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1년 -
내 가슴속 촛불은 아직도 타오른다
▶ 2016년 10월29일. 세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촛불혁명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날이다. 1차, 2차, 3차…. 매 주말 촛불집회가 열릴 때마다 전국의 거리와 광장엔 갈수록 더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번째 촛불집회가 열린 날로부터 정확히 1년. 국정을 농단하던 전직 대통령과 그 무리들은 자리에서 쫓겨나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촛불 1년. 지난겨울 ‘커다란 하나’였던 우리 모두에게 촛불은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모두 인정합니다" 국정농단 반성하며 눈물 흘린 단 한 명 1027 오마이뉴스
[촛불집회 1주년] 촛불 들게 만든 국정농단 피고인들의 '말말말'
▲ "아무것도 하지말고 당장 하야하라" '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에 참가한 시민이 2016년 11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인시장 앞에 모여 촛불을 들어보이며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촛불집회가 1주년을 맞았다. 2016년 10월 29일,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어둠을 밝힌 이유는 국정농단을 향한 분노였다. 1년이 지난 지금,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 등을 포함한 국정농단 공범들은 피고인으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그들은 과연 법정에서 어떤 태도로,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말말말①] "모두 인정하고, 반성합니다"
잘못을 반성하며 당시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털어놓는 피고인은 단 한 사람, 김소영 전 문화체육관광부 비서관이다. 김 전 비서관은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의 메모에 '김기춘, 조윤선, 정관주, 김소영, 문체부'라고 적힌 블랙리스트(문화예술지원배제명단) 관련 인물 중 한 명으로 블랙리스트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김 전 비서관은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하며 피고인 신문에서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나 비서실장의 지시사항을 수석비서관을 통해 전달받아 문체부로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했기에 깊이 반성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첫날부터 자백했고,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김 전 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다른 피고인들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블랙리스트가 전달되거나 실행된 경위에 대해 증언했다. 그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부터 전달받았다" 등 다른 피고인들과 엇갈린 진술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 전 비서관의 변호인은 1심 결심 공판에서 "자백했다는 이유로 타 피고인들은 비난하고, 심지어 지난 기일에선 나가는데 욕설을 하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김 전 비서관은 현재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 블랙리스트 혐의를 받는 피고인들과 함께 항소심을 받고 있다. 그는 피고인석에 앉아 대부분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모으고 있다.
[말말말②] "혐의는 인정, 그래도 박근혜 대통령은 잘못 없어"
혐의는 인정하나 박 전 대통령을 끝까지 보호하는 경우도 있다. 최씨에게 공무상 비밀을 누설한 혐의를 받는 '문고리 3인방'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의 형사재판에서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증언거부권을 행사했다. 피고인으로서 재판부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인 '최후진술'에서도 박 전 대통령을 언급했다.
"우리 정치사회에서 박근혜 대통령님만큼 비극적인 사람이 또 있겠는가. 마음이 아프다…제가 대통령 뜻을 헤아리고, 그걸 받드는 과정에서 과했던 점은 있었을 수 있지만, 특별히 부당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하고, 대통령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이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알지 못했던 최씨의 행동들과 연계돼 지금 이 상황까지 오게 됐다."
정 전 비서관은 오는 11월 15일에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 조윤선, 블랙리스트 항소심 첫 재판 출석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불구속 상태인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7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항소심 첫 재판에 출석한 뒤 점심식사를 위해 법원을 나서고 있다. ⓒ 권우성
[말말말③]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공직자' 생활이 끝났으니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존중해달라고 호소하는 인물도 있다.
조 전 장관은 문예기금 지원배제, 영화 지원배제, 도서 지원배제 등과 관련해 기소됐으나 1심 재판부는 '국회에서 거짓으로 증언한 부분(위증)'만 유죄로 판결했다. 조 전 장관은 1심 결심 공판에서 '자연인' 조윤선으로서의 희망만은 꼭 이어가고 싶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문화예술과 문화예술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작은 꿈이다. 두 딸도 예술을 시켰고, 제 주된 관심도 늘 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블랙리스트 주범이라는 오해에 맞닥뜨려 꼭 해보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그만두게 됐다. 문체부 장관으로 제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은 하늘이 허락해주시지 않았지만 앞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자연인 조윤선으로서의 희망만은 꼭 이어가고 싶다."
조 전 장관은 항소심에서 '위증'까지 무죄로 인정받기 위해 "선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증이 아니다", "블랙리스트 존재 자체를 부인한 게 아니다" 등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관련 기사: 조윤선의 항소심 전략 '선서 효력은 당일')
[말말말④] '모르쇠' 김기춘과 '태도 불량' 우병우
'법꾸라지'로 알려진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법정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며 혐의를 부인한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선고를 앞둔 결심 공판에선 '모르쇠'로 잡아뗐다.
"저는 문체부 1급 공무원들에게 사직을 강요한 사실이 없다. 당사자에게 강요한 일도 없고, 장관에게 사표를 받으라고 협박한 사실도 없다. 저는 문화예술인 개인이나 단체 선정이나 지원 배제를 위한 명단을 작성하라고 지시한 일도 없고, 작성명단을 본 일도 없다. 집행하도록 지시하거나 강요한 일도 없다. 보고받은 일도 없고, 집행상황을 알지도 못했다."
조 전 장관과 함께 항소심을 받고 있는 김 전 실장은 피고인 출석 의무가 없는 준비기일에도 법정에 출석했다. 하늘색 환자복을 입고 나온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재판부에 자신의 건강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국정농단 방조 혐의로 기소돼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우 전 수석은 최근 법정에서 '태도 불량'으로 재판부에 혼쭐이 났다. 우 전 수석은 지난 13일, 신영선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이 영화 <변호인>을 제작한 CJ 그룹에 우 전 수석이 불이익을 주려고 했던 정황에 대해 증언하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재판부는 "증인신문 할 때 액션을 나타내지 말아 달라. 피고인은 특히 (그렇다)"며 제지했다. 우 전 수석은 첫 공판부터 열심히 자신을 변호했다.
"전 대학을 졸업한 뒤 23년간 검사를 했고, 1년 변호사 생활을 거쳐 2년 6개월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 등으로 근무했다. 청와대에서 매일 야근했고, 주말에도 대부분 출근했다. 대통령이 언제, 어떤 지시를 할 수 없어서 제가 사는 안방, 서재, 통근 차량, 화장실까지 메모지나 수첩을 두고 긴장된 나날을 보냈다. 전 평생 공직자로 살아오면서 사심 없이 직무 수행하는 원칙을 지키고자 했고,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보좌할 기회를 갖게 된 데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 국정농단'의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최순실씨가 5월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열리는 속행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연합
[말말말⑤] 법정에서 '물 흐리는' 박근혜-최순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당사자인 박 전 대통령과 최씨는 법리적 다툼은 포기한 듯 보인다.
