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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덩치 큰 민간병원 대신 '최약체' 공공병원이 뛰어야 할까
사립병원은 코로나19 대응을 공공병원에 떠넘겼다. 병상 부족으로 기존 입원환자를 내보내고 외래와 응급실을 축소해야 했던 공공병원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료 인력도 빠져나가고 있다.
서울 중랑구 서울의료원에 컨테이너형 임시 치료 공간 설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시사IN 이명익
‘단계적 일상회복’에 들어선 지 한 달이 지났다. 예상한 대로 코로나19 감염자 숫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 사실 방역조치 완화는 ‘드디어 우리가 코로나19를 물리쳤다’는 승전보가 아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도저히 퇴치할 전망이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타협책에 가깝다. 교육·일자리·생계·사회적 관계 등의 가치들을 더 이상 유보할 수 없다고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방역조치를 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코로나19에 감염되어도 무증상이나 경증이 대부분이며, 백신접종을 통해 중증화로 진행되는 것을 상당히 막을 수 있음을 알게 된 덕분이다. 고위험 경증, 혹은 중증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의료자원만 충분히 확보한다면, 유행의 규모가 다소 커지더라도 감내할 만한 도전이다.
그런데 이 ‘조건’이 흔들리고 있다. 중증 환자의 급증을 의료자원이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11월 말 기준으로 중환자 병상의 가동률이 전국적으로 78.8%에 도달했으며, 심지어 수도권은 89.2%에 달한다. 아직 10%나 남았으니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병상 점유율 90%는 ‘매진’과 다름없는 수치다. 영국 국립보건임상연구원은 병상 점유율이 90%가 넘지 않도록 대비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권고한 적도 있다. 이미 수도권 중환자들이 지방으로 이송되고 있다.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한목소리로 병상 확보를 외치고, 정부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사실 한국은 확진자가 채 1000명이 안 되던 시절부터 항상 병상 부족, 의료 붕괴 걱정을 해왔다. OECD 회원국 중에서 병상수가 가장 많은 그룹에 속하는데도 말이다. 급성기 병상의 경우 OECD 회원국의 평균 병상 개수가 인구 1000명당 3.7개에 불과하다면 일본과 한국은 각각 7.8개와 7.1개로 평균의 두 배에 가깝다. 캐나다·스웨덴에 비해서는 세 배 이상 높다. 그런데 왜 병상이 부족할까? 그 이면에는 허약한 공공보건의료 체계, 주치의 제도, 의료 전달 시스템 부재 등 해묵은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다.
■ 가진 게 너무 없는 한국의 공공병원
국내의 64만여 개 병상 중에서 공공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남짓이다. 그럼에도 지난 2년 동안 공공병원이 전체 코로나19 환자의 80%를 진료해왔다. 기존 입원환자들을 내보내고 외래 및 응급실 축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중보건 위기 상황이고 공공병원이니까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사립병원들은 건강보험을 통해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을 내세워 스스로 ‘공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공공성’이란 것이 반드시 정부가 직접 소유하고 운영해야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사립병원이지만 지역사회에서 공공적 역할을 하는 곳도 있고, 공공병원이지만 돈벌이에만 골몰하며 엉망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공공병원 수를 늘리기보다, 어차피 병상도 포화상태인데 사립병원들의 공공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영리적 속성을 최소화하고 보건의료 전반의 공공성을 높이자는 주장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막상 코로나19 유행이 닥치자 스스로 ‘공공이나 다름없다’고 했던 사립병원들은 조금이라도 열이 나는 환자들은 모두 공공병원으로 미뤄버렸다. 심지어 “왜 공공병원들이 병상을 싹 비우고 코로나19에 대응하지 않느냐”라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사립병원들은 ‘메르스 때처럼 정부가 손실보상을 제대로 안 해줄 것이고, 다른 환자도 맡아야 하기 때문에 코로나19 진료에 나서기 어렵다’고 했다.
이쯤 되면 공공병원 측이 “그래? 그럼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네는 빠져!”라고 큰소리칠 법도 하다. 서글프게도 한국의 공공병원들은 이렇게 자존심을 내세울 수가 없다. 가진 게 너무 없기 때문이다
지난 8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의료기관들이 보유한 중환자 병상 개수는 총 1만899개에 달한다. 소아, 신생아 중환자실을 제외하면 총 8847개로 인구 10만명당 17개, OECD 평균 12개에 비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국립대학병원을 포함한 공공병원들이 보유한 중환자 병상은 1924개로 전체의 21.7%에 불과하다. 산재병원이나 보훈병원 같은 특수병원을 제외하면 숫자는 더욱 줄어든다. 공공병원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병상 숫자만 적은 것이 아니라 인력과 기술적 역량도 취약하다. 사실 전국의 지방의료원(지자체 설립 공공병원) 가운데서 위중증 코로나19 환자를 직접 진료할 수 있는 병원의 숫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 경증이나 중등증 환자만 진료하다가 환자 상태가 나빠지면 지역의 국립대학병원이나 사립대학병원으로 보내야 한다. 코로나19 대응에서 공공병원들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본인의 몸집보다 큰 부담을 떠안아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립병원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 덩치 큰 민간병원 대신 ‘최약체’ 공공병원이 뛰는 나라
공공병원과 사립병원의 이런 관계는 영국이나 이탈리아 사례에 비추어보면 대단히 이질적이다. 국립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s, NHS) 제도를 운용하는 영국은 병상 대부분이 국가가 직접 소유한 공공병원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NHS 예산이 꾸준히 삭감되고 의료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대기 적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응급 수술(고관절 치환술, 백내장 수술 등) 등을 사립병원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영국의 사립병원들은 외과 의사나 마취과 의사를 직접 고용하기보다 NHS 소속 전문의들을 활용한다. 당연히 중환자 병상을 보유한 사립병원은 거의 없다.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잉글랜드 정부는 사립병원들과 계약을 맺어 NHS 진료 부담을 완화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한 달에 약 4억 파운드(약 6200억원)를 사립병원에 지원했지만, 정작 사립병원들은 13개월 동안 잉글랜드 전체 코로나19 환자 진료량의 0.08%만 분담했다. 사실 이럴 수밖에 없었다. 사립병원들은 병상과 수술실은 있지만 전담 인력 없이 NHS 의료진에 의존해왔다. 팬데믹 기간 중에 대다수의 의료 인력들이 NHS 병원에서 일하느라 사립병원엔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1월17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응급실 의료진 118명이 당국의 코로나19 부실 대응에 항의하고 있다.ⓒAFP PHOTO
또 다른 NHS 국가인 이탈리아 병원들은 크게 공공·사립·‘공영형’ 사립병원으로 구분된다. ‘공영형 사립’이란 민간이 소유하고 있지만 NHS 계약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공공이든 공영형 사립이든 NHS 병원에서는 대부분의 의료서비스가 무료다. 일부 특별한 서비스에 대해서만 본인부담금이 부과된다. 반면 사립병원은 모든 보건의료 서비스 비용을 이용자가 직접 부담해야 한다. 사립병원들은 진단검사, 외래 전문의 진료, 비응급 시술 등 소위 ‘장사가 되는’ 서비스들만 제공하는 편이다. 반면 공공병원들은 응급의료를 비롯해 폭넓은 범위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518개 공공병원 중 79.9%가 응급실을, 65.4%가 중환자실을 운영하는 반면, 전체 병원의 48%를 차지하는 공영형 사립병원에서는 단지 5.8%가 응급실을, 9.3%만이 중환자실을 운영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난 10년간 이탈리아에서는 NHS 투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2010~2017년 공공병원이 634개소에서 518개소로, 공공병상 숫자도 인구 1000명당 4.1개에서 3.5개로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정규 인력은 7%가, 비정규 인력은 37.8%가 감소했다.
결국 이탈리아 NHS는 민간부문과의 협력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렇게 전체 의료시스템에서 비중을 늘린 민간부문 병원들이 응급의료, 중환자 진료 등 복잡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 서비스들을 여전히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10~2017년 이탈리아 전역의 응급실 숫자는 10.7%, 중환자실은 5.8% 감소했다. 특히 공공병원이 줄어든 곳에서 이런 감소 폭이 컸다.
유행 초기 큰 타격을 받았던 롬바르디아주의 경우, 58개 공공병원 중 40곳이 응급실, 42곳이 중환자실을 운영한 반면, 66개의 공영형 사립병원 중에서는 단지 17곳에서 응급실을, 13곳에서만 중환자실을 운영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정부는 사립병원들이 NHS를 돕도록 재정지원을 했다. 그러나 사립병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응급의료, 중환자 진료 등 비용이 많이 드는 복잡한 서비스를 제공할 역량 자체가 사립병원들에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진료 역량과 자원 측면에서 공공병원들이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당하기 어려워 민간을 동원한 반면, 한국은 양적·질적 측면에서 우세한 민간 의료자원을 최대한 보호하는 가운데 최약체 공공병원들이 전면에 나섰다.
■ 주치의도, 1차 진료 의사도 없다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난 한국 의료체계의 문제는 공공부문의 허약함뿐만이 아니다. 중환자 진료만큼 중요한 것이 1차 의료다. 의료진이 환자와 가까운 곳에서 장기적 신뢰관계를 구축하며 건강을 관리해주는 것이 1차 의료기관이다. 환자 개인의 건강과 안녕에도 도움이 되지만, 불필요한 입원을 최소화함으로써 팬데믹 대응 등을 위한 병상 및 의료인력 보전에도 중요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방역조치 완화 이후 환자 폭증을 경험하고 있는 싱가포르에서는 보건부의 대국민 지침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긴급하지 않은 문제로 병원에 진료받으러 가는 것을 자제해주시기를 강력히 요청합니다. 대신 주치의나 1차 진료 의사와 상담하십시오.” 한국에서는 정부가 시민들에게 이런 협조를 구할 수 없다. 주치의도, 1차 진료 의사도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환자의 재택치료나 일반 환자의 비대면 진료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에도 1차 의료의 역할이 중요하다. ‘열이 나고 기침을 하는데 과연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러 가야 할지 궁금할 때’ ‘코로나19 재택치료 중에 배탈이 나서 비대면 진료가 필요할 때’ ‘백신접종 후 갑자기 두통이 생겼는데 병원에 당장 가야 할지 애매할 때’ 등이다. 평소 나의 건강상태를 잘 알고 의무기록도 보존되어 있는 1차 의료센터에 문의하면 대부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일면식도 없는 전담 클리닉이나 콜센터, 보건소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부터가 어렵다. 정부도 고생이 많다. 콜센터 인력을 확보하고 가능한 시나리오에 따라 대응 매뉴얼을 만들며, 별도의 의료기관을 지정해야 한다. 1차 보건의료체계가 잘 갖춰져 있었다면 굳이 들이지 않아도 될 수고다.
2013년 3월28일, 폐업 두 달 전의 진주의료원. 2013년 2월26일 당시 홍준표 경남지사는 적자 누적을 이유로 진주의료원 폐업 조치를 했고 결국 같은 해 5월29일 병원은 폐쇄되었다.ⓒ시사IN 이명익
■ 청구서가 왔다, 그리고 또 쌓여간다
이 같은 상황은 지난 50년 동안 해온 국가정책의 결과물이다. 지금 뒤늦게 그 청구서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건강보험의 도입과 확장을 통해 의료보장 강화를 도모하면서도, 의료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려는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건강보험 대상자가 늘어나고 급여 수준이 높아질 때마다 의료 수요는 급증했지만, 정부는 직접 병원을 세우기보다 민간부문의 자원을 동원하는 데 집중했다. 직접 사업비를 지원하거나 장기 저리융자, 해외 차관을 알선해가면서 사립병원의 건립과 이들의 시설·장비 확보에 힘을 보탰다. 지역의 병상 총량을 규제하는 시스템이 사실상 부재한 가운데, 민간병원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엔 50% 이하였던 민간 병상 비중이 1977년 62.6%, 1985년 80%를 넘어 지난 10년 동안 거의 90%에 육박하고 있다.
그동안 국립대학병원과 일부 특수목적 병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공병원들은 정치적 무관심과 투자 부족 속에서 지금 같은 ‘소수파’로 전락했다. 또한 민간부문에 이 정도의 공적 지원을 해왔으면 정부가 어느 정도 통제력을 가질 법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국이라는 국가는 경제발전계획을 세우고 산업 부문을 직접 통제했다. 그러나 보건의료, 돌봄, 주거, 교육 부문엔 국가가 직접 나서서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기존 진료를 상당 부분 축소했던 공공병원의 경영진들은 하나같이 코로나19 이후를 걱정하고 있다. 그나마 지역사회에서 힘들게 쌓아올린 신뢰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병원 자원을 탈탈 털어서 하고 있기 때문에, 응급센터는 당연히 포기했다” “투석 환자도 70명까지 봤는데 지금 10명 남짓이다. 나머지는 다른 투석실을 간다는 얘기다. 병원이야 쌔고 쌨잖나. 한번 그리로 가고 나면 다시 안 올 거다” “유행이 조금 잠잠해지면서 환자를 다시 받았는데, 의료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코로나19를 위한 병상 확충 때문에) 나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를 않더라. 우리 병원에 계속 오시던 환자들 가운데, ‘다른 데 입원해 있더라도 의료원 문 열면 갈래요’ 이야기를 했던 분들이 두 번째 내보내고 나니까 이제는 안 오더라.”
코로나19 전담 진료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러지 않아도 미흡했던 의료 역량이 더욱 축소되고 있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비뇨기과 수술하시는 분이 나가셨고, 정형외과 수술하시는 분 나가셨고, 치과 선생님도 나가셨고” “환자도 없고 외래도 보지 말라고 이러니까 내가 여기서 뭐 하나, 대개 구하기 힘든 과들이 많이 나갔다. 재활의학과, 심장내과… 나중에 이 병원으로 참, 뭘 할지 걱정이다.” 손실보상금으로 당장의 손실은 메울 수 있다지만, 장기적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의료서비스의 핵심은 인력인데 그 핵심 요소가 빠져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의 의료대응 체계가 지속된다면, 그리고 규모와 질 측면에서 획기적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공공병원들은 코로나19가 진정된 이후 단골 환자도 의료인력도 줄어든 만신창이 상태에서 힘겹게 살길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돈벌이에 나서거나, 적자-저투자-낙후-적자의 악순환에 빠지거나. 그리고 그 대가는 다음 번 공중보건 위기에 청구서가 되어 우리 사회에 날아올 것이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 시사인
1700만명 월급주는 中企…韓경제 48%도 맡아
중소기업 전체 매출 2732조원, 688만 기업체에 근로자 1744만명'
중소기업중앙회(이하 중앙회)는 2021년 '중소기업 10대 뉴스'를 발표하면서 양적 성장을 주요성과로 손꼽았다. 올해 발표된 통계청 기업통계등록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중소기업은 688만개로 전년 동기대비 25만개(3.8%)가 증가했다. 몸집이 불어나면서 중소기업 근로자수는 1744만명으로 직전년도 1710만명에서 34만명 늘었다. 매출액은 2.6%증가한 2732조원으로 국내 기업 매출액의 48.7% 정도다.
중소기업 수출액도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중기부와 관세청은 지난달 기준 올해 누적 중소기업 수출액이 역대 최고치인 1052억달러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은 그간 연 1000억달러 안팎을 수출해 왔다. 올해는 2010년 통계 작성이 시작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더 2018년(1052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이 밖에도 △중소기업협동조합의 중소기업자 지위 인정 △2차례 대출연장·이자유예 통한 유동성 지원 △중소기업 결손금 소급공제 기간 확대 △중기중앙회 납품대금 조정업무 개시 △기술탈취 근절 법령 개정 △노란우산 재적가입자 150만명 돌파 △중소기업 ESG·탄소중립 대응 △15년만에 조합추천 수의계약 한도 2배 상향 등이다.
머니투데이 이재윤 기자
사회는 우리의 애도에 응답하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춤추는 '성노동자'들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2021 성노동자 추모행동’에서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의 왹비(활동명)씨가 발언하고 있다. 이두리 기자
“왜 아직 목숨의 위협을 받아도 경찰에 신고할 엄두조차 못 내는 존재가 있습니까?”
서울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지난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에 ‘창녀’들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성노동자의 죽음과 존재를 가시화하자는 의미의 ‘창녀 행진(slut walk)’이다. 이날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이하 차차)’가 개최한 ‘2021 성노동자 추모행동’에 참가한 40여명은 집회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가시나’ ‘숙녀가 못 돼’ 등 신나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용산구 한강진역부터 녹사평역까지 왕복 약 4km를 행진했다. “우리가 여기 살아있음을 알리는 몸짓을 합시다. 죽은이들의 몫까지 춤춥시다!” 집회 트럭에 오른 성노동자 당사자인 왹비(활동명)씨가 외쳤다.
“‘창녀’가 ‘더러운/음란한 여성’을 가리키는 멸칭으로 쓰이잖아요. 그런데 왜 ‘더러운 여성’으로 살면 안 되냐는 거예요. 창녀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니라 창녀를 향한 ‘시선’이 문제라는 걸 나타내고 싶었어요.” ‘차차’의 유자(활동명) 활동가는 이날 ‘창녀’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17일은 ‘국제 성노동자 폭력 종식의 날’이었다. 수십 명의 성노동자 여성을 살해한 미국의 연쇄살인범 게리 리지웨이의 유죄 판결을 계기로 2003년 도입된 기념일이지만, 그로부터 20여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성노동자 여성들은 여전히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다.
지난 8월 서울 송파구에서 강윤성에게 살해당한 여성 두 명은 모두 노래방 도우미였다. 지난 6월에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30대 성노동자 여성이 19세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없어져도 된다”고 진술했다. 지난 3월에는 미국 애틀랜타의 한 마사지숍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성노동자 여성들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경찰에서 마사지숍을 “제거하고 싶은 유혹”으로 인식했다고 말했다.
“왜 아직 목숨의 위협을 받아도 경찰에 신고할 엄두조차 못 내는 존재가 있습니까?”
서울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지난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에 ‘창녀’들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성노동자의 죽음과 존재를 가시화하자는 의미의 ‘창녀 행진(slut walk)’이다. 이날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이하 차차)’가 개최한 ‘2021 성노동자 추모행동’에 참가한 40여명은 집회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가시나’ ‘숙녀가 못 돼’ 등 신나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용산구 한강진역부터 녹사평역까지 왕복 약 4km를 행진했다. “우리가 여기 살아있음을 알리는 몸짓을 합시다. 죽은이들의 몫까지 춤춥시다!” 집회 트럭에 오른 성노동자 당사자인 왹비(활동명)씨가 외쳤다.
“‘창녀’가 ‘더러운/음란한 여성’을 가리키는 멸칭으로 쓰이잖아요. 그런데 왜 ‘더러운 여성’으로 살면 안 되냐는 거예요. 창녀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니라 창녀를 향한 ‘시선’이 문제라는 걸 나타내고 싶었어요.” ‘차차’의 유자(활동명) 활동가는 이날 ‘창녀’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17일은 ‘국제 성노동자 폭력 종식의 날’이었다. 수십 명의 성노동자 여성을 살해한 미국의 연쇄살인범 게리 리지웨이의 유죄 판결을 계기로 2003년 도입된 기념일이지만, 그로부터 20여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성노동자 여성들은 여전히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다.
지난 8월 서울 송파구에서 강윤성에게 살해당한 여성 두 명은 모두 노래방 도우미였다. 지난 6월에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30대 성노동자 여성이 19세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없어져도 된다”고 진술했다. 지난 3월에는 미국 애틀랜타의 한 마사지숍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성노동자 여성들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경찰에서 마사지숍을 “제거하고 싶은 유혹”으로 인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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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성매매특별법은 성매매 업주와 성구매자뿐 아니라 성노동자까지 처벌하도록 돼있다. ‘위력에 의해’, 즉 비자발적으로 성매매를 강요당한 사람은 ‘성매매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보호되지만 생계를 위해 성노동을 ‘선택’한 자는 단속 대상이다.
이날 집회에서 왹비씨는 “성노동자의 죽음은 원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조용히 사라진다”고 말했다. “성노동을 선택한 사람을 짓밟을 권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말 한 개인이 성노동을 선택하는 과정은 자발적이었고 자유로운 선택이었을까? 노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노동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나? 창녀에게만 자발과 비자발을 나눠서 말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왹비씨는 발언대에 올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지난 16일 ‘차차’가 ‘2021 성노동자 추모행동’의 일환으로 개최한 웹 세미나 ‘삶─성노동자─죽음’에서 발언한 성노동 당사자 데파코트(활동명)씨는 “성노동을 노동이라고 명명할 때 성노동자의 권리, 성산업 현장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존재는 불법이기에 강간을 당해도 신고조차 할 수 없다. 내가 경찰 단속에 걸려 구치소에 구금돼도 업주는 나를 대체할 다른 성노동자를 구할 것”이라며 “성노동자도 부당해고를 당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을 수 있어야 하고,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2021 성노동자 추모행동’의 ‘창녀 행진’에서 참가자들이 “사회는 우리의 애도에 응답하라 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두리 기자
이날 집회에는 비거니즘, 트랜스젠더퀴어, 청소년 등 다양한 분야의 인권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연대발언을 한 비거니즘·페미니즘 팟캐스트 ‘흉폭한 채식주의자’의 나무(활동명)씨는 “수치로 매겨져 애도되지 않는 동물의 죽음과 성노동자의 죽음이 같은 맥락에 있다”고 했다. “고기를 먹을 때 그 고기가 원래 살아있는, 구체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듯이 성구매자도 성노동자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죠. 그런 권력 구조에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유자 활동가는 “현행 성매매특별법은 업주와 성구매자들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성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돈과 일자리가 가장 간절한 성노동자가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구조”라며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을 구원의 대상 혹은 처벌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매매 산업에서 무조건 나오라고 할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성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버텨내고 있는지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경향 이두리 기자
고려장에서 간병살인까지,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홀로 간병하다가 결국 아버지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한 죄로 감옥살이 중인 청년의 사연이 최근 알려졌다. ‘사회복지’는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묻게 된다.
김기영 감독이 연출한 영화 〈고려장〉의 한 장면.ⓒ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제공
몇 주 전 한국 영화사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하녀〉(1960)를 잠깐 얘기한 적이 있지. 〈하녀〉를 만든 김기영 감독의 초기 걸작 가운데 영화 〈고려장〉도 있다. 당시 이화여대 교수로 와 있던 캐서린 크레인은 “한국 고래(古來)의 풍습을 그린 고려장도 좋지만 국민들의 일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해달라(〈조선일보〉 1963년 3월29일)”는 기고를 하고 있어. 외국인들에게 ‘고려장’은 한국의 옛 풍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한국인들 역시 그러려니 했다는 걸 의미할 거야.
