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어울리기/서평

불평등의 역사 외

이성근 2017. 10. 13. 23:26




불평등의 역사/ 발터 샤이델 지음·조미현 옮김 |에코 리브르 | 768| 4만원

원제 The Great Leveler

저자 발터 샤이델(WALTER SCHEIDEL)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역사학자이다. 1984~1993년 비엔나 대학교에서 고대사와 화폐학을 공부했으며, 1993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스탠퍼드 대학교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비엔나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에서 근무했다.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 인문학부 딕커슨 교수이며, 고전 및 역사학 교수이자 인간생물학부의 케네디 그로스먼 선임연구원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근대 사회·경제사, 인구통계학, 비교역사학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주요 저술 및 편집한 책으로는 나일강의 죽음: 로마령 이집트의 질병과 인구통계학(DEATH on THE NILE: DISEASE AND THE DEMOGRAPHY OF ROMAN EGYPT)》 《로마와 중국: 고대 세계 제국에 대한 비교 견해(ROME AND CHINA: COMPARATIVE PERSPECTIVES on ANCIENT WORLD EMPIRES)》 《고대 중국과 로마의 국가 권력(STATE POWER IN ANCIENT CHINA AND ROME)》 《전근대 국가의 재정 체제 및 정치경제학(FISCAL REGIMES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PREMODERN STATES)》 《인간 속박에 대하여: 노예제와 사회적 사망 이후(ON HUMAN BONDAGE: AFTER SLAVERY AND SOCIAL DEATH)등이 있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서 살고 있다.

 

목차

그림과 표 목록

감사의 글

서문: 불평등이라는 도전 과제

 

1부 불평등의 역사

01 불평등의 탄생

02 불평등의 제국

03 불평등의 기복

 

2부 전쟁

04 총력전

05 대압착

06 산업화 이전의 전쟁과 내전

 

3부 혁명

07 공산주의

08 레닌 이전

 

4부 붕괴

09 국가 실패와 체제 붕괴

 

5부 전염병

10 흑사병

11 대유행병, 기근 그리고 전쟁

 

6부 대안

12 개혁, 불황 그리고 대의권

13 경제 발전과 교육

14 만일 이랬다면? 역사로부터 반사실로

 

7부 돌아온 불평등과 평준화의 미래

15 우리의 시대

16 우리의 미래는?

 

부록: 불평등의 한계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우리 인간이 영원히 풀 수 없는 딜레마, 불평등 그 폭력의 역사

 

1.

억만장자가 몇 명 있어야 세계 인구 절반의 순자산과 맞먹을까? 2015년에는 지구상 최고 부자 62명이 인류의 절반인 하위 35억 명의 개인 순자산을 합친 것만큼 소유했다. 전년도(2014)에는 그 문턱을 통과하는 데 억만장자 85명이 필요했고, 아울러 그리 오래 전도 아닌 2010년에는 지구상 나머지 절반의 자산을 상쇄하려면 388명이 자기의 재원을 그러모아야 했다.

 

서두에 이런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평화가 오래 지속될수록 빈부의 격차는 커지며, 부와 소득이 더 집중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물론 빈부 격차는 국가 간 차이도 있을 수 있고, 한 국가 내에서도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렇더라도 평화스러운 시간이 오래 지속될수록 빈부의 격차가 커진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물질적 불평등은 우리 모두를 살아 있게 하는 데 소용되는 최소한도 이상의 자원에 대한 접근성을 필요로 한다. 잉여란 수만 년 전에도 이미 존재했으며, 그것을 불균등하게 나눌 채비가 된 인간들 역시 항상 있었다. 옛날 마지막 빙하기의 수렵·채집인은 시간과 재물을 할애해 어떤 개인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호화롭게 매장했다. 그러나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부를 창출한 것은 바로 식량 생산농경과 목축이었다. 불평등의 증가와 지속은 충적세(沖積世)를 규정하는 특징이 됐다.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으로 생산 자원을 축적하고 보존하는 일이 가능했다. 이런 자산에 대한 권리를 규정하기 위해 사회 규범이 발전했고, 여기에는 후손에게 그것을 전해주는 능력도 포함됐다. 이러한 조건 아래 소득과 부의 분배가 다양한 경험에 의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건강, 결혼 전략과 번식 성공, 선택적 소비와 투자, 대풍년, 메뚜기 떼와 우역(rinderpest, 牛疫: 소나 그 비슷한 동물에게 발생하는 전염병옮긴이) 등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질 재산을 결정했다. 운과 노력의 산물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장기적으로 불균등한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체제가 물질 자원의 배분과 노동 결실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고안한 개입을 통해 막 고개를 쳐들던 격차를 고르게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일부 전근대 사회가 실제로 시행했다고 알려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회적 진화는 일반적으로 현실에서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식량의 가축화는 또한 길들여진 인간을 만들었다. 고도로 경쟁적 조직 형태인 국가의 형성은 소득과 부에 대한 접근 기회를 편중시키는 가파른 권력 위계와 강제력을 구축했다. 정치적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을 강화하고 증폭시켰다. 대부분의 농경 시대에 국가는 다수를 희생시켜 소수의 배를 불렸다. 급료와 공공 서비스 혜택에서 오는 이익은 부패, 갈취, 약탈로 얻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전근대 사회는 성장과 더불어 최대한 불평등해졌고, 낮은 1인당 생산량과 최소 성장이라는 조건 아래서 소수 엘리트들이 잉여를 전용하는 한계를 시험했다. 그리고 좀더 온건한 체제가 더 왕성하게 경제 발전을 촉진할 때이는 부상 중이던 서구에서 가장 두드러졌다높은 상태의 불평등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도시화, 상업화, 금융 부문의 혁신, 갈수록 세계적 규모를 갖추어 가는 무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업화는 자본 소유자들에게 풍성한 수익을 안겨줬다. 노골적 권력 행사에서 비롯된 지대(rent, 地代)가 줄어들어 엘리트를 살찌우던 전통적 원천이 차단되자 좀더 안전한 재산권과 국가 공약이 세습적인 개인 자산의 보호를 강화했다. 경제 구조, 사회 규범 및 정치 제도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여전히 높거나 아니면 새로운 성장 활로를 찾았다.

 

수천 년 동안 문명은 평화적인 평등화에 적합하지 않았다. 안정은 다양한 사회와 각기 다른 발전 수준을 망라해 경제적 불평등을 편애했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처럼 파라오의 이집트에서도 그랬고,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서도 그러했다.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고 소득과 부의 분배를 압박해 빈부 격차를 좁히는 데는 격렬한 충격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평준화는 예외 없이 가장 강력한 충격으로 인해 발생했다. 네 가지 다른 종류의 격렬한 분출이 불평등의 벽을 허물어왔다. 요컨대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그리고 치명적 대유행병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것들을 평준화의 네 기사(騎士)’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성경의 4인방처럼 땅에서 평화를 거두칼과 굶주림과 흑사병과 들짐승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이것들은 때로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때로는 서로 협력하며 현대인에게 흔히 묵시록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결과물을 양산했다. 수억 명이 이것들의 뒤를 따라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사태가 잠잠해질 때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간극이 줄어들었다. 가끔은 극적일 정도였다.

 

2.

일본은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였다. 1938년 이 나라의 ‘1퍼센트는 총 신고 소득의 19.9퍼센트를 벌어들였다. 그다음 7년 안에 그들의 점유율은 3분의 2가량 떨어져 6.4퍼센트까지 곤두박질쳤다. 이런 손실의 절반 이상은 최상층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0.1퍼센트가 유발했다. 그들의 소득 점유율이 같은 시기 9.2퍼센트에서 5분의 4가량 떨어져 1.9퍼센트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런 소득 분배의 변동이 아무리 급작스럽고 심각했다 해도 엘리트의 부가 훨씬 더 극적으로 무너진 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일본에서 가장 큰 1퍼센트 재산의 실질 신고 가격은 1936~194590퍼센트, 1936~1949년 거의 97퍼센트 떨어졌다. 전체 재산 중 상위 0.1퍼센트는 훨씬 손해를 많이 봤다(각각 93퍼센트와 98퍼센트 이상). 이런 사실들은 국민소득 지니계수(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1930년대 후반 0.45~0.65 어디쯤이었다가 1950년대 중반 0.3 근처로 떨어졌음을 통해서도 상류층의 소득 및 부 점유율의 위축이 심대했을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평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소득 및 부의 불평등이 완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엄청난 살육과 파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험은 정말 전형적인 경우였을까? 다른 대답이 필요 없다. 무조건 그렇다이다. “드라마 같은 30년간의 전쟁이라고 샤를 드골이 말했듯이 1914~1945년은 모든 선진국에 의미 있고 가끔은 극적인 소득과 부의 분산을 낳았다. 즉 근대 대중 전쟁과 그 전쟁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재정적 요소 및 결과가 유례없이 강력한 평준화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랑스는 양차 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첫 번째 전쟁으로 자본금의 3분의 1이 파괴되고 국민 가계 소득의 자본 소득 비중은 3분의 1로 떨어졌으며 GDP 또한 동일한 비율로 추락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 무렵 최대 0.01퍼센트 재산의 평균 가치는 전쟁 이전 수준에 비해 4분의 3 이상 떨어졌다. 엘리트의 재산 붕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자본금의 3분의 2가 소멸했는데, 첫 번째 전쟁 때 수축률의 2배에 달했다. 프랑스 최대 재산의 4분의 1을 차지하던 국외 자산이 증발했으며, 상위 소득 점유율은 이 시기에 급격하게 떨어졌고, 이어진 전후 인플레이션은 단 몇 년 만에 공채의 가치와 전쟁 채무를 무너뜨렸다. 상위 0.01퍼센트의 재산 가치는 결과적으로 1914~194590퍼센트 훨씬 넘게 떨어졌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 국부의 14.9퍼센트를 잃고, 2차 세계대전 때 다시 18.6퍼센트를 잃었다. 소득 상위 0.1퍼센트의 문턱은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평균 소득의 40배에서 20배로, 2차 세계대전 때는 30배에서 20배로 떨어졌다. 세금 공제 후 상위 소득 점유율의 하락세는 한층 더 두드러졌다. 요컨대 1937~1949년 상위 1퍼센트는 거의 절반, 상위 0.01퍼센트는 3분의 2가 떨어졌다. 전체 사유 재산 중 가장 큰 1퍼센트의 비중은 7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줄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양차 대전과 그 사이 대공황을 거치며 소득 점유율은 세 차례에 걸쳐 하락했다. 전체적으로 1916~1945년 상위 1퍼센트는 총소득에서 그들이 차지한 비중의 40퍼센트를 잃었으며, 상위 0.01퍼센트의 소득 점유율은 같은 기간 동안 80퍼센트 하락했다. 또한 미국에서 대공황은 다른 주요 교전국에서보다 소득과 부의 격차를 평준화하는 데 전쟁 자체와 비교해 더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우리는 피케티가 “20세기에 불평등을 줄인 것은 단연코 전쟁이라는 혼돈이었고, 그에 수반된 경제적?정치적 충격이었다. 더 큰 평등을 지향하는 점진적이면서도 합의에 기반을 둔 갈등 없는 발전이란 없었다. 20세기에 과거를 지우고 사회를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게끔 한 것은 바로 전쟁이지, 조화로운 민주주의나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었다고 한 주장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교전국에서 상이한 결과를 경험한 나라는 없는가, 또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나라들이 겪은 결과는 어떠한가? 결론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국가는 그 정도가 훨씬 작지만, 마찬가지로 불평등이 완화됐음은 분명한다(211~277쪽 참조)

 

지금까지 양차 대전이 불평등을 어떻게, 어느 정도 완화시켰는지 살펴보았다. 물론 군사적 충돌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에 만연한 특징이었지만, 오직 특정 유형의 전쟁만이 그만큼 보편적인 또 다른 현상소득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을 약화시켰다. 승자든 패자든 매한가지로 근대의 대중 동원 전쟁은 평준화의 잠재적 수단이었음이 드러났다. 전쟁과 관련한 시책이 전 사회에 스며들고, 자본 자산이 가치를 상실하고, 부자들로 하여금 공정한 몫을 지불하도록 할 때마다 전쟁은 비단 인간을 죽이고 사물을 박살내기만 했던 게 아니라 빈부 격차를 좁혔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런 영향이 전쟁 중은 물론 그 이후에도 전시 정책의 지속으로 유지되면서 제대로 작동했다. 선진국 시민이 한 세대 혹은 그 이상 불평등 하락을 누린 것은 이런 전례 없는 전 지구적 충돌의 폭력성 덕분이었다. 유사한 물질적 격차의 압착은 제1차 세계대전 도중과 그 이후에도 일어났다. 그보다 과거에는 이 특별한 스타일의 전쟁 사례가 드문 데다 보통은 평준화와 연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범위가 좀더 국한된 전쟁은 역사를 통틀어 보편적 현상이었지만, 일관된 성과를 내놓지는 못했다. 약탈과 정복이라는 전통적인 전쟁은 보통 이긴 쪽 엘리트에게 혜택을 주고 불평등을 신장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나라 간 충돌이 불평등을 감소시킬 때가 있다면, 국가 내부의 충돌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우리는 최근 역사에서 내전이 확실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기존의 격차를 악화하는 쪽이었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권력을 쟁취하고 소득과 부의 분배를 고르게 하는 데 성공한 더욱 야심찬 운동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일어났다. 큰 전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행동의 강도가 결정적 변수였다. 대부분의 전쟁이 평준화 성과를 내지 못한 데 반해, 대중적 군사 운동은 기존 질서를 뒤엎을 수 있었다. 반란 중에서 모든 개별 중소 도시와 개별 마을의 자원을 비슷한 정도로 속속들이 동원한 경우만이 급진적 평준화로 귀결됐다.

 

거듭 말하지만 관건은 폭력의 양 자체였다. 양차 대전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유혈 낭자한 전쟁이었듯 세상을 가장 평등하게 만든 혁명 역시 기록으로 남겨진 국내의 격변 중에서 가장 피비린내 사는 사건이었다. 평준화의 수단으로서 대규모 폭력이야말로 핵심 골자라는 것을 반란과 혁명에 관한 비교에서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가장 유의미한 증거는 역시 공산주의 혁명이 소득과 부의 극적 분산을 초래한 20세기에 일어났다. 또 프랑스 혁명과 기타 농민 봉기처럼 무력으로 국내 상황을 타개하려 한 전근대적 시도들을 고찰하는데(305~335), 대개는 최근의 혁명만이 대다수 인구의 부와 소득 분배에 영향을 미칠 만큼 충분히 강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극적인 불평등 감소가 뒤따른 곳은 러시아였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과 대조적으로 평준화는 전시의 개입과 전이 혹은 전후의 재정 붕괴가 아닌, 오히려 전쟁의 잔해로부터 탄생한 급진적 혁명의 대격변으로부터 초래됐다. 1917년의 대대적인 경기 침체는 이미 대토지 장악으로 귀결된 농민 봉기를 촉발했고, 파업 노동자들은 많은 공장의 통제권을 확립한 뒤 116일과 7일 볼셰비키에 의한 수도 무장 탈환에서 극에 달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을 기습한 바로 다음 날인 116, 신설된 인민위원회는 레닌이 손수 작성한 토지령을 통과시켰다. 무엇보다 강제 재분배가 초대 의제였다. 뒤이은 법령은 모든 은행을 국유화하고, 공장을 노동자평의회 통제 아래 두고, 개인의 은행 계좌를 압수했다.

 

여러 급진적인 법령을 거친 끝에 모든 것을 국유화하고 징발했다. 그렇게 강압은 승리했다. 요컨대 1937년 소비에트 농업의 93퍼센트가 강제로 집단화하고, 개인 농장은 완전히 붕괴했으며, 민간 부문은 소규모 정원으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변신하기까지는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 전체 자본의 7분의 1이 증발했듯 가축의 값어치가 절반 넘게 사라졌다. 인명의 희생은 한층 더 충격적이었다. 19302월 며칠 만에 첫 번째 범주의 쿨라크(부농) 6만 명이 체포된 뒤, 그해 말에는 70만 명, 그다음 해 말에는 180만 명에 이르렀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소비에트 시대의 자료 질이 고르지 못한 탓에 소득 불균형의 진화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어렵지만 제정 러시아 시대 말엽의 지니계수는 0.362로 추산되고, 소비에트 시대의 지니계수는 1967년에 0.229로 알려져 있듯이 제정 러시아 말기에 불평등이 훨씬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르기적 전제의 논리적 확장을 강제로 옹호하지 않게 된 순간, 모든 게 갑자기 무너져내렸다. 시장 소득 지니계수가 거의 1980년대 내내 0.26~0.27 근처를 맴돌던 러시아 연방에서는 소련이 몰락한 뒤 불평등이 폭등했다. 시장 소득 지니계수는 1990년에 0.28에서 5년 뒤 0.51로 거의 2배가 됐고, 그 후로는 0.44~0.52 사이를 오갔다.

 

이러한 강제적 평준화의 다른 끔직한 예는 마오의 중국과 캄보디아다(294~303쪽 참조). 물론 다른 예들도 포함하면 그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하지만 그 근저의 기본 계획은 동일했다. 즉 사유 재산과 시장의 힘을 억압하고 그 과정에서 계급의 격차를 평준화함으로써 사회를 재구성하려 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런 개입은 정치적이었고, 앞에서 논의한 근대의 세계대전이 유발한 것에 비결할 만한 충격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변혁적 공산주의 혁명은 그 비극적 잔인성이란 측면에서 대중 동원 전쟁과 같은 반열에 놓일 수 있다.

