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통영 1박2일 박경리선생과 장사도를 만나다 (내사랑 부산운동추진협 운영위 워크숍)

이성근 2017. 7. 1. 23:11


통영은 얼마나 변했을까.  지나가다 오가며 통영을 스치면서 당일치기가 많은 반면  1박은 드물다.

간만에 통영에서 1박의 기회가 생겼다.  내사랑부산운동추진협의회에서 마련한 운영위원회 워크숍 참가 때문이다.  비소식이 있었다.

거가대교를 이용해서 거제를 관통하는 58번 국도와 1018번 지방도를 이용했다.  2011년 부산경남지역 대학생 국토기행 코스를 역으로 오는 코스였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남강 > 진주 > 고성 > 통영 > 거제 >가덕 >부산의 500여 km 거리를 16박 17일 걸었다.  태풍이 아니었다면 사흘 정도 더 나갈 일정이었지만 안전사고를 이유로 코스를 변경했었다. 아무튼 그때 통영에서 2박. 거제에서 2박의 일정을 가진 바 있다. 여기에 비공식 답사 일정까지 합하면 아마 그때가 가장 많이 통영에 머문해일듯하다. 차창으로 그때 오르막길에 힘겨워 하던 참가자들이 눈에 선했다.  

볼락 매운탕을 점심으로 하고  전혁림 미술관으로 향했다.

전시관은 미룩산 자락 용화사 가는 길목에 있다. 1975년부터 화가가 거주하던 집을 헐고 만들었다.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잘 꾸며지 있는 80(1~3) 규모의 미술관은 지난 2003년 개관했고, 그의 아들이자 화가 전영근의 그림도 전시되고 있다. 3층 전면의 벽은 1992년 작품 ()을 타일 조합으로 재구성한 대형 벽화로 꾸며져 있다 안과 밖에 전시장이다.


전혁림(全爀林) 화가에 대해서는 생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림보는 눈이 낮은데다 그의 그림에 내 기호와는 맞지 않아서일 것이다. 해서 통영에 갈 일이 있더라도 일부러 찾지는 않았다. 그는 1915년 통영서 태어나 1938년 부산미술전에 입선하면서 신진화가로 주목받았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화가는 고향 통영에서보다 부산에서 더 많은 작품 활동을 한 것 같다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은 1977년이었고, 이후 타계하기 까지 2010년까지 작품활동을 꾸준히 했다.


통영항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그만의 독창적 필치로 한국 비구상 회화의 시원으로 색체의 마술사또는 한국의 피카소로 불렸다는 것이다. ‘보수적 성향을 가진 지방 작가들 사이에서 전혁림은 거의 유일하게 현대 미술의 전위적(前衛的) 조형 방법으로서 전통을 표현하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현재 부산시청에 그가 그린 대작(18x27m) 한국의 환상(1999)이 걸려있다.


젊은날의 전혁림 화가


다음 코스는 소설가 박경리기념관이었다.  산양읍 신전리에 있다.

비가 구죽구죽 내리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비를 탓하지 않았다.  반드시 와야 할 비였기 때문이다.  나 다니는데 불편하지만  모두의 관심은  이 정도비로  해갈이 될까 였다.  어떨 때는  비님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기념관 앞 차도에 kill 당한 능구렁이 한 마리  찬찬히 살피니 갓길 쪽이었다. 일부러 뭉개버린 듯 했다.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야행성인 이놈은 대체 어쩌다 이런 한길까지 나와 이 지경으로 당해야 했는지 ...

박경리기념관은 2010년 통영시가 선생의 문학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건립했다.  당시 시장은 진의장씨로  기념관을 열며 그가 남겼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께서는 " 고향이 그립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고향은 삶의 기초다. 특히, 문학하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밑천이다"  라고 했던 말을 언급하며 기념관 개관에 인사말을 남겼다.  그리고 끝말에 '모든 이들이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흙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시간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곁들였다,  내가 일고있는 진시장 다운 표현이다.  

건물은 2층 규모에  지하 1층은 사무공간으로 지상부 1층은 전시공간으로 나누었다. 소박하지만 잘 꾸며져 있다.  너무 과한 걸 싫어했던 선생의 평소 생각을 반영한듯 했다.  

기념관 야외는 묘소까지 이어져 박경리 공원으로 기능한다.

