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근 2017. 10. 6. 18:57

1.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건 경제학자 _ 아마르티아 센

1943년 인도의 벵골 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들이닥쳤다. 태풍의 영향도 있었지만 이 대기근의 원인은 사실 당시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의 엉터리 식량 정책 탓이었다. 이른바 벵골 대기근으로 불리는 이 참사에서 얼마나 많은 인도인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정확한 통계조차 나와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은 아사자(餓死者)300만 명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700만 명이라고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대기근으로 최소한 우리나라 부산의 인구를 넘는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이 참혹한 사태에 인도를 다스리던 영국 총독은 영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영국인의 영웅으로 불렸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이 요청을 식량을 실어 나를 배가 없다는 이유로 묵살하며 이렇게 비웃었다.

 

아니, 인도가 굶고 있어? 그러면 굶고 있다는 간디는 아직도 안 죽었나?”

 

이 참혹한 현실이 한창일 때, 벵골 지역에는 총명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굶어 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목격하며 왜 가난한 사람은 이처럼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리고 그는 1998년 아시아 출신으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는 위대한 경제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바로 후생경제학의 대가(大家), 경제학계의 마더 테레사로 불리는 아마르티아 센이다.

 

민주주의의 확립, 빈곤 해결의 첫 걸음

센은 대표적인 후생경제학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경제학계에서는 센코노믹스(SEN-conomics)’, 센의 경제학이라는 분야가 따로 정립됐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굶주림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연구한 센의 결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바로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독재 국가에서는 독재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독재자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권력이 견제를 받지 않으니 독재자는 국민들의 삶을 걱정하지 않는다. 권력자는 원래 다음 선거에서 내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어야 굶주린 국민들을 돌보는 법이다.

 

이 때문에 여당과 야당이 적절히 힘을 나누고 경쟁하는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굶어죽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 센은 민주주의 국가는 단 한 번의 기근도 겪은 적이 없다.”라는 말로 자신의 견해를 요약했다. 벵골 대기근을 겪은 인도가 좋은 사례다.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은 인도에서 독재 권력이었다. 당연히 영국은 인도 국민들의 삶을 돌볼 이유가 없었다. 국민들이 굶어죽건 말건, 자신들의 권력은 유지될 테니까. 수 백 만 명이 굶어죽는 그 처참한 현실을 보고도 처칠이 식량을 실어 나를 배가 없다는 황당한 이유로 곡물 지원을 거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별,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

센이 내린 두 번째 결론은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센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사회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풍요의 혜택이 일부 소수에게만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발전한 사회란 과연 무엇일까? 스마트폰의 성능이 높아지고, 고급 자동차가 늘고, 맛있는 음식이 지천에 널려 있으면 그게 경제적으로 발전한 사회일까? 가난한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을 그림의 떡처럼 바라봐야 하고, 몇몇의 부자들만 그 풍요를 누리는 사회를 과연 경제적으로 발전한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센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답한다. 그는 경제적 발전이란 풍요로움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리는 실질적 자유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누구나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경제적인 발전을 이뤄 낸 나라라는 뜻이다.

 

이런 사회를 이루려면 인간에 대한 권리의 박탈과 억압, 그리고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 모두가 풍요로움을 누릴 권리와 토대가 있어야 한다. 여자라고 차별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차별하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차별하고, 출신 지역이나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한다면 그들은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된다.

 

특히 센이 인간의 기본권 확대를 위해 가장 신경을 쓴 두 가지는 바로 교육과 의료의 불평등을 해소였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병이 들었는데 치료도 못 받고 죽는다면, 역시 가난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다면 이들은 자신의 재능과 꿈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그래서 센은 국가가 나서 의료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이에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소득이 아니라 빈곤지수

또 한 가지, 센은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적 통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센이 비판하는 대표적 통계가 ‘1인당 국민소득(GDP)’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한 나라 국민들이 1년에 평균 얼마를 버느냐를 계산한 수치다. 평균이기 때문에 소득격차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7000달러(3000만 원)인데 이는 4인 가족 집안이라면 1년에 12000만 원의 소득이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4인 가구 중에 1년에 12000만 원을 버는 사람이 대한민국의 평균이라는 주장은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소득불평등 3위의 불명예를 괜히 얻은 게 아니다.

 

이런 이유로 센은 1인당 국민소득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숫자라고 단언한다. 센에게 중요한 것은 평균이 아니라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삶을 사는 이들의 인생이었다. ‘모두가 인간의 기본권을 누리는 세상을 위해서는 평균치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빈곤하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센은 빈곤지수라는 것을 개발해 실제 가난한 국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빈곤지수는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을 올리는 이들의 비중이 전체 국민에서 얼마 정도를 차지하는지를 계산한 수치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건 낮건, 빈곤지수가 높으면 그 사회에서는 최악의 가난을 겪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겉으로 잘 사는 듯 보여도 이 수치가 높으면 뭔가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함께 사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센은 악마는 항상 꼴찌부터 잡아먹는다는 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잔인함을 이야기했다.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극단의 고통에 처하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최소한 인간답게 살도록 해 주는 것, 어떤 경제 위기가 닥쳐도 적어도 그들이 굶어죽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마르티아 센이 바라보는 진정한 경제학의 임무였다.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1933~) = 인도 벵골 지역에서 태어났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영국 유학 시절 그가 묵었던 하숙집의 주인은 너는 밖이 안 보이지만, 밖에서는 네가 보인다라며 센에게 밤에 커튼을 열지 말 것을 지시한다. 이런 혹독한 인종 차별을 겪으면서 센은 자신만의 후생경제학을 개척했다. 그는 복잡한 수치와 그래프를 동원한 경제학을 배척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립했다. 이런 영향 탓인지 그의 저서 위기를 넘어(Beyond the crisis)는 한국에 번역되면서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이라는 인간적인제목으로 바뀌었다. /이완배 기자 9.30 민중

 

2. 사랑과 배려가 넘치는 이상향을 꿈꾼 몽상가 _ 샤를 푸리에

산업혁명 초기 유럽 사회의 모습은 실로 비참했다. 노동자들은 하루 1000원도 안 되는 일당을 받으며 14시간 넘게 일해야 했고, 도시는 질병이 들끓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 산업자본가들은 큰돈을 벌어 떵떵거렸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렸던 애덤 스미스는 이런 현상을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설득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고, 이런 이기심을 최대한 발휘해야 세상이 발전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경제사학 교수인 애브너 오퍼의 말처럼 경제학은 물리학과 같은 과학이 아니라 어느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이기심을 강조한 스미스의 경제학은 새로운 지배자로 떠 오른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금욕주의 기독교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중세 귀족들은 자본가들을 돈만 아는 벌레 같은 자들이라고 몰아붙였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은 스미스의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다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이를 방어해 냈다. 스미스의 비호 아래 자본가들은 더 이기적으로 노동자들을 수탈해 나갔다. 산업혁명 시대의 어두운 세상은 그렇게 공고해지고 있었다.

 

이상향을 꿈꿨던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는 바로 이 비인간적 산업혁명 시대에 넌더리를 냈던 가장 인간적인 사회주의자 중 한명이었다. 푸리에는 극도로 가난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이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푸리에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이 불평등하고 비인간적인 사회를 개선할 방법을 모색한다.

 

마침내 그가 찾은 해법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모여 마을을 만든 뒤, 마을 안에서 서로 나누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상상 속에서 만든 이 이상향의 이름을 팔랑스테르(phalanstere)’라고 불렀다. 그가 꿈꿨던 팔랑스테르의 모습을 잠깐 살펴보자. 이곳에는 1600~1800명이 하나의 거대한 주택 단지에 모여 산다. 이들은 가족만큼 서로를 사랑한다. 4~6층 규모의 주택은 너무도 아름답고 쾌적해서 푸리에의 표현을 빌면 여름에는 분수 덕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거대한 벽난로 때문에 따뜻한곳이었다.

