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오래된 미래

산지 노거수 조사 4 기장 2

이성근 2018. 12. 13. 21:07


척판암 느티나무 



불광산 척판암 부근 숲, 앞 능선 뒤쪽 솟아 있는 두 개의 봉우리중 하나는 불광산이고  뒷쪽이 대운산(762m) 이다.  풍광이 좋다.

지난 여름 이후 4번째 방문이다. 마침 마주친 스님에게 수령을 묻자 대뜸 원효대사가 심었나무라고 한다. 정말입니까 재차 물으니 스님이 답이 어린아들만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묻더니 어른도 그런다며 ,여기는 암반지역이라 나무가 잘 자랄 수 없다고 했다.

 

척판암 '던질 척()' , '널빤지 판()' 자를 써 암자 이름을 척판암(擲板菴) 원효의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求衆)'을 이야기 해야 한다. 자료를 찾다 보니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이 울산저널에 쓴 글이 있어 일부를 옮겨 본다.





...원효(元曉)는 우리말로 첫새벽이다.(...) 15세에 출가한 원효는 특정한 스승 없이 공부하였다. 원효와 의상은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다. 두 번째 유학길에서 45세 원효는 저 유명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홀연히 깨달았다. 간밤에 먹은 물과 아침의 물은 같지만, 그 물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 물을 대하는 행동이 달랐다. “온 세상은 모두 마음뿐이요, 이치는 모두 인식일 뿐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을 득도한 것이다. 그러다 66752세경 어느 날 원효는 요석궁의 과부를 만나 훗날 이두를 창안한 아들 설총을 낳고 환속한다. 그는 우리 불교사에 최초의 파계승이자 대처승이었다. 환속한 후에는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그리고 그는 수없이 많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조롱박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그의 무애행(無碍行)은 걸림 없는 자유인 그 자체였다. 누구도 삼국통일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시때때로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조롱박은 원효가 민중 속의 부처를 만나는 매개체였다. 부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 극락정토에서 왕생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에 나무관세음보살을 덧붙인 것은 의상대사이다. 원효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내세구복적인 정토종을, 의상은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현세구복적인 화엄종의 문을 열고 완성한 사람이다. 춤과 염불로 민중을 구원한 원효는 승려 사회에서 배척의 대상이었다. 아무튼 파계 이후 원효가 양산지역에 내려온 듯하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찬녕스님 988)>에 원효가 때로는 상을 던져 대중을 구하였고(혹척반이구중或擲盤以求衆)”라는 구절이 있다. 이 내용이 확대되고 구체화 되어, <천성산 운흥사 사적(千聖山雲興寺事蹟, 우운당 진희 대사, 169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운흥사는 원효가 창시했는데, 진평왕 39(원효 탄생 617년 때라 다소 문제가 있다)이다. 당전(唐傳)에 이르기를 선덕왕 때 계림부 단석산 척반대에 있었다. 선정에 들어 관상(觀想)하니 중국의 큰절 법운사(法雲寺) 일천 승려가 안거하고 있는데 요사한 한 승려의 죄로 모두 함몰할 조짐이라 원효가 이름을 적고 소반 하나를 던져 구했다. 그 천 명의 스님이 원효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찾아왔다. 양식과 거주할 곳도 막연하여 돌아다니니 산신령이 나타나 말하길, 원적산(圓寂山)이 마땅히 거주할 곳이라 했다. 원효는 천 명의 사람을 이끌고 이 산에 주석하였다. 정족봉(鼎足峰) 대둔대(大芚臺)에 올라 세 줄기의 산맥을 둘러보고 삼둔(三芚-중둔암, 대둔암, 소둔암), 삼방(三防-장방사, 중방사, 소방사), 삼적(三寂-원적암, 명적암, 묘적암 ) 등에 암자 89곳을 세웠다. 천 명의 스님이 안거했다. 산 이름을 천성산(千聖山)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단석사에는 천 명이 원효를 찾아왔으나 이미 원효가 열반하여 탑을 쌓고 원효의 명복을 빌고 갔다는 천탑암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불광산 척판암에는 운흥사와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중국 종남산 태화사 대웅전이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알고 판자에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신라 원효대사가 판자를 던져서 사람들을 구한다)’ 글자를 적어서 구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암자 이름 등은 다르지만 운흥사와 유사하다. 그런데 보운자(普運子) 희근(禧謹)이 쓴 <척반대사적기 擲盤臺事蹟記>는 그 무대가 북한의 묘향산 척반대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어떤 곳인지도 없고 단지 판자로 사람을 구한 내용만 있다. 아무튼 역사와 전설이 때론 뒤섞이기도 한다.


그냥 바라보기만 했는데 나무둘레를 재어 보고 싶었다.   암자 담장 아래로 가서 위태로이 측정했다.

느티나무 근원부 4.4  흉고 4,24  느티나무 치고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나 스님의 말마따나 생육조건의 제약이 있어 설득력을 가진다.  그렇게 본다면 하장안 밀레니엄 느티나무와 동급인 셈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원래 세 개의 가지가 펼쳐진 형태로서 수세 수관이 장관이었을 법 하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암자 안쪽으로  뻗었을 가지는 잘렸다.  

그래도 이 산중에 저런 큰 나무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해송  흉고 3.14  수관 남북 16.4   수고 17

용소삼거리에서 기장대로를 따라 가다 장안로로 접어들어 300m 지점 길가에 서 있다. 수 없이 지나 다녔지만 눈여겨보지 못했다. 장안초등학교 뒤편 팽나무의 명성에 가려진 보물같은 나무였다.







곰솔 흉고 2.1    / 2.0

2.0

좌동리 덕산마을 (佐東里 德山)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며, 명칭은 넓은 들의 언덕진 곳을 둔덕산·둔덕뫼라고 부르는데 마을의 이러한 위치 때문에 덕산[둔덕산을 줄여 부름]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또 하나는 옛날 덕대사(德大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절터는 전답으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되며 덕대사에서 덕()자를 따오고, 산이 둘러싸고 있어 산()을 써서 덕산으로 칭했다고 전한다.

마을은 좌동리 북쪽의 넓은 들 가운데 낮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주변에 고개나 골짜기가 많은데, 북서쪽의 선암리로 넘어가는 목넘 고개가 있고, 북쪽에는 못이 있어 못안골로 불렀다. 동남쪽에는 지게 고개[지게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가 있으며, 서쪽 산 너머로 덕선천이 흐른다.


마을 동남쪽 입구에 1939년 건립된 할매당산이 있고 거기 200년 추정 소나무가 있다. 매년 정월 14일 자정 경에 제를 지낸다. 마을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대의 개발이 가속화 되고 있어 걱정스럽기도 하다.







소나무 근원부 3.43  흉고 3.23    기부 1.34   남북 16.8   수고 8.0

능성부에 보이는 해송을 두고 동행자와 깁론을박을 벌였다.  당산목에 버금 간다는 것이고 나는 아니라고 했다.  마을이장이 훨씬 더 크다 하기에 결국 현장으로 가서 실측했다.



해송 흉고 2.4  내눈이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무의 기상은 반듯하여 먼곳에서도 식별이 가능했다.



기장군 일광면 횡계리  



며칠전 근처에 왔다가 크게 보인 나무가 있어 확인차 왔다. 막상  현장에 가보니 줄잘 잴 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안타깝게도 전면부의 일광산 가장자리 능선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현장을 만나게 된다는 일이 고통스럽다.

원래 이번 일정은 예고 없이 다른일로 근처를 지나다 이루어진 방문들이었지만 기대 밖의 선물같은 만남이었다.



Cheek To Cheek (Ella Fitzgera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