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최훈
동물 해방 피터 싱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개정판 ]멜라니 조이
고기로 태어나서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한승태
육식의 종말 제러미 리프킨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고기를 굽기 전,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철학적 질문 최훈 저 | 사월의책 | 2012년 12월
고대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철학 속에서 지금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생각법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어떤 문제든 ‘놀라워’해서 출발하고 ‘아포리아’에 빠져 보는 경험도 해보고 그 ‘경이감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등의 영역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강원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양과정의 철학 교수, 자유전공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냈고, 호주 멜버른대학교, 캐나다 위니펙대학교,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했다. 박사학위 주제였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연구를 계속하면서 그 연구 성과를 논리적 사고와 오류 연구에 접목하고 있다. 그간 이론적 배경이 부족했던 이 분야에 학문적 토대를 쌓고 있다. 그 일환으로 나온 『논리는 나의 힘』은 논리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논리적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플라톤은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저자는 온 국민이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좋은 나라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학술 연구 못지않게 대중에게 철학적 사고가 무엇인지 알리는 것을 철학 선생의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약간은 거창하지만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저술로써 대중과 소통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데카르트와 버클리』, 『매사에 공평하라: 벤담과 싱어』는 그런 작업의 결과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철학 속에서 지금의 삶에 필요한 지식과 생각법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철학자이다. 어떤 문제든 ‘놀라워’해서 출발하고 ‘아포리아’에 빠져 보는 경험도 해 보고 그 ‘경이감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등의 영역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그 결과가 『좋은 논증을 위한 오류 이론 연구』, 『동물을 위한 윤리학』, 『동물 윤리 대논쟁』의 저서로 나왔다. 주요 저서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데카르트&버클리』, 『매사에 공평하라: 벤담&싱어』,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 『변호사 논증법』, 『생각을 발견하는 철학 토론학교』(박의준과 공저), 『나는 합리적인 사람』,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좋은 논증을 위한 오류 이론 연구』 등이 있다. 그 외 『플라톤과 인터넷』, 『철학: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목차
프롤로그: 철학자의 식탁에는 고민이 많다
1. 나의 식탁 변천사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
습관을 따를 것인가, 앎을 따를 것인가
고기의 추억 / 위대한 결단
“물고기만 먹어요”
반쪽짜리 채식주의자
한국 사회에서 채식하기
채식주의 커밍아웃
2. 고기를 치워버린 사람들
고기를 먹으면 업이 쌓인다(인도의 종교들)
더러운 고기는 먹지 않는다(중동의 종교들)
고기 맛이 싫어서 안 먹어요(취향의 문제)
몸에 나빠서 안 먹어요(건강의 문제)
먹는 것에 무슨 윤리가 필요한가요
3. 옳고 그름의 문제
상식이 윤리가 될 때
동물이 불쌍해도 먹을 수는 있다?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
그렇다면 종차별주의는?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
동물이 정말로 고통을 알까?
물고기의 경우
무엇을 먹으라는 말인가
식물은 말이 없다
4. 인간이 외계인을 만났을 때
인간과 동물의 계약
동물들도 서로를 잡아먹는데
고기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외계인과의 대화 - 쉬어가는 이야기
5. 고통의 해부학
잡아먹히고 싶은 동물
동물이 공포를 느낄 때
도살장, 지옥보다 더한 곳
고기를 찍어내는 공장들
6. 지옥에 갇힌 동물들
소들의 지옥
돼지들의 지옥
닭들의 지옥
구제역 사태를 생각한다
7. 육식이 인간을 망친다
나의 고기는 당신의 굶주림
똥과 트림으로 바꾼 밀림
고기, 먹을수록 해롭다
8. 아직도 남은 문제들
고통 없이 기른 고기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동물들
사람을 일찍 죽이는 것이 나쁜 철학적 이유
동물을 일찍 죽이는 것이 나쁜 철학적 이유
실험실고기를 만들 수만 있다면
진보적 채식주의자 되기
채식주의의 명인들
9. 채식, 초보부터 프로까지
윤리적으로 생산된 고기 먹기
플렉시테리언
개고기 끊기
비덩주의
새와 물고기만 먹기
물고기만 먹기
락토-오보 채식주의
완전 채식주의 / 프루테리언
10. 채식 Q&A
에필로그
참고문헌
출판사 리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2년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 당선작
고기를 굽기 전,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철학적 질문들
‘철학자’라 불리는 별종들이 있다. 멀쩡한 책상을 앞에 두고 우리가 보고 있는 책상 따위는 없다고 하지를 않나, 거북이가 아킬레우스보다 빠르다고 하는 이들이다. 이런 철학자 한 사람이 이번에는 식탁 위의 음식들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섰다. 대관절 우리 식탁이 어떻기에? 철학자는 우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먹는 음식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정의롭고 올바른 밥상이 있고, 부당하고 잘못된 밥상이 있다는 것이다. 내 입맛에 맞거나 거슬리는 음식들, 건강에 좋거나 나쁜 음식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상식과 양심으로 조금만 반성해 보면 음식 뒤에 도사린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젯거리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기’의 문제들이다.
이 책은 채식주의, 정확하게 말해서 채식의 윤리적 측면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식습관, 즉 ‘채식’이 왜 윤리적이란 말인가? 현직 철학교수인 저자는 이 질문을 심각한 철학적 난제로 다루지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하는 자신의 체험담에서 시작하여 채식의 윤리적 의미를 친절하게 이끌어낸다. 저자의 논지는 쉽다. 인간이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들에게 가하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육식은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논지 위에서 잔인한 공장식 축산은 물론이요, 육식이 전 세계 기아인구에게 미치는 악영향까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나아가 동물에 대한 차별이 인종차별이나 여성차별과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름이 없음을 깨닫게 한다.
개인의 체험에서 보편타당한 철학으로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는 저자 자신의 체험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저자는 철학을 공부한 이래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불일치에 대해 심각한 자기반성에 부딪힌 나머지 마침내 채식주의를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철학자답게 저자의 채식 결심은 가히 철학적이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본성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싶은 선호가 있다.”(101쪽 참고)
“내가 고통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남에게도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106쪽 참고)
이런 윤리학의 기본 명제들을 전혀 반박하기 어렵다면 당연히 생활에서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채식 동기였다. 이후 저자의 행동거지는 가관이다. 고기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해 갖은 핑계를 만들어 고기에 손을 대고, 채식 실천에 거의 성공했다 싶으면 다가오는 주변의 유혹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공감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이런 솔직한 고백을 통해서 채식이란, 그리고 윤리적 반성이란, 한밤중에 잠 못 자는 철학자만이 아니라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씨름할 만한 보편타당한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에서 채식과 같은 윤리적 결단을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자신을 본보기삼아 보여준다.
우리가 고기를 포기해야 하는 2가지 이유
채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저자의 눈물겨운 고백담에 이어, 우리는 준비운동 삼아 채식의 여러 가지 동기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요컨대 전 세계 채식가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종교, 취향, 건강에 따른 채식들은 진정한 채식주의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채식주의는 신념이나 취향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개인적 선택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윤리적으로 옳기 때문에 고기를 포기하는 것은 진정한 채식주의라 할 만하다. 자신의 올바름을 주장할 수 있는 채식주의, 보편타당성을 갖는 채식주의가 아니라면 그것은 그냥 개인의 기호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생각이다. 여기에는 감성이라는 불안정한 토대를 떠나 이성적 사고와 반성에 의해서만 윤리는 탄탄한 기초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이상 제2장 참고)
저자는 채식주의가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근거로 2가지를 든다. 첫째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옳지 않은 것과 똑같이 동물차별(종차별, speciesism)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 능력이 모자란다는 이유, 차별은 신이 정해준 것이라거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정당화되어 왔지만, 그 논리적 근거는 매우 허약한 것임이 이미 드러나 있다. 만일 그런 차별이 옳다면 갓난아이나 중증 정신장애자와 같은 ‘가장자리 인간’에게도 차별이 정당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동물을 먹듯이 그들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동물을 인간과 같이 대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흑인도 피곤하면 버스에 앉을 수 있듯이 동물도 그들이 가진 본성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자는 얘기이다.(97-104쪽)
채식주의가 보편타당한 윤리일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는 ‘고통’에 있다. 모름지기 윤리학은 만인의 행복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준에서는 행복의 총량이 확보되기만 한다면 행복과 불행의 양극화나 약자의 손해는 방치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초래된다. 따라서 거꾸로 약자가 당하는 고통과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침해의 최소화 원칙’)이 윤리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128쪽 참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 동물의 고통을 줄이자는 것은 바로 이런 토대를 가진 주장이다. 고통은 누구의 고통이건 다 같은 것이고, 나의 고통만큼 남의 고통을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이다. 채식주의가 반려동물 애호와 꼭 일치하지 않는 지점이 여기에서 생긴다. 반려동물을 사랑한다면서 여전히 고기를 찾는 태도는, 동물의 고통을 줄이겠다는 윤리적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91-96쪽 참고)
‘윤리’란 사실 자체에 머무르지 않는 태도
우리가 채식을 실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윤리적 능력의 차이를 들 수 있다. 고기애호가들은 동물들끼리 흔히 그러하듯이 인간도 동물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운다. 저자는 윤리란 사실 판단(to be)을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당위(have to)를 설정하는 데 있음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동물이 서로를 해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대안이 있고 윤리적 판단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채식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여기서 채식이 건강에 나쁘다든지 하는 이유는 한 번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못한 가설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제4장 참고)
4장에서 저자는 이제까지의 설명을 재미있는 비유 한 가지를 통해 요약해서 풀어낸다. 인간보다 힘과 지능이 월등하게 뛰어난 외계인, 가령 에일리언들이 나타나서 인간이 동물을 잡아먹듯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면? 황당한 가정이지만 철학자들이 일쑤 제시하는 사고 실험이다. 인간이 동물의 고기를 먹기 위해 드는 근거들, 즉 지능과 능력의 차이, 종적인 구별, 입맛과 식감, 지구의 지배자 등등 모든 논거는 똑같이 에일리언들이 사람을 먹는 근거로 들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런 비유를 통해 철학자의 눈높이에서 채식주의 논지를 훨씬 즐겁게 이해할 수 있다.(146-157쪽)
우리의 육식이 공장식 축산, 지구적 기아를 부른다
채식주의의 윤리적 토대는 종차별의 부당함과 고통의 문제에서 모두 설명되었지만, 오늘날 빠트릴 수 없는 문제들이 또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 동물들이 더욱 고통을 겪고 있고, 이런 사육방식이 세계 최빈국의 기아 상황까지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의 고통이나 동물에 대한 차별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직접적인 윤리적 이유라면, 공장식 축산과 인간의 굶주림 문제는 간접적인 윤리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리가 잘린 채 A4 반 장 크기에서 일생을 보내는 닭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햇빛 한 점 못 쐬면서 서로를 물어뜯으며 죽어나가는 돼지들, 젖퉁이가 퉁퉁 불어 고통에 시달리는 젖소, 연한 고기맛을 위해 빈혈에 시달리다 죽는 송아지…, 이 모든 잔인한 상황은 고기를 탐하는 사람들, 그리고 비약적으로 불어난 육류 소비가 빚어낸 광경들이다. 이 책은 공장식으로 고기를 생산하는 현대의 밀집 사육방식이야말로 동물들의 고통을 한층 증가시키는 주범임을 힘주어 고발하고 있다.(제6장 참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공장식 사육에 대량으로 투여되는 사료를 만들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옥수수와 콩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고, 결국 이들 곡물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곡물의 가격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옥수수 경작 면적의 확대는 아마존과 같은 열대우림까지 무차별로 파괴하는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 저자는 이 상황을 “옥수수로 고기 만들기”라고 표현한다. 이런 비극은 다른 책에서도 여러 번 지적된 바 있지만, 윤리적 측면에서 고려되었다기보다는 인간만을 염려하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에서 지적된 것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동물과 인간의 공동 번영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다.(제7장 참고)
남아 있는 질문들
이 책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는 채식의 윤리적 근거들뿐 아니라 채식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질문들을 광범위하게 다룬다. “고통 없이 기른 동물의 고기라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동물들이 그토록 고통을 받고 있다면 차라리 일찍 죽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채식주의가 옳다면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 옳은가?” “왜 식물은 먹어도 되고 동물은 먹으면 안 될까?”와 같은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 가운데 채식주의의 윤리적 타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논지는 아무것도 없다. 저자가 이 질문들에 대해 차근차근 반박하는 내용은 제8장 「아직도 남은 문제들」과 제10장 「채식 Q&A」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책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는 추상적이고 현실성 없는 탁상 위의 철학을 논하는 책이 아니다. 채식이 올바른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채식주의의 단계별로 하나하나 설명함으로써 실천적 길잡이를 제시한다.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기른 고기만 먹는 데서 시작하여, 먼저 덩어리 고기를 피하고, 그 다음으로 생선을 피하고, 마침내 온전한 채식에까지 이르는 현실적인 방법들이 제시된다. 물론 저자가 완전채식주의(프루테리언)를 실천하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그 과정에서 자기와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가감없이 고백하는 데서 이 책의 공감 능력을 찾을 수 있다.(제9장 참고) 이런 여러 장점들이 높이 평가된 덕에 이 책은 “2012년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 당선작 20편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책 속으로
“대학생 시절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일찌감치 도서관 자리를 잡으러 가면 그 새벽에 화장까지 다 하고 오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겨우 고양이 세수나 하고 온 주제인데, 저렇게 뽀얗게 화장까지 하고 오다니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는 건지 감탄스러웠다. 아니, 예쁜 모습들이 더없이 좋았다. 하이힐 신은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어딘가 불편해보이기도 하지만, 허리를 곧추 세우고 항상 긴장된 자세로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아, 남에게 예뻐 보이려면, 남보다 조금이라도 아름다워지려면, 저렇게 부지런하고 불편해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하는 고민도 다를 게 없다. 윤리적이 되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아서는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고기를 먹는 것이 왜 윤리적인 문제일까? 먹는 일에 무슨 놈의 윤리가 필요한가? 남의 것을 훔쳐 먹는 것도 아닌데, 고기를 먹거나 안 먹는 것이 왜 윤리와 관련이 된다는 말인가?”--- p.11
“솔직히 말해서 나는 고통 받는 동물을 보아도 이효리 씨와 같은 동정심을 느끼지 못한다. 동물을 예뻐하지도 않으며, 더구나 반려동물 따위는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다. 더 솔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동물을 예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옆에 다가오는 것조차 싫다. 나의 처가에서는 개를 키우는데 처가에 갈 때마다 그 개가 옆에 오는 것이 싫고, 개 역시 내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아는 듯 옆에 오지도 않는다. 나는 적어도 동물에 대해서는 냉혈한이다. 또 나는 동물이 인간과 평등하다거나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여러 면에서 동물보다 우월하며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전제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윤리적 채식주의를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p.92
“동물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니 인간 역시 동물을 먹어도 된다는 말은 인간도 동물의 하나라고 보는 입장이다. 맞는 말이다. 인간도 동물의 하나이다. 그리고 동물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인간이 동물을 먹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전통이므로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나아가 자연스러운 일이니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안 될까?”--- p.142
“나 한 명이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서 과연 동물들의 고통이 사라질까 회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나 한 사람 더 투표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겠는가?”라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분명히 나 한 명의 투표가 세상을 바꾼다.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1년에 얼마만큼의 고기를 먹을까? 쉽게 닭으로 계산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1년에 10.68킬로그램의 닭고기를 먹는다고 한다(한국육류수출입협회 통계). 치킨집에서 가장 많이 쓰는 11호 닭의 무게가 1.1킬로그램이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1년에 닭을 10마리 정도 먹는 셈이다. 즉 내가 고기를 안 먹는다면 1년에 닭 열 마리가 고통을 덜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축산업자가 즉시 그만큼의 생산량을 줄이지는 않겠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고통 받는 동물의 숫자도 줄어들 것이다.”--- p.330
전 세계 10억 마리 소가 트림하자 지구가 병들었다
똥과 트림으로 바꾼 밀림 맥도날드, 아마존을 삼키다 소 한 마리가 싸는 똥의 양은 사람 16명의 양과 같아
“맥도날드, 아마존을 삼키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신문에 떴다. 무슨 뜻일까? 맥도날드 회사가 아마존닷컴을 인수했다는 뉴스일까? 그게 아니다. 아마존이란 남아메리카에 있는 진짜 아마존을 말하며, 맥도날드 햄버거나 맥너겟 때문에 아마존이 황폐화되고 있다는 뉴스이다.