그런데 우리나라 사서에는 어느 시대든 고려장이 널리 행해졌다는 기록이 없다. 몇몇 설화의 형태로 전승되고 노인 유기 범죄로 다뤄진 사례는 있으며 다산 정약용도 짤막하게 언급한 바 있지만 고려장이라는 장례 풍습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이 고려장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조선 말 동양에 왔던 선교사 윌리엄 그리피스의 저서 〈은자(隱者)의 나라 한국〉에서였어. 여기서 그리피스는 한국에 노인을 유기하는 장례 풍습이 있었다며 이를 ‘Ko-rai-chang’이라고 표기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으나 그리피스 이후 한국에 고려장이라는 몹쓸 풍습이 널리 행해졌다는 이야기가 확산됐고,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스스로도 그걸 사실로 믿어버린 게 아닌가 해. 그래서 고려장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단어의 연원을 떠나서 ‘노인 유기’라는 특정한 범죄적 행동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다고 판단해 ‘고려장’의 표현을 빌리기로 한다.
각박하고 혹독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고려장’ 사건은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아버지를 생장(生葬)하는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1924년 9월13일)는 그 후 수없이 되풀이될 노인 유기 범죄를 대하는 언론의 전형과도 같다. “‘부친을 고려장을 지냈다.’ 이것을 옛말로는 들었으나 사실로 듣고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 그런 불효자 놈을! 하고 놀라는 도학 선생의 분심으로 놀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산 채로 장사지냈다는 이 한 사실과 이런 일을 해야 했던 그의 형편을 대조하여 생각할 때 엄숙한 경악을 느끼는 바이다. 물론 단순한 경제적 곤박뿐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교육이 없는 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종래로 극단의 가족주의를 지켜오던 우리 조선에서 부모를 생장(生葬)했다는 것은 실로 경제라는 것이 얼마나 그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는지를 알겠다.”
‘도학 선생의 분심’ ‘사실과 형편의 대조’ ‘극단의 가족주의를 지켜오던 조선’ 그리고 ‘경제를 지배하는 인격’ 따위 표현들은 그로부터 100년 동안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노인 유기 범죄, 즉 고려장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거의 다 묘사하고 있어. “어떻게 부모를 버릴 수 있나” 분기탱천하고 “가화만사성”을 곱씹으며 “못 배워먹은 놈들이 그렇지”라고 혀를 차다가 사건의 내막을 듣고는 “가난이 죄지” 하면서 먼 산 바라보는 일이 그 뒤로 골백번 반복됐을 거란 얘기다.
범죄를 질타하면서도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
1933년 부산 대신동에 사는 이의문이라는 사람은 그 두 아들과 공모해 죽지도 않은 아버지를 관에 넣어 생매장해 버렸다. 이 극악한 살인미수범 불효자를 질타하면서도 기자는 슬쩍 이런 사실을 흘리고 있어. “수년간 노병으로 고통 겪으며 지내는데 오랫동안 병이 낫지 않고 지리하게 끌어오는 것을 싫어하여(〈동아일보〉 1933년 7월9일)” 벌인 행동이라는 것이었지. 아마 당시 사람들도 이런 불효자 살인미수범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발을 구르는 한편으로 돌아서서는 “긴 병에 효자 없지” 하며 쓴 입맛을 다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지금도 가족 중 누군가 중병에 걸린다면 그 병세와 더불어 “그 집 형편은 괜찮나”를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판에 온 나라가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 늙은 부모가 오래 몸져눕거나 치매에 걸린다면 얼마나 큰 사건이었겠니.
1995년 2월10일 전북 부안의 한 다방에 할머니가 버려졌다는 신고 전화가 들어왔다. 경찰이 출동해 할머니를 모시고 와 부안군청에 인계했다. 부안군청은 할머니를 보호하면서 대체 어떻게 된 사연인지 캐물었는데 한 달을 버티던 할머니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어. 일종의 자발적 고려장이었다.
할머니는 서울에서 택시 기사를 하던 아들, 며느리와 단란하게 살고 있었어. 그런데 아들이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집안의 가장이 대소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됐고 먹고살 일이 막막했지. 그때 할머니가 며느리를 설득한다. “고향에 나를 버리면 누군가 양로원이라도 보내줄 것 아니겠느냐.”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거부했지만 ‘경제는 인격을 지배’하기 마련.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전북 부안으로 향한다. 그리고 다방에 할머니를 놓아두고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이 할머니를 모셔가는 걸 지켜본 뒤 통곡하며 돌아왔다고 해.
사실이 밝혀진 후 며느리에게 존속유기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됐지만 검찰이 고개를 저었다. “유기의 고의가 분명하지 않다(〈조선일보〉 1995년 3월17일).” 즉 노인을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행위 과정에서 고려할 점이 있고 그런 행동을 감행하게 만든 상황을 감안했기 때문일 거야. 사람들도 이 슬픈 이야기에 가슴을 쳤고 전국에서 성금이 쏟아지는 가운데 할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비극은 이어졌지. 사건이 알려진 뒤 뇌출혈로 쓰러진 아들은 “못난 자식 때문에 어머니와 집사람이 고통을 받게 됐다며 곡기를 끊었고(〈동아일보〉 1995년 4월22일)” 그예 세상을 떠나버렸으니까. 2000만원가량 들어온 성금을 어머니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말이다. 범죄를 저질렀지만 어느 모로 봐도 착한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착한 사람들이지만 범죄를 저질렀다. 그 어느 쪽도 부인할 순 없겠지만 우리는 어느 쪽에 더 방점을 찍고 대책을 세워야 하겠니.
얼마 전 탐사보도 매체 〈셜록〉에서는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홀로 간병하다가 결국 아버지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한 죄로 감옥살이 중인 22살 청년에 대해 보도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으며, 아버지를 두고 일하러 갈 수도 없고, 당장 먹을 쌀과 생필품이 되다시피 한 핸드폰까지 끊겨버린 청년은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외면했고, 그 결과 존속‘살해’ 혐의로 2심에서도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변호인 측은 형량이 좀 낮은 ‘유기치사’를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지. 사건을 가장 엄밀하게 들여다본 이들은 재판부일 테니 그 판결을 두고 아빠가 왈가왈부하기는 어렵겠다. 그래도 안타까움은 남는단다. 아빠가 그 청년의 상황이 됐을 때 그와 다른 선택을 할 거라고 장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야. 반대로 아빠가 그 청년의 아버지 처지가 됐다면 아들을 일점 원망할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야. 그리고 대관절 세계 10대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사회복지제도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이기에 이런 상황이 방치되는 걸까 생각해본다. 처음에 얘기한 1924년, 〈동아일보〉 기사는 이렇게 끝맺는다. “물질 때문에 죄악을 짓지 않는 공평한 세상이 이 땅 위에는 세워지지 않고 말려는가. 이 엄숙한 사실 속에 불 지를 연료를, 눈 있는 사람은 찾아낼지어다.” 이 기막힌 현실을 불태울 ‘연료’는 과연 무엇일까.
김형민(SBS Biz PD) 시사인
부동산 오르든 내리든, 왜 모두 기분 나빠 할까
대부분 화나는 부동산 급등
앞사람을 못 따라가 좌절하고
뒷사람이 쫓아와서 초조한 구조
집 있는 서민은 세금 많다 화내고
집 없는 이들은 ‘낙오자’라고 분노
부동산값이 모든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한다는 명제는 성립할까? 사진은 아파트로 가득 찬 서울 도심을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데이터의 시대다. 자료도 해석도 넘쳐난다. 하지만 신호가 많은 만큼 소음도 많다. 소음을 걸러내고 꼭 맞는 신호만을 찾아내기 위해, 직접 원자료에 접근해 분석하는 방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작업의 많은 부분을 직접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해야 하니 까다롭다. 하지만 입맛에 꼭 맞는 통찰을 찾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글의 문패가 ‘경제 코드’인 이유다.
기분 나쁠 수밖에 없는 자산 분포
첫번째 분석 대상은 부동산이다. 최근의 부동산값 급등으로 ‘모두가 기분이 나쁘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왜 그럴까? 원자료를 분석해 알아내려 했다. 사실 이 명제는 직관에 어긋난다. 집값이 오르면 집을 가진 사람은 행복해지는 게 맞다. 우리나라에 자기가 소유한 집에 사는 사람은 60%를 넘는다. 게다가 집을 갖지 않았으나 구매할 계획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집값이 오르면 3분의 2 이상은 기분이 좋거나 그저 그런 상태가 될 것 같은 수치다.
불평등 때문일까? 불평등이 원인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평등한 사회가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 그런데 명백해 보이는 문제도 막상 구체적으로 정의하려면 쉽지 않다. 모든 사람의 부동산 자산이 얼마나 비슷하면 평등한 것일까? 모두가 다 똑같은 게 이상적일까? 최상위 계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억제되어야 할까? 어느 정도까지 억제되면 평등한 것일까?
따지다 보면 계층별 평균이나 일부 계층이 차지한 비중과 같은 부분적 분석만으로는 ‘평등’이라는 이상적 분배 상태를 정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평등을 정의할 수 없다면 불평등 정의도 어렵다. 결국 불평등은 전체 부동산 자산의 분포가 어떤 모양인지를 통해 정의해야 한다.
나는 정규분포(그림 1)가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소득 및 자산의 분배 상태라고 본다.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 가운데는 불룩하고 양쪽 꼬리는 얇은 그래프를 떠올리면 된다. 소득이나 자산이 중간 정도인 사람은 아주 많고, 상위층과 하위층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소수인 형태의 곡선이다.
무엇보다도 중간이 두껍다는 게 장점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동질감을 느끼며 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정규분포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양쪽 꼬리가 존재한다는 점도 어쩌면 장점이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큰 부를 쌓는 소수로 올라설 기회가 있다. 또한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뒤로 처질 수도 있다. 그런 어려움은 소수에게만 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정규분포는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정규분포는 그래서 안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집값 급등이 모두를 기분 나쁘게 만든 이유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부동산 자산의 분포를 살펴보며 짐작할 수 있다. 부동산 관련 통계자료를 제공하는 쪽에서 분포 전체를 분석해 보여주는 일은 흔치 않다. 보도자료나 언론에서는 평균이나 특정 계층 집중도나 상승률 정도를 보여줄 뿐이다. 그것도 전체 부동산 시장이나 아파트 정도로 뭉뚱그려 보여준다.
전체 부동산 자산의 분포를 보려면, 원자료를 직접 찾아 가구별 자산을 파악해 그림을 그리면서 판단해야 한다. 직접 코드를 짜서 원자료를 분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가구 부동산 자산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통계청에서 1년에 한번 실시하는 가계금융복지조사 원자료를 내려받아 분석했다. 전국 2만여가구의 소득과 자산 실태를 주로 알아보는 설문조사 결과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조사는 2020년 3월 조사다. 원자료에 접근해 가구 부동산 분포를 보면 그림 2와 같다. 가구 보유 부동산 자산은 앞서 언급했던 정규분포와는 거리가 멀다. 가장 자산 규모가 작은 계층의 수가 가장 크다. 자산이 커질수록 수는 점점 작아진다. 그래서 자산이 가장 큰 계층의 수가 가장 작다. 계층이 올라갈수록 보유자산 규모는 거듭제곱으로 커진다. 흔히 ‘기하급수적’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분포다.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모두가 기분이 나빠진’ 이유가 바로 이 ‘지수분포’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분포 아래서는 바로 앞사람과 나 사이 거리는 나와 내 뒷사람 사이 거리에 일정한 수를 제곱하면 나온다. 즉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2미터, 2×2=4미터, 2×2×2=8미터, 2×2×2×2=16미터와 같은 식으로 벌어진다. 따라서 내 뒷사람과 나의 거리보다, 나와 내 앞사람의 거리가 일정한 수의 제곱만큼 더 멀다. 이 분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같은 처지다.
우리나라 모든 가구를 부동산 자산 보유액을 기준으로 한줄로 세워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꼭 한칸 뒤에 있는 집과 우리 집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나와 나보다 한칸 앞서 있는 집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적으로 가격이 오르면 어떻게 될까? 나와 내 뒷사람 사이의 거리는 크게 멀어지지 않는 것같이 느껴지지만, 나와 내 앞사람 사이의 거리는 훨씬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앞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어 좌절스럽고, 뒷사람이 따라오고 있어 초조해지는 구조다. 집 가진 사람들은 내 앞사람 집이 저리 비싼 걸 보니 나는 서민임이 분명한데 세금만 더 낸다고 화를 낸다. 집 없는 사람들은 낙오자가 되었다고 화를 낸다. 이게 바로 내 집값이 올라도 오히려 더 화가 날 수 있는 구조다.
당장은 집값 낮추고, 분배 정책 바꿔야
지수분포는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서만 나타나는 법칙은 아니다. 토마 피케티가 모은 세계 각국의 소득 및 자산 데이터를 보면, 최근 대부분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최상위 계층 내부에서만 조금 다른 분포가 나타난다. 지수분포보다 더욱 불균등한 형태다.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차별과 혐오의 정서도 이 분포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자산가격이 오르면서 모두가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분포 곡선은 보여준다. 이런 사회의 해법은 뭘까? 당장은 너무 앞만 바라보며 살지는 않도록 노력하는 게 좋겠다. 앞만 바라보면 목이 꺾이며 주저앉기 쉽다. 앞사람이 점점 더 높이, 멀리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집값이 다 같이 떨어진다면 앞사람과의 거리는 좁혀질 것이다.
물론 더 좋은 방법은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 예컨대 자산분포를 지수분포에서 정규분포로 바꾸는 것이다. 정책의 역할이다. 다만 단기 미봉책으로 분포의 변화까지는 일어나기 어렵다. 모두가 기분 나쁜 일이 원천적으로 생기지 않으려면, 분배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정책이 필요하다.
LAB2050 연구활동가 wonjae.lee@lab2050.org/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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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장님들, 우리는 기계도 노예도 아닙니다”
세계이주노동자의날 맞아 집회…사업장 이동의 자유·차별금지 등 요구
비닐하우스 사망 노동자 1주기 추모식도 열려…“여전히 근로조건 열악”
이주노동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를 ‘세계 이주노동자의날’ 기념대회가 열린 19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회 1부에서는 지난해 12월20일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된 캄보디아 여성 농업노동자 속헹에 대한 추모제가 열렸다(왼쪽 사진).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주노동자는 한국에서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 탈것, 살 것을 생산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주노동자는 기계나 노예 취급을 당하고 있다.”
‘세계 이주노동자의날’을 맞아 이주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촉구하고 지난해 겨울 비닐하우스 기숙사에서 숨진 이주노동자 속헹을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주노동자들은 “Free Job Change(사업장 이동의 자유)” “No discrimination(이주노동자 차별금지)”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주노조와 민주노총 등은 ‘세계 이주노동자의날’(12월18일)이 하루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세계 이주노동자의날 대회’를 열었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토요일이었던 18일은 이주노동자들이 쉴 수 없어서 이날 집회를 열었다”고 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이주노동자들은 내국인이 하지 않는 3D 업종에서 일하며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그런데도 수십년간 착취와 차별, 억압과 폭력 속에 놓여 있다”고 했다.
“한국 사장님들, 우리는 기계도 노예도 아닙니다”
이주노조 등은 대회에 앞서 속헹을 위한 추모제를 열었다. 한 제단에는 그가 고향 캄보디아에서 즐겨 먹었을 열대과일이 놓였다.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인 속헹은 지난해 12월20일 경기 포천시의 한 비닐하우스 기숙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영하 16도의 한파가 닥친 날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속헹 사망 후에도 열악한 주거환경과 근로조건이 바뀌지 않고 있다고 했다.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촌 싸왓은 “제가 사는 컨테이너 기숙사에는 난방도 안 되고 뜨거운 물도 안 나온다. 비가 내리면 천장에서 물이 새서 바닥에서 잘 수가 없고 해먹을 묶어 그 위에서 자야 한다”고 했다. 또 “사장님은 정해진 근무시간 외에도 일을 시킨다. 벼를 수확할 때면 새벽 4시에 깨워서 일을 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 10시간 일을 시키면서 임금은 8시간분만 준다. 우리는 노예처럼 일한다”고 말했다.
이주노조 등은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는 고용허가제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2003년부터 시행된 고용허가제에 따라 이주노동자는 3년간 3번만 사업장을 이동할 수 있다. 이를 어기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다. 차만다 성서공단노동조합 부위원장은 “사용자의 허락 없이 회사를 옮길 수 없는 법 때문에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고 있다”며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면 사장들이 임금 체불을 해도 고용노동부에 갈 수 없고 건강보험이 없으니 병원에도 못 간다”고 했다. 우다야 라이 위원장은 “고용허가제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이 노예 노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경향 박채영 기자
키워드로 보는 2021 경제10년 만에 ‘고물가’…코로나로 방향 꺾인 길
인플레이션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2.3%
코로나 이후 원자재값 상승에
디플레 우려와 정반대로 전환
‘공급망 병목’ 등 장기전 전망
각국 금리 인상 카드 등 대응
올 한 해 한국 경제는 10년여 만에 ‘고물가’라는 낯선 경험을 했다.
연초 계란, 파 같은 밥상물가에서 시작해 하반기 들어서는 기름, 라면이나 참치 같은 가공식품, 외식비 등 서비스 품목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물가 오름세가 확산됐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경기 회복 과정에서 원자재 가격 상승, 공급망 병목 현상, 수요 확대 등이 맞물리면서 전 세계적으로 물가를 끌어올린 영향으로 풀이된다. 인플레이션(물가 오름세)이 예상보다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지면서 한국과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물가 대응을 위해 완화적 통화정책을 거둬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19일 한국은행과 통계청에 따르면 올 1~1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2.3%를 기록하고 있다. 연간상승률로는 2012년 2.2% 이후 처음으로 한은의 물가안정목표인 2%를 웃돌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16일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설명회를 통해 “최근 들어 물가상승의 속도가 빨라지고 그 범위도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상당 기간 높은 수준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까지만 해도 한국은 물가 수준이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컸다. 실제 2019년 8~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기도 했다. 고령화·저출생이 급격히 진행되고, 경제의 활력도 떨어지면서 ‘저성장·저물가’ 기조가 고착화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확산됐던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계기로 물가를 둘러싼 환경이 정반대 국면을 맞고 있다. 물가를 크게 끌어올린 요인은 국제유가 등을 포함한 원자재 가격 상승이다. 실제 한은 분석을 보면 올 10~1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3.44%를 기록했는데, 이 가운데 석유류의 기여도가 1.17%포인트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충격에서 경제가 빠르게 반등했지만 원유 공급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친환경·탄소중립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재생에너지 공급도 예상에 미치지 못한 탓에 휘발유나 천연가스 같은 기존 에너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까지 겹쳤다.
‘공급망 병목 현상’은 최근 오미크론 바이러스 확산 등에 따라 장기화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재택근무가 확산하고 온라인 소비가 늘면서 재화소비가 빠르게 늘어난 데 비해 노동 공급 부족, 검역 강화, 봉쇄조치 등으로 공급망이 삐걱거리면서 물가 오름세가 크게 확대됐다.
수요 측면에서의 물가 압력도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정부의 지원책으로 가계의 저축이 늘고, ‘단계적 일상회복(위드 코로나)’ 방역 조치 시행으로 억눌렸던 민간소비가 내년에 더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정여경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아직은 미국, 유로존 등 선진국에서 경제 재개방(리오프닝)에 따른 물가 상승세가 두드러지는 상황이지만 ‘위드 코로나’ 국면이 확대된다면 아시아 국가에서도 리오프닝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물가 오름세가 예상보다 장기화할 것으로 보이면서, 각국 중앙은행들도 물가 대응을 우선순위에 두기 시작했다. 물가가 계속 오르면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떨어지고, 경제 성장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어서다.
한은은 올해 두 차례 기준금리를 인상한 데 이어 내년에도 통화정책 정상화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지난주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인플레는 일시적”이라는 기존 전망을 거두고 내년에 세 차례 금리 인상에 나설 것을 시사했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은 “공급 측면에서의 물가 압력은 내년 하반기 들어 조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물가 관련한 복합적 요인들이 모두 다 가능한 상황이라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향 이윤주 기자
한경연, 엉터리 비교로 “보유세 비중, OECD 평균 넘는다”
한국 2021년 추정치, OECD 2018년 확정치
한경연 자료로도 “미국·영국·프랑스의 1/3~4, 일본의 1/2 수준”
한겨레 자료 사진
집 부자, 땅 부자가 들으면 반색하며 거봐라 쾌재를 부를 주장이 튀어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4년간 부동산 보유세 비중이 급격히 증가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넘는다”는 내용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하 한경연)이 20일 내놓은 ‘종합부동산세의 국제 비교 및 시사점’ 보고서에 들어있다.
한경연이 사용한 분석 방법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부동산 보유세 비중을 따진 것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경연은 우리나라의 경우 “보유세 비중이 2010년~2017년까지 0.08%포인트(0.7%→0.78%) 증가한 데 그쳤다가 현 정부 출범 시기인 2017년 0.78%에서 2021년 1.22%로 0.44%포인트 급격하게 높아져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1.07%)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한국의 2021년 추정치는 성장률이 3.9%에 이를 것이란 가정에 따른 것이라고 한경연은 밝혔다. 보유세 추정 규모는 국민의힘 소속 유경준 의원실에서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의 고지액과 징수액의 차이 등을 따져 추정한 결과에서 따왔다고 했다.
올해 한국의 성장률과 보유세 추정치의 적절성이나 한국의 경제수준(2020년 기준 GDP 규모 세계 10위)을 떠나 당장 눈에 띄는 문제점이 있다. 비교 대상의 시점이다. 한국을 빼고는 모두 2018년 수치까지밖에 없다. 한국보다 낮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치는 2018년 기준이다. 한국의 2018년 수치는 이보다 낮은 0.82%이다. 같은 시점을 비교하면 한국 쪽이 낮은데도 한경연은 용감무쌍하게 높다고 자료에 콕 박아 썼다. 간격이 3년이나 벌어져 있는 두 시점 자료를 같은 것인 양 태연하게 비교해, 하고 싶은 주장의 근거로 써먹은 그 무심함이 놀랍다.
보고서를 펴낸 임동원 부연구위원은 “우리나라와 달리 오이시디 평균은 2019년 이후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2019년 비중이 2018년보다 약간 낮은 1.06%로 추정됐다고 덧붙였다.
통계 비교의 기본을 떠나 이 자료 자체에서 이미 국내 보유세의 문제적 실상이 드러나 있다. 2018년 기준 미국의 부동산 보유세 비중은 2.73%로 한국의 3.3배, 영국(3.09%)은 3.8배, 프랑스(2.66%)는 3.2배, 일본(1.90%)은 2.3배이다. 우리나라 부동산 보유세 비중이 너무 높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한경연 쪽을 매우 실망하게 했을 법한 내용이다.
이런 터에 “세제나 규제의 강화가 아니라 수급 안정에 바탕을 둔 부동산 정책의 일관성 유지가 필요하다”는 한경연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임동원 위원은 “다른 국가들은 보유세 비중이 높지만, 거래세나 양도세 비중은 작다”며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부동산 관련 세금이 높고, 보유세 비중은 현 정부 들어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세재정연구원장을 지낸 김유찬 홍익대 교수는 “(한경연 자료의) 표에서 보듯 우리나라 보유세는 너무 낮은 게 문제라는 결론이 나온다”며 여기에 “우리나라 민간 소유 부동산 자산의 국내총생산 대비 가액 비중이 다른 나라보다 매우 높다”는 점도 있다고 말했다.