 

팔랑스테르에서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일이 절대 없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주민들이 마을 중앙광장에 모여 토론을 통해 결정을 한다. 주민들은 하루에 6시간만 일을 한다. 마을에서 생산된 물건은 필요한 만큼 구성원들에게 나눠진다. 아이들은 잘 갖춰진 시설에서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며 공부를 한다. 그렇다면 이 멋진 도시를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누군가가 돈을 대야 이런 멋진 도시가 만들어 질 것이다. 푸리에는 이 대목에서 부자들이 인간미를 갖추고 스스로 돈을 내 이런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돈에 눈이 멀어 하루 일당을 1000원만 주고 노동자들을 부려먹던 당시 산업자본가들에게 이런 주장은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하지만 푸리에는 부자들의 배려와 가난한 노동자들의 헌신을 통해 이런 유토피아가 건설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팔랑스테르를 지지해 푸리에가 죽은 뒤 미국에서는 꽤 많은 숫자의 팔랑스테르가 생기기도 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이 자금 부족으로 나중에 망하긴 했지만 말이다.

 

인간적인 경제학을 꿈꾸며

푸리에는 살아생전 상상력이 너무 풍부해 미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경제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로 남아 있다. 푸리에가 등장하기 전까지 경제학에서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경쟁을 통해 남을 쓰러뜨리려는 존재로만 해석됐다.

하지만 인간이 과연 그렇게 이기적인 존재이기만 할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반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손해를 좀 보더라도 누군가를 배려하고, 나누는 삶을 존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빈부격차가 극심한 신자유주의 말기에 푸리에의 인간미 넘치는 경제학이 다시 조명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쟁 대신 신뢰와 협동을 통해 남을 쓰러뜨리지 않고도 함께 공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이 갖기 시작한다.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기업끼리 서로 정보를 나누고, 도와가는 시도가 바로 대표적인 예다.

 

최근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산업 지역 가운데 한 곳이 바로 이탈리아의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라는 곳이다. 이곳에는 40만 개가 넘는 중소기업이 협동조합을 조직해 서로를 돕고, 배려하며, 정보를 공유해 나간다. 경쟁을 통해 이웃집 공장이나 가게를 쓰러뜨리는 것은 이들의 관심이 아니다. 이들은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모두가 더 잘 사는 방안을 자발적으로 모색한다. 큰 기업이 작은 기업을 억압하는 일도 없다. 이곳의 국민소득은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높은 편이고, 주민들의 생활 만족도도 세계에서 제일 높다.

 

오랫동안 경제학은 합리적인 선택, 이기적인 경쟁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 남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팔랑스테르를 건설해 함께 나누고 배려하는 삶을 꿈꿨던 몽상주의자 푸리에를 우리가 다시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 =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그가 활동할 당시 경제학의 주류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의 차지였다. 잘 알려진 대로 자유방임주의는 개인에게 경제 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경쟁을 활성화하자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푸리에는 이를 세상을 망치는 악()’으로 규정했다. 푸리에는 경제적 자유보다도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경쟁보다도 조화와 소통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부자와 빈자(貧者)가 함께 모여 배려하고 살아가는 이상향을 만들자고 주문했다. 그의 대표 논문 제목도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라는 아주 인간적인 것이었다.

 

 

 

3. “() 뿐 아니라 빈곤도 확대 재생산된다 _ 군나르 뮈르달 10.5 민중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됐을 때 온 세계가 술렁였다. 오랫동안 노벨경제학상은 압도적으로 우파 경제학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명단을 보면 확실히 진보 쪽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나 아마르티아 센(Amartya Kumar Sen) 등 몇 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스웨덴의 보석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진보적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이 선정된 것이다. 이 해 노벨경제학상이 특히 눈에 띈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뮈르달과 함께 공동으로 상을 받은 이가 바로 우파 경제학자 중 악마적 거장으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였기 때문이다. 이 해 노벨경제학상은 가장 진보적인 경제학자와 가장 보수적인 경제학자 두 명의 손을 동시에 들어준 셈이다.

 

뮈르달과 하이에크의 공동 수상 사실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이에크는 알겠는데 뮈르달이라는 듣보잡은 누구야?”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당시 두 학자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이는 너무나 큰 오해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이후 하이에크가 유명해져서 그렇지 1974년만 해도 뮈르달은 하이에크보다 훨씬 유명한 경제학자였다. 오히려 하이에크가 무명에 가까웠다. 하이에크는 노벨상을 받은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케이스다. 그의 전기를 쓴 기자도 하이에크가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면 현재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없다고 쓸 정도였다.

 

차별과 빈곤의 본질을 파헤친 누적적 인과관계 이론

뮈르달이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1938년 그가 미국의 흑인문제를 연구한 미국의 딜레마(An American Dilemma)를 출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 흑인들의 빈곤이 왜 끝없이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줬다.

       

뮈르달이 제기한 핵심 개념은 누적적 인과관계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부()는 확대 재생산되고 가난은 대물림된다고 여긴다. 문제는 이런 시각에 미묘한(하지만 중요한)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부는 축적되는 것을 넘어 확대 재생산된다는 사실을 대부분 안다. 그런데 가난은 그냥 대물림만 된다고 생각을 한다. 아빠의 가난 강도가 10이라면 자식도 10 정도의 가난을 물려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뮈르달은 자본주의의 현실이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처참하다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가난은 단지 대물림되지 않는다. 가난은 오히려 후손으로 대물림될수록 더 커진다. 아비의 가난이 10이라면 자식의 가난 강도는 50이 된다. 손주의 가난 강도는 100으로 불어난다. 자본이 눈덩이처럼 부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처럼, 빈곤도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이야기다.

 

뮈르달은 이런 현상을 누적적 인과관계의 결과라고 설명을 한다. 그는 미국의 딜레마에서 흑인들의 빈곤을 이렇게 설명한다.  

흑인들은 소수다. ➜ ● 소수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 ➜ ● 차별을 받기 때문에 소득이 줄어들어 가난에 빠진다. ➜ ● 가난하다보니 건강과 교육에 투자를 못한다. ➜ ●교육수준이 낮아져 더 가난해진다 ➜ ● 과거에는 흑인이라고 차별받았는데 이제는 흑인인데다 가난하기까지 하다고 더 차별을 받는다. ➜ ● 차별이 더 심해져 더 큰 빈곤에 직면한다. ➜ ● 더 가난해질수록 이들의 교육과 의료 수준은 더 낮아진다.

 

차별은 빈곤을 유발한다. 문제는 이 차별이 단발적으로 빈곤을 유발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차별과 빈곤은 원인과 결과로 반복적으로 작용하면서 누적적으로 쌓인다. 가난하니까 차별을 받고, 차별을 받아서 더 가난해 진다. 이 끝없는 악순환에 빠지면 빈곤이 확대되는 일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뮈르달의 주장이었다.

 

호남 차별의 역사와 뮈르달의 누적적 인과관계 이론

한국에서 누적적 인과관계 이론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호남 차별이다.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김대중 후보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를 압박하기 전(부정선거가 아니었다며 김대중 후보의 승리였다는 평가가 다수)까지 호남에 대한 지역 차별은 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대중이라는 정적을 만난 박정희는 이후 악랄하게 호남을 지역적으로 고립했다.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호남은 숱한 탄압을 받았다. 문제는 이 차별이 단지 호남 민중들을 한 차례 빈곤으로 몰아넣은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호남의 빈곤은 교육과 복지의 낙후로 이어졌다. 명문대는 대부분 경북고를 중심으로 한 TK지역의 차지가 됐다. 당연히 사회 요직도 이들이 휩쓸었다. 호남 출신의 중앙 진출은 더 어려워졌고 지역의 빈곤은 더 심화됐다. 인재들에게 제공되는 교육과 복지는 더 낮아졌고 호남 인사들의 요직 진출은 더 어려워졌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호남의 빈곤은 누적적으로 쌓여만 갔다.