“맥도날드, 아마존을 삼키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신문에 떴다. 무슨 뜻일까? 맥도날드 회사가 아마존닷컴을 인수했다는 뉴스일까? 그게 아니다. 아마존이란 남아메리카에 있는 진짜 아마존을 말하며, 맥도날드 햄버거나 맥너겟 때문에 아마존이 황폐화되고 있다는 뉴스이다.
꼭 아마존뿐만이 아니라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의 많은 열대우림들이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목초지로 바뀌거나 소 사료를 위한 옥수수나 콩 경작지로 바뀌고 있다. MBC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2009~10)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아마존 밀림은 수많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목초지와 경작지를 위해 열대우림을 밀어버리는 것은 원주민들을 숲 밖으로 내모는 일이기도 하다. 1988년에는 고무나무 수액 채취업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치코 멘데스Chico Mendes가 벌목꾼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 전 세계적으로 논란이 일어났다. (가수 폴 메카트니의 곡 “How Many People”은 멘데스에게 바치는 노래이다.) 문제는 벌목꾼이나 살인 청부업자에게 죽은 원주민이나 아마존 보호운동가가 멘데스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 또는 산소탱크라 불리는 곳인데, 알다시피 산림이 파괴되면 탄소를 더 이상 저장하지 못해 온실가스 효과가 확산된다. 또한 아마존은 태고의 생태계를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지구상 모든 종들의 50퍼센트가 살고 있을 만큼 생물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치코 멘데스의 피살은 세계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지키려고 한 것은 단지 아마존 생태계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생존권이었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고기를 먹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생물군의 영토가 얼마나 무참히 파괴되고 있는지 고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열대우림을 개간해서 생산한 소고기로 햄버거를 하나 만들어 먹으면 75킬로그램에 이르는 생명체가 파괴된다고 한다. 그 결과 2000년 한 해에만 포르투갈의 2배에 해당하는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말았다(『고기, 먹을수록 죽는다』, 5장 “기후변화 문제”). 이런 속도로 벌목이 진행되면 앞으로 20년 이내로 남아있는 열대우림이 모두 사라져버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더 웃지 못할 사실은, 열대우림을 밀고 개간한 땅들은 땅의 무기질이 빈약해 목축에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다. 3~5년 목축을 하고 나면 그 땅을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그 땅을 버리고 또 새로운 천연림을 파괴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육식의 종말』). 꼭 열대우림이 아니더라도 공장식 축산은 모든 지역의 숲을 파괴한다. 존 로빈스의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에 따르면, 미국 사람들이 땅을 가축사료 경작지로 사용하는 대신에 사람들이 먹을 식량 재배에만 이용한다면 농지로 바뀐 미국의 숲 가운데 4분의 3이 다시 숲으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열대우림 파괴에 대한 비난이 거세다 보니 맥도날드는 1989년에 열대우림을 개간해 기른 소고기는 구입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외국의 맥도날드 홈페이지에 가보면 맥도날드가 환경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려주기 위해 이 사실을 홍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맥도날드 햄버거가 소고기의 전형이 된 탓에 맥도날드의 조치가 상징적으로 보이지만, 아마존 산 소고기는 여전히 다른 곳에 수출되고 있고 그 속도도 빠르게 늘고 있다. 그리고 열대우림을 밀어버리고 만든 농경지에서 경작한 콩을 유럽에서는 여전히 가축사료로 쓰고 있으며, 맥도날드도 그렇게 키운 고기를 여전히 구매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5월 18일 환경단체회원들이 한국 맥도날드 본사 앞에서 이러한 환경 파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지구의 허파가 병들고 있다! WWF(세계자연보호기금) 포스터
숲을 베어내고 사료로 쓰일 곡물을 심는 것도 문제이지만 풀밭이던 곳에 곡물을 심는 것도 환경에는 문제가 된다. 풀밭은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뿌리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란다. 그런데 그 풀밭에 소 사료로 쓰이는 옥수수를 심으면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옥수수는 지력 즉 토지 영양분을 약탈적으로 빨아들이기 때문에 비옥한 토양을 금세 망치게 된다(「SBS 스페셜: 옥수수의 습격」).
가축을 대량으로 사육하는 데는 물도 엄청나게 소비된다. 예전의 가족농에서 가축을 키우는 데 필요한 물은 가축이 마시는 물이 전부였다. 공장식 사육에서는 가축사료를 경작하기 위해, 그리고 가축의 똥오줌을 씻어내기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을 쓴다. 알기 쉽게 비교해 보면 햄버거에 들어가는 소고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물은 같은 크기의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의 15배, 감자와 비교하면 64배, 토마토와 비교하면 86배가 든다(『죽음의 밥상』). 더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무게 450킬로그램짜리 소 한 마리를 키우는데 들어가는 물의 양은 해군 구축함 한 척을 띄울 수 있는 양이다(존 로빈스, 『음식혁명』)! 이게 과장으로 보인다면 이런 비유는 어떨까? 소 한 마리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물의 양은 도살자를 떠내려가게 할 수 있다.
논리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대한 적이 있을 것이다. “버스가 소비하는 연료는 승용차가 소비하는 연료보다 많다.” 이 말이 맞을까 틀릴까? ‘버스’를 개별적인 의미로 보느냐 집합적인 의미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곧 버스 한 대와 승용차 한 대를 비교하면 위 진술은 맞는 말이지만, 버스 전체와 승용차 전체를 비교하면 틀린 말이 된다. 승용차 대수가 버스 대수보다 훨씬 많으니까. 그렇다면 소와 닭 중에 더 심하게 환경을 오염시키는 쪽은 어느 쪽일까? 이 질문도 한 마리씩만 비교하느냐 전체를 비교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한 마리씩 비교하면 당연히 소가 닭이나 돼지보다 훨씬 심하게 환경을 오염시킨다. 그러나 닭은 워낙에 대량 사육을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환경을 더 심하게 오염시킨다. 미국에서 2010년 소비된 닭고기를 생산하느라 배출한 이산화탄소량을 자동차가 달린 거리로 환산해보면 약 898억 100만 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다(『고기, 먹을수록 죽는다』, “기후변화 문제”). 감이 안 잡히면 지구에서 태양까지 300번을 왕복하는 거리라고 보면 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똥을 싼다. 도시에서는 사람의 분변 처리만으로도 큰 고민거리인데, 시골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름으로 썼기 때문이다. 예전에 시골 사람들은 집 밖에 나갔다가도 용변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집에 와서 해결했다. 똥오줌은 모두 거름을 만들기 위한 귀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가축도 마찬가지였다. 가축의 ‘축畜’ 자 역시 밭[田]을 거뭇하게[玄] 한다는 뜻으로 풀 수 있는데, 소가 논밭을 갈아 작물을 잘 자라게 하기도 하지만 가축의 똥으로 논밭을 기름지고 풍부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나 돼지나 닭을 우리에서 키울 때는 그 똥을 짚단과 섞어 거름으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작물을 키웠다. 방목을 할 때는 똥이 자연스럽게 식물의 거름이 되었다. 가축이 식물을 먹고 배설을 하면 그 배설물이 다시 식물을 기르는 과정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이것을 생태계 순환이라고도 하고 가축과 식물의 공진화라고도 한다.
그러나 공장식 축산이 시작되면서 이런 생태계는 깨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한 곳에서 기르는 가축의 마릿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배설물의 양도 엄청나게 많다. 공장식 농장에서 기르는 가축의 총 마릿수는 닭, 돼지, 소의 순서이지만 싸지르는 똥의 양은 거꾸로다. 소 한 마리가 싸는 똥의 양은 사람 16명이 싸는 똥의 양과 같은데, 10만 마리의 소를 기르는 사육장은 뉴욕과 똑같은 양의 배설물을 내놓는다(『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미국의 대규모 농장들에서 나오는 배설물은 거름으로 자연스럽게 처리할 수준을 넘기 때문에 쌓이고 쌓인 나머지 작은 호수 또는 저수지 크기의 못을 이룬다.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보면, 어떤 일꾼이 그 ‘인공 못’의 유독가스에 의식을 잃고 빠지는 사고가 생기는데 그를 구하려 한 친척들까지 빠져죽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나 돼지의 배설물은 그 양도 양이지만 질도 문제가 된다. 질소와 인의 농도가 너무 높아서 거름으로 쓰면 작물을 죽일 수가 있다. 그런 유독 물질이 땅으로 스며들고 강으로 흘러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문제가 되는 사안이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소의 트림이다. 장난 같은 말로 들리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소는 트림을 할 때 메탄가스를 내뿜는데, 소 4.2마리가 자동차 한 대에 해당하는 온실가스를 내뿜는다. 옛날부터 인류와 함께 살아온 소가 이제 와서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몰리게 되었으니 소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일 텐데, 사실은 소 탓이라고 할 수 없다. 소의 트림이 새삼 문제되는 것은 먹이와 마릿수 때문이다. 풀을 먹지 못하고 곡물만 먹으니 소화가 안 돼서 트림을 더 많이 하게 된 것이다. 또 소가 적었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전 세계에서 10억 마리가 넘는 소가 사육되는 시스템이 되면서 소의 트림도 걱정거리가 된 것이다. 소 탓이 아니라 소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의 욕심이 스스로 지구온난화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채널 예스 글 | 최훈
동물 해방 피터 싱어 저 | 연암서가 | 2012년 09월 | 원서 : Animal Liberation(2009)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1975) 출간 이후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인간 가치 대학 센터’에서 생명 윤리학 Ira W. DeCamp 교수이자 멜버른 대학교 계관 교수이다. 그는 『실천윤리학(Practical Ethics)』(1979), 『당신이 구할 수 있는 생명(The Life You Can Save)』(2009), 『현실 세계에서의 윤리학(Ethics in the Real World)』(2016) 등을 저술하였다. 2005년 『타임』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명단에 포함시켰으며, 2012년에 오스트레일리아 국가 최고 시민 훈장인 Companion of the Order of Australia를 받았다.
목차
2009년판 서문
1975년판 서문
제1장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인간 평등의 토대가 되는 윤리 원리가 배려의 범위를 확장하여 동물도 동등하게 배려하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차별과 인종차별, 그리고 동물의 도덕적 지위/동물이 느끼는 고통/종차별 거부
제2장 연구를 위한 도구
당신의 세금이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미국의 동물 실험 실태/심리학 분야에서의 동물 실험/실험자들의 의인주의 회피/독극물을 이용한 동물 실험/동물 실험을 재고해 보려는 징조/의학 분야에서의 동물 실험/다양한 실험/어떻게 잔혹한 실험이 가능할 수 있는가//과학자들의 반응/규제의 결여/동물 실험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언제인가//동물 실험 대체
제3장 지금 공장식 농장에선…
저녁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고기가 살아 있는 동물이었을 때 어떤 일을 겪었을까
육계들의 운명/과밀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산란 닭/영리한 돼지 사육방법/식용 송아지가 살아가는 환경/젖소의 운명/육우가 살아가는 환경/다섯 가지 기본적인 자유/가축들의 고통과 자행되고 있는 관행들/도축의 현장/동물의 복리를 향한 발걸음
제4장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
환경 손실을 줄이면서 고통을 적게 산출하고 더 많은 음식을 생산하는 방법
고기 생산의 비효율성과 환경 파괴/무엇까지 먹을 수 있는가/채식주의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
제5장 인간의 지배
종차별주의의 간략한 역사
기독교 이전의 사유 방식/기독교의 사유 방식/르네상스 시대/계몽 시대와 그 이후
제6장 오늘날의 종차별주의
동물 해방에 대한 옹호, 합리화,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과 이를 극복하는 데서 이루어진 발전
인간이 우선이라는 가정/종차별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식물도 고통을 느끼는가/종차별주의와 철학/결론
더 읽을거리 / 주석 / 감사의 말 / 역자 후기
부록
/ 피터 싱어가 말하는 피터 싱어
/ 동물 해방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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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 혁명의 도화선이 된 책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동물의 해방을 주장하는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대표작 『동물 해방』의 개정완역판이 연암서가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판(제4판)은 이전 판들 출간 이후 이 책이 가져온 학계 및 관련 산업에 미친 변화와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였으며, 부록으로 ‘피터 싱어가 말하는 피터 싱어’와 ‘동물 해방 30년’을 수록하였다. 1975년 처음 출간된 이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 선구적인 저술은 우리에게 동물에 대한 태도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으며, 동물들에 대한 잔혹 행위를 금하는 범세계적 운동을 촉발했다.