 

전쟁과 혁명은 더 많은 폭력을 불러일으킬수록, 사회에 더 깊숙이 침투할수록 불평등을 더 많이 낮출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전이가 체제 전체와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질서를 파괴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제까지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삼을 경우 여느 때보다 훨씬 더 큰 대격변은 여느 때보다 강한 평준화로 귀결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국가 실패와 체제 붕괴는 위계 서열을 뒤집고, 어떤 때는 극적인 규모로 물리적 불평등을 압착하기도 했는데, 대개 전근대 시기에 발생했다.

 

우선 용어 정의부터 시작하면,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주로 정치권력 행사와 관련한 과정, 즉 전통적으로 국가 실패라고 알려진 것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의 시각에서는 국가가 그 구성원에게 공공재를 공급할 수 없을 때 실패했다고 간주한다. 부정부패, 안보 결핍, 공공 서비스와 하부 구조의 와해 및 정통성 상실이 국가 실패의 표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더 먼 과거에는 적용됐을 리 없는 기준을 국가에다 갖다 붙인다. 전 근대의 시각에서는 전근대 정치 조직은 우선 나라 안팎의 도전자를 감시하고, 통치자의 핵심 협력자와 동료를 보호하며, 이런 과업을 수행하고 파워 엘리트를 부유하게 하는 데 필요한 세수를 빼내는 데 초점을 맞췄던 만큼 국가 실패는 이런 기본 목표를 성취할 능력마저 상실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피지배자와 영토에 대한 통치권 약화 및 군벌 같은 비정부 활동 세력의 국가 관료 대체가 전형적 결과이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정치권력이 지역 사회 차원으로까지 이양되는 경우도 있었다.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은 좀더 확장된 개념인 체제 붕괴가 있다. 체제 붕괴란 훨씬 포괄적이며 때로는 모든 것을 총망라하기도 하는 해체 과정으로서 기존 사회의 복합성 수준이 상당 부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는 경제부터 지적 분야에 이르기까지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확대되면서 전형적으로 계층화, 사회 분화 및 노동 분업의 축소, 정보와 물자의 흐름 경감, 그리고 기념비적 건축?미술?문학?문해력(literacy)같은 문명의 특징에 대한 투자 하락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전개 과정은 중앙 집권적 통치 기능을 약화시키든지 송두리째 제거하는 정치적 분산을 동반하거나, 그런 분산과 상호 작용한다. 심한 경우 전체 인구는 수축하고, 정착지가 줄어들거나 버려지며, 경제 활동이 좀더 단순한 수준으로 퇴보한다.

 

국가 또는 문명 전체의 와해는 우리가 소득과 부의 격차를 평준화할 수 있는 동력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국가 실패는 소수에게 새로운 번영의 기회를 창출할 수 있지만 기존의 엘리트는 고통 받을 공산이 크고, 대국들은 작은 독립체로 쪼개지는 만큼 최상층으로 자원이 집중될 잠재성은 줄어든다. 중앙 집권화한 통체 체제의 해체는 공식적 위계와 엄밀한 의미의 엘리트 계급을 약화하며, 그에 상응하는 규모로 경영하기를 기대하는 정적들이 기존의 엘리트를 즉각적으로 대체하는 상황을 차단한다.

 

소말리아라는 동아프리카 국가는 일반적으로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가장 심각한 국가 붕괴의 사례로 여겨진다(374~379쪽 참조). 이외에 서로마 제국의 붕괴나 당나라 엘리트의 파멸 등의 사례 연구가 소개되어 있다.

 

국가와 문명의 붕괴는 평준화의 세계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많은 곳을 피폐시킨 묵시록의 세 번째 기사에 해당한다. 즉 도처에서 생명을 파괴한 것만큼이나 불평등을 짓밟았다.

 

앞선 세 가지는 인간 대 인간의 폭력과 그것이 불평등에 미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불평등을 완화하는 마지막 동력인 네 번째 기사는 유행성 질병이다. 이는 다른 생물종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세 기사와 다르지만, 폭력적 관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인간 사회에 감행한 공격은 인간 스스로 초래한 거의 모든 재난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온 질병은 중세 말, 근대 초기의 페스트이다. 14세기 중반(1326~1350)에 중국 동부, 인도 남부, 중동 서부, 지중해 및 유럽의 설치류는 감염된 벼룩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대상 경로가 그 보급 통로 역할을 했다. 페스트는 1347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강타했고, 남부 유럽 서유럽 북아프리카를 거쳐 1349년에는 스칸디나비아까지 번졌다. 그러다 1350년 지중해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그 이듬해에는 유럽 전역에서 당분간이긴 했지만 누그러졌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을지라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수치일 리는 없으므로 인용하면, 1351년 교황 클레멘스 6세 때 산출한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2384만 명이라고 한다. 전체 인명 손실에 관한 현대의 추산은 25~45퍼센트의 범위에 있다. 파올로 말라니마의 연구에 의한 가장 최근의 재구성에 따르면, 유럽의 인구는 13009400만 명에서 14006800만 명으로 떨어졌다. 4분의 1이 넘는 하락이다. 인구 감소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가장 심했는데, 전염병 이전에 600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의 거의 절반이 사라졌을 수 있으며, 18세기 초까지 예전 수주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국민의 최소 3분의 1이 사라졌다. 중동에 관해서는 믿을 만한 추정치를 얻기 힘들지만,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망자는 특히 15세기 초까지의 손실을 고려하면 통상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인용된다.

 

비단 페스트의 습격은 인적 손실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는 그것이 초래한 질병과 전이가 광범위한 사고방식과 제도에 발자취를 남겼다. 즉 교회의 권위는 약해졌고,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나란히 유행했으며, 공포의 상속자를 남기지 않은 죽음 모두가 작용해 자선이 급증했다. 예술 양식마저도 영향을 받았고, 현역 의사들은 오랫동안 간직해온 이론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경제 영역에서, 특히 노동 영역에서 발생했다. 흑사병은 몇 가지 요인에 의해 약 300년에 걸쳐 인구가 급증한 때 유럽에 번졌다. 1000년부터는 기술 혁신, 농업 방식과 수확의 개선 및 정치적 불안의 약화가 정착지, 생산성 및 인구의 팽창을 불러왔다. 도시의 크기도 수도 증가했다. 하지만 13세기 말에 들어서면 이 장기적인 번영이 자연스레 스러졌다. 중세 기후의 최적기가 막을 내려 생산성이 하락하고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면서 지천의 굶주린 입들이 식품 물가를 급속도로 끌어올렸다. 나날이 빈약해지던 식단에서 기초 곡물이 여느 때보다 우세한 주식이던 바로 그 시기에 경작지 발전의 시동이 꺼지고 목초지가 줄어들면서 단백질 공급을 격감시켰다.

 

인구 압박은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그로 인해 실질 임금도 줄어들었다. 아무리 낙관하려 해도 생활 여건이 침체했다. 14세기 초에는 불안정한 날시 조건이 결국 파멸적 기근이로 이어진 수확량 감소를 초래했다. 인구 수준은 그 세기의 1/4분기 중에 하락했으나 최저 생계의 위기는 한 세대 더 지속됐고, 동물 유행병은 가축의 수를 대폭으로 감소시켰다. 이럴 때 흑사병이 찾아왔다. 흑사병은 물리적 인프라는 고스란히 내버려둔 채 인구수의 극적 하락을 불러왔다. 생산성 향상 덕분에 생산량은 인구가 줄어든 것보다는 덜 하락했고, 1인당 평균 생산량과 수입이 증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토지가 노동력에 비해 한층 풍부해졌다. 지대 및 이자율은 절대적으로도, 임금과 비교했을 때도 모두 떨어졌다.

물론 이후에도 전염병은 수없이 인간들을 괴롭혔다. 우리가 관찰한 소득과 부의 불평등 완화 뒤에 숨은 동인은 조금도 특이하지 않다. 부자들의 자산을 몰수하고 남은 생존자들이 눈에 띄리만큼 잘살게 될 정도로 노동 인구가 줄어들기까지는 대규모 폭력과 인류의 고통이 필요했다. 사회 스펙트럼의 상위는 물론 하위에서 일어난 상이한 형태의 인구 감소는 소득과 부의 분배가 압착되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불평등을 급격하게 축소하는 네 기사가 모두 폭력적 재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2개의 의문을 제시한다. 불평등을 평준화하는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존재하는가?

 

3.

불평등에 관해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상당히 암울한 상황에 봉착했다. 우리는 몇 번씩 되풀이해서 빈부 격차의 실질적 축소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음을 살펴보았다. 다시 말해 평준화의 규모는 대부분 폭력의 규모가 좌지우지했다. 무력을 더욱 많이 투입할수록 평준화는 더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폭력은 언제나 평준화의 원천이었을까? 비슷한 성과를 배출한 적이 있는 평화로운 대안이 있었는가? 물론 잠재적인 후보들이 존재했고 또한 인간들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토지 개혁, 경제 위기, 민주화 및 경제 발전 들 말이다.

 

토지 개혁은 일반적으로 농경지가 사유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마땅히 평준화 노력의 첫 번째 자리에 등극할 만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토지 분배는 폭력과 연관되지 않지만 항상 그러한 노력은 폭력이 개입되었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고 냉전의 종식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경제 위기도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준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금융 위기는 역효과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팽창은 평화적인 수단으로서 그럴싸한 후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진화가 대중 동원 전쟁과 얽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서구 국가들이 20세기 상반기의 특정 시점에서 선거권을 확대한 것은 중요하게도 양차 대전의 충격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만으로 민주화가 그런 국가에서 물질 자원 분배에 평준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이것이 어떤 과정이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쟁의 압력에 의해 촉발됐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 481쪽에 나와 있는 미국의 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가 우리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채택할 수도 있고, 소수의 손에 막대한 부가 집중되게 할 수도 있지만,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이 사실상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는 없음을 명확하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불평등에 관해서는 암울하게 모든 것을 끝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국 20세기 후반 이후 지금까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변화의 배후에 있는 추진 동력은 대압착 이후의 국가 간 관계 및 세계 안보의 진화를 반영한다. 요컨대 폭력적 충격이 글로벌 무역망을 파괴하고 사회적 결속과 정치적 화합을 북돋우고 공격적인 재정 정책을 지속시킨 반면, 폭력적 충격의 완화는 소득 분산과 부의 집중에 대한 견제를 약화시켰고, 다시 불평등은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폭력이 낳는, 불평등 완화의 역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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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은 올해로 꼭 20년 전인 외환위기 사태를 계기로 심화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부가 출범한 1980년대를 불평등 확대의 기점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지난 몇십 년 동안 소득과 부는 급속도로 특정한 개인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2015년 기준 전 세계 자산의 절반가량을 억만장자 62명이 소유하고 있는데, 불과 5년 전인 2010년에는 388명이 같은 부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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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역사>는 그저 수십 년이 아닌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소수의 개인에게 부와 소득이 집중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불평등에 대한 빅 히스토리. 수렵·채집 사회를 거쳐 농경 사회에 진입하고, 생산 과정에서 잉여가 발생할 때부터 빈부 격차가 싹튼 것이다. 전근대적인 국가가 들어선 것도 불평등이 자라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과연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불평등을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이 가능할까. 스탠퍼드대 인문학부 교수인 발터 샤이델은 인류 역사상 불평등은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해소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직 인간의 존립을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강한 충격이 발생했을 때에만, 불평등도 실질적으로 감소했다. 저자가 평준화의 네 기사(騎士)’로 명명한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치명적 전염병이 그것이다. 책의 원제(The Great Leveler)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평준화의 네 기사는 극도로 폭력적인 방식으로 수억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점에서 묵시론적이다. 성경의 4인방처럼 땅에서 평화를 거두칼과 굶주림과 흑사병과 들짐승으로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불평등의 벽을 무너뜨렸단다. 이런 도발적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고전학·역사학자로서의 장기를 발휘한다. 본문만 600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석기 시대부터 현대까지, 유럽과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 여러 대륙에서 수집된 방대한 양의 사료가 물 흐르듯 엮여 나온다.

 

인류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긴 평준화의 네 기사중에서도 전쟁은 극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1914~1945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승전국과 패전국을 막론하고 소득과 부를 분산시켰다. 일본은 최상위 계층인 상위 1%가 지닌 재산의 실질 신고 가격이 1936~194997%가량 떨어졌다. 미국도 양차 대전과 그사이 대공황을 지나며 소득 점유율이 크게 하락했는데, 1916~1945년 상위 1%의 소득 점유율은 40%, 상위 0.01%의 경우 80% 하락했다.

 

이 같은 드라마틱한 변화는 근대의 대중 동원 전쟁이 지닌 성격에서 비롯됐다. 약탈과 정복을 핵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전쟁은 승리한 지배층에게 더 많은 부를 돌려줬다. 그러나 막대한 물자·인력 동원을 수반하는 대규모 전쟁은 부자들에게 적용되는 누진세율을 높이고 자본의 집중을 통제했다. 저자는 전후 불평등이 대폭 감소하는 대압착의 시기를 경험한 선진국들이 복지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것 역시 전쟁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전시의 재정적 수단이 복지서비스 확대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100년 전 러시아 혁명과 함께 세계 곳곳에 확산된 공산주의도 부와 소득 분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가가 직접 나서 시장과 사유재산을 억제함으로써 계급차를 소멸시켰지만, 그 과정은 전쟁만큼이나 폭력적이었다. 스탈린의 쿨라크(부농) 처형, 중국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 등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14세기 중반 유럽 전체 인구의 25~45%를 숨지게 한 페스트도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인구가 줄어들면서 1인당 생산량과 수입, 토지가 늘어났고, 지대와 이자율은 임금에 비해 떨어진 것이다. 한편 고대의 로마제국과 당나라, 현대의 소말리아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붕괴될 때에도 평준화의 과업이 달성됐다. 기존 질서가 폭력적으로 파괴되면서 부를 독점한 지배층에게도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다. 더러는 토지개혁, 경제위기, 민주화, 경제발전 등 좀 더 온건하고 피비린내가 덜한 조치들이 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나 혁명, 국가 실패, 전염병과 같이 강력한 평준화를 일관되게 이뤄낸 경우는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이 책의 논지는 불평등 연구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토마 피게티의 주장과도 일정 부분 겹친다. 피게티는 <21세기 자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20세기에 불평등을 줄인 것은 단연코 바로 전쟁이라는 혼돈이었고, 그에 수반되는 경제적·정치적 충격이었다. 더 큰 평등을 지향하는 점진적이면서도 합의에 기반을 둔 갈등 없는 발전이란 없었다. 20세기에 과거를 지우고 사회를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게끔 한 것은 바로 전쟁이지, 조화로운 민주주의나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었다.” 샤이델은 현대의 불평등을 가속화시키는 주범으로 자본소득을 꼽는 등 피게티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피게티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교육 확대를 주장하는 것과 달리, 샤이델은 해법을 제안하는 데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추진되어 온 정책들이 역사 인식 결핍증을 앓고 있다고 꼬집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평준화의 네 기사를 만들어낸 동력이 현재는 사실상 사라졌고,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가능성도 낮다는 결론에서는 다소 힘이 빠진다. 아무리 불평등 해결이 지상과제라고 해도, 전쟁이나 전염병처럼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극단적인 처방을 택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세계화와 이민의 증가는 이전보다도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다.

 

저자는 서로 다른 시기에 상이한 문화권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불평등이 지속되었고, 엄청난 폭력을 통해서만 부와 소득의 격차가 실제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힌다. 또 역사를 교훈 삼아 좀 더 신중하고 정교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책을 덮으면 자꾸만 이 질문이 떠오른다. 정녕 이 길고도 끈질긴 불평등의 고리를 끊을 묘책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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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세계의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거세게 표출했다. 공평하지 않은 내핍 강요를 거부하는 지중해 연안 국가, 평등하게 나누어지지 않은 자유와 기회에 반발하는 아랍인들의 저항, 불평등한 고등교육을 거부하는 칠레 학생과 중산층, 그리고 1퍼센트의 지배에 반대하는 미국과 영국 등지의 월가 점령운동 등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이어졌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왜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에 분노하면서 스포츠 선수나 스타 연예인들의 불평등에는 경탄하는가? 불평등과 차이는 어떻게 다른가? 현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평등주의자들은 어떤 평등을 위해 싸우는가? 불평등(그리고 평등)을 유발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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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창조 /저자 켄트 플래너리, 조이스 마커스|역자 하윤숙|미지북스 |2015.01

인류는 왜 평등 사회에서 왕국, 노예제, 제국으로 나아갔는가

원제 The Creation of Inequality: How Our Prehistoric Ancestors Set the Stage for Monarchy, Slavery, and E

 

저자 켄트 플래너리 KENT FLANNERY는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로 미시간대학교 인류고고학 교수이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이전의 중앙아메리카 문명과 문화, 특히 멕시코 지역의 고대 문명을 폭넓게 연구했다. 소아시아에서 농경과 집단 거주의 기원, 안데스 산맥 목축민의 문화적 진화에 관한 영향력 있는 저작을 발표했다. THE FLOCKS OF THE WAMANI (2009), ZAPOTEC CIVILIZATION (1996) 등을 썼다.

 

저자 조이스 마커스 JOYCE MARCUS는 켄트 플래너리와 함께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이다. 미시간대학교 사회진화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광범위한 고고학 연구를 발표했다. 특히 마야 문명과 멕시코 남부에 위치한 오악사카 밸리 근처의 고대 문명에 대한 현장 조사를 수행했다. 1997년에는 미국과학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ANDEAN CIVILIZATION (2009), THE ANCIENT CITY (2008) 등을 썼다.