살면서 존경하는 문인을 몇 분 꼽자면 소설가로서 박경리선생 그리고  요산 김정한 선생에 더하여 김남주시인과 김수영시인 등이다.   김수영시인을 빼고 거명한 문인 세분은 살아 생전 존경의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던 분이다.  다만 해남 출신의 김남주시인은 조금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중에서 박경리선생의 경우 환경운동연합과 인연을 맺으며 직접적으로 알게 된 분이기에 그 기억은 남다르다.   1993년 전국에서 활동하던 환경단체가 하나의 조직을 만들 대 선생이 끼꺼이 운동에 동참해주셨다.  선생은 태어나서 한번도 직책을 맡지 않으셨지만 공동대표직을 부탁드렸을 때 "이것만은 거절하기 힘들다" 라며 수락했다.  당시 전국 공동기관지 '금수강산'을 편집했던 나는 선생의 동참이 무엇보다 좋았다.  우리 당대에 저런 분을 모신다는 게 개인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기댈 수 있는 큰  언덕을 얻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평소 환경과 농업문제에 관심이 높았다. 해서 이 분야에서는 정부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기도했다.  그리고 직접 실천했다.




한때 노벨문학상추천과 관련 선생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예컨데 "작가 입장에서 보면 모국어로 글을 써야 하는데, 작품이 영어나 불어로 번역되어 읽혀지는 정도를 보고 노벨문학상을 거론하고 있으니 작가로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과연 이땅의 작가들 가운데 누가 이런 말을 했든가. 그래서 선생을 더더욱 존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백조의 노래 중-

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잘 꾸며 놨다. 


무덤 주위에 그 어떤 것도 없다. 

선생은 죽음이 다가왔을 때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주변에서 수술과 항암치료를 권했지만 기대지 않았다.  82세였다.

선생의 묘소에서 내려다 본 통영바다. 비안개로 바다를 볼 수 없었지만 나 역시 족했다.

선생은 이런 말도 했다 "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과연 고통스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고 글로서 그 아픔을 승화시켰다.  나 또한  때로 물질적 유혹이나 그 욕구에 목말라 하고 푸념하기도 한다만  참 쉬운 일은 아니다.  

묘소 앞에 있는 홍단풍이 오늘따라 더욱 붉다. 아 위대함이여  한 사람의 생이여

기념관 옆 길 낮달맞이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숙소로 가는 길

통영 해안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놈의 길 바람을 되 짚어 본다.  보여주고 싶었겠지. 통영 바다와 구비구비 하지만 큰 오점으로 남았다.  나도 한때 길에서 있었고 한국길연합이란 것도 만드는데 일조하긴 했지만  단언컨데 생활의 길은 아니었다.  길 바람 끝에 깨어지면 나타난 길이다.  해안수제선의 완충지대, 예컨데 해양과 육상 전이지대가 도로개설로 깨진 것이다.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만약 폭 4m 도로가 아닌 사람 한 명 오가는 오솔길 정도였다면 어땟을까.  그러면서 저 국제음악당이 위한다면  ... 안타까웠다.

시간이 남아 일대를 산보했다.   예상했던 대로 였다.  

추진협의회가 마련한 특강 지속가능개발목표와 시민사회의 역할을 듣기 위해 숙소 앞 별관으로 향한다.  준비주최는 이 장소도 가까스로 구했다고 했다.  단체나 기관들의이용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강사는 송진호 부산ymca 사무총장이다. 사전에 보내어져 온 원고를 보고 들었던 생각은  반갑고소중한 것이다. 또 송총장의 부산 진출 또한 부산 시민사회에게는 큰 기회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본격 강의 직전 DEVELOPMENT에 대해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발전과 개발, 그리고  지속 가능과 지탱 가능에 대한 해석과 의미의 부여, 제대로 관통했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역사회 내에서 이 주제를 자기 사업화 하는 단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안이라면 단체 마다 분야별 의제 정도는 관여하고 있지만 그 깊이는 낮다고 판단한다.  나아가 지자체는 ?   아직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자문해 본다.  1992년 리우 지구정상회의 이후 지금껏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있든가.  어처구니 없게도  이후 리우 10 남아공대회를  조직하면서도 정작 서류 문제로 인천공항에서 혼자 돌아와야 했던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까지 되살아 났다.  그리고 다시 20년이 흐르고  유사한 회의가 유엔을 중심으로 펼쳐졌지만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SDGs)의 구속력에 대해서는  늘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멀리갈 것도 없다. 2015년 어렵사리 합의했던 파리기후협정에서 얼마전 탈퇴를 선언했던  미국 트럼프를 본다면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참여했던 주거와 지속가능한 도시 발전을 다루는  유엔인간정주회의 UN Habitat 3 회의 역시 그런 평가를 내린 바 있다.   하지만 가야할 길이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송총장의 이번 특강은 대단히 의미있는 강의였다.  하지만  그 강의 주제가 이어진 술자리의 주제가 도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고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거나  비 오고 모처럼 모였으니 자연 술이 지배하기 마련이다.