이 책에서 싱어는 먼저 자신의 윤리적인 입장인 보편주의적 공리주의의 논리적 정당성과 이의 논리적 귀결을 소개하고, 이어서 사실에 관한 자료를 면밀하게 분석한다. 그는 수많은 동물들이 관여하고 있는 실험실과 공장식 농장이라는 환경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환경이 동물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 분명하며, 이러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이와 같은 잔혹 행위가 나타나게 된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배경을 살피고, 마지막으로 그와 같은 동물 학대의 배후에 깔려 있는 종차별주의의 사고의 그릇됨을 폭로하고 이를 극복해 나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아마도 종차별주의에 깊이 빠져 있거나 육식을 지나치게 즐겨하여 다른 생각의 여지를 두는 사람이 아니라면 싱어의 논리에 결국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삼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성과 논증의 힘을 굳게 신뢰하고 있다. 나는 오늘날 동물 해방 운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논증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갖게 하리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완전히 냉소적이 되어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이나 감정 때문에 움직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동물 해방 운동은 철학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운동으로, 그들이 사람들과 논의를 함으로써, 전제들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함으로써,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증거를 끌어옴으로써 역할을 했던 운동이다. 이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부록: 피터 싱어가 말하는 피터 싱어 중에서
책 속으로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인간 아닌 동물들을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면밀하고도 일관되게, 그리고 남김없이 생각해 보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은 우리의 현재의 태도와 행위 뒤에 숨겨져 있는 편견을 폭로한다. 그러한 태도가 어떠한 관행으로 나타나고 있는가―인간의 폭정으로 인해 어떻게 동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를 서술하고 있는 장들에서는 정서를 자극하는 구절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자극이 책에서 서술된 관행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동반되는 노여움과 분개의 정서이길 바란다. 하지만 내가 이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독자의 정서에만 호소하고 있는 경우는 이 책의 어떤 곳에도 없다. 서술해야 할 내용이 불쾌한 사실이라면, 불쾌하다는 것을 숨기면서 이를 어떤 중립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당신은 ‘열등 인간’이라고 간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나치 강제수용소 ‘의사들’의 냉정한 실험을 흥분된 감정 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오늘날 미국, 영국, 그리고 그 외 여러 곳의 실험실에서 자행되고 있는 몇 가지 실험을 서술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 실험을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통해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도덕 원리에 호소함으로써 반대를 정당화하고자 하며, 위의 두 가지 종류의 실험에 희생되고 있는 대상에 이러한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요구다.--- p.17
해방 운동은 도덕적 지평의 확장을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까지는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던 관행들이 정당화될 수 없는 편견의 결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 누가 자신의 모든 태도와 관행이 정당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억압자 편에 들어 있지 않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집단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태도로 인해, 그리고 그러한 태도에 따르는 관행으로 인해 고통 받는 존재들의 입장에서 우리의 태도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익숙지 않은 정신적 전환을 이룰 경우, 우리는 다른 집단을 희생해서 동일 집단―우리들 자신이 속해 있는―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시종일관 노력하고 있는 우리의 태도와 관행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칠 경우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해방 운동이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당신의 태도와 관행을 바꾸어 매우 규모가 큰 존재들의 집단, 즉 우리 종이 아닌 다른 종의 성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있다. 나는 다른 생물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매우 오랜 역사를 갖는 편견과 독단적인 차별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익에 대한 동등한 고려라는 기본 원리를 다른 종의 성원에게 확장할 것을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착취 집단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이기적 욕구를 제외하고는―주장하고 있다. 나는 다른 종의 구성원들에 대한 태도가 다른 인종이나 성에 대한 편견과 마찬가지로 반대할 만한 편견임을 당신이 인식해 주길 바란다.--- p.19
도덕 철학의 한 학파인 개혁적 공리주의의 창시자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은 “모든 사람은 각각 한 명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아무도 그 이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정식을 이용하여 도덕적 평등의 핵심적 토대를 자신의 윤리학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행위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개별 존재들의 이익은 다른 존재들의 이익과 다를 바 없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또한 동일한 비중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벤담 이후의 공리주의자 헨리 시즈윅Henri Sidgwick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범 우주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 개인의 이익(good)은 다른 사람의 이익 이상의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더욱 최근 들어 현대 도덕 철학의 주요 인물들이 견지하는 도덕 이론의 근본 전제는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있는데, 즉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라’와 유사한 어떤 조건을 자신들의 근본 전제로 생각하는 데 서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p.33
만약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와 같은 고통을 고려하지 않으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평등의 원리는 그 존재가 어떤 특성을 갖건 그 존재의 고통을 다른 존재의 동일한 고통과 동등하게―대략적이나마 비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낄 수 없거나 즐거움이나 행복을 누릴 수 없다면, 거기에서 고려해야 할 바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쾌고 감수 능력(limit of sentience)은 다른 존재들의 이익에 관심을 가질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우리가 옹호할 수 있는 유일한 경계가 되는 것이다. 지능이나 합리성 등과 같은 다른 특징으로 경계를 나눈다는 것은 임의적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들이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예컨대 피부색과 같은 다른 특징을 경계 기준으로 채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다른 인종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에 자신이 속한 인종의 이익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측면에서 평등의 원리를 위배하고 있다. 성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한 성의 이익을 우위에 둠으로써 평등의 원리를 위배한다. 이와 유사하게 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한 종의 이익이 다른 종의 더욱 커다란 이익에 비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경우에 문제의 패턴 자체는 동일하다.--- p.38
인간 아닌 동물들이 고통을 느끼는가?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간이건, 인간이 아니건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 자신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는 직접적인 고통에 대한 경험을 통해, 예컨대 누군가가 담뱃불을 손등에 지지는 경우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건, 길 잃은 개이건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고통이란 의식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는 ‘정신적인 사건(mental event)’이다. 고통은 그 자체를 관찰할 수가 없다. 몸을 뒤튼다거나, 고함을 지른다거나 담뱃불에서 손을 치우는 등의 행위 자체는 고통이 아니다. 두뇌 활동에 대한 신경학자의 기록 또한 고통 그 자체에 대한 관찰이 아니다. 고통이란 본인이 느끼는 무엇이며, 우리는 다양한 외적 표시들로부터 타인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론상으로 보자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추정할 때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가 교묘하게 제작된 로봇이며, 고통의 느낌을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표현하지만 다른 기계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느끼지 못하며, 영민한 과학자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문제는 철학자들에게 골칫거리의 과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일상인들 중에선 그 누구도 가까운 친구가 자신처럼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추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위하는가를 관찰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추정이다. 또한 이는 친구들이 우리와 같은 존재, 즉 우리와 동일한 기능을 갖는, 유사한 경우에 유사한 느낌을 산출할 수 있는 신경계를 갖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추정이다.--- p.41
과거로부터 과학에서는 가급적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온건한 설명 방식이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져 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의식적 느낌, 욕구 등을 거론하며 동물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즉 의식 또는 느낌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어떤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단순한 설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들의 실제 행동에 관한 설명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해 볼 때, 우리는 의식적 느낌, 욕구 등의 용어가 포함되지 않은 설명이 다른 경쟁하는 설명보다 사실상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의식과 고통의 느낌을 언급하지 않을 경우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사한 신경계를 갖는 동물들의 유사한 행동을 인간의 행동과 동일하게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설명, 예컨대 인간 아닌 동물들의 행동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창안해서 이를 이용해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들의 행동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보다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p.44
지금까지 나는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동물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한 바가 없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 생각해 볼 때, 고통을 가하는 행위에 평등의 원리를 적용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그 자체로 나쁘며, 따라서 고통 받는 존재의 인종이나 성, 또는 종과 무관하게 고통은 억제되거나 최소화되어야 한다. 고통이 얼마나 나쁜가는 그것이 얼마나 강렬하며,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동일한 강도와 지속성을 갖는 고통은 동일하게 나쁘며, 그것을 인간이 느끼는지 또는 동물이 느끼는지는 고통에 대한 평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p.52
종차별주의를 피하고자 할 경우 우리는 모든 측면에서 유사한 존재들이 유사한 생명권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들 자신이 속해 있는 생물학적 종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권리를 갖는지의 여부를 나누는 합당한 도덕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제한 범위 내에서도 우리는 예를 들어 자기 인식 능력과 미래에 대한 계획 능력, 그리고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능력 등을 갖춘 정상적인 성인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방금 언급한 성인 인간이 갖춘 특징들을 공유하지 못하는 쥐를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입장을 견지할 수가 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인간이 갖는(쥐는 동일한 정도로 갖지 않는) 가까운 혈연간의 유대나 다른 사적인 관계에 호소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을 죽일 경우 다른 사람들이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낄 것이기 때문에 쥐보다는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밖에 우리는 이들 요인들이나 다른 요인들의 조합으로 인해 정상적인 인간 살해가 더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을 선택하건 우리는 그러한 기준이 우리 종의 경계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떤 존재의 어떤 특징이 다른 존재들에 비해 그 존재의 생명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는 입장을 정당하게 견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판단 기준으로 가름해 보아도, 어떤 인간 아닌 동물의 생명이 어떤 인간의 생명보다 가치가 있는 경우가 분명 있다. 예를 들어 침팬지, 개 또는 돼지는 심각한 결함을 가진 아이나 노쇠한 고령의 노인보다 높은 자기 인식 능력 및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생명권을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은 특징들에 근거 지우고자 할 경우, 우리는 결함을 가지고 있거나 노쇠한 사람들과 유사한, 또는 그 이상의 생명권을 이러한 동물들이 갖게 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55
결론적으로 나는 “종차별주의를 반대한다”는 주장이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가 있다”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의식,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가질 수 있는 능력,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등은 고통을 야기하는 문제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설령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다른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고통은 결국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목숨을 앗아가는 문제를 따져보고자 할 경우에는 위에서 열거한 능력들을 감안해야 한다. “추상적인 사고나 미래에 대한 계획, 그리고 복잡한 의사소통 등이 가능한 자의식을 갖추고 있는 생물의 생명이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 생물의 생명에 비해 가치가 있다”는 주장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고통을 가하는 문제와 목숨을 앗아가는 문제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 하는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p.57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인간 아닌 동물들에 대한 실험은 종차별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인간 혹은 다른 동물들의 중요한 이익을 증진시킬 가망이 조금도 없는 수많은 실험으로 인해 가혹한 고통이 야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실험은 다른 상황과 동떨어져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실험은 주요 산업의 일부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실험자들이 동물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과학 실험’의 횟수를 보고해야 하는 영국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988년 한 해 동안 동물에게 시행된 과학 실험이 350만 번이나 되었다. 미국에서는 영국과 비교할 만큼 정확성을 지닌 통계 자료가 없다. 동물 복리법이 시행되고 있는 미국에서는 농무부 장관이 등록된 시설의 수와 더불어 그 시설이 사용하는 동물의 숫자가 기재된 보고서를 발행하고 있지만 이는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점이 많다. 이 보고서에는 실험에 사용되는 쥐(rats), 생쥐(mice), 새, 파충류, 개구리 또는 가축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보고서에는 중등학교에서 사용되는 동물도 제외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동물을 주 경계 너머로 수송하지 않는 연구 시설이 수행하는 실험이 포함되지 않으며, 연방 정부의 승인을 얻은 연구 시설 혹은 연방 정부와 계약을 맺은 연구 시설이 행한 실험도 포함되지 않는다.--- p.81
수없이 시행된 실험들 중에서 중요한 의학 연구에 이바지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실험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동물들이 대학의 임학과, 심리학과 등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그보다 많은 동물들이 상업적인 목적, 즉 화장품, 샴푸, 식용 색소, 그 외 하찮은 품목 등의 실험에 이용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있어날 수 있는 것은 우리 종 구성원이 아닌 생물의 고통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의 편견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물 실험 옹호자들은 동물들이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의 고통을 부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실험이 인간의 목적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주장하려면 인간과 동물들 간의 유사성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험자들은 쥐에게 굶주림과 전기 충격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고, 그것이 그들에게 궤양을 일으키는가(실제로 궤양을 일으킨다)를 살펴본다. 그런데 실험자들이 그런 실험을 하는 이유는 쥐가 인간과 매우 유사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유사한 방식으로 전기 충격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p.86
가장 고통스런 실험 중 상당수는 심리학 분야에서 행해지고 있다. 심리학 실험실에서 사용된 동물들의 수를 어느 정도 파악해 보고자 한다면 1986년 한 해 동안 ‘국립정신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가 350건의 동물 실험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될 것이다. NIMH는 심리학 실험에 자금을 지원하는 여러 연방 기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기관은 뇌에 직접적인 조작을 가하는 내용이 포함된 실험에 약 1,100만 달러를 사용하며, 약물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실험에 500만 달러 이상을, 학습과 기억 실험에 약 300만 달러를, 수면 박탈, 스트레스, 공포와 불안 등을 포함한 실험에 200만 달러 이상을 사용한다. 이 정부 기관은 동물 실험에 매년 3,000만 달러 이상을 사용하는 것이다.--- p.90
전기 충격은 동물에게서 공격적인 행동을 촉발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아이오와 대학에서 행해진 한 연구에서 리처드 비켄Richard Viken과 존 넛슨John Knutson은 160마리의 쥐를 집단으로 나누어 그들을 전기가 통하는 스테인리스강鋼으로 된 바닥의 우리 안에서 “훈련시켰다.” 짝을 이룬 쥐들에게는 곧게 선 자세로 서로를 마주할 경우 상대 쥐에게 덤비거나 상대를 물어뜯음으로써 싸움을 학습하게 될 때까지 전기 충격을 가했다. 쥐들이 처음 충격을 받을 때 즉시 이렇게 하도록 학습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평균 30번의 훈련이 필요했다. 그 다음으로 연구자들은 훈련되지 않은 쥐들이 있는 우리에 충격 훈련을 받은 쥐들을 집어넣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하루가 지난 후 실험자들은 모든 쥐들을 살처분하고 털을 깎아 상처를 검사했다. 실험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실험 “결과가 전기 충격으로 유발된 반응의 공격적 또는 방어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p.99
가장 널리 알려진 급성 독성 실험은 LD50이라고 하는 것이다. LD50은 ‘50퍼센트의 치사량(lethal dose 50 percent)’을 약어로 쓴 것이다. 즉 연구 대상이 되는 동물의 절반이 죽게 되는 물질량을 일컫는 것이다. 실험자들은 그 용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표본 집단의 동물들을 중독시킨다. 대체로 반은 죽고 나머지 반은 살아남은 시점에 이르러서는 실험 대상이 된 모든 동물들의 건강이 매우 나빠져 있으며, 격심한 고통을 겪는다. 비교적 무해한 물질의 경우마저도, 동물들의 반을 죽게 하는 농도를 발견하는 것은 좋은 방법으로 간주된다. 그 결과 동물들은 대량의 물질을 강제로 먹게 된다. 그들은 단지 많은 분량 또는 고농도의 물질을 먹게 됨으로써 죽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그 제품을 사용할 것인지의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러한 실험은 동물의 50퍼센트를 중독사시키는 당해 물질의 양이 얼마 만큼인가를 측정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데, 죽어가는 동물은 정확하지 못한 결과가 산출되리라는 우려 때문에 반복적으로 실험 대상이 되며, 이로 인해 죽음을 통해 신속하게 편안함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미국 의회기술평가국은 매년 ‘수백만’의 동물들이 미국 내에서 독성 실험에 사용되고 있다고 추산했다.--- p.107
화장품 및 기타 물질들이 동물들의 눈에 투입되어 실험되고 있다. 드레이즈Draize 식 눈 자극 실험은 1940년대에 최초로 사용되었다. 당시 미국 식품의약청에서 근무하고 있던 J. H. 드레이즈J. H. Draize는 어떤 물질이 토끼의 눈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자극을 주는가를 평가할 척도를 개발해냈다. 대개 토끼들은 머리만을 내민 채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에 놓여진다. 이러한 장치는 동물들이 눈을 긁거나 부비는 것을 막아 준다. 그리고 나선 실험 물질(표백제, 샴푸, 또는 잉크 등과 같은)를 개별 토끼의 한 눈에 투여한다. 이때 아래 눈꺼풀을 당겨서 컵처럼 생긴 움푹 파인 조그만 곳에 물질을 집어넣는 방법이 사용되며, 그리고는 눈이 감겨진다. 때로는 이러한 방법이 반복해서 시행된다. 실험자는 토끼를 매일 관찰하며, 이때 눈에 종기, 궤양, 감염, 출혈 등이 나타났는지를 조사한다.--- p.108