김영배 선임기자 kimyb@hani.co.kr
‘3년간 8차례’ 미국 금리인상…시간표대로 간다면 한국 경제는?
예상과 부합…국내 경제 버틸 여력 있어
2004∼2006년처럼 속도 빨라지면 위험
제롬 파월 연준 의장. 연합뉴스 제공
미국이 내년부터 정책금리 인상으로 시중에 풀었던 돈을 거둬들인다. 전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국내 외국인 자금이 유출될 수 있다. 다만 지난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시사한 ‘향후 3년간 8차례 금리 인상’ 시간표대로라면 한국 경제가 충격을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이보다 긴축 속도가 빨라지면 경제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지난 14~15일(현지시각) 연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결과를 보면, 참석자들이 전망한 목표금리(중간값 기준)는 2022년 0.9%, 2023년 1.6%, 2024년 2.1% 등으로, 내년 3차례·내후년 3차례 금리를 올린 후 2024년 2차례 추가 금리 인상을 시사했다. 향후 3년에 걸쳐 총 8차례 금리 인상이다.
더 스테일 서면 해링턴 타워
미국의 저금리는 전 세계 경기를 부양해왔기 때문에 금리 인상은 세계 경제에 악재다. 또한 통상적으로 한국 금리보다 미국 금리가 높아지면 수익을 좇아 국내에 투자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갈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환율 급등 등 금융시장 혼란이 발생한다.
국내 경제는 연준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아직은 차분한 모습이다. 그 이유는 연준의 발표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다. 연준은 갑작스러운 경제 충격을 막기 위해 정책금리 인상 가능성을 꾸준히 시사해왔고, 이로 인해 시장은 이미 내년 3~4차례 인상을 준비하고 있었다.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16일 기자간담회에서 “예고된 악재는 더는 악재가 아니다”며 “미국의 통화정책 방향이 오늘 발표한 것처럼 가면 큰 충격은 없을 것이다”고 언급한 이유다.
우리가 먼저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 까닭에 한국과 미국의 금리 역전 상황도 내년 이후에야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현 금리 수준은 한국 1.00%, 미국 0~0.25%다. 긴축 속도도 우리 경제가 감내할 수준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금융연구원이 이달 발표한 ‘미국 통화정책 정상화의 영향과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연준이 2015년 4분기~2018년 4분기(3년) 9차례 금리를 올렸던 과거 사례를 대입해 이번 통화정책 정상화 영향을 살펴본 결과 원-달러 환율이 약 8%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년간(2020년 12월~2021년 12월) 원-달러 환율이 약 8% 상승한 것을 고려하면 급격한 환율 변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외국인 자본 유입은 이전보다 112억달러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분석에 사용된 과거 사례는 지난주 연준이 시사한 3년간 8차례 금리 인상 속도와 비슷하다.
지난 10월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4692억1천만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하면서 과거보다 유사시 활용할 수 있는 외화 유동성도 충분한 상황이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외국인 투자 자금이 벌써 많이 빠져나가 추가 유출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지난 7월 기준 시가총액 대비 외국인 주식보유비중(코스피+코스닥)은 약 29.4%로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2009년 8월 28.9%)에 거의 도달한 상태다. 보고서는 “현재 시장에서는 이 같은 이유로 미국 통화정책 정상화의 충격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견해가 우세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혹시라도 연준의 긴축 시간표가 달라지면 금융·외환시장 혼란이 불가피하다. 금융연구원은 연준이 과거 2004년 2분기~2006년 2분기(2년)에 금리를 17차례 올린 것처럼 긴축 속도가 빨라지면, 원-달러 환율이 17~22%로 크게 상승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준은 현재로서는 긴축 속도를 추가로 높이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지난주 회의 결과를 보면 금리 수준은 2024년 말 2.1%(중간값)까지 도달하는데, 장기 균형 금리라고 볼 수 있는 2.5%(Longer run)에 비해서는 여전히 낮다. 연준이 고물가 부담 속에서 얼마나 속도 조절을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전슬기 기자 sgjun@hani.co.kr
고용 없는 성장, 고용없는 수출의 출구는 없는가?
[복지국가SOCIETY] 한국에만 존재하는 끊어진 고리
1970년대는 수출로 인한 고용창출 효과는 지대했다. 이후 20년간 지속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인한 제조업 중심의 일자리 창출이었다. 1970년 이후 20년간 제조업 수출과 고용은 각각 연평균 12.4%, 7.4% 성장했다. 1990년대 이후는 기술발전으로 정보통신산업 자본집약적 첨단산업으로의 전환되고, 노동은 자본과 기술에 의해 대체된다. 따라서 제조업 고용 수준은 1990년대 이후 오히려 감소하기 시작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1980년대 초기 수준으로 회귀한다. 2000년대 이후는 FTA 확대 등으로 수출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지만 고용은 오히려 감소한다. 1990년 이후 20년간 수출은 연평균 7.8% 성장했지만, 제조업 고용은 연평균 0.2% 감소하였다.
수출증가와 고용유발효과는?
올해는 최고의 수출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번달 1일 산업통상자원원부는 무역 역사상 최초로 월간 600억 불을 돌파하였다고 했다. 12월 중순에는 수출액 6,049억 불을 넘어서는 사상 최대 실적 달성이 기대된다고 한다. 물론 국제유가와 원자잿값 상승에 따라 수출 단가가 높아졌기 때문에 총수출 금액이 늘어났다는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수출실적은 평가할만 하다.
그러나 '고용없는 성장'이란 늪에 빠진 한국경제가 수출에 있어서도 역시 고용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고용없는 성장'이자 '고용 없는 수출'이다. 2017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수출이 국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란 보고서에 의하면, 수출의 고용 창출 능력이 과거에 비해 크게 축소된 주요 원인으로 수출 산업의 구조(structure) 및 구성(composition) 변화, 생산의 글로벌 분업화(international fragmentation of production), 기술혁신으로 인한 노동생산성 향상 등으로 꼽는다. 무엇보다 수출품목의 구조(구성)가 기술/자본집약적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과정에서 수출의 고용 창출 둔화가 현상을 야기할 수 있고, 비교우위 산업이 노동절약적 산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수출-고용 간 선순환 고리가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4차 산업혁명과 기술집약형 산업으로의 진행 과정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 속에 놓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수출 중소기업의 고용은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이다.
끊어진 수출-고용의 고리는 한국에만 존재
굳이 구체적인 수치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대기업의 산업 비중 대비 고용 비중은 매우 낮음을 알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는 자산 5조 원 이상인 우리나라 64개 대기업 집단의 매출 규모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84% 수준에 달하지만 고용 비중은 11%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먼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다. 진보는 대기업 중심의 산업체제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해다.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재벌경영체제와 대기업 독점, 고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지적할 뿐이다.
특히 고용하지 않는 대기업을 원하지 않을 뿐이다. 지금까지 대기업이 어느 만큼 고용을 해 왔는가? 지금이라도 어느 만큼 할수 있는가? 앞으로는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도 지난해 상위 10대 대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수출액에서 10대 대기업의 비중이 35.4%로 전년보다 0.8%포인트 증가했다. 비단 지난해의 수출 상황이 아니라, 197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기업 위주의 한국 산업의 지배구조와 더불어 세계 수출시장에서의 괄목한 성장을 이뤄낸 상황에서 대기업은 고용에 대한 책임을 다 했는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 주요 선진국들의 고용 상황은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 이전까지는 지난 수십 년 중 가장 양호한 상태를 보여왔다. 코로나19라는 상황 변수를 제외한 통상적 비교를 위해 2018년의 각 선진국의 성장률과 고용/실업률의 추세를 보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8년의 경우, 미국의 실업률은 4.1%로 전년대비 4.7%보다 0.6%포인트나 낮아졌고, 실업률은 4.1%로 2000년 12월이래 최저수준을 보여였다. 일본도 2018년 1월 실업률은 2.4%로 전년대비 2.7%보다 0.3%포인트 낮아졌고, 2018년 1월 실업률 2.4%는 1993년 4월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독일도 마찬가지로 전년 대비 개선된 상태를 유지하며, 실업률 3.6%는 1991년 이래로 가장 낮은 실업률이었다. 영국의 전년 4분기 실업률은 4.4%로 2016년 4분기 실업률 4.8%보다 크게 개선되었다.
이처럼 세계 경제의 호전 가운데서 고용이 개선되지 않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OECD 38개 중 34개국의 실업률이 낮아졌다. 그런데 왜 한국만이 고용상태가 개선되지 않았는가? 앞서 말했듯 세계 수출시장의 점유율을 이렇게 높여가고 있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만이 고용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은 수출구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수출증가 비중 중 대부분을 차지 하는 것이 바로 반도체, 석유화학과 석유제품 등이다. 반도체 부분만해도 약 45.7%를 차지하며, 다음으로 석유화학과 석유제품이 11%씩을 차지하고 있다. 즉 수출증가 규모의 68%를 반도체-석유화학-석유제품과 같은 세 품목이 차지하고 있다. 이 세 품목은 거의 대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산업부분이며, 동시에 장치산업으로 고용유발효과가 낮은 부분이다 이라는 것이다.
위 2017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연구보고서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이 높을수록 수출이 고용에 미치는 효과가 큰 것으로 추정되었다. 즉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에서 수출과 고용의 선순환 고리가 대기업에 비해 잘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대기업의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수출 비중 대비 대기업 수출의 고용 창출 능력이 크게 감소하였음을 역시 분석하였다. 더욱이 대기업에 편중된 수출 비중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되어, 한국의 고용 둔화 현상은 수출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반복하며 강조하건대 대기업에 편중된 수출 증가로는 더 이상 고용 확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고용없는 성장의 탈출구는 새로운 시장과 MBO(MDO: Market Development Organization)
결론은 중소기업을 어떻게 성장시키느냐는 것이다. 국내 내수시장으로 생존하기 힘든 중소기업은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서는 그나마 대기업과의 협력관계를 가져야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괄목할만한 강소기업들은 대부분 해외 시장을 겨냥하여 성장해 왔다. 대기업 의존에 의한 성장이 아닌, 시장 지향의 성장으로 중견기업으로의 성장할 수 있는 정책의 마련이 필요하다.
최근의 한 보수언론은 지난해 기사를 언급하며, 한국은 대기업 수가 G5 국가에 비해 부족한 수준으로 나타났다며, 대기업을 늘리면 252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우리나라 대기업 비중은 전체 기업의 0.09%로 분석대상 OECD 국가 34개국 중 33위이며 기업 1만개 중 대기업이 9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터키(20위), 리투아니아(19위), 폴란드(16위) 등 한국보다 국내총생산(GDP)이 작은 국가보다 낮은 수준이며, 1위 스위스(0.82%)와 비교하면 9분의 1 수준이다. 따라서 “중소기업이 글로벌 대기업까지 성장하기 위해 총 275개의 규제에 직면한다”며 “기업 규모에 따른 차별 규제를 해소하고 중소기업이 중견‧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일면 합리적인 주장인 것 같지만, 이는 현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대기업을 위한 정책전환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대기업, 고용을 유발하는 대기업의 등장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규제의 문제가 아닌 국내 시장에서의 대기업의 횡포와 불공정거래 등의 문제였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해답은 규제의 문제를 넘어 새로운 시장에 있다. 경쟁력있는 중소기업, 강소기업 등이 마음껏 새로운 시장에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시장을 열어주고 지원해 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이러한 방향으로 신남방정책과 신북방정책을 세웠다. 신남방 정책은 인도를 포함해 아세안 10개 국가들과 경제 협력과 상생을 위한 공동체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아세안 국가의 인구는 약 6억4천7백만 명 정도이고, 인도의 인구는 약 13억 명이다. 지나친 중국과 미국 의존도를 극복하고,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전략적 동반자로서 신남방 국가와 함께 하는 미래 공동체 구축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 나라는 젊고 역동적인 성장 지역이고 중산층 인구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바로 새로운 시장이다. 이 시장에서 마음껏 중소/강소기업들이 대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고용으로 바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새로운 시장'은 국경선을 넘어 새로운 인구로 만들어지고 있는 세계 시장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시장이 바로 아세안이고, 인도이고, 신남방이다. 과거에는 정부가 대기업 중심의 주요 기반 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폈지만, 이제는 중소기업을 위한 지원 정책을 우선시해야 한다. 20억 인구의 신남방 시장은 다양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제품을 가진 중소기업들이 먼저 시장을 열고, 뒤를 이어 대기업이 따라가서 시장을 장악하는 단계별 접근 전략을 펴야 한다. 대기업의 해외 매출 신장은 고용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으나, 중소기업의 매출 신장은 고용 및 고용 조건 등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필자는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대통령직속 시장개발위원회(MDO: Market Development Organization)를 만들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시장개발위원회는 새로운 인구 변화, 한류 및 다문화 등을 기회로 한국의 시장을 공격적으로 만들어가는 대통령 직속 최고 조직을 의미한다. MDO는 통상 교섭과 투자 분야뿐만 아니라 새로운 해외시장을 정부 주도적으로 찾아내고, 그 시장에 국내기업이 진출하도록 하며, 해외투자와 IPO까지 지원하는 총체적 역할을 포함한다. 미국에는 USTR이란 조직이 있다. 10~20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들이 200명이 넘게 있다. 입사 이후 줄곧 통상 관련 업무만 담당한다. USTR 수장은 대통령 주재 각료회의의 장관급 고정 멤버로 19개 관련 기관으로 이뤄진 무역정책심의그룹(TPRG)을 총괄·지휘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유사 조직은 4차 산업혁명위원회이다. 이 위원회는 정부 측 5명, 민간 측 19명으로 24명(지원단 28명)로 구성되어 있으나, 시장 개발을 위한 조직으로 보기 어렵고 현존 하는 시장을 위한 전략적 조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지만 통상 관련 조직인 통상교섭본부장실은 산업통상자원부의 5개 실 중의 하나다. USTR은 장관급이 수장이지만 한국의 통상 조직 책임자는 차관도 아닌 차관보에 해당한다. 다른 부처와 원활한 공조는 당연히 어렵다. 순환 보직으로 인해 직원들의 이동이 잦아 전문성을 가지기도 쉽지 않다. 어떤 프로젝트든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책임지고 추진하기도 쉽지 않다. 대통령이 바뀌면 이들의 업무도 바뀐다. 정권이 바뀌어도 전문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 조직, 대통령직속위원회로서 장보고처럼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갈 전담 조직이 있어야 한다. 현재의 조직으로서는 새로 개척해야 할 해외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현지화 지원을 위한 정부 기관은 전무(全無)하다. 재외 공관 직원 1명, 산자부 직원 1명, KOTRA 지부 등은 일상적인 업무와 자신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시장의 개척 조사와 발굴, 시장 요구형 제품의 연구개발, 현지화를 위한 전담 조직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박민식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프레시안
2022 대선, 결국은 ‘부동산 선거’다
결국 부동산 선거다. 야당에게 기회를 준 것도, 여당을 긴장하게 만든 것도 첫 번째 원인은 부동산이다. 이재명·윤석열 두 후보의 말과 글에서 부동산 공약의 방향을 살폈다.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헬리오시티’는 아파트 동 간 배치가 빽빽하기로 유명하다. 용적률은 285%이고, 건폐율은 19% 수준이다.ⓒ시사IN 조남진
‘정치의 시간’에도 집값은 올랐다. 지난 7월1일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즈음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에 위치한 A 아파트에서는 전용면적 44㎡(약 13평) 한 호가 3억8500만원에 거래되었다. 11월5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때 이 아파트의 거래 가격은 4개월 만에 4억4000만원으로 뛰어올랐다. 1992년에 지은 이 아파트의 1년 전(2020년 12월) 가격은 2억5000만원에 불과했다. 대선 정국이 전개되는 동안 ‘서울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20평도 안 되는, 지은 지 29년 된 아파트’의 가격이 76% 상승한 것이다.
모로 가도 결국 부동산 선거다. 정권교체를 주장하며 표심을 끌어 모으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실책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으며 공세를 펼쳐나간다. 여당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중도층 확장을 노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도 문재인 정부 주택정책을 비판하며 자신과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논쟁의 영역일 수 있다. 그러나 대선 전쟁이 펼쳐지는 지금 이 순간만은 여야 후보 모두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실패했다. 그러니 바꾸겠다.’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양강 구도를 이루고 있는 이재명·윤석열 두 후보의 부동산 공약은 아직 최종 완성 단계가 아니다. 두 후보 모두 경선 과정에서 큰 밑그림만 발표했을 뿐, 당과 협의를 마친 세부 공약은 발표를 미루고 있다. 다만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와 향후 발표할 공약 방향을 두 후보의 말과 글에서 읽어낼 수 있다. 두 후보는 정책 기조와 주택공급 방법, 세제 개편에서 크고 작은 차이점을 드러낸다.
두 후보 모두 정책 기조에 ‘시장’을 앞세우고 있다. 이재명 후보는 11월23일 “(문재인 정부에서는) 수요만 억압하면 된다고 봤는데 시장은 그렇게 안 봤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시장을 따라가야 된다. 시장을 존중해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같은 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집권 세력의 일부로서 그 작은 티끌조차도 책임져야 되는 것은 분명하다”라며 현 정부와 선을 그은 터이기도 했다.
7월6일 당시 이재명 경기지사가 ‘부동산 시장법 제정’ 국회토론회에서 환영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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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후보는 부동산 시장에 대해 이 후보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이다. 8월29일 윤 후보는 “잘못된 규제와 세제를 정상화해 수요에 부응하는 다양한 주택이 꾸준히 공급되고 거래될 수 있는 제도와 시장 질서를 확립하겠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규제와 세제’를 윤 후보는 “징벌적 과세, 과도한 대출 규제, 임대차보호법”으로 꼽았다. 사실상 문재인 정부 시절에 추진한 대다수 정책의 ‘원점 회귀’를 천명한 셈이다.
똑같이 시장을 앞세우고 있지만 방향성은 극과 극이다. 윤석열 후보가 ‘문재인 지우기’를 통해 정부 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이재명 후보의 ‘시장 존중’은 부동산 시장의 수요-공급 원칙을 무시하지는 않겠다는 원칙론에 가깝다. 가령 이 후보는 ‘시장 존중’ 기조에도 불구하고 임대차 3법에 대해 “법은 안착시키는 게 문제 해결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라며 당장 폐지하는 것은 시장 혼란을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11월29일에는 “사실은 부동산 가격 폭등이 아니라 폭락이 걱정된다. 전 세계 유동성이 줄어들고 이자가 올라가는데, 높은 상태로 가격이 형성되어 있어 급격한 하락이 경제에 충격을 주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상황”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윤 후보는 부동산 정책에서도 선명한 정권교체를 이뤄내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반면 이 후보의 관련 발언들은 경제상황 변동에 유의하며 수요-공급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이처럼 정책 기조는 다르지만, 주택공급을 대폭 늘린다는 원칙은 두 후보 모두 유사하다. 심지어 목표로 삼는 공급 물량도 임기 내 250만 호로 일치한다. 다만 두 후보의 공급 목표 수치들은 문재인 정부의 공급 계획 물량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주거복지 로드맵과 3기 신도시를 통해 수도권 127만 호를 공급 추진 중이다. 올해 초 변창흠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이 발표한 ‘공공주도 3080+(공공재개발 등)’의 공급 목표치도 수도권 기준 약 61만 호(전국 80만 호) 수준이다. 이미 200만 호 이상을 현 정부에서 중장기적으로 추진해온 셈이다. 결국 각 후보가 주장하는 추가 공급 물량은 50만 호에 미치지 못한다.
목표 삼는 공급 물량은 비슷하지만 공급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이재명 후보는 250만 호 가운데 100만 호 이상을 이른바 ‘기본주택’으로 공급하겠다고 주장했다. 중산층을 포함한 무주택자들이 건설원가 수준에 맞춘 저렴한 임차료로 역세권 등 좋은 위치에 살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다.
반면 윤석열 후보는 청년 주거문제 완화를 위한 해법으로 ‘청년원가주택’ 30만 호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한다. 원가주택이란 무주택 청년이 원가(택지조성원가, 건설비 등)로 주택을 분양받은 뒤, 5년 이상 거주 후 정부에 매각해 시세차익의 70%를 가져가게 하는 구조다. 분양받아서 거주하다가 다시 공공부문에 되팔고 공공 측이 시세차익의 일부를 환수한다는 측면에서 청년원가주택은 문재인 정부의 신혼희망타운, 환매조건부 주택 등과 닮았다. 현 정부의 부동산 규제 체계를 허물겠다는 윤석열 후보 측의 표면적 주장과 달리 공급정책의 기본 철학은 크게 바뀌지 않는 셈이다. 결국 이재명 후보는 ‘중산층도 좋아할 만한 질 좋은 임대주택’을 중시하고, 윤 후보는 ‘공공이 재매입하는 공공분양주택’을 강조한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주택공급 정책에서 차이가 도드라지지 못하다 보니 결국 정책의 ‘선명성’을 강조하는 후속 공약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대규모 택지 조성과 관련된 정치적 승부수가 나올 수 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극복해야 하는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이미 대선후보 경선 당시부터 여러 아이디어가 각 예비 후보의 입을 통해 등장했다. 저층에 학교를 두고 고층에 아파트를 짓는 방식(정세균)부터 서울공항 활용(이낙연), 김포공항 활용(박용진)까지 갖가지 ‘땅 활용’ 공약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용산공원 부지 일부에 아파트를 짓자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내놓는다. 이런 아이디어 중 일부를 대선 공약에 공식화하자는 주장이 민주당 선대위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특정 부지를 선거에서 띄울 경우 투기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 대선후보가 직접 후보지를 언급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주택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공항이나 공원 같은 기반시설을 없애거나 옮긴다고 발표했을 때, 오히려 표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가령 김포공항을 인천공항과 통합하고 이 지역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한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주택을 빠른 시일 내에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다는 낙관적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항공편 이용에 불편을 겪을 수도권 동부 지역 주민들과 각 지역 거점 공항의 이용객 감소를 걱정하는 지방 표심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이재명 캠프 측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시장에 커다란 충격을 줄 만한 공급 정책’은 고도의 정무적 판단이 필요한 내용이다.