 

뮈르달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자기 보정장치가 없기 때문에 누적적 인과관계의 모순을 결코 고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뮈르달에 따르면 이를 해결한 방법은 오직 하나,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다. 그는 차별과 빈곤에 허덕이는 지역(혹은 인종)에 대해 정부가 나서 공공서비스를 확대하고 고용을 인위적으로 극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교육여건의 개선과 복지혜택의 확대도 당연히 선행돼야 한다. 이래야 차별을 받는 이들이 빈곤의 확대 재생산 이 멈춘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뮈르달은 상공부 장관을 맡으면서 이 이론을 현실에 접목했다. 빈곤의 확대 재생산을 정부의 개입과 공공성 확대로 해결한 것이다. 뮈르달의 충고를 받아들인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지금도 전체 일자리에서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이 수치가 5.6%에 불과하다. 북유럽은 고사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5%)에도 한참 못 미친다. 이래서야 정부가 빈곤의 확대 재생산을 막을 힘을 갖지 못한다.

 

수 십 년에 이르는 호남 차별의 역사는 빈곤과 차별을 시장에 맡기면 결코 보정되지 않는다는 뮈르달의 이론을 입증했다. 차별과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정부가 공공정책을 통해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는 것뿐이라는 뮈르달의 조언이 우리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나르 뮈르달(Karl Gunnar Myrdal, 1898~1987) = 스웨덴 구스타프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법학 교수였지만 1929년 미국 록펠러재단의 초청으로 경제학을 접하면서 경제학자의 길을 걸었다. 1935년 스웨덴 상원의원으로 당선돼 현실 정치에 입문했고 상공부장관과 스웨덴계획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스웨덴 복지국가의 모델을 설계했다. 1938년 미국 흑인문제를 연구한 미국의 딜레마(An American Dilemma)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특히 빈곤국가의 경제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문제 해결을 위해 기존의 주류 경제학을 배격하고 새로운 경제 발전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4. “얼마나 있어야 행복한가?”를 묻다 _ 로버트 스키델스키

행복한 나라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나라가 히말라야 산맥 동쪽의 소국 부탄이다. 이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GDP)2871달러로 세계 129위에 머문다. 하지만 국민총행복지수(GNH, Gross National Happiness)라는 수치로 평가를 하면 순위가 완전히 달라진다. GDP로는 129위지만 GNH를 측정해보면 부탄이 세계 1위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 이는 과장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부탄의 행복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이 나라는 불교를 숭배하기에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수도도, 전기도 없지만 초가지붕 밑에서 행복하게 산다” “차가 없어서 신호등도 없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담배를 안파는 나라다” “모든 국민에게 의료 혜택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등의 예를 든다.

 

하지만 담배를 팔지 않는 게 행복과 무슨 상관일까? 수도와 전기가 없는 게 행복한 걸까? 게다가 불교를 믿는 부탄은 힌두교를 믿는 네팔계 부탄인들을 탄압했다. 1990년대에 부탄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네팔계 부탄인은 10만 명이 넘는다. 또 이 나라에서는 미혼모의 아기를 국민으로 등재하지 않는다. 무상 의료는 맞는 말이지만 의료 기술이 너무 떨어져 영아 사망률이 26.9%(2016)에 이른다. 과연 이런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GNH라는 지표를 만든 사람은 부탄 국왕이었다.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잣대로 우리가 제일 행복하다!”라는 주장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좀 더 객관적인 수치를 살펴봐야 한다. 국제연합(UN)이 매년 발행하는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부탄의 행복 순위는 고작 97위였다.

 

경제학적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자본주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철학적, 인문학적, 그리고 경제학적인 연구가 진행됐다. 자본주의의 찌든 이들은 행복의 지표를 오로지 돈의 크기로만 표시하려 한다. 반면 반()자본, ()물질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은 무소유를 기반으로 한 정신적 행복을 강조한다.

 

과연 정답이 이 둘 중 하나에 있을까? 사실 무소유를 기반으로 한 정신적 행복은 일반 민중들이 이해하기에 매우 힘든 기준이다. 당장 오늘 굶어죽을 판에 우리는 굶주렸지만 행복해요를 되뇌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잣대를 돈의 크기로 측정하는 것은 온당한가? 이 문제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한 경제학자가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전기 3권을 집필하며 명성을 떨친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그 주인공이다.

      

스키델스키는 저서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How much is enough?)에서 돈으로 모든 가치를 측정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끊임없는 소비욕구에 대해서도 냉정한 반론을 펼친다. 그는 단언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돈에 대한 무한 애정이 아니라 좋은 삶이다라고 말이다.

 

스키델스키의 문제의식은 그가 평생을 연구해온 케인즈의 수필 한 토막에서 출발했다. 케인즈는 1930년 출간한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에세이에서 “100년 뒤에는 하루 세 시간만의 노동으로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올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케인즈는 인류 기술의 진보를 믿었다. 그는 기술이 진보하면 시간당 생산량이 증가하므로 생계를 위한 필요 노동시간은 점점 더 줄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거의 일할 필요가 없어지는 단계(하루 3시간 노동)에 이르게 된다고 예상했다. 문제는 이 예상이 너무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데에 있다. 그가 내다본 100년 뒤는 2030년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으로부터 13년 뒤에 노동자들이 하루 세 시간만 노동을 해도 되는 세상이 올 것 같지 않다.

 

물론 케인즈의 예측처럼 기술은 엄청나게 빨리 진보했다. 문제는 기술이 창출한 부()를 자본이 독식했다는 데 있다. 자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대해졌지만, 민중들은 나날이 가난해졌다. 케인즈는 기술의 발전 속도는 예상했지만,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이토록 처참한 분배구조가 자본주의의 주류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스키델스키는 케인즈의 예측이 틀린 이유로 분배 이외에 다른 해석을 추가한다. 원래 케인즈는 경제가 성장하고 적당하게 물질적 풍요를 이루면, 사람들은 그 상태에서 만족하고 여가를 즐기며 행복을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인간을 그런 소박한 행복에 가두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머리 하나 누일 편안한 공간이 있고, 병이 들면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삼시세끼 걱정하지 않는 삶이라면 행복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구성원들에게 당신은 아직 부족해요. 더 부자가 돼야 해요. 돈을 더 버세요. 이 넘치는 광고를 보세요. 돈을 더 쓰고 싶지 않냐구요!!”라고 부추긴다.

 

경제학은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비싼 걸 소비하라고 부추기는 학문이 됐다. 아무리 벌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그래서 스키델스키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소비와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에서는 그 누구도, 아무리 많이 가져도 충분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무소유도, 무한한 부()도 아닌 그 중간쯤의 가치

부탄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하지만 만족을 모르는 탐욕에 기대는 것도 행복이 아니다. 그래서 스키델스키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무엇을 가져야 행복한가?”로 바꿔놓았다.