동물 실험은 인간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이로 인해 동물에게는 위험하지만 인간에게는 위험하지 않은 유익한 제품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인슐린은 새끼 토끼와 쥐에게 기형을 일으킬 수가 있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평온을 가져오는 모르핀이 쥐에게는 극도의 흥분을 일으킨다. 또 다른 독물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만약 페니실린의 유독성이 모르모트를 통해 판단되었다면, 결코 페니실린은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p.115
실험이 ‘의학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그러한 연구가 인간의 고통을 경감하는 데 기여하리라고 믿는다. 때문에 이에 수반되는 고통이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 이미 치료용 의약품 실험이 선 의 최대화보다는 이익의 최대화에 대한 욕구의 추동을 받는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의학적 연구’라는 막연한 말은 일반적인 지적 호기심으로 시행된 연구에도 사용될 수 있다. 만약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호기심은 지식을 얻기 위한 기초적인 연구의 일부로 받아들일 만하다. 하지만 고통을 야기한다면 이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본적인 의학 연구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실험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p.121
어떻게 가학성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원숭이를 평생 동안의 우울증으로 몰아넣고, 개에게 열을 가하여 목숨을 빼앗고, 고양이를 약물 중독에 빠뜨리며 일과를 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는 어떻게 흰 가운을 벗고, 손을 씻고, 자신의 가족들과 식사를 하러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납세자들은 이러한 실험에 돈이 사용되고 있음을 용인해도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학생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대학 캠퍼스에서 자행되어 왔던―그리고 현재도 자행되고 있는―잔혹 행위는 무시하면서 모든 종류의 부정의ꠚ.?u, 차별, 그리고 모든 종류의 억압(아무리 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일이라 해도)에 반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우리가 종차별주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인간에게 가해졌다면 분노를 느꼈을 잔혹 행위가 다른 종 구성원들에게 가해질 경우에는 입을 다문다. 연구자들은 종차별주의적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로 실험동물을 생각하기 보다는, 장비나 실험실 기구 품목쯤으로 간주하게 된다. 실제로 정부 자금 지원 기관의 보조금 신청서에는 시험관 및 기록 장비들과 더불어 동물들이 ‘공급품’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p.133
아이의 잠재력을 내세워 실험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의 유아는 성장한 인간 아닌 동물 이상의 도덕적인 배려와 관련한 중요한 특징들을 갖추고 있지 않다. 잠재력이라는 특징을 중요한 요소로 생각해야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유아에 대한 실험과 아울러 낙태 또한 비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아의 잠재력과 태아의 잠재력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자 한다면 원래의 질문을 약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아가 회복될 수 없는 정도의 뇌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6개월 된 유아 수준 이상의 지적 발달을 기대할 수 없다고 가정해 보자.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유아들은 실제로 많이 있으며, 전국 각지의 특별 병동에 수용되어 있다. 그들의 일부는 부모와 친척들에게 버림을 받은 후, 그리고 슬프게도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그렇게 수용되어 있다. 지적 장애가 있음에도 이 아이들의 해부학적·생리학적 특성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정상인들과 동일하다. 때문에 그들에게 다량의 바닥 광택제를 강제로 먹이거나 눈에 화장품 농축액을 떨어뜨려 결과를 확인할 경우 인간에 대한 안전도를 나타내 주는 매우 신뢰할 만한 지표를 얻게 될 것이다. 이는 현재 다른 여러 종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로부터 얻게 되는 자료보다도 더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LD50 실험, 드레이즈 눈 실험, 방사능 실험, 가열 실험, 그리고 이 장 전반부에서 서술한 다른 많은 실험들을 개나 토끼 대신 심각한 뇌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행할 경우, 인간의 반응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p.152
우리가 더욱 계몽된 국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최소한의 개혁을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동물의 이익이 그와 유사한 인간의 이익과 동등한 배려의 대상이 되는 지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오늘날 우리가 거대 산업으로 파악하고 있는 동물 실험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동물들을 가두어 두었던 우리는 텅 비게 될 것이며, 실험실은 폐쇄될 것이다. 하지만 의학 연구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거나, 시장에 실험을 거치지 않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미 말했던 바와 같이 신제품의 경우는 이미 안전한 것으로 알려진 성분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조금 덜 사용하면서 이럭저럭 살아가면 될 것이다. 이것이 커다란 손실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제품을 실험하고자 할 경우 동물을 사용하지 않는 다른 방법이 사용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방법이 앞으로 발견될 것이다.--- p.160
어떤 경우라도 동물 실험이 우리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방법을 통해 동물 실험의 정당성에 관한 윤리적 질문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와 같은 혜택이 있다는 증거가 아무리 명백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익 동등 고려라는 윤리적 원리에 입각해서 생각해 볼 때, 지식을 획득하는 몇 가지 수단들은 배제시켜야 한다. 지식을 추구할 권리에 신성함을 부여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미 우리는 과학 연구에 관한 많은 제한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사람들의 동의 없이 그들에 대한 고통스런, 또는 치명적인 실험을 수행할 일반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와 같은 실험을 통해 다른 어떤 방법보다 훨씬 신속하게 지식이 발전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생기더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는 실험에 관한 기존의 제한을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주요 건강 문제들은 우리가 어떻게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방식에 따라 실천하는 데 충분한 비용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적절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산업화가 이루어진 서구의 빈민가를 휩쓰는 질병들은 대체로 우리가 치료법을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와 같은 질병들은 적절한 영양과 위생, 그리고 건강관리가 갖추어진 공동체에서는 크게 줄어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매주 25만 명의 아이가 목숨을 잃고 있으며, 그들의 사망 중 4분의 1이 설사로 인한 탈수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미 알려진, 동물 실험이 필요 없는 단순한 치료만으로도 이들 아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진정으로 건강 개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연구소를 떠나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존의 의학적 지식이 닿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인간의 건강에 훨씬 효과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 p.167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살아 있는 동물 학대에 대해 무지하다. 가게나 식당에서 식품을 사거나 먹는 것은 오랜 학대 과정의 종착점이다. 최종 제품 외의 나머지 과정은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깔끔한 플라스틱 꾸러미(package) 안에 담겨 있는 고기와 가금을 구입한다. 이 상태에서는 동물들이 좀처럼 피를 흘리는 법이 없다. 이러한 꾸러미를 보고 있노라면 살아 숨쉬고, 걸어 다니며, 고통 받는 동물이 쉽게 연상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그 자체가 고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은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몇 가지 이유에서 어린 양의 다리라고 하였을 때에 그 본질을 파악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쇠고기(beef)를 먹는다고 하지, 황소(bull), 거세 황소(steer) 또는 암소(cow)를 먹는다고 하지 않으며, 돼지고기(pork)를 먹는다고 하지 돼지(pig)를 먹는다고 하지 않는다. ‘쇠고기(meat)’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기만적이다. ‘meat’는 원래 고형 음식 일반을 지칭하는 단어로, 오직 동물 고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용례는 아직도 ‘nut meat’(견과堅u의 살)와 같은 표현에 남아 있다. nut meat는 flesh meat(살코기)와의 차별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듯한데, 이를 그냥 ‘meat’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런데 이처럼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meat’를 살코기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사실상 살코기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174
심각한 좌절로 점철된 현대 계란 공장에서 사육되는 암탉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암탉으로 가득 찬 새장을 살펴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들은 편하게 서있거나 앉아 있기가 불가능하다. 설령 한두 마리가 자신들의 자리에 만족해도 닭장 안의 다른 닭이 움직이면 자신들 또한 움직여야 한다. 이는 한 침대에서 세 사람이 편안한 밤을 보내기 위해 애쓰는 경우와 비슷한데, 암탉들은 하룻밤이 아니라 1년을 꼬박 별다른 효과도 없이 버둥거린다는 점에서 침대의 경우와 구분된다. 설상가상으로 닭은 닭장에서 몇 개월을 보내면서 깃털을 잃기 시작한다. 이는 철망에 깃털이 문질러짐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암탉들에게 쪼임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결과 맨살이 철망에 문질러지기 시작하며, 그리하여 닭장 안에서는 깃털이 얼마 남지 않고, 피부가 문질러져 맨살이 밝은 적색으로 바뀐, 특히 꼬리 부분이 그렇게 된 암탉이 흔히 발견된다.--- p.207
현재 시행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집약적 축산 중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송아지 고기(veal) 산업이다. 송아지 사육의 요체는 감금되어 있는 생기 없는 송아지에게 고단백 사료를 먹여 고급 식당의 단골손님에게 제공되는 연한 빛깔의 고기를 공급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산업의 규모가 가금, 소(beef) 또는 돼지 생산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착취의 정도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터무니없이 비능률적이라는 측면에서 송아지 산업은 극단성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p.230
195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의 송아지 고기 생산업자는 고기가 붉게 되거나 질기게 되지 않은 상태로 송아지를 오래 살려둘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 비결은 송아지를 매우 부자연스러운 환경에 두는 것이었다. 송아지들을 야외에서 성장하도록 내버려두면 들에서 마음껏 뛰어놀 것이다. 이때 그들은 고기를 질기게 만드는 근육을 발달시킬 것이며, 칼로리를 소모하여 생산업자가 그 비용을 부담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풀을 먹을 것이며, 이로 인해 갓 태어난 송아지 고기가 갖는 연한 색깔을 잃게 될 것이다. 때문에 송아지 고기 생산 전문가는 경매를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곧장 송아지들을 감금 장치로 끌고 간다. 그 곳, 다시 말해 개조된 헛간, 또는 특별히 지어진 우리는 나무로 된 칸막이가 여럿이 죽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각각의 우리는 1피트 10인치의 폭과 4피트 6인치의 길이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은 우리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 깔아놓은, 나무로 된 작은 널빤지로 이루어져 있다. 몸집이 작을 때 송아지가 우리 안을 한 바퀴 도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송아지의 목은 사슬로 묶여 있다.(송아지가 성장하여 조그마한 우리에서 방향을 바꿀 수 없게 되면 사슬은 제거된다.) 헛간에는 지푸라기나 깔짚이 깔려 있지 않다. 왜냐하면 송아지들이 그것을 먹어치워 고기의 연한 색깔을 망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도축될 때에만 우리를 벗어날 수 있다. 송아지들은 비타민, 미네랄, 그리고 성장 촉진제가 첨가된 탈지분유로 된 완전 액체 사료만으로 사육된다. 그렇게 송아지는 16주를 더 산다. 갓 태어난 송아지의 체중은 41킬로그램 남짓 나간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사육된 송아지는 16주가 지나면 181킬로그램까지 나가게 된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상당한 장점이다. 또한 송아지 고기는 상당히 비싼 가격에 팔린다.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송아지를 사육해서 판매하는 것은 수지맞는 사업이다.--- p.231
대부분의 쇠고기 생산자들은 소에게서 뿔을 잘라내고, 소인찍으며, 거세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야기한다. 소에게 뿔이 있을 경우 여물통으로 목을 내밀 때, 또는 운송을 할 때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또한 틈이 없을 정도의 과밀한 상태에서 실어 나르는 경우 서로를 다치게 할 우려가 있다. 이 때문에 생산자들은 소의 뿔을 자르는 것이다. 죽은 소의 상처 입은 몸통과 흠이 있는 생가죽은 가격이 덜 나간다. 그런데 뿔은 단순히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뼈가 아니다. 뿔이 잘려 나갈 때에는 동맥과 다른 조직이 함께 잘려나가게 된다. 이때 피가 많이 터져 나오는데, 특히 송아지가 출생 직후 뿔을 자르지 않았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거세 가 행해지는 이유는 거세한 수소가 그렇지 않은 소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게 될 것―실제로는 더욱 체중이 많이 나갈 것같이 보일 뿐인데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수컷의 호르몬이 육질을 감염시킬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거세가 행해지기도 한다. 거세된 소는 다루기도 쉽다. 대부분의 영농인들은 거세 수술이 소에게 쇼크와 고통을 준다는 점을 인정한다. 거세 수술시에 마취제는 대개 사용되지 않는다. 수술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시행된다. 우선 소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칼로 음낭을 찢어발겨서 고환을 노출시킨다. 그 다음으로 고환을 차례대로 움켜쥐고 잡아당겨서 거기에 붙어 있는 건을 파괴시킨다. 소가 나이가 들었을 경우에는 건을 아예 잘라 버려야 한다.--- p.257
가축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거세, 소인, 그리고 어미와 새끼가 격리됨으로써 고통을 당해 왔다. 그런데 인도주의 운동이 가축들에 대한 처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19세기에는 수송과 도축할 때의 잔혹한 처우가 번민에 찬 탄원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서는 소들이 로키 산맥의 목장으로부터 철도 운송 종점까지 수송되었다. 이어서 그들은 기차가 시카고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며칠 동안 철도 객차에 처박혀 있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소들은 피비린내와 썩은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거대한 임시 가축 수용소에서 삶을 마감했다. 순번이 된 소들이 경사로를 질질 끌려 올라가면 그 위에 자루 도끼를 든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에게 운이 따라 주면 그 사람은 목표를 정확히 가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에게는 그다지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p.260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 자체가 마음이 괴로워지는 행위다. 만약 우리 손으로 먹을 동물을 직접 죽여야 한다면 우리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도축장에 가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며, 도축장 운영에 관한 방송은 TV에서 인기가 없다. 개중에는 구입하는 고기가 고통 없이 죽은 동물들의 것이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어쨌거나 고기를 구입함으로써 동물의 죽음을 방조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입한 고기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이런 저런 측면에 사실상 도움을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죽음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은 법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고통스러워야 할 이유는 없다. 계획대로 나아간다면 인도적 도축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는 선진국에서는 동물들이 죽음을 순식간에, 고통 없이 맞이하게 될 것이다. 동물들은 전류나 가축 도축용(captive--- p.bolt) 총을 맞고 기절하게 되고, 무의식 상태에서 숨통이 끊어진다. 물론 그들이 도축장 경사로로 끌려갈 때 이미 가버린 동료들의 피 냄새를 맡으며 죽음 직전의 짧은 시간 동안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동물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론과 현실 사이에는 흔히 차이가 있다.--- p.264
종교적 의례에 따르는 도축은 “죽이기 전에 기절시켜야 한다”라는 조항에 따를 필요가 없는데, 이는 인도적인 도축법을 피해가는 또 다른 구멍이다. 정통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식사 계율에 따르면 죽일 때 ‘건강하게 살아 움직이지 않는’ 동물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기절시키는 것은 숨을 끊기 전에 동물에게 상해를 가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요구가 생긴 역사적 배경에는 아프거나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하려는 생각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정통주의자들은 오늘날에도 율법을 지나치게 문구에 매달려 해석함으로써 죽기 전 단 몇 초 동안이라도 동물을 무의식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도축은 급소와 경동맥을 겨냥해 날카로운 칼로 단 한 번에 베어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도축 방법이 유대법으로 정해졌을 당시에는 아마도 다른 어떤 선택지보다도 이 방법이 인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방법은 예를 들어 가축 도축용 총을 사용하여 즉각적으로 동물들이 의식을 잃게 하는 도축보다 인도적이지 못하다.--- p.270
우리는 여러 경향이 충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전의 자구에 얽매여 그러한 방법에 따라 동물을 계속 도축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과학자들은 동물 자체의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혁명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다. 바야흐로 인간이 직접 만들어낸 동물들의 세계가 구축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세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8년 미국 특허 상표국이 암에 걸리기 쉽게 유전적 조작을 가한 쥐에 대한 특허를 내주면서 만들어졌다. 특허 상표국은 하버드 대학의 연구자들에게 가능한 발암 물질을 판별해내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이러한 쥐에 대한 특허를 내주었던 것이다. 1980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인간이 만든 미생물(microorganism)에 대한 특허 취득이 가능해졌는데, 1988년에는 이의 선례를 따라 동물에 대해서도 특허 등록이 승인되었던 것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특허 등록 승인은 이것이 최초였다.--- p.274
엄밀한 논리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동정이라는 견지와 식도락적 견지에서 동물의 이익을 고려하는 데는 아무런 모순이 없을지도 모른다.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데 반대하면서도 고통 없이 죽이는 데는 반대하지 않는다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살았고, 순간적으로 고통 없이 도축된 동물은 계속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리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 아닌 동물들을 배려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계속 먹을거리로 삼을 수는 없다. 단지 어떤 특정 유형의 음식으로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생물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면 이때 그 생물은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 이상이 될 수 없다. 얼마 안 가 우리는 아무리 강한 연민을 느낀다고 해도 결국 돼지, 소, 그리고 닭을 우리가 이용할 무엇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러한 동물들이 처한 환경을 확실하게 변화시킬 경우 이들의 고기를 적절한 가격에 계속 구입하기 힘들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이때 동물들이 처한 환경을 조금밖에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을 가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공장식 축산은 동물이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응용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식습관은 우리에게 소중하며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다른 동물을 배려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물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다. 동물 고기를 먹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누구건 동물의 사육 조건이 고통을 초래하는지를 판단할 때 완전히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당한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식용 가축을 대규모로 사육하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집약적인 방식이 사용되지 않는 전통적인 축산에도 거세, 어미와 새끼의 격리, 가축 무리의 해체, 낙인찍기, 도축장으로의 수송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축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동물들이 이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고 식용으로 사육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물론 사육이 소규모로 이루어질 경우에는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비집약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고기로 오늘날의 엄청난 도시 인구의 수요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어쨌거나 소규모로 사육된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육 과정을 거쳐서 생산된 고기는 오늘날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릴 것이다. 동물 복리에 대한 동등한 배려를 통해 사육되다가 도축된 동물의 고기는 오직 부자만이 사 먹을 수 있는 진귀한 음식이 될 것이다.--- p.278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제스처만은 아니다. 또한 이것이 자신의 깨끗함을 유지하고, 그리하여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잔혹한 처우와 살육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여 세상의 추한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도 아니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 아닌 동물 살해와 고통 야기의 종식을 향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매우 실천적이며 효과적인 행보라 할 수 있다. 당분간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살해가 아니라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앞장에서 서술한 집약적 축산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p.280