목차

 

불평등의 창조에 보내는 찬사

서문

1부 평등한 출발

1장 인류의 탄생과 확산

2장 루소의 자연 상태

3장 조상과 적

4장 종교와 예술은 왜 생겨났을까?

5장 농경 이전의 불평등

 

2부 명망과 불평등 사이

6장 농경과 야망

7장 성과 기반 사회의 의식용 건물

8장 선사 시대의 의식용 가옥

9장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의 명망과 평등

 

3부 불평등의 세습

10장 농경 사회의 세습적 불평등

11장 족장 사회에서 권력의 세 가지 원천

12장 아메리카 대륙: 신전의 출현

13장 족장 없는 귀족 사회

14장 초기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신전과 불평등

15장 미국의 족장 사회

16장 남태평양: 지위에서 계층으로

 

4부 왕국과 제국의 불평등

17장 왕국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18장 신세계의 1세대 왕국

19장 전갈 왕의 땅

20장 흑소 가죽과 황금 의자

21장 문명의 탁아소

22장 수탈과 제국주의

23장 제국이 제국에게 남긴 교훈

 

5부 불평등에 맞서는 저항

24장 불평등과 자연법

 

후주

그림 출처

찾아보기_인명

찾아보기_기타

 

출판사 서평

인간은 어떻게 자유를 빼앗겼는가

불평등은 인류 사회에 본래부터 내재한 현상인가?

불평등의 세습에 저항한 사회는 없었는가?

결국 대부분의 사회가 불평등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인류는 왜 불평등을 허락했을까

현대 사회에서 불평등은 가장 중요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현상이다.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인권을 가지며 지위에 차이가 없다고 법으로 명시하지만, 반면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만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 불평등이 본래부터 내재하는 현상이라고 여긴다. 정말로 그럴까? 최초의 인류 조상들도 불평등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인간 사회에서 불평등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노예와 귀족 같은 신분 차이와 부자와 빈자 같은 빈부 격차가 최초로 사회에 생겨났을 때, 그것에 저항한 사람은 없었을까?

 

불평등의 창조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진화의 역사를 추적한 역작이다. 저자들은 불평등이 인간 사회에 내재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며, 농경의 등장 같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다. 인류의 초기 조상은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았고 사회적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지만, 규모가 큰 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불평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놀라운 점은 인구 성장, 잉여 식량, 귀중품의 축적만으로 불평등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평등은 모든 인간 집단의 핵심에 있는 고유한 사회 논리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물이었다.

 

몇몇 사회에서는 재능 있고 야심적인 개인이 명망을 쌓는 것을 용인했지만 이들이 세습 상류층이 되는 것은 계속해서 막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회에서는 부채, 족보, 신성한 지식 등을 이용하여 높은 지위가 세습되도록 했다. 역사의 일정 시점이 되면서 고위층 지도자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서아시아, 이집트, 아프리카, 멕시코, 페루,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 전제적인 왕국과 제국이 탄생했다. 저자들은 선사 시대 사회에 관한 고고학 자료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사회 집단을 아우르는 인류학 연구를 바탕으로, 보다 위계적이고 규모가 큰 사회의 탄생을 야기하는 사회 논리의 변화를 설명한다.

 

불평등의 사회 논리

유인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유인원 사회가 안정성을 확립할 수 있는 것은 서열 순위 덕분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수렵채집 사회는 어떻게 불평등한 위계 서열 없이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을까? 비밀은 바로 수렵채집 사회의 서열 순위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는 데 있다. 수렵채집 사회의 일인자는 신, 즉 초자연적인 존재였다. 이인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조상 영혼으로 초자연적 존재의 지시를 수행하면서 살아 있는 인간 후손을 보호했다. 살아 있는 인간 중 어느 누구도 일인자나 이인자가 될 수 없었다.

 

불평등은 바로 이 서열 순위를 조작해야만, 그리고 새롭게 바뀐 서열 순위를 다른 성원들이 납득해야만 탄생할 수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지위를 후손에게 세습하려고 했던 지도자들은 자기네 가계와 조상 영혼, 심지어 신 사이에 연관 관계가 있음을 다른 구성원들에게 납득시키려고 했다. 만약 신, 조상 영혼, 인간으로 이어지는 서열 순위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런 전략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계가 창세 신화의 두 형제 중 형의 후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동생의 후손보다 높은 지위를 누리거나, 다른 사람들은 사회의 이인자인 조상 영혼의 후손인 반면 자기는 일인자인 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지위를 정당화했다. 한때 신성한 존재들이 사회의 일인자와 이인자라는 개념이 이타심을 북돋우고 살아 있는 인간 사이의 대결을 완화함으로써 사회의 평등을 강화했다면, 이후에는 세습 상류층을 창출하는 데 활용되었다.

 

불평등에 저항하는 힘

멕시코, 페루, 서아시아의 선사 시대 사회는 농경이 도입되고 촌락 사회가 정착된 이후 세습 신분 사회로 나아갔고 다시는 이전의 평등 사회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불평등으로 나아가려는 시도에 맞서 평등을 유지한 농경 사회도 많았다. 이 사회들은 개인이 명망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도 세습 상류층이 되지 못하도록 막았다. 예를 들어 미국 남서 지역의 푸에블로 인디언 사회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평등하게 시작한다는 점에서 평등 사회이면서, 통과의례를 거친 사람 중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만 배타적인 의식 모임에 입회하고 이를 통해 명망이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점에서 성과에 기반한 불평등의 요소가 있는 사회였다. 버마 고지대의 카친족 사회는 세습적 불평등이 등장했음에도 주기적으로 불평등을 없애고 세습 지위가 없는 평등 사회로 회귀했다. 고고학에서는 이런 변화를 순환적 변동이라고 하는데, 카친족의 사례는 평등한 대우를 원하는 지속적인 욕구가 존재하고 이 욕구가 세습적인 특권을 주기적으로 무력화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평등 사회에서는 모든 촌락이 자치권을 지녔지만 불평등 사회에서는 족장이 한 번에 60개가 넘는 촌락을 감독하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아주 오랜 시기 동안 안정을 누렸던 사회들을 여럿 발견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장기간의 사회적 안정은 정치적 자치권을 지닌 성과 기반 촌락 사회의 결과물이었다. 반면 세습 상류층을 형성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사회에 심한 불안정을 초래하기도 했다. 특권과 평등 사이에 일어나는 사회 논리의 모순 때문에 사회가 동요하고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불평등의 탄생, 시나리오: 남보다 성공한 사람들

불평등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평등한 상태에서 사회의 다른 성원들이 그에 납득해야만 했다. 카친족 사회에서 지위의 격차는 어떻게 생겼을까? 카친족의 모든 가계는 독자적인 조상 영혼()이 있었다. 그리고 지역을 관할하는 촌락 차원의 영혼, 그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는 땅의 영혼과 하늘의 영혼이 있었다. 평등 사회일 때는 모든 가계가 조상 영혼의 중재를 통해 땅의 영혼과 하늘의 영혼에 제물을 바칠 수 있었다. 인류학자 조너선 프리드먼의 설명에 따르면, 한 가계가 다른 모든 가계를 상대로 촌락 차원의 영혼이 자기네 가계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납득시킬 때 지위의 격차가 생겼다.. 그 결과 한 가계가 족장 가계, 즉 그 지역을 다스리는 영혼의 후손 가계가 되었다. 이런 변화는 우주론에도 영향을 미쳐, 카친족의 우주론에서 땅의 영혼은 가장 지위가 높은 가계의 조상이 되고 그보다 지위가 낮은 영혼은 지위가 낮은 가계의 조상이 되었다.

 

다른 가계가 이런 변화를 아무 불만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리드먼의 설명에 따르면 장차 족장 가계가 될 집안은 이미 사회에 퍼져 있는 익숙한 전제를 이용해서 다른 가계의 마음을 샀다. 탁월한 성공을 거둔 사람은 초자연적 존재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였다. 카친족 사회에서 열심히 일해 가장 많은 잉여 산물을 생산한 가계는 가장 명망이 높은 제물을 내놓고 많은 손님을 대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료 가계들은 이 가계의 성공이 열심히 일한 대가라고 여기지 않고, 영혼에 적절한 제물을 바침으로써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인 것뿐이라고 믿었다. 부를 노동의 산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천상의 영혼을 흡족하게 해 준 결과라고 여긴 것이다. 그 결과 사회 논리에서 그들이 영혼을 흡족하게 해 주었을 것에서 그들이 우리에 비해 높은 영혼의 후손일 것이라는 변화가 일어났다. 한 가계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영혼의 후손으로 대우받게 되면 이 가계가 그 지역의 땅을 다스리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귀족들의 황금만능주의 사회: 사적 소유의 창안

대부분의 불평등 사회가 족장 가계를 두었지만 독특하게도 소수의 귀족층이 사회를 지배한 곳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인도 동쪽 끝의 아삼 지역에 위치한 아파타니족이다. 1960년대에 인류학자 크리스토프 폰 퓌러 하이멘도르프가 아파타니족을 여러 차례 방문해서 관찰했다. 아파타니족은 미테(mite)와 무라(mura)의 두 개 씨족으로 나뉜 불평등 사회였다. 미테는 세습 귀족이고 무라는 노예이거나 노예 출신 평민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런데 두 씨족의 관계는 놀라울 정도로 협조적이었다. 많은 무라 씨족이 미테 씨족과 의식용 건물을 함께 사용했다. 미테 씨족과 부유한 가족 출신의 남자들이 속한 평의회가 촌락을 이끌었다.

아파타니족 사회가 특히 인상적인 점은 토지의 사적 소유 개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부족 사회에서 농사를 지은 사람이 수확물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노동의 결실이라는 개념에 따라 정당했다. 그러나 작물이 자라는 땅을 사적으로 소유하지는 못했다. 아파타니족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불모의 늪을 비옥한 계단식 논으로 만드는 데는 엄청난 노동이 들어갔다. 논을 만든 아파타니족 가족은 그 땅을 이용할 권리를 다른 가족에게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파타니족 사회에서 계단식 논은 개인의 땅으로 여겨졌으며 토지 사유화가 인정되었다. 이제 사회 성원들에게 집약 노동과 부를 창출할 동기가 생겼고, 다른 활동에 땅을 이용하지 않고 쌀을 생산하는 데만 집중하여 더 많은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부유한 사람이 촌락 평의회의 성원으로 선출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아파타니족은 이웃한 다른 부족과 달리 복수나 전쟁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직 부를 일구는 데 전념했다. 그들은 전쟁 포로를 복수의 수단으로 삼는 대신 몸값을 받는 데 이용했다. 이런 행동은 논리적 모순을 야기했다. 부를 향한 욕망이 씨족에 대한 충성심이나 사회적 대리의 원칙보다 앞서게 된 것이다. 세습 지위와 부가 있지만 족장이 없었던 아파타니족 사회는 지위 사회의 특수한 형태를 보여 주는 사례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가, 왕국: 역동적인 경쟁이 낳은 산물

세습 지위 사회에 불과했던 불평등 사회는 계층 사회로 나아가면서 왕국을 탄생시켰다. 왕국은 먼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왕국은 5,500년 전부터 19세기까지 인류 사회에서 계속하여 발생했다. 하와이 제도, 남아프리카의 줄루족, 인도 북쪽의 훈자 지구,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왕국이 탄생한 과정을 서구인들이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긴 덕분에 오늘날 그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세계 각지에서 건설된 최초의 왕국은 족장 가계 간의 치열한 권력 찬탈의 결과물이었다. 어느 지역도 단순히 지위 사회의 규모가 커져서 왕국으로 변화한 곳은 없었다. 한 집단이 경쟁 관계에 있는 지위 사회를 무력으로 통일함으로써 왕국이 탄생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한 가계가 다른 경쟁 가계를 압도하는 우위를 확보해야 했다. 하와이에서는 서구인들이 가져온 무기가, 줄루족 사회에서는 관습을 무시한 새로운 전투 방식이, 훈자 지구에서는 새로 도입된 관개 체계가 그런 역할을 했다

 

왕국, 즉 최초의 국가가 탄생하는 데 무력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일까? 인류학자 로버트 카네이로는 사회가 자발적으로 자치권을 넘겨주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또한 고고학자 찰스 스펜서는 최초의 국가가 탄생하는 데 반드시 영토 확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수학적인 방식으로 뒷받침했다. 스펜서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에 관한 동물학 연구에서 등식을 빌려 와, 족장이 자신의 추종 세력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자원이 한계에 달하고 사회의 성장 곡선이 가파른 상승선에서 평평한 수평선으로 바뀔 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첫째, 백성에게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하며 이는 반란을 부르기도 한다. 둘째, 기술 향상을 통해 생산을 증대한다. 셋째,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영토를 확장한다. 어떤 이유로든 3번 방식이 채택되고 그 결과로 늘어난 영토가 한계를 넘어서서 이전의 족장 사회와 같은 방식으로 관리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족장이 관리 방식과 사회 논리에 변화를 꾀하면서 국가가 탄생했다.

 

책속으로

기원전 15000년 무렵 인간은 가장 가까운 경쟁자를 거의 멸종시킨 뒤 지구 상의 주요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빙하 시대 인류 조상은 일반적으로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먹이를 찾아다니며 살았고 이 집단의 성원은 베푸는 마음, 나눔, 이타심을 존중했다. 인류학자 크로스토퍼 보엠이 지적했듯이 수렵채집 사회의 성원은 불평등이 생기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우리 조상 모두가 계속 이런 방식으로 산 것은 아니다.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일부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 커진 더 큰 규모의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기원전 2500년 무렵이 되면 지금까지 인류에게 알려진 거의 모든 불평등의 형태가 세계 어디에선가 나타나게 되었고 진정 평등한 사회는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 다른 이들은 원하지 않는 몇몇 지역에만 한정되었다.--- p.12

창조 신화는 단순한 민간 설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신화는 사회 집단의 헌장 기능을 한다. 어떻게 생활을 꾸려 가고 서로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초자연적 영혼의 지시가 신화 속에 담겨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채집 생활자 사회에서는 우주론을 토대로 많은 사회 논리의 원칙을 만들었다.--- p.108

 

성과 기반 사회는 대단한 안정성을 지녔다. 하지만 고대 세계의 여러 시기, 여러 곳에서 자기애가 지속되다가 마침내 세습 상류층이 생겼다. 인구 성장, 집약 농업, 기후 개선 등이 불평등을 낳기에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는 해도 이러한 요인 자체의 필연적인 결과로 불평등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핵심적인 과정은 인간 행위자 중 일부 집단이 더 큰 특권을 얻기 위해 싸운 반면 다른 이들은 가능한 한 모든 힘을 모아 특권에 저항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p.888

 

인간은 자유로운 상태로 태어났지만 곳곳에서 속박당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루소는 선언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조상들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불평등에 저항할 수 있는 수십 가지 가능성이 있었지만 항상 단호한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 사업적 역량, 용맹을 높이 평가한 점에 대해서는 그들을 용납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특성이 세습된다는 견해만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 p.905

 

불평등의 경제학 / 저자 이정우|후마니타스 |2010.03

 

저자 이정우는 참여정부의 동반성장론을 상징하는 인물로,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참여정부라는 이름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한 경제학자. 200310?29 주택시장 안정 대책을 만들면서 강력한 부동산 규제정책을 주도했고, 인위적 경기부양 반대, 성장 분배 동반 추구를 주장하며 참여정부 초기 경제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2006년 말 정책 특보직에서 물러나면서 참여정부를 떠남. 이 과정에서 한 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반대하는 등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으나, 참여정부의 기본적인 경제정책 밑그림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현재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다. 1977년부터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아마 한국에만 있는 단어인 지방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대해 긍지를 갖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좋은 건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며, 언젠가 골고루 분산될 날을 꿈꾼다. 지방대학 학생들이 우수한 자질과 순박한 심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차별을 받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순전히 능력과 인간 됨됨이로 평가받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평생 강단을 지켰으나 노무현 정부 시절 2년 반 동안 청와대에 가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이 책의 내용인 분배, 형평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정책 면에서 조금 기여하기도 했기 때문에 보수파로부터 분배주의자’(이 역시 다른 나라에는 없는 단어이지 싶다), 혹은 좌파란 공격을 받았고 그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추진했던 몇몇 정책조차 실은 복지 후진국인 한국이 장차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첫 걸음을 뗀 정도에 불과하고, 앞으로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은 유교적 잔재, 식민지, 전쟁, 우익 독재 등 독특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보수가 과잉이고, 진보가 전멸된 특수한 나라라고 본다. 그는 이 특이한 나라에 진보의 싹을 키워 세계 보편의 나라로 만드는 일을 평생 사명으로 생각한다. 그는 대학 시절 많은 친구, 선후배들이 제적, 고문, 투옥을 불사하며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데 대해 늘 마음 한 구석에 빚이 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것을 빚을 갚는 과정으로 여기고 있는데, 평생 갚아도 다 못 갚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전공은 경제학인데 역사책 읽기를 더 좋아해서 서재에는 경제학 책보다 역사책이 더 많다. 평소에 학생들에게 수학을 모르고 이과 공부를 할 수 없듯이, 역사를 모르고 문과 공부 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역사 공부를 중시한다. 특히 우리나라 학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을 개탄하며, 수업 시간에 수시로 역사 보충수업을 한다. 취미는 다양해서 헌책방 순례, 음악 듣기, 테니스, 바둑을 좋아한다. 특히 수년 전 하찬석 국수, 조훈현 국수에게 석 점을 놓고 이긴 바둑을 늘 뿌듯하게 생각한다. 공동저서로는 어떤 복지국가 인가?가 있다.