윤석열 후보는 부동산 공급 관련 후속 공약이 아직 미비하다고 평가받는다. 8월29일에 발표한 부동산 종합 공약 외에는 이렇다 할 정책 공약을 내놓지 않고 있다. 청년원가주택에 대해서도 ‘과연 시민들이 시세차익의 100%를 포기하고 원가주택을 매입하겠느냐’는 반응부터 ‘지나치게 집 없는 청년층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40대 이상 무주택자는 해당되지 못하는 정책’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12월7일 출범한 선거대책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해당 정책에 대한 수정·보완이 이뤄질 전망이다. 경선 시절부터 윤석열 후보의 부동산 정책 밑그림을 그린 김경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가 선대위 국토교통정책분과위원장으로 합류해 이 같은 논의를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8월29일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부동산 정책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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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 문제를 두고 두 후보 간 차이 커
세제 문제는 두 후보가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는 영역이다. 이재명 후보는 보유세를 강화하는 수단 중 하나로 국토보유세를 주장한다(18~20쪽 기사 참조). 반면 윤석열 후보는 종부세 전면 재검토를 공약으로 내세운 상황이다. 최근 몇 년간 문재인 정부가 강하게 추진해온 ‘공시가격 현실화’도 완화하는 등 자산에 매겨지는 각종 조세·준조세 부담을 낮추겠다는 것. 이 후보가 땅 부자에 대한 과세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윤 후보는 부동산으로 인한 세 부담을 없애야 부동산 가격 자체가 안정화된다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양 후보의 보유세(재산세·종합부동산세·국토보유세 등)에 대한 관점은 정반대다. 그러나 취득세·양도소득세 등과 관련해서는 아직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윤 후보는 양도소득세 완화를 공약으로 명시했으나 이재명 후보는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11월15일 이재명 후보는 양도세 완화에 대해 “당론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현 정부 방침으로부터 자유로운 윤석열 후보와 달리, 이재명 후보는 양도소득세 중과세를 핵심 정책으로 삼은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민주당은 다주택자의 양도소득세를 한시적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당 정책위에서 11월30일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2월2일 “정부 내에서 논의된 바가 전혀 없고 추진 계획도 없다”라고 못 박아 반대했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도 12월2일 “만약 필요하다면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다음 정부에서 그때 상황에 따라 시간을 갖고 검토할 문제”라며 선을 그었다. 결국 양도소득세·거래세 인하 카드는 당의 입법 지원 없이, 이재명 후보 본인이 추진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윤석열 후보의 부동산 정책은 ‘디테일’이 부족하지만 방향은 확실하다. 문재인 정부가 구축해놓은 부동산 규제 체계를 박근혜 정부 시절로 되돌리는 쪽이다. 반면 이재명 후보는 ‘꺼내놓은 공약은 다양하지만 단순화시키기 어렵다’는 난점을 갖고 있다. 문재인 정부와 거리를 두면서도, 현 정부의 정책 가운데 일부(임대차 3법, 보유세 강화 등)를 계승하는 측면도 있다.
재건축·재개발 이슈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아파트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높이면서 재건축 이슈가 지역 집값을 띄우는 걸 막으려 했다. 이 같은 방침에 야당을 비롯해 오세훈 서울시장은 반발하며 ‘안전진단 기준 완화’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중이다.
당초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공공 재개발·재건축’에 힘을 싣는 모습이었다. 공공이 주도해 재개발·재건축을 할 경우 해당 단지의 용적률 규제를 완화해주고, 이렇게 완화된 용적률로 확보된 주택 중 일부를 공공임대주택으로 활용하는 구상이었다.
‘용산 베르디움 프렌즈’의 용적률은 961.97%로 집이 빽빽하게 들어찬 형태로 지어졌다.
ⓒ시사IN 조남진
그러나 최근 이재명 후보가 ‘공급 중시, 시장 중시’를 선언하면서 민주당 내부에서도 기류가 바뀌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현재 이재명 선대위 공동상황실장을 맡고 있는 진성준 의원은 12월7일 라디오 방송에서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까지 재검토하고 층고(층의 높이)를 제한하는 문제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럴 경우 정부·여당이 ‘결국 버티니까 이긴다’며 버텨온 부동산 투기 세력의 승리를 공식 승인하는 듯한 모양새가 될 수 있어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장기적으로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 기조에 대한 신뢰도를 낮출 수도 있는 방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가 이 후보와 문재인 정부 사이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수도권 중도층을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 카드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재명 후보로서는 지지층의 내부 반발도 감안해야 하는 중요한 이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도시 풍경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두 후보 모두 ‘용적률’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밝히고 있다. 이재명 후보는 12월7일 “어차피 도시의 밀도는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라고 말했다. 층수나 용적률 규제를 일부 완화해 주택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의미다. 이 후보가 주장하는 ‘시장 중시’의 핵심에는 결국 ‘공급과 관련된 다양한 규제를 적극적으로 완화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고, 이는 도시의 풍경을 결정짓는 용적률 규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윤석열 후보도 8월29일 부동산 정책 발표 당시 “용적률 인센티브를 활용해 신규 주택의 공급을 확대하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현재 3종 일반주거지역의 건폐율은 50% 이하, 용적률은 ‘200% 이상 300% 이하’ 수준이다. 가령 아파트 동 간 배치가 빽빽하기로 유명한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헬리오시티’의 용적률은 285%, 건폐율은 19% 수준인데, 이보다 밀도 높은 주택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두 후보 모두 역세권 고밀도 개발을 주장하는 만큼 수도권 전철역 인근 도시 풍경은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이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인근에 완공된 역세권 청년주택 ‘용산 베르디움 프렌즈’는 바깥에서 한눈에 보기에도 집이 빽빽하게 들어찬 형태로 지어졌다. 이곳의 용적률은 961.97%로 역세권 중심 임대주택이 활성화될 경우 이런 풍경이 수도권 곳곳으로 확대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도시 미관을 해치는 닭장 같은 건축물’로 비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들은 ‘이렇게라도 지어서 주거 선택권을 확대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도시 미관과 별개로 이런 밀도 높은 주거 환경이 다음 정부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리라 보인다.
부동산은 현 시대 자산 격차와 가계부채 문제의 핵심 사안이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발생한 진짜 문제는 단순히 집값이 올라 매입하기 어려워졌다는 것만으로 일축되지 않는다. 급격한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해 파생된 또 다른 문제들도 있다.
가장 큰 ‘뇌관’은 전세 문제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전세 대출을 규제하려 했으나, 실소유자들의 반발로 결국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초 금융위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전세자금 대출에 적용하려 했다. DSR은, 차입자가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가 해당 차입자 소득의 일정 비율 이상을 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원리금을 문제없이 갚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돈을 빌려준다’는 원칙하에 만들어졌다. 문제는, DSR 규제가 전세자금 대출로까지 확대되면 저소득층이 전세자금을 빌리기 힘들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센 사회적 반발이 일었던 이유다.
12월9일 한 시민이 서울 송파구 잠실동 일대의 아파트 전·월세 홍보물을 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임대차 시장의 ‘3중 전세 가격’도 문제
그러나 금융 당국으로서는 긴장할 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집값 상승으로 전세 가격까지 덩달아 오르면서 전세대출이 가계부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전세대출이 점차 늘어난다는 것은 공공의 전세대출 보증 규모 역시 점점 커진다는 의미다. 그동안 저금리 전세대출에 대한 공공부문의 보증은 일종의 ‘주거취약층 보호 정책’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주거정책’이 높은 집값을 떠받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대출을 갚을 만큼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억 원대 전세금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임대차 3법으로 현재 임대차 시장에 고착화되고 있는 ‘3중 전세 가격’ 문제도 차기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다. 3중 전세란 같은 아파트에 서로 다른 3가지 가격으로 전세 계약이 이뤄지는 걸 의미한다.
가령 매매가 5억원, 전세가 3억원인 아파트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집은 2년 사이에 매매가격이 8억원으로 상승했는데, 임대인들은 높은 전세금을 받고 싶어 한다. 이사 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계약갱신청구권을 활용할 수 있는 임차인 A씨는 종전 전세가 3억원으로 계약 기간을 추가로 2년 연장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 이사 온 임차인 B씨는 5억원(집값이 8억원으로 오르면서 전세가도 인상)으로 전세 계약을 맺는다. 이처럼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한 3억 전세 가구와 새로 들어온 5억 전세 가구가 뒤엉킨 현상을 ‘2중 전세 가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에 임대인과 협상 끝에 4억원을 낸 임차인 C씨가 섞이게 된다. C 임차인은 2년 동안 이 아파트에 살다가 A 임차인처럼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해 재계약하려 했다. 이에 대해 임대인이 ‘내가 실거주할 테니 나가달라’고 맞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집을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인근 주택 모두 전세 가격이 5억원으로 올라 있는 터라 당장 이사를 가기도 막막한 상황이다. 결국 C 임차인은 임대인을 설득해 4억원까지 전세금을 올려주는 대신 2년 더 전세를 연장한다. 임대차 3법의 빈틈으로 발생하고 있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한 아파트의 같은 평수를 둘러싸고 세 임차인이 각각 3억원, 4억원, 5억원으로 전세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임대차 3법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든, 임대차 3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든, 이미 고착화되기 시작한 ‘3중 전세 가격’에 대해서는 정책적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선후보들이 새로운 공급을 언급하고 ‘250만 가구’를 외치는 동안 현실에서는 임대인과 임차인 간에 갖가지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커다란 빚을 짊어진 임차인들에게 전가된다.
결국은 부동산 선거다. 야당에게 기회를 준 것도, 여당을 긴장하게 만든 것도 첫 번째 원인은 부동산이다. 이번 대선에서 부동산 문제가 논의된다는 것은 단순히 집 부족, 집값 폭등을 해소한다는 의미로 국한되지 않는다. 가계부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불안정한 주거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인구의 수도권 집중 현상엔 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이 모두 ‘부동산 이슈’에서 가지처럼 파생되어 나온다. 부동산 이슈의 주제는 이념도 이상도 아니다. 유권자들의 ‘일상’이다./ 시사인 김동인 기자
ckrgkrptkfwk-수도권에 집 가지고 있는 국민들은 대다수 민주당 안 찍는다고 본다. 문재인 부동산 정책은 다주택 자 죽이려다 집 한 채 가지고 있는 주인들까지 피해를 입힌 것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서 쓴맛을 봐야 한다. 재산 있는 사람들이 세금 내지, 없는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가? 잘 생각해 보라~ 남의 재산이 그렇게도 못 마땅한 괘씸 죄를 쒸우니 될 일이 되겠냐?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최아영 -진짜 모르겠어서 묻는 건데, 부동산 정책에 국민들 대다수가 관심 있는 거 맞아요?
최대과제처럼 구는 게, '만들어내는 관심사'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저게 뭐라고 이렇게 시간과 공을 이렇게 잡아먹나.
호비-누가 많이 환경과 자연을 파괴하고 식량생산하는 농경지를 많이 파괴하고 건설업자들 배불려주는가가 관점인가? 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집값이 올라가는 이상한 현상은 뭐지?
killyran**** @호비 서울~수도권에 농업이 주산업임?? 환경은 그놈의 그린벨트가 서울시 전체면적보다 훨씬높은건 아시고?? 환경과 자연을 고집하다가 서울시내의 부동산이 그따구로 올라가버린거 환경단체들이 책임져주던가??
중소사업장 산재줄이기] 정부 산재예방 내년 일반회계 예산 고작 183억원뿐
노사정 2006년부터 세차례 '지원확대' 합의했지만, 15년간 33억원 증액에 그쳐 … 노사 "산재보험법 제95·96조 개정해야"
고용노동부는 올해 11월 말까지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가 790명인 것으로 잠정 집계했다. 올해 감축 목표치인 당초 616명에서 705명으로 수정했는데도 이마저도 달성하지 못했다. 2018년 문재인정부가 약속한 국민생명지키기 3대 프로젝트(산재사고·교통사고·자살) 가운데 산재사고 사망자 절반(2022년까지 505명) 줄이기는 사실상 실패했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산재예방과 감소대책의 방향을 중소기업, 특히 50인 미만 사업장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50인 미만 사업장의 산재사고 사망자가 전체 사망자의 81.0%를 차지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정은 2006년 2008년 2020년 세차례에 걸쳐 '산재예방사업비에 대한 일반회계 지원 확대'을 합의했음에도 정부는 2006년 150억원에서 183억원으로 늘리는 데 그쳤다. 예산 비중은 0.3%대에서 0.2%대로 줄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산업재해 예방을 위해서 순수하게 쓰는 돈(정부 일반회계 예산)은 183억원밖에 없다."
노동계와 경영계, 안전보건 전문가들의 격앙된 목소리다.
노사정이 2006년부터 세차례나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상 산재보상보험기금 지출총액의 3%까지 올리기로 합의했지만 15년이 지났는데도 실제 기금의 0.2% 수준(2022년 183억원)인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노사를 대표하는 한국노총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그리고 안전보건 전문가들은 15일 한국노총 주최로 열린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중소기업 지원 강화' 토론회에서 "정부가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합의한 대로 중소기업 산재예방에 필요한 일반회계 예산을 2500억~3000억원까지 올려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산재보험법 제95조 3항과 제96조 2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광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은 '중소기업 산재예방을 위한 지원 및 제재 방향성' 주제발표를 통해 "산재예방 및 감소에 대한 획기적인 정책이 수립과 이행 없이는 매년 2000여명이 죽고 10만여명이 다치고 병드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한정된 시간과 예산, 인력 등을 고려한다면 산재예방과 감소대책 방향을 50인 미만 사업장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50인 미만 사업장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2년 적용 유예된 만큼 남은 기간 동안 중소기업 산재예방을 위해서 지원을 확대하고 제재를 동시에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0인 미만서 산재 사고사망재해 81% 발생 = '2019년 기준 중소기업 기본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전체 기업의 99.9%, 종사자는 82.7%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50인 미만 기업은 99.6%이다.
중소기업은 국가·지역 경제와 일자리 창출에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안전보건관리 측면에서는 매우 취약한 구조다. 지난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전체 산재(10만8379명)의 74.6%(8만910명)가 발생했다. 사망재해는 63.2%(1303명), 사고사망재해는 81.0%(714명)를 차지했다.
2020년 산재에 따른 경제적 손실 추정액은 29조9841억원으로 집계됐다. 2019년(27조6468억원)보다 8.5%p 증가한 금액이다.
정부와 국회는 2019년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전부개정, 올해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이어 산안법 양형기준도 강화하는 등 사업주 의무와 처벌 수준을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노동자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의 경영책임자 등이 재해예방을 위한 안전보건 관리체계 구축 등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날 경우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내년 1월 27일부터 시행된다.
다만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산업안전보건법규 규제 등에 전부 또는 일부 제외된 상태에서 안전보건 경영을 하는 데 무리가 있다는 지적에 중대재해처벌법 제16조(정부의 지원)가 들어가고 2년간 유예돼 2024년 1월부터 적용된다. 산재사고 사망자수의 24.2%을 차지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은 아예 제외됐다.
50인 미만 사업장은 인력 조직 예산 등이 부족하기에 산재예방 및 감소를 위해 인적·물적 지원이 필요하다.
2월 중소기업중앙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산업안전 강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정부지원은 '안전설비 투자비용 지원'(52.6%)인 것으로 나타났다.
◆산재예방 일반회계 박근혜정부보다 못해 = 김 본부장은 "고용부가 중대재해처벌법 제16조 시행 10개월 흘렀는데 무엇을 했는지 의문"이라며 "안전보건관리체계 가이드북, 중대재해처벌법 해설서, 업종별 자율점검표 등으로 충분한 것인지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제16조 2항에는 정부가 중대재해 예방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예산의 범위에서 지원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산재예방 예산은 전적으로 '산업재해보상보험 및 예방기금'(산재보상보험기금)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가 산재예방에 투자하는 일반회계 예산은 극히 미미하다.
산재보험은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를 신속·공정하게 보상하기 위해 사업주의 강제가입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보험이다.
정부는 산재예방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회계연도마다 기금지출예산 총액의 3% 범위에서 정부의 출연금으로 세출예산에 계상해야 한다. 내년도 정부가 산재예방에 투입되는 일반회계 전입금은 183억원으로 실제 기금(8조8844억원)의 0.21% 수준이다.
노사정은 2006년 12월 '산재예방사업에 대한 국고지원 규모는 기금지출예산 총액의 3%를 목표로 연차적 단계적으로 확대한다'고 합의했다. 이 합의로 일반회계 전입금은 기존 150억원에서 155억원으로 5억원 늘었다.
2008년 10월에는 2006년 합의 이행을 다시 촉구했다. 지난해 4월에는 '2006년과 2008년 노사정이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산재기금에 대한 일반회계 지원규모를 매년 확대하고, 중소기업을 우선 지원하며, 이에 대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논의하는 노사정 협의체계를 구축한다'고 재합의했다.
하지만 일반회계 전입금은 올해 155억원에서 163억원으로 8억원, 내년엔 20억원 오른 183억원에 그쳤다.
김 본부장은 "산재 사망사고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한 문재인정부가 생색낸다고 8억원, 20억원 올렸지만 산재보상보험기금 대비 0.2% 수준에 그쳤다"면서 "박근혜정부 때(0.3%)보다 못한 수준으로 국고지원 규모를 늘리면 목표 도달까지 300년이 걸린다"고 비판했다.
전승태 경총 산업안전팀장도 "경사노위 차원의 이행 촉구, 중대재해처벌법상 정부의 지원규정 마련에도 불구하고 산재예방에 대한 정부의 일반회계 지원은 매우 미흡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안전·보건관리자 선임기준 30인까지 강화 = 노사는 정부가 산재예방 책무와 노사정 합의를 이행하도록 산재보험법 개정도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산재보험법 제95조 3항의 산재보상보험기금 지출총액의 '100분의 3의 범위' 규정을 '100분의 3 이상'으로, 이와 연동해 같은 법 제96조 2항에서도 '100분의 8 이상'을 '100분의 11 이상'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본부장은 "중소기업은 '기업활동 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기업규제완화법)으로 인해 산안법상 안전보건관리체제 및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안전보건관리규정 등이 전부 또는 일부 제외된 상태로 법적 의무사항이 없어 노·사 모두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며 "중소기업 사업장의 산업재해 감소 및 예방을 위해서는 안전·보건관리자 선임기준을 상시 종사자 수 30인 사업장까지로 다시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997년 기업규제완화법에 따라 안전·보건관리자 선임기준이 상시근로자 30인에서 50인 이상으로 완화됐다. 50인 미만 사업장은 관리감독자, 안전보건관리담당자 등이 일부 지정돼있으나 안전보건관리담당자의 경우 20~50인 미만 사업장은 제조업 등 5개 업종에만 적용된다.
김 본부장은 "중대재해처벌법 제16조와 산업재해 예방기금 일반회계 확대를 통해 중소기업 산재예방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고 늘어난 예산으로 안전설비 및 기술지원은 물론 30~50인 미만 사업장의 안전·보건관리자 직접 채용 또는 안전관리전문기관 업무 위탁시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 본부장은 "목표와 예산 그리고 인력이 확보된 상태에서 장기간 지도·지원했으나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사업 또는 사업장의 경우에는 반드시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팀장은 "현행 제도 내에서 중소기업, 특히 사고위험이 높은 업종을 중심으로 안전관리를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들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중소기업은 규제보다 지원과 역량 강화에 초점을 둔 산업안전정책과 예방사업 추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공청회 한 번 안 열었다”…공론화 부재부터 기증품 구입·검증까지 이건희 기증관 반대 8가지 이유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 구성원들이 22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타나무홀에서 개최한 기자회견 중 졸속 추진 반대 8가지 이유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사회를 맡은 최희진 솔방울커먼즈 활동가, 박선영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팀장,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윤은주 경실련 활동가. 한수빈 기자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이 “정부가 원칙도, 절차도, 명분도 없는 방식으로 기증관 건립을 강행하고 있다. 막무가내식으로 진행되는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을 막고, 원칙과 절차에 따른 과정을 밟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22일 냈다. 이 모임엔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경실련, 문화도시연구소, 문화연대, 서울시민연대, 서울환경운동연합, 솔방울커먼즈,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등이 참여했다.
이건희기증관반대시민모임은 이날 참여연대 건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회적 논의와 합의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과정이며, 대규모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사회적 공감대와 공론화 과정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며 졸속 추진을 반대하는 8가지 이유도 발표했다. ‘비정상적인 추진 속도와 사회적 공론화 부재’, ‘송현동 부지 매입 및 등가교환 과정 문제’, ‘기증품의 검증 과정 부재 및 구입 과정에 대한 의혹’, ‘이건희 명칭 사용의 적절성과 삼성 특혜 논란 의혹’ 등이다.
가칭 ‘이건희 기증관’ 건립 예정지인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경향신문 자료사진
①비정상적인 추진 속도와 사회적 공론화 부재
시민모임은 “2021년 4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소장품의 기증이 결정된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기증관에 대한 구상, 추진계획, 관계부처 협의, 부지 결정 과정이 충분한 논의와 공론화 과정 없이 진행됐다. 기증관이 연면적 3만㎡ 규모의 대규모 국가 예산이 예상되는 사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문화정책과의 연계성, 기증품에 대한 검증, 지역별 균형발전과의 연계성, 기증관의 지속가능성, 기증관의 시설·예산·인력·프로그램 등과 같은 운영요건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기증관 건립 문제를 두고 공청회나 설명회도 열리지 않았다. 시민모임은 “이 점이 공론화 부재에 대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시민모임은 지나치게 빠른 건립 추진 과정 때문에 다양한 쟁점들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부재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7인으로 구성된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사실상 이러한 공론화 과정을 대체하고 있다”고도 했다. 위원회의 위원들이 “정부 산하 기관장이나 공무원 출신, 수도권 인사들이 주를 이루고, 미술과 문화재와 같은 특정 장르에 편중”된 점도 지적했다.
문화연대는 10여 차례 진행된 위원회 회의 녹취록을 정보공개 청구했다고 한다. 시민모임은 “문화체육관광부 측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 제1항 제5호(공개될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이나 연구·개발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 6호(개인정보로서 공개될 경우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를 근거로 설득력 없는 이유를 대며 회의록 공개를 거부했다”며 “국민의 관심이 높은 사안에 대해 결정과정을 비공개하는 것은 정부의 정책 과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해칠 수 있고, 정보공개를 통한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했다.