탄핵 전, "(국정농단 사태가) 오래전부터 기획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던 박 전 대통령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나쁜 사람'으로 지칭했던 노태강 전 문체부 체육국장 등을 무표정으로 빤히 바라보거나 변호인단이었던 유영하 변호사와 증인이 설전을 벌이면 웃는 등 간접적인 표현만 해왔다. 그러나 재판부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을 연장하자 그는 법정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지난 6개월은 참담하고 비판한 시간들이었다.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배신으로 되돌아왔고, 이로 인해 저는 모든 명예와 삶을 잃었다… 이제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저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박 전 대통령이 '변호인단 일괄 사임'이라는 카드를 꺼내며 재판을 법정에서 외부로 끌고 가자, 최씨도 이를 따라 다음 기일에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구속된 지 1년이 다 돼간다. 구속돼 지금 검찰이 6~7개월간 외부인 접견을 막고, 일체 면회를 불허해서 1평되는 방에서 CCTV로 감시하는 등 화장실도 오픈된 곳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버텨왔다. 지금 너무 힘들다. 검찰이 불합리하게 하는 것을 재판장님께서 정리해달라."
검찰 관계자는 "핵심 피고인들은 다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촛불이 타오른 지 1년이 지났다. 그때도, 지금 법정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같은 모습이다.
촛불 1년] “촛불 이후, 나는 비로소 국민이 되었다”1028 한국
<상> 내 삶을 바꾼 촛불
2016년 11월 26일 토요일 밤. 회사원 임석규(45)씨는 서울 광화문광장의 어둠 속에 섬처럼 잠겨 있었다.
춥고 새까만 밤 사람들은 서로의 온기로 존재를 확인하며 흐느끼듯 숨죽이고 있었다. 그때 정적이 내려앉은 광장 위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꼬마 아이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무대 위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어둠 속의 시민들이 동시에 촛불을 켰다. 순식간에 광장을 밝힌 광대한 빛에 찌르듯 두 눈이 부셨을 때, 임씨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이 헬조선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게 나 혼자만은 아니었구나.’ 흩뿌려진 섬들이 연결되던 추운 겨울의 광장에서, 그는 전율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저는 늘 사람들에게 정치가 실망스러울수록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던 사람이었어요. 92학번으로 운동권 마지막 세대고,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그런 저도 이 나라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떨칠 수가 없더라고요. 세월호의 아이들, 백남기 농민의 죽음…. 숨기고 탄압하고 가로막고 찍어 누르던 정권에 지쳐 친구를 만나도 가족이 모여도 다들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죠. 이 나라에서 살기 싫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수치스러웠어요.”
처음 촛불이 켜졌던 지난해 10월 29일로부터 어느덧 1년. 종종 이민을 생각하던 임씨에게 지난 사계절은 다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복귀하는 시간이었다. 주말부부임에도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23차례 열린 촛불집회에 총 12번을 참여했다. 청와대에 들리도록 함성을 내지르면서, 국민을 우습게 알고 권력을 사유화했던 대통령을 마침내 끌어내리면서, 한국 시민으로서 오래 앓던 정치적 우울과 상처를 조금씩 치유했다. 정치혐오를 서서히 잊어버렸다.
“저는 에버트인권상의 수상자입니다.(웃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뿌듯해요. 이제는 어디서건 자연스럽게 정치 얘기를 나누죠. 정치가 우리 삶의 이야기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으니까요.”
독서토론강사 오숙희(35)씨는 지난 겨울 8세, 6세, 3세였던 세 자녀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촛불광장에 나갔다. 살면서 한번도 집회나 시위에 참여해 본 적이 없던 그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으로 촛불의 격랑이 일었던 2008년에도 “한우 사먹으면 되지” 생각했던 정치 무관심층이었다. 당시 주변에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택시 타고 광장에 나갔던 엄마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권력의 부조리를 보며 침묵만 했던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광우병 사태 때는 안 먹으면 된다는 옵션이라도 있었지만, 이 나라에는 대안이 없었어요. 대통령이 비선실세에 휘둘려 말도 안 되는 짓들을 하는데, 아이들 앞에서 침묵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더라고요. 촛불을 통해 국민들이 권력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방법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오씨는 미국산 소고기 반대 집회에 나갔던 엄마가 ‘사람들이 조금만 더 모여주면 바꿀 수 있을 것 같은데’라며 안타까워했던 게 그렇게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처음으로 힘을 보태고, 목소리를 모으고, 말로만 듣던 연대를 실천해보고 싶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사람들로 가득한 광장에 처음 섰는데, 내가 비로소 이 나라의 국민으로 느껴지더군요. 새 시대를 열겠다는 똑같은 희망을 갖고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 함께 서 있다는 게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었어요. 그 전까지 저는 그저 개인일 뿐이었죠. 아, 나는 공동체의 연대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구나 부끄러웠어요.” 오씨는 “그저 내 아이들만 잘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며 “내 아이가 잘 되려면 마을이 건강해야 하고, 그러려면 나라 전체가 건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이런 각성은 자연스레 정치에 대한 관심 고조로 이어졌다. 오씨는 특히 공론화위원회를 통한 숙의민주주의 실험을 뿌듯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나의 미약한 촛불이 계기가 돼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거잖아요. 내가 큰일을 했구나 자부심을 느껴요.”
촛불 이후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정치적 견해를 전달하기 위해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정도는 흔한 일이 됐다고 오숙희씨는 말한다. 투표 후 누굴 뽑았더라 기억도 가물거렸던 과거는 지났다. “나는 주권자고, 당신은 대리인이라는 걸 이제는 다 알아요. 정치인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대통령도 바꿔봤는데 지역구 의원에게 문자 보내는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죠.” 뽑히고 나면 그만이던 국회의원도 이젠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게 느껴진다. 촛불의 보람이다.
촛불은 한국 주권자들의 유전자에 정치 효능감을 아로새겼다. ‘나는 주권자고, 당신은 대리인이다.’ 최대 인파가 운집한 지난해 12월 3일 광화문에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는 촛불 시민들의 행렬. 한국일보 자료사진
거대한 민주주의의 학습장, 그곳에서 배운 것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집회가 29일로 1주년을 맞는다. 붕괴된 민주주의의 근간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가을부터 봄까지 세 계절 동안 열린 총 23회의 토요집회에 연인원 1,700만명의 시민이 모였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비폭력 시위로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혁명적 기적을 이뤘다. 국민주권의 헌법정신을 죽어있던 사어(死語)에서 약동하는 진실로 변환한 촛불혁명은 시민의 유전자에 정치 효능감을 각인시켰다. 촛불 이후,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이전과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크든 작든, 촛불은 한국의 주권자들을 변화시켰다.
