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과 자전거

이성근 2022. 8. 24. 01:58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우자와 히로후미 지음 임경택 옮김 사월의책 펴냄 2016.06

 

저자 우자와 히로후미 (?弘文)는 일본을 대표하는 진보적 경제학자. 1928년에 태어나 도쿄대학 수학과를 졸업한 뒤 도호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세계적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스탠퍼드, 캘리포니아 대학(버클리) 등에서 가르치다가, 196436세의 나이로 근대경제학의 중심인 시카고 대학 경제학부 교수가 되었다. 당시 뛰어난 연구 성과로 자주 노벨경제학상 물망에 오르내렸으나, 1968년 돌연 귀국하여 도쿄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부임했다. 1989년 정년퇴임한 후 명예교수로 있다가 1994~99년에는 주오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2000년대에는 우자와 국제학관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20148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우자와 히로후미는 신고전파적인 근대경제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소스타인 베블런에서 시작된 제도주의 경제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방향을 전환하였으며, 넓게는 포스트-케인스주의의 일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앤 로빈슨, 스라파 등의 사상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조지프 스티글리츠, 조지 애컬로프와 같은 비판적 경제학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을 비롯하여 근대경제학의 재검토』 『경제학의 사고방식』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 『공공경제학을 찾아서』 『풍요로운 사회의 빈곤』 『우자와 히로후미 저작집(12) 등 다수를 남겼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 오쓰카 노부카즈

머리말

 

프롤로그

1 왜 자동차가 문제인가

2 시민적 권리의 침해

 

자동차의 보급

1 현대문명의 상징 자동차

2 자동차와 자본주의

3 자동차로 건설한 나라

4 공공 교통의 쇠퇴와 공해

5 희미한 희망

 

이상한 나라의 자동차

1 일본의 자동차 보급과 도로

2 도시와 농촌을 바꾸다

3 인간 위에 군림하는 도로

4 이상한 나라의 자동차 통행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

1 사회적 비용이란 무엇인가

2 세 가지 계산법

3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

4 사회적 공통자본이란 무엇인가

5 사회적 합의와 경제적 안정성

6 시민적 자유와 효율성

7 도로가 사회적 공통자본으로 남으려면

8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

 

맺음말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출판사 서평

자동차가 많아질수록 사회는 점점 불평등해진다.

자동차를 위한 경제학에서 인간을 위한 경제학으로!

 

1970년대 일본 사회를 흔든 대중 경제학서

동아시아 인문서 100선정 도서

1가구 1자동차 시대라고 한다. 집집마다 승용차 한 대쯤 있는 것은 흔한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자동차 보유가 아무리 개인의 자유라고 해도 자동차에서 얻는 편의만큼 개인들이 그 비용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을까? 각자가 부담하는 기름값, 통행료, 자동차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막대한 도로건설비, 공해, 교통사고로 인한 인명 손실, 그리고 자연 파괴까지 자동차들을 도로에서 달리게 하기 위하여 사회가 떠안아야 할 비용은 헤아릴 수 없다. 자동차 소유자는 과연 그 비용을 공정하게 치르고 있을까?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은 자동차 보급이 급속히 증가하던 1970년대 일본에서 출간되어 큰 충격을 안겨준 책이다. 저자 우자와 히로후미(宇澤弘文)는 노벨경제학상 유력 후보로 자주 물망에 오르던 경제학자로, 이 책에서 사회적 비용의 문제를 대중적 필치로 해설함으로써 일본 사회에 일대 각성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책은 자동차에 감춰진 사회적 비용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가 도로, 주거환경 등의 사회적 공통자본을 독점하는 데 따른 폐해가 어떻게 약자들에게 집중되는가를 밝힘으로써 완전경쟁을 신봉하는 시장자유주의에 일침을 가한 책이기도 하다. ‘자동차가 상징하는 시장경제의 불평등 구조는 오늘에 와서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뒤늦은 번역이지만 이 책이 이제라도 우리 사회에서 읽혀야 하는 이유이다.