 

스키델스키는 그 무엇을 다음의 일곱 가지로 정리했다. 건강 안전 서로에 대한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가 바로 그것이다. 돈과 탐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안전하게 사는 사회, 각자의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 서로에서 벗이 돼 주는 사회, 그리고 여유로운 여가를 즐기는 사회, 바로 이런 사회가 우리가 지향하는 행복한 사회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스키델스키는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천을 제안했다. 첫째, “끊임없이 일하라고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야 한다. 주당 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법정 휴일을 늘리고, 일자리를 나눠야 한다. 둘째, 행복을 위해 소득을 적절히 분배해야 한다. 그래서 스키델스키는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셋째,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에 저항해야 한다. 상품 광고를 제한하고 소비세를 누진세로 개편하자는 것이 스키델스키의 주장이었다. 넷째, 스키델스키는 세계화 속도를 현저하게 낮춰 자본이 국경을 넘나들며 소비와 탐욕을 부추기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수 십 년 동안 세계가 주목할 정도의 압축 성장을 이뤄낸 나라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의 본모습은 여전히 헬조선이다. 오징어와 텅스텐을 팔던 세계 150위권의 빈국에서 세계 11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는데, 우리는 과연 그만큼 행복해졌는지를 돌이켜봐야 한다.

 

돈이 없어도 우린 정신적으로 행복해라는 부탄식 행복주의도 정답이 아니고, “돈을 더 벌어야 행복할 수 있어라며 탐욕을 부추기는 영미식 자본주의도 정답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세계 11위 경제대국인 동시에 헬조선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등을 새로운 행복의 가치로 제안한 스키델스키의 주장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1939~) = 영국인이지만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났다. 영국 워릭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정치적인 행보는 다소 오락가락했다. 1981년 영국 사민당 창당 멤버였으나 1992년에는 뜻밖에도 보수당에서 상원의원을 지냈다. 2001년 보수당을 탈당한 뒤 2015년 노동당 당수를 뽑는 선거에서 영국 진보의 상징인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을 지지하며 진보적 경제학자의 면모를 되찾았다. 아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와 함께 쓴 저서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How much is enough?)는 물질적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은 명저로 평가받는다.

 

5. 독점자본은 왜 전쟁을 원하나? _ 폴 스위지

1970년 남미 칠레에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아옌데는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자였다. 아옌데는 특이하게도 원래 직업이 소아과 의사였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어린이들의 건강에 관심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칠레는 그다지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유아기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아옌데는 난국을 돌파할 수단을 우유에서 찾았다. 소아과 의사 출신답게 그는 단백질과 지방, 칼슘과 비타민이 고루 함유된 우유가 어린이들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문제는 칠레 국민들이 가난해서 자녀에게 충분한 분유와 우유를 사 먹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옌데는 이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해결하려 했다. 15세 이하의 모든 칠레 국민에게 매일 하루 0.5리터의 분유와 우유를 무료로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아옌데의 이 정책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정책에 결사반대한 막강한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세력은 바로 당시 중남미에서 우유와 분유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던 식품기업 네슬레였다.

 

네슬레는 단 한 잔의 우유도 칠레 정부에 팔 수 없다고 버텼다. 정부가 우유를 무상으로 나눠주면 자신들이 그동안 챙겨왔던 막대한 이익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옌데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옌데는 1973년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빼앗겼다. 그는 반란군에 맞서 스스로 총을 들고 항전했지만 반란군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목숨을 잃었다. “독점자본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는 사회주의자 폴 스위지의 주장이 현실화되는 장면이었다.

 

독점의 횡포와 견제

독과점이 시장의 가격 결정구조를 왜곡한다는 사실은 주류 경제학자들도 알고 있었다.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담 스미스조차 독과점을 끔찍이 싫어했다. 독점은 보이지 않는 손인 가격이 제 기능을 못 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국을 대표하는 사회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는 새로운 연구를 통해 독점의 횡포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점이 단지 상품 가격만 쥐락펴락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난한 이웃나라를 괴롭혀 전쟁까지도 벌인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스위지에 따르면 한 나라의 시장을 장악한 독점기업은 정부를 조정해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심을 부린다. 특히 강대국의 독점기업들이 이런 횡포를 많이 저지른다. 강대국 독점기업은 이미 벌어들인 돈으로 정부에 로비를 벌여, 주변 가난한 나라에 자신들이 쉽게 진출할 길을 터달라고 요구한다. 로비를 받은 강대국 정부는 가난한 나라를 압박한다. 만약 가난한 나라가 말을 듣지 않으면 전쟁을 벌여 강제로라도 시장을 개방시킨다.

 

베트남 전쟁과 칠레 개혁의 좌절

스위지의 주장은 다양한 형태로 현실에서 입증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1965~1973년 일어난 베트남 전쟁이었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을 침략했다. 통킹만 사건이란 1964년 베트남 동쪽 통킹만에서 일어난 북베트남 경비정과 미군 구축함의 전투를 말한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먼저 미군 함대를 공격해 전투가 벌어졌다며, 이를 베트남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사실 먼저 공격한 쪽은 미군이었으며, 군수업체와 미국 정부가 결탁해 이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베느남 전쟁은 군수업체라는 독점자본이 만들어 낸 전쟁이었다.

 

칠레 아옌데 대통령의 개혁 실패도 비슷한 경우다. 강력한 독점기업이었던 네슬레는 미국과 유럽 강대국 정부에 로비를 벌여 아옌데 정권을 압박했다. 실제 미국은 아옌데의 개혁을 막기 위해 갖은 경제 제재를 동원해 칠레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당시 칠레의 가장 큰 돈벌이 수단은 광산에서 채굴한 구리를 수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국가가 가지고 있던 구리를 모조리 풀어 구리 가격을 폭락시켰고 이 때문에 칠레는 경제적으로 큰 곤란을 겪었다. 아옌데의 목숨을 앗아간 군사 반란을 은밀하고 강력하게 후원한 곳도 미국 CIA였다.

 

스위지는 이런 강대국 독점기업들의 횡포에 의해 약소국의 경제가 피폐해 질 것이고, 이에 따라 약소국에서부터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착취는 심해졌고, 전쟁의 위험은 높아졌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멸하며 스위지의 예상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위지의 학문적 업적이 훼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2001년 오사마 빈 라덴한테 얻어터졌던 미국은 엉뚱하게도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 전쟁을 주도한 세력 중 하나는 미국 금융자본이었고, 금융자본은 이라크 재건사업을 명목으로 펀딩을 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독점자본의 이해관계가 전쟁을 일으킨다는 스위지의 예견은 여전히 유효했던 셈이다.

 

폴 스위지(Paul Sweezy, 1910~2004) = 은행가 부모 아래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상류층만 다닌다는 뉴잉글랜드의 기숙학교를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폴 스위지는 전형적인 미국 상류층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미국 대공황을 겪으면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눈을 떴고 이후 영국 유학길에 올라 사회주의 경제학자로 변신했다. 그의 저서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1942)독점자본(1966)1970, 1980년대 한국에서 당연히(!) 출판이 금지됐다. 하지만이 두 책은 워낙 많은 불법 번역본이 제작돼 사회개혁을 꿈꾸던 젊은이들의 필독서 역할을 했다.

 

6. 지주들을 향한 독설과 저주 _ 헨리 조지

누가 더 넓은 땅을 차지했나? 이것은 바로 인류 역사에서 정복자의 힘을 측정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었다. 땅은 바로 인류의 터전이었고, 인류는 땅을 벗어나 살 수 없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그것을 입증해왔다. 땅을 지배하는 자가 땅 위의 모든 것을 함께 지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1870년대 후반 미국 서부. 30대 젊은이가 엄청난 수수께끼 하나를 머리에 떠올린다. “과학 기술과 산업은 나날이 진보하는데 왜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한가?”라는 수수께끼였다.

