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2017 추석 2 -금곡리

이성근 2017. 10. 6. 21:03


추석 이튿날 큰아들이 휴가 나왔다. 입대 후 세번째, 우리 부부는  너무 자주 나오는 것 아니냐며 농담 삼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아들의 등장이 기뻤다. 동생이 형을 마중나가 저 형이 들고 온 가방을 받아 들고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오던 길로 배가 고프다며 밥을 찾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를 넣은 라면을 끓여주니 밥을 한가득  말아서는 게눈 감추듯 뚝딱 먹는다.  마침 일을 마치고 귀가한 아내의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부모의 마음이다. 

간만에 가족 전체가 한차에 타고 김해로 간다.  안그래도 작은 차가 더 작은 것 같다. 부쩍 커버린 두 아들이 앞 뒤로 타니 꽉 찬 느낌이다. 그래도 좋았다.  

결혼 초기에는 차가 없어 부전역에서 기차를 이용했다. 조금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기차를 타고 오가는 맛도 있었다. 그로부터 이십 여년이 흘렀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큰 아들 태어 난 이후 큰처남 작은처남 차례로 결혼을 하면서 처가집은 명절이면 아들 딸 내외에 장인 장모의 형제 친인척이 들끓었다.  

처가집옆을 스치던 기차길은 KTX의 등장과 신항선의 개설과 복선화로 작약산 쪽으로 150m 가량 더 들어 갔다. 모정고개를 관통하는 터널이 새로 둟렸다. 기존의 폐선철로를 이용하여 생림 마사에는 낙동강 레일 파크라는 것이 조성되어 있다.  여기를 두고 청도까지 가서 헛걸음하고 왔으니ㅡㅡ 

기존에 있던 철둑길과 구릉은 평지가 됐다. 

그리고 장인의 문전옥답이라 할 수 있는 집앞 논은 반달농장 사업으로 더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다. 장인이 힘들어서 농사를 못짓겠다고 선언한 배후에 있던  행정조치가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논으로들어가는 출구까지 펜스로 막아 버렸다.

논은 1년도 안되는 시간, 귀화식물인 망초류가 점령해버렸다. 

비가 예고된 하늘 아래

거미줄을 공우하는 무당거미  떼

처가집 앞 남아 있는 구릉의 흔적, 그 앞에  삼랑진에서 낙동강 건너오는 58번 국도에서 갈라져 나온 금곡로가 지난다.   총거리는 마사에서 모정고개를 넘어 한림 60번 지방도와 만나는 곳 까지의 약 6.4km 거리다. 

언제나 그렇듯 습관처럼 일대를 산책한다. 3km남짓 한 거리지만 간만의 여유와 평화를 만끽한다. 

시전마을 입구 금곡교 근처에서 바라 본 모정마을과 한림 배구장 

어둠 내린 화포천이 낙동강을 향해 마지막 흐름을 다하는 구간이다. 

그 시각 고속열차가 지나간다. 

모정교, 아내가 나와 연애하던 시절 차에서 내려 집으로 가던 다리다.  

모정교에서 바라 본 금곡교 쪽 야경 

처가집 마당에서 건너다본 한림면쪽의 불빛 산중턱의 열지어선 불빛의 출처는 김해 상록골프장이다. 아내의 일 때믄에 올해는 처가집 방문이 하루 늦게 이루어 졌고, 처남들은 다들 떠난 다음이었다.  큰아들도 부산으로 가고 장인과 소주 한잔을 나누어 마시고 일찍 잠들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새벽 

산책에 나섰다 대숲에 앞에서멈추었다. 참새떼가 머물고 깃드는 곳이다. 출근을 준비하는 참새떼의 지저귐이 와글거리는 수준이다, 

어디선가 꽃향이 있어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금목서였다. 

모정 마을은 제법 크다. 마을은 한림면 북쪽 끝 낙동강과 인접한 마을로 총 92세대 17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에도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69명으로 타 지역보다 고령화진행속도가  빠른 편이다. 

마을을 돌면 석류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도 과일로 치면 감으로 유명한 진영의 영향 때문인지 감나무가 많다. 간혹 사과와 배도 보인다.