 

자동차의 문제를 경제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다

이 책은 원서 상태로도 이미 국내의 진보적 경제학자, 환경운동가 등에게 꽤 알려져 있는 책이다. 길지 않은 분량에 쉬운 필치로 쓰여 있음에도 읽는 이들을 각성시키고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모델에 따라 한국에서도 혼잡비용, 대기오염, 교통사고 손실액 등을 따져 30~57조의 사회적 비용을 추산하기도 했다.(한겨레신문 2015.9.14. 경제면) 저자는 책 출간 후 30년이 지난 2005자동차가 유발하는 사회적 비용문제는 현재에 더욱 긴급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책의 번역은 다소 늦었지만 꼭 필요한 책이라 할 만하다.

 

저자 우자와 히로후미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아성인 시카고대학 경제학부 교수와 도쿄대 교수로 있으면서 세계에 이름을 알린 일본 경제학계의 거장이다(2014년 타계). 그는 1960년대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시작하여 70년대에는 제도주의 경제학으로 연구 방향을 일대 전환하였는데,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은 그 계기가 된 책이기도 하다. ‘제도주의란 시장경제의 작동을 추상화된 수학적 모델에서 연역하여 해설하는 주류경제학과 달리 각 사회의 문화, 제도 등 경제외적 조건이 만든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으로서, 소스타인 베블런, 칼 폴라니 등을 대표적 인물로 들 수 있다. 이 책은 주류경제학의 비용편익분석(cost benefit analysis)의 사고에서는 간과되기 일쑤인 사회적 비용의 문제를 경제의 핵심 요소로 다루었다는 점에서(40~41) 제도주의 경제학의 대표적 저서라 할 수 있다.

 

사회적 비용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회적 비용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그것은 어떤 개인이나 기업의 경제활동이 다른 경제 구성원들에게 뜻하지 않은 손실을 입히고도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27)을 말한다. 저자가 특히 자동차를 문제로 삼은 까닭은, 자동차가 유발하는 사회적 비용이야말로 막대한 규모임에도 시장경제 바깥의 일로 치부되어 아무도 책임을 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계산에 따르면, 그 비용은 1970년대 도쿄를 기준으로 자동차 1대당 1,200만 엔(연간 200만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라고 한다.(182) 왜 이토록 엄청난 비용이 지금껏 무시되어 왔을까?

 

거기에는 경제성장을 위해 자동차 산업을 지렛대로 삼고자 한 정부의 입장, 투자 대비 효율만으로 경제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오랜 사고방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 소비세를 자꾸만 낮추고 도로 건설에 국가 재정을 쏟아부어 자동차 소유를 부추기는 데는 이런 사고가 숨어 있다. 그러나 자동차 소유자가 누리는 편익과는 별개로 그 비용이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집중되고 있다면? 그리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면?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시장경제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불평등 구조를 자동차라는 일상적 사례로부터 캐내고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경제적 불평등을 낳는다

이 책은 2장과 3장에 걸쳐 자동차가 어떻게 현대 산업의 중추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사회의 형태까지 바꿔놓았는가를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역사를 통해 살펴본다. 자동차는 20세기 초 미국의 포드주의가 대두하면서 무수한 연관 산업을 가능케 하는 국가 경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국가 정책은 자동차 생산과 소비를 촉진하는 데 집중되었고, 시민의 삶과 사회 형태마저 자동차에 적합하도록 바꾸어버렸다. 자가용 통근에 따른 도시의 확장, 공공교통(철도/버스)의 쇠퇴, 부유지역과 빈곤지역의 분리, 도시 내부의 슬럼화는 자동차 보급의 또 다른 그늘이다. 미국의 이런 사례는 인구조밀국인 일본, 한국에 와서는 주거지에 마구잡이로 침투한 도로, 극심한 혼잡 현상, 교통사고 빈발 등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런 자동차의 폐해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된다는 사실에 있다. 왜 그럴까? 개인의 경제 능력에 따라 이 피해를 회피하는 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운전할 수 없는 노약자, 어린이는 물론이고 주거지를 옮길 능력이 없는 경제 약자들은 피해를 고스란히 겪어야 한다. 그래서 맑은 공기, 편리한 공공교통, 쾌적한 주거환경 등 모두가 누리던 사회적 공통자본은 점점 고갈되는 반면, 경제적 약자는 의료비, 교통비 등 더 많은 비용을 안게 되어 점점 더 빈곤해진다.(136~138)