연구를 거듭한 이 젊은이는 1879년 마침내 해답을 찾은 뒤 이를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이 바로 근현대 역사상 땅과 인류의 관계에 대해 가장 도전적인 문제를 제기한 진보와 빈곤이다. 물론 칼 마르크스도 조지와 똑같은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마르크스는 그 해답을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았다. 하지만 같은 질문을 던졌던 조지의 해답은 달랐다. 조지는 진보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빈곤한 이유를 노동의 착취가 아니라 땅에서 찾았다. 즉 땅을 제공하면 받는 돈인 지대(地代)가 사람들이 누려야 할 부를 부당하게 빼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돈을 투자하는 자본가는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기업을 경영한다. 노동자는 열심히 일을 하지. 그런데 땅 주인인 지주(地主)는 뭘 하는가? 땅을 제공한다고? 땅은 그냥 땅일 뿐,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땅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돈을 가로채는가?”

 

그래서 조지는 땅 주인들이 받는 지대는 사실상 자본가와 노동자가 받아야 할 몫을 가로채는 도둑질이라고 단언했다. 지대라는 도둑질 때문에 노동자가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높아지는 땅값, 가난해지는 노동자

조지는 땅값과 지대가 계속해서 오르는 현상에 극도의 반감을 표시했다. 사실 땅값의 상승은 단순히 땅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땅이 넓은 나라에서도 도시의 땅값은 계속해서 오른다. 그리고 그 땅에 공장을 짓는 사람들은 땅 주인에게 엄청난 지대를 지불해야 한다.

 

왜 싸고 넓은 땅 놔두고 꼭 비싼 땅에다 공장을 지어야 하느냐는 질문은 너무 한가하다. 땅값이 싼 한적한 시골에 공장을 짓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막 한 가운데 아무도 살지 않는 땅값 싼 곳에 공장을 지었다고 가정해보자. 전기는 어떻게 공급 받나? 수돗물은? 이래서 싸구려 빈 땅에 공장을 지을 수가 없다. 비싼 땅값을 물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고 도로도 있는 도시에 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도시의 땅값은 계속 오르고 그 도시에 땅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땅값 덕에 돈을 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열심히 일하면 뭐해? 대도시에 땅 한 조각만 사두면 평생 먹고 살 돈이 생기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 모이면 땅을 사는데 혈안이 된다. 사려는 사람이 늘어나니 땅값은 더 오른다. 땅 주인만 부자가 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더 가난해 진다. 실제 이런 일이 극심하게 벌어졌던 일본에서는 1990년 수도 도쿄의 전체 땅값이 미국 전체 땅값보다도 더 높아지는 현상이 생겼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통째로 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땅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조지는 이런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혁신적인 세금을 제안했다. 세금의 이름은 단일토지세였다.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땅을 빌려준 대가로 지대를 받았다면, 그 지대를 모조리 세금으로 걷어버리는 것이다.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땅으로부터 얻는 돈을 모두 세금으로 걷으라니 그건 좀 심한 거 아닌가? 땅 주인의 권리도 인정해 줘야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지는 누군가가 이 땅이 내 땅이라고 주장하는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땅은 자연이고, 자연은 모든 피조물들이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조지는 평생 지대를 빼앗아야만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난한 노동자의 위대한 친구라고 여겼다. 하지만 정작 조지 자신은 스스로를 노동자의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노동자만의 친구가 아니에요. 노동자에게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대를 되찾는 것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누려야 할 평등한 혜택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땅 위에서 이뤄졌다. 땅을 지배하는 자는 그 땅 위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자연의 피조물 중 하나일 뿐인 인류가, 자연 그 자체의 기반인 땅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아파트 한 채 가격이 수 억 원에 이르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평범한 서민이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려면 30년 동안 월급을 꼬박 모아야 한다. 헨리 조지의 다음과 같은 외침들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하는 이유다.

 

땅값은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서 온기를, 배고픈 사람에게서 음식을, 병자에게서 약품을, 불안한 사람에게서 평온을 빼앗는다.”

 

지대는 과거에 대한 도둑질일 뿐만 아리나 현재에 대한 도둑질이며, 미레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린이들의 타고난 권리를 빼앗는 사악한 절도이다.”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 =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다섯 달 만에 중퇴했기 때문에 조지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으로 기록됐다. 젊은 조지는 미국 전역을 돌며 각종 험한 일을 하다가 문득 왜 세상은 발전하는데 사람들은 가난한가?”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그리고 그는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해 세상 모든 불평등의 원인이 지대(地代)에 있다는 독특한 이론을 만들어 낸다. 조지는 지대 전액을 세금으로 걷는 단일토지세 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면 자본가와 노동자가 더 이상의 세금을 낼 필요가 없고, 복지 혜택도 늘어나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7. 민중은 어떻게 놀고먹는 자들에게 지배당하나? _ 소스타인 베블런

지난 겨울 시민들의 촛불이 뜨겁게 타올랐던 서울 한 복판, 시청 광장 인근에서는 이른바 탄기국 집회라는 것이 열렸다. “우리 모두 박근혜 대통령님의 이름을 불러봅시다!”라는 사회자의 선동에 참가자들은 박근혜~~” “박근혜~~~”라고 울부짖었다.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의 본질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놀라운 것은 좌빨필살모자를 쓰고 해병전우회 군복을 입은 이들이 절대 기득권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재용을 석방하라!”라고 외치는 이들 대부분은 삼성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집회에 참가하면 2만 원, 유모차를 끌고 나오면 10만 원을 받아간다는 민중들(이 사람들도 분명한 민중들이다)은 정작 자신을 탄압하고 수 조 원을 챙긴 자본가 계급을 위해 절규한다. 도대체 어떤 모순이 이런 기괴한 장면을 만들었을까?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착취와 수탈을 견디다 못한 노동자 계급이 혁명에 나설 것이라 예견했다. 하지만 착취와 수탈이 심해지는 것까지는 맞았는데,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노동자 계급은 온순해졌다. 혁명은 요원해졌고 자본주의 시스템은 공고해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문제에 대해 놀라울만한 식견을 제시한 경제학자가 있다. 유한계급(有閑階級)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며 자본주의에 대한 격렬한 조롱과 통찰을 과시한 경제학계의 이단아 소스타인 베블런이 그 주인공이다.

 

놀고먹는 자들의 특징_유한계급론

베블런은 19세기 미국 경제체제를 신랄하게 비꼰 유한계급론1899년 출간하면서 학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지금도 유한계급은 베블런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통용되는 경제학 용어다.

 

주의할 점은 유한이란 단어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무한(無限)’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자로 유한(有閑)이라고 적고 영어로는 leisure class라고 쓴다. ‘()’은 한가하다는 뜻이다. 즉 유한(有閑)계급은 한가한 계급, 한마디로 놀고먹는 계급을 뜻한다.

 

베블런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기록된 야만적인 지배자들을 모두 유한계급이라고 칭했다. 베블런이 보기에 자본주의의 유한계급은 생산에 전혀 종사하지 않으면서 자본이 안겨주는 자본이득으로 부를 누리는 자들이다.

 

부모 잘 만나 놀고먹는 한량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익히 안다. 그런데 베블런은 유한계급의 존재에서 매우 중요한 경제학적 사실을 한 가지 추출해 낸다. 바로 이 한량들이 과시적 소비를 한다는 사실이다.

 

경제학 교과서에 베블런 효과로 기록된 이 이론의 요지는 이렇다. 유한계급은 필요에 의해서 소비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가 힘든 노동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놀고먹을 정도의 재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말도 안 되게 비싼 제품(실용적 가치는 거의 없는)을 기꺼이 사들인 뒤 뽐을 낸다. 베블런은 이를 과시적 소비라고 부른다.

 

이까지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게 경제학에서 왜 중요한 문제일까? 베블런은 이런 과시적 소비 탓에 특정한 사치재의 경우 가격이 오를수록 오히려 수요가 늘어난다는 점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명품 핸드백이 그런 경우다. 이런 제품은 가격이 싸면 오히려 가치가 떨어져 수요가 줄어든다. 그래서 명품 브랜드들은 가방 하나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가격을 매긴다. 아무리 명품이라도 물건 집어넣는 기능이 전부인 가방 하나에 몇 백만 원씩 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놀고먹는 유한계급은 비싼 가방일수록 더 많이 사들인다.