 

목차                      

서문

1. 서론

2. 소득분배의 개념과 측정

3. 교육과 불평등

4. 노동시장구조와 불평등

5. 노동조합과 불평등

6. 그 밖의 분배 이론: 상속, 능력, 생애 주기, 선택, 우연

7. 차별의 경제학

8. 부의 불평등

보론. 토지와 불평등

9. 상대적 분배율

10. 빈곤

11. 소득재분배와 복지국가

12. 세계의 소득분배

13. 한국의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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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경제학과에서 1977년부터 교수로 재직해온 저자는 기존의 시장주의적 주류 경제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평등과 분배의 경제학30년이 넘도록 가르쳐 왔다. 비주류 경제학자이면서 또한 지방대교수로 보내 온 그 기간은 그를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이란 문제에 깊이 천착할 수 있게 만든 조건이자 밑거름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2년 반 동안 청와대 정책 실장으로 일하는 동안 분배, 형평을 정책 방향으로 삼았었고, 이 때문에 보수파로부터 분배주의자’, ‘좌파란 공격을 받아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때 추진했던 몇몇 정책조차 실은 복지 후진국인 한국이 장차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첫 걸음을 뗀 정도에 불과하고, 앞으로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장과 분배는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할 수 있다. 함께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에서는 성장만 중시되고, 분배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해방 후 반세기 동안 반공주의가 워낙 기승을 부렸기 때문에 그 여파로 분배의 중요성을 말하기만 해도 좌파로 몰고 의심하는 잘못된 풍조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도성장 시대는 끝났고, 분배·복지 문제를 돌보지 않고는 성장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성장만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보다 폭 넓은 균형 잡힌 시각이 절실하다.

 

우리는 소득수준에 비해 낮은 우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도 성장지상주의를 극복해야 하거니와 우리가 진정 성장 자체를 지속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을 위해서도 이제는 분배와 복지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보이고 있는데, 저출산 문제 하나만으로도 머지않은 장래에 성장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엄청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문제는 사실 그 동안 성장 지상주의에만 경도해 왔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며, 그 해결은 성장 지상주의로는 결코 불가능하다. 우리가 낙후한 분배, 복지 체계를 가다듬어 국민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될 때만이 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각 대학의 경제학 수업은 여전히 분배, 복지를 무시한다. 몇몇 대학에서 이런 강좌가 개설되어 있긴 하지만 주류라고는 할 수 없고 찬바람 부는 변방에 속한다. 또한 불평등, 빈곤 문제를 학술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저서도 드문 형편이다.

 


 

약자를 위한 경제학 / 저자 이정우|개마고원 |2014.


목차   

1부 경제의 세계, 세계의 경제

1장 지금 우리의 경제

경쟁이냐 협력이냐 싹쓸이 사회의 경제학 종신고용의 위기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대공황, 유효수요와 케인즈 친기업이 친경제는 아니다 공정무역이란 무엇인가? 공포의 전염병과 우울한 과학고리대의 횡포, 눈물의 역사 부패의 역사, 부패의 경제학 노조는 무엇을 하나?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 탈세의 유혹, 할인의 유혹 기부의 계절, 기부의 경제학

 

2장 세계 경제의 앞날

시장경제의 세 모델 세계화와 바닥을 향한 경주세계 경제 불균형의 동상이몽 IMF, 구세주인가 개혁대상인가? 국가경쟁력의 수수께끼 토지개혁의 정당성과 위험성 세계적 양극화 초인플레이션의 악몽 식품 인플레이션 진퇴양난의 원전 맥나마라의 추억

 

2부 세계 경제의 흐름

1장 미국의 그늘

과연 역사는 반복되는가? 투기와 거품의 역사 바이 아메리칸의 추억 기축통화 달러의 운명 소유자 사회의 비극 잭 웰치의 전향 GM의 흥망성쇠 고실업: 미국의 유럽화? 헬리콥터 벤의 양적 완화 의술 선진?의료 후진, 미국의 두 얼굴

2장 유럽의 고민

그리스의 경제위기 유로존의 고민 두 개의 스페인, 두 명의 파블로 슬픈 아일랜드 세기의 철녀, 마거릿 대처 영국의 폭동 프랑스 연금개혁의 진통 고전하는 프랑스 경제 비틀거리는 이탈리아 경제 독일의 경제 최근의 러시아 경제

3장 떠오르는 아시아와 중남미에도 문제가

격차사회일본이 주는 교훈 아베노믹스의 세 개의 화살 노대국 일본의 주는 교훈 중국 경제의 천지 개벽 중국의 성장/분배 논쟁 위기에 빠진 중국의 노사관계 떠오르는 나라 인도 방글라데시의 착취공장 남미 수탈 500년의 역사 칠레의 아옌데, 피노체트, 그리고 바첼레트 브라질의 구원투수, 룰라 비극의 땅, 아이티

 

3부 한국 경제의 오늘

1장 정치경제와 북한 경제

박정희, 이토 히로부미, 스탈린 박정희의 경제 실정 독재와 경제성장 허창수 신부와 사회적 시장경제 서울중심주의와 세종시 강은 흐르고 싶다 지방재정위기와 연성예산제약 부자감세 남북한의 화폐개혁과 물자부족 경제통일비용과 북한 퍼주기 논란

2장 부동산, 재벌, 미시경제

토지문제에 정의는 없는가?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 토건국가의 악순환전세대란의 경제학타블로 사건과 군집행동 승자의 저주와 드라마의 위기 부모의 자식 사랑과 경영권 승계 이익공유제 논란농부의 역설과 쌀 직불금 널뛰기하는 배춧값과 거미집 이론 담배값 인상과 수요의 탄력성 석유가격의 경제학

3장 노동·복지·교육의 경제학

민영화의 망령: 의료와 철도 일자리 나누기와 임금삭감 최저임금제의 효과 3중고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미누와 이주노동자 문제 ! 전태일 노동절과 노동귀족 남녀차별과 유리천장 김대중, 노무현 시대의 소득분배 성장지상주의의 저주, 저출산 정조의 손상익하와 복지국가 카이스트의 비극 경찰과 대학: 성과주의의 함정 정글 자본주의와 미친 대학 등록금 장학금은 누구에게 주어야 하나

 

출판사 서평

경제, 오른쪽에서 옳은 쪽으로

경제학자들은 대개 보수적이다. “가장 급진적인 경제학자도 가장 보수적인 사회학자보다 보수적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심지어 경제학자들은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상황을 놓고 한 실험에서 경제학 전공자들은 60%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걸 택했다. 반면 비전공자들은 60퍼센트가 서로 협조하는 걸 택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그러한데, 경제학 교수들은 교수들 중에서 가장 기부를 안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이기심을 강조하는 경제학의 학문적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이기적인 사람들이 경제학을 선택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오른쪽 경제학’, 즉 현재 주류인 우파 경제학은 사람의 경쟁과 이기심을 강조하며 그에 기반하여 경제 정책을 제안한다. 소수의 승자에게 큰 인센티브를 주며 사기업과 공공기관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방향이 장기적으로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불평등은 결국엔 경제 성장을 저해하며, 경쟁만을 강조하면 효율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현실의 여러 경제 현상을 짚으면서 약자를 위하는 경제학이 옳은경제학임을 역설한다.

 

불평등은 경제 성장의 적이다

경제학계에서는 불평등을 경제 성장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불평등이 있어야 경쟁이 활발해지고 경제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199의 사회에 면죄부를 줘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과도한 불평등이 경제위기를 가져온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전통적으로 소득편차가 큰 직종인 배우·가수·스포츠 스타뿐만 아니라 재계까지 보상체계가 극심한 불평등을 보이니 미국 전체가 모 아니면 도식으로 싹쓸이 사회라는 향기롭지 못한 별명을 갖게 되었다.

 

각종 기발한 금융파생상품이 다투어 개발된 것도 천문학적 크기의 물질적 인센티브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한 것도 이런 불평등한 보상체제가 촉발한 면이 있다. 엄청난 보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이성을 발휘할 수 있는 냉철한 기업가, 금융인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16~17

 

1929년과 2008, 빈부격차가 사상최대로 벌어졌을 때 경제공황이 닥쳤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며, 역사의 선례를 들어가며 불평등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미국에서 최고 10% 부자의 소득몫은 대개 35% 정도인데, 공화당 정권의 연이은 경제실정으로 1920년대 말에는 50%까지 올라갔다. 그러다가 대공황을 맞았다. 이 비중이 다시 50%로 치솟은 것은 80년 뒤 부시 임기중이었다. 레이건과 부시의 경제정책은 1920년대와 판박이처럼 같았다. 작은 정부·부자감세·규제완화·친기업·반노조가 그것이다. 그 결과 빈부격차가 사상최고로 커졌고,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세계적 불황이 닥쳤다. 역사는 80년을 사이에 놓고 정확하게 반복했다. -84

 

저자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사례를 들어가며, 불평등과 격차사회의 문제를 지적한다. 첫 꼭지인 경쟁이냐 협력이냐에서부터 마지막 꼭지인 장학금은 누구에게 주어야 하나까지 다종다양한 이야기에서 저자의 논지는 항상 약한 편의 처지가 개선되고 불평등이 감소되어야 한다는 쪽에 가 있다.

 

친기업이 경제를 망치고, 반기업이 경제를 살린다

그간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주의라는 이름으로 기업과 부자들을 위하는 정책이 여러 나라 추진됐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크게 강조되었다. 기업이 잘 활동해야 경제가 나아진다는 논리에서다. 그러나 이 책은 친기업적인 정책이 외려 경제를 망치고 반기업적인 태도가 정부에게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감세, 규제완화, 반노조 등으로 대표되는 친기업 정책이 소수에게만 부를 집중시키고 시장의 투기와 과열을 불러와 경제의 안정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들의 공통점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반기업적 태도다. () 제퍼슨은 금융계는 군대보다 더 위험하다라고 했다. 링컨은 노동은 자본에 선행하며 독립적이다. 자본은 노동의 아들이며, 노동 없이는 애당초 존재조차 않을 것이다. 노동은 자본보다 우위이며, 더 우대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친노동적 발언을 했다. 링컨이 암살되었을 때 부통령이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한 앤드루 존슨은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나면서 우리가 다음에 싸워야 할 전쟁은 금융과의 전쟁이다라고 술회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부자가 있다. 범죄자 부자와 바보 부자라고 반부자 발언을 했고,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후나 항상 대기업과 정면으로 싸웠기 때문에 독점분쇄자란 별명을 갖고 있다.

이들과 반대쪽에 친기업적 대통령들이 있다. 친기업적 대통령 중에서 존경받는 대통령은 거의 없다. () 친기업 대통령은 주로 공화당이 많은데, 1920년대의 하딩·쿨리지·후버 그리고 근래의 레이건과 부시 부자가 손꼽힌다. 친기업적 대통령들은 임기 중 경제성적이 나빴고, 심지어 대공황과 경제위기를 일으킨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25~26

 

기업 또한 비용절감을 목적으로 감원과 정리해고를 남발하는 기업은 생산성이 오히려 감소한다고 말한다  

해고를 남발하는 회사에서는 노사간에 신뢰가 깨지고,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한 약삭빠른 행동 즉 단기적·전략적 행동에 몰두하므로 장기적으로 생산성 향상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해고의 칼날에서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쫓겨난 동료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빠져 인간관계가 나빠지며, 생산성이 지체된다고 보는 연구가 있다. 실제로 감원과 구조조정을 남발하는 회사가 심각한 내부 갈등에 시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점을 다 감안하면 해고는 결코 능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도 있듯이 어려울 때일수록 인간존중의 경영철학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19

 

저자는 이처럼 위에서는 손해를 보고 아래에서 이득을 보는 손상익하의 경제가 종국적으로 더 건강한 경제 시스템이 된다고 주장한다.

 

약자를 위하는 경제가 좋은 경제다

저자는 한결같이 이 책에서 약자를 위한 경제가 좋은 경제라고 강조한다. 부자감세토건경제비정규직 확대민영화 등을 비판하고, 최저임금 상승노동권 강화소득분배율 개선이 국민경제를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국내외와 동서고금의 여러 사례를 곁들인 저자의 설명은 부드럽게 읽는 사람을 설득한다.

 

이 책에서는 탄탄한 경제학적 지식과 더불어 인문학적 향기가 짙게 묻어난다. 흥미로운 역사적문화적 사례가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데 다양하게 동원될 뿐 아니라, 글에 담긴 고민의 철학적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독자는 편하게 읽어도 읽고 나면 어떤 경제가 바른 경제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2012경향신문여론조사에 따르면,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55.2%가 동의하고, 44.3%가 반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복지국가가 부상했지만, 재원 문제에 부딪히자 모든 논의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2017한겨레여론조사에서 더 나은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71.7%가 세금을 추가 부담할 뜻이 있다고 답했다. 그럴 의사가 없다는 응답자는 26.2%에 불과했다.

 

5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사람들은 왜 돈을 내는 민감한 문제에 생각이 바뀌었을까.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불평등이 심화되어 중간계급이 사라지고 있으며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한국은 뚜렷한 분열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여기서 더 나빠져서는 안 된다. 아동, 청년, 노인이 모두 살기 어려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2016년 촛불혁명과 2017년 장미대선으로 공정과 불평등 해소라는 시대정신이 대다수 국민의 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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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이 문제다 / 저자 김윤태|휴머니스트 |2017.09

 

저자 김윤태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희망하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가 꿈꾸는 희망과 현재 삶의 간극이 너무 크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맞서든지, 결코 바뀌지 않을 테니 포기하고 굴욕을 감내하며 살아가든지. 사회학자 김윤태는 원자화되고 파편화되는 우리의 삶과, 갈수록 심화되는 빈곤과 불평등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은 왜 이렇게 빠르고 심각하게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는지, 그 원인과 결과, 대안까지도 하나하나 짚어 본다. 사회란 미덕을 키우고 동반자를 만들고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시민들에 의해 이 사회의 미래가 바뀔 거라 믿는다.

 

군산에서 태어나 1980년대에 고려대학교를 다녔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버벡칼리지 객원연구원, 미국 컬럼비아대학 객원연구원,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공공정책대학 교수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교수, 공공정책연구소 사회정책연구센터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자유시장을 넘어서, 한국의 재벌과 발전국가, 빈곤: 어떻게 싸울 것인가(서재욱 공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복지국가의 변화와 빈곤정책(문화부 우수학술도서 세종도서) 등이 있다. 엮은 책으로 한국 복지국가의 전망(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새로운 진보의 길, 세계의 정치와 경제,한국 정치, 어디로 가는가, 발전국가, 복지와 사상등이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사회학, 국가의 역할, 복지국가, 시민권, 민주주의 등이다.

 

목차                  

머리말__문제는 경제가 아니다

감사의 글

        

1부 한국인은 불행하다

 

1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실패

한국인이 불행한 이유 증가하는 자살률과 우울증 가난한 사람이 일찍 죽는다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교육 가계 부채와 불평등의 심화 추락하는 중산층 신분제 사회의 등장 한국의 역설

 

2 정글 자본주의가 만든 비극

과잉 경쟁의 고통 불평등이 강요하는 구조적 경쟁 경쟁 논리가 지배하는 대학의 비극 여성 혐오 발언이 증가하는 이유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성형 대국 속물 사회와 과시 소비 광고와 사치품 열광 일중독 사회의 덫

 

3 커져가는 소득 불평등

최고경영자와 노동자의 임금격차 한국의 지니계수를 믿을 수 있는가 소득 5분위, 10분위 배율의 격차 상위 1%10%의 소득 집중 상대적 빈곤율의 가파른 상승 무엇을 알 수 있나

 

4 밑바닥으로 밀려난 사람들

여자가 남자보다 가난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빈곤 세대가 된 청년 세대 극빈국의 가난한 사람들 불평등의 불평등

 

2부 왜 한국은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나

 

5 불평등이 심해지는 이유

빈곤과 불평등을 만든 사회구조 세계화에 소외된 사람들 기술의 진보가 불평등을 확대하는가 그리고 기업은 비정규직을 창조했다 노동조합이 약화되면 불평등이 심해진다 조세정책과 사회정책이 불평등을 줄인다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가 불평등을 키운다 위기에 직면한 민주주의

 

6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

농지개혁과 평등주의의 등장 정치적 민주화 이후 증가한 불평등 불평등 이데올로기의 성공 순수한 능력주의 자연적 엘리트주의 낙수 경제학 개인주의 심리학 체제에 순응하는 경제적 인간

3부 불평등한 한국의 새판 짜기

7 평등의 사상을 찾아서

평등과 불평등 형식적 평등, 기회의 평등, 결과의 평등 평등과 정치의 이데올로기 통합적 제도인가, 분열적 제도인가

 

8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가 유일한 자본주의 모델인가 역사 종말론의 오류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성공했나 스웨덴, 독점자본과 복지국가의 결합 제3의 길 정치가 실패한 이유 세계 금융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실패 새로운 대안을 찾아서

 

9 민주주의와 공정한 조세

세습이 만든 억만장자 초부유층이 지배하는 사회251 미국의 승자 독식 정치 부의 재분배를 위한 최고의 발명 세금이 경제를 망친다? 세금 많은 스웨덴의 성공 비결 그리스가 파산한 진짜 이유 공정한 조세가 필요하다 세금을 어디에 쓰는가

 

10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복지국가와 노동권 경제정책은 정치의 다른 수단 중산층 경제학과 포용적 자본주의 사회통합적 제도의 중요성

 

과제 1 좋은 일자리 확대와 비정규직 차별 해소

과제 2 교육, 직업훈련과 사회 투자 강화

과제 3 최저임금 인상과 생활임금 확대

과제 4 누진세를 강화하는 조세 개혁

과제 5 보편적 사회보험의 전면 실행

과제 6 공공부조 개혁과 최저생활기준 향상

과제 7 주거비용 감소와 공공임대주택 증설

과제 8 보편적 아동 수당 도입과 아동 빈곤 근절

과제 9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한 여성 친화적 사회정책 추진

과제 10 보편적 청년 수당과 청년 펀드 신설

과제 11 모든 시민을 위한 참여 소득 필요

과제 12 노동조합의 역할과 노사정 사회적 협의 제고

과제 13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운동 지원

과제 14 비례대표제 확대와 합의 민주주의 도입

과제 15 국제개발원조 확대와 지속 가능한 발전 추구

 

맺음말__평등의 정치, 복지의 정치

사회 정의와 평등을 위하여 불평등과 싸우는 전략 새로운 현실적 이상주의

 

주석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1. 문제는 경제가 아니다

1:99의 사회에서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경제적 기준으로만 본다면 한국은 성공한 국가다. 1960년대에 80달러 정도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2016년에는 3만 달러에 육박했다. 그러나 OECD가 지속적으로 측정한 한국인의 삶의 만족수준은 하위권이다. 경제적 성공을 가장 빨리 이룬 나라가 정신적 불행감에 직면했다는 역설적 현실이 바로 한국의 비극적 자화상이다. 이 지독한 한국의 역설이 왜 발생했을까? 정치인들은 1인당 GDP 2만 달러, 4만 달러 시대를 외쳤지만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불평등한 분배와 그로 인한 불평등 사회에 있었다.