댕댕이 덩굴

고려시대부터  역(驛)의 기능을 해 왔다는 이웃마을인  금곡리처럼 수백년 된  노거수는 없지만 흉고 둘레 2m 급의 소나무를 통해 마을의 역사를 짐작한다.

모정마을의 지명 유래를 찾다 보니 몇 가지  설이 있다.  김해뉴스 13.6.14일자  김해의 뿌리 자연마을을 찾아서 중 모정마을을 소개하는 글이 있어 일부를 퍼 왔다.

... “모정고개에서 내려다보면 낮은 산봉우리 두 개가 완만히 흘러 내려 만나는 곳에 아늑하게 들어선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은 화포천과 그 너머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우아하게 날개를 편 나비의 몸통 중심에 마을이 들어선 형상이다. 그래서 이 마을은'나비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나비의 왼쪽날개 하나는 마을 입구의 낮은 능선으로 흘러와 이웃한 정촌마을과 이어진 또 다른 낮은 산봉우리와 만나 학 모양을 이룬다. 마을 입구가 학의 머리와 목에 자리 잡았다. 모정마을 뒷산이 학의 오른쪽 날개, 정촌마을 뒷산이 학의 왼쪽 날개이다. 그래서 붙여진 또 하나의 이름이 '학마을'이다. 마을 뒷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대포산이라고 부른다.

 

모정마을의 이름인 '모정'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다. "가락국 2대 거등왕과 혼인하기 위해 왕비가 배를 타고 와서 처음 내린 곳이 이 마을입니다. 그 왕비의 이름이 '모정'이라는 설이 있죠." 허경회(64) 이장의 설명이다. 또 하나의 유래는 조선 인조 때부터 내려온다고 그는 덧붙였다. "인조 때 증이조판서를 지낸 해은 노한석(1622~1702) 공이 명나라 멸망과 청나라 건국 이후 마을로 옮겨 와 살았습니다.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을 길 없음을 분노한 해은공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마다했죠. 마을 입구에 명나라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정자를 짓고,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기린다는 의미로 마을 이름을 모정(慕禎)이라 했다는 유래가 전해져옵니다." 해은공이 지은 정자는 그의 호를 따서 해은정이라 한다. 해은정 안에 있는 비문은 후일 청나라의 눈을 피해 모정(慕貞)으로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그외 이 마을에 있던 최씨 여인이 끝가지 정절을 지키다 죽었는데, 그녀의 "정절을 흠모한다"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변화 속도가 빠르다. 지난 2002년 수해 이후 기와집나 슬레트 지붕 중심에서 네모 반듯한 도시형 주택들이 들어 서고 있다.  

       사진출처: http://blog.daum.net/kjs6565/15984587

1970년대 모정마을 전경이다. 첫번째 사진이 모정마을 입구인듯 하고 정면에서 두번째 집이 처가집으로 추정된다.   고개만디 로 불렸다는데

고구마 꽃이 지천이다.  [Sweet potato ]고구마의 어원은 쓰시마섬의 '코코이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코’는 ‘효행(孝行)’의 일본식 발음이고 ‘이모(いも)’는 마·토란·감자·고구마 따위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고구마로 부모를 봉양했다는 ‘고코이모’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고구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일본말 고귀위마(古貴爲麻)에서 유래됐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 고구마는 온대에서는 일년생이지만 열대에서는 숙근성(宿根性)으로 분류된다. 원산지는 멕시코에서 남아메리카 북부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되며 원종(原種)도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약 2000년 전부터 중·남아메리카에서 재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63(현종 4)에 표착하였던 사람이 그 곳에서 고구마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작물을 재배하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고 보고한 기록이 있다.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후반부터이다.

 

운석유고(雲石遺稿)에서는 1763년 조엄(趙曮)이 일본에 통신사로 가던 중 대마도(對馬島)에 들러 그 종자를 얻어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삼아 심게 한 것이 처음이다.


원산지인 중남미에서는 기온이 높고 일조량이 많기 때문에 꽃이 피나,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꽃을 피우기가 어려워 춘원 이광수의 회고록에 100년에 한번 볼수 있는 꽃이라고 적었다. 실제 고구마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 부터 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만큼 한반도의 기후가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산물이다.


마을앞 들 가운데 들어서고 있는 양옥집들

간만에 논두렁 길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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