‘이건희 기증관’ 건립 추진 일정.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 제공
②문화균형발전 원칙에 위배되는 수도권 집중 문제
시민모임은 전국 미술관 229곳(2017년 기준) 가운데 41%가 수도권(서울·경기·인천)에 몰린 점도 거론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지역 간 문화격차 해소를 통한 문화균형발전’을 제시했고, 문체부도 문화균형발전이 주요 정책 기조임을 밝혀온 점을 지적했다. 시민모임은 “문체부는 송현동 부지 선정에 접근성을 중요한 이유로 꼽고 있으나, 해외의 유명 박물관·미술관의 경우 접근성이 낮지만 높은 인지도와 방문객 수를 기록하는 시설들이 있다는 점에서 꼭 수도권일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③송현동 부지 매입 및 등가교환 과정의 문제점
송현동 부지는 1945년 해방 이후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수십 년간 활용됐다. 숙소 이전에 따라 1997년 국방부가 삼성에 1400억원에 매각했다. 2008년 삼성은 대한항공에 2900억원에 팔았다. 대한항공의 관광호텔 건립 계획은 무리한 추진 과정과 시민사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서울시는 2020년 이곳에 문화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3월 국민권익위원회 중재로 대한항공이 송현동 부지를 서울시에 매각하되, 매각대금은 LH가 지급하고 서울시는 해당 보상액에 준하는 시유지를 LH에 제공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서울시는 송현동 부지와 맞교환할 부지로 구 서울의료원(남측) 부지를 결정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달 10일 송현동을 이건희 기증관 건립 부지로 결정했다. 서울시와 기증관 건립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송현동 부지 일지’. 이건희 기증관 건립 졸속 추진 반대 시민사회단체모임 제공
시민모임은 “서울시가 송현동 부지를 시세 수준으로 매입하겠다는 것도 재벌에 대한 특혜이자, 예산낭비의 사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송현동 부지는 2021년 1월 공시지가 기준 3762억원이다. 서울시는 토지 보상비로 4620억 원을 책정한 적이 있다. 시민모임은 “송현동 부지 매입가는 5000억원 정도로 예상된다”고 했다. 시민모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교환할 국유지 역시 지역의 맥락이나 상황, 여러 조건 등을 고려하여 신중히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송현동 부지 이전을 위해서 이러한 측면들은 크게 고려되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부지로 할 지 결정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송현동 부지와 교환을 확정하는 것은 절차상으로도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④박물관·미술관 정책과의 충돌과 기증관의 모호한 정체성
시민모임은 “박물관·미술관 정책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 방식으로 이건희 기증관 설립이 마치 독립적 사업인 양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박물관·미술관 진흥 중장기 계획(2019~2023)’에 따르면 생활 문화기반시설로서 박물관·미술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역공동체에 사회·문화적으로 기여할 방안을 제시했다.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강화라는 기조 아래 박물관·미술관 진흥정책 수행체계를 재정비하고, 지자체의 역할 강화 필요를 역설했다”며 정책과의 충돌 문제를 짚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구상하는 ‘수장고+전시장+학예실’ 형태의 융합형 기증관 계획을 두고도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을 뛰어넘는 시설과 직제 구조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이는 기존의 박물관·미술관의 운영체계를 무너뜨리게 되며, 기존 시설과 이건희 기증관의 위상과 정체성에서 혼란을 야기한다”고 했다.
유족 측은 기증처로 국립중앙박물관 2만1693점, 국립현대미술관 1488점, 광주시립미술관 30점, 전남도립미술관 21점, 대구미술관 21점,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 18점, 제주 이중섭미술관 12점을 정했다. 시민모임은 “문화체육관광부 측이 ‘삼성가가 국가에 기증한 것이므로 국립기관의 소장처 이관은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만, 소장처를 이관하는 절차나 협의 과정, 명분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은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특정 인물의 기증품을 중심으로 박물관·미술관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동일 인물이 기증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시설에 소장되는 것은 시설의 정체성 및 목적이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⑤시민 공간으로서 송현동 부지의 역사·문화·사회적 가치와 충돌
경복궁 동쪽에 있는 송현동 부지는 지리적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다. 왕실 종친들의 주택과 왕실 사당들이 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식산은행의 사택부지로, 해방 후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활용됐다. 시민모임은 “조선시대에는 궁중문화의 중요 공간이었고, 근대에는 굴곡의 근대사를 함께해 온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상징하고 아우르는 대표성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송현동 부지를 특정 개인이나 기업의 기증품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송현동이 가지고 있는 역사, 문화적 의미와 가치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개입하는 과정을 통해서, 시민 주도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과정의 결과로서 송현동 부지가 조성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⑥관광수입 창출을 위한 경제적 효과에만 지나치게 집중되는 문제
‘이건희 기증관’ 부지로 결정된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문화체육관광부는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방안’에서 제시한 4가지 기본원칙 중 하나로 ‘문화적·산업적 가치 창출을 통한 문화강국 이미지 강화’를 들었다. 관광객의 방문이 많은 외국의 유수 박물관(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과 같은 인지도 높은 박물관·미술관 건립을 통해, 광화문-송현동 일대를 부가가치 창출 및 상업적 가치가 높은 세계적인 문화관광지구(워싱턴의 내셔널몰, 베를린의 박물관섬)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송현동은 경복궁, 광화문광장, 서울공예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세종문화회관, 북촌·인사동이 인접해 있어 기증관 건립의 최적지이다. 기증관 건립을 통해 광화문 일대가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지대(벨트)로 발전하고, 서울이 세계 5대 문화·관광 도시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시민모임은 “송현동 부지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송현동 부지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과 쟁점, 시민과 지역주민의 요구에 대한 고려보다는 기증관의 입지 조건만 고려해 경제적 파급효과와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으로 평가를 진행했다. 광화문-송현동 일대에 대한 다양한 맥락과 가치들이 상업화라는 명분에 묻혀버리는 부정적 효과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왼쪽부터)과 김영나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 위원장,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11월10일 서울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 옥상에서 이건희 기증관 건립 예정지인 송현동 부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공동취재단
⑦기증품의 검증 과정 부재 및 구입과정에 대한 의혹
시민모임은 “(이건희 기증품 1만1023건, 2만3000여 점 중) 일부 작품은 언론보도와 특별전시회 등을 통해서 알려졌으나, 기증품 전체 목록과 구체적인 작품명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증품은 어디까지나 국가와 행정이 관리·운영하는 것이고,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기증품과 관련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국민에 대한 권리 침해”라고 했다.
이들은 2007년 삼성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가가 고가의 미술품 구입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폭로 등을 두고 “작품 출처, 구입 및 소장 경위를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 도난품·도굴품인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인력을 투입해 기증품 등록·조사·연구·데이터베이스 구축을 2023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시민모임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만성적인 인력난을 겪어왔고, 최근 ‘미술품 물납제’의 도입으로 기증품이 증가하면서 그 문제가 더 심해지고 있다. 기증품 검증 과정에 대한 제도적 개선도 필요하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건희 기증작’ 특별전 언론 공개회(7월20일) 중 기자들이 ‘인왕제색도’ 앞에서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김종목 기자
⑧이건희 명칭 사용의 적절성과 삼성 특혜 논란 의혹
시민모임은 국가 예산을 투입하는 공공문화시설에 ‘이건희’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지도 짚었다. “이건희라는 인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 컬렉션 수집 과정의 의혹, 컬렉션에 대한 조사 및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이건희라는 이름이 공공의 미술품과 문화재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적절한가라고 묻는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과 이재용 부회장 사면 등을 두고 “여러 논란에도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강행하는 정부의 태도는 (삼성에 대한 특혜 의혹) 의심이 커질 수밖에 없도록 한다. 투명한 논의 과정과 적절한 절차를 통해 이런 의혹들을 풀어나가는 과정들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경향 김종목 기자
김건희 의혹 보도량, 중앙일보가 한겨레보다 적은 이유
알맹이 빠진 의혹 보도, 허위이력 보도 않거나 해명만 전해
‘허위경력’ 논란으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배우자 김건희 씨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후보 배우자 검증을 더 철저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김 씨는 허위경력 논란 외에도 △주가조작 연루 △김 씨가 대표인 회사의 대가성 협찬 △논문 표절 △모친이자 윤 후보 장모인 최은씨 씨 사문서 위조 공모 의혹 등을 받고 있습니다.
제1야당 대선 후보 배우자로서 필요한 검증일뿐더러 의혹 자체의 중대성 등을 감안할 때도 적절한 소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후보가 배우자 및 가족 의혹에 윤석열 후보가 어떻게 해명하고 대처하는지도 검증 대상이기 때문에 언론은 김 씨 의혹에 주목해야 합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언론이 김 씨 의혹을 충실히 보도하고, 검증하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김건희 의혹 보도량, 언론사별 편차 최대 4배
중앙일보 14건 가장 적고, 한겨레 55건으로 가장 많아
▲ 2020년 2월18일부터 2021년 11월30일까지 김건희 씨 주요 5개 의혹을 다룬 신문 지면과 2020년 2월17일부터 2021년 11월30일까지 방송 저녁종합뉴스 보도량. 표=민주언론시민연합
2019년 윤 후보의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이 김건희 씨 회사가 대가성 협찬을 받았다는 의혹 등을 지적했으나 주목받진 못했습니다. 이후 뉴스타파 <“윤석열 아내 김건희, 주가조작 연루 의혹” 경찰 내사 확인>(2020년 2월17일 심인보 기자)이 주가조작 의혹, MBC <스트레이트> ‘장모님과 검사사위 3부작’(2020년 3월9일~4월4일)이 장모 최 씨의 ‘잔고 증명서 위조 사건’과 김 씨 개입 의혹, 오마이뉴스 <“재직 이력 없다”… 윤석열 부인, ‘허위경력’ 정황>(8월20일 윤근혁 기자)이 허위경력을 제기했고, 지난 7월 국민대학교가 김 씨 논문과 관련해 예비조사위원회를 꾸리면서 논문 표절 의혹까지 주목받았습니다.
주가조작 의혹을 제기한 뉴스타파 보도가 나온 2020년 2월17일부터 2021년 11월30일까지 1년9개월간 김 씨의 주요 5개 의혹 보도량을 살펴본 결과, 중앙일보가 14건으로 가장 적었고, TV조선·한국경제 각각 16건, SBS 17건, 채널A가 18건을 보도했습니다. 반면 한겨레는 55건으로 보도량이 가장 많았으며, 중앙일보와 약 4배 차이가 났습니다. 자본시장법 위반, 청탁금지법 위반 등 의혹이 가볍지 않은 데다 2년 가까이 오랫동안 제기된 제1야당 대선 후보 배우자 의혹이란 점을 고려할 때 유권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전달했다고 볼 만한 보도량은 아닙니다.
TV조선, 김혜경 낙상사고 10일 보도량=김건희 의혹 2년치 보도량
▲ 2020년 2월18일부터 2021년 11월30일까지 김건희 씨 주요 5개 의혹을 다룬 신문 지면과 2020년 2월17일부터 2021년 11월30일까지 방송 저녁종합뉴스 보도량. 2021년 11월10일부터 11월30일까지 김혜경 씨 낙상사고 등을 보도한 신문 지면 및 방송 저녁종합뉴스 보도량. 그래프&표=민주언론시민연합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배우자 김혜경 씨 보도량과 비교해보면, 김건희 씨 의혹 보도량의 또 다른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김혜경 씨는 낙상 사고와 관련해 과잉취재 등으로 몸살을 앓았을 뿐 의혹으로 볼 만한 것도 없어 후보 검증과 무관한 사안이었습니다. 대다수 언론은 후보 행보를 전할 때 짧게 언급하거나 언론의 과잉취재를 비판하는 수준의 보도를 내는 정도였는데요. 반면, 낙상 사고를 김건희 씨 의혹 보도량과 맞먹는 수준으로 기사화하고, 제목에서 부각하는 매체도 있었습니다.
채널A는 해당 소식을 11개 리포트에서, TV조선은 10개 리포트에서 전하거나 언급했습니다. 김건희 씨 의혹 보도를 채널A가 18건, TV조선이 16건 다룬 것과 비교할 때 김건희 씨 의혹 보도량과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김건희 씨 의혹은 약 1년 9개월에 걸친 보도량이고, 김혜경 씨 보도는 낙상사고가 처음 보도된 11월 10일부터 10일간 보도량임을 감안하면 그 차이는 매우 두드럽니다. 채널A와 TV조선은 김건희 씨 의혹은 과도하게 적게, 김혜경 씨 낙상사고는 과도하게 많이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 김혜경 씨 낙상사고 관련 소식을 주요하게 다룬 채널A(11월4일)‧TV조선(11월6일) 저녁종합뉴스
또한 채널A는 <이 “제가 때렸다는 소문이”… 여 “국민의힘 지지자 연루” 제기>(11월14일 최수연 기자)에서 루머 내용을 제목에 사용했고, TV조선은 <“사진 속 인물은 수행원”… 기사는 삭제>(11월16일 황정민 기자)에서 김혜경 씨를 스토킹 취재한 매체를 두둔하는 듯한 리포트를 내기도 했습니다. 논란이 아닌 것을 논란으로 만들 수 있는 유형의 보도입니다.
알맹이 빠뜨린 김건희 의혹 보도
주가조작 의혹 설명조차 없고… TV조선 ‘허위이력’ 의혹 ‘0’건
김건희 씨에게 제기된 주가조작 의혹은 권오수 도이치모터스 회장이 주식시장 ‘선수’라 불리는 이 모 씨와 함께 주가를 조작하고, 김 씨가 여기에 이른바 ‘전주’로 참여해 현금 10억 원을 맡겼다는 내용입니다. 윤 후보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부장검사로 재직하던 2013년 경찰에서 내사를 진행했으나 금융감독원 등 비협조로 중단된 바 있는데요. 2020년 4월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의 고발로 재수사가 시작돼 최근 김 씨를 제외한 관련자 대부분이 기소됐습니다. 검찰은 12월3일 주가조작을 총괄‧지시한 혐의를 받는 권오수 회장을 구속하면서 “(경찰) 내사기록에 편철된 이 씨의 진술서 등은 사건 수사 결과 상당 부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의 첫 번째 핵심은 주가조작이 실제 있었는가, 두 번째는 왜 경찰 내사 단계에서 수사가 진전되지 못했냐는 것입니다. 전자는 김건희 씨 범죄 혐의와 연관된 것으로, 사실로 밝혀진다면 자본시장법 위반 등으로 결코 범죄 내용이 가볍지 않습니다. 후자는 김 씨가 오랫동안 법망을 피해온 데 윤 후보나 검찰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과도 관련돼 소상히 밝혀져야 할 사안입니다. 여러 쟁점이 얽혀 있고, 사안 자체가 복잡한 만큼 제대로 된 검증은 물론 쉽게 풀어 설명하는 역할이 중요한데요. 하지만 상당수 언론은 수사 상황을 관망하는 데 그쳤습니다.
▲ 김건희 씨 주가조작 의혹 전체 보도량과 의혹 내용 및 김 씨 연관성을 비중 있게 다룬 보도량(다른 의혹 다룬 경우도 중복 포함, 신문 지면은 2020년 2월18일, 방송 저녁종합뉴스는 2020년 2월17일부터 2021년 11월30일까지). 표=민주언론시민연합
방송 저녁종합뉴스의 경우 뉴스타파가 주가조작 의혹 보도를 처음 한 2020년 2월17일부터, 신문의 경우 다음날인 그해 2월18일부터 2021년 11월30일까지 보도를 살펴본 결과, 김 씨가 왜 의혹의 중심에 서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사는 찾기 어렵습니다. 권오수 회장을 포함해 관련자들이 기소되면서 김 씨가 여러 차례 언급만 됐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혐의인지 시청자의 이해를 돕는 보도는 드뭅니다.
특히, KBS와 채널A의 경우 주가조작 의혹을 각각 14건, 9건 보도에서 언급했지만, ‘김 씨 주가조작 연루 의혹이 반부패수사 2부에 배당됐다’와 같이 수사 상황을 언급하는 데만 쓰이거나 단신으로 전했고, 김 씨가 ‘여러 의혹을 받고 있다’처럼 다른 의혹과 함께 언급하는 수준의 소극적 보도를 이어나갔습니다.
윤석열 캠프, 주가조작 시점 빠진 계좌내역만 공개
윤석열 후보 캠프는 10월 21일 김건희 씨 주가조작 의혹을 해명하겠다며 김건희 씨 주식거래 내역을 캠프 법률팀 페이스북에 공개했습니다. 주가조작 여부를 확인할 중요 단서였으나 공개된 자료엔 주가조작 의혹이 제기된 핵심 시기는 빠져 있습니다. 캠프에서 공개한 주식거래 내역 기간은 2010년 1월14일부터 2월2일까지였으나 경찰내사 보고서에 따르면 주가조작 공모가 시작된 시점은 2010년 2월 초이고, 주가조작으로 주식 가격이 오르기 시작한 시점은 2010년 10월경입니다. 경찰내사 보고서에서 김건희 씨가 ‘선수’ 이 모 씨를 만났다고 밝힌 시점도 2010년 2월 초입니다. 그런데 윤 후보 캠프는 그 이전 자료를 공개한 겁니다.
윤석열 후보 처가 일가에 대한 취재를 이어온 홍사훈 KBS 기자는 <시사기획 창> 유튜브 콘텐츠 ‘김건희, 수상한 거래내역(11월25일)’에서 ‘선수’라 불리는 주식 전문가가 사용하지 않았을 전화주문방식(HTS, Home Trading System)을 사용해 매도한 흔적, 이 씨와 관계를 끊었다고 밝힌 이후 잔액변동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을 지운 점 등을 들어 거래내역에 여러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처럼 의심의 여지가 다분한 자료라 언론이 추가 취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 11월25일, 김건희 씨 주식거래 내역을 설명하고 검증한 KBS ‘시사기획 창’
계좌내역을 살펴보면서 문제를 제기한 곳은 동아일보, MBC, MBN, JTBC에 불과했습니다. MBC <‘김건희 연루 의혹’ 도이치 주가조작 관련자 재판에>(10월26일 임현주 기자)는 “주가조작이 이뤄진 걸로 의심받는 시기의 거래내역은 밝히지 않았다”고 짚었고, 동아일보와 MBN 등은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 홍준표 당시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주장을 실었습니다.
이와 달리 TV조선 <검찰, ‘윤 측근 수사’ 관련자 잇따라 소환>(11월2일 백연상 기자)은 거래내역을 공개했다는 사실만 보도하며 “주가조작 의혹은 정치보복”이라는 윤 캠프 쪽 주장을 덧붙였고, 채널A <윤석열 “대학 모의재판서 전두환 무기징역 선고” 해명>(10월20일 송찬욱 기자)은 “김 씨의 계좌를 공개하며 대응했습니다”라고 전할 뿐 공개한 계좌에 대한 설명이나 검증은 없었습니다.
허위이력, 보도 않거나 해명만 전하기도
최근 YTN <김건희의 ‘수상한 지원서’… “돋보이려 한 욕심”>(12월14일 신준명 기자)을 통해 김건희 씨가 허위이력 의혹 일부를 인정한 사실이 알려졌고 이후 추가로 다른 허위이력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허위이력 관련 첫 보도는 오마이뉴스 <“재직 이력 없다”… 윤석열 부인, ‘허위경력’ 정황>(8월20일 윤근혁 기자)으로, 김 씨가 서일대에 이력서를 제출하면서 한림성심대를 한림대로 써냈고 해당 이력서에 작성한 초·중·고등학교 근무 이력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윤 후보가 평소 ‘공정’, ‘정의’를 강조해왔다는 점에서 해당 의혹에 대한 대처 방식이나 반응 또한 언론이 짚어야 할 부분이지만, TV조선에선 관련 보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허위이력을 언급했지만, 보도했다고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매일경제 <교육부 ‘김건희 논문 의혹‘ 국민대 특정 감사 진행>(11월2일 김금이 기자)은 “교육부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배우자 김건희 씨의 논문 부정과 허위이력 의혹과 관련해 국민대에 대한 특정 감사에 나선다”라고만 전했고, 조선일보 <윤석열 가족 의혹에 반부패강력수사부 투입>(11월10일 이세영 기자)에선 허위이력 의혹에 대해 “윤 후보가 ‘단순 오기(誤記)’라고 말한 것이 허위사실 공표에 해당한다며 고발된 사건”으로만 소개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 2021년 8월20일부터 11월30일까지 김건희 씨 허위이력 의혹 관련 보도량. 표=민주언론시민연합
오마이뉴스 첫 보도가 나온 지난 8월20일부터 11월30일까지 관련 보도량이 많진 않았으나 MBC <김건희 ‘초·중·고 근무 이력… “해당 학교 명단에 없다”>(10월7일 김성현 기자), 동아일보 <서울교육청 “김건희 씨 초중고 근무 경력 없어”>(10월8일 최예나·유성열 기자), 한국일보 <“정경심과 뭐가 다르냐”지만… ‘허위이력’ 김건희 형사 처벌 어려울 듯>(11월15일 최나실 기자) 등에서 교육청에서 확인한 사실을 전하거나 범죄성립 가능성 등을 따지며 주요하게 다뤘습니다.
불필요한 관심만 키운 사생활 의혹 보도
▲ 김건희 씨 사생활 관련 해명을 제목에 쓴 보도. 위부터 MBC(6월30일)‧중앙일보‧조선일보‧매일경제‧JTBC(7월1일)
유튜브 채널 열림공감TV가 김건희 씨 사생활 관련 내용을 담은 이른바 ‘쥴리 의혹’을 방송하고, 김 씨의 해명 인터뷰가 인터넷매체 뉴스버스를 통해 보도됐습니다. 범죄 혐의는 물론 윤 후보 검증과도 무관한 내용인데요. 그런데도 김 씨의 해명 인터뷰를 제목으로 싣고, 구체적 내용을 실은 기사가 나왔습니다. 검증 형식을 띄긴 했지만 불필요한 사생활 들추기였습니다.
몇몇 매체는 이러한 사생활 들추기를 비판하며 ‘정작 중요한 검증은 가려지고 있다’고 짚었는데요. 경향신문 <대선 주자 부인 사생활 들추기… ‘검증의 탈’을 쓴 비방>(7월31일 탁지영‧유설희 기자)은 “공직 후보의 권력을 남용한 경우 등을 파헤치는 건 중요한 검증이지만 개인의 (사생활) 문제는 네거티브고 비방”이라는 조진만 덕성여대 교수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어 “합리적 검증 대상인 논문 표절이나 주가조작 관여 의혹도 제기됐지만 선정적인 사생활 들추기로 인해 상대적으로 묻혀버렸다”며 불필요한 관심만 부추기는 상황을 비판했습니다.
한국일보 <“윤석열 때리려 ‘쥴리’ 공격 행태 반복… 여성 인권의식 낮은 탓”>(7월31일 오지혜‧이유지 기자)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성적으로 문란해선 안 되고 흠결이 있다면 비난받아 마땅한 대상”, “이런 낡은 관점이 여전히 통용되는 건 한국의 낮은 여성인권 수준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윤김지영 창원대 교수의 발언을 보도했는데요. 김 씨의 사생활을 선거용 네거티브로 삼는 일부 정치인의 구태와 여성인권 의식 부재를 비판한 겁니다.