 

조지 오웰의 말처럼 동물들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는데 농장만 배를 불려 가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2011년에 월 가를 점령한 시위대는 우리는 99%!”라고 외치며 상위 1%에 집중된 부의 불평등을 지적했다. 미국의 상위 1%가 나라 전체 부 가운데 3분의 1을 차지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인구의 1%가 개인 토지의 55.2%, 인구의 10%97.6%를 소유하고 있다. 이처럼 불평등은 개인이 노력하지 않아 생긴 문제가 아니다. 불평등은 정치적 결정, 사회의 암묵적 방조 속에 어느새 하늘 끝까지 올라간 잭의 콩나무와 같다. 이는 개인뿐 아니라 경제성장에 해악을 끼치고 파괴적 갈등을 유발해 사회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불평등에 맞서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도덕적 의무이며, 많은 사람이 함께, 오래 살아가기 위해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2. 익숙한 불평등의 이데올로기 뒤집기

왜 우리는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나

우리는 불평등을 기쁘게 생각하고,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재능과 능력에 따라 통로와 표현이 주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의 말이다. 이런 말의 주술로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는 불평등이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게 만들고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그리하여 효율성을 높인다고 주장했다. 부자의 세금을 줄여야 기업의 투자가 늘고 그래야 가난한 사람에게도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낙수 효과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주류 경제학자가 두루 포진한 IMF2015년에 출간한 보고서에서 150여 개국의 사례를 분석하고 낙수 효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많은 노동자가 언젠가 돌아올 내 몫을 믿고 열심히 일해 전체 소득이 증가했지만, 그 혜택은 극소수 상위층에 돌아갔다. 한국 사람이 믿어왔던 교육으로도 계층 상승은 어렵다. 그 사다리는 걷어치워 진 지 오래다. 부의 세습과 그로 인해 양질의 교육 기회를 더 얻은 상위층과의 간극은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같은 명문 대학에 다녀도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학생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학자금 대출이 쌓여 가는 학생의 출발선은 결코 같지 않다. 이 책은 낙수 경제학을 비롯해 순수한 능력주의, 자연적 엘리트주의, 개인주의적 긍정 심리학 등 그간 우리가 갇혀 있었던 불평등에 관한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낱낱이 분석해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한국의 불평등은 극에 달했다. 정부의 정책으로 누가 이득을 얻는지, 누가 이득을 잃는지를 따져야 한다. 성장과 분배가 대립하지 않고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제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이분법적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거에 한국 경제가 성장의 양적 측면에 치중했다면 이젠 성장의 질과 종류를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소득 주도 모델 등 높은 수준의 포용적 성장과 기술 발전 효과로 인한 혁신적 성장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니만큼 경제성장의 목표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3. 불평등한 대한민국의 새판 짜기를 시작하라!

보편적 복지 정책은 시혜를 베푸는 포퓰리즘 정책이 아니다

이 책의 1부는 불평등이 만든 다양한 사회문제와 현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2부는 불평등의 원인을 평가하고, 3부는 지나친 불평등 완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를 제시한다.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겠지만,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는 희망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저자 김윤태 교수는 불평등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해 그 실행을 촉구한다. 저자는 빈곤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관심을 쏟고 꾸준히 연구하는 사회학자다. 역사가가 과거를 복원하고 기록하듯 사회학자는 현재를 증언하고 고발할 의무가 있다. 그는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명확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관되게 논지를 전개해 나감으로써 오늘날 사관史官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불평등 문제 해법을 찾고 현실성 있는 해법을 제시한 점은 이 책의 특장점이다. 3부에서 제시한 열다섯 가지 과제를 풀어간다면 불평등이 만든 사회문제를 모두 없애지는 못해도 불평등을 줄이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특히 조세 개혁, 복지 정책에 대해 국민의 이해를 도와 설득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복지국가는 산타클로스 국가가 아니다. 복지 지출의 바탕에는 시민의 세금과 사회보험 기여금이 있다. 결국 내가 내는 돈으로 혜택을 받는 것이다. 사회보험의 원리에 따라 질병, 산업재해, 실직, 은퇴 등 사회적 위험에 빠진 사람을 서로 돕는 것이다. 누구나 빈곤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 예방이 중요하다. 전염병이 퍼지면 건강한 사람도 질병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예방주사를 맞는 것과 같다. 몸이 약해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사후에 치료하는 것이 선별적 복지다. 이처럼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는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보편적 복지를 포퓰리즘이란 단어 속에 묶어 둔다면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국민을 구하고 복지국가로 갈 기회를 또 한 번 놓치게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복지 정책 추진과 관련해 시혜적인 관점에서 탈피해 국가 발전 전략의 핵심 요소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복지 정책을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에게 정부가 베푼다는 인식이 아닌 국민 기본권관점에서 접근하자는 것이다. 이 책 역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고 복지국가로 한 발 내딛기 위해서 널리 퍼진 이 같은 오해를 줄이고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불평등을 말한 현인들]

- 불평등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위정자는 백성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않은 것을 걱정하며, 백성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불안해하는 것을 걱정하라.- 공자(고대 중국 사상가), 논어

 

부자와 가난한 자의 불균형은 모든 공화국의 가장 오랜 치명적 우환이다. - 플루타르코스(고대 로마 역사가), 영웅전

 

어떤 시민도 다른 사람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는 안 되며, 어떤 시민도 자기 자신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는 안 된다.- 장 자크 루소(프랑스 사상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큰 부자 한 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애덤 스미스(고전 경제학의 창시자), 국부론

 

불평등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자원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우리의 역량, 건강, 자존감, 자아의식을 손상시킨다.- 예란 테르보른(스웨덴 사회학자), 불평등의 킬링필드

 

책속으로

마태복음의 포도밭 우화가 유명하다. 포도밭 주인은 장터의 일꾼들에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포도원에서 일하게 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 보니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장터에 있어 그들도 일하게 했다. 주인은 해 질 무렵에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또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왜 하루 종일 일거리도 없이 여기에 서 있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를 써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주인은 그들에게도 포도밭으로 가라고 말했다. 저녁이 되자 포도밭 주인이 관리인을 시켜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자,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더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들은 집주인에게 불평했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땡볕에서 하루 종일 고생한 우리와 그들을 똑같이 대우합니까.” 그러자 주인은 나는 당신에게 잘못한 게 없소. 당신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나와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몫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마지막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과 똑같이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포도밭의 우화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우화에는 인간이 평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분명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오후 늦게야 일한 사람의 노동시간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주인이 동일하게 준 품삯은 하루를 살 수 있는 생활임금일 수 있다. 더욱이 늦게 일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게으른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일할 기회를 기다렸다. 이런 점에서 누구나 일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를 보여 준다. 오늘날 최저임금도 노동하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임금을 정한 것이다. 나아가 국가는 모든 국민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맺음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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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에 따라서 교육, 경력과 같은 인적자본이 월소득에 미치는 정도가 다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타인을 고용하는 자본가의 경우 교육이나 경력은 월소득에 영향을 미치지지 못하고 있다. 교육의 효과가 크게 나타나고 있는 계급은 중간계급으로서, 교육을 통한 소득증대가 중간계급에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계급간 소득에 미치는 인적자본의 효과가 다르다는 점은 계급이 단순히 인적자본이나 교육과 독립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인적자본과 소득을 매개한다는 계급 매개 가설을 증명하는 것이다. …… 그러나 한국 남성의 경우 계급의 매개 효과보다는 계급의 직접 효과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이유는 교육과 계급과의 관계가 매우 높은 학벌주의사회이기 때문에 교육 계급 소득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가 서구사회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 p.155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중간계급이 향유하였던 경제적 풍요와 중간계급이 선호한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주의가 더 이상 중간계급이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경제적 풍요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중간계급은 이를 막아낼 아무런 조직적,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지난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의 중산층이 보여주었던 보수성으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러한 결과는 역설적으로 한국의 중산층이 스스로 만든 결과이자,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그 이전에 형성되었던 1987년체제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 위기는 노동계급과 중산층 모두의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한 시기이다. 새로운 대안은 기업의 이윤만을 가장 우선하는 경제 시스템 작동 원리로 삼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기업과 피고용자 그리고 지역주민이 공생하는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가 지속되는 한 중산층의 불안정은 더욱 커질 것이고, 더욱이 보호막이 없는 중산층의 몰락은 전 사회적으로 꿈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에게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중산층에게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두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제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과제가 되었다. --- pp.266-267 한국의 계급과 불평등/저자 신광영|을유문화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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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사회에 무관심하지 말고 기꺼이 분노하라!

소득불균형과 빈부격차의 심화는 경제위기를 초래하고 민주주의와 시민의 삶을 파괴하는데도, 우리는 불평등사회에 너무나 무관심하다. 1929년 대공황과 2008년 경제위기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시점에 터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르크의 말처럼 빈부격차는 모든 국가를 갉아먹는 가장 오래되고 치명적인 병폐이다. 평등한 사회일수록 성장률이 높고, 오랫동안 경제 성장이 지속되며, 경기 침체에서 훨씬 빨리 회복된다는 연구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소득불균형과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탐욕스러운 1%에 맞서 99%는 무엇에 분노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1%의 재벌기업과 정치권력에 맞서 99%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한민국 헌법 1192항에 따르면, 국가는 적정한 소득분배와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중산층 몰락, 영세한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양산, 재벌기업 독식으로 인해 부의 쏠림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2011년 한 조사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계층간 소득격차가 가장 큰 나라는 우리나라였다.

소득불균형으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는 민주주의와 시민의 삶을 파괴한다. 보통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악화시키고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또한 평등한 교육 기회와 안정적인 주택 공급과 의료환경을 무력화시킨다. 이 모든 일이 극심한 빈부격차에서 시작된다면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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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부패의 기원 / 저자 유종성|동아시아 |2016.09

문제는 불평등이다. 한국 타이완 필리핀 비교연구

목차

 

추천의 글

한국어판 발간에 부쳐

감사의 말

 

1장 서론: 문제 제기, 핵심 주장과 방법론

부패와 발전

동아시아의 부패와 발전

부패와 민주주의

부패, 후견주의 그리고 포획

동아시아에서의 부패의 원인들

출발점: 민주주의에서의 불평등과 부패

비교역사 분석을 위한 논거

사례 선택: 왜 한국, 타이완, 필리핀인가?

책의 구성

 

2장 민주주의, 불평등, 그리고 부패: 이론과 가설

부패의 주인-대리인-고객 모델

대리인 문제로서의 부패

후견주의, 역선택과 부패

부패한 고객과 엘리트 포획의 문제

민주주의, 불평등과 부패

후견주의의 원인으로서의 불평등

포획의 원인으로서 불평등

민주주의와 독재국가에 있어서 불평등과 부패

일반 가설들

 

3장 한국, 타이완, 필리핀의 부패 상대적 수준, 추세와 가능한 설명

부패의 측정

한국, 타이완, 필리핀에서 부패의 상대적 수준과 추세

1940년대 후기(해방 초기) 시기부터 1980년대 초기까지

1986/1987년 민주주의 전환부터 현재까지

요약

가능한 설명들

한국, 타이완, 필리핀의 불평등-부패 가설 검토

불평등 감소에 있어서 토지 개혁의 성공과 실패

민주주의, 선거 그리고 후견주의

관료제, 엽관주의와 부패

산업 정책과 정부-기업 관계

반부패 개혁의 엄격함과 효과성

 

4장 불평등, 토지 개혁과 경로 의존성의 기원

한국의 성공적 토지개혁

타이완의 성공적 토지개혁

필리핀의 토지개혁 실패

토지개혁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

토지개혁의 성공과 실패의 결과

 

5장 선거, 후견주의와 정치적 부패

필리핀: 지속적인 후견주의

필리핀의 초기 민주주의 시기(1946~1972)

필리핀의 권위주의 시기(1972-1986)

필리핀의 마르코스 이후 민주주의 시기(1986~현재)

한국: 프로그래머티시즘의 발전

한국의 초기 선거 민주주의 시기(1948~1972)

한국의 권위주의 시기(1972~1987)

한국의 민주주의 시기(1987~현재)

타이완: 프로그래머티시즘의 발전

타이완의 권위주의 시기(1949~1987)

타이완의 민주주의 시기(1987~현재)

후견주의의 원인

후견주의의 결과

필리핀과 한국의 초기 선거 민주주의 시기

세 국가의 권위주의 시기

1980년대 후반 이후 민주주의 시기

 

6장 관료제, 엽관주의와 관료 부패

필리핀 관료제에서의 엽관주의 발전

한국 관료제에서의 능력주의 발전

타이완 관료제에서의 능력주의 발전

능력주의와 엽관주의의 원인

능력주의와 엽관주의의 결과

 

7장 산업 정책, 포획과 기업 부패

필리핀의 기업-정부 관계와 산업 정책

포획된 민주주의(1946~1972)

약탈 정권과 실패한 수출 지향 산업화(1972~1986)

포획된 민주주의의 복귀와 자유주의 개혁들 (1986~현재)

한국의 기업-정부 관계와 산업 정책

국가 자율성과 수입 대체 산업화에서 수출 지향 산업화로의 전환

*박정희의 재벌 중심 중화학 공업 전략

*민주화와 재벌의 포획

민주적 자율성 또는 포획?

타이완의 기업-정부 관계와 산업 정책

권위주의적 국가 자율성과 산업 정책

자유화, 민주화 그리고 국가 자율성에 제기된 도전

국가 자율성과 포획의 원인

기업 지배 구조와 부패에 대한 국가 포획의 영향

 

8장 일반화를 위한 국가 간 증거

데이터

도구변수

국가 간 증거

 

9장 결론

주요 발견들

부패 연구에 대한 공헌

신생 민주주의에 대한 정책적 함의

비교정치학과 정치경제학 문헌에 대한 함의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부패 불감증에 빠진 대한민국 문제는 김영란법이 아니라 불평등이야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부의 양극화

부정부패에 무뎌진 대한민국의 현주소

김영란법을 탄생시키다

공기업에 자녀의 채용을 청탁하다 적발된 유력자들의 뉴스가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다. 취업난 속에서 부정 채용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박탈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사업권을 따기 위해 사법 권력에 전방위적 로비를 펼치는 CEO, 사건 무마 청탁을 전제로 벤츠 승용차 등 각종 편의를 제공받는 현직 검사 등. 공공 부문, 민간 부문, 여야 정당, 입법, 사법부를 망라한 부패 뉴스가 연이어 터지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이권을 둘러싼 뇌물 수수, 전횡, 배임 관련 소식이 보도된다. 유력자와 그 친인척들이 저지른 범죄는 대부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이 사회의 부패는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구조화된 부패 속에서 흙수저’, ‘갑질’, ‘헬조선이라는 유행어 또한 실천력이 거세된 힘없는 장탄식으로만 소비되었다. 3년 전 처음 등장한 김영란법또한 법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불평등에 지친 사람들의 분노를 모아내는 뜻밖의 키워드가 되었다. 대중이 부패한 권력 엘리트에게 뭇매를 들고, 불평등한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영란법김영란법 현상은 이렇게 구분된다.

 

928일 시행되는 김영란법의 정식 명칭은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한 여론 조사 기관에 따르면, 이 법을 찬성하는 여론이 70.4%로 압도적인 공감을 사고 있으며 법의 시행으로 인해 부패 척결이 기대된다는 응답 또한 50%를 넘어섰다고 한다. 권력형 비리에 무덤덤해진 것처럼 보였던 여론의 물밑에 숨겨져 있던 분노는 이렇게 의 시행으로 응축되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키우는 것에 앞서 든든한 뒷배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해진 현실이 빚어낸 형국이다.

 

불평등이 먼저일까, 부패가 먼저일까?

