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설을 보내며
2017년 설날은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설 전날까지 갑자기 들어 온 신규사업신청서 작성하는라 날밤을 보내야 했다. 거기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보고서 책자 만들기를 근 한달을 붙들고 있었다. 예전같았으면 이맘때면 부족하나마 명절 후원금을 조직하고, 새로운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일정이었을 텐데, 전혀 그런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어찌보면 올해 처음으로 사무처에 있는 돈 탈 탈 들어 떡값을 나누고 선물을 나누어 가진 첫해로 기록된다. 그래서 다소불안한 설차림이었다. 얼마간의 비지금도 탈탈 털었다.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였다.
아내는 설전날까지 일해야 했고, 누적된 피로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는지 나 또한 늦도록 잠을 자고 본거로 향했다.
본가까지는 두 정거장, 예전에는 집뒤 통일동산 지름길을 통해 갔지만 이제는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어 갈 수가 없다.
적어도 수십년간 문현동은 큰 변화가 없었다. 특히 3동지역은 지역의 전형적 주거지역이었다. 이런 골목의 모습은 2000년들을 넘어서면서 빌라골목으로 바끼면서 2010년 이후론 원룸이 장악하다 주변에 대규모 개발이 일어나고 있다.
골안에 보이는 재개발 현장만 모두 다섯 곳이다.
갑갑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선 자리에서 보는 향후 5년 뒤의 동네 풍경이 확 달라질 것이다. 양옆으로 30층 내외의 아파트가 성벽처럼 들어 설 것이다. 문현 1동과 전포동 경계지역에도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게 된다. 정 붙일 곳이 자꾸만 사라지고 있다.
본가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한 문패 하나 6.25 참전 유공자 라고 새겨진 문패 앞에서 왠지 모를 반발감이 생겼다. 물론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었다거나 평가 절하 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한국전쟁 시기에 징집되어 군에 들어 간 사람은 모두가 참전 유공자 라 부여 한다면 그래서 문패마다 저마다의 그시절 위치 지어진 예컨데 참전 실종 자의 집 13만 100명, 부상자 70만 9000명에 나아가 민간인 피학살자의 집 12만 8936명, 사망자 24만 4663명, 행불자 33만312명 등에게도 부여해야 안될까 잠시 들었던 생각이다. 아마도 나라도 저 시기에 군 징집 연령이었다면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지만 전쟁에 참전했을 것이고 당연 참전 유공자가 되는 것인데, 그 나머지는 뭐란 말인가이다. 한국전쟁 당시 조부는 일명 지게부대원이었다고 한 적이 있다. 엄청 고생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상정했고, 다음날 12월 16일 국회는 큰 논란없이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예산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통과시켰을 정도로 준비가 매우 허술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당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고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사실 김윤근은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은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신성모의 사위였다.
12월 21일에 첫 부대 1만여 명이 창덕궁에 소집된 것을 시작으로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무려 50만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모으긴 했으나, 중공군의 대공세로 또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된 정부는 방위군 장병들을 대구·부산 등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게한다 문제는 서울에 집결한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하느냐였는데, 이들 50만 명은 걸어서 추운 혹한 상황속에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으며 보급과 겨울피복 및 군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의 공식기록에는 천수백명 사망으로 돼 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명 내지 10만명이 죽었다고 하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50만명의 대원 중 2할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돼 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명으로 돼 있다. 노무현 정권에서 조직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사망자 5만~8만명 추산했고 이후 정리된 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키백과. 두산백과 등에서는 사망자를 9만으로 기록하고 있다.
국민방위군사건은 1·4후퇴 시기 방위군 예산을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약 25억 원의 국고금과 물자를 부정 착복함으로써 야기된 것이었다. 식량 및 피복 등 보급품을 지급하지 못하였고 방위군 수 만여 명의 아사자와 병자를 발생시켰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이기붕이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며, 사건의 직접 책임자인 김윤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 주요 간부 5명이 사형 선고되었다. 대한청년단은 1953년 9월 10일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 공식 해산되었다.
군사재판은 통상 비공개 하에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국민여론의 관심을 반영하여 국민방위군사건의 재심은 공개재판으로 진행되었다. 그만큼 여론의 관심이 지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았던 정계의 인사들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상납된 자금에 대한 수사도 착수되지 못하였다. 단 한달여의 행군 끝에 9만 명이 목숨을 잃고도 아무도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던 희대의 사건 국민 방위군 참사는 한국전쟁 기간 중 보도연맹 사건과 더불어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록되고있다.
하나의 사례일 뿐이지만 참전 국가유공자 에 대해 여타의 국가 기여를 고려한다면 또 국가권력으로부터 무고한 죽임을 당한 숫한 죽음을 대비시킨다면 형평성의 차원에서 진실과 화해의 차원에서 심각하게 다루어 볼 문제라 본다.
퇴근 후 아내는 쉴틈 없이 본가로 와서 설 음식 준비에 바빴던 어머니를 도와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고맙게도 창원에서 삼촌내외가 명절음식 준비를 거들었다. 지난 가을 추석 때 이후 두 번째다. 큰 조카의 사정을 알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일을 거들어 주신 것이다. 당신들의 아들 며느리와 손자가 명절이라 찾아왔음에도 였다. 그럼에도 나는 현실적으로 그 고마움을 표현할 선물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설이 오는 밤늦도록 족보를 보았다. 고향땅 의령에 입향조로 삶의 터를 마련했던 32대조 이후 고조,증조, 조부 형제들의 생몰을 기록하며 ... 그 후손들 고향을 떠나 정착하고 있는 현재까지를 대비시켜 보며
새벽에 눈을 떴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 조왕신(竈王神)과 성주(成主神)에게 가족의 안녕을 고 했다.