 

베블런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가격이 올라도 수요가 되레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이는 경제학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하고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세상을 지배했던 주류 경제학(신고전학파)의 가장 중요한 전제가 수요의 법칙(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들고,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가 늘어난다)이었기 때문이다   

수요의 법칙이 만고불변의 과학이라고 믿었던 경제학자들은 베블런의 주장에 어쩔 줄 몰라서 당황했다. 게다가 베블런에 따르면 베블런 효과는 단지 몇몇 유한계급에서 벌어지는 예외적 일탈이 아니었다.

 

이들은 세상의 지배자였고 과시적 소비를 뽐내고 다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했다. 결국 수요는 가격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인다고 믿었던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베블런의 통찰에 전제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왜 가난한 민중들은 보수를 지지할까?

베블런의 통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부자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이어갔다. 베블런에 따르면 부자들은 당연히 정치적으로 보수파가 된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은 생활습관이건 사고습관이건, 변화 자체를 싫어한다. 지금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한계급은 보수가 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왜 착취를 당하는 민중들이 시청 앞에 모여 이재용 석방!”을 외치고 박근혜!”를 절규할까? 베블런은 그 이유를 가난한 사람들 역시 유한계급과 마찬가지로 보수화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나 힘겨운 일상생활에 모든 힘을 빼앗기는 사람은 내일 이후의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보수적이다. 이것은 유한계급이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품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보수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 우리 현실이 그렇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진보를 고민할 시간 따위가 주어지기는 하나? 진보를 위해서는 주변을 돌아보고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철저히 체제에 순응해야 한다. 찢어지게 가난할수록 시키는 일에 순응해야 그날 일당이라도 받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보에 대한 고민은 사치다. 세계적으로 선거를 해보면 보수파를 지지하는 주요 지지층이 빈곤계급이라는 사실은 베블런의 통찰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베블런의 해답은 분명치 않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을 격렬히 조롱했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지 않았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신뢰도 별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명쾌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업적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는 과학을 자처하며 수요의 법칙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했던 고전학파의 가장 중요한 전제를 뒤흔들었고, 우리 사회에서 왜 빈곤층이 체제에 순응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 = 미국 위스콘신 주 매니터웍(Manitowoc)에서 가난한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괴짜 기질이 다분해 대학 시절 친구들에게 인육을 먹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실업자로 지내다가 34세에 코넬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후 시카고대학교로 일자리를 옮겼는데 그는 이곳에서 그 유명한 유한계급론을 저술해 대학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훗날 시카고대학교가 보수적 자유주의 경제학의 본토가 된 점을 감안하면 시카고대학교의 명성이 베블런에 의해 널리 알려진 일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베블런은 자신이 예견했던 대공황(1930)을 한 해 앞두고 산장에서 칩거를 고집하다 세상을 떠났다.

 

8.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류의 본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나? _ 칼 폴라니

대학에서 경제학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화. 교수님께서 경제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균형(equilibrium)’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예를 들었다.

 

우리 집에 딸이 둘이 있거든. 둘 다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엄청 좋아해. 그래서 내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가져가면 서로 더 먹겠다고 싸워요. 그래서 내가 게임을 제안했지.”

 

게임의 내용은 이렇다. 먼저 언니에게 칼을 쥐어준다. 대신 언니에게 너 마음대로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나눠라. 단 조건이 있다. 케이크를 2등분 하는 건 네 마음인데, 뭘 먹을지 고르는 권한은 동생에게 먼저 준다는 것이다.

 

언니의 머리에 온갖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케이크를 더 먹고 싶은 언니는 케이크를 이렇게도 쪼개보고 저렇게도 쪼개본다. 하지만 어떻게 쪼개도 손해다. 왜냐하면 더 크게 보이는 조각을 냉큼 동생이 채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 언니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케이크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이처럼 케이크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균형이다. 그런데 이 설명을 듣던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대학 교수가 너무 쪼잔한 거 아닙니까? 애들이 그렇게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데, 그냥 두 개 사서 하나씩 나눠 먹이세요!”

 

인간의 본성을 갈아 마신 악마의 맷돌

아담 스미스 이후 자본주의 경제학은 시장의 존재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류가 탄생한 이래 늘 존재했고, 모든 것을 상품으로 사고파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온갖 이론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인간은 이기적이고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자. 인류 문명의 역사 7000년 동안 인류는 도대체 언제 이기적이고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였었나? 인간이 언제부터 경쟁을 통해 남을 짓밟고 승리하려는 본성을 가진 존재였느냐는 말이다.

 

반례를 들어보라면 수천, 수만 가지를 들 수 있다. 지난겨울 우리는 매주 토요일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다. 우리가 진짜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면 무슨 경제적 이익이 있다고 모금함에 돈까지 집어넣으면서까지 주말을 헌납하고 함께 싸웠을까?

 

역사를 살펴봐도 인류는 개인의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파편적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서로 역할을 분담하며 사회를 지키려 했던 존재였다. 인류 삶의 토대는 이기적 개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얽혀 모여 사는 사회의 공존이었다는 이야기다.

 

경제학 교수님이야 딸들에게 균형을 가르치고 싶어서 케이크를 둘로 쪼개라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자녀를 위해 케이크를 충분히 사서 오순도순 나눠먹는 게 인류의 본성에 더 가깝지 않은가? 가정도 하나의 사회고 그곳에도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에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와 교환이 인류의 본성이라고?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인류의 본질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영국 자본주의 형성기를 깊이 연구한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단언한다. “자유방임 시장경제는 인류 본능에 따른 자연스러운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이 창출한 계획의 산물이다라고 말이다.

 

시장을 무한 예찬하는 자본가들은 시장은 너무나 위대하고 인간의 본성에 잘 맞아서 정부가 시장에 절대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폴라니는 인간의 노동력까지 사고파는 이 저급한 시장경제가 서로 돕고 사는 인간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고 통박했다.

 

특히 폴라니는 시장이 자기조정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황당한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폴라니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폴라니는 인류 본성과 한참 거리가 먼 시장이라는 착취의 제도를 악마의 맷돌이라고 불렀다. 시장 자본주의는 사회를 맷돌처럼 통째로 갈아 인간의 본성을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장이 아니라 사회를 복원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맷돌로 갈아버리는 것도 처참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시장 자본주의의 숭배자들이 떠드는 대로 시장에 자기조정 기능이 있기만 하다면 그런대로 자본주의를 봐줄만 하다고 칠 수도 있다(물론 그래도 자본주의는 전혀 봐줄만 하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런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란 건 완전한 기만임이 수차례 증명됐다. 자기조정 기능이 있다면서 왜 완전고용은 늘 요원한 꿈이 된 걸까? 자기조정 기능이 있다면서 1930년 대공황은 왜 벌어졌고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왜 생긴 것일까? 가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짜잔~! 하고 조절된다는 주장은 인류 경제 역사의 기본만 알아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시장은 자기조정 기능이 충분치 않다. 따라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두면 경제가 망가지는 것은 자명하다. 이 와중에 시장은 인간의 본성까지 맷돌에 갈아버린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공유하는 인류 본성의 사회는 씨가 말라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고 경쟁하는 개인만 부각된다.

 

폴라니는 인류가 7000년 간 유지해온 사회를 말살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를 복원코자 하는 반발적 운동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하고, 공동체를 복원코자 하는 이 운동을 폴라니는 이중운동(double movement)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이 이중운동이 꼭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때로는 이 이중운동이 사회의 공동체성을 복원하는 바람직한 시도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붕괴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폭력적으로 복구하려는 시도(예를 들어 나치즘이나 파시즘)로 연결되기도 한다.