일단 당신이 가금, 돼지, 송아지, 소, 그리고 공장식 농장의 계란을 먹는 것을 중단했다면, 다음 단계는 어떤 유형의 도축된 조류나 포유류도 먹지 않는 것이다. 이는 먹지 않을 대상의 범위를 아주 조금 넓힌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먹는 조류나 포유류 중 집약적인 방식으로 사육되지 않는 동물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채식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상상으로라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단계로의 이행을 커다란 희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일단 한번 해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괜찮은 채식주의 요리책을 사라. 이때 당신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전혀 희생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길을 걷는 이유는 입맛을 만족시킨다는 사소한 목적을 위해 이러한 동물들을 죽인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설령 집약적 방식으로 사육되지 않아도 이러한 동물들이 앞 장에서 서술된 바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을 겪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p.296
우리는 계란 산업이 가장 무자비한 형태의 현대 집약형 공장식 축산임을 살펴본 바 있다. 암탉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계란을 낳도록 잔혹하게 착취당한다. 우리가 이러한 유형의 축산 방식으로 생산된 계란을 거부해야 할 의무는 집약적으로 생산되는 돼지나 닭을 먹지 말아야 할 의무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방사되는 닭의 계란은 어떠한가? 이 경우 윤리적 반대가 제기될 수 있는 여지는 훨씬 약해진다. 몸을 피할 곳이 있고, 야외에서 마구 돌아다니며 땅을 긁어댈 수 있는 암탉은 편안한 삶을 영위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란을 가져가는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육되는 닭의 계란마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의 주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산란 닭이 낳은 수평아리는 부화되자마자 죽임을 당할 것이며, 암탉도 더 이상 계란을 충분히 낳지 못하게 되었을 때 도축되어 버리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는 과연 암탉의 쾌적한 삶이 시스템의 일부인 도축을 능가할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다. 이에 대한 답변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죽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이는 고통 야기와는 별개의 논의다)에 달려 있다.--- p.303
우리들의 식습관에서 종차별주의적 요소를 일시에 모두 제거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여기서 지지하는 지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실상 동물 착취를 반대하는 대중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동물 해방 운동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러한 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가급적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불매운동을 확산하여 대중들의 관심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형태의 동물 착취를 즉각 중단하려는 훌륭한 욕구가 지나칠 정도로 넘쳐흐름으로써, 자칫 유제품을 먹길 중단하지 않는 경우와 가축의 고기를 계속 먹는 경우가 다를 바 없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줄 수가 있다. 이런 경우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전과 다름없이 동물들에 대한 착취가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묻는 비종차별주의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들에 대한 답변을 몇 가지 살펴보았다. 이 절의 처음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가 언급한 내용들은 제안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세부 문제에 대해 비종차별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것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는 이상 세부적인 불일치가 공통적인 목표를 향한 노력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p.305
많은 사람들은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논변이 강력하다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적인 확신과 평생의 습관을 타파하는 데 필요한 행동 사이에 틈새가 있는 경우는 너무나도 흔하다. 책이 이러한 틈새에 다리를 놓아 줄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확신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나는 틈새를 좁히려는 노력을 해보고자 한다. 나의 목표는 독자들이 훨씬 쉽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기가 포함된 식사로부터 채식주의 식사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식사의 변화를 즐겁지 않은 의무로 생각하기 보다는 새롭고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요리에 대한 기대를 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새로운 요리에는 신선한 음식들뿐만이 아니라 고기를 쓰지 않은 유럽, 중국, 그리고 중동의 진귀한 요리가 포함될 것이다. 나는 비교를 통해 그러한 요리들이 너무나도 다채로워서 고기 투성이인 대부분의 서구 식사가 진부하고 반복적이라고 느끼게 할 작정이다. 식물성 요리의 좋은 맛과 영양가 있는 품질은 땅에서 직접 제공된 것으로, 땅이 생산한 것을 낭비하지 않으며, 쾌고 감수 능력이 있는 존재의 고통이나 죽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우리는 식물성 요리를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 수 있게 된다.--- p.306
채식을 할 경우 음식과 식물, 그리고 자연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살코기는 우리의 식사를 오염시킨다. 아무리 그럴 듯하게 꾸미려 해도, 저녁 식사의 메인 요리(main dish)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축장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숨길 수 없다.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냉동하지 않을 경우 이내 썩어서 악취를 풍기게 된다. 우리가 먹을 경우 그런 고기는 며칠 후 배설하려고 애를 쓰게 될 때까지 우리의 위장에 대량으로 남아 있으면서 소화 과정을 막는다. 반면 식물 음식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리고 먹어도 몸에 아무런 해가 없는, 땅으로부터 온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기로 인해 미각이 무뎌지는 대신 땅에서 곧장 가져온 신선한 채소를 먹음으로써 매우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녁 식사를 손수 장만하겠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채식주의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뒤뜰을 일구어 채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는 내가 이전에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었지만 채식주의자 친구들은 이미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식단에서 고기를 제거함으로써 식물과 흙, 그리고 계절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내가 채식주의자가 된 후 흥미를 가지게 된 또 한 가지는 요리를 하는 것이다. 메인 요리가 두 가지 종류의 익힌 채소와 고기로 이루어진 일상적인 앵글로색슨의 식사를 하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고기를 제거하는 것은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에서 논의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줄 경우 흔히 대중들은 내게 고기 대신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질문하는 어투로 봐서는 질문자가 자신의 식사용 접시에 으깬 감자와 끓인 양배추를 남겨둔 채, 두껍게 자른 고깃점이나 햄버거를 빼고 무엇을 얹을지 고민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콩을 한 더미 쌓아 올려놓아야 하는가?--- p.307
동물들에 대한 서구의 태도는 두 가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대주의와 고대 그리스가 그것이다. 이러한 뿌리들은 기독교에서 통합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유럽에 확산된 것은 기독교를 통해서이다. 우리와 동물들의 관계에 대한 좀 더 계몽적인 견해는 교회로부터 사상가들이 비교적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근본적인 측면에서 18세기까지 유럽에서 당연시 되었던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을 고려해 보았을 때, 우리는 동물의 태도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기독교 이전, 기독교, 그리고 계몽시대와 그 이후라는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p.319
만약 바위, 나무, 식물, 종달새, 그리고 소를 동등하게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를 잊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쾌고 감수 능력의 정도라는 차이를 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어차피 생존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죽이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때문에 그 중 어떤 대상을 죽일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 프란체스코는 새와 소를 사랑했지만 이들을 계속 먹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가 창설한 수도회의 탁발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제정할 때, 금식일을 제외하고는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지침을 포함시켰는지도 모른다.--- p.338
인간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오늘날의 견해는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이전의 모든 견해와 큰 차이를 보여 준다. 하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 따져볼 때, 다른 동물을 처우하는 방식에 관한 우리의 태도는 변한 바가 거의 없다. 이제 동물은 더 이상 도덕의 영역 밖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여전히 영역 바깥 가장자리 근처의 특별한 구역이다. 그들의 이익은 인간의 것과 충돌하지 않을 때만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충돌이 발생한다면―심지어 인간 아닌 동물이 일생 동안 겪게 되는 고통과 인간의 식도락 기호 간의 충돌이라 할지라도―인간 아닌 동물의 이익은 무시당한다. 과거의 도덕적 태도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동물들에 대한 지식이 달라졌어도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p.359
어떠한 경우이건 ‘인간 우선’이라는 생각은 양립 불가능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경우보다는, 인간 혹은 인간 아닌 동물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변명하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배려와 동물에 대한 배려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이건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힘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경우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인간 문제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사람들이 축산 산업에서 자행되는 학대의 결과로 생산된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운동에 동참한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중단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다시 말해 동물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주의자가 된다고 해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p.373
인간 아닌 동물들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 그리고 동물들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시사하는 바에 관한 잘못된 추론 또한 우리가 종차별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제껏 우리는 흔히 우리들 자신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야만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을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친절하다는 것을 뜻했다. ‘야수 같은’, ‘짐승 같은’이라고 하거나 ‘짐승처럼’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잔인하고 거칠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죽일 때 최소한의 이유라도 갖고서 죽이는 동물은 인간 동물(human animal)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우리는 사자나 늑대가 다른 동물들을 죽이기 때문에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죽이지 않으면 굶주려야 한다. 반면 인간은 운동 삼아,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자신들의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 그리고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동물들을 죽인다. 또한 인간은 탐욕이나 권세를 얻기 위해 자기 종의 구성원을 살해한다. 나아가 인간은 단순히 죽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역사를 통틀어 인간은 다른 인간과 동물들을 죽이기 전에 괴롭히고 고문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p.375
한 마리의 동물의 상실이 새로운 동물의 탄생으로 보상된다는 주장에 대한 마지막 지적은 다음과 같다.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구를 변호하기 위해 그와 같은 기발한 방어책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논거가 함축하는 바를 끝까지 추구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만약 생물의 탄생이 좋은 것이라면 아마도, 다른 모든 조건이 동등하다면, 가급적 많은 사람들도 탄생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여기에 인간의 목숨이 동물의 목숨에 비해 더욱 중요하다는 견해―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이러한 견해를 틀림없이 수용할 것인데―를 추가한다면, 논의는 애초에 문제를 제기한 자에게는 불편하겠지만,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 버릴 것이다. 만약 가축에게 사료를 주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얻어 연명할 수 있게 될 것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결국 우리는 채식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또다시 도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388
철학은 시대가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철학의 주요 임무는 우리들 대부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초지일관 비판적이고도 조심스럽게 검토하는 데에 있으며, 이로 인해 철학이 가치 있는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철학이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항상 훌륭히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도를 옹호하였다는 사실은 철학자도 인간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갖가지 편견에 구속되게 마련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물론 선행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성공한 철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선행 이데올로기를 매우 세련된 형태로 옹호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 p.399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본래적인 존엄성에 대한 호소가 평등주의 철학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오직 ‘인간이 본래적으로 존엄하다는 생각이 도전을 받지 않을 경우’에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일단 모든 인간―유아, 지적 장애인, 반사회적 정신질환자,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코끼리, 돼지, 또는 침팬지가 가질 수 없는 어떤 존엄성 또는 가치를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 이 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인간과 다른 동물 간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어떤 적절한 사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답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질문은 사실상 하나의 질문이다. 여기서 본래적인 존엄성이나 도덕적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 그리고 오직 인간만이 본래적 존엄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만족스럽게 옹호하고자 한다면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어서, 그로 인해 인간이 유일무이한 존엄성 또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적절한 능력이나 특징을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데 다른 이유가 아닌 존엄성과 가치라는 관념을 도입하는 것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거창한 구절은 논거를 대는 데 한계를 느끼는 사람들의 마지막 방편에 불과하다.--- p.403
이 책의 요지는 단순히 한 개체가 어떤 종 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차별하는 것이 일종의 편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인종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개인을 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부도덕하고 정당화될 수 없다. 나는 나의 주장이 그저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주장 또는 사견 드러낸 것으로 파악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종차별을 반대하는 입장을 감정이나 정서에 호소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하며 논증하였다. 내가 이러한 길을 택한 것은 다른 동물에 대한 애정 어린 느낌과 존중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성이 훨씬 보편적이며 호소력 또한 더욱 강력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다른 동물들에 대한 순수한 동정 어린 관심을 모든 쾌고 감수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 확대함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종차별주의를 제거해 버린 사람들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오직 동정심과 고운 마음씨에 호소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종차별주의의 그릇됨을 설득할 수 없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들 사이의 문제를 고려할 때에도 오직 자신이 속한 국가와 인종만을 고려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익숙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 명목상으로라도 이성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도덕성에 우열의 차이가 없다고 말하면서 지나친 주관주의의 유희에 빠진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히틀러의 도덕성 내지 노예 상인의 도덕성이 알베르트 슈바이처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도덕성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느냐고 종용해 보면, 그들은 결국 어떤 도덕성이 다른 도덕성에 비해 훌륭하다고 믿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p.409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조너선 사프란 포어 저/송은주 역 | 민음사 | 2011년 09월 | 원제 : Eating Animals
1977년 워싱턴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교에 진학한 후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 4년 동안 해마다 학교에서 수여하는 문예상을 수상했다. 1999년 대학 2학년생이었던 포어는 빛바랜 사진 한 장만을 들고 우크라이나로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2차 대전 당시 자신의 할아버지를 학살로부터 구해 주었던 한 여성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애초 그는 이 여행의 과정을 논픽션으로 집필하고자 했으나, 조이스 캐럴 오츠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계획을 바꾸었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첫 소설 『모든 것이 밝혀졌다』(2002)를 완성했다. 그러나 출판사들은 이 소설을 출간하길 거절했고 포어는 한동안 대필 작가, 기록 보관소 직원, 상점 점원 등으로 일하며 꾸준히 글을 써냈다.