6세와 4세 아이를 키우는 직장인 백지현(33)씨는 촛불 이후 남편과 함께 한 정당의 권리당원으로 가입했다. 본격적인 정치 참여와 감시를 위해서다. “우리 애기들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엄청난 힘과 지위를 가진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도 잘못하면 국민이 끌어내려 큰 벌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이제 알게 됐죠.” 백씨는 촛불 이전까지는 한번도 집회에 나가본 적 없고, 정치 스캔들을 볼 때면 ‘또 저러는구나’ 생각하고 마는 평범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제대로 교육받고 도덕관념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해요. ‘나 하나가 무슨 힘이 있겠어’가 아니라 ‘나 하나의 힘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절감했잖아요.” 백씨 같은 젊은 세대에게는 승리해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 정치 냉소와 무력감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해봤자 되겠어’에서 ‘해보니 되더라’로 경험의 감각회로가 변경됐으니 정치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외환위기 당시 은행산업 구조조정에 맞서 집회현장에 나간 이후 처음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박재성(가명ㆍ54ㆍ금융업)씨는 폭력적이었던 과거 집회와 달리 질서정연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에 감탄하며 새로이 민주주의를 배웠다. 전교조 출신 학원 강사인 386세대 김송환(54)씨도 “광장에 긴장감이 없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고 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4ㆍ19와 달리 탄탄한 정권을 만들어냈잖아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이 경험이 한국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광장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광장에서 우리는 서로를 믿고 있었다. ‘나’는 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연결되어 대륙이 되었다. 대학병원 간호사인 김혜란(44)씨는 “국가가 있는가” 묻기 위해 광장에 나갔다가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구나”를 배우고 왔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라는 생각은 김씨를 결코 촛불 이전으로 돌아가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실은 스스로,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밝히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 필수적이죠. 그 과정에 내가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면서 촛불로 인해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깨닫곤 해요.”
지난해 수능을 치르자마자 고향 삼척에서 광화문 촛불광장으로 달려나갔던 김오연(19ㆍ가톨릭관동대 사회복지학과)씨는 “기득권자들은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내디딘 한 걸음으로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함께의 위력’을 느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아들을 키우는 김혜란(50ㆍ주부)씨는 “같이 사는 동시대 시민들에 대한 믿음이 좀 생겼다”며 “우리는 우중이 아니라 현중일 수 있겠구나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노동자연대에서 활동 중인 양효영(25ㆍ정치외교학과 재학)씨는 세월호 생존학생들이 광장 자유발언대에 올랐을 때 통곡하듯 울었다. 100만 군중 앞에서 ‘우리들이 살아남아 끝까지 싸우겠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어린 친구들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 큰 슬픔을 함께 이겨내려는 광장의 풍경이 그렇게 뭉클할 수 없었다. 세월호의 아이들을 등에 태운 파란 고래 풍선이 하늘로 날아오를 때, 광장의 누군들 울음을 참을 수 있었던가.
“촛불 이후 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높아진 학생들의 변화를 피부로 느껴요. 올 여름 학교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 서명을 제안했는데, 사흘 만에 700명이 서명을 해서 깜짝 놀랐어요. 학교도 진보적인 주제를 다루는 토론회에는 대체로 장소를 잘 안 빌려주거든요. 그런데 최근 촛불집회 토론회에는 아무 말 없이 대관을 해주더라고요. 큰 변화를 느꼈어요.”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1월 26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시민들이 세월호 아이들을 태운 파란 고래 풍선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사회의 정치적 우울, 그 치유의 공간
촛불혁명은 최순실 국정농단만으로 발발하지 않았다. 이 비극서사의 후반부가 국정농단이라면, 그 전반부는 세월호였다. 분노의 임계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동력을 비축케 한 건 세월호의 참혹이었다.
서울 망원동에서 비온뒤숲속약국을 운영하는 장영옥(57)씨는 세월호 이전까지 “나 개인의 평화와 행복, 성장이 주요 관심사였던 사람”이다. 사회적 문제들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시민으로서 법 잘 지키고 세금 잘 내며 양심적으로 살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세월호와 맞닥뜨리면서 그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권력을 쥔 이들에게 힘을 보태는 것이라는 자각을 처음으로 갖게 됐어요. 정치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절감한 거죠. 세월호가 잠자는 저를 깨웠달까요. 이런 비극이 생겨난 사회에서 나 하나의 안위만 생각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장씨는 첫 번째 촛불집회부터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인용 결정이 났던 올 3월 10일 집회까지 꼬박 스무 번의 주말을 광장에서 보냈다. 그렇게 잊지 말자던 세월호를 그렇게 빠르게 잊어버린 사회에 무력하게 분노했던 상처를 이곳에서 치유받았다. “이렇게 끝나가는 건가 싶었는데, 결국은 다시 일어섰잖아요. 그야말로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풀의 힘을 서로가 느낀 거죠. 권력에 대한 절망뿐 아니라 우리에 대한 절망까지도 그렇게 치유받지 않았을까요.”
장씨의 약국은 촛불 이후 최저임금 1만원제를 자체 시행하고 있다. 헬조선으로 불리던 이 공동체에 어떻게 하면 작은 희망의 씨앗이라도 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올 6월부터 약국 직원들에게 시급 1만원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삶 속에서 촛불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박주명(44)씨에게도 촛불혁명의 시점은 세월호였다. “대통령이 국민을 핫바지로, 개돼지로 보고 있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광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국가가 모든 사고와 재앙을 다 막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최선을 다해 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일삼았어요. 거기다 국정농단까지, 배움의 정도를 떠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그냥 있기 너무 답답하니까 뛰쳐나온 것 아닙니까. 제가 윤봉길 의사처럼 도시락 폭탄을 던져 애국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게 아니다, 세상 살아가는 게 이게 아니다, 이런 억울함과 분노는 억누를 수가 없었어요.”
박씨의 촛불 이후는 ‘내 안의 박근혜 몰아내기’로 요약된다. “내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면서, 내가 박근혜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촛불을 운운하면 우습잖아요. 촛불을 겪었으니까 저는 떳떳하고 싶습니다. 제 자식들에게도 이번 주에 레고를 사주겠다 약속했으면 지켜야 하는 거예요.”
시인 송경동(50)씨는 “온 국민이 상주였던 세월호로 인해 쌓였던 분노가 터져나온 것”이라며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에 짓밟힌 민주주의 현장, 민생 현장에서 축적됐던 그 많은 고통의 시간들, 분노의 시간들이 한번쯤은 맑게 정화되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아이 캔 스피크’, ‘위 캔 리슨’
촛불광장에 마련된 자유발언대는 추상적 개념이던 공론장을 살아 펄떡이는 실재로 눈앞에 재현했다. 시민들은 그곳에서 ‘나는 말할 수 있고, 우리는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행하고 느꼈다. 대기업 부장 김수찬(가명ㆍ45)씨는 자유발언대 덕분에 촛불은 배려라는 걸 배웠다. 자신의 권리와 다양성을 주장하는 게 민주주의고, 이때 가장 필요한 게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배려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성소수자부터 청소노동자까지 따뜻하게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시간. 스물 세 번의 토요일을 통해 한국사회는 이곳이 함께 사는 세상임을 새삼스레 학습했다. 이 땅에 희망이 있었구나, 모두가 놀랍게 깨달았던 곳. 광장에서 보낸 날들은 고스란히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들이었다.