 

지난해 미국 대선은 이중운동의 양면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좋은 예다. 낙수효과가 경제적 번영을 안겨줄 거라던 신자유주의의 거짓 선전이 종말에 이르자, 미국 민중들의 절반은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시장의 폭압에 맞서자고 주장했던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이중운동의 바람직한 사례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코자 했던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이중운동의 부정적 사례다.

 

그래서 우리는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에 맞설 때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를 복원하고, 공동체를 빛나게 하며, 연대와 협동이 넘치도록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자본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든 것을 시장 아래 두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시장을 우리가 사는 사회 아래에 두고 인간을 보호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을 맷돌에 갈아버리는 이 악마적 자본주의에 맞서 공동의 사회를 재건하자는 칼 폴라니의 제안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 = 188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급진적 사고를 가진 클럽 갈릴레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 클럽에는 게오르크 루카치 같은 위대한 사상가도 참여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에 파시즘의 기운이 감돌자 폴라니는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 시기 폴라니는 영국 자본주의 처참한 참상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폴라니는 영국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통찰과 비판을 담은 거대한 전환1944년 출간했다. 거대한 전환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후 자본주의에 관해 가장 심도 깊은 분석과 비판을 가한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9. 인간적 사회주의의 초석을 닦은 경제 혁명가 _ 체 게바라

혁명에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 뒤 내각을 꾸리기 위해 혁명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당장 급한 직책이 화폐를 통제하는 중앙은행 총재였기에 카스트로는 자네들 가운데 이코노미스트가 없나?”라고 물었다. 이때 손을 번쩍 든 사람이 바로 체 게바라였다. 카스트로는 잠시 당황했지만 무슨 일을 맡겨도 듬직한 동지 게바라를 믿었고 그에게 기꺼이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맡겼다. 후일 카스트로는 게바라를 불러 물었다. “자네가 언제부터 이코노미스트였지? 나는 그냥 자네가 의사 출신인 줄 알았는데.”

 

이때 게바라의 답은 이랬다. “저는 당신께서 자네들 가운데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가 없나?’라고 묻는 줄 알았습니다.” 카스트로의 발음이 엉망이었건, 게바라의 청력이 엉망이었건, 게바라가 쿠바 경제를 설계하는 중책을 맡은 이유는 바로 이런 오해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코노미스트와 한참 거리가 먼 코뮤니스트 게바라는 꼼짝없이 중앙은행 총재직을 수행해야 했다.

 

게바라를 혁명가로만 알고 있다면 게바라와 경제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라는 질문이 당장 나올 법하다. 하지만 게바라는 의외로 매우 유능한 경제 시스템 설계자였다. 게바라는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1959) 2년 동안 국립은행 총재를 지냈고, 농지개혁을 주도했으며, 이후에는 산업부장관도 맡았다. 그의 업적이 만만치 않아서 서방 세계에서는 그를 쿠바의 두뇌라고 부를 정도였다.

 

자유무역 이론을 부정한 자립 경제의 수호자

게바라가 설계한 쿠바의 경제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무역 이론이라는 자본주의의 환상을 먼저 알아야 한다. 절대우위론과 상대우위론을 바탕으로 무역은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는 자유무역 이론은 세계를 제국주의의 착취의 무대로 탈바꿈시켰다.

 

자유무역 이론의 핵심은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더 잘하는 분야에 집중한 뒤 무역을 통해 물품을 교환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진국은 상대적으로 더 잘하는 반도체만 만들고, 후진국은 상대적으로 덜 못하는 물고기 잡이에 집중해 반도체와 물고기를 교환하면 모두가 행복해 진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이야말로 세계를 자본이 지배하는 거대한 체제로 편입시킨 악랄한 이데올로기였다. 자유무역 이론에 따르면 후진국은 평생 물고기만 잡아야 한다. 고부가가치 제품은 모두 선진국으로부터 사들여야 한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못 사는 이유는 그 땅의 민중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다. 자유무역 이론을 앞세워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자본지배 시스템으로 만들어놓은 제국주의적 착취 구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혁명에 성공할 당시 쿠바의 경제는 완전히 미국에 종속된 상태였다. 미국 군정을 거치며 미국식 자본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경제 자체가 단일작물경제(설탕)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쿠바의 산업은 오로지 미국만 쳐다보는 종속적 상황이었다. 당연히 미국 또한 쿠바 경제를 발전시켜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미국의 관심은 오로지 설탕과 시가를 착취하는 일뿐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쿠바가 미국에 종속된 상태를 유지했다면 지금의 자메이카보다도 못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쿠바에서 게바라는 미국에 종속되지 않는 쿠바만의 자립경제의 길을 추구했다.

물론 이 시스템이 성공했느냐에 대한 평가는 매우 어렵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는 석유 같은 천연자원의 무분별한 사용 위에 성립된다. 세계가 이런 시스템에 종속돼 있는 한, 식량과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한 자립경제는 성공할 확률이 극히 낮다.

 

게바라는 세계 각 나라를 돌아다니며 미국에 종속되지 않는 쿠바만의 자립경제의 정당성을 설파했고, 각 나라와 대등한 무역을 원했다. 하지만 미국이 지배했던 자유주의 세계는 단호히 게바라의 제안을 거부했다. 게바라는 또한 쿠바가 소련에 종속되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그가 설계한 자립경제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의 현실적인 도움을 원했던 카스트로와, 완벽한 자립경제를 꿈꿨던 게바라 사이에 갈등이 심해진 때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경제와 인간을 접목시킨 사상가

게바라의 경제관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인간을 경제와 접목시킨 대목이었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 대부분은 소련 식 경제 모델을 받아들였다. 소비에트라고 불리는 중앙평의회가 경제의 모든 것을 관장했다. 코뮤니스트였던 게바라도 당연히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모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특이하게도 그 모델의 틀 안에 인간도덕성이라는 요소를 가미했다. 게바라가 꿈꿨던 경제 시스템은 각 개인이 최대한 발달할 수 있고, 개인의 자유로운 발달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달의 조건이 되는 사회였다.

 

게바라는 자본주의적인 인센티브 시스템이 인간의 도덕성을 심각하게 말살시킨다는 점에 주목했다. 대안으로 게바라가 내세웠던 것이 바로 도덕적 인센티브라는 개념이었다. 어떤 일을 해냈을 때 엄청난 돈을 보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성과가 사회와 인민들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는 도덕적 명예를 수여한 것이다. 게바라는 이런 도덕적 자극이 자본주의보다 더 경쟁력 있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다. 특히 그는 예산재정시스템(BFS)과 자율재정시스템(AFS)을 도입해 소련 식 사회주의와 차별점을 찾아 나갔다.

 

소련 식 사회주의는 예산과 관리, 생산, 유통까지 전부 소비에트 평의회가 결정했다. 하지만 게바라는 계획과 재정(예산)은 중앙에서 관리하되 생산과 유통을 분산시켜 현장 노동자들의 자율적 참여를 보장했다. 현장을 믿지 않고 철저히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 의존했던 소련과 달리 게바라는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을 믿었던 것이다. 게바라의 이상은 인간의 발달에 있었고, 그는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협동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이상은 미국의 강력한 경제봉쇄와 쿠바 내에서 친 소련파의 득세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은 오로지 이기적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주장과, 경제는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는 소련식 경제 시스템을 넘어 그는 우리에게 무언가 제 3의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믿음이 이기심을 이긴다는 그의 뚜렷한 신념이 제3의 길을 향한 첫 걸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 아르헨티나 중상류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게바라는 의학박사 학위를 땄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보장된 삶을 버리고 당시 진보정부가 수립된 과테말라로 이주해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55년 멕시코로 망명했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뛰어들었다. 1959년에 혁명에 성공한 뒤 쿠바 경제 시스템을 설계하다가 1965년에 쿠바에서 사라졌다. 게바라와 카스트로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이후 볼리비아 반독재 혁명군에 가담했지만 정부군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자주적 관리의 기치를 높이 들다 _ 토마스 상카라

1980년대 아프리카 대륙, 이곳에는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하고 오토바이 질주를 즐겼던 30대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공군 대위였고 그에게는 자기보다 두 살 어린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도 공군 대위였다. 청년은 이 친구와 평생 우정을 다짐했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자고 다짐했다.