 

저자는 자동차가 빚어낸 이런 결과들을 단순한 관찰이나 편향된 경험만으로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 가다듬은 경제학적 통찰이 숨어있다. 그것은 신고전파의 주류경제학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근대경제학의 한계를 넘어서

저자는 이 책에서 이른바 근대경제학이라고 일컫는 신고전파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신고전파 이론이 일반균형이론이라는 모델을 근간으로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반균형이론은 생산수단을 사유한 개인들이 시장가격으로 평가되는 보상을 얻기 위해 합리적 선택을 하므로, 완전경쟁 상황이 이루어지면 수요와 공급은 균형가격에서 최적의 일치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124~129)

 

그러나 우자와 교수는 이 이론이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나 생산수단의 탄력성(가소성) 등 여러 허구적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개인은 문화와 제도적 영향에 따라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생산수단은 아무런 비용 없이 언제든 전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반균형 상태에서 분배 또한 최적에 도달하리라는 기대 역시 근거가 없고, 오히려 생산수단(능력)의 편향에 따른 불평등의 심화를 결과로 얻게 된다는 것이다.(131~136)

 

사회적 공통자본의 사상

저자는 이와 함께 신고전파 이론이 등한시하는 사회적 공통자본의 역할에 강조점을 둔다. 저자는 훗날 사회적 공통자본(2000)이라는 명저를 출간한 바 있거니와, 이 생각의 뼈대는 이 책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사회적 공통자본이란 대기, 하천, 땅과 같은 자연환경, 도로, 전력망과 같은 사회 인프라, 의료, 교육, 금융과 같은 제도자본을 말하는데, 이 사회적 자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모든 이의 생활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희소성으로 인한 혼잡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절대로 시장경쟁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43~149)

 

우자와 교수는 평등주의적 시장경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통자본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서 공공 투자에 의한 최저소득보장이라는 케인스주의적 소득재분배론의 한계도 아울러 지적한다. 마이너스 소득세 같은 세제 정책으로 가난한 사람의 최저소득을 아무리 보장한다 해도, 그들은 소득의 대부분을 사회적 공통자본과 같은 필수적인 희소자원에 쓸 것이기 때문에 선택적 소비를 할 수 있는 부유층에 비해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53~156) 따라서 이런 사후적 처방보다는 사회적 공통자본의 혜택을 사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분배에 훨씬 효과적이다. 저자의 이런 생각은 생존권의 기준을 넘어 시민 모두가 문화적 생활수준을 누려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활권의 사상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166~170)

 

동아시아 인문서 100에 선정된 현대의 고전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2010동아시아 인문서 100에 선정된 책이기도 하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홍콩의 명망 있는 출판인들이 모인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여러 출판인, 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1950년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출간된 인문학 명저들을 선정, 발표하였는데, 이 책이 일본의 대표적 명저 26권의 하나로 뽑힌 것이다.

 

이 책은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이라는 표면적 주제를 넘어서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경제성장과 생태주의가 왜 양립할 수 없는지를 경제학적으로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성장과 효율을 앞세워 의료, 교통(철도와 공항), 교육 등을 자꾸만 민영화하려고 애쓰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동차가 길과 환경을 점유함으로써 커다란 사회적 비용을 만들어내고 있듯이, 사회적 공유재가 시장에 맡겨질 때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것은 이 책으로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다.

 

책 속으로

일본에서의 자동차 통행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의 시민적 권리를 침해하는 형태의 자동차 통행이 사회적으로 허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경제 활동은 어떤 의미에서든 다소간 다른 사람들의 시민적 권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점에서는 산업공해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활동에 수반하여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충분히 내부화하지 않고 제삼자 특히 저소득층에게 대폭 부담을 지우는 형태로 처리해 온 것이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동차는 그야말로 가장 상징적인 예일 것이다. (27)

 