1급 중증장애인 최용기(51)씨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로 광장에서의 삶이 익숙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배제 당하지 않고 공감 받았던 것은 촛불광장이 처음이었다. 장애인 차별금지나 이동권 문제를 얘기하면 대체로 ‘내 문제는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이던 비장애인들이 촛불광장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치 자기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장애인들이 기습 방문을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러 가면 뒷문으로 도망 다니기 바빴던 장관들이 촛불 이후에는 시간을 내 대화를 하고 질문을 받는다. “이제는 정치인들이 우리를 대화의 파트너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촛불이 가져온 변화죠. 정부의 포용력이 달라진 것뿐 아직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어요. 하지만 세상이 변할 것 같은 기대와 희망은 갖게 됐지요.”
모든 목소리가 환대 받았던 것은 아니다. 촛불광장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에 광장은 때때로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페미당당 활동가인 우지안(23)씨는 “혐오발언 없는 시위문화를 만들자고 했을 때 내부 동력을 떨어뜨린다고 비판한다면 그 동력은 소수자를 배제하고 얻는 것”이라며 “그렇게 얻은 정의는 누구의 정의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움직임에 최근에는 ‘촛불도둑’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하지만 희망은 보인다. “2008년만 해도 ‘콘돌리자 라이스를 강간하자’ 같은 구호가 전혀 문제의식 없이 사용됐잖아요. 자정의 목소리가 나오고 그 목소리가 수용되기도 하는 걸 보며 아, 많이 바뀌긴 했구나 느껴요.” 우씨는 촛불이 가져다 준 변화로 여성으로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게 됐다는 점을 꼽았다. “페미존 깃발 뒤에서 행진하는데, 내 인생에서 ‘내가 여기에 소속돼 있구나’하는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어요. 많은 소수자들이 ‘나는 트랜스젠더인데…’, ‘나는 청소년인데…’ ‘나는 성소수자인데…’라고 발언하고, ‘발언을 할 수 있어 너무 좋다, 여기가 내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얘기하는 걸 보는 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요.” 공론장에 서 본 경험, 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것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과 접속하는 경이. 그 겨울의 광장에선 그것이 가능했다.
촛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구도 촛불을 과거완료형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갈 길은 멀고,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촛불을 통해 배우고 느낀 교훈과 감동이 한때의 추억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라는 것. 그 기억을 가지고 각자의 삶 속에서 촛불정신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김선경(34) 청년민중당 부대표는 “정치에 대한 혐오가 비관, 방관으로 이어졌지만, 우리가 바로 변화를 만든 주체”라며 “정치권이 해결해 주겠지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나설 때 비로소 정치가, 사회가,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경동 시인은 “1차 촛불항쟁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을 만들어냈다면, 2차 촛불항쟁은 현재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항쟁의 대리정부입니다. 촛불이 새로운 정치적 시공간을 열었고, 거기에 촛불 시민정부가 들어선 거죠. 이 정부가 한국사회에 제기되는 과제들을 어떻게 수행해 주느냐, 잘 지켜봐야 합니다.”
주부 신아루(35)씨는 삼베옷을 입은 장정들이 청와대 영정사진을 든 채 상여를 메고 촛불광장에서 결연히 걸어가던 침묵의 행렬을 잊지 못한다. 서슬 퍼런 눈빛에 담긴 주권자의 힘에 압도됐다. “예전엔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해결할 힘도, 돈도 없다는 것만 뼈저리게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았죠. 촛불집회도 처음엔 저런다고 뭐가 바뀌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촛불에 힘을 보태고 난 후엔 어쩌면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아침마다 눈뜨는 게 조금씩 설레기까지 해요. 잘못한 사람은 아무리 돈과 힘이 있어도 벌을 받고, 그게 당연한 일이 되는 나라가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요.”
촛불, 1년. 한국 정치는 촛불이 열어젖힌 새로운 시공간에 과연 얼마나 적응했는가. 개벽하듯 진화한 주권자의 기대와 열망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가.
촛불 1년] “촛불이지? 여기 태극기 많아” 노년층 중심 편가르기 심해져
촛불집회 반대했던 이들은
지난 2월 15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인근 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왼쪽)와 탄핵을 촉구하는 태극기(오른쪽 팻말 든 사람)가 교차하고 있다. 묘한 긴장도 잠시, 탄핵 촉구 피켓을 보고 격분한 탄핵 반대 측 참가자가 상대방의 태극기를 빼앗으려 들면서 일대 소란이 일었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촛불집회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기회였던 동시에 상처와 후유증도 남겼다. 촛불이 타오른 광장의 반대편에 서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시민의 상당수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이 부정당한 상처를 잊지 못하며, 사회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물론 촛불집회 이후 박 전 대통령의 재판 과정과 새 정부의 탄생을 지켜보며 생각이 달라진 이들도 없지 않다.
직장인 A(41)씨는 지난 추석 고향을 찾았다가 아버지(76)가 “문재인 대통령이 노인을 위해 고민을 많이 하고 안보도 잘 해보려 노력하는 게 보인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A씨는 “지난 겨울 ‘촛불집회 필요 없다, 나라 망친다’며 비판했던 그 아버지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이후 국민과 소통을 잘 하는 정부 분위기를 보면서 아버지의 인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기존의 세대간 갈등은 지속되고 있지만 세대별 정치 성향이 다양해지고 간극이 커지면서 분화되는 중”이라고 진단했다. 일방적으로 보수 정치에 충성심을 보이던 고령층 일부가 중도나 진보 진영으로 이동했고, 50대는 진보 성향이 눈에 띄게 늘었다. 20대는 지난 대선을 거치며 문재인 후보뿐만 아니라 심상정, 유승민 지지자로 다양하게 분화했다고 윤 센터장은 진단했다.
하지만 촛불집회와 탄핵에 반대했던 이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불만에 휩싸여 있다. 이런 불만이 자칫 사회 갈등으로 불거질 소지가 있다는 게 문제다. 서울의 한 대학 명예교수인 B(67)씨는 최근 결혼식 주례를 보러 갔다가 한 지인으로부터 “(자네) 촛불이지? 여기 태극기 많아. 말 할 때 신경 좀 쓰는 게 좋을 꺼야”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출신 지역과 평소 주장을 놓고 촛불집회 참가자로 단정짓는 것도 황당했지만 1년이 지나서도 적대적 편가르기가 여전하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촛불집회 이후 노년층을 중심으로 촛불집회 지지자, 태극기집회 지지자로 편을 나누고 날을 세우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특히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신의 과거가 통째로 부정당했다는 허탈함에 더 공격적으로 바뀐 것 같다”라고 말했다.