불평등이 먼저이다.

저자 유종성 호주 국립대학교 교수는 기존 상식을 깨고 부패와 불평등 간의 인과적 방향성을 새롭게 뒤집어 주장한다. “부패가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이 부패를 초래한다.” 책은 부패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적 이득을 얻기 위한 공직의 남용.’(본문 37) 그런데 부패는 부패 행위 자체를 처단하는 법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접대 문화를 일소하면 부패 문제가 해결되어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까. 책은 사회과학 특유의 증명으로 부패에 관해 심도 있는 토론장으로 안내한다.

 

이에 따르면 불평등이 심할수록 아무리 좋은 민주주의 제도를 갖추고 있어도, 개혁의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소수의 권력 엘리트들과 다수의 일반인 모두가 부패 행위에 다가가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리에, 각종 특혜에서 소외된 일반인들은 배타적인 혜택을 얻기 위해 비리에 가까워진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는 후견인에 의존하는 후견주의,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국가가 좌지우지되는 엘리트 포획 등이 다수에 의해 견제되는 구조가 갖춰진다. 결국 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사람이다. 제도가 놓여 있는 불평등한 구조를 지켜봐야 한다. 극심한 불평등은 제도의 효율성을 무력화시킬 수도, 극대화시킬 수도 있는 주요 기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불평등이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흔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로 선거 등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핵심적인 제도에서 부패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영란법이 아니라 김영란법이 제대로 시행되기 힘든 양극화된 경제구조일 수 있다.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2006년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던 Democracy, Inequality and Corruption-Korea, Taiwan and Philippines Compared를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1984,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정책연구실장과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활동가로서 금융 실명제, 기업 지배구조 개선, 정치자금 투명화 등 경제 민주화와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공공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캠퍼스를 거쳐 현재 호주 국립대학교 정치 및 사회변동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필자가 공공정책학으로 학위를 받았음에도 비교정치와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이다. ‘

 

저자의 논문 불평등과 부패에 관한 비교연구2005, 미국의 일류 학술지, 미국 사회학 리뷰에 게재되면서 많은 후속 연구에 인용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2006, 부패, 불평등, 사회적 신뢰의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정부대학원에서 공공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 지도 교수였던 로버트 퍼트넘의 권유로 한국과 타이완, 필리핀 사례연구를 추가하게 된다. 그중의 한 장이 단행본으로 발전했다.

 

저자의 지도 교수, 로버트 퍼트넘은 우리 아이들-빈부 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Our Kids: The American Dream in Crisis, 나홀로 볼링등의 저자로서 사회적 자본을 역설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정치학자이다. 저자는 로버트 퍼트넘이 우리 아이들에서 지적한 미국 사회에 만연해진 부의 세습을 한국이 닮아가고 있으며 소위 말하는 개천에서 용나는시대가 마감하면서 기회균등의 관념이 사라졌다고 꼬집었다.

 

비교연구로 객관화된 부패 현실

우리가 몰랐던 토지개혁의 효과

저자는 통시적으로 한국과 타이완, 필리핀의 부패 역사를 비교한다. 같은 불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세계적 베스트셀러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와 견주어 이 책이 갖는 장점이 여기에 있다. 서구와 달리 식민지 역사를 겪고, 친미 성향을 지닌 채 50년대 이후 발전국가로 발돋움했던 동아시아 세 국가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을 토대로 각 나라의 불평등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년 공표되는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지수CPI (0(가장 부패)10(가장 덜 부패))등을 보면 한국은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보다는 부패가 덜하지만, 대부분의 선진국보다는 부패 수준이 높다고 집계된다. 필리핀, 타이완과 비교해보면 2011년 기준, 한국의 CPI5.4, 필리핀의 CPI2.6, 타이완이 6.1로 한국은 필리핀과 타이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세계은행의 부패통제지수 CCI (평균은 0이고 표준편차는 1로서 값이 높을수록 부패 수준이 낮다는 뜻)는 필리핀 ?0.78(백분위 23), 한국 0.45(백분위 70), 타이완 0.90(백분위 78)로 필리핀의 부패 수준은 세계 평균보다 높고, 한국과 타이완은 세계 평균보다 낮다.

 

세 국가 모두 1945년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맞이했고 당시 비슷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필리핀이 타이완과 한국보다 교육 수준도 높았다그렇다면 왜 지금 이렇게 필리핀의 부패 수준이 현저하게 심해진 것일까? 저자는 토지개혁의 역사에서 그 배경을 설명했다. 필리핀은 토지개혁에 실패했고, 한국과 타이완은 성공했다. 이후 한국과 타이완은 공평한 성장을 이루었고 필리핀은 과거 지주 세력이었던 소수 가문이 지역의 시장부터 학교 청소부까지 모든 공공 일자리를 독점할 정도로 부패가 심해졌으며 선거 운동에도 돈을 가장 많이 쓰는 나라로 악명을 떨쳤다. 정책으로 승부하는 경쟁이 아닌 비공식적 선거운동 자금으로 제도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토지개혁은 소득 분배에 있어 상당한 평등화 효과를 낳았다. 또한 급속한 교육의 확대를 불러일으켰으며 지주 권력 해체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토지개혁으로 한국은 경작 토지 대부분을 농민이 직접 경작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이 경작하는 모든 토지를 소유한 가구 비율은 194513.8%에서 196471.6%로 급증했다. 소작농 비율은 194948.9%에서 19645.2%로 떨어졌다. 이와 동시에 소작 토지는 194565%에서 19518%로 떨어졌다. 한국은 역사상 가장 급격한 개혁으로 평가받는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농촌 계급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농지개혁으로 이룬 평준화의 성과가 사라지고 부와 소득 분배의 양극화가 다시금 심각해지고 있는 오늘날 농지개혁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회고를 넘어서 현재와 미래에 대해 중요한 정책적 함의를 가진다고 본다.” (저자 유종성 교수의 2016-09-21자 칼럼)

 

저자는 한국의 토지개혁이 식민지 시대 심화되었던 불평등을 어느 정도 바로 잡아놓았고, 그 토대 위에서 경제 개발 드라이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효과(공정한 성장)를 거둘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저자의 최근 칼럼이 시사하듯 마치 토지개혁 이전으로 돌아가는 듯한 부의 세습, 양극화된 작금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경자유전의 원칙으로 진행되었던 토지개혁의 평준화 효과를 시의성으로 다시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책 구성과 내용 엿보기

책은 총 9420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1서론: 문제 제기, 핵심 주장과 방법론에서는 불평등과 부패의 인과적 방향성을 확실하게 제기한다. 2민주주의, 불평등, 그리고 부패: 이론과 가설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좋은 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원인으로서의 불평등부패를 고찰한다. 3한국, 타이완, 필리핀의 부패 상대적 수준, 추세와 가능한 설명에서는 국제기구들의 객관적 수치를 통해 한국, 타이완, 필리핀의 과거, 현재를 가로지르는 부패 수준을 짚어보고 해석하고 4불평등, 토지개혁과 경로 의존성의 기원에서는 세 국가의 토지개혁 성공여부로 인해 다져진 평등 수준과 그로 인한 개발의 효과에 대한 설명이, 5선거, 후견주의와 정치적 부패는 소수의 엘리트가 민주적 제도인 선거 제도를 어떻게 자의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사례가 담겨 있다. 6관료제, 엽관주의와 관료 부패, 7산업정책, 포획과 기업 부패, 8일반화를 위한 국가 간 증거에서는 사회과학자로서 저자가 연구에 사용한 도구변수와 증명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9결론에 이르러 1장에서 제기한 문제의식과 가설이 신뢰할 수 있는 결과로써 다시 재정리된다.

 

책속으로

불평등은 부패를 만연하게 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불평등과 부패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기존 부패 관련 문헌의 다수가 불평등에 대해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큰 정부가 부패를 유발한다는 이유로 민영화와 규제 완화 등 작은 정부를 위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제시한 경우가 많았다. 필자의 연구는 이러한 접근이 편협하고 잘못된 것임을 밝힌 것이라 큰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p.12

 

오늘날 한국은 피원조국으로부터 원조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세계 최초의 사례로서 한국의 발전 경험을 후발 개발도상국들에게 전수한다면서 새마을 운동 수출을 강조하고 있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농지개혁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가난뿐 아니라 극심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에게 한국, 타이완, 일본 등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이 공통으로 경험했던 농지개혁이 이후 공평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p.13-14

 

불평등과 부패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경험적 연구들에 대한 실망에서 시작되었다. 필자에게 있어서 부패는 경제 발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규범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략) 필자는 부패의 기능성을 주장한 일부 부패 관련 초기 연구들의 문헌에 동의할 수 없었다. 부패가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후기 연구들의 경험적 발견에 안도했다.--- p.18

 

필자는 부패에 대한 민주주의 효과는 불평등에 달려 있다고 했는데, 부분적으로 높은 수준의 불평등이 프로그램적 경쟁보다 후견주의 경쟁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불평등이 증가하면 엘리트는 일반적으로 프로그램적 경쟁, 특히 좌파 정당의 발전을 두려워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표를 매수할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한편 대규모의 가난한 인구는 배타적인 혜택을 얻기 위해 표의 후견주의적 교환을 선호할 것이다--- p. 168

 

이전의 경험적 연구들은 즉, ‘부패로부터 불평등으로불평등으로부터 부패로의 상호 인과 영향을 제시했다. 이 책의 초점은 후자에 있다. 필자는 특히 민주주의에서 왜, 어떻게 경제 불평등이 부패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경제 불평등이 정치와 경제 엘리트로 하여금 후견주의, 엽관주의, 포획에 의존하려고 하는 유인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했다. 또한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대규모 빈곤 인구가 정치인과 후견주의적 교환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동아시아 3개국 비교역사적 분석과 내생성 문제를 해결한 국가 간 양적 분석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 p.373

 

 

탐욕의 시대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저자 장 지글러|역자 양영란|갈라파고스 |2008. 원제 L'empire de la honte

들어가는 말 - 다시 연대만이 희망이다

        

1.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유토피아를 꿈꾼 사람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가난

제국의 존재 이유, 전쟁과 폭력

죽음으로 내몰린 국제법

제국과 성전주의자들의 야만성

 

2. 무엇이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부채, 그 추악한 악성 종양의 실체

기아, 부조리와 파렴치의 극치

 

3. 에티오피아,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부유한전쟁 과부, 알렘 체하이에

커피 가격의 폭락, 시다모의 부조리한 녹색 기아

연대, 저항의 또 다른 이름

 

4. 브라질, 혁명은 계속된다

룰라, 가난한 노동자에서 혁명의 지휘관으로!

민주 혁명의 핵심 사업, 기아 제로 프로그램

외채와의 전쟁

 

5. 탐욕의 시대는 어떻게 봉건화되는가?

신흥 봉건제후,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

유전무죄 무전유죄, 가진 자가 이기는 세상

유전자 변형 생물, 불공쟁 경쟁의 대표주자

베베이의 파렴치한 문어, 네슬레 왕국

노동조합은 안 돼!

돈 없으면 마실 수 없어요!

후안무치한 제후들

인권도 좋지만, 시장이 더 좋아!

 

끝맺는 말 - 다시 시작하자

저자 후기/ 옮긴이의 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이자 실천적인 사회학자이며, 기아문제에 관한 저명한 연구자로서 오랜 기간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해온 열정적인 이력의 소유자 장 지글러. 그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이어 한국에 두 번째 전언을 보내왔다. 탐욕의 시대-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이하 탐욕의 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전작인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형식을 빌려 기아에 관한 진실을 알기 쉽게 조목조목 풀어놓은 책이라면, 탐욕의 시대는 그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누가 이 세계의 빈곤화를 주도하고 있는지, 부의 재편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기아와 부채가 가난한 자들의 발목을 어떻게 옭아매고 있는지 등의 내용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특히, 이른바 신흥 봉건제후들이라 불리는 거대 민간 다국적 기업들과, IMF, IBRD, WTO 등 시장원리주의와 세계화를 맹신하는 신자유주의적 국제기구들, 무기를 팔아 돈을 벌고 희귀재와 자원을 이용해 전쟁과 폭력의 조직을 일삼는 제국, 사적 자본의 축적을 위해 국가의 미래는 나 몰라라 하는 일부 부패한 권력층의 실체를 고발하고, 그에 대항한 전 세계 시민들의 즉각적인 연대를 촉구하고 있다. 객관적인 통계자료, 냉철하고도 논리적인 분석, 지글러 특유의 거침없는 언변이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책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1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일부 혁명가들의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살펴보고, ‘인간의 행복을 열망한 그들 투쟁의 역사가 200년이 지난 현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생각해본다. 더불어 거대 다국적 민간 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세계의 봉건화 추세와 이들에 의해 철저히 구조화되고 있는 전쟁과 폭력의 사례들을 들여다본다. 2무엇이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에서는 가진 것 없는 약자들의 삶을 가공할 위력으로 파괴하고 있는 부채와 기아의 원인과 배경, 그 심각성을 살펴본다. 3에티오피아,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4브라질, 혁명은 계속된다에서는 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커피 가격의 폭락 정책으로 나라의 온 경제가 파탄나버린 에티오피아의 상황과, 천문학적인 외채로 인해 국민의 대다수가 빈민으로 전락한 브라질의 현재를 돌아본다. 동시에 이들 나라에서 모색되고 있는 새로운 연대의 움직임을 알아본다. 끝으로 5탐욕의 시대는 어떻게 봉건화되는가?에서는 첨단기술과 막대한 자본, 강력한 연구소들로 무장한 민간 다국적 기업들이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를 어떻게 고착화하고 있는지 해당 기업의 실명과 실제사례를 통해, 자본에 눈 먼 자들의 이중성을 낱낱이 해부한다.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 말미의 저자 후기역시 빼놓을 수 없다.

 

다시 봉건화되는 세계

오늘날 인류가 처한 비참함의 정도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하다. 지글러에 의하면 “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1천만 명 이상이 해마다 영양 결핍이나 각종 전염병, 오염된 식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이 희생자들의 50퍼센트는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6개국에서 발생하며, 이 수치의 90퍼센트가 남반구 국가들 42퍼센트에 집중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희생이 재화의 객관적인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재화의 공평하지 못한 분배, 다시 말해 인위적으로 조작되는 가난에 의한 것이라는 데 있다. 이를 관장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과거보다 훨씬 강력하고 냉소적이며, 예전에 비해 한결 야만적이고 교활한 새로운 봉건 지배 세력“?조업, 은행업, 서비스업, 상거래에 종사하는 거대 다국적 민간 기업들이다. ‘탐욕의 시대를 지배하는 이들 봉건 군주들은 이익의 극대화라는 논리에만 복종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희귀재를 조작해나간다. 이렇게 조직화된 재화의 희귀성으로 말미암아 해마다 지구상에 사는 수많은 인간들의 삶은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

 

제국이 주도하는 전쟁과 폭력은 또 어떠한가? 지글러는 재화의 희귀성이 지배하는 제국에서는 전쟁이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계속된다고 말했다. “전쟁은 하나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인 일상이며, “일시적인 이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제국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이들 제국은 무기를 팔아 돈을 벌고, 자원과 공공재의 사유화를 통해 구조적인 폭력을 생산해낸다. 지글러는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의 극히 일부만 투자하더라도 버림받은 지구상의 주민들을 절망으로 몰아가는 ?해를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2000년을 기준으로 1년 동안 전 세계가 군비로 지출하는 금액은 약 7,800억 달러에 이른다. 이 금액은 매해 증가일로에 있다. 하지만 해마다 850억 달러씩 10년 동안 투자를 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기초적인 교육과 기초적인 의료, 적절한 영양, 식수, 기본적인 위생 시스템 등을 보장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적절한 산부인과 치료도 받을 수 있다니. 참으로 씁쓸한 현실이다.

 

이렇듯 탐욕의 시대를 정의하는 일부의 통계들은 우리 사회의 빗나간 가치관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우리들 자신 스스로를 몹시 무력하게 만든다. 유엔은 백악관의 대변인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제법은 유명무실해졌으며,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전 세계의 테러와의 전쟁은 끝없이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신흥 봉건제후들이 조직하는 구조적 빈곤의 희생양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으며, 한 줌의 희망마저 잿더미로 녹아버린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이다. 이쯤에서 묻고 싶어진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정녕 우리 곁에 존재하는가? 천문학적인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브라질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희망의 모색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부자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비용을 대기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 남반구가 북반구, 특히 북반구의 지배계층을 위해 돈을 댄다. 오늘날 북반구가 남반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부채를 제공하고 그에 대해서 받는 대가이다.

 

지글러는 위의 상황을 역설적인 한마디로 요약한다. “한 나라의 국민들을 노예 상태로 만들어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기관총 네이팜탄, 탱크 따위는 필요 없다. 부채가 그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부채에 따르는 원리금 지불 업무(이자와 일부 원금의 상환)는 채무국 국민총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때문에 공립학교나 공공병원, 사회보험 등의 사회투자에 소요되어야 할 예산은 거의 남아나지 않는다.” 부채의 멍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깨에 떨어지고, 오직 이들만이 그 멍에를 짊어진다. 부채는 마치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종양과 같아서 끊임없이 자라나고 돌이킬 수 없이 불어난. 악성 종양은 제3세계 국가의 주민들이 가난과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방해한다. 아니, 오히려 이들을 죽음으로내몬다. 따라서 상당수의 기아는 부채가 낳은 직접적 산물이다. 그리고 지글러의 말처럼 영양 결핍과 기아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21세기 최대의 비극이다. 기아는 어떤 이유나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부조리와 파렴치의 극한 상태이며 나아가 끝없이 되풀이되어온 반인류 범죄이다. 현재 지구상에서는 5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기아 또는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2007년 기아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같은 해 일어난 모든 전쟁의 사망자를 더한 수보다 많다는 것은 자못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러한 부채와 기아의 악순환에 멍들어가는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라틴아메리카에 위치한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브라질이다.