 

청년은 전도유망한 군인이었다. 낙하산 부대 대원이었던 그는 몹시 용맹스러워서 부하들의 신임도 두터웠다. 청년은 1974년 국경 충돌 때 25세의 나이로 일선에서 부대를 지휘해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이 명성을 바탕으로 그는 1983년 총리에 선임됐는데 권력 다툼에서 밀려 구금을 당하고 만다.

 

이때 청년을 지지했던 수많은 군중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며 강력한 시위를 벌였다. 대중적인 지지를 확인한 청년은 같은 해 8월 평생 우정을 다짐한 친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마침내 대통령에 취임했다.

 

쿠데타가 민주적 절차를 밟지 않은 행위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당시 아프리카 대륙에는 민주적 선거 절차가 확립된 나라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독재가 횡행했고, 쿠데타는 독재자를 몰아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대다수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쿠데타가 하나의 악순환일 뿐이었다. 독재자를 몰아낸 쿠데타의 주역들은 또 다른 독재자가 됐고, 그 독재자를 몰아내기 위해 또 다른 쿠데타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 청년은 달랐다. 청년은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했다. 조국이 제국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번영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이 청년의 이름이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토마스 상카라다.

 

상카라는 집권 이후 식민지 잔재가 남은 국가명인 오트볼타(Haute Volfa, 프랑스어로 볼타 강 상류라는 뜻)를 없애고 새로운 국명을 정했다. 원주민들의 언어로 정직한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지금의 부르키나파소다.

 

아프리카의 보석 같았던 사회주의자

 

공군 대위로 재임할 때 마르크스 사상을 접한 상카라는 집권 이후 프랑스 식민지 잔재를 없애고 국민들의 권익을 높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제국주의 수탈에 누구보다도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도대체 제국주의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면 지금 당신이 먹고 있는 그 옥수수캔, 유럽에서 만든 치약과 칫솔, 비누 등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에 제국죽의가 있다고 역설했다.

 

상카라가 벌인 개혁 정책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상카라는 법으로 일부다처제를 금했고,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너무도 가혹했던 할례의식을 금지시켰다. 또 여성의 날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피임을 장려했다. 각종 전염병에 대비한 예방접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에이즈의 실체를 아프리카 최초로 정부차원에서 인정한 나라도 부르키나파소였다. 학생 수를 두 배로 늘렸고, 영아사망률을 낮췄다. 봉건 지주의 땅을 농민들에게 재분배해 아프리카 민중들에게 땅을 되찾아 줬다. 인두세(人頭稅)를 폐지해 민중들의 조세부담을 낮췄다.

 

상카라는 또 황폐화된 부르키나파소의 자연환경을 복구하기 위해 녹화 사업을 추진했다. 수도 와가두구에 아직도 민중들의 쉼터로 쓰이는 1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이가 상카라였다. 지금 평가를 해도 식량자급, 환경, 인권, 여성, 조세제도 등 거의 모든 면에서 1980년대 아프리카 국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선진적인 정책을 상카라가 추진한 것이다. 또 상카라는 검소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정부가 보유한 리무진을 전부 팔고 르노 소형차에 몸을 실었다. 대통령의 월급도 대폭 삭감했다. 사망 이후 상카라가 남긴 재산은 자동차 한 대, 오토바이 4, 고장 난 냉동고와 냉장고, 그리고 그가 취미로 연주했던 기타 3대가 전부였다고 한다.

 

자주관리제도의 경제학적 의미

그는 분명 빛나는 혁명가였지만, 경제학적으로 남긴 업적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가 추구했던 가장 빛나는 경제정책은 바로 자주관리제도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경제학은 정부가 시장에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하느냐를 두고 일전을 벌인 전쟁터였다. 진보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통한 시장의 제어를 지지했고, 보수는 정부의 철저히 배제를 통한 시장의 숭배를 지지했다. 시장의 폐해를 정부의 힘으로 제어하려면 당연히 정부에 강력한 권한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강력한 힘을 정부에 부여했는데 선거를 통해 엉뚱한 자들이 집권을 할 때 생긴다. 우리나라도 비교적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을 인정하는 국가인데, 이런 나라에서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자들이 대권을 잡으면 시장에 대한 견제는커녕 나라가 거덜이 난다. 이것이 큰 딜레마다. 그래서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정부의 강력한 힘을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 선거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 결과 민중들의 외면을 받으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상카라는 진보 경제학 입장에서 보기에 매우 위험한 도전에 나섰다. 자주관리제도라는 제도를 시행하면서 상카라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은 공무원 수를 줄인 것이다. 큰 정부를 지향하는 진보 경제학 입장에서 공무원을 줄이고 정부 사이즈를 축소하는 정책은 전혀 교과서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카라는 어떤 힘을 바탕으로 시장을 제어하려 했을까? 상카라는 이 해답을 지방정부에서 찾았다.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상카라는 전국을 과감하게 30개 자치구로 나누고 각각의 자치구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주민들이 자주적으로 나서 자치구를 관리토록 했다. 권력의 중심이 민중과 보다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다. 이것이 자주관리정책의 요체였다. 지방분권은 중앙정부가 민주주의를 믿느냐, 민중들을 믿느냐에 관한 문제다. 소수의 엘리트가 세상을 이끈다는 발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도 민주주의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과감하게 권력을 민중들에게 이양하고, 아래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시민조직이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도록 양성하는 것, 이것이 더뎌보일지는 몰라도 지속가능한 진보사회의 참모습이다.

 

자주관리제도 실시 당시 다민족 국가였던 부르키나파소의 부족 갈등이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 갈등이 현저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상카라가 주도했던 토지재분배 정책에 힘입어 부르키나파소는 상카라 집권 4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자급자족 국가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상카라의 개혁을 눈엣가시로 생각했던 미국과 프랑스는 끝내 상카라를 가만 두지 않았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로 연쇄 이탈할 것을 우려했던 미국은 CIA를 동원해 상카라가 평생의 친구로 여긴 두 살 아래의 동지를 자기편으로 포섭했다.

 

그가 바로 상카라를 살해한 뒤 2014년까지 무려 4선을 연임한 독재자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e·1951~)였다. 미국과 프랑스의 사주를 받은 콩파오레는 집권 이후 상카라의 개혁정책을 모두 원점으로 돌려놨다. 부르키나파소 민중들은 2014년 반정부 시위를 통해 마침내 콩파오레를 몰아냈지만, 상카라를 잃은 부르키나파소는 정직한 사람들의 땅에서 아프리카의 최빈국으로 다시 전락하고 말았다.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 1949~1987) = 부르키나파소 북부의 마을 야코에서 태어났다. 19세에 공군에 입대한 뒤에 사회주의자가 됐다. 1983년 집권에 성공했다.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상카라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는 별칭을 얻었다. 상카라는 1987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저자 장 지글러(Jean Ziegler)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체 게바라는 몇 살까지 살았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미국이 적대시하는 혁명 지도자로서 상카라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듯 했다. 그 해 10월 상카라는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콩파오레에 의해 살해당했다.

 


 

내일이 찿아와도 - 서울 훼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