대선 후보와 배우자 검증 게을리해선 안 돼
후보 가족을 어디까지 검증해야 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결혼 전 일은 포함해선 안 된다거나, 도덕성 검증에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혹은 후보 검증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무엇을 정답으로 꼽긴 어렵지만, 대통령 배우자는 공적 역할을 수행하고 정부 예산과 국민 세금이 배정되는 자리라는 점에서 검증에 손을 놓을 순 없습니다. 특히 후보와 관여됐을 가능성이 있는 사안에 대해선 집요하게 취재해야 합니다. 김건희 씨의 경우 주가조작 의혹, 일부 혐의가 남아있는 코바나 불법협찬 의혹 등과 관련해 수사가 진행 중이고, 최근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부담금 특혜 의혹도 새롭게 제기됐습니다. 수사상황만 전달하는 ‘배달부’가 아니라, 질문하고 취재하는 언론의 역할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 모니터 기간과 대상 : ① ‘김건희’ 이름 언급된 2020년 2월18일~2021년 11월30일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 지면 기사, 2020년 2월17일~2021년 11월30일 KBS <뉴스9>, MBC <뉴스데스크>, SBS <8뉴스>, JTBC <뉴스룸>(1·2부), TV조선 <종합뉴스9>, 채널A <뉴스A>, MBN <종합뉴스> 저녁종합뉴스. / ② ‘김혜경’ 이름 언급된 2021년 11월10~30일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 지면 기사, KBS <뉴스9>, MBC <뉴스데스크>, SBS <8뉴스>, JTBC <뉴스룸>(1·2부), TV조선 <종합뉴스9>, 채널A <뉴스A>, MBN <종합뉴스> 저녁종합뉴스
※ 미디어오늘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민언련 신문방송 모니터’를 제휴해 게재하고 있습니다. 해당 글은 미디어오늘 보도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마도, 돈 벌 수 있어”…1500만원짜리 ‘욕망의 덫’을 보다
-2천만원짜리 욕망의 기획자①] 기획부동산 취업 취재기
10월말부터 기획부동산 2곳 서류면접 후 입사
‘장 차장’ 되어 보고들은 그들만의 비밀·실태
게티이미지뱅크.
‘부동산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신화의 나라. 부동산 성공담이 차고 넘치지만 부동산 게임에서 모두가 ‘승자’가 될 순 없다. 부동산이란 이름의 욕망 전차에도 ‘꼬리칸’은 있게 마련이다. 남들만 돈을 번다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중상류층을 올려다보기만 하던 이들마저 영혼을 끌어모아 부동산 투기 열차에 탑승한다. 이들을 꼬리칸으로 안내하는 이들이 바로 ‘부동산 기획자’다. 돈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을 자극해 쪼개진 ‘땅’의 주인으로 만들고, 2천만원에 갭투자 아파트를 사도록 이끈다. 돈이 적다고 욕망마저 가난할 순 없는, 그럼에도 부동산 생태계에서 끝내 포식자가 되지 못할 이들, 그 2천만원짜리 욕망을 기획하고 판을 짜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들이죠. 필지로 땅 못 사는 사람들! 돈 없는 사람들도 땅으로 돈 벌 수 있게 하려고 쪼개서 파는 것이니 영업할 때 당당해도 됩니다!
기획부동산 ㅎ사에 입사한 지 나흘째 되던 11월1일, 박정자(가명·59살) 부장이 직원들에게 말했다. ‘영끌’도 있는 이들이 한다는 땅의 통념을 깨는 놀라운 말은, 곧 자연스러워졌다. 이후 조회나 석회에서도 반복해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땅은 유산자의 것을 넘어 ‘만인의 욕망’으로 개발되는 중이고, 그 공정에 기획부동산이 있다.
“엄마, 엄마도 돈 벌 수 있어.”
연두색 칸막이 너머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11월5일 오후 2시께 심혜선(가명·36살) 차장은 회사에서 알려준 각종 개발 호재를 조곤조곤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11월 입사 첫날 “저 빨리 돈 벌어야 해요”가 인사말이기도 했던 심 차장은 그리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부모님과 오빠에게 ‘땅 매입’을 권하게 된 것이다.
청주에서 베이킹 카페를 운영하다 서울로 온 심 차장은 남들도 다 한다기에 손을 댔던 코인 투자로 1억원을 날렸다고 한다. “만회할 카드는 부동산뿐”이라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획부동산을 제 발로 찾아 들어왔다.
‘돈 때문에 절박하신 분’, ‘부동산 배우면서 돈 버실 분’, ‘재테크해서 노후준비하고 싶으신 분’을 찾는다는 이 회사 광고를 심 차장이 놓쳤을까. 기자 역시 온라인 구인광고로 알게 된 ㅎ사(서울 강남구)에 정식으로 서류 지원해 인사실장, 담당 부장과 일대일 면접한 게 10월26일 오후 2시께다. 이력서를 손에 쥔 채 “서울에서 대학 나오고 이쪽 일 경험이 없어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며 마지막까지 연신 의중을 떠보는 박 부장에게 진짜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돈 많이 벌고 싶습니다.”
“뭣보다 눈빛이 살아 있고 ‘돈 벌고 싶다’고 하니 믿어볼게요.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게티이미지뱅크
10월27일 기자는 ‘장 차장’이 되어, 취업에 실패해온 40대 남성은 같은 날 ‘허 차장’으로, 무너진 자영업자는 나흘 뒤 ‘심 차장’으로 ㅎ사의 영업4부에 배치됐다. 서울 강남 선릉역 번듯한 오피스 건물에 입주한 ㅎ사는 각기 4명 안팎으로 구성된 영업1부부터 10부까지 있는데, 통째 빈 부서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직원이 모두 나갔거나, 그래서 곧 ‘신입’들로 채울 부서들이고 그 생몰의 ‘무한반복’이 이 회사의 본질이란 걸 이내 파악할 수 있었다. 강남 일대에만 이러한 기획부동산이 300여개로 추정되고, 그들이 이젠 저소득층까지 노려 개발될 리 없는 땅조차 상품으로 기획해내고 있다.
ㅎ사는 충남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삼화리 일대 임야 2곳을 각각 평당 130만원, 150만원에 팔았다. 현지 실거래가에 견줘 최대 4~5배 이상 비싼 가격이었다. 임원들은 쿠팡과 편의점에서 파는 생수와 마트와 식당에서 파는 소주의 가격 차이를 언급하며 “4억원짜리 땅을 11억원에 파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니 직원들에겐 각오나 다짐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계약으로 뭉친 4부 ㅎ의 최고 부서! 된다 된다 계! 약! 번다 번다 돈! 돈! 영업4부 파이팅 파이팅 얍!
실제 회사의 하루는 구호로 시작된다. 영업4부도 마찬가지다. 회사가 ‘젊은 피’를 수혈해 조직한 부서였다. 기존 팀원인 60대 차장 2명에 3040세대를 투입해 ‘신구’ 조화를 이뤄내겠다는 게 회사의 목표라고 박 부장이 말했다. 우렁찬 박수와 함께 부서별 구호 파도타기가 끝나면 조회가 시작된다. 거듭 “필지로 땅 못 사는 사람들” “돈 없는 사람들도 땅으로 돈 벌 수 있게”….
에이스 부서로 정평이 난 영업10부의 정인영(68살) 부장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게 우리나라 속담이야. 욕심을 이용하란 말이야! 주변에 크게 오른 땅 말하면서 기대감을 품게 하고, 우리가 파는 땅 얘기를 하란 거야”라고 신입 차장들에게 영업 노하우를 전수하곤 했다. 그는 올해만 15억원어치 땅을 팔아 성과급으로 1억5천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필지로 땅 못 사는 사람들” “돈 없는 사람들도 땅으로 돈 벌 수 있게” 판 땅은 그 가운데 얼마일까.
“부동산은 망하지 않아. 내 딸이 직업 군인이야. 진급 못 하면 아예 기획부동산에서 일하려고 한다는 거 아니야. 직장생활 하면서 이런 돈 평생 못 만져. 정말 잘한 선택이야.” 그는 눈이 마주치는 직원들에게 자주 엄지척을 날렸다. 그의 ‘응원’을 무시하는 신입들은 없다. 베테랑 정 부장과 신입들의 욕망, 아니 꿈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 왼쪽) ㅎ사에서 가장 실적이 좋은 ‘영업10부’의 실적 현황. 계약을 따낸 직원의 이름과 수수료가 적힌 종이를 벽면에 붙여두었다. (오른쪽) ㅎ사 사무실 내부. 중앙 통로를 두고 양쪽으로 칸막이 책상이 일렬로 놓여 있다. 중앙 무대에는 물건지 설명을 위해 화이트보드, 티브이, 빔프로젝터가 설치돼 있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회사 사무실 구조는 ‘공장식 콜센터’라 할 만하다.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4자리 또는 6자리씩 칸막이로 구분된 책상이 일렬로 놓여 있다. 흔한 컴퓨터 한대 없이 책상 위엔 유선전화기만 달랑 놓여 있다. 칸막이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2030 당진시 개발계획도’와 회사 계좌번호가 찍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사무실 벽면에는 개인별 실적이 적힌 종이가 부서 단위별로 게시돼 있다. 영업 경쟁을 유도한다. 부서별로 실적 격차가 제법 큰 게 눈에 들어왔다. 영업10부 뒤 벽면은 실적을 붙일 자리가 모자라는 반면, 단 한건 올리지 못한 부서도 있었다. ㅎ사에서 일한 열흘간 2개 부서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고 빠르게 새 사람들로 채워졌다.
매일 아침 10시30분부터 1시간 반쯤 진행되는 조회에서 임원들은 우리가 파는 ‘물건지’가 어째서 좋은 땅인지, 개발 호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침이 튈 정도로 열렬히 주입시켰다. 화면에는 지자체 홍보 동영상, 경제지 기사 스크랩, 국토부 보도자료 등이 연신 띄워졌다. “우리가 파는 땅은 차원이 달라요”, “개발이 확정됐으니 돈 빌려서라도 이 땅은 사야 합니다”, “지금이 아닌 미래 값어치로 보라고 고객을 설득하세요”와 같은 ‘확신의 언어’들이 촤르르 쏟아졌다.
게티이미지뱅크
단 하나 금기가 있었다. 회사가 파는 토지의 지번은 고객에게 절대 먼저 알려줘서는 안 된다. 물건지를 설명하는 대면 미팅을 만들어 고객이 회사로 직접 방문하는 ‘내사’가 확정되고 난 뒤에야 지번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교육받는다. 고객이 앞서 땅의 ‘실체’를 달리 파악하거나 평가할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명품을 즐겨 입는 한정원(가명·40대 초반) 상무는 논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 임야를 놓고 “지대가 높아 홍수가 와도 안정적이고 농작물 수입이 없기에 세금이 적고 흙을 파 팔 수도 있다”고 말했다. 차장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갖가지 교육 정보들을 받아 적다 조회가 끝나면 일제히 부산을 떨며 전화통을 붙들었다.
“지금 은행 이자가 1%도 안 되는데!”, “그때 파주에 땅 산 사람들은 돈을 엄청 벌었다니까 그러네!”, “이 당진 땅은 죽으면 새끼한테 물려줘도 돼. 나 못 믿어?” 고성과 읍소 사이에서 중부권의 지번 모를 땅들을 질주하던 차장들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면, 사장을 포함한 3명의 임원들이 중앙 통로를 오가며 호통을 쳤다. “왜 이리 조용해. 절간이야, 오늘은 영업 안 할 거야?” 좁은 양계장의 닭처럼 붙어 앉은 직원들은 눈치를 보며 또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장필수 김완 기자 feel@hani.co.kr
가수 태연 가족이 산 땅보다 좋은 땅” 유혹과 압박이 오갔다
②] 기획부동산 취업 취재기
10월말부터 기획부동산 2곳 서류면접 후 입사
‘장 차장’ 되어 보고들은 그들만의 비밀·실태
지난 10월27일부터 11월15일까지 직접 일한 기획부동산은 모두 2곳(ㅎ·ㅈ사)이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ㅈ사에선 충남 예산군 삽교읍 두리에 있는 밭을 평당 244만원에 팔았다. ㅎ사와 비슷하게 실거래가의 4~5배였다.
회사별로 토지의 최소 판매 평수와 가격이 달랐지만, 약속이나 한 듯 최소 구매금액은 ‘1500만원대’로 형성돼 있었다. ㅎ사는 11평(1460만~1650만원), ㅈ사는 6.36평(1554만원)을 최소 판매 단위로 삼아 ‘지분 쪼개기’(한 필지를 서로 모르는 다수가 살 수 있게 지분을 회사가 분할) 방식으로 판매했다. 두 회사 임원들은 조회·석회 시간을 틈타 지분 쪼개기는 “돈 없는 사람들을 위한 최적의 투자 방법”임을 강조했다.
기존의 기획부동산들은 군사보호지역, 비오톱(생물서식공간) 1등급,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등 개발이 제한된 토지를 ‘뻥 브리핑’(허위 개발 정보를 제공)해 팔아 문제가 됐다. 개인별 피해 규모가 적어도 수천만원에서 1억~2억원대로 중상위 계층이 주로 포섭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합법적’ 테두리에서 덜 가진 이들, 더 작은 욕망까지 타깃 삼는 변화가 뚜렷하다. 최근 몇년의 부동산값 폭등이 남 일이었던, 남 일일 수밖에 없던, 그렇게 ‘가만히’ 더 가난해지고 만 이들을 위해서란 듯 말이다.
실제 회사에선 아예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부동산 판매사기 사건들을 ‘과거 사례’로 나열해 직원들에게 보여준다. “정상적인 업체”임을 강조하고, 세뇌하는 수단이다. 가장 최근 사건 가운데 하나인 가수 태연 가족의 사기 사건 기사(거래는 2019년)를 보여주며 “이 땅은 비오톱 1등급 임야다. 우리가 파는 땅은 절대 그런 땅이 아니다. 비오톱 땅을 팔아서도 2500억원을 남겼다는데, 우리는 좋은 땅을 파니 그보다 더 많이 팔아야 된다”고 당당하게 소리치기도 했다. 당당함 대신 호기심이 커졌다. ‘2019년조차 노골적 사기가 먹혔구나.’
ㅎ사의 영업 방식은 단순하다. 하지만 간단하진 않다. 휴대전화 번호가 담긴 서류를 보고 무작위로 전화를 거는 이른바 ‘114 영업’. 그런데 그 기반인 ‘전화번호부’가 대체로 무용지물이다. 회사가 나눠준 수백명의 휴대전화 번호 중 상당수는 결번 또는 정지된 번호인데, 이럴 경우 “끝자리나 중간 자리를 바꿔서 다시 전화하라”고 지시한다. 운 좋게 생판 모르는 사람과 연결이 되더라도 쉽게 넘어올 리 없다.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나 사라” 따져오기 십상이다. 최선의, 그러나 대개 최후가 되고 마는 멘트를 던져야 할 순간이다. “저도 샀는데요?”
기획부동산들은 “인사→본인·회사 소개→공감대(나이·고향·취미) 형성→재테크 대화→투자 권유로 이어지는 ‘단계별 통화’”를 강조하지만 그건 애초 불가능하다. 기획부동산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차장들을 늘려가는 이유다. 회사의 진짜 실체가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차장들이 이들 회사의 유일한 ‘고객’이란 사실. 회사는 차장들에게 지인과 가족 상대의 영업도 처음부터 권하진 않는다. 하지만 114 영업이 무모한 도전이라는 것을 체감할 때쯤, 제안이 들어온다.
출근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톰브라운 니트를 입은 한 상무가 말했다. “하루 삼사백통 전화를 해서 받는 사람은 10% 내외고 그중에서도 계약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1%도 안 돼요. 114보다 빠른 게 연고이고 마감을 앞두고는 이제 연고도 병행해야겠죠?” 직원이 고객으로 전환되는 ‘연고 압박’이다.
왼쪽) 장 차장이 앉았던 자리. 유선 전화와 티슈만이 제공됐고, 칸막이에 ‘2030 당진개발계획도’, ‘아파트 단지’ ‘ㅎ사 계좌번호’ ‘영업 4부 구호’ ‘회사 주소’가 적인 종이가 붙여져 있다. 책상 위에 놓은 서류는 ㅎ사에서 제공한 ‘114’ 영업용 전화번호부. (오른쪽) ㅎ사에서 제공한 114 영업 기록 카드. 통화한 고객과 관련한 정보를 기록해 담당 부장에게 보고한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기획부동산은 3단계를 거쳐 직원을 고객화한다. 이벤트성 상금(금 1돈 등), 성과급(토지 판매 대금의 2%)을 미끼로 차장들을 자극한다. 시상금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들뜨면, 부장들은 “우리가 먼저 상금을 챙겨야 하니 본인 명의로라도 일단 계약금을 걸어놓고 이달 안으로 고객에게 팔자”, “우리끼리 돈 모아서 일단 (계약서를) 쓰고 상금은 나눠 가진 뒤 고객에게 떠넘기자”고 제안한다. 영업은 원래 “벼랑 끝에서 해야 되는 것”이라고 내몬다.
월말 ‘마감 시한’이 다가오면 임원들이 대놓고 나선다. 세번째 압박 카드다. “손님을 붙잡아 계약금을 ‘땡기든지’, 아니면 차장님들이 (먼저 가계약해) 잡아놓고, 시한을 줄 테니 이번달까지만 (고객 돈으로) 잔금을 넣으면 된다”고 압박한다. 180㎝가 넘는 키에 몸무게가 100㎏이 넘는 권일성(가명) 상무는 “오늘 계약 따낼 사람 손 들어봐라, 끝날 때 다시 확인하겠다” “어떻게든 오늘 안에 ‘정계약’(토지매매계약서상 계약금만 회사 계좌로 입금한 상태)을 만들어 놓으라” 엄포를 놓으며 아침 조회를 마무리하곤 했다.
이렇게 해 보통 1500만원대 금액의 10%가량인 150만원 정도를 계약금으로 걸게 되는 차장들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에게 땅을 팔아야 하거나, 결국 잔금까지 직접 치러 살 수밖에 없는 블랙홀로 진입하게 된다.
움츠러든 차장들을 달래는 역할은 부장이 맡았다. 단골 레퍼토리는 ‘영업10부 에이스’ 김미선(가명) 차장 이야기였다. 박 부장은 “김 차장님이 회사에서 산 평택 도대리 땅이 (평당) 280만원에서 800만원까지 올랐어. 초등학교 선생인 친동생이 교장, 교감까지 다 데리고 와서 지난달에만 2억원어치 팔았다”며 올해 일흔을 넘긴 김 차장이 본인은 돈도 벌고 주변에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시상금 욕심, 제2, 제3의 김 차장이 되고 싶은 욕망, “회사가 파는 토지가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의 삼박자가 갖춰질 때쯤 차장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걸어둘 ‘정계약’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담당 부장이 허리춤을 깊숙이 찌른다. “어차피 오를 땅인데 자기가 하나 사두면 좋잖아. 이번에 시상금도 걸려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야.” 누군가에게 땅뙈기를 비싸게 팔았을 기획부동산의 가해자와 그러한 땅을 살 수밖에 없는 피해자가 뒤섞이는 순간이다. 이른바 피라미드 영업의 ‘물고 물리기’처럼 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직접 구매할 여력 되지 않아요?” ㅎ사 입사 7일 만인 11월4일, 박 부장이 점심 식사를 하러 가던 중 단도직입적으로 토지 구매를 권했다. 앞서 박 부장은 “마포에 살고 여유가 되니까, (영업) 천천히 해요”, “여차하면 지를 수 있잖아요?”와 같은 말을 스쳐 지나가듯 던져왔지만, 이날만큼은 집요했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마자 11월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새 물건지 정보가 가득 찬 서류 뭉치를 가져와 “본인 이름으로 계약 한 건 올려야 하지 않겠나. 계약금 150만원부터 일단 걸고 (150만원이) 없으면 100만원만이라도 걸어라”고 독촉했다. 박 부장과 특히 가까운 진선영(61살·가명) 차장도 거들었다. “나도 친언니 이름으로 11평 계약했다. 계약을 해야 회사가 믿음을 준다”고 설득했다. ‘70만원밖에 없어서 죄송하다’고 하니, “30만원 빌려줄 테니 계약서부터 쓰자”고 박 부장은 말했다. 성과가 없자, 퇴근 직전인 오후 4시 박 부장은 들으란 듯 ‘신입 차장’을 상대로 한 영업 경과를 누군가에게 휴대전화로 보고했다. 명품 스카프를 두른 박 부장이 빠르게 훑던 이력서의 ‘주소란’에 눈길을 세운 채 “마포에 사네, 자가, 전세?” 하다 부모의 직업까지 구체적으로 묻던 10월의 면접일 풍경이 스쳐갔다.
ㅎ사에서 10월27일부터 일주일간 성사되었다고 보고된 정계약(가계약금까지 납입)은 16건이었다. 가까이서 바로 확인된 최소 3건이 차장 본인 또는 가족 명의의 계약이었다. 전체 직원 계약건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땅을 팔아 돈을 벌러 기획부동산에 모여든 이들이 없는 돈을 끌어모아 땅을 사버린 것이다. 이들은 “값이 오를 좋은 땅 정보를 알았고, 천만원이면 살 수 있다는데 적은 돈이라도 투자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어차피 오를 땅 아니냐”, “내 이름으로 넣어 놓고 나면 회사도 나를 믿어줘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영업10부의 6개월차 장일영(가명) 차장은 “내 명의 등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내가 샀으니 너도 믿고 사’라고 말하면 고객이 따라온다. 내가 먼저 사니 망설였던 사람들도 다 (따라) 샀다”며 “만약 살 계획이 있으면 미리 사서 영업하는 게 낫다”며 지금이라도 땅을 사라고 권했다.
장 차장처럼 회사에서 땅을 산 차장들은 ‘내가 산 땅은 반드시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두터워 보였다. 믿음이 영업의 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 믿음은 사실 그들의 오늘 삶을 버티게 하는 동력일 것이다.
“나 못 믿어? 나 믿고 일단 와서 설명만 들어봐.”
“진짜 돈 천만원 가지고 이렇게 따지고 그러면 이런 좋은 땅 못 산다니까.”
“엄마, 엄마도 돈 벌 수 있다니까.”
과연 개발될 땅일까, 이들에게 땅에 대한 믿음은 어쩌다 필요했을까, 그리고 또 믿음을 필요로 하는 전화 너머 그들은 누구일까.
“코인 투자로 1억 날려... 만회할 카드는 부동산 뿐” 그는 믿었다
속아도 땅은 믿는 ‘차장들’…패배가 뻔한 부동산 게임
[더탐사-2천만원짜리 욕망의 기획자③] 기획부동산 취업 취재기
한국말 어눌해 취업 안되던 중국 동포 ‘중국어 능통자’로 대접
코인 투자 실패자, 만년 구직자가 나누는 땅에 대한 욕망
“돈이 없어 물러가지만, 땅은 꼭 사고 싶다”
지난달 취업한 기획부동산 ㅈ사에는 중국동포도 있었다. 중국 연변 출신의 하영순(가명)씨가 부동산업계에 투신한 지는 2년 정도 된다. 50살 이주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식당 일을 전전하다 평소 관심사였던 아파트 분양 대행사에 취업했고 “한국에서 돈 벌려면 부동산을 해야 한다”는 말을 공인중개사한테 들었다.
들쑥날쑥한 높낮이 억양에 어눌한 한국어 말투 때문에도 하씨는 취업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세계’에 오니 일순 사내 유일의 중국인 영업이 가능한 ‘중국어 능통자’로 대접받았다. 중국동포들이 모이는 각종 모임에 참석해 연락처를 주고받은 다음 이들을 상대로 땅을 팔았다. 중국 사람들도 한국 부동산은 오른다고 생각해서 접근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회사에서 판매하는 땅을 팔 뿐 사진 않는다고 했다. 2019년 5월 이전 회사로부터 충남 서산시 팔봉면 대황리에 있는 보전관리지역 ‘임야’를 추천받아 612만원을 주고 34평을 ‘지분 쪼개기’(한 필지를 놓고 다수가 공유지분을 사들이는 투기 행위)로 사들였다. “회사에서 앞으로 남북관계가 좋아진다면서 연천 땅을 팔아서 사려고 했는데 외국 사람이라서 등기가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팔봉면 이 땅을 (회사가) 추천해 샀어.” 600만원이 넘는 비싼 수업료를 낸 뒤 기획부동산 판매 물건지의 태반은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업계를 떠나진 않고 있다.