 

브라질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곡물 수출 국가이자 서류상으로만 보면 식량 면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로 분류된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전연 다르다. 브라질 내부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수천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심각한 만성 영양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브라질의 농산물 수출이 대부분 외국 기업들에 통제되고 좌지우지되고 있으며, “과거 군사 독재정권과 이와 결탁한 허수아비 대통령들이 수출입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유럽이나 일본, 북미 지역 민간은행들로부터 돈을 마구 끌어다 쓴덕분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부채를 갚아야 하는대다수의 국민들이 빈민으로 전락한 까닭이다. “군사 독재정권 이후에 들어선 대통령들은 부패를 조장했으며, 수익성이 높은 공공기업을 외국 자본에게 유리하도록 민영화해버렸다. 그 결과 도시엔 실업자들과 거지들이 득실거리고, 쓰레기 하치장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이것이 오늘 브라질이 처한 현실이다. 그러나 희망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은 듯 보인다. 이 절망의 땅 위 한편에선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 룰라를 필두로, 민주주의적, 반자본주의적 평화 혁명이 멋지게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룰라는 3세계의 그 어느 국가도 부채를 온전히 상환할 능력이 없다고 고백하며 3세계 국가들의 발전 전략과 부채 상환은 결코 양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즉각적으로 부채 상환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채 상환을 거부하고 절약하게 되는 돈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발전 기금, 교육이나 공중보건, 농업개혁 등 요컨대 제3세계 국가들의 진보를 위해 필요한 발전 기금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채권국 및 IMF 같은 국제기구의 격렬한 저항을 받고 있다. 하지만 룰라는 굴하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냈다. 그것은 바로 채무국끼리의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룰라는 어떤 나라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며, 외채 문제에 관한 토의는 은행과 정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정부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장 지글러 역시 부채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3세계 국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전략적 수단으로 채무국끼리의 동맹체 구성을 제시하고 있다. 거기에 노예화된 민중들이 중심이 되는 사회단체 지도자들연대의식을 내세우는 북반구의 강력한 시민단체들과 연합할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영국과 독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쥐빌레2000’ 같은 단체가 IMF를 비롯한 채권 기관으로부터 부채 경감에 대한 최소한의 양보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연대의 힘이 지닌 놀라운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브라질 내부에서도 이러한 시민사회의 활발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거기에 채무내역에 대한 연합 감시체제 구축 역시 새로운 희망의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룰라는 이 혁명이 어떻게 마무리되느냐에 따라 브라질 인구 18천만 명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물론, 남미 대륙 전체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보다 광범위한 관점에서 본다면 민주주의적, 대중적, 반자본주의적 운동의 미래가 달려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결말은 언제나 그렇듯, 불확실하다.” 하지만 저들 연대의 힘이 불확실한미래를 보다 선명한 희망의 전망으로 하나씩 바꿔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다함께 일어서기 위하여

브라질의 사례에서 보았듯, 우리는 결국 연대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함께 달려야 하고 함께 나눠야 하고 함께 행복해야 한다. 연대는 그 시작은 비록 누군가의 미미한 몸짓이었을지언정 끝내는 거대한 움직임으로 그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이것이 연대가 품은 희망과 믿음의 본질이자 우리가 지난 5월 거리에서 뜨거운 촛불을 함께 든 이유이다.

 

지글러는 이 책의 서두를 프랑스 혁명의 격변기를 온 몸으로 살아냈던 급진적 혁명가들의 외침에 아낌없이 내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많은 혁명가들이 스스로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토록 손에 쥐고자 했던 이데아가 지글러 자신이 끊임없이 굶주림의 문제에 천착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생쥐스트가, 장 폴 마라가, 그리고 자크 루가, 단두대에 오르고, 암살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단 한 순간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그것은 바로 혁명의 영원한 화두이자 모든 꿈꾸는 자들의 열망인 인간의 행복할 권리였다. 그렇다면 이 행복할 권리를 기초하는 가장 주된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먹고살기. 다름 아닌 생존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도 누릴 수 없는 부조리의 극치인 기아와 절대적 빈곤은 결단코 인류의 고려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 탐욕의 시대가 지향하는 바는 아주 뚜렷하다. 이 책은 결국 인간이 누구나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음을 천명하는 책이다. 이 책은 저 스스로의 분명한 목표와 소신을 지닌 오만한 책이다. 책상머리에서만 읽혀지고 금세 잊히기를 원치 않는 책이다.

 

지글러는 투쟁은 아는 것에서 출발하며, 투쟁을 통해서만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을 획득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지식인의 의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의무는 민중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무장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책은 지글러 자신이 얘기한, 그리고 그가 인용한 레지 드브레의 명제를 그대로 실천하고자 한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결코 쉽지 않므 그 실천의 여정은 나눔과 연대라는 희망의 움직임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일굴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오늘 탐욕의 시대에 새로 쓰는 또 하나의 인권선언문이자,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변화를 향한 애절한 기도문이며, 다함께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지성의 대자보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장 지글러의 힘임을 두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책속으로

견디기 어려운 열등감과 무력감으로 똘똘 뭉쳐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는 제3세계의 주민들은 그들이 끌어안고 있는 기아나 부채가 불가피한 것이 아님을 아는 순간 새로운 의식에 눈을 뜨게 될 것이며, 제 힘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불명예로 괴로워하던 굶주린 자, 실업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한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희망이 조금이라도 보이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으로 알았던 굴레가 벗겨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되면 투쟁 의지를 불태우는 반항자, 봉기 세력으로 변신 가능해진다. 수동적인 희생자로 치부되었던 자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적극적인 행동가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변모를 실현시키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pp. 15-16)

 

특정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기아에 허덕이게 만들 때, 자유란 한낱 허울뿐인 유령에 불과하다. 부자가 독점을 통해서 동시대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할 때, 평등이란 한낱 허울 좋은 유령에 불과하다. 혁명의 반동 세력이 나날이 곡식의 가격을 쥐고 흔들어 시민들의 4분의 3이 눈물 없이는 식량을 조달할 수 없을 때, 공화국은 한낱 유령에 불과하다.(- 자크 루) (p. 24)

 

원칙적으로 외채를 요청한 나라는 외채를 얻어서 자국에 투자를 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자국 내 사회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제반 생산력을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차츰 빌려 쓴 돈을 갚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와 같은 논리가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은 점점 더 높은 이자를 물어야 하고, 원금은 원금대로 갚아가느라 점점 더 가난해진다.

외채는 마치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종양과 같다.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이 불어난다. 이러한 악성 종양은 제3세계 국가의 주민들이 가난한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방해한다. 아니, 오히려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p. 93)

 

부채와 기아, 기아와 부채. 악순환을 거듭하는 이 두 가지의 조합에는 출구가 없어 보인다. 도대체 누가 이와 같은 살인적인 조합을 만들어냈는가? 누가 이와 같은 상황을 유지하려 하는가? 이와 같은 교착 상태를 이용해서 천문학적인 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망설일 것도 없이 자본주의가 낳은 봉건주의자들이다. 오늘날 자크 루와 마라, 생쥐스트가 목청껏 타도를 주장하던 투기꾼과 사기꾼, 국민을 굶주리게 하는 모리배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라쿠스 바뵈프가 뿌리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파렴치한 독점꾼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닌다. 우리는 이 세계가 다시 봉건화되어가는 참상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p. 247)

 

우리는 현재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끔찍한 공격을 받고 있다. 그 어떤 나라도, 그 어떤 초국가적인 기구도, 그 어떤 민주주의로도 이 공격에 저항할 수 없다. 경제 전쟁을 벌이는 신흥 봉건제후들은 온 지구를 거덜내고 있다. 이들은 국가와 국가가 지닌 규범적인 권력을 공격하며, 주권재민 사상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며 자연을 망가뜨리고 인간과 인간의 자유를 말살시키고 있다. (p. 328)

 

 

 


굶주리는 세계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 저자 프란시스 무어 라페|역자 허남혁|창비 |2003.10

 

한국어판 서문

영문판 서문

일러두기

죄책감과 공포를 넘어서

첫번째 신화식량이 충분치 않다

두번째 신화자연 탓이다

세번째 신화인구가 너무 많다

네번째 신화식량이냐 환경이냐

다섯번째 신화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여섯번째 신화정의냐 생산이냐

일곱번째 신화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여덟번째 신화자유무역이 해답이다

아홉번째 신화너무 굶주려서 저항할 힘도 없다

열번째 신화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열한번째 신화그들이 굶주리면 우리가 이득을 본다

열두번째 신화식량이냐 자유냐

굶주림에 대한 신화를 넘어서

출처와 참고문헌

참고도서 및 관련단체

옮긴이의 말

 

출판사 서평

 

세계 식량의 날WTO 각료회의

1016일은 제23회 세계 식량의 날이다. 국제적인 협력으로 기아, 빈곤, 영양실조 퇴치를 모색하기 위해 식량농업기구(FAO)가 창설된 지 23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인류의 식량을 책임져야 하는 세계의 농업은 오히려 자본과 정치의 개입으로 점차 자기 기능을 잃어가고, 3세계를 비롯한 전세계 대다수 빈민들은 점점 더 굶주리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5차 각료회의가 열리고 있던 멕시코 깐꾼에서 농업개방협상 반대를 외치다 생을 마감한 고 이경해씨는 한국 농민과 농업이 처한 현실이 제3세계 빈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세계에 알렸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한동안 잊어두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왜 한국의 농민들은 농업개방에 온몸을 던져 반대하는가? 식량은 우리에게 맞바꿀 수 있는 상품인가, 포기할 수 없는 인권인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적경제적 맥락에서 본 식량문제

푸드퍼스트(Food First)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식량과발전정책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집필한 굶주리는 세계: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World Hunger: 12 Myths)는 세계의 굶주림과 식량문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책이다. 그러나 단순히 전문적이고 세세한 각론만을 나열하지 않는다는 데 이 책에 의의가 있다. 민중의 입장에서 서서 굶주림을 생존과 직결된 인권문제로 인식하면서, 식량을 둘러싼 국제적 현실을 치밀히 분석하고 그 정치적 경제적 맥락을 명쾌하게 해설하며 나아가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굶주림을 칼로리 섭취량 부족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해법 또한 숫자(식량원조량, 경제원조 금액 등)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굶주림은 고통, 슬픔, 굴욕, 공포 등의 인간의 감정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세계의 굶주림은 먹을 것이 모자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자연재해 탓도 아니다. 인구가 너무 많아서도 아니다. 굶주림의 원인은 식량과 토지의 부족, 인구의 과잉이 아니라, 다름아닌 민주주의의 부족이다. 우리가 먹을 것에 관해 우리 자신이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황, 즉 소수 거대 자본이 식량을 독점하고 통제하며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현 상황에서는 아무리 기술적인 진보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세계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민중의 굶주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장이 개방되어 자유롭게 무역을 하면 식량은 자연스럽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분배될 것 같지만, 문제는 시장이 사람들의 필요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장은 분명 돈에 반응하며, 경제권력을 집중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시장을 늘리지 말고, 소비자를 늘려야 시장이 제대로 기능을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대안이다. 이 책의 날카로운 비판은 미국의 대외원조에 대한 설명에서 두드러진다. 90년대말까지 미국의 대외원조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결국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면밀히 조사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도주의적인원조를 시행하려면 해당지역의 자원을 해당지역의 주민들이 능동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하며, 결국 원조를 부채 탕감하는 데 쓰도록 하지 않으면 제3세계는 미국과 선진국에 종속될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굶주림과 먹을 것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들

이 책에서는 거대하고 복잡한 식량문제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흥미로운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굶주림과 식량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상식, 신화를 하나하나 설명하고 반박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굶주림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 해결책에 대한 생각을 좌우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책에 실린 열두 가지 대표적인 신화가 사태를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다는 저자들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이미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식량문제에 관해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용 소개서로 자리잡은 이 책은 쉽고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문제의 본질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세계 각국의 생생한 사례들이 풍부히 담겨 있고, 일상적인 차원의 문제제기도 빼놓지 않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식량문제를 이해하면서, 현실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한국의 상황과 최근의 경향을 위주로 한 옮긴이의 꼼꼼한 해설을 장마다 실었고,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을 고 이경해씨를 위한 헌사로 대신하였다. 또한 이 책 전반을 통해 현재 한국의 급박한 현실에 대입해볼 만한 내용들도 많아서, 한국의 독자들이 현실적으로 공감하며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용 요약

첫번째 신화: 식량이 충분치 않다 식량은 모든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을 만큼 풍부하다. 문제는 식량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난한 국가라도 자국민들이 충분히 먹을 만큼 식량을 생산하고 있지만 대부분 선진국으로 수출을 해야 하는 실정이다.

두번째 신화: 자연 탓이다 자연재해에 취약한 것은 늘 가난한 사람들이고 그렇게 만든 것은 인간이다. 자연재해는 최후의 일격을 날릴 뿐이다. 식량생산자원에 대한 접근성, 농업체계 자체의 취약성 등이 기근을 일으키는 심각한 문제다.

세번째 신화: 인구가 너무 많다 과도한 인구밀도가 굶주림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나이지리아, 브라질, 볼리비아 등은 인구밀도도 적고 식량자원도 풍부하지만 굶주린 사람들이 많다. 토지, 일자리, 교육, 보건의료 같은 자원에 대한 접근성의 불균형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다.

 

네번째 신화: 자연이냐 환경이냐 환경위기가 식량생산을 위협한다. 친환경적인 농법이 더 많은 생산을 가져오는 선례가 많이 있다. 환경파괴는 식량생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들이 선진국 소비자를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어지럽힌다. 3세계는 토양손실을 감수하면서 수출할 수 있는 식량과 원료만 생산하여 정작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섯번째 신화: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생산증대만으로는 굶주림을 해결할 수 없다. 경제권력의 집중구조, 토지에 대한 접근성과 구매력에 관한 집중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또한 대기업의 기술과 자본에 근거를 둔 녹색혁명이 불평등을 심화하며 자연을 고갈시키기도 한다.

 

여섯번째 신화: 정의냐 생산이냐 효율적인 생산과 공정한 경제체제는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단위 면적당 더 많은 생산을 하는 것은 거대 토지소유자들이 아니라 소농들이다.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의사결정의 구조이다. 어떤 체제가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체제가 굶주림을 해결할 가능성이 큰가를 물어야 한다.

일곱번째 신화: 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시장은 개인들의 선호나 필요에 반응하지 않고 돈에 반응한다. 시장은 분배를 위한 유용한 도구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장을 확대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늘려야 한다. 그래야 노동과 생산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해진다.

 

여덟번째 신화: 자유무역이 해답이다 대부분 제3세계에서 수출이 늘어도 굶주림은 지속되거나 더 심해지고 있다. 생산은 시장중심적으로 이루어지며 수출을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은 지역 경제의 엘리뜨들에 불과하다. 또한 수출을 위해 낮은 임금과 비참한 노동조건을 강요한다. 3세계 국민들이 자원 이용에 좀더 평등한 권리를 갖게 될 경우에만 무역이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아홉번째 신화: 너무 굶주려서 저항할 힘도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한 생존에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빈민들이 수동적이라면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사빠띠스따 농민운동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빈민들이 변화를 주동하는 사례가 있다. 우리에게는 사태에 개입하여 바로잡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운동에 동참할 책임이 있다.

열번째 신화: 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해외원조는 현상유지를 고착화할 뿐이다. 또한 굶주림의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미국의 원조는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자유무역과 시장 정책에 사용되었고 식량과 무기의 수출을 늘리는 데 기여했다. 굶주림을 해결하려면 부채를 탕감하는 데 원조자금이 쓰여야 한다.

 

열한번째 신화: 그들이 굶주리면 우리가 이득을 본다 가난한 국가에서 만드는 값싼 물건을 살 수 있는 만큼 다른 방식으로 댓가를 치러야 한다. 3세계의 가난은 제1세계 국가의 일자리와 노동조건까지 어지럽힌다. 세계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때만 선진국의 노동자들도 보호받을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연대의식이다.

열두번째 신화: 식량이냐 자유냐 자유를 부를 축적하고 사용하는 자유로 한정한다면 우리는 식량과 자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경제적 안정이 자유를 보장한다고 자유의 개념을 이해하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굶주림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

 

 

굶주리는 세계, 어떻게 구할 것인가? / 저자 장 지글러|역자 양영란|갈라파고스 |2012.07.

장 지글러의 대량 살상, 기아의 지정학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다

원제 Destruction massive

 

저자 장 지글러JEAN ZIEGLER1934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장 지글러는 제네바 대학과 소르본 대학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고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에서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부터 20084월까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으며, 현재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국제법 분야에서 인정받는 학자이자 실증적인 사회학자로서, 특히 인도적인 관점에서 빈곤과 사회구조의 관계에 대한 글을 의욕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저명한 기아 문제 연구자이다.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을 돌아보면서 발견한 세계화의 병폐를 지적하며 그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지를 담은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대표작으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탐욕의 시대』『빼앗긴 대지의 꿈등이 있다.