통영지역 활동가들이 초청되었다.

알고보니  이래저래 아주 가차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이른바 족보를 따라가 보니  절친의 후배이기도 했고, 한때는 밤새 더불어 술을 마셨던 사람들이었건만  생활 토대가 다름에서 오는 단절이 그런 기억조차 까마득히 잊게 했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다 자리를 옮겨야만 했던 푸른통영21

추진협의회의 윤미숙 국장 이야기도 자연 등장했다.  통영거제 환경련 출신인 윤이 이곳으로 오면서 통영의 변화가 일어 났다고하면 너무 띄워 주는 것일까 . 하지만 사실이다.   지금의 동피랑 서피랑은 윤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2007년부터 화석 에너지 제로인 에코아일랜드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도 윤이 중심이었다.

 

그녀가  심혈을 기울였던 그 섬, 48가구 80여 명이 사는  작은 섬 연대도는 세계에서도 특별한 섬이 되었다. 태양광 발전소가 마을 전기 100%를 공급한다. 마을회관과 경로당은 첨단 단열 공법으로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한 패시브 하우스(pas- sive house). 폐교를 리모델링해 에코 체험센터를 세웠다. 주민들은 꽃밭을 가꾸고 할매공방을 만들었다. 할매들의 호미질을 눈여겨본 윤씨의 작품이다. 동피랑 벽화마을과 연대도 에코아일랜드는 2014년 유네스코 지속가능발전교육(ESD) 공식 프로젝트 인증을 받았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 지역 브랜드 대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욕지 자부랑개 마을 살리기, 강구안 푸른골목 만들기 등 윤씨가 실무를 도맡다시피 한 마을이 많다. 강구안 푸른골목 만들기는 2014 지속가능발전공모대상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인 국무총리상을 받았다정작 그 주인공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고 보고 싶었다.





한가지 첨한다면 술 자리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그 오만과 버릇없음은 영 기분 잡치는 일이었다. 그게 술때문에 술 기운에 그렇다면 또 이해해 줄 수 있으련만  암튼 그것으로 끝이다.

다소 늦게 잠들었다.  창넘어 쉴새없이 몰려와 귀를 적시는 잔물결 갯가에 철썩이는 소리가 간만이었다.

꽤나 술울 마셨음에도 그다지 큰 숙취는 없었다. 바다가 가차이 있었기 때문일까


시나브로 해당화 지고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일행이 장사도로 가는 배에 탓다. 

일행 중에 통영 출신이 세명 있었고 이번 1박2일 프로그램은 그들의 사전답사 속에 짜여졌다.  고향자랑에 신이 난 김해창교수 , 김교수 인연이 오래 됐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고리 1호기를 비롯하여 신고리5.6호기의 공사 중단까지 이어지게 했다.  물론 전국시민사회가  오래전부터 싸워온 결과물이긴 하다만  2011년 후쿠시마핵발전소 폭발 이후 그는 탈핵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 실천했다.  그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장사도 가는 뱃길은 안개로  사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섬의 위치는 거제와 더 가깝지만 통영 한산면 소속의 섬으로 되어 있다.  뱃길로 편도 한시간 남짓한 거리다.

장사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은 통영 장사도 말고도 전남 완도군 노화읍 이목리에 딸린 섬과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에 딸린 장사도가 있다. 경남 통영의 장사도는 한산면 매죽리에 딸린 섬이다.

[長蛇島 ] 한자 풀이로 보면 긴 뱀처럼 생긴 섬이다. 섬에 뱀이 많아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실제 장사도 탐방 길 곳곳에 출입금지와 더불어 뱀 조심 문구가 있었다. 해서 진짜 어떤 뱀들이 있나 보고 싶기도 했지만 뱀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한편 섬의 형태가 누에를 닮아 '잠사도(蠶絲島)'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누에의 경상도 방언인 '늬비'를 써서 '늬비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섬 전체가 해식대가 발달했고 해식동도 있었다. 섬의 크기는 동서로 200-400m, 남북으로 1.9km 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형이 정사부를 제외하고는 전 사면이 가파르다. 사람살이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그만큼 사람의 간섭이 적어 삭물상은 비교적 잘 보전되었으리라.  관련하여 약 250여종의 상록활엽수 난대식물군이 보고 되었지만  극히 일부만 보았을 뿐이다.

기막힌 사실은 막상 배가 섬에 도착했지만 관련 종사자들이 기싱악화로 누구도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변 명소며 지명에 대해 소개하던 선장이 멋적어 했다.