돈이 급할수록, 땅을 통한 반전의 욕망이 클수록 업계에서 성실했고, 믿음 또한 두터웠다. 기획부동산 ㅎ사에서 만난 심혜선(가명·36) 차장은 코인투자로 1억원을 잃었다. 그의 꿈은 서울에서 카페 하나를 차리는 것이었다. “만회할 카드는 부동산뿐”이라는 말과 함께 기획부동산에 입사한 그는 며칠 만에 “부동산업이 돈을 많이 벌고 자영업보다는 낫겠다”, “부동산을 배워서 돈을 벌게 된다면 아예 전업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 담당 부장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파트 가격은 지금 꼭짓점이고 앞으로 대세는 공공임대인데 굳이 고점에 사기보다는 여유 자금으로 땅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설득해.” 영업4부 박정자(가명) 부장은 ‘토지 대신 아파트에 투자하고 싶다’는 심 차장 친구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고선 말했다. 114 영업(휴대전화 번호가 담긴 서류를 보고 무작위로 시도하는 전화영업)이 쉽지 않다는 걸 이내 깨달은 심 차장은 지인과 가족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는데, 때로 박 부장과 상황극을 모의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식사 때 박 부장이 전화 걸어 땅 이야기를 꺼내 흥미나 관심을 이끌어낸다는 시나리오를 짜는 식이다. 심 차장은 지인, 가족들에게 외면당할 때마다 “우리가 첫 고객이었고 그다음이 우리 지인인 것 같다”고 푸념하면서도 “여기는 정말 좋은 땅을 선별해서 파는 것 같아요. 우리 땅 좋은 거 맞죠?”라고 물었다. “누나가 기획부동산에서 사기를 당한 적 있는데 수법이 똑같다”는 친구의 조언은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다.
ㅎ사 입사 동기였던 허성태(가명·42) 차장은 입사 첫날부터 박 부장 앞에서 연신 한숨을 쉬어댔다. 전직 보험 영업맨으로 ‘지인 판매’의 험난함을 익히 아는 듯 보였다. 인천에 사는 그는 왕복 4시간 출퇴근 사투를 감내하며 강남 부동산업체에 진입했다. “부동산 한번 제대로 배워보려면 강남 바닥에서 굴러야 한다”고 믿었다. 지방 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상경했지만, 바라던 사무직이 되기에는 스펙이 늘 발목을 잡았다. 제대로 된 사무직이 되어보지 못한 채 주차관리요원, 호텔 서비스업, 공사판 일용직, 택배 분류 작업까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전전했다. 그러다 허리까지 다쳤다. “스펙 없고 마흔 넘으면 몸 쓰는 일 말고는 받아주는 곳이 없어요. 부모님이 공부 열심히 해서 대기업이나 공무원 하라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허 차장은 티브이 속 공인중개사가 빌딩 투자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부동산 투자’ 쪽 진로를 결행하게 됐다고 했다. 틈날 때마다 박 부장과 동료들에게 <에스비에스>(SBS)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부동산 컨설턴트 얘기를 꺼내고선 “저도 그 사람처럼 빌딩을 전문으로 하는 부동산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럼에도 지인·본인 영업 판매로 굴러가는 기획부동산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면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는 이들이 생긴다. 심 차장, 허 차장 등 3040 신입 차장들은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다. 1000만원이 없거나 빌릴 수도 없는 사람은 회사에서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땅에 대한 믿음을 버렸단 말은 아니다. “전 아는 사람도 없어서 다니기 어렵게 됐어요. 좋은 회사인 것 같으니 필수씨도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잘 다녀봐요.” 허 차장은 전화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퇴사 뒤 만난 심 차장의 말은 더 깊이 박혔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임원과 부장에게) 잘 보이고 싶었어요. 돈이 없어서 그만뒀지… 땅을 정말 사고 싶었거든요.”
이를 아는 탓인지 박 부장은 부서 차장들이 나갈 때마다 “(예전 나간 이들도) 우리 토지가 좋으니 돈 생기면 꼭 사러 온다고 한다”며 ‘땅에 대한 욕망’을 만져주고 격려했다.
한겨레 장필수 기자
박원순 측 정철승, 조국 옹호했나…“윤석열 검찰에 ‘멸문지화’ 핍박 겪어”
“조국, 검찰개혁에 반발하는 검사들은 모두 옷 벗기면 된다고 거침한 자”
“文정부, 그 아까운 2년 이상의 시간을 ‘조국 사태’라는 국가적 소동으로 허송”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 대한민국은 공고하고 파렴치한 기득권의 아성 될 가능성 높아”
조국(왼쪽) 전 법무부 장관과 정철승 변호사. 연합뉴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유족 측 법률대리인 정철승 변호사가 "조국 일가가 지난 2년 동안 윤석열 검찰로부터 '멸문지화'에 가까운 핍박을 겪고 소위 진보에 속한다는 부류들로부터도 조리돌림에 가까운 비난을 당했던 이유였던 일들, 그 여러 불공정들은 대개 MB 정부 때 있었던 일들"이라고 말했다.
21일 정치권에 따르면, 정철승 변호사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당시 조국 교수는 '진보 집권 플랜'이라는 책을 써서 전국으로 북콘서트를 다니고 있었다. 권력이기는 커녕 권력의 칼날이 겨누어 지는 곳에 있었던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정 변호사는 "당시 조국 교수는 검찰개혁을 주장하면서 반발하는 검사들은 모두 옷을 벗기면 된다고 거침한 자다…"라면서 "10여년 전 권력으로부터 주시되던 조국 일가의 행태가 불공정이라면 그것은 한국 사회 자체가 기득권계층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 기울어짐을 바로잡는 것이 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그 아까운 2년 이상의 시간을 '조국 사태'라는 국가적 소동으로 허송해버리고 결국 개혁은 시작하지도 못한 채 임기가 끝나게 되었다"며 "대한민국 기득권의 주류인 윤석열 검찰과 언론은 성공적으로 검찰개혁뿐 아니라 기득권 계층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사회, 경제, 교육, 입시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을 막을 수 있었다. 그 공로로 윤석열은 유력한 대권후보까지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국 일가를 통해 드러났던 입시제도의 문제점이 있었다면 그것을 반성하고 고쳤어야 옳지, 조국 일가만 욕하고 끝내버린 어이없는 국가적 어리석음의 이면에는 대한민국 기득권층의 교활함이 있었다"고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끝으로 정 변호사는 "그래서 나는 늘 조국 사건에 대해 기득권 계층은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라며 "윤석열 국민힘당 정부가 들어선다면 대한민국은 공고하고 파렴치한 기득권의 아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 조국 사건과 윤석열 검찰의 폭주는 그 국가적 불행의 서막이었다"고 덧붙였다.
최근 정 변호사는 부인 김건희씨의 '허위 경력 의혹'을 해명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겨냥해 "내가 조국 장관이라면 이 기사 읽고 혈압으로 쓰러졌을 것 같다"고 신랄한 비판을 쏟아낸 바 있다.
당시 그는 "얼마나 울화가 터지고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게 느껴질까"라며 "이런 물건한테 검찰 조직을 맡겼다니…"라며 "윤석열, 김건희 의혹에 '현실·관행 살펴라, 대학 관계자에게 물어보라'"는 제하의 기사 캡처사진도 올렸다.
정 변호사는 김건희씨가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사과 의사를 내비친 것을 두고는 "김건희씨의 지원서 경력 허위기재 및 재직증명서 위조는 범죄 행위이기 때문에 사과로 퉁칠 일이 아니다"라며 "공소시효가 지났어도 범죄는 범죄인 것이고, 수사와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는 처벌 여부를 함부로 단정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진모라는 사람이 뭘 얼마나 알고 사과 운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언론이 야당 대선후보 배우자의 형사 문제라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 이런 문외한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을 옮겨서 기사화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언론보도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진씨가 그나마 양식이라도 있다면 김건희씨는 자수하고 그 배우자인 전직 검찰총장 윤석열 후보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후보직에서 사퇴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온당하다"면서 "그러나 진씨는 그것이 왜 온당한 것인지 이해도 못할 것"이라고 거듭 날을 세우기도 했다.
권준영기자 kjykjy@dt.co.kr
연체율이 폭로한 '경제적 불평등'…부자·은행만 돈 벌었다
가계대출 연체율이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는 지적이다. 고신용자에 대한 대출이 크게 확대된 점이 연체율 하락의 주된 배경이기 때문이다.
이는 계층간 대출 접근성 격차 확대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됐음을 의미한다. 실제 고신용 가계대출은 부동산시장에 집중됐다. 최근 집값 폭등 영향으로 대출 접근이 용이한 고신용자와 그렇지 못한 저신용자간 자산 격차는 더욱 확대됐다.
고신용자 못지 않게 은행들도 큰 재미를 봤다. 담보가 확실한 부동산대출 확대에다 연체율마저 떨어져 은행들은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대한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버블 붕괴에 유의하는 한편 저신용자의 부채와 이자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24일 한국은행 '2021년 하반기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은행과 비은행을 아우른 전(全)금융권 가계대출 연체율은 올해 6월말 기준 0.60%를 나타냈다. 통계가 집계된 2009년 1분기 이후 최저 수준이다.
한은은 코로나19 위기 상황 속에서도 연체율이 하락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신용위험 관리 강화 및 고신용자 대출 확대'를 꼽았다. 은행들이 신용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주머니가 두둑한 고신용자 위주로 대출을 늘리면서 연체율 자체가 낮아졌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무주택자이면서 비은행 신용대출을 보유한 차주의 연체율은 지난 3월말 기준 4.80%로 가장 높았다. '내 집' 없이 비은행권에서 높은 이자에 돈을 빌릴 정도로 궁지에 몰린 중·저신용자들이 그만큼 많아진 셈이다.
앞으로 이러한 대출 양극화는 가속화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한은은 2013~2021년 평균 차주 신용도별 연체율이 기간 경과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분석했다.
중·저신용자 가계대출의 경우 대출취급 후 1년 경과시 연체율이 2.4%, 2년 경과시 3.3%, 3년 경과시 3.5%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고신용자 가계대출은 3년의 기간이 경과해도 0.1~0.3% 수준에서 완만하게 상승했다. 고신용자와 달리 저신용자들이 앞으로도 빚에 허덕일 가능성이 큰 셈이다.
한은은 이 보고서에서 "가계부채가 부동산 시장에 집중되고 부동산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계층 간 대출 접근성 격차가 곧 자산 격차 확대로 이어지는 등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2020년 소득 하위 20%에 해당하는 1분위 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2017년 대비 233만원 감소한 반면, 상위 20%인 5분위 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7115만원 증가했다. 3년에 걸쳐 상위 20% 재산이 7000만원 넘게 불어나는 동안 하위 20% 주머니는 오히려 얄팍해졌다.
이를 두고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통상 불경기에서는 대기업 역시 타격을 입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수출에 힘입어 실적이 나아졌다"며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 돈이 몰리면서 고소득층은 자산을 불린 반면, 저소득층은 생활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은 탓에 자산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단순히 저소득층 이자 부담을 경감한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을 반대해선 안되며, 정부가 저소득층의 부채와 이자 부담을 줄이는 재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제적 양극화도 문제지만 향후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부동산 버블' 붕괴 역시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부동산 시장이 연착륙하지 않고 급작스럽게 붕괴된다면 가계대출 부실화, 금융부실로 이어져 금융위기가 재현될 우려가 있다"며 "이를 막을 책임은 정책 당국에 있으며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높일 경우 조세정책은 풀어주는 식으로 정책 조합을 잘 써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동시에 저신용자 연체를 줄이기 위한 서민금융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달 3만명씩 늘어난 노인…'젊은 노인' 300만명 넘었다
만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가 노인연령에 편입되기 시작한데다 평균수명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노인인구는 2024년 무렵 1000만명을 돌파한다. 노인인구가 증가하면서 기초연금 등 재정 부담도 커졌다. 급격한 고령화에 따른 노인인구 상향조정, 노인빈곤 문제 등 과제가 많다.
23일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만 65~69세 인구는 301만1793명이다. 해당 연령대의 인구가 300만명을 넘어선 건 처음이다. 10년 전인 2011년 11월 기준 65~69세 인구는 190만484명이었다. 매년 평균 11만명씩 해당 연령대의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선두인 1955년생이 지난해부터 노인연령에 도달하면서 증가 속도는 더 빨라졌다.
2024년 노인인구 1000만명 돌파 예상
'젊은 노인'이 늘어나고 '늙은 노인'의 평균수명까지 길어지면서 만 65세 이상 전체 노인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지난달 기준 만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총 882만1070명이다. 10년 전 약 560만명이었던 노인인구는 올해 들어서만 매달 약 3만명씩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기대여명은 83.48세로 2010년(80.24세)보다 3.24세 늘었다.
통계청은 최근 발표한 장래인구추계(중위추계)를 통해 2024년 노인인구가 1000만8000명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같은 시기 노인인구 비율은 처음으로 20%를 넘어선다. 노인인구 비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해 2035년 30.1%, 2050년 40.1%, 2070년 46.4%에 이를 전망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른 저출산 속도만큼 빠른 고령화 속도다.
급격한 고령화는 재정 부담을 동반한다. 기초연금은 만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 하위 70%에게 지급하는데, 노인인구가 늘어나면 관련 예산도 증가한다. 매달 노인인구가 3만명씩 늘어나면 그 인구의 70%인 2만1000명에게 월 최대 30만원인 기초연금을 최대 63억원씩 줘야 한다. 실제로 2017년 2017년 8조960억원 수준이던 기초연금 예산은 내년 16조1140억원이다.
현재 노인연령을 정의하는 법은 따로 없다. 다만 65세부터 받을 수 있는 기초연금과 64세까지로 정의되는 생산가능인구 등을 감안할 때 노인연령을 65세로 통용한다. 정부의 인구정책TF(태스크포스)를 이끌고 있는 기획재정부는 64세인 생산가능인구를 상향조정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를 가속화하겠다"고 밝혔다. 자연스럽게 노인연령 상향조정 논의도 이뤄질 전망이다.
매달 3만명씩 늘어난 노인…'젊은 노인' 300만명 넘었다© MoneyToday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까"…논의는 여전히 진행형
하지만 노인연령은 연금수급, 정년연장 등과도 맞물린 주제라는 점에서 간단하지 않다. 이태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인구구조대응연구팀장은 "노인연령 상향조정은 연금개혁과 마찬가지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며 "중장기적으로 조정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공유하되, 취약 노인의 입장에서 감당 가능한 상향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의 노인실태조사를 보면, 노인연령에 대한 인지를 묻는 질문에 70~74세라고 답한 노인의 비율이 52.7%로 가장 높았다. 하지만 이는 인생주기에 따른 단순 노인연령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풀이도 있다. 실제로 정책의 혜택을 받는 노인연령을 상향조정하는 것에 대해선 노인들의 반발이 크다.
이윤경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노인정책연구센터장은 "노인들 중에는 소득과 건강 등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책적인 의미에서 노인연령을 당장 조정하자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며 "지하철 무임승차 대상을 소득과 이동성을 기반으로 조정하는 등 연령 기준보다 욕구를 기반으로 정책대상을 정한다면 소모적인 논쟁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북유럽은 어떻게 '성장·복지·지역균형발전' 모두 잡았나?
[경제지리학자들의 시선] 장소기반 혁신전략과 지역 기여형 대학 육성해야
우리나라의 수도권 인구가 올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이대로라면 지방은 청년인구의 유출과 고령화로 소멸할 거라는 위기의 목소리가 높다. 이런 중앙과 지방간의 지역 간 격차는 2000년대 이후 글로벌화, 지식기반경제로의 진전으로 더욱 확대됐다. 더불어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경제성장은 잠재성장률이 3%도 안 되는 저성장 기조에 들어섰다.
반면에 한국의 상위 10% 집단의 소득집중도는 44.6%로 신자유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과 유사하다(영국, 독일 등은 32~37%). 복지지출도 확대되어 왔지만 아직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멀었다. 저성장과 저복지, 지역 간 불균등의 악순환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며, 향후 확대될 우려가 크다.
그런데 북유럽국가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해 낸 이후, 세계 최상위 수준의 혁신력과 고른 분배 및 지역균형을 달성하고 있다. 최근 스웨덴, 핀란드는 스타트업의 요람이라고 불리며, 행복도도 가장 높고 지역 간 격차도 가장 낮다.
전통 경제학에서 성장과 분배는 상충관계에 있다고 했지만, 북유럽이 성장과 복지, 지역균형발전의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비결은 무엇인가?
북유럽 모델의 재발견
그간 많은 논자는 글로벌화, ICT화에 적합한 경제시스템은 영·미형의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라고 봤다. 이들은 규제 완화와 세계화의 추세 아래 북유럽과 같은 고부담을 강요하는 나라에서는 노동의욕을 잃거나 인재와 기업이 해외로 유출될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1990년대 초 북유럽은 복지국가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예측은 빗나갔다. 1990년대 초의 복지국가 위기와 2000년대 초의 ICT 버블경제 침체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난 이후 북유럽은 경제성장률, 양호한 고용률, 낮은 인플레이션율 등 여러 주요 경제지표에서 유럽 최상위권의 성적을 기록해왔다.
세계지적재산기구가 발표하는 세계혁신지수(Global Innovation Index, 2021)을 보면, 세계에서 가장 혁신국가로 1위가 스위스, 2위가 스웨덴, 3위가 미국이며, 핀란드, 덴마크도 각각 7위와 9위에 올라있다. 즉, 세계 혁신을 주도하는 두 그룹을 꼽으라면 미국과 북유럽이라고 할 수 있다.
북유럽은 미국의 애플, 구글, 페이스북처럼 독보적 지위의 유명한 ICT업체가 두드러지지 않지만, 리눅스, 스카이프, 스포티파이(이상 스웨덴), 로비오, 슈퍼셀(이상 핀란드)과 같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기술을 바탕으로 행정, 의료, 교육 분야를 비롯하여 정보통신기술(ICT)의 응용분야에서 높은 국제경쟁력을 갖고 있는 기업이 많다.
북유럽은 균형과 성장, 혁신을 어떻게 동시에 달성했는가
노벨경제학자인 스티글리츠는 '선도자와 추종자: 혁신경제학과 북유럽 모델의 시사점'(Stiglitz, 2014)이라는 논문에서, 오늘날과 같은 지식기반경제에서는 미국 모델보다 오히려 북유럽 모델이 우위에 있다고 한다. 급진적 혁신은 개인이나 기업이 부담하기에 위험이 커서, 이를 공공부문이 부담해 주는 북유럽식 모델이 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북유럽 국가는 △질 높은 숙련과 교육, △혁신을 촉진하기 위한 적극적인 공공 정책 △잘 설계된 안전망(급진적 혁신의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특히 실업보험은 근로자 고용을 쉽게 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에게 유리)을 갖췄다는 것이다.
최근에 경제지리학자들은 혁신을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이나 시장의 금전적 인센티브 보다 혁신에 유리한 총체적인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핀란드는 1990년대에 OECD 국가 중 가장 먼저 국가혁신체제(NIS: National Innovation Systems)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스웨덴도 2001년 VINNOVA(기술혁신청)을 설립하면서 혁신시스템(innovation system) 개념을 이른 시기부터 정책에 도입했다.
주목할 점은 북유럽이 국가혁신체제 정책을 도입할 때 처음부터 지역기반, 장소기반(place based) 혁신체제 구축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OECD는 이런 점에서 2008년 이후 북유럽국가의 선전은 헬싱키나 스톡홀름과 같은 수도권 대도시 외에 지방의 도시를 산업과 경제 발전 정책의 핵심 지역으로 선정 및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수도권과 대기업이 주도하고, 구상기능은 수도권에, 지방은 분공장 형태의 생산기지에 머무는 한국의 국가혁신체제가 가지는 한계점과 대조를 이룬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대표적인 클러스터 정책으로서 전문특화센터 구축전략(Centres of Expertise, 1994~2013)은 수도 헬싱키 이외에 8개 대도시권에 각각 전문특화분야와 민간협력체제를 구축하는 장소기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산업은 수도인 헬싱키(Helsinki)가, 에너지 기술은 바사(Vaasa), 헬스·바이오는 투루쿠(Turku), 건강 웰빙은 쿠오피아(Kuopio), 오울루(Oulu), 지능형 기계는 탐페레(Tampere), 나노 기술은 이위베스퀼레(Jyväskylä) 등이 맡는 식이며, 이 도시들의 특화발전과 도시 간 연계협력이 핀란드 국가 전체의 산업혁신과 신산업 창출을 견인하도록 했다.
스웨덴의 VINNOVA(기술혁신청)의 대표적 혁신 프로그램인 '강한 연구혁신환경(strong R&I milieus)' 프로그램도, 지역기반 혁신 정책의 사례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연구개발투자(R&D)보다는, 혁신(R&I)을 강조하고 혁신환경과 주체 간의 산학관(Triple Helix) 협력을 장려했다.
이 정책은 지역 간의 경쟁 공모제를 채택했는데, 혁신기반을 잘 갖춘 스톡홀름이 오히려 탈락하고, 비록 혁신자원은 부족하지만 산학관 협력 의지가 잘 갖춰진 변방이 먼저 선정되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런 배경으로 2000년대 이후 북유럽국가의 지역 간 격차는, 스톡홀름이나 헬싱키의 수도 집중이 일부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30여개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북유럽의 지역 간 격차가 낮은 이유는 잘 설계된 장소기반 혁신정책 이외에, 광범위한 복지 모델, 조율된 임금 교섭(coordinated wage bargaining) 및 국가의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명확한 목표 설정 덕분이다.
북유럽 지역발전정책은 효율적이라고 정평이 나 있다. 대부분의 국가 재정이 의료나 사회복지 등에 쓰이고, 혁신 및 지역산업발전을 위한 재원은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혁신정책 자체를 혁신'하여 철저히 효율성을 추구했던 덕분이었다.
선별적인 보조금이나 조세 혜택 등의 지원방식이 아닌 산업 인프라, 교육체제, 산학네트워크, 기업과 대학간 상호협력 등의 혁신환경 조정에 초점을 뒀다. 그리고 처음부터 글로벌 경쟁을 중시했다.