보수 성향의 직장인 C(36)씨는 촛불집회 이후 동료, 친구들로부터 ‘네가 찍은 (박근혜) 후보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반성 좀 해라’ 같은 비판과 핀잔에 괴롭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적극 지지했던 나 자신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있다. 하지만 큰 죄를 지은 사람 취급을 받을 때면 저도 ‘두고 보자. 문재인 정부라고 얼마나 다르겠어?’ 하는 반발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D(46)씨도 “친구 모임에 나가면 한국당이나 바른정당에 우호적인 이야기는 전혀 못한다. 그런 얘기를 하면 비난하는 분위기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촛불집회가 시민들이 순수하게 의사를 표출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돼 문제가 많다”는 E(58)씨는 “촛불집회 이후 사회가 더 양분됐다”고 지적한다. 그는 “좌우로 갈려 서로 물어뜯는 이런 상황에서 나라가 잘 되겠나. 정부가 이런 갈등을 아우르는 리더십을 보이지 못해 갑갑하다”고 말했다. 취업 준비생 F(28)씨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드라이브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지난 정부의 모든 것을 들추려는 태도가 촛불집회를 반대했던 나 같은 사람들을 다 적폐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통령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처럼 일자리, 경제 등 먹고 사는 문제에 에너지를 더 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불만의 목소리를 최대한 들어 국정에 반영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촛불집회를 반대했던 사람들을 ‘과거에만 집착하는 꼰대’라거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식으로 비판만 하기보다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보는지 다양한 의견을 듣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박 교수는 “잠복된 갈등이 분출하지 않도록 촛불집회가 만든 소통과 공유의 정신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촛불, 그후 1년]역사를 바꾼 광장에 시민이 있었다 1028 경향
2017.10.28 그날처럼 촛불을 들기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난 오늘 광화문광장에서는 다시 촛불이 타오른다. 적폐청산이 끝나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2016.10.29 첫번째 촛불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첫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던 중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2016.11.3 최순실 구속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구속 사흘 전인 10월31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서며 울먹이고 있다. 강윤중 기자
▼2016.11.19 촛불 파도타기
박근혜 퇴진 4차 범국민행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과 스마트폰 불빛을 이용해 파도타기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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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 탄핵안 표결 직전, 232만의 염원
국회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12월9일)을 앞두고 열린 제6차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이날 역대 최대 인원인 232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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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17 이재용 구속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월18일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다. 이준헌 기자
▼2017.3.10 박근혜 탄핵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앞 대형 전광판에 이정미 헌법재판소장이 ‘대통령 박근혜 탄핵심판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장면이 방송되고 있다. 박민규 기자
▼2017.3.31 박근혜 구속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에서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로 이송되고 있다. 김영민 기자
ㆍ촛불의 장 마련했던 ‘퇴진행동’ 6인이 말하는 촛불정신
지난해 10월29일 시작돼 연인원 1700만명 가까이 모인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뒤에는 시민들이 한데 모여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한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의 역할도 컸다. 퇴진행동은 지난해 11월9일 23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발족했다. 이후 참가 단체는 2500여개까지 늘어났다. 지난 4월29일 마지막 촛불집회를 마치고 5월24일 공식 해산했다. 퇴진행동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6명에게서 촛불집회 정신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와 이를 계속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들어봤다
퇴진행동 공동대표였던 권태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62)는 정치권이 ‘적폐청산’을 주요한 의제로 다루게 만들고 새 정부가 이를 위해 노력하게 한 것을 촛불의 성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촛불집회 정신이 구현된 예로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 발족을 꼽았다. 권 대표는 “공론화위는 숙의 민주주의를 실험해봤다는 점에서 촛불의 성과라고 본다”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자신들의 의제를 결정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퇴진행동에서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46)도 정부가 진행 중인 ‘적폐청산’을 더욱 과감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박 활동가는 “정부가 시민들을 믿고 적폐를 청산하는 데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한다”며 “워낙 뿌리가 깊은 적폐들이 많기 때문에 정부의 선의만을 믿고 맡기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촛불 때처럼 계속 이야기하고 떠들어야 한다”고 했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43)은 “부당해도 참거나 불의를 봐도 못 본 체했던 일들을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집회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며 “촛불집회 때 나온 얘기들 가운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나 신고리 원전 공사 재개 등에서 정부에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새 정부가 탄생한 지 아직 6개월이 채 안됐기 때문에 이 사회가 변화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45)도 “적폐와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고 시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촛불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참다운 민주주의로 나갈 길이 아직 멀다”며 “광장에서 타올랐던 촛불이 동네로, 일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쉬움도 있다.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56·전 퇴진행동 공동대표)은 “‘헬조선’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시민들의 의지가 촛불집회를 일으켰다”면서도 “그러나 개별 사안들이 종합적인 방향으로 제대로 제시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이어 “광장에서는 우리 모두가 존중받아야 하고 차별·혐오를 표현하면 안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촛불이 끝나고 보니 우리 사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며 “최근 장애인 학생 부모들이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무릎을 꿇었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이 국회에서까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59)은 “재벌이 양극화의 주범이라는 인식이 퍼진 것은 긍정적”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촛불을 든 이유는 단순히 대통령 얼굴을 바꾸자고 한 게 아니라 일터와 세상을 바꾸기 위한 것”이라며 “노동기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촛불의 의미는 무엇일까. 권 공동대표는 “촛불집회 때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중·고교생들이 나와 교육현장에서 본인들이 겪고 있는 비민주적인 것들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을 봤다”며 “촛불시위 현장이 민주시민 교육현장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촛불시위 구호 중에서 ‘이게 나라냐’라는 게 있었는데 집회가 끝나자 ‘이게 나라다’라는 구호가 나왔다”며 “시민들이 민주시민으로서 내가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책무성을 인식했다는 데 촛불집회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 활동가는 “1987년 6·10 민주항쟁을 유신을 넘는 또 다른 체제의 시작이었다고 본다면 이번 촛불 ‘시민혁명’도 특권·반칙·부정의에 대항한 또 다른 30년의 시작”이라며 “시민들의 마음속에 촛불 시민혁명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이었다는 기억이 심어진 것만으로도 민주주의의 씨는 뿌려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촛불집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지난해 12월3일 사상 최초로 청와대 앞 100m까지 행진한 것을 꼽는 이들이 많았다. 김 사무국장은 “깃발을 든 시민들이 경찰 등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평화롭게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 인근 효자치안센터 앞까지 갔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4·16연대 공동대표이기도 했던 박 소장은 “행진을 할 때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맨 앞에 섰다”며 “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가 계속 제지를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청와대 100m 앞으로 가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어 “막히고 막혔던 곳이 뚫리니까 유가족들이 막 울었다”고 회상했다.
박 활동가는 퇴진행동 운영 자체가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퇴진행동은 2500개가 넘는 시민단체가 참가하다 보니 다양한 의견을 조정해 나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구호 하나를 정하는 데도 몇 시간씩 토론했다. 돌이켜보면 모두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훈련이었다”고 말했다.
촛불 1주년, 적폐청산에 염려 쏟아낸 동아일보 1030미디어오늘
[아침신문 솎아보기] 한겨레 “적폐청산 가속화가 국민 뜻”, 동아 “다 적폐로 모는 건 우려”
촛불이 1주년을 맞았다. 언론은 촛불의 의미와 나아갈 길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드러냈다.
동아 “다 적폐로 모는 건 우려”
촛불의 최대 화두는 적폐 청산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적폐는 편 가르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을 씻어내는 것이다. 정의로운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라며 적폐 청산을 강조했다.