호프만 방식으로 교통사고에 따른 사상(死傷)의 경제적 손실액을 산출한다는 것은, 인간을 노동을 제공하고 보수를 얻는 생산요소로 간주하고 교통사고에 의해 그 자본 가치가 얼마나 감소했는가를 계산하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방식에는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다. 호프만 방식에 따르면, 현재 소득을 올릴 능력이 없고 장래에도 전혀 갖지 못하리라 예상되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면 그 피해액이 제로로 평가된다. 또한 고소득자일수록 사망에 대한 평가액이 높아지고 저소득자일수록 낮아질 수밖에 없다. () 이런 계산법으로 교통사고 피해에 대해 쉽사리 답을 낼 수 있는 것은 인간을 하나의 생산요소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즉 이 계산법의 배후에는 () 인간이 지닌 실로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측면을 무시하고 순수하게 경제적인 측면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오로지 희소자원의 효율적 배분만을 추구해 온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적인 사고가 있는 것이다. (107)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득보장 정책 이외의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가령 수요의 가격 탄력성 및 공급능력의 투자 탄력성이 모두 낮은 재화, 서비스에 대해 공공요금을 통한 규제를 시행한다고 하자. 여기서 공공요금에 의한 규제란 이런 재화, 서비스에 대해 생산은 사적인 경제주체가 맡지만, 가격은 정부가 공공요금으로 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자에게는 이 공공요금제 하에서 발생하는 수요에 걸맞은 만큼의 생산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 이렇게 하여 수요와 공급의 탄력성이 모두 낮은 재화, 서비스들에 대해 공공요금을 통한 규제를 늘리면, 소득보장 정책으로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는 일은 한층 효과를 볼 수 있다. 게다가 불안정한 가격 상승과 그에 따른 최저 소득수준의 상승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167)

 

 

자가용을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다

택배 트럭과 배달 오토바이가 엉켜서 서로 삿대질을 하고 있던 서울 어느 골목길에서 결심했다. 차를 없애야겠다고. 뒤차는 앞의 트럭과 오토바이를 밀어버리라는 듯 내 차를 향해 1분쯤(정말이다) 경적을 눌러대고 있었다. 멱살잡이라도 할까 싶은 감정을 억누르고 보니 이 모든 게 차 때문이었다. 차가 주는 편의에 취해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애써 외면해온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늦은 나이에 면허를 따서 몇 해 동안 굴렸던 자가용을 그렇게 처분했다. 그즈음 이 책을 만났다.

 

자동차 한 대를 도로에서 달리게 하기 위해 사회는 얼마나 많은 비용을 부담하고 있을까? 막대한 도로 건설비, 공해 비용, 교통사고, 자연 파괴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동차로 인한 피해는 이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집중된다. 이 책은 시장경제가 어떻게 공동체를 파괴하고 시민의 권리를 앗아가는지 사회적 비용이라는 개념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놀라운 건 이 책이 1974년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이 폭발적인 성장가도를 달리며 장밋빛 미래에 들떠 있을 때 저자는 현대사회의 경제구조가 얼마나 취약한지 통찰했다. 성장이 우선해야 소득재분배가 가능하다는 낙수효과도 반박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반백 년 전에 출간되었다.

 

차를 처분한 지 몇 년. 그다지 불편함이 없다. 여행할 때는 공유차량을 이용하고, 장을 볼 때는 핸드카트를 들고 나간다. ‘지옥철’ ‘콩나물 버스도 하루 중 잠깐이다. 적어도 비장애인에게 서울(그리고 일부 수도권)은 세계 어느 도시와 견줘도 꿀리지 않는 대중교통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물론 최근 인터뷰한 정내권 전 기후변화대사의 지적처럼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도 지하철 승강기 설치 등 대중교통 편의성을 지금보다 더욱 극대화해야 한다. 이번 폭우에 침수된 차량이 수천 대라는 소식을 들으며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을 다시 생각해본다.

시사인 이오성 기자 22.8.23

 

 

에너지와 공정성에 대하여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 | 신수열 옮김 | 사월의책 | 201807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교황청 국제부 직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빈민가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인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일했다. 1956년에 푸에르토리코 가톨릭 대학 부총장이 되었고, 1961~1976년에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일종의 대안 대학인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설립하여 연구와 사상적 교류를 이어갔다.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스스로 사제직을 버렸다. 80년대 이후에는 독일 카셀 대학과 괴팅겐 대학 등에서 서양 중세사를 가르치며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다. 깨달음의 혁명』 『학교 없는 사회』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 『에너지와 공정성』 『의료의 한계』 『그림자 노동』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등 성장주의에 빠진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 사회에 급진적 비판을 가하는 책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사회, 경제, 역사, 철학, 언어, 여성 문제에도 깊은 통찰들을 남겼다. 2002122일 독일 브레멘에서 타계했다.