특히 지역발전의 축으로서 대학의 역할이 눈에 띈다. 1970년대~1980년대 대학의 지방분산과 신규 설립, 정부의 적극적 지원은 지방균형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핀란드의 북방 접경 지역인 오울루가 정보통신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도 오울루 대학과 같은 질 좋은 대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핀란드 교육부 장관을 했던 야아꼬 눔미넨(Jaako Numminen)은 '집 근처에 훌륭한 학교' 즉, 어디에 살든 대학교육의 평등한 기회를 보장해줌으로써, 어디서라도 필요한 인재를 구할 수 있었고, 지방도 과학과 학문적으로 폭넓은 국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으며, 정부 R&D투자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 그릇을 갖출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덕분에 노키아와 같은 대기업도 인재를 찾아 오울루, 탐페레와 같은 지방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고급 일자리를 만들었다.
2000년대 중반에 잘 알려진 핀란드의 대학통합(예를 들어 헬싱키공과대학, 헬싱키경제대학 그리고 헬싱키예술디자인 대학의 알토대학으로 통합)은 '개방형 혁신 플랫폼 (open innovation platform)' 시대에 다학제 융합형 신산업 창출을 선도하는 세계적 대학의 모델을 키워내려는 또 다른 시도이다.
▲ 핀란드 오울루대학 홈페이지
북유럽 모델의 시사점
북유럽과 같이 인구 500만(핀란드, 덴마크)~1000만(스웨덴)의 소국경제가 글로벌 경쟁에 맞서 지방분산과 균형발전을 중시한다면 장점보다 대가가 클 수 있다. 크루그만(P. Krugman)은 오늘날 세계에서 성장을 주도하는 동력은 대도시와 도시집적의 이점(외부효과)이라고 한다. 북유럽의 분산경제는 이런 효과를 누리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북유럽은 1990년대 후반 이후 2000년대를 통해 복지국가 위기와 대기업 의존체제를 극복하고 지식기반경제로의 원활하게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벤처기업들의 활발한 창업과 지역 간 고른 발전을 이룩한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현재 우리나라는 자동차, ICT라는 좁은 산업기반과 대기업에 의존하는 추격형(catch-up) 경제에서 혁신을 기반으로 한 탈 추격형(post catch-up)경제로 전환과 함께 분배와 지역균형을 동시에 달성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최근 'R&D 투자 역설', '지역산업진흥정책의 역설'이란 말이 종종 들린다. 전자는 한국 R&D 수준이 세계 최고이나 성과는 저조(특히 산학협력, 사업화, 유니콘 스타트 업 육성 등)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약 10조 원이 넘는 재원을 지역산업 육성에 지원하였으나, 변변한 산업 하나 창출하지 못하고 성과가 저조하다는 이야기다.
북유럽의 지역발전 경험 가운데, 특히 대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 인상깊다. 스웨덴 룬드(Lund) 대학의 에릭슨(Per Ericsson) 전 총장은 종전에는 교수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주로 '해달라'했지만, 현재는 대학이 기업과 지역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로 자세 변화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대학보다 산업육성에 더 초점을 둔 클러스터 정책을 그간 추구해왔다. 좋은 대학이 없으면 기업이 지역에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북유럽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진정한 생태계와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지역경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혁신정책과 대학정책을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할 시점이다.
박경 목원대학교 금융경제학과 명예교수/프레시안
비정규직이 불법에 맞선 '죄', 징역 5년
한 피고인은 최후 진술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했고, 다른 피고인은 죄값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 재판을 방청하던 누군가는 판사를 향해 “피고인들을 가두려면 본인을 대신 가두라”고 외치기도 했다. 마지막 가을비가 내리던 지난 11월 3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509호 형사 법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날 509호 법정에선 피고인 17명에 대한 두 번째 결심 공판이 열렸다. 결심 공판은 판결 선고 전 열리는 마지막 공판이다. 원래 10월19일이 마지막 공판이었는데, 검찰이 피고인들의 구형량을 변경하기로 해 이례적으로 결심 공판이 두 번 열리게 됐다.
이날 검찰은 피고인의 일부 죄명을 변경했다. 당초 ‘특수건조물침입’ 혐의를 적용했던 사건에는 ‘공동주거침입’ 혐의를, ‘공동주거침입’ 혐의를 적용했던 사건에는 ‘공동퇴거불응’으로 죄명을 변경했다. 죄명이 바뀌면서 일부 피고인들의 형량도 줄었다. 17명 피고인에 대한 검사 구형량 합계는 징역 21년 2개월. 1차 결심 공판과 비교하면 1년 4개월 줄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은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했던 걸 자인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11월 30일 김수억 씨 등 비정규직 17명이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벌인 집회, 시위 등에 최대 징역 5년의 중형을 구형한 검찰을 규탄했다.
불법 파견에 맞서 집회, 시위에 나선 죄…징역 5년
검찰이 무리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판사에게 피고인들의 죄값을 무겁게 요구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7명의 피고인들은 대체 어떤 잘못을 했기에 법정에 서게 된 걸까.
피고인 17명은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다. 기아차 비정규직 8명, 현대차 3명, 한국GM 2명, 아사히 글라스 2명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오랜 기간 불법 파견 시정을 요구하며 투쟁해왔다는 점이다. 파견법(파견 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제조업 직접 공정에는 파견 근로자를 써서는 안 된다. 그 외 공정에도 파견 근로자를 2년 이상 쓸 경우에는 직접 고용해야 한다. 원청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는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게 법의 취지다.
현대 기아차는 2004년, 한국GM은 2005년, 아사히 글라스는 2017년에 이미 고용노동부와 법원으로부터 불법 파견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임금은 낮고 처우는 열악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불법적으로 파견받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날 검찰은 불법 파견을 저지른 회사가 아닌 노동자들에게 죄를 물었다. 이유는 뭘까.
검찰로부터 징역 5년을 구형받은 김수억 씨가 현대 기아차의 불법 파견 소송 과정에 대해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현대 기아차의 불법 파견 여부를 따지는 소송에서 노동자들은 현재까지 32차례나 승소했다.
검찰로부터 가장 무거운 구형량을 받은 사람은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김수억 씨. 그는 전 금속노조 기아차 비정규직지회장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 모임인 '비정규직 이제그만'의 공동 소집권자(공동대표 격)이기도 하다. 검찰은 이날 그에게 징역 5년형을 구형했다. 첫번째 결심 공판에서 구형한 5년 6개월에서 6개월을 깎아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현대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18년 9월,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불법 파견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고용노동청 점거 농성을 벌였다. 검찰은 이 농성에 당초 '특수건조물침입'죄를 적용했다가 '공동주거침입'으로 죄명을 변경했다.
김수억 씨의 죄명은 공동주거침입, 공동퇴거불응 등 다양하지만 모두 불법 집회,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것이다. 그는 2018년부터 2019년 초까지 여러 차례 문재인 정부를 향해 불법 파견 문제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 4층 복도나 대검찰청 민원실 앞에서 농성을 하고, 청와대 행진 도중 차로를 막았다는 혐의로 2019년 7월 재판에 넘겨졌다. 김 씨의 혐의 중에는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재로 사망한 고 김용균 씨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다 기소된 것도 있다.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김 씨와 함께 농성하거나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시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미 법원이 불법 파견이라고 선고한 사용자들의 범죄는 거의 처벌받지도 않았고 불법 상태가 바로잡히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문제를 바로 잡아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던 노동자들에게만 무거운 죄값이 부여된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최후 진술 “우리를 가둘 거면 재벌도 함께 가둬라”
이날 결심 공판이 열린 법정은 17명 피고인들만으로 자리가 꽉 찼다. 얼마 남지 않은 방청석 맨 뒷자리에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앉아 재판을 지켜봤다. 이날 김수억 씨를 포함해 비정규직 노동자 4명이 최후 진술을 했다. 최후 진술에는 이들이 왜 법을 어기면서까지 집회와 시위를 해야했는지 그 이유가 담겨있다.
오늘 검찰은 비정규직 노동자 17명 중 단 한 명도 빼지 않고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떠한 중죄를 저지른 것입니까.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청년 노동자 김용균이 회사의 책임으로 죽어갔을 때, 그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매일 2천 명이 넘게 일하다 죽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멈추기 위해 중대재해기업처벌특별법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2004년과 2005년 노동부는 현대기아차, 한국지엠 마찬가지로 아사히글라스 역시 고용노동부 스스로 모두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습니다. 특히 현대 기아차는 16년의 세월 동안 법원이 32번이나 불법 파견이라고 판정했습니다. 그러나 16년의 그 긴 시간 동안 고용노동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기소는커녕 조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21년에 이르는 이 죄를 그리고 이러한 구형을 우리가 달게 받아서 더 이상의 불법 파견 범죄가 없어질 수 있다면,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로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불법 파견 범죄자인 정몽구, 정의선 회장, 한국GM의 카허카젬 회장도 검찰이 기소하고 구속시키고 그 죄를 달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상식과 정의가 아니겠습니까. 김수억 / 전 금속노조 기아차 비정규직지회장 (징역 5년 구형)
한국GM도 2005년부터 고용노동부터 불법 판결 판정을 받았고요. 16년이 지난 지금도 공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불법 파견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수천 명은 그 기간 동안 자신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또는 자신이 정당하게 받아가야 할 이익을 그들에게 다 뺏겨가면서 희생당해왔고, 지금도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통해서 저희들은 하루하루 너무나도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거꾸로 이렇게 재판장에 서야 되는 현실,지금도 해고로 고통받고 있는데 누구 하나 알아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 진짜로 바로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황호인 / 한국지엠 부평공장 해고 노동자 (징역 1년 구형)
우리는 행동하면서 조금씩 스스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에서 죽어간 노동자나 가족들은 여전히 스스로 고통을 감내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위험에 노출돼서 함께 죽어간 동료들을 보고 슬퍼만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동하면서 저희는 조금씩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경찰 조사와 검찰 조사 그리고 지금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 우리가 왜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고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이유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거리에서 외칠 수밖에 없었는지 헤아려 주십시오 이태의 /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징역 10개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한 말이 있습니다. 앞장서서 뭘 하지 말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 피고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했던 사람들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월차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고 머리도 기르지 못했습니다. 파마도 하지 못했습니다. 염색을 하면 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너희 아이만 아프냐며 회사에 일할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었고, 부당함에 맞섰습니다. 제 구형량을 듣고 중학교 1학년 아들이 '도대체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정민기 / 현대차 울산 비정규직 노동자(징역 1년)
이렇게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이 모두 끝났다. 판사가 재판을 마무리 지으려던 찰나, 방청석 맨 뒤에 앉아있던 고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씨가 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방청석 맨 앞자리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판사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여기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싸웠던 것은 용균이의 억울한 죽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비정규직들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싸운 것이었고 현재도 죽을 수밖에 없는,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모두 함께 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검찰 구형을 받게 된 겁니다. 이 사람들을 감옥에 넣으려면 저도 같이 넣어 주십시오.” 김미숙 / 고 김용균 씨 어머니(김용균 재단 이사장)
법정은 잠시 숙연해졌다. 판사는 숙고하겠다며 선고기일을 넉넉히 잡았다. 비정규직 노동자 17명에 대한 1심 선고는 내년 2월 9일 내려진다. 법정을 나오는 노동자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오전 내내 내리던 비도 어느새 그쳐있었다. 과연 법원은 십 수년간 불법에 맞섰던 이들의 투쟁에 얼만큼의 죄를 물을까.
뉴스타파 홍여진
박근혜 사면에 “文정부, 대선 앞두고 조중동에 무릎 꿇었나”
민주언론시민연합, 24일 성명 내고 문 대통령 강력 성토
“반성이 전제되지 않은 사면, 대통령의 불법적 권한 행사”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문재인 대통령의 박근혜씨 사면 결정을 두고 “화합과 통합, 난제극복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가당치 않은 이유”라면서 “문 대통령은 박근혜씨가 국민들로부터 탄핵을 당하고 무려 22년의 형량을 선고받은 이유를 잊었단 말인가”라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조선‧중앙‧동아일보‧TV조선‧채널A‧MBN 등 보수언론과 적폐세력들의 공세에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민언련은 24일 성명을 내고 “박근혜씨는 재임 기간 대통령의 책임을 저버리고, 최순실 등 국정농단 세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권력을 사유화했다.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를 상납받고, 새누리당 공천에 개입하는 등 독재정권에서나 볼 수 있던 불법행위를 저질러 역사적, 사법적 단죄를 받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국민이 나서지 않았다면 박근혜 씨는 임기를 누리고 지금까지 국정농단 세력과 호의호식하며 권력을 누렸을 것이다. 그런 박근혜 씨를 국민통합‧난제극복을 들어 사면하겠다고 하니 국민들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라고 밝혔다.
민언련은 “당장 박근혜 씨 사면은 ‘국민분열’을 불러오고 있다”면서 “문재인 정부는 촛불 시민을 배신하고, 자칭 ‘촛불 정부’마저 스스로 부정한 꼴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박근혜 씨는 국정농단에 대해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최소한 사면의 명분을 찾으려면 당사자의 진정한 사죄가 전제돼야 하지 않는가”라고 되물으며 “반성 없는 중대 범죄자에 대한 사면은 특혜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2016년 11월21일 문재인 대통령이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이 같은 대통령의 ‘문제적 결정’은 보수언론의 지속적인 프레임 공세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게 민언련의 입장으로 보인다. 조중동은 줄곧 전직 대통령의 수감상태를 ‘국격 문제’ 또는 ‘혼란과 분열’ 등으로 묘사하고 사면은 ‘통합’으로 묘사해왔다. 조선일보는 지난 1월2일자 사설에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평가와 법적 처벌은 충분히 내려졌다. 수감이 더 이상 장기화되는 것에 무슨 의미를 둘 수 있는지를 국격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가 됐다”며 연초부터 특별사면을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 사설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에 사과와 반성이라는 전제를 다는 것도 구차하다. 전직 대통령은 수감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치적 굴욕을 겪었다”고 주장한 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은 국민통합을 향한 대통령의 의지에 달렸다”며 문 대통령을 압박했다.
지난 1월14일 대법원이 박근혜씨의 선고를 확정하자 중앙일보는 15일자 사설에서 “박 전 대통령의 형이 최종 결정됐다는 건 그가 사면 대상이 됐다는 의미”라면서 “24년 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때처럼 두 전직 대통령의 동시 수감이 되풀이되자 국격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며 역시 사면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 같은 프레임은 사실상 1년 내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민언련은 “이들 언론은 박근혜 탄핵이 부당하다는 주장부터 형 집행정지, 석방 등을 노골적으로 부추겨왔다. 일부 종편엔 ‘박근혜 석방하라’는 출연자가 계속 나왔다. 보수언론은 올해 1월 박근혜 씨가 대법원 두 번째 판결에서 징역 20년을 확정받자 ‘사면 쟁점화’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주장했다. 또 “지난 12월18일 신년 특별사면이 언급될 때도 이들 보수언론은 일제히 박근혜 씨 건강악화설을 부각하고, 만기출소 후 나이를 비롯해 출간 예정인 ‘옥중서신’을 상세히 소개하는 등 ‘박근혜 사면론’에 불을 지폈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내렸다. ‘분노’는 대통령을 향할 수밖에 없다. 민언련은 “외신도 박근혜 씨 사면을 주요하게 보도하고 있다. 내년 대선을 겨냥한 조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전하면서 “사면이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반성하는 자들을 위해 대통령만이 행사할 수 있는 초법적 권한이다. 전제는 반성이다. 하지만 반성이 전제되지 않은 사면은 대통령의 ‘불법적’인 권한 행사에 불과하다”며 문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
대통령님, 사면복권해줘서 진심으로 열 받습니다
[송경동 기고] 박근혜 사면복권의 들러리... 적폐청산하랬더니 적폐복권
근혜 사면을 위한 명분이나 들러리로 사면복권 대상자가 된다는 건 부끄럽고 민망하며, 열 받는 일이다. 늘 도와주셨던 변호사님들께 반납하고 거부할 수 있는지 자문을 받아보려 한다. 어제(23일) 저녁 늦게 박근혜 사면 얘기가 청와대를 중심으로 다시 나온다는 기사를 보면서도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했다. 최소한의 양심과 눈치, 민심에 대한 예의는 있겠지 했다.
물론 노회한 김종인이 얘기한 것처럼 크게 의미 있는 일도 아니고, 선거에 별 영향도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미 박근혜로 대표되는 불공정과 불의, 특권 수구 보수세력, 반 노동, 반 민주, 반 민생, 반 통일 세력을 이 정부는 촛불항쟁의 염원을 적당히 형해화 시키며 지난 4년여간 정말 혼신을 다해 '사면복권'시켜 놨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많은 '박근혜들'이 이미 사면복권 되어 활개를 치고 있기에 마지막 종결점을 찍어 수구 보수 반민주 공안세력의 부활을 확정하는데 별 부담도 없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박근혜의, 박근혜들의 어떤 권리를 복권시켜 다시 활개치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로써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었다던 시민 촛불항쟁은 다시 철저히 농락당하며 희화화 되고 말았다. 박근혜 사면복권을 정점으로 적폐청산의 요구는 결국 적폐복권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노동 존중? 가당찮다
개인적으로도 하나도 기쁘거나 감개무량하지 않다. 2011년 희망버스의 복권은 나와 몇 명의 사면복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시 300여 명의 이름없는 사법탄압 피해자들이 있었다. 그 분들의 복권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 한 나의 복권은 도리어 희망버스 운동에 대한 또 다른 왜곡과 폄훼이자, 모독이다.
더더욱 2011년 희망버스를 이끌었던 해고자 김진숙 동지에 대한 명예회복과 복직을 이 정부는 끝내 거부했다.
신부님, 목사님 등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48일간의 집단 단식을 하며 호소하고, 암 투병을 거부한 채 김진숙 지도위원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걷기행진에 나서고, 심지어 국회 환노위와 부산 시의회 여야 의원 전원의 복직촉구 결의안이 나오고, 국가인권위원장 등이 복직 촉구에 나섰지만 이 정부와 청와대는 이동걸 산업은행장과 함께 끝까지 김진숙 동지의 복직을 막아섰다.
그러면서 2011년 희망버스 운동을 박근혜 사면복권의 들러리로나마 써먹으려 하다니 미안하지만 하나도 고맙지 않고, 도리어 분노가 치민다.
노동 존중을 위해서라는 멘트도 가당찮다. 얼마 전에도 나는 서울중앙지법 법정 앞을 서성거려야 했다. 고 김용균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건 진상규명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비정규직 악법 폐지와 불법 파견 대법원 판결 이행 등을 요구하며 청와대와 국회와 대검찰청 면담에 나섰다는 이유로, 김수억 등을 포함한 17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22년 6개월의 구형이 언도된 현장이었다(관련기사: 김수억과 그의 친구들을 위한 헌사 http://omn.kr/1w5p0).
이미 끝나버린 집행유예에 대한 뒤늦은 복권은 필요없다. 그것이 박근혜 석방을 위한 구색 맞추기용이라면 더더욱 치욕스럽다. 지금 필요한 것은 김수억을 비롯한 17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기소 철회와 사과다. 조삼모사의 짝퉁 비정규직 양산을 멈추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공약부터 지키는 일이며, 비정규직 양산법이나 다름없는 비정규 악법들 폐지에 나서는 게 그나마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일일 것이다.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 여전히 길거리에
문화예술인 한 놈쯤 끼어 넣어두는 게 필요하다는 얕은 속셈도 사양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원·청와대·문체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들이 불법적으로 공모해 2만여 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들을 블랙리스트로 사찰하고 배제하고 탄압했다.
헌법에 명기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등을 부정한 희대의 국가범죄로 그 하나만으로도 박근혜 정부는 파면감이었다. 파면 사유에 블랙리스트 사건 실행이 인용되지 않아 현재 문화예술인들이 헌법소원을 내놓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정부는 미안하지만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지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는 민간 예술인들과 조사관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역 없이 투명한 진상규명을 이뤄내지 못했다. 한시적이고 권한 없는 진상조사위원회는 이명박·박근혜 시절 청와대와 국정원, 문체부 상층 관료들에 대해서는 접근조차 힘들었다.
그런 틈을 타고 핵심 연루자들인 송수근 전 문체부 차관은 계원예술대 총장으로 가고, 안호상 전 국립극장장은 다시 오세훈과 손잡고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되어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들의 존엄을 짓밟고 있다(송수근 전 차관은 '블랙리스트를 본 적도 없고, 관리를 총괄한 바 없다'라고, 안호상 전 국립극장장은 '이미 소명이 끝난 일로 블랙리스트 문제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오세훈이나 계원예술대 이사회를 뭐라 할 일도 아니다. 현 정부는 블랙리스트 피해 규명을 위해 문화예술인들이 제기한 민사법정에서도 1심에서 패소하자 문화예술인들을 상대로 항소를 하며 블랙리스트 최소 진상마저 인정하지 않고 있다(2017가합200570).
▲ 문화예술인 대행진 "블랙리스트 블랙라스트" 적폐청산과 블랙리스트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2018문화예술인 대행진 - 블랙리스트 블랙라스트(Blacklist Blacklast)’가 3일 오후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주관으로 여의도 국회앞을 출발해 청와대앞까지 열렸다. 광주민예총, 민족미술인협회, 터울림 등 131개 단체와 문화예술인 2,166명 개인은 선언문을 통해 ‘블랙리스트 불법공모 131명 책임규명 권고안 즉각 이행’ ‘진상조사 및 책임규명이행 축소, 왜곡, 방해, 셀프 면책 책임자 문책’ ‘국회의 블랙리스트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2018.11.3ⓒ 권우성
도대체 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인지, 박근혜 정부인지 알 수가 없다. 보다 못한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거리로 나서서 2018년 11월 3일 당시 민주당 당대표(이해찬) 항의 면담 과정에서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특별법TF' 구성 약속을 재차 받아냈지만 몇 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정부의 이런 비호 속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 세력들은 기지개를 켜는 것을 넘어서 적반하장으로 문제 제기한 예술인을 역고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연극인인 이양구 연출에게 행한 일이다.
24일 금요일 그래서 다시 또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거리로 나서야 한다. 박근혜 퇴진운동 당시 광화문 광장에 '박근혜퇴진 광화문 캠핑촌'을 꾸리고 근 다섯 달을 노숙 농성해야 했던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여전히 이렇게 길거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기뻐할 수 있을까. 나 혼자 복권시켜 주었다고 감사할 수 있을까. 도리어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그 알량하고 기만적인 복권은 치욕이니 다시 가져가길 바란다. 김진숙이나 복직시키고, 비정규 악법이나 폐지시키고, 종전 선언에나 나서고, 중대재해기업처벌 시행령이나 제대도 제정하고, 차별금지법 제정하고, 내 친구들인 비정규직 노동자 17명에게 언도한 22년 6개월 구형이나 취소하길 바란다.
할 일이 많아 죽겠는데, 어쩔 수 없이 앉아 이런 글이나 쓰게 만들다니, 선물이란 것도 누가 언제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주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박근혜 사면복권에 들러리나 치장물이라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내가 밴댕이 속인 게 아니라, 당신이, 당신 주변의 속들이 썩어 있는 것이다. 그 구린내가 만천하를 오염시키며 진즉 없어졌어야 할 시대의 구더기들이나 다시 키워주고 있으니 돌아보라. 메두사의 머리처럼 한 몸으로 얽혀 있는 그 흉측한 몰골을.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