그러나 보수신문들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동아일보는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하지만 정치 원로들과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이 적폐 청산을 국정 운영의 핵심 동력으로 삼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과거 정권의 국정운영을 적폐청산이란 프레임만으로만 접근하다보면 부정적 측면만 부각될 수밖에 없고 결국 정치, 사회적 갈등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동아일보가 말한 ‘정치 원로’나 ‘전문가’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일하게 실명으로 등장한 이는 자유한국당 출신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다. 그는 “집권세력이 과거 야당 시절 반대했던 정책을 지금 와서 다 적폐로 몰면 우려스럽다. 미래 비전을 설정하는 데 소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폐 청산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정당의 관계자의 입장을 ‘정치 원로’로서 전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또한 현재 정부기관 19곳이 적폐TF를 운영하고 있다며 현황을 나열했다. 그러면서 “청 드라이브에 정부기관 몸살”이라는 부제를 쓰고 부처별 적폐청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강조했다. 기사에는 적폐청산 TF구성에 대한 내부 반발, 위법성 및 월권 논란, 모호한 활동기간 등의 문제점이 부각됐다.
▲ 30일 동아일보 보도.
한겨레 “적폐청산 가속화가 국민 뜻”
반면 한겨레는 “적폐청산 가속화가 국민의 뜻”(사설)이라고 강조하고 나섰다. 한겨레는 촛불집회 1주년을 맞아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벌인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는데 68.3%의 국민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등에 대한 적폐 수사에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7.5%에 달했다. 검찰개혁과 공영방송 파업에 대해서도 응답자 다수가 지지의사를 밝혔다. 자유한국당과 일부 언론이 연일 적폐 청산에 반발하고 나섰지만 다수 민심은 동조하지 않은 것이다.
한겨레는 “수구세력이 알아야 할 것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면 미래도 어둡다는 역사의 교훈”이라며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파헤쳐 청산할 것을 단호히 청산하는 것이 미래를 여는 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고 강조했다.
▲ 30일 한겨레 보도.
촛불 1주년에 태극기 부각한 조선
지난 토요일 열린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언론은 시각차를 드러냈다. 한겨레는 “행진한 곳은 달랐지만 시민들은 적폐 청산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따로 또 같이 촛불 1주년을 자축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적폐청산, 더 강한 개혁, 보수압박’... 촛불의 ‘3색 진화’”기사를 통해 촛불이 ‘진화’했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은 “촛불 1주년 사전행사에서는 더 강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나왔다“면서 청소년 선거권 확대, 비정규직 문제 개선 등의 목소리를 전했다.
반면 조선일보는 촛불 1주년 집회에 ‘태극기 집회’를 같이 언급했다. 조선은 “촛불 1년 서울집회, 2개 광장서 3갈래 길을 가다” 기사를 통해 촛불의 분열을 강조하고 태극기 집회를 부각하는 편집을 했다. 조선은 광화문 집회, 친문 지지자 중심의 여의도 집회를 소개한 뒤 ”친박 단체가 주관하는 태극기 집회도 도심 곳곳에서 열렸다”고 보도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여전히 촛불집회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고질병이었던 불법 폭력시위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보행 방해와 과도한 소음, 시민의 불쾌감을 일으키는 풍토는 여전히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는 것이다. 동아는 “경찰은 비폭력적인 시위는 신고나 진행 과정에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경찰력 행사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정부 역시 합법과 불법을 명확히 구분해 엄정하게 대응함으로써 시위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촛불 1주년’이라 쓰고 ‘태극기 집회’라 읽은 MBC
[기자수첩] MBC뉴스의 비정상, 더 악화되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촛불 1주년·태극기 집회 잇따라’
10월28일 MBC 뉴스데스크 리포트 가운데 일부다. 촛불 1주년 ‘행사’를 다뤘다. 28일 뉴스데스크에서 촛불 1주년 리포트는 단 한 개. 그런데 리포트 제목에 촛불 1주년과 태극기 집회를 동등하게 배열했다. 이런 방식도 문제지만 더 황당한 건, 리포트 내용이다.
“오후 6시부터 열린 촛불집회 1주년 행사에는 시민 수천 명이 참여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던 1년 전 촛불집회 기록을 담은 영상을 시작으로 시민들의 자유발언과 촛불 집회 당시 무대에 섰던 가수들의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주최 측인 박근혜 정권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당초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계획했지만 논란 끝에 취소했습니다.”
10월28일 MBC 뉴스데스크 화면캡처
MBC가 이날 뉴스데스크에서 언급한 ‘촛불 1주년’은 대략 이게 전부다. 주최 측 추산 5만 여명이 참여했다고 밝혔지만 MBC는 ‘근거도 불분명하게’ 시민 수천 명이 참여했다고 했다. 그 흔한 시민 인터뷰도 없다. 박근혜 정권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 관계자가 연단에서 한 발언만 짧게 소개했다. 시민들은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적폐청산’을 외치며 또 다른 촛불집회를 이어갔지만 MBC는 ‘모른 척’이다. 대다수 구성원들이 파업 중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이 안 된 내용을 리포트로 내보내는 건 촛불시민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사실 이날 MBC가 뉴스데스크에서 공을 들인 건 ‘다른 집회’였던 것 같다. 보수단체들의 태극기 집회. 일단 리포트 내용을 한번 보자.
“참가자들은 서울역 광장과 덕수궁 앞에 모여 박 전 대통령의 석방과 전술핵 재배치를 촉구했습니다.”
“또 다음 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과 관련해 한미동맹 강화를 굳건히 하고 북한의 위협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작권을 준비도 안 된 한국군이 단독으로 행사한다는 것은 허울뿐인 군사 주권인 것이고 결국 북한 김정은 정권이 가장 바라는 것이다.” (이 마리아/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 발언)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가 정확히 어떤 단체이고 어떤 상징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MBC는 이날 뉴스데스크에서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 관계자 발언을 비중 있게 내보냈다. 그 정도로 가치가 있다는 게 현재 MBC 보도국 수뇌부의 판단일 터. 그 판단 앞에 화가 나거나 분노하기보다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동의는 못하지만 ‘촛불 1주년’과 ‘태극기 집회’를 동등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면 리포트를 별도로 가는 성의는 보였어야 했다. MBC와 함께 ‘언론계 적폐청산’ 대상으로 지목된 KBS조차 이 정도로 ‘막가파 보도’는 하지 않았다. 지금 MBC 뉴스가 얼마나 정상궤도에 벗어나 있는지는 28일 KBS 뉴스9와 비교해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10월28일 KBS 뉴스9 화면캡처
“오늘(28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린지 1년 되는 날입니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정치 변화를 이끈 촛불집회 1주년을 기념해, 오늘(28일) 광화문 광장에 다시 나온 사람들은 ‘적폐 청산’을 외쳤습니다.”