2년 후 마침내 첫 소설이 출판계에 화제를 뿌리며 출간에 성공하면서 포어는 ‘분더킨트(신동)’라는 찬사를 받았다. 실험적인 언어를 사용한 이 데뷔작은 전 세계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면서 《LA 타임스》가 선정한 ‘2002 최고의 책’으로 꼽혔고, 포어에게 《가디언》 신인 작가상과 전미 유대인 도서상을 안겨 줬으며, 2005년 영화로 제작되었다. 두 번째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은 9.11 사건을 배경으로 아홉 살짜리 소년 오스카의 이야기를 넘치는 에너지와 기발한 상상력, 그리고 다양한 방식의 시각적 효과를 동원해 그린 작품으로, 미국 문단에서 새로운 소설의 시대를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
현재 포어는 소설가 니콜 크라우스와 결혼하여 두 아이와 함께 뉴욕 브루클린에 살면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소설가의 예민한 감성과,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냉철한 판단력으로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육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준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2009)는 그의 첫 번째 논픽션으로, 발표 당시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목차
이야기하기
전부 아니면 전무 또는 그 밖의 무엇
단어 / 의미
숨기 / 찾기
영향 / 말 못하는
천국의 조각들 / 똥 덩어리들
실행
이야기하기
주석
찾아보기
출판사 리뷰
9.11 사건을 아홉 살짜리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장편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첫 번째 논픽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포어는 어린 시절 막연한 도덕심으로 채식주의를 실천해 보았지만, 곧 포기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 왜냐하면 고기는 맛있고, 그는 배고팠으니깐. 하지만 첫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되면서 포어는 아이에게 무엇을 먹여야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했고, 이전보다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고기란 무엇인가? 고기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생산되는가? 동물은 어떻게 다뤄지는가? 그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영향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인가?
광우병, 구제역, 조류 독감 등 우리의 먹을거리, 특히 육식 식단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빈번하지만, 고기 소비량은 해마다 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쇠고기 총 소비량은 2010년 43만 4000톤으로 1인당 소비량은 8.9킬로그램이다. 이는 4년 전인 2006년과 비교해 30%가량 증가한 수치이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100억여 마리 동물을 식용으로 도살하며, 1인당 평생 소비하는 동물의 양은 2만 1000마리이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고기를 많이 먹는 시대는 없었다.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지 고기를 최대한 싸게 많이 팔고 많이 먹기 위해 고안된 오늘날의 ‘공장식 축산’은 동물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환경 파괴에 그 무엇보다도 크게 악영향을 끼치며, 면역력을 파괴해 우리 건강을 위협한다. 또한 기아에 시달리는 14억 인구를 먹일 수 있는 곡물을 가축들 먹이로 쏟아 붓는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육식은 과연 자연스러운 관습인가, 이 시대의 악덕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포어는 공장식 축산업 종사자, 동물 권리 보호 운동가, 채식주의자 도축업자 등 다양한 입장을 지닌 인물들을 광범위하게 인터뷰했고, 소설가의 예민한 감수성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자료를 내세워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진실을 밝혀내고자 했다. 포어는 결국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통해 동물 권리 문제부터 경제, 보건, 환경 문제까지, 동물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훑으며 이것들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문제라고 말한다.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모순, 지배, 탐욕
포어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모순된 태도를 지적하며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인용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포어는 인간이 문화적 배경 아래 선택적으로 육식을 하고, 어떤 고기에 대해서는 금기시하지만, 사실상 그 기준은 논리적이지 않으며, 매우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미국에서 해마다 개와 고양이가 300만~400만 마리가 안락사를 당하고 버려지거나 묻히는데, 이는 해마다 고기 수백만 킬로그램이 버려지는 것과 다름없다. 생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손실이 지대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고기를 이용하려 하지는 않는다. 로컬 푸드 옹호자나 현실적인 환경보호주의자라면 양도 풍부하고 영양가도 높으며 경제적, 생태적 손실도 줄일 수 있는 이 고기를 이용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포어는 반문하며, 우리의 모순된 태도를 꼬집는 동시에 그런 태도가 환경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지적한다.
포어는 식재료로 동물을 대하는 우리의 대표 행위인 공장식 축산이 행위가 아니라 마음 자세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여기에서만은 일관된 자세가 통용되는데, 수산업과 축산업을 통틀어 동물을 통째로 지배하고자 하는 공장식 축산의 정신과 그 아래 맺어진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단어는 바로 ‘전쟁’이다. 우리가 키우는 육삭동물의 99%가 공장식 축산업으로 사육되며, 바다에서는 대량 어업의 결과로 많은 어류 종들이 멸종해 가고 있다. 우리는 지상과 해양의 모든 동물들을 우리 통제 아래 두고 계속해서 재생산하거나 멸종시켜 나가고 있다. 공장식 축산은 생산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고, 환경 파괴, 인간의 질병, 동물의 고통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체계적으로 무시하며 최대한 많은 수익을 내고자 한다. 최대한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공장식 축산의 정신인 것이다.
높은 수익만 중시하는 공장식 축산업에서 동물들은 생명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생산품으로 다뤄진다. 가능한 많은 계란을 얻기 위해 가능한 좁은 곳에 가능한 많은 닭을 쌓아 놓고, 닭들은 철창에 꽉 끼어 머리 위로 배변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강압적인 호르몬 조절로 자연 상태보다 2~3배나 많은 알을 낳고, 그다음 해에 도축당한다. 알을 많이 낳지 못하는 상태? 된 닭을 죽이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산란계 수평아리는 매해 2억 5000여 마리씩 산 채로 매장당한다. 우리 입에 좀 더 맛있는 고기를 얻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하는 것은 ‘품종 개량’이라는 이름 아래 오래전부터 해 온 일이며, 가능한 빠르게 많은 동물을 도축하기 위해서 식용 소, 돼지, 닭들이 아직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도살되고 분해되는 것은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곳의 일꾼들은 인권 유린을 당하며 100%가 넘는 이직율을 보이며 노동을 하고, 그 스트레스는 그들이 다루는 동물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어 동물들은 갖은 학대를 당한다.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모순되며, 단 하나의 일관된 태도는 탐욕과 지배이다.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겠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가장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을 대상으로 삼으면서, 우리는 공감력을 잃고 그 자체를 망각하고 있다고 포어는 말한다. 그리고 그 공감력을 회복하고 우리가 벌이는 일들에서 ‘수치’를 느낄 때야 우리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고,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장식 축산이라는 범죄 : 환경 오염, 건강에 대한 위협
간혹 동물 보호주의자나 채식주의자를 ‘감상주의’에 빠진 인간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공장식 축산의 잔인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로 인해 우리가 실제로 입는 피해가 얼마나 극심한지 안다면, 공장식 축산에 반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포어는 말한다.
포어는 공장식 축산을 반대하지 않는 환경주의자는 진정한 환경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UN에서 밝힌 것처럼, 농장 동물들은 자동차 등을 비롯한 운송 수단보다 약 40퍼센트나 더 많은 온실 가스를 배출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배설물 처리 문제다. 특히 공장식 축산 농가에서는 대량으로 고기를 생산하는 시설만 즐비하고 배설물을 처리하는 기반 시설이 거의 전무하다. 커다란 분뇨 구덩이를 몇 개 파 놓았을 뿐이다. 미국에서 돼지 농장은 배설물을 연간 3200톤, 양계장은 3000톤, 소 사육장은 15만 톤을 생산하고, 이것들은 인간보다 130배나 더 많은 양이다. 그리고 이 분뇨들이 환경을 오염시키는 정도는 하수보다 160배나 더 크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병원균이 100가지도 넘게 자라는 돼지 분뇨 때문에 농가 주변에서는 귀앓이, 만성 설사, 폐 통증 같은 병이 늘어가고, 그대로 유출한 분뇨로 인해 미국 22개 주 5만 6000킬로미터 강이 오염되었다. 이는 모두 기업에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손실이지만, 실제로 공장식 축산업을 이끄는 기업들은 실제 비용보다 훨씬 적은 비용인 몇 번의 벌금을 내는 것이 전부이다. 일례로 스미스필드사는 수질 오염 방지법을 7000번이나 위반했지만, 그 벌금은 1260만 달러뿐이었다. 10시간마다 1260만 달러의 총수익을 올리는 회사에서 이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처리되지 않은 가축의 분뇨 때문에 건강의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포어는 공장식 축산에서 동물을 다루는 과정에서 생기는 보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말한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나 너무나 좁은 공간에서 짧은 평생을 스트레스 속에서 살다 죽는 공장식 축산업의 가축들은 이러한 환경 때문에 면역력이 매우 취약하다. 이 때문에 구제역, 조류 독감 등이 더욱 급속히 퍼진다. 적당한 공간을 제공하고 다른 동물들과 친목을 다지며 무리를 지어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전통적인 방식의 사육 아래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온갖 건강 문제 때문에 공장식 축산업의 동물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엄청난 항생제를 투여받는다. 해마다 인간에게 쓰는 항생제는 1300톤이지만, 가축에게 투여하는 항생제는 1만 1000톤이며 이 때문에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병원균이 늘어 간다. 그럼에도 기업에서 이러한 방법을 고수하는 것은 이렇게 비용을 들이는 것이 결국 수익이 더 남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생기는 인간의 건강 문제는 기업에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비용 문제가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구매하는 값싼 공장식 축산 고기가 정말로 저렴한지 고민해 봐야 한다고 포어는 말한다. 누구를 위한 일인지 우리는 자문해 봐야 한다. 누구를 위해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하지만 포어는 육식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동물이 살아 있는 동안 합당한 복지를 제공하고자 애쓰는 어떤 채식주의자 농부를 지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구입할 수 있는 고기의 99%가 이미 공장식 축산업 아래에서 생산된 고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하나뿐인 것으로 보인다. 포어는 공장식 축산을 삶에 받아들이는 것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느끼는지 말한다. 내 가족에게 공장식 축산 음식을 먹이고, 내 돈으로 공장식 축산을 지탱한다면, 덜 자신다워지고, 덜 아버지다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포어가 채식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며, 우리 모두에게 공장식 축산 고기에 반대할 것을 권하는 이유이다.
동물을 먹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들 (미국 통계 기준)
* 우리가 먹는 동물의 99% 이상이 공장식 축산에서 나온다.
* 계란 생산용 닭은 이 책을 양쪽으로 펼쳤을 때 나오는 지면보다도 작은 공간에서 평생을 살고, 알을 낳지 못하는 산란계 수평아리 2억 5000여만 마리는 매해 산 채로 폐기된다.
* 트롤망 어업은 전체 어획물에서 2% 이하밖에 차지하지 않는 목표 어획물을 얻기 위해 100여 종의 다른 어종을 함께 죽인 후 바다에 버린다.
* 닭고기의 80% 이상이 캄필로박터균이나 살모넬라균에 감염된 채 판매된다.
* 해마다 인간에게 쓰는 항생제는 1300톤이지만, 가축에게 투여하는 항생제는 1만 1000톤이며 이 때문에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병원균이 늘어 간다.
* 농장 동물들은 초당 40톤의 배설물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도시 하수보다 160배나 더 환경을 오염시키고, 우리의 건강을 위협한다.
* 농장 동물들은 자동차 등을 비롯한 운송 수단보다 약 40퍼센트나 더 많은 온실 가스를 배출한다.
* 육지의 3분의 1에 가까운 면적을 가축들이 차지한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 쏟아진 찬사
▶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는 개인적 여행이고, 어느 정도는 현대의 사생활 폭로이며, 음식에 관한 놀라우리만치 솔직하고 공감 가는 책이다. 고기의 유혹으로 인한 복잡다단함과, 공장식 축산업의 시대에 우리 접시에 오르는 닭고기가 세상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에 관한 현실 앞에서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그는 보기 드문 성취를 이뤘다.
―아론 그로스(팜 포워드 설립자)
▶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껴 채식을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대단히 개인적인 여행이면서도, 모든 이들이 자기 입에, 혹은 자기 자식 입에 고기 한 점을 넣을 때 무엇이 정말로 위험해지는지 알기 위해 누구나 꼭 해야 한다고 그가 믿는 여행이다. ―《시드》
▶ 포어는 우리 자신이 우리가 하는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하지 않기로 하는 일에 의하여 정의된다고 말한다. 채식주의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진짜 즐거움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칭찬할 만한 것은, 그가 이것을 우리에게 주저하지 않고 청한다는 점이다. ―《뉴요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육식주의를 해부한다 [ 개정판 ]멜라니 조이 저/노순옥 역 | 모멘토 | 2021년 08월
원제 : Why We Love Dogs, Eat Pigs, and Wear Cows -An Introduction to Carnism (10th Anniversary Edition)
사회 심리학자이자 비건 운동가, 관계 코칭 전문가. 매사추세츠대학교에서 11년간 심리학과 사회학을 가르치며 육식주의Carnism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동물을 먹는 행위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육식주의에 대항하는 국제단체 ‘육식주의를 넘어서Beyond Carnism’ 창립자이며, 육식주의를 알리기 위한 대중 강연과 미디어 홍보, 활동가 교육에 힘쓰고 있다. 사람들이 폭력적·비관계적 행동에 참여하는 이유와 이러한 패턴을 바꾸는 방법을 설명하는 그의 획기적인 이론은 〈뉴욕타임스〉, 〈BBC〉, 〈NPR〉, 호주 공영방송 등 전 세계 언론에 소개되었다.
2013년에는 비폭력과 불살생 원칙을 지키는 개인에게 수상하는 아힘사상을 받았다. 이 상은 넬슨 만델라와 달라이 라마에게도 수여된 바 있다.
대표작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는 전 세계 17개 언어로 번역된 동물 복지 분야의 고전이다.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는 논비건 세상을 살아가는 비건과, 비건과 가까이 살아가는 논비건을 위한 최초의 관계 심리학 책으로 신념의 차이를 넘어 서로의 연대자가 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이 책은 2017년 노틸러스 북 어워드 ‘관계와 소통’ 부문에서 금상을 받았다.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는 작가이자 번역가로도 활동 중인 그는 《생명의 위대한 비밀Life’s Greatest Secret》 《세대Generation》 《레지스탕스The Resistance》 《팔월의 열하루Eleven Days in August》 《냄새: 아주 짧은 소개Smell: A Very ShortIntroduction》 등 대중을 위한 인문서를 다수 집필했고 <러더퍼드와 프라이의 궁금한 이야기The Curious Cases of Rutherford & Fry>< 인사이드 사이언스Inside Science> <무한한 원숭이 우리The Infinite Monkey Cage> 등 BBC 라디오 과학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현재 <뉴 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와 <가디언The Guardian>의 전문 논설위원이다.
목차
제1장 사랑할까 먹을까
제2장 육식주의: “원래 그런 거야”
제3장 ‘진짜’ 현실은 어떤가
제4장 부수적 피해: 육식주의의 또 다른 희생자들
제5장 동물을 먹는 것에 관한 신화: 육식주의를 정당화하기
제6장 육식주의의 거울 속으로: 내면화된 육식주의
제7장 바로 보고 증언하기: 육식주의에서 연민과 공감으로
출판사 리뷰
우리는 쇠고기, 돼지고기를 먹을 때 살아 있는 소와 돼지를 떠올리지 않는다. 고기와 그것을 제공한 동물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 단절의 미스터리는 일련의 질문을 부른다. 무수한 동물 종 가운데 우리가 혐오감 없이 먹는 것은 어째서 극소수일까? 먹어도 되는 동물과 그렇잖은 동물은 어떻게 나뉘나? 육식이 태곳적부터 행해 온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영아살해와 살인, 강간, 식인 풍습 역시 자연스러운 걸까? 인간이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식탁에 오르는 동물은 왜 일상에서 눈에 거의 띄지 않을까? … 이 모든 의문을 푸는 열쇳말이 바로 ‘숨은 이데올로기’인 육식주의다.