 

 

목차

머리말

 

1장 에너지 위기

2장 교통의 산업화

3장 속도에 마비된 상상력

4장 시간 횡령

5장 가속의 비효율성

6장 수송산업의 근본적 독점

7장 가늠하기 어려운 속도의 한계

8장 자력이동의 효율성

9장 주요수단으로서의 동력과 보조수단으로서의 동력

10장 저설비, 과잉개발, 그리고 성숙된 기술

 

참고문헌

해설 / 박홍규(영남대 명예교수)

 

출판사 서평

행복한 사회는 오직 자전거의 속도로만 가능하다

- 인간을 노예화하는 에너지 소비와 속도에 대한 고발

 

에너지 과잉소비에 기초한 현대의 수송이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고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해치는지 고발한 책. 에너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를 노예처럼 쓸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 요소다. 그러나 에너지는 또한 인간을 도구들에 예속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동차 없이는 아예 이동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동력화된 수송의 노예가 되었으며,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 생활은 단 하루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자동차가 있어도 모든 사람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릴 수는 없다. 지구에 사는 우리들은 이미 꽉 막힌 자동차들 때문에 안달하고 지겨워 죽을 지경이다. 값비싼 자동차들은 엄청난 화석연료를 써대면서도 결국은 자전거보다 못한 속도를 낸다. 도로 건설과 관리에 드는 비용, 자동차를 구입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을 계산하면 자동차는 결코 자전거보다 빠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 책은 에너지 위기생태 위기와 같은 표면적 이유를 넘어 자전거로 상징되는 적정에너지, 적정기술이 어떻게 한 사회의 행복에 이바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자전거는 공정하다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훨씬 빠르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한 프로선수들 이야기가 아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하는 김광석 노랫말도 아니다. 우리가 매일처럼 타는 자동차는 실제로 자전거보다 매우 느린 교통수단이다. 물론 속도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체와 포화로 인해 차의 이동속도가 턱없이 느려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차를 구입 유지하는 비용과 연료비, 세금, 보험료, 통행료 등을 버는 데 바치는 시간까지 합치면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훨씬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우리는 차에 앉아 시속 80킬로미터의 속도를 만끽하며 달리지만, 사실은 시속 20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자전거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다. 휘발유를 쓰는 자동차건 요즘 각광받는 전기차건 상관없다. 교통 분야에 들어가는 에너지 사용량은 총에너지 사용량의 45퍼센트에 달한다고 한다.(미국 1970년 기준) 한 사회의 가용 에너지가 속도라는 이름 아래 교통에 독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전거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리기 위해 한정된 화석연료를 펑펑 쓰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자동차가 제시하는 속도의 꿈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동차는 한 사회가 가진 가용에너지의 대부분을 독점할 뿐 아니라, 도로 건설비, 주차장 등의 공공시설 비용, 공해 비용 등을 유발함으로써 막대한 세금을 탕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동차의 속도를 확보하는 데 투입되는 세금은 자동차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부담한다.

 

누구나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세금은 당연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동차를 중심에 둔 교통시스템은 애초부터 차별에 근거한 것이다. 꽉 막힌 출퇴근 시간에 버스와 콩나물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한가한 시간대에 빠르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계층에 비해 운송시스템 자체에 의해 차별을 당한다. 시간은 돈으로 환산되고, 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 경쟁에서 앞선다. 물론 이 모든 불공정은 자동차를 가진 사람과 나아가 그 자동차를 생산하는 산업을 우선적으로 배려해 온 국가와 정부 탓이 크다.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제도적 불공정을 조장해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집밖을 나서는 즉시 자동차를 타지 않고는 한 걸음도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 겨우 몇 킬로미터를 가는 데도 차를 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인간의 타고난 자력이동 능력을 퇴화하고, 인간의 노예인 줄 알았던 에너지와 자동차에 의해 거꾸로 노예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책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원제목은 에너지와 공평성”(Energy and Equity)이다. 공평성은 평등(equality)과 다르다. 평등이 권리와 혜택의 고른 배분이라는 산술적 의미에 치우쳐 있다면, 공평성은 정의(justice)와 관계된 것이고 주어진 사회적 차별을 보정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속도, 에너지, 자동차 등의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묻는다. 적정 에너지와 적정 기술을 넘는 순간, 사회는 공동체적 가치를 잃으며, 인간을 산업(수송산업)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전거는 인류가 도달한 최적의 기술, 최적의 에너지 효율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속도에 마비된 상상력