KBS 뉴스9 리포트 제목은 ‘촛불 집회 1주년…다시 광화문’이다. 뉴스9 헤드라인이다. 이른바 태극기 집회는 리포트 말미에 한 줄 언급됐다. KBS는 최소한의 선은 지켰다. 물론 ‘촛불의 완성은 국민통합으로 귀결돼야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에 방점을 찍는, 기자가 보기에 ‘KBS 경영진의 희망은 담은 듯한’ 별도 리포트를 내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상식과 합리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 MBC는 뉴스데스크 중반부에 촛불 1주년을 태극기 집회와 함께 다뤘다. 리포트 구성도 이상하고 내용도 비상식적이다. MBC는 이 리포트에서 ‘촛불 1주년’이라 쓰고 ‘태극기 집회’라 읽고 싶었던 걸까. MBC뉴스의 황당함과 어이없음은 그동안 여러 번 논란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BC뉴스는 변함없이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채 ‘그들만의 비정상성’을 유지해왔다.
이제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도 머지않아 끝이 날 것으로 보이지만 ‘정상궤도’에 올라서기 전까지는 그래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MBC에서 ‘비정상적 리포트’를 계속 접하게 될 수도 있다. 공공재인 전파를 이렇게 낭비해도 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현재 ‘비정상적 리포트’ 제작에 동참하는 MBC기자들에게 당부 하나 드린다.
타방송사 리포트와 본인들 리포트를 비교하고 모니터 좀 하시라. 얼마나 이상한 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대열에서 이탈하시라. 본인 이름으로 나간 리포트는 평생 남는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싶다. ‘부끄러운 언론인’으로 기록되지 않기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도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진심으로 드리는 충고다.
같은 날 ‘다른 촛불’…광화문 아닌 여의도에 모인 사람들 1029 한겨레
여의도에서 열린 ‘촛불파티 2017’
‘촛불 1주년’ 축하하지만 시민단체 주도 ‘촛불집회’ 반발
‘적폐어워드’ 등 조촐한 ‘파티’
28일 저녁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건물 앞에서 열린 ‘촛불파티 2017’ 행사에서 사회자가 발언하고 있다.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새 정부 출범을 이끌었던 ‘촛불집회’는 1년이 지나 두 개의 목소리로 갈라졌다. 일부 시민들은 청와대가 아닌 국회를 향해 적폐청산을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여의도에서 촛불집회 1주년을 기념하는 촛불파티를 개최했다.
28일 저녁 6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주최쪽 추산 2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굿바이 수구좌파-촛불파티 2017’이 열렸다. 행사를 주관한 ‘촛불시민 1기 호스트’ 관계자는 “촛불파티는 특정단체가 주관한 게 아니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결성된 단체”라고 설명했다. 이번 집회는 핼러윈데이(31일)를 맞아 다양한 분장과 코스프레를 한 시민들이 함께 즐기는 파티 형식으로 꾸려졌다.
‘촛불파티 2017’은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의 주도로 열리는 1주년 집회에 반대한 한 시민이 지난 24일 여의도 국회 앞에 집회신고를 하면서 시작됐다. 자신을 ‘그만 떠들자’라는 별명으로 소개한 이 시민은 이날 무대에 올라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싶었는데 저랑은 방향이 안 맞는 것 같았다. 마음이 맞는 분들과 조촐하게 모여서 (촛불 1주년을) 기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파티를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주최 쪽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999만원을 모아 행사비를 마련했고, 나머지 비용들도 오늘 오신 시민들의 성금에 의해 운영될 예정”이라며 “음료와 음식들 모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았다”고 했다.
28일 저녁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건물 앞에서 열린 ‘촛불파티 2017’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각자 피켓을 들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촛불파티’에 참석한 시민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집회 1주년을 함께 축하하면서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1주년 집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직장인 권영우(32)씨는 “광화문 촛불집회는 민주노총, 페미니즘 관련 단체들이 주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여성인권 등을 주장할 텐데 청와대 앞에서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나타냈다. 이번 파티에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 스티커를 직접 제작해 참가했다는 대학원생 김아무개(26)씨도 “광화문 촛불집회가 청와대로 행진을 한다는 게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대처럼 느껴졌다. 이전 정부와 비교해보면 문 대통령은 직접 국민들과 소통하려는 모습이 국민들의 마음을 녹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촛불파티’는 인디 밴드들의 공연과 시민들의 자유발언 시간, 지난 정권의 주요 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적폐어워드’ 등의 코너로 꾸려졌다. 통기타를 매고 무대에 오른 한 시민은 기타를 치며 “이니(문재인 대통령의 별명)는 우리 거, 다스는 누구 거”라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자유한국당의 정치는 죽었다’는 의미에서 여의도 자유한국당사 앞으로 침묵행진한 뒤 1분간 묵념했다.
“우리 사회 나아졌다” 말하지만 “나의 삶은 그대로다”1030 한겨레
막연한 희망과 구체적인 고단함’
<한겨레>가 촛불집회 1돌을 맞아 실시한 조사에서 나타난 사회와 개인 삶의 변화에 관한 여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지난 1년간 사회가 나아졌다는 공감대는 퍼졌지만 저마다 마주한 현실의 고단함은 요지부동이었다.
‘지난 1년간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4.6%는 “나아졌다”고 답했다. “나빠졌다”는 응답(12.5%)의 4배 이상이다. “그대로이다”란 응답은 31.0%였다. 우리 사회가 나아졌다는 응답은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이나 진보층에서 특히 높게 나타났다. 지난 5·9 대선에서 문 대통령에게 투표를 했다는 응답자 가운데 74.4%가 “나아졌다”고 답해 평균보다 20%포인트 정도 높았다. 스스로 진보 성향이라고 응답한 계층 역시 76.3%가 “나아졌다”고 응답했다. 반면, 자유한국당 지지층에서는 사회가 나아졌다는 응답이 12.6%에 불과했다. 절반가량인 46.6%가 “나빠졌다”고 했다.
사회가 나아졌다고 응답한 546명에게 ‘어느 분야가 나아졌느냐’고 물어보니, ‘전반적인 모든 분야’라는 응답이 46.2%를 차지한 가운데 정치(17.0%), 복지·교육 등 사회(16.1%), 문화(6.2%), 일자리·소득 등 경제(5.5%) 분야 순서로 나타났다. 사회가 나빠졌다는 125명에게 ‘어느 분야가 나빠졌느냐’고 물어보니, ‘전반적인 모든 분야’(39.2%)에 이어 외교·안보 분야(20.0%)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북한 핵·미사일 발사 실험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로 인한 한반도 긴장 고조와 한-중 관계 악화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어 일자리·소득 등 경제(16.0%)와 정치(13.6%)가 ‘악화된 분야’로 꼽혔다.
사회적 변화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본 응답자들은 그러나, 개인의 삶의 변화를 묻는 질문 앞에서는 커다란 물음표를 달았다. ‘지난 1년간 당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 “나아졌다”는 응답은 21.8%에 그쳤다. 반면, “그대로이다”라는 응답이 63.7%에 이르렀다. “나빠졌다”는 대답은 14.0%였다.