안개 속에 원추리 몇 송이 반겼다.

돈나무와 동백 수국, 협죽도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배의 승객 중에는 중국사람도 있었다.  승무원의 정중한 자세와 중국 처자의 밝은 표정이 문득 눈에 들어 왔다.

여러 종류의 수국이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그 중 산수국, 산수국은 곤충울 유인하기 위해 헛꽃을 만들지만 앞을 가리는 장애나 차단되는 잎이 있으면 헛꽃을 만들지 않는다.  

사실 여기에 산수국이 원래 자라고 있었든가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 할 수 없다.   어쩌면 유입종으로 장사도를 가꾸는데 동원된 식물종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컨데 겨울 동백으로 유명한 이곳에  여름 대표 주자로 수국을 식재한 것이라는 

짧은 시간 주어진 길로만 가면서 보았던 식물들을 대층 적어 보자면  자생종: 다정큼나무,호랑가시나무, 후박나무, 돈나무, 생달나무, 개비자, 먼나무, 담팔수, 구실잣밤나무, 까마귀쪽나무, 천선과, 황근, 자귀나무, 해송, 기린초, 마삭줄, 도깨비고비, 팽나무, 뽕나무, 초피나무, 작살나무, 동백, 애기등, 해당화, 갯머위, 천남성, 반하, 미나리리아재비, 좀씀바귀, 섬백리향, 벼룩나물, 긴병꽃풀, 댕댕이덩굴, 해국, 돌가시나무,  억새,  원추리, 참나리 등

유입종: 산수국, 수국, 바위수국, 꽃댕강, 분홍조팝나무, 불두화, 협죽도, 백정화, 망종화, 홍가시나무, 은행나무, 송엽국, 클로핑 로즈마리, 스타치스, 알로에 아보레센스, 레몬제라늄, 미국능소화, 모감주 등이다


초피나무

생달나무

장사도에 사람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때는 1900년 경이라고 한다. 인근 거제에서 정씨가 처음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전해졌다. 1973년도 통계에 의하면 14가구 73, 분교생이 3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난 1986년은 마지막까지 남았던 주민들이 섬을 떠났던 해라 한다.

폐교 운동장에는 분재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 귀퉁이  은행나무에 기대어 혹말타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구조물이 있다.

그런데 웬 문인석인가

멸종위기 식물종 애기등도 보였다.


섬의 곳곳에 설치된 조각 전시물 중 참 괜찮다고 여긴 작품  





섬의 곳곳에서 보이는 구실잣밤나무 이곳의 우점종이이라 할 수있다.

까마귀쪽나무 어린 개체

구실잣밤나무는 자신의 영역을 고수하는 나무다.  지근 거리에 동종의 나무가 있을 경우 그 나무가 있는 방향으로 가지를 내지 않는다. 때문에 구실밤나무 숲에서 하늘을 올려다 볼 경우 수관과 수관 사이가 열려 있어 마치 길을 낸듯 보인다.

안개가 풍광을 말아 먹었다.

우연히 발견한 동박새 한 마리

미국능소화





귀항할 시간이 다되가자 바다는 섬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날이 날이 문제였다만  이럴 때도 있다.

지척에 보이는 땅이 거제땅이다.




망종화

클로핑 로즈마리 속에 쉬고 있는 청개구리 한 마리,  어라 였다.   여기 청개구리가 어떻게 살게 된 것일까.




워크숍이 참여한 위원들

들어 올때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섬의 모습을 나갈 때 보이기 시작했다.





도남항 등대도 눈여겨 볼만하다

우측의 등대가 무슨 모양처럼 생겼냐는  선장의 질문에 로케트, 우주선 등의 답이 나왔는데 연필형상이라고  했다. 문인들의 땅을 상징하기 위해... 과연

통영을 떠나기 직전 멍게 비빔밥과 굴전을 점심으로 ...

그리고 부산으로 가는 차내,  거제 장평동 교차로에서 보았던 홈플러스 외벽에 걸린 쇼핑 홍보 문구 쇼핑하라!  적나라했다.  

간간히 비 뿌리고

대금산 자락이 스치고

잠시 조는 사이 부산 사상을 지난다. 차창 넘어 경동의 신축 아파트가 또 눈을 쑤신다. 백양산 서쪽 사면이 잠식되었다. 스카이라인을 고려한 듯 했지만 역시나 맘에 들지 않는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과 후의 주변 산지 변화다

간만에 해가 있는 시간 귀가했다.  터무니 없는 전정으로 가지가 송두리째 잘려나가 볼품없던 목련이 그나마 잎을 내어 반겼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나들이었다.

Hey Jude - Wilson Pick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