했던 청춘도 실제로는 훨씬 더 좌충우돌, 갈팡질팡하며 고단한 데도 얻는 것이 없는 부질없는 시간들이었다.
수많은 흐리고 비 오는 날 가운데 기억나는 단 하루가 벚꽃이 화사한 오후일 따름이다. “그땐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갈 만큼 충분한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과거는 현재보다 틀림없이 더 좋은 시간이 아니었다. 미래가 현재보다 틀림없이 더 좋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는 것처럼. 레트로 마케팅이 때때로 ‘추억팔이’로 비하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4050세대는 레트로 트렌드가 정점에 이른 핫 플레이스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 판타지는 그들에게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돌려주지 못하고, 지금 그들이 자신의 청춘을 바쳐 획득한 것들만큼 그들을 뿌듯하게 만들지도 못하면서 ‘비싼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효과보다 비싼 대가를 우리는 ‘낭비’라고 부른다. 4050세대에게는 사실 낭비할 에너지가 거의 없다.
뉴트로라는 트렌드가 1020세대에게 더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넉넉한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청춘은 청춘의 아까움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청춘은 자신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는 과정 중일 것이다.
넘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잠재력이 가치 있게 쓰이게 될 정확한 지점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청춘의 특징이다. ‘가장 좋은 것(the best)’이 아니라 ‘가장 적합한 것(the right)’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서서히 터득한다. 그래서 가지 않은 길을 가보고,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다. 4050세대에게 ‘낭비’일 따름인 경험이 1020세대에게는 절실한 ‘충족’일 수 있는 것이다.
빈티지와 레트로 사이, 온고지신
와인의 생산연도와 원재료인 포도의 수확연도를 일컫는 빈티지라는 말은 이제 패션과 트렌드의 각 분야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빈티지 와인이 특정 연도, 특정 지역에서 생산된 최고의 와인을 가리키는 일종의 평가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빈티지라는 수식어는 ‘오래돼도 여전히 가치 있는 것’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빈트로’라는 말까지 쓰이고 있다. 이 말이 ‘빈티지’와 ‘레트로’의 합성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즉,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예스런 것들 가운데 여전히 가치가 있는 것,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고대 중국과 유가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우리 문화 전통에서 ‘복고(復古)’는 언제나 숭상되는 것이었다. 옛것은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요, 새로운 것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즐기는 바이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이니 흘러가는 유행에 불과하다는 판단은 전통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었다. 새로운 것은 다만 ‘흘러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서야만 받아들여졌다. 즉, 모든 가치 있는 것은 ‘시간의 시험’을 거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말이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것을 토렴해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다. <논어>에는 “옛것을 토렴해 새로운 것을 아는 사람은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라는 공자의 말씀이 등장한다. 지나간 것을 잘 살피고 새겨서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사람이어야 남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사유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사람의 삶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모두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서 가치를 찾아나가기 때문이다.
1020은 왜 뉴트로를 원하는가.
1020세대는 다음 세대를 가지지 못한 젊은 세대다. 다음 세대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직 기념할 만한 자기 자신의 역사가 없다는 의미다. 그들에게는 ‘지금, 여기’만 있을 뿐 ‘그때, 그곳’의 추억이라는 것이 없다.
자기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역사란 책 속에나 존재하는 거리감 있는 대상일 따름이다. 1020세대가 역사의 중요성을 아는 것은 당위이지 필연이 아니다. 사실 과거가 없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또한 일종의 결핍이고 결핍은 충족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1020세대가 자신들에게 없는 역사를 ‘현재’의 감각으로 즐기는 뉴트로 현상은 이런 관점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누군가는 뉴트로라는 것이 이미 모든 것이 풍족하고 다양해진 현실에서 독특함과 고유함을 찾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테크놀로지의 편의성과 반비례해 자기 통제권을 잃어버림으로써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도피 감정이 뉴트로의 원인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사실 모두 자기 경험의 축적을 소유해 본 기성세대의 판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 경험의 축적을 경험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결핍’을 실감한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에 대한 결핍은 그것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1970년대 출생한 10대에게 1980년대에도 사람이 태어난다는 사실만큼 믿기 어려운 일은 또 없었다. 2000년생 10대에게도 그런 경험은 마찬가지로 믿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뉴트로는 ‘새로운 복고’가 아니라 그저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일 따름이다.
진로 이즈백을 가장 즐겨 마시는 세대는 찐 진로를 마시던 청춘을 회고하는 4050세대가 아니다. 이제 막 성인의 경계선을 넘은, 순하고 목 넘김이 좋은 주류와 깔끔한 패키지를 좋아하는 1020세대다. 마치 30년 전의 1020세대가 다음 날 아침의 끔찍한 숙취에도 불구하고 저도수의 청주나 레몬소주를 즐겼던 것처럼. 그 기억이 아무리 그리워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 컨디션으로는 돌아가기도 힘들고.
프로필-문현선 교수는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 대학원 초빙교수이자 인문연구모임 문이원 연구원이다. 또한 공작소 파수(破守) 스토리텔러 & 캐릭터 프로파일러, 레 필로소피(LP) 인문 프로그램 ‘타로와 별자리’ 인문학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무협>, <삶에서 앎으로 앎에서 삶으로>를 썼고, <꿈의 해석을 읽다>, <장자를 읽다> 등을 옮겼다.
I'll Meet You At Midnight /Smok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