개인의 삶이 지난 1년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고 응답한 140명은 ‘어떤 면에서 나빠졌느냐’는 물음에 빠듯한 현실을 꼽았다. ‘일자리·소득 등 경제적인 측면’이 나빠졌다는 응답이 64.3%에 달했다. 이런 인식은 ‘현재 삶에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더욱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응답자들은 걱정거리로 노후(22.4%), 취업·실직 등 일자리(16.3%), 자녀 교육(12.5%), 주택구입·전월세 등 주거(11.8%) 등을 꼽았다. 개인의 삶이 지난 1년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응답자 218명은, 개선된 분야로 ‘정치·사회 분위기 등 심리적인 측면’(52.3%)을 가장 많이 꼽았다. 사회 분위기는 1년 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이게 나라냐’라는 지경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지만, 개인 삶의 변화는 훨씬 더디게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정관철 한국리서치 여론조사본부 부장은 “사회 제도나 분위기는 뭔가 좋아지고 있다고 느끼지만, 각자 처한 경제적 상황은 큰 변화가 없기 때문에 사회와 개인 삶의 변화를 판단하는 차이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현 정부서 삶 나아질 것” 52%…호남 69% 최고·TK 41% 최저
취임 직후 비해선 조금 낮아져
국민의 절반 이상은 문재인 정부에서 자신의 삶의 질이 좋아질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가 촛불집회 1년을 맞아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선생님의 삶이 어떻게 될 것으로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1.9%가 ‘좋아질 것’(매우 좋아질 것 9.9%+대체로 좋아질 것 42%)이라고 답했다.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자는 11.6%, 변화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 응답자는 34.8%였다. 여전히 절반 이상이 삶의 질 개선을 기대하고 있지만, 문 대통령의 취임 직후와 취임 100일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 때 같은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이 54.4%(5월12~13일)와 56.5%(8월11~12일)였던 것에 견주면 긍정적인 기대가 조금 낮아진 것이다. 반면, 자신의 삶의 질이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은 3.9%(5월), 9%(8월), 11.6%(10월27~28일)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삶의 질 개선에 대한 기대감은 50대(42.5%)와 60대 이상(37.4%)에서 평균보다 눈에 띄게 낮았다. 지역별로는 광주·전라가 69%로 가장 높게 나타난 반면, 대구·경북이 41.2%로 조사돼 대조를 보였다. 지지하는 정당과는 ‘정비례’였다. 더불어민주당(74.6%)과 정의당(64.9%) 지지층에선 낙관적인 전망이 많았고, 국민의당(40%)과 바른정당(21.9%) 지지자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특히 자유한국당 지지층은 10명 가운데 1명(9.7%)만이 자신의 삶이 좋아질 것이라고 답했고, 4명(39.8%)은 나빠질 것으로, 5명(47.6%)은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국민 10명중 7명 “적폐청산, 정치보복 아니다”
촛불 1년’ 여론조사
68.3% “적폐청산, 잘 하고 있다”
67.5% “정치보복 주장 동의 안해”
“더 진보적으로 됐다” 30%, “더 보수적으로 됐다” 10%
이념성향 변화…“그대로” 57%
이번 조사에서 ‘더 진보적으로 되었다’는 답변은 이념 성향이 진보로 완전히 바뀐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중도 또는 보수를 지향하더라도 촛불집회 이전보다 이념 성향이 진보의 방향으로 좀 더 이동했다는 응답을 포함한 것이다. 촛불집회가 일으킨 변화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보수화하는 것보다는 사회 개혁과 쇄신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공감하는 이들이 더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나이대별로 보면, 촛불집회를 계기로 ‘더 진보적’으로 변했다는 응답이 40대(36.7%)에서 가장 높았다. 반면 ‘더 보수적으로 되었다’는 응답은 60대(20.4%)에서 가장 높게 조사됐다. 성별로는 여성(34.3%)이 남성(26.6%)보다 ‘더 진보적으로 변했다’는 응답률이 높았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 현재 자신의 이념 성향을 물은 항목에선 중도(36.8%), 진보(34.6%), 보수(23.9%), 모름·무응답(4.7%) 차례로 나타났다.
공적 지식인 1030 경향
편집기획자란 남들 앞에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직접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 필자, 독자, 출판 관계자들과 협업을 통해 이를 구현해내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기획자는 음지에서 일하지만, 양지를 지향한다. 아무리 좋은 기획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줄 필자가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될 때가 있다. 얼마 전 편집회의에서 여러 안건을 두고 이야기하다가 너무나 멋진 기획을 만났지만,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하신 말씀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해서 글을 쓸 수 있는 필자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지식인 중에는 자기 분야를 벗어나서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연구자들이 정말 드물어요. 또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럴 여력 자체가 없습니다.” 전문가(specialist)의 시대지만, 공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라 부를 만한 이들은 더욱 희소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1980년 한 해 동안 배출된 국내 박사학위 소지자는 528명에 불과했지만, 2009년 1만명을 넘어섰고, 2015년에는 1만3077명에 이른다. 올해 태어날 신생아 수가 최초로 40만명 미만이 될 것이라 하니 인구는 줄어도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꾸준히 증가하는 셈이다. 인구 1만명당 박사학위 취득자도 2명이 넘는다.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7%에 불과하며 고졸자의 대학 진학률은 80%에 육박한다. 수치와 통계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는 지식 선진사회, 바야흐로 대중지식인의 시대다. 그런데도 지식인 사회, 대학의 위기를 넘어 우리 사회가 반지성주의 사회가 되어간다는 우려가 들려온다.
역사학자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1963년에 펴낸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현대 지성사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그는 미국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복음주의’가 매카시즘이라는 ‘극우-반공주의’와 결합하면서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지식인, 특히 공적 지식인들을 어떻게 몰락시켰는지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복음주의, 극우-반공주의와 더불어 실용주의를 반지성주의의 핵심으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지적 능력(intelligence)’과 ‘지성(intellect)’의 핵심적 차이는 실용성이 아니라 비판능력에 있다. 지적 능력이 어떤 사안을 파악하고 처리하는 능력이라면, 지성은 의문을 품고, 이를 비판하고 이론화한다. 지적 능력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높은 자질로 평가되지만, 지성은 때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에 대해 호프스태터는 “지식인이란 해답을 질문으로 바꾸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지식인은 사회적 통념과 상식에 의문을 던지는 불편한 존재란 뜻이다.
촛불항쟁을 통해 우리 사회는 대중의 참여에 의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은 국가권력의 정상화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를 달성한 결과이지만, 이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외면하고, 분단이라는 지속적인 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 없이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우리는 스스로 정직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한가롭게 ‘선비질’이나 하는 존재로 비치기에 십상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염려하게 된 이유의 상당 부분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살아오면서 권력과 야합하고, 금력에 굴복했던 지식인 자신에게 있다. 대통령 탄핵으로 귀결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뚜껑을 연 것이 이화여대의 미래라이프 사태와 정유라의 부정입학 사건이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 사회가 처한 위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지식인이 없다면 적폐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과 싸울 때보다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스스로 더욱 외로운 소수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들의 비판과 의문이 우리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What A Difference A Day Made - Dinah Washing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