그리고 조상들에게도 후손들의 발복을 염원했다. 이 정성을 나는 갚을 길이 없다.
마을 산책에 나섰다. 대관절 어떻게 될 요량인지를 짚어보기 위해
어머니 타향살이 50년에 마련한 집이건만 일대가 개발된다. 개발은 유감스럽게도 본가부터 시작된다.
미루어보건데 작금의 문현동 일원에 도모되고 있고 벌어지고 있는 재개발 재건축의 발로는 문현 금융단지가 들어서면서다. 물론 그 전에 계획한 재개발도 있겠지만 저런 거점이 마련되면서 주변이 변화를 강요당하게 된 것이다. 지겹고 두려운 일이다.
주민들이 개발 반대 현수막을 내걸고 저항을 예고 하고 있다.
일대의 부지는 동아대학교 땅이다. 땅 주인인 동아대학교가 직접 나서지 못하고 사전 정지 작업을 하는 뉴 글로벌 이라는 대행개발사가 주민들을 공략하고 있다. 집집마다 차별적인 보상책을 제시하면서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 것 같다. 저들의 작당을 어찌해야 될까
마음이 착찹했다. 어쩌면 이곳 본가에서 맞이하는 설맞이가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주민들이 순순히 물러 날리는 없다. 터무니 없는 보상금으로 주민들은 갈 곳이 없다며 실보상을 원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지
내몰라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복잡해진다. 대비책을 세워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관망할 따름이다.
왠지 올 한해가 무척이나 더디 갈 것 같다는 예감이다.
개발이 전면화 된다면 서로가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다. 불하를 통해 숲과 마을 전체를 살리는 개발방식을 바래보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럼에도 일가친척들이 설 차례를 지내기 위해 모이고 상견례로 설인사를 나누고 조상을 모셨다. 올해는 대선주자에 대한 평이 안주로 다루어 졌다. 집안의 60대 이상이 가지는 현 정세며 촛불정국에 대한 시각을 재확인 했다. 딱한 노릇이었다. 다같은 60대라도 삼촌의 시각은 달랐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니 또 살면서 보니 이거는 아아니다라는 게 삼촌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60대 이상은 뭐란 말인가 . 논쟁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다들 일찍 일어났다. 덕분에 처가집도 일찍 갈 수 있었다.
처가집으로 향하는 길에 본 김해 신어산
처가집 동네도 전에 하고는 다른 모습이었다.
철둑길이 허물어지고 도로가 개설됐다. 금곡리 일원 군도9호선 확장공사가 완료된 것이다. 폭 10m 길이 440m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 구태여 손되지 않아도 될 것들이 흔적을 지우면서 곳곳에 들어서고 있었다. 2023년 완공 예정인 한림-생림간 도로공사를 위해 장방들과 화포천을 가로 질러 1.5km의 터널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2023년이면 내 나이 60대 초가 된다. 그때까지 장인장모 살아계실까. 그리고 아이들은, 막내 처남내 어린 조카들이 대학생이 되거나 고등학생이 될 무렵이다.
처가 집 뒤 노씨 재실 앞에 서있는 당산목처럼 유규한 것은 왜 지켜지지 못할까
터무니없는 개발만능주의 시대가 지속되는 것은 탐욕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탐욕에 빌붙거나 편승하여 조금이라도 이익을 탐하고자 하는 욕심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아 저문 저 화포천은 이 시절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기러기떼 오래동안 화포천 반달농장 주변을 선회하다 내려 앉는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강에 내려 앉고서도 긴 목을 세워 한동안 경계 태세다.
날 저물어 곳곳에 저녁 연기 피어오른다. 시인고은은 골안에 자욱한 저 저녁연기를 보고 엎드려 절하고 싶다고 했건만
뛰엄뛰엄 불빛 지평선처럼 펼쳐진 저 들녁에 내일의 정체가 없다. 다만 설명절이라 찾아든 자식들을 위한 밥상만 오늘 가득할 뿐이다.
자식들이 뿔뿔히 제 갈길로 가고나면 내일의 저 가로등 불빛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왠지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가야할 곳을 제대로 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년에 겨우 서너차례 기는 차가집이지만 올해는 아내의 출근 일정 때문에 일박하지 않고 귀가했다.
차가 밀릴 것이라는 뉴스 와는 달리 큰 지체 없이 귀가했다. 한 시간 남짓이면 되는 거리를 또 10분이면 도착할 본가로의 발걸음이 왜 그리 옮겨지지 않는 것일까
설 연휴 마지막날 어영부영 텔레비젼 앞에서 시간을 보낼 것 같아 사무실로 향했다.
곳곳에 분양 현수막이 붙어 있고 전신주마다 분양 안내 리프렛이 매달려 있다. 팔리지 않을 아파트를 지어서 이 지랄 인지 확 찢어버리고 싶었다. 갈기갈기 아 전런 것들 망해버렸으면, 거기에 빌붙어 시세차익이나 노리고 불로소득으로 잘난체하는 것들 몽땅 망해버렸으면
꽃은 피우지 못할 망정 벌과 나비를 쫒아내어서야 되는가 이 빌어 먹을 세상아 세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