에너지 소비와 수송산업의 발달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수송수단을 생산하고, 움직이게 하고, 주행과 주차 등의 편의를 도모하는 데 사회가 쓰는 총에너지의 45퍼센트가 들어간다. 사회적 가용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사람들을 빠르게 이동시킨다는 명목 아래 쓰이고 있는 것이다. 1974년 기준으로 미국인 29천만 명이 교통 분야에서 쓰는 에너지량이 13억의 중국인과 인도인이 모든 분야에서 쓰는 에너지를 훌쩍 뛰어넘는 현실이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이 속도를 높이는 마술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속도가 아무리 증가하고 에너지를 많이 써도 우리는 도리어 시간이 부족하다며 안달한다. 우리는 하루 평균 32킬로미터를 이동하지만 사실상 반경 8킬로미터 내의 범위에서 맴맴 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발로 걸을 때보다 훨씬 좁은 반경 안에서 움직이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먼 곳까지 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발이 수송수단에 의지하면서 대지와의 관계를 잃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발을 통해 시공간 속에 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발로 걷는 속도와 거리에 맞춰 그의 생활세계와 인간관계와 마을이 생기고 그에게 의미를 가진 세상이 구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마치 자신의 활동범위가 넓어진 듯 착각하지만, 사실은 신기루에 불과한 세상만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발자취를 남기고, 의미와 기억을 심고,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토를 잃어버린 것이다.

 

횡령당한 생활시간

사회가 속도를 우상화할수록 공평성은 저하한다. 왜냐하면 무제한의 속도를 누리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며,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는 소수 인간의 시간을 고액의 가치로 자본화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시간을 희생시킨 결과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쳇바퀴 돌 듯 출퇴근과 대중교통에 구속되어 있는 사이, 소수는 가장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빠르게 이동하거나 비행기를 타기 때문이다. 1974년 미국 기준으로 해마다 전체 비행거리의 5분의 41.5퍼센트의 인구가 독점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돈이 있는 사람은 속도를 마음 놓고 구입할 수 있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은 더 많은 자본을 확보하는 데 쓸 수 있다. 속도에 의해 생활시간을 횡령당하고 있는 현실을 좀 더 들여다보자.

 

표준적인 미국 남성은 1년에 1,600시간 이상을 차에 쓴다. 주행중이거나 정차해 있을 때만이 아니다. 그는 차를 사기 위해 계약금, 월부금을 벌어야 하고, 연료비, 보험료, 세금, 교통위반 시의 벌금을 내기 위해 노동시간의 상당 부분을 바쳐야 한다. 이 시간을 모두 합치면 하루에 깨어 있는 16시간 중 4시간에 달한다. 결국 표준적인 미국인은 1년에 12,0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데 1,600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이것은 시속으로 치면 7.5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시속 7.5킬로미터면 수송산업이 발달하지 않는 나라의 사람들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속도이다. 자동차 등록대수 2천만 대가 넘는 한국도 미국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자전거는 왜 행복한가?

이반 일리치는 이 책에서 에너지 낭비와 속도의 무익함을 대신할 수 있는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든다. 자전거와 자동차는 모두 볼베어링 장치 때문에 가능했던 발명품이다. 왕복운동과 거기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회전운동으로 바꾸어 속도를 높인 것은 인간 창의성의 빛나는 사례라 할 만하다. 하지만 볼베어링 기술에 엔진, 모터와 같은 동력원이 추가되면서 기술적 편의는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압도하여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키게 되었다.