우리는 육식을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으로, 즉 ‘원래 그런 것’으로 본다.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며 꼭 필요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별다른 의문 없이 동물의 고기와 알, 유제품을 먹는다. 그 행위의 근저에 있는 일련의 믿음들, 특정 동물을 먹도록 인간을 길들이는 신념체계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삶의 방식을 ‘자연화’하는 이 신념체계의 실체를 들춰내면서 거기에 얽힌 온갖 신화와 심리적 기제들을 톺아본다. 그리고 그 너머로―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과 공감으로―나아가기 위한 실천적 방안까지 제시한다.
육식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동물과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이는지를 아주 쉽고 흥미롭게 얘기하면서 저자는 시공을 넘나드는 관련 사례와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별도 박스로 곁들여 읽는 재미를 배가한다. 입맛의 후천성, 공감 능력의 선천성,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정신적 마비, 전장에서 총을 쏘지 않는 병사들, 축산업계의 비밀주의와 언어 조작, 권력과의 결탁, 동물들의 고통 감각, 한국의 개고기 시장, 권위에 대한 우리의 복종 경향, 단백질 신화, 숫자와 감각마비, 톨스토이 신드롬 등등. 이 모든 것이 저자의 논리를 살찌우며 독자의 공감을 유도한다.
책 속으로
▲ 개와 돼지에 대하여
실험을 하나 해보자. 개를 상상할 때 떠오르는 모든 단어를 그대로 적어 보라. 다음엔 돼지를 상상하며 똑같이 하라. 그러고는 두 목록을 비교해 보자. 개를 생각할 때 ‘귀엽다’, ‘충성스럽다’, ‘다정하다’, ‘영리하다’, ‘재미있다’, ‘애정 깊다’, ‘나를 보호해 준다’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돼지를 상상했을 때는 ‘진창’ 또는 ‘땀’, ‘더럽다’, ‘멍청하다’, ‘게으르다’, ‘뚱뚱하다’, 그리고 ‘못생겼다’ 같은 말을 떠올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다수에 속한다.
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매 학기에 하루를 이 실험에 할애한다. 몇천 명의 학생이 거쳐 갔지만 이때 오가는 대화는 거의 같다. 대부분 학생이 개는 좋아하거나 사랑하며 돼지는 역겹다고 느낀다. 자신과의 관계를 묘사해 보라고 하면 개는 ‘당연히’ 친구이자 가족의 일원으로, 돼지는 식품으로 요약된다. 그때 저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에 따라 설명을 덧붙인다.
-돼지는 왜 멍청한 거지? “그냥 원래 그렇지요.” 그런데 실제론 돼지가 개보다도 더 영리하다고 해. 왜 돼지보고 더럽다 하지? “진창에서 뒹구니까요.” 왜 진창에서 뒹굴지? “진흙 같은 더러운 걸 좋아하니까요. 돼지는 더러워요.” 실은 더울 때 몸을 식히느라 진창에서 뒹구는 거야. 땀샘이 없기 때문이지.
-돼지도 감정이 있다고 생각해? “물론이죠.” 돼지도 개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그런 것 같은데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몰라서 그렇지, 돼지가 얼마나 예민한가 하면 가둬놓았을 때 자해 같은 신경증적인 행동을 하기도 해.
-우리는 왜 돼지는 먹고 개는 먹지 않는 걸까? “베이컨은 맛있으니까요.” “개에게는 각기 개성이 있으니까요. 개성 있는 존재를 먹을 수는 없잖아요. 이름도 있고,” 돼지에게도 그런 개성이 있다고 생각해? 그들도 개처럼 개체라 할 수 있나? “네, 돼지도 알고 보면 그럴 것 같은데요.”
-돼지가 땀투성이도 아니고 게으르지도 탐욕스럽지도 않은 영리하고 예민한 개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을 먹는 데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돼지를 먹는 걸 이상하게 느꼈을 거예요. 아마 죄책감 같은 걸 느꼈겠지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돼지는 먹고 개는 먹지 않을까? “돼지는 먹기 위해 키우니까요.” 왜 먹기 위해 돼지를 키우는 거지? “몰라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어요.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 원래 그런 게 아니다
원래 그런 것이다? 이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아주 곰곰이. 우리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 종은 도축장으로 보내고 다른 종에게는 사랑과 친절을 베푼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이처럼 일관성이 없고, 그 사실을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다면, 그건 우리가 부조리한 논리에 휘둘려 왔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테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하나같이 사고의 기능을 유보하고 사는 것은 물론, 자기들이 그런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상당히 복잡한 질문이지만, 답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육식주의 때문이다.
▲ 채식주의와 육식주의
우리는 고기 먹는 일과 비건주의를 일관된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비건주의에 대해서는, 동물과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일련의 가정들을 기초로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육식에 대해서는 당연한 일, ‘자연스러운’ 행위,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으로 본다. 그래서 아무런 자의식 없이, 왜 그러는지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동물을 먹는다. 그 행위의 근저에 있는 신념체계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이 신념체계를 저자는 ‘육식주의(carnism)’라고 부른다.
▲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육식주의는 특정 동물들을 먹도록 우리를 길들이는 신념체계다. 때로 우리는 동물을 먹는 사람을 육식동물(carnivore)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육식동물이란 생존하기 위해 육식에 의존하는 동물을 말한다. 동물을 먹는 사람들은 또 잡식동물(omnivore)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인간을 포함한 잡식동물은 식물과 육류를 모두 섭취할 수 있는 생리적 능력을 지닌 동물이다. 그러나 ‘육식동물’과 ‘잡식동물’이라는 용어는 개체의 생물학적 특징만을 기술하지 철학적 선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에 따라 동물을 먹는데, 선택이란 항상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선택임에도 선택이 아닌 듯이 보이는 것은 육식주의의 비가시성 때문이다. 그런데 왜 육식주의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건가? 우리는 왜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육식주의가 특정한 유형의 신념체계, 바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며, 그중에서도 정밀한 검토를 잘 허용하지 않는 형태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 먹을 수 있다, 먹을 수 없다
육식주의와 관련해서 우리가 동물에게 적용하는 두 개의 주된 범주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이분법 안에는 또 다른 범주 쌍들이 있다. 예컨대 우리는 야생동물보다는 가축을 먹고, 육식물이나 잡식동물보다는 초식동물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돌고래처럼)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동물은 먹지 않지만, (참치처럼) 그다지 영리하지 않아 보이는 동물은 일상적으로 먹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귀엽다고 여기는 (토끼 같은) 동물은 먹지 않고 (칠면조처럼)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동물을 먹는다. 동물들을 분류하는 범주들이 실제로 정확한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정확하다는 믿음이다. 이분화의 목적은 단지 고기를 먹는 데 대한 불편감에서 놓여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가치판단이 실린 범주들로 여과하면, 예컨대 개를 안고 쓰다듬으며 스테이크를 먹으면서도 그러한 행위의 선택이 함축하는 바를 전혀 모를 수 있다. 이렇게 이분화는 정당화를 지원한다. 우리가 동물을 먹으면서도 괜찮다고 느끼게 만들어 준다는 얘기다. 왜 괜찮으냐고? 영리하지 않으니까, 반려동물이 아니니까, 귀엽지 않으니까?그래서 먹어도 되니까.
▲ 정당화의 온갖 기제들
동물을 먹는 것에 관한 방대한 신화들이 있지만 그 모두는 내가 ‘정당화의 3N’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동물을 먹는 일은 ‘정상적이며(normal), 자연스럽고(natural), 필요하다(necessary)’는 논리 말이다. 내면화된 육식주의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한다. 동물은 살아 있는 생명체임에도 우리는 그들을 살아 있는 물건으로 본다. 또한 그들이 각기 독립된 개체임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서 인식한다. ‘한 무리의 물건’이라는 식이다. 그리고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이, 그들은 자연이 정한 식용 동물이므로 우리가 그들을 먹는 일은 타당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생각한다. 예컨대, 시스템이 그토록 숨기려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곧 고기로 바뀔 돼지 한 마리가 어쩌다 눈에 들어올 경우, 우리는 그 돼지를 쾌락과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생명체로, 혹은 뚜렷한 개성과 선호를 지닌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그 돼지의 ‘돼지다움(더러움, 게으름 등)’과 ‘먹을 수 있다는 점’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동물을 보는 데는 내가 ‘인식의 트리오(Cognitive Trio)’라고 부르는 세 가지 방어기제가 개입한다.
--- 본문 중에서
고기로 태어나서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한승태 저 | 시대의창 | 2018년 04월
한승태 -창원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꽃게잡이 배, 주유소, 양돈장 등에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선배 작가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서울의 주인들이 그럴듯한 일자리를 맡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들의 기록자로 임명했다. 요즘은 저자 소개란이 두툼해질 수 있게 좀 열심히 살 걸 하는 후회를 곱씹으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전국을 떠돌며 농업, 어업, 축산업, 제조업, 서비스업계에서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틈틈이 기록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쓴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저질 유머로 가득한 치기 어린 책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인간의 조건』이 있다.
목차
시작하기 전에
- 통계와 클로즈업
닭고기의 경우
- 산란계 농장(충청남도 금산)
- 부화장(대한민국 어딘가)
- 육계 농장(전라북도 정읍)
돼지고기의 경우
- 종돈장(경기도 이천)
- 자돈 농장(충청남도 강경)
- 비육 농장(강원도 횡성)
개고기의 경우
- 첫 번째 개 농장(경기도 포천)
- 두 번째 개 농장(충청남도 금산)
마무리하며
- 붉은 돌담 앞에서
출판사 리뷰
멸종 위기로부터 3억 광년 떨어진 곳에 서식하는 동물들을 찾아 떠난 노동 여행
동물의 생명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밀렵꾼이나 마구잡이 포획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떠올리기 쉽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현대 사회에서 가장 생명을 위협받는 동물은 단연코 우리가 매일 쉽게 볼 수 있는 식용 동물들이다. 이 책은 멸종 위기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전 세계인의 식용 동물 닭, 돼지와 한국인들의 식용 동물 개가 ‘고기’가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통계가 아닌 클로즈업의 방식으로, 노동하고 체험하면서 관찰한 결과물이다. 노동 여행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4년의 시간 동안 한국 식용 동물 농장 열 곳에서 일하고 생활하면서 단순하게 머리로 숫자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체를 확인하고 냄새를 맡아보려고 했다. 그곳에서 경험한 사람과 동물의 이야기를 틈틈이 일기로 적어뒀고, 에세이 형식으로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고기「명사」
1. 식용하는 온갖 동물의 살.
2. 사람의 살을 속되게 이르는 말.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맛있는 고기들: 시간과 공간의 감옥에 갇힌, 생명 아닌 상품
고기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맛있는’ 고기와 ‘힘쓰는’ 고기. “고기로 태어나서” 스스로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서글픈 운명에 처한 ‘두 고기 이야기’를 이 책은 두루 다루고 있다.
‘맛있는’ 고기들의 생명은 현대 사회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과 속도와 식감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농장에서 가장 자주 쓰는 말은 ‘도태’다. 고기라는 상품으로 태어난 닭, 돼지, 개는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즉시, 즉 사룟값 대비 판매가격이 낮다고 판단되면 ‘도태’된다. 죽인다, 잡는다가 아닌 ‘도태’다. 하자가 생긴 물건을 처리하는 것일 뿐 생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식용 동물일지라도 생애 주기만큼은 보장받는다던지, 조금 더 윤리적인 방식으로 사육된다던지 하는 것들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저자가 경험한 거의 모든 농장의 상황이 비슷했다.
닭은 비좁은 케이지에 한 가득 갇힌 채 고기가 될 부위들만 기형적으로 성장을 당한다. 수평아리들은 모조리 쓰레기통에 코 푼 휴지를 버리듯 폐기된다. 돼지 농장에서는 육질을 위한 거세가 제대로 된 마취도 없이 진행되는가 하면 (법적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전기 충격기가 종종 쓰였다. 모돈의 경우 1년에 단지 40분을 걷고, 그 외의 시간은 먹고 잠을 자면서 스톨이라는 기구 안에서 “동사(動詞)가 필요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적게 먹고 빨리 찌는 규칙이 농장 전체를 지배하고, 이 규칙을 따르지 못하는 돼지는 도태된다. 아프다고 치료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낫거나, 도태되거나, 판매될 때 그 부위를 잘라내면 될 뿐이다. ‘관리’와 ‘위생’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의 환경에서 개 사육과 도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동물 농장의 동물들은 모두들 서로를 쪼아대고 물어뜯는다. 신체 여러 부위에 이상 현상이 나타난다. 자연 상태의 닭, 돼지, 개가 절대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인간이 고기를 얻기 위해 강제하는 시간과 공간의 감옥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과연 이런 식으로 자연과 관계를 맺는 게 온당한 일일까, 생명을 이런 식으로 낭비해도 되는 것일까 저자는 고민한다.
하지만 이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을 지닌다. 돈이라면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농장주가 바로 그 때문에 ‘돼지 킥 노노’를 외치는 것과 그 어떤 농장주(또는 기업 사장들)보다도 노동자 인권을 이해하던 이가 ‘사람들 너무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전기 충격기를 허용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개 농장에 대해 비판하기는 쉽지만, 개 농장이 한국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마지막 재기를 위해 손대는 사업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현실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상품성이 있는 일부 동물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기도 한다. 그럼 그렇지 않은 고기들에 대해 상품성을 배제한 채 윤리적으로만 접근하자고 말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맛있는 고기의 문제는 보면 볼수록 단순하지 않다.
힘쓰는 고기들: 저 아래 낮은 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
“승태 이빨 잘생겼네.” 부화장 아저씨들이 저자를 보고 이야기한다. 누구 하나 살면서 치아 한번 제대로 관리 받을 여유가 없었기에 밥을 먹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다는 걸 저자는 그제서야 알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과 비슷한 다른 이들처럼 살았다면 아마도 그곳에서 일을 하지는 않았을 저자는 ‘저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다양한 일들을 경험한다. 부화장에서 함께 한 가족처럼 모여 술을 마시고, ‘앙골와트’를 남긴 민족의 예술혼에 감탄하며, 한국 남성 노동자와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의 결혼을 축하하고, 이집트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왜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 질문 받고, 조선족 아저씨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집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요리들을 맛보고, 한 달에 하루 또는 이틀 쉬며 일하던 중 돌발적으로 주어진 ‘저녁이 있는 삶’에 감동하고, 개 농장 주변 농민들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라는 말에 자신이 이론서 한 귀퉁이를 붙잡고 성실한 사람들을 평가하며 교만하게 구는 건 아닌지 고민한다.
근로기준법도 합법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노동 환경(최근의 개정 논의에서도 이 업종은 완전히 배제됐다)에서 노동을 하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오늘날 이곳의 ‘저 아래 낮은 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인간의 조건》부터 이어져온 작가의 치열하지만 가난한, 세상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사람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인 것이다.
종의 돌담 앞에서 살펴본 인간과 동물의 경계
이 책은 채식을 주장하지 않는다. 야만적인 고기는 없다.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이 똑같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식용 고기 산업의 단면을 살펴보면서, 저자는 동물보다도 “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과연 ‘두 고기’를 저런 식으로 대하는 것을 인간다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은 것 하나부터 더 윤리적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식용 고기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스스로를 의심하고 변화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자연과 생명에 야기하는 고통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고민과 시도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 통해 ‘윤리적인 고기’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다. ‘윤리적인 방식으로 사육한 고기’의 값이 비싸진다면, 맛이 없어진다면 이는 적절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장,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나가기 때문에 우리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수십 톤의 음식 쓰레기가 불균형하게 쏟아지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이 없다면, 우리는 종(種, species)을 가르는 돌담 앞에서 미심쩍은 눈으로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계속 바라보며 ‘이것이 인간인가’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극단적인 불의를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 속으로
이 책은 멸종 위기로부터 3억 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서식하는 동물들을 찾아 떠난 여행을 기록한 글이다. 내가 처음 양계장에 발을 디딘 것이 4년 전이다. 당시에는 동물의 삶을(당연히 인간도 동물이지만 여기선 편의상 인간이 아닌 동물만을 동물이라고 부르겠다) 확인하겠다거나 책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서울을 떠날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다. 소개소장이 100원짜리 밀크 커피 한 잔을 뽑아주며 강원도의 옥수수 농장과 금산의 양계장을 추천해줬다. 내가 후자를 선택한 이유는 옥수수보다는 닭을 키우는 쪽이 조금이나마 덜 지루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맞았다. 양계장은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은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다. 돈을 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내가 원한 것은 악몽에나 나올 법한 그 닭들에게서 멀어지는 것뿐이었다. 내가 축사 안에서 본 것들 가운데 모르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축사 속에 내가 예상한 대로의 모습을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고기를 위해 길러지는 동물들이 어떻게 먹고 살고 있는지 보고 싶어졌다. 이들 주위에는 상아를 노리는 밀렵꾼도 밭을 만들려고 숲에 불을 지르는 주민도 없었지만 디스커버리 채널의 주연 배우를 괴롭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하지만 비슷하게 강력한 위기가 이들의 삶을 위협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 p.5
동정심도 그저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닭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이것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밟은 다음 저 산 너머로 차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만약 내가 이 닭들에 대해서 책으로 읽었다면,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고 너무나도 역겨워 보였기 때문에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 말고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케이지란 도구는 갇힌 쪽이나 가둔 쪽 모두에게서 최악의 자질을 이끌어 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p.19
계급이란 것은 옷차림이나 대학 졸업장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이빨로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있는 데 복 부장이 대뜸 내게 물었다. “야, 너 그거 니 이빨이야?” 적당하게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지금 그게 내 피부냐고 물은 것처럼. 그는 내 이빨을 임플란트나 틀니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내 이빨로 향했다. “히야, 승태 이빨 잘생겼네. 가지런하니. 얼굴보다 이빨이 낫다.” 이빨이 잘생긴 남자가 이상형인 여성이 몇이나 될까 추측하는 동안 아저씨들은 자신들의 치아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씹을 때 크든 작든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어금니에 문제가 있어서 아주 약하게 씹거나 앞니로 씹었다. 나와 비교적 같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마흔의 장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치과에서 일하는 친척을 둔 덕분에 어릴 때부터 싼 가격으로 꾸준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매번 제일 먼저 식사를 마치는 이유가 단순히 먹성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저씨들은 이빨에 생긴 문제는 참을 수 있을 만한 불치병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좀처럼 병원에 가려고 하질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 밥을 먹을 때면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아저씨들이 음식을 씹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며, 들릴 듯 말 듯 신음 소리를 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처럼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우적우적 씹어대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머쓱해졌다.--- p.58
무감각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0동에서부터 차례대로 작업했는데 얼마나 많은 닭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수백 마리는 될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손에 ‘투두둑’ 하고 닭의 명줄이 끊어지는 느낌이 전해져도 정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릴 때만큼의 감정도 소모하지 않고 닭의 목을 비틀었다. 내 발 주위는 무도병에 걸린 것처럼 사지를 흔들어대는 닭으로 가득했다. 잠깐, 정말 찰나의 100분의 1 정도의 순간 동안 예전의 일기에 적어놓은 그런 감정들, 미안함, 불편함, 찝찝함 같은 것들이 느껴질 것 같았지만 금세 짜증과 피로에 묻혔다. 이런 식이면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p.154
겉으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걱정이 됐다. 물론 상처는 크지 않았다. 주사 바늘이 이미 수십 마리의 돼지들 몸속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초조했다. 결국 한 시간이 지나서야 처치를 했다. 사장은 돈사에 소독약이 없어서 사무실까지 내려가야 하는 걸 무척이나 귀찮아했다. “안 죽어, 안 죽어. 피 살짝 나는 것 가지고…… 이제 보니까 아주 귀여운 구석이 있어.” 주사 바늘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건 뉴욕이나 암스테르담으로 이민을 간 후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의료 폐기물 더미 속에서 주운 주사기로 이 국제관계학과 졸업생의 팔을 살짝 찔러보고 싶어졌다. 아, 그렇게만 할 수 있었다면 이 야심만만한 사업가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워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 p.171
다시 한 번 눈물이 핑 돌았다. 돈도 돈이었고 분하고 억울한 것도 그렇지만 가장 나를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의 말투가 한두 시간 전에 멱살을 붙들고 호로새끼를 외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중했다는 거다. 조금이나마 화를 가라앉히고 진정해서일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대에서 소송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농장장은 그가 “문제 생기면 변호사 시동부터 걸고 보는 인간”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일도 소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차하면 법정에서 증거물로 쓰일 수 있는 휴대폰 문자에 조금 전 일어났던 폭행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이렇게 철저하구나, 나는 생각했다. 나나 쌍남 같은 사람은 절대 이런 사람을 이길 수 없겠구나. 이 개새끼! 이 씨발 놈! 가만 놔두면 안 되겠어. 신고해야겠어. 나는 결심했다.--- p.233
사장처럼 온화한 사람이 전기 충격기로 돼지를 찌르는 모습이 잘 그려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씨 아저씨나 강 부장이 조금이라도 폭력적이거나 거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전기 충격기는 돼지라는 상품을 다루는 방식의 하나일 뿐이었다. 여기에 이곳 돼지 삶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었다. 강경의 사장은 (이런 식으로 야비하게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는데)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사람보다 상품이 더 중요했다. 그는 우리가 절대 돼지를 때리지 못하게 했다. 상품에 흠집이 생기면 안 되니까. 그가 감시하는 동안뿐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농장의 원칙은 그랬다. 하지만 횡성의 사장은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가 물건처럼 다루는 것은 돼지뿐이었다. 그는 진심에서 우리가 너무 힘들게 일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돼지를 때리는 것도 전기 충격기를 쓰는 것도 막지 않았다. 전자는 법적 책임을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두들겨 팰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돼지에게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게 했다. 후자는 뺨을 얻어맞으면 자기가 뭘 잘못했나부터 고민할 사람이었지만 돼지에게 전기 충격 주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이성의 노예들이 보는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성적으로 문란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횡성의 양돈장에서 보았던 일들도 같은 논리로 이해한다. 그건 그들이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동물은 물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어느 과학자의 말을 바꿔서 표현해보자면 생명관에 상관없이 좋은 사람은 동물을 아끼고 악한 사람은 동물을 학대한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동물을 학대하는 경우, 그것은 대부분 동물은 물건이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p.263
그런 일들이 괜찮은지 물어보자 상대는 내가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즉시 이해했다. “개 키우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그 대답은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흘러나왔기 때문에 더욱더 확신에 차 있는 듯이 들렸다. 내 자신이 쓸데없는 참견쟁이처럼 느껴졌다. 이곳의 물을 마시고 이곳의 쌀을 먹는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내가 뭐라고 그게 더럽고 끔찍하다고 난리란 말인가? 나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이론서 한 귀퉁이에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기준을 가지고 폄하하고 있는 걸까? ‘다 그런 거지’라는 말속엔 내 비난보다 훨씬 더 거대한 존재에게 호소하는 울림이 있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p.355
갑이 을의 처지를 상상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면 인간이 동물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동물은 특히나 식용 가축은 인간 앞에선 영원불변의 을일 테니 말이다. 이곳은 케이지 하나에 여러 마리의 개를 넣고 기르다 보니 서로 싸우고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치료 같은 건 없었다. 어떤 개는 뒷다리에 30cm 정도 길이로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벌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지만 방치됐다. 또 이곳엔 눈에 이상이 생긴 개가 많았다. 가장 심했던 개는 한쪽 눈알이 부어서 눈 대신 8번 당구공을 끼워 넣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어쩌다 저렇게 된 거냐고, 뭐라도 해야 하지 않냐고 물으면 그는 한결같이 시큰둥했다. “별 거 아냐. 조금 따끔하다 말아.” 유달리 상상력이 부족한 남자가 대답했다.
--- p.414
칠면조를 기르는 미국의 어느 동물 복지 농장은 일반적인 사육 기간보다 수개월을 더 기르는데 이 고기 역시 질기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고기를 구매하는 식당과 개인 소비자들을 위한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했다. 맛은 어찌 보면 생산비나 시설 문제보다 더 큰 어려움일 수도 있다. 동물 복지가 미각과 연결된다면 요식업계의 변화까지 동반해야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동물에게 충분한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그렇다 해도, 지금부터 조금씩이라도 동물들이 갇혀 있는 시간의 감옥에 대해 고민해볼 가치는 있을 듯싶다.--- p.433
육식의 종말 제러미 리프킨 저 | 시공사 | 2002년 01월 | 원제 : Beyond Beef
목차
머리말
1부 소와 서양 문명
1. 도살업자를 위한 제물
2. 소로 그려졌던 신과 여신들
3. 신석기 시대의 카우보이
4. 신이 내려준 선물과 자본
5. 소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도
6. 소를 '남성'의 상징으로 여겼던 스페인
7. 소 사육장이 된 아메리카
8. 영국인과 육식
9. 감자를 먹게 하라
10. 살찐 소와 비대한 영국인
2부 미국 서부를 정복기
11. 철도 연결과 소 떼의 이동
12. 육우로 대체된 버펄로
13. 카우보이와 인디언
14. 목초가 곧 금이다
15. '옥수수로 사육하는' 육우 정책
16. 철책을 두른 목장과 토지 사기
3부 쇠고기의 산업화
17. 쇠고기 기업 연합
18. 쇠고기 해체 공정
19. 현대의 쇠고기
20. 자동화된 정육 공장
21. 전세계적인 '육우 기지화'
4부 배부른 소 떼와 굶주린 사람들
22. 소 떼의 천국
23. 맬더스와 육식
24. 지방(脂肪)의 사회학
25. 육식의 대가
26. 인간을 집어삼키는 소
5부 지구 환경을 위협하는 소 떼
27. 생태적 식민지 정책
28. 열대지방에 자리잡은 목초지
29. 발굽 달린 메뚜기 떼
30. 사막으로 변해 가는 아프리카
31. 물을 빼앗긴 사람들
32. 더워져만 가는 지구
6부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의식구조
33. 쇠고기 심리학
34. 육류에서 비롯된 남녀 차별주의
35. 쇠고기가 낳은 계급주의, 국수주의
36. 소 떼와 개척정신
37. 햄버거와 고속도로 문화
38. 현대 육식 문화 비평
39. 쇠고기, 그 차가운 악
40. 육식의 종말
주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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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절망적인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식량 곡물에서 사료 곡물로의 전환은 역전될 기미가 전혀 없는 채 여러 나라들에서 사료 곡물 생산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이런 전환이 인간에게 미친 결과는 1984년 날마다 수천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어 가던 에티오피아의 사례를 통해 극적으로 입증되었다. 바로 그 당시 에티오피아는 일부 경작지를 아마인 깻묵, 목화씨 깻묵, 평지씨 깻묵을 생산하는데 할애했다는 사실을 대중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 작물들은 가축사료로 영국을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에 수출할 목적이었다. 현재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제 3세계 토지가 오로지 유럽의 가축사육에 필요한 사료를 재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본문 중에서
소를 포함하여 여타 가축들은 미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의 70%를 소비한다.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식의 1/3을 소와 다른 가축들이 먹어치우고 있는 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농토가 생계용 양식 곡물 생산에서 상업용 사료 곡물 생산으로 전용됨에 따라 수많은 농부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조상의 땅으로부터 쫓겨나고 있다. 인간들은 기아에 시달리고 있지만 소와 다른 가축들은 실컷 곡물을 먹고 있다. 이런 이유로 개발도상국들에서는 격렬한 정치적 분쟁이, 북반구의 산업화된 국가들과 남반구의 가난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적대감이 움트고 있다.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곡식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선진국에서는 사료로 사육된 육류, 특히 쇠고기 과잉 섭취로 인해 생긴 질병으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들은 곡물로 사육된 쇠고기를 탐식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풍요의 질병', 즉 심장발작, 암, 당뇨병 등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구촌 곳곳의 축산 단지들이 야기하는 환경적, 경제적, 인간적 해악의 피해에 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가 지구의 생태계와 문명의 운명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다. 하지만 날로 증가하는 소와 육식 문제가 미래의 지구와 인류의 행복에 가장 큰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머리말 중에서
미국에서 사용되는 제초제의 80%가 축우와 다른 가축들의 사료로 사용되는 옥수수와 콩에 뿌려지고 있다. 가축들이 섭취한 제초제는 그들의 신체에 서서히 쌓여가며, 살충제 또한 쇠고기 덩어리와 함께 소비자인 인간에게 전달된다. 전미 과학아카데미 연구위원회(NRC)에 따르면 쇠고기는 살균제 오염으로 인한 암 유발 식품들 중 토마토에 이어 두 번째로 위험한 식품이다. 제초제 오염으로는 가장 위험한 식품이며, 살충제 오염으로는 세 번째로 위험한 식품이다. NRC에서는 요즘 시장에 나오는 온갖 식품들 중에서 쇠고기 살균제 오염이 소비자들의 암을 유발시키는 정도가 전체의 11%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pp. 19 ~ 20
그들(포장 노동자들)은 고기가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될 때면 그것들을 캔 제품으로 만들거나 썰어서 소시지에 넣었다 그곳에선 소시지에 썰어 넣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수입 불가 판정을 받은 곰팡이가 피고 희멀건 유럽산 소시지들이 들어왔는데, 그것들은 보록스와 글리세린으로 처리된 후 가공장치에서 재차 가정용 식품으로 제조되었다.
또 그곳에는 먼지와 톱밥이 가득한 바닥에 고기들이 내팽개쳐져 있고, 그 위에서 노동자들이 짓밟고 침을 뱉어대기 때문에 수십 억 마리의 세균이 득실거렸다. 창고마다 수많은 고깃덩이들이 쌓여 있고, 곳곳에서 새어나오는 물이 그 위로 떨어지고, 그 주위로는 수천 마리의 쥐들이 내달리고 있었다. 이런 저장고들은 너무 어둠침침해서 제대로 볼 수도 없지만, 이 고깃덩이들 위에 널린 말라빠진 쥐똥을 손으로 치워낼 수는 있었다. 이 쥐들은 아주 골칫거리여서 노동자들은 독이 든 빵들을 놓아두는데, 쥐들은 그것을 먹고 죽었다. 그러면 쥐들과 빵과 고깃덩이들은 모두 한꺼번에 가공장치 안으로 들어갔다.--- pp. 158 ~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