 

자전거는 보행속도인 시속 5~6킬로미터보다 3~4배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에너지는 보행의 5분의 1밖에 쓰지 않는 최고의 이동수단이다. 또한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하게 맞춘 이상적인 변환장치이다. 화석연료를 쓰는 모든 기계보다 열역학적 효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 모두의 능력보다 이동능력이 뛰어나다. 또한 자전거 주행에 필요한 공공시설의 건설비는 자동차보다 턱없이 적을 뿐 아니라, 자전거와 자동차 사이의 전체 가격차이보다도 적을 정도다.

 

또한 자전거는 공간의 활용도도 높다. 자동차 한 대가 주차하는 공간에 자전거는 18대를 세울 수 있고, 주행시 필요한 공간도 3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4만 명의 사람을 1시간 안에 다리를 건너게 하는 데 자동차는 12, 버스는 4개가 필요하지만 자전거는 단 하나면 된다. 에너지 과잉 사용에 기초한 자동차의 저효율성과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효과에 비해, 자전거는 적정 기술과 적정 에너지의 모범적 사례라 할 만하다.

 

만들어진 필요독점에 기초한 사회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가 줄곧 주장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최적을 이루는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있다는 것이다. 최적 에너지가 있다면 최적 속도도 있을 텐데, 저자는 시속 25킬로미터가 넘는 순간 사회적 불공정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일리치가 이렇게 최적 에너지와 적정 기술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와 소비에 기초한 산업사회의 논리 때문이다. 일리치는 말한다. “산업 생산물의 1인당 산출량이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그 생산물은 필요의 충족에 대하여 근본적인 독점을 행사한다.”

 

근본적 독점’(radical monopoly)이란 원래부터 인간에서 없었던 필요를 만들어내고는, 산업적 생산물이 아니면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도록 만든 것을 말한다. 예컨대 인간의 타고난 이동능력을 수송산업이 장악하면, 그 생산물인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이동이 아예 불가능해지는 것과 같다. 근대경제학은 이러한 필요를 설득하기 위해 희소성’(scarcity)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이반 일리치의 주장이다. 인간이란 자립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 삶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는 존재임에도,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는 상품과 이윤을 위해 결핍(scarcity)을 과장하고 필요를 조작한다는 것이다. 동력에 사로잡힌 이동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책 속으로

에너지와 공평성을 동시에 증대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1인당 소비 에너지가 일정한 한계 안에 있을 때는 동력장치들도 사회적 진보를 위한 여건들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한계 이상으로 에너지 사용량이 늘어나면 그때부터는 공평성을 대가로 지불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가 더 풍부해진다는 것은 곧 에너지를 통제할 권한을 더 이상 고르게 배분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6)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우주 속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와 함께 진화해 왔다. 동물들에게 그저 환경에 지나지 않는 곳을 인간은 으로 삼을 줄 안다. 인간의 자아상은 생활공간 및 생활시간을 덧붙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이 이동하는 보폭에 의해 통합된다. (37)

 

속도를 강요하는 사회는 수송에 이익을 주기 위해 자력이동을 가로막는다. 고속 수송수단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의 기본적 필요도 충족시켜 주지 않는 사회에서 각 개인의 생활리듬만 빨라지는 것이다. 모든 일상생활이 동력에 의존하는 순간부터 교통은 수송산업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인간의 타고난 이동능력에 대해 수송산업이 행사하는 이 통제력은 () 특성상 은밀한데다 견고하게 구축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근본적 독점’(radical monopoly)이라 부른다. (67)

 

저설비 상태에 있거나 과잉산업화된 세계와는 별도로 탈산업적 효율성을 갖춘 세계도 있다. 교통의 측면에서 말하면 그곳은 자전거에 몸을 실음으로써 일상의 활동반경을 세 배로 늘린 사람들의 세상이다. 이 세계의 특징은, 자전거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일들을 위해 보조적 동력장치를 이용하더라도 공정성이나 자유가 제약받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저설비는 인간을 원시적 자연 상태에 예속시킴으로써 자유를 제한한다. 반면 과잉산업화는 그 기술적 특징을 사회에 강요함으로써 정치적 선택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이와 달리 기술적으로 성숙한 사회는 온갖 정치적 선택들과 문화적 다양성을 허용한다.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