 

역자 양영란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코리아헤럴드기자와 시사저널파리 통신원을 지냈다. 옮긴 책으로 탐욕의 시대』『빼앗긴 대지의 꿈』『공간의 생산』『그리스인 이야기』『물의 미래』『위기 그리고 그 이후』『빈곤한 만찬』『현장에서 만난 20THC: 매그넘 19472006』『미래의 물결』『식물의 역사와 신화』『잠수복과 나비등이 있으며, 김훈의칼의 노래를 프랑스어로 옮겨 갈리마르사에서 출간했다

 

목차

들어가는 말: 어떻게 굶주리는 세계를 구할 것인가

1. 기아가 빚어낸 대학살

기아의 지정학

보이지 않는 기아

오래 지속되는 위기

덧붙이는 글 1: 기아를 무기로 삼은 이스라엘

덧붙이는 말 2: 2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의 기아

세아라의 이름 없는 아이들의 묘지

하느님은 농부가 아니다

무관심과 냉소가 키우는 굶주림

기아가 낳은 끔찍한 질병, 노마

 

2. 의식의 각성

기아가 숙명이라고!

세계식량농업기구의 창시자, 조수에 데 카스트로

히틀러가 세운 기아 계획

암흑 속의 한줄기 빛, 유엔과 식량권

처치 곤란한 관, 조수에 데 카스트로 그 이후

 

3. 식량권의 적

신자유주의를 수호하는 십자군 원정대

빈곤을 키우는 세계 기구들

자유교역이 죽음을 불러온다

자유무역의 전도자, 세계무역기구 수장 파스칼 라미

 

4. 세계식량계획의 파산과 무기력한 세계식량농업기구

억만장자 짐 모리스의 눈물

한쪽이 부를 쌓을 때 다른 쪽은 굶주린다

세계식량계획, 생명을 선별하다

방글라데시의 빈민, 잘릴 질라니와 그녀의 자식들

세계식량농업기구 대표 디우프, 다국적기업에 무너지다

덧붙이는 글: 이라크 어린이들을 죽게 만든 유엔의 경제 봉쇄

 

5. '녹색 금'을 노리는 독수리 떼

바이오연료, 기아의 새로운 원흉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집착

사탕수수의 저주

덧붙이는 글 : 구자라트의 지옥

아프리카, 다시 식민지가 되다

 

6. 식량 투기꾼들

헤지펀드, 식량을 노리는 뱀상어들

제네바는 어떻게 식량 투기꾼들의 수도가 되었나

농지를 빼앗긴 자들의 분노와 저항

부조리한 서양의 동조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출판사 서평

굶주리는 세계, 어떻게 구할 것인가?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탐욕의 시대』『빼앗긴 대지의 꿈등으로 잘 알려진 장 지글러의 최신작이다. 저명한 기아 문제 전문가인 장 지글러가 이 책에서는 유엔 최초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8년 동안 활동하면서 겪은 절망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기아가 창궐하는 전 세계 곳곳을 누빈 이야기는 물론 굶주리지 않을 권리인 식량권과 식량권을 지키기 위해 창설된 세계식량농업기구, 세계식량계획과 같은 국제기구의 한계와 가능성, 기아의 새로운 원흉으로 부상한 바이오연료와 식량 투기꾼, 유엔 내부에서 겪었던 갈등과 장 지글러에게 가해진 압력 등을 선명하게 풀어낸다.

 

브라질의 땅 없는 농민들의 연대, 비아 캄페시나, 기아대책행동과 같은 비정부단체들의 활동에서 그는 기아와 빈곤을 극복할 희망을 발견하고 전 세계 민주 시민들의 대대적인 연대를 촉구한다. 식량특별조사관을 그만두고 쓴 이 책에서는 그가 유엔 내부 인물이었기에 여러 전작에서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다. 호시탐탐 그를 해임시키려 했던 미국 대사들, 식량권에 격렬히 반대하던 농가공식품업계 다국적기업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굶어 죽어가는 국민들을 외면하는 남반구의 부패한 정치 지도자들에 맞서 장 지글러는 식량권을 사수하기 위해 투쟁해 왔다. 이 책은 그런 그의 투쟁을 밑바닥에 깔고 있으며, 평생에 걸쳐 기아에 맞서 싸운 그의 지속적인 문제의식과 전망을 종합한 역작이다.

 

1. 기아가 빚어낸 대학살에서는 세계식량농업기구, 세계식량계획 및 시민단체와 전문기관에서 펴낸 심층 연구물, 통계와 표, 그래프, 보고서, 결의안 등을 통해 기아로 인한 대량 살상의 심각성에 대해 보여준다. 2. 의식의 각성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기아 계획으로 심각한 기아 상황에 직면했던 유럽인들이 식량권에 대한 집단의식을 깨우는 과정을 보여준다. 3. 식량권의 적에서는 유엔이라는 체제 내부와 많은 회원국 내부에 있는 식량권의 적을 파헤친다. 4. 세계식량계획의 파산과 무기력한 세계식량농업기구에서는 기아를 퇴치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인 세계식량계획과 세계식량농업기구가 어떻게 해서 무력해지고 파산 지경에 이르렀는지 살펴본다.

 

5. ‘녹색 금을 노리는 독수리 떼에서는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새로운 수익 창출원으로 부상한 바이오연료를 생산하기 위해 식량이 아닌 바이오연료의 재료가 되는 사탕수수, 옥수수만을 재배하면서 촉발된 굶주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6. 식량 투기꾼들에서는 바이오연료 때문에 식량을 수입해서 먹어야 하는 사람들을 더 굶주리게 만드는 식량 투기꾼들의 작태를 밝힌다. 장 지글러는 에필로그인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에서 세계 시민들의 연대를 강력히 촉구하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유엔과 식량권, 기아를 퇴치하기 위해 태동하다

기아와 영양실조를 방지하기 위해 지구에는 수백 가지의 국제법, 국제기구, 비정부단체들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골백번씩 기아는 사라져야 한다고 되뇌지만 기아로 고통 받는 당사자들의 삶에는 눈곱만큼의 변화도 없다. 현재 유엔의 목표는 2015년까지 기아로 고통 받는 자들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지만 기아로 인한 사망자 수는 감소하기는커녕 점점 증가했다.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생산구조로 인해 남반구 국가들의 기아는 항구적이다. 해마다 영양실조로 허덕이는 수백만 명의 여인이 영양실조를 겪는 수백만 명의 아이를 낳으며 기아가 대물림되고 있다. 여기에 메뚜기 떼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 전쟁으로 인한 피해 등으로 재앙은 가속화된다.

 

노마는 수많은 기아의 참상 속에서 가장 끔찍하고 가슴 아픈 단면을 보여주는 질병이다. 노마는 영양부족으로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걸리는데, 얼굴이 부어오르고 썩어 들어가면서 입술과 뺨이 사라지고 그 대신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아이들의 얼굴은 사라지고 만다. 기아로 인한 질병인 노마, 콰시오커, 빈혈, 각기병, 괴혈병 등은 충분한 영양만 섭취하면 쉽게 예방할 수 있는 병이다. 그러나 간단한 예방 조치도 취하지 못해 많은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고, 세계 곳곳에서 이름 없는 아이들의 묘지가 늘어만 간다.

 

이런 기아의 참상은 당연한 것인가? 장 지글러는 현 시점에서 전 세계의 농업 생산량은 120억 명 정도는 문제없이 먹일 수 있다. 120억 명이면 현재 지구 인구의 두 배에 해당한다. 그러니 기아는 불가항력적인 문제가 절대 아니다. 기아로 죽는 아이는 살해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한다. 기아를 조장하고 고착화시키는 구조와 배후를 파헤침으로써 기아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려는 것은 장 지글러의 지속적인 문제의식이다. 그중 지글러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식량권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식량권은 인권의 한 부분이자 인류가 고통을 겪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얻어낸 값진 유산으로, 지글러는 식량권이 태동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며 식량권의 중요성과 유엔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아는 남반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럽도 한때 기아로 심하게 고생했다. 히틀러의 기아 계획과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기아를 겪으면서 유럽인들은 기아 문제에 대해 새롭게 각성하고 맬서스적 숙명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기아와 식량권에 관한 문제에 대해 유럽인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브라질 출신 혼혈 의사인 조수에 데 카스트로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 기아의 지정학을 통해 기아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일깨웠다. 이런 집단의식은 국제연합과 식량권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1945년에 창설된 유엔은 전후 세계의 질서 재건과 더불어 기아와의 투쟁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듬해 세계식량농업기구(FAO)를 발족시켰다. “식량 생산 농업을 발전시키고 인간들에게 공평하게 식량을 배분하기 위해서였다. 1948년 통과된 인권선언의 제25조는 식량권을 명시한 것이었다. “식량권은 정기적, 상시적으로 자유롭게 직접으로나 또는 화폐를 매개로 하는 구입을 통해 질적, 양적으로 적절하고 충분하며 소비자가 속한 민족의 문화적 전통에 부합되고 불안에서 자유로우며 만족스럽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적, 신체적, 개인적, 집단적 삶을 보장해주는 먹을거리를 취하는 권리다.” 즉 굶주리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유엔은 1963년 긴급 원조를 담당하는 세계식량계획(WFP)을 창설해 식량권을 확보하고 늘어만 가는 재앙에 신속하게 대처하고자 했다. 지글러는 식량권의 태동과 유엔의 탄생을 인류의 위대한 역사적 과정으로 여기며 인류가 기아라는 적에 맞서 대동단결한 가슴 떨리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식량권의 적이 된 국제기구와 다국적기업, 식량 투기꾼

유엔에는 세계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 같이 식량권을 확보하고 지키기 위한 기구가 있는 반면 식량권을 무력화하는 기구도 공존한다. “미국이 용병처럼 부리는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과 세계무역기구(WTO)는 자유무역과 시장의 원칙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수호자다. 미국과 국제기구들에 있어 식량권은 한낱 판단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기아를 무찌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장 경제뿐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시장의 법칙은 오로지 지불 능력이 뒷받침되는 요구만 충족시켜준다. 이 법칙은 식량은 인간의 권리,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된 기본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부러 모르는 척할 것을 강요한다.”

 

국제통화기금의 정책도 식량권을 침해하는 데 일조한다. 국제통화기금은 과도한 외채를 진 나라들이 구조조정 계획에 동의할 경우 외채 지불을 유예해주거나 채무 조정을 허락해준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안을 실행에 옮긴 곳은 어디에서나 새로이 수백만 명의 기아 피해자가 발생했다.” 세계무역기구는 상품, 특허, 자본, 서비스 유통 등의 완전한 자유화를 목표로 한다. 그 목적은? “남반구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방적인 무장해제. 시장 개방으로 피해를 입는 건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장을 가진 남반구 국가들이다.

 

세계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은 이런 국제기구들의 압박과 재정부족으로 인해 식량권 사수라는 임무 수행에 차질을 빚으며, 무용지물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유엔은 정치적 무기로 활용된 기아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글러는 이를 조직적 범죄이자 대량 살상이라 말한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주변에 전기 철조망을 설치해 가자 지구를 봉쇄하고 제분소와 수도 정화 시설 등을 공격해 파괴시켰다. 그러고는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식량만 들여보냈다. “가자 지구 주민들에게 의도적으로 고통을 주어 하마스 정권에 반기를 들게 하려는정치적 목적으로 기아를 이용한 것이다.

 

유엔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의 경제 봉쇄령을 의결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식량과 맞바꾸는 석유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이라크 경제가 봉쇄된 와중에도 석유를 팔아 이라크 주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재위원회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라크의 물품 수입을 거절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이라크 사람들이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지글러는 이처럼 기아가 무기로 활용되어 대량 살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극악한 범죄로 규정한다.

 

책속으로

해마다 수천만 명의 인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기아 때문에 죽어간다는 건 우리 시대의 거대한 참극이다. 5초마다 열 살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는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온갖 풍요로 넘쳐나는데 말이다. 현 시점에서 전 세계의 농업은 120억 명 정도는 문제없이 먹일 수 있다. 120억 명이면 현재 지구 인구의 두 배에 해당한다. 그러니 기아 문제는 불가항력적인 문제가 절대 아니다. 기아로 죽는 아이는 살해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16

 

지구상에는 기아와 영양실조 방지를 존재 이유로 삼는 수백 가지의 국제법, 국제기구, 비정부단체들이 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수천 명의 외교관들이 일 년 내내 이 대륙 저 대륙으로 옮겨 다니며 인권에 대해 한가한 성가대 합창을 해대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이 골백번씩 똑같은 노래를 반복해도 솔직히 고통 받는 당사자들의 삶에는 눈곱만큼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 우리는 그 까닭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p.20

 

나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태도로 유엔 로고가 찍힌 명함을 돌렸다. 여자들은 무슨 부적이라도 된다는 듯 그 명함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입을 열어 그들에게 인권이니 유엔의 보호니 하는 말들을 하는 순간, 나는 자신이 그들을 배반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중팔구 유엔은 그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엔이 파견한 직원들은 과테말라시티의 청사에 편안하게 들어앉아 이른바 개발계획이라는 돈만 많이 드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 p.41

 

(……)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그저 단순한 통계의 한 단위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기 위해 이 땅에 온 대체불가능하고 유일한 존재의 소멸로 본다면, 풍요함으로 넘치며 하늘에 떠 있는 달도 따올 수 있는역량을 갖춘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처럼 인격체를 파괴하는 기아가 여전히 계속된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가장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 자들의 대량 학살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 p.50

 

저녁이면 배가 고파 우는 자식들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어느 날 저녁 기적처럼 이웃에게 다소간의 우유를 얻어 먹인다고 한들 다음 날이 되면 그 어머니는 또 어떻게, 어디에 가서 먹을 것을 조달할 것인가? 자식을 먹이지 못하는 어미가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이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존감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pp.55~56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하얀 색으로 칠한 작은 나무 십자가들이 열 줄가량 늘어서 있었다. (……) 브라질 법에 의하면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반드시 관할 관청에 신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신고하려면 돈이 드는데 보이아 프리우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어차피 많은 아이들이 태중 영양실조의 후유증으로 또는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산모가 모유를 제대로 먹일 수 없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는다. 요컨대 프라고소 주교의 표현대로 그 아이들은 죽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다.” --- p.75

 

권투 시합이 벌어지는 링 위에 헤비급 세계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과 영양실조에 걸린 벵갈 출신 실업자가 나란히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신자유주의 교리를 설파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무어라고 말하는가? 그들은 두 선수에게 똑같은 가격의 글로브를 지급했으며, 두 선수들에게 동일한 시합 시간을 할애했고, 시합의 장소도 동일하며, 시합 규칙 또한 동일하므로 정의는 보장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실력이 더 나은 선수가 이기면 그것이 곧 정의라는 입장이다! 불편부당한 심판관은 바로 시장이다. 어떤가,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교리의 황당함이 금세 머리에 와 닿지 않는가? --- p.169

 

제네바 주재 미국 외교관들의 눈에 비친 나는, 뉴욕에 주재하는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지만, 유엔이라는 이름을 남용하는 비밀공산주의자로 한시라도 빨리 가면을 벗겨야 할 요주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당신은 뭔가 숨겨놓은 계획이 있는 것이 분명해!”. “당신은 우리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어!” 난 이런 멍청한 비난을 수없이 많이 들었다. 이들은 여러 번씩이나 나의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의 우정, 인권위원회 고등판무관 세르지우 비에이라 데 멜루의 외교적 수완 덕분에 나는 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지막엔 가까스로 가능했다. --- p.205

이러한 참혹한 상황을 초래한 진짜 책임자들은 투기꾼들, 그러니까 각종 헤지펀드 운용자, 명망 높은 대형 은행 수장들을 필두로 하는 글로벌 금융 자본 포식자들이다. 이들은 기업의 이익 혹은 사리사욕, 그리고 냉소주의에 사로잡혀 세계 금융 시스템을 파산으로 이끌었으며 수천 억 유로에 해당되는 자산을 공중분해 시켰다. 이들 포식자들은 반인류 범죄를 재판하는 법정에 세워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들은 워낙 막강한 권력을 지녔고 그에 반해 국가는 너무도 허약하다 보니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p.209

 

(……) 유엔의 봉쇄령으로 이라크 경제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뉴욕 주재 브라질 대사인 세우수 아모링은 이렇게 말했다. “비록 이라크 주민들이 현재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이 전적으로 외부적 요인[봉쇄령] 탓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어찌되었든 안전보장이사회가 그 같은 조치만 취하지 않았어도 이들은 그처럼 큰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엔 주재 말레이시아 대표단의 책임자 하스미 아감의 표현은 이보다 훨씬 노골적이다. “이 무슨 역설인가! 이라크를 대량 살상무기에서 해방하겠다는 정책이 오히려 대량 살상을 자행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니 말이다!” --- pp.235~236

 

곡물 상인이나 녹색 금을 찾아 나선 독수리, 거래소를 휘저으며 먹잇감을 노리는 뱀상어가 어느 날 갑자기 양심을 되찾기를 기대하는 건 너무도 어리석고 한심한 짓이다. 이익 극대화라는 법칙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철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공공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단 말인가?

체게바라는 가장 튼튼한 벽도 조그만 균열로 무너진다는 중국 속담을 즐겨 인용하곤 했다. , 그러면 육중한 콘크리트 덮개로 민중들을 짓누르는 현재의 세계 체제 속에 그 조그만 균열이 최대한 많이 생겨나도록 하자! --- pp.329~330

 

 

거대한 단절 16500년 동안 신세계와 구세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저자 피터 왓슨|역자 조재희|글항아리 |2016.04

 

저자 피터 왓슨PETER WATSON1943년 영국 출생으로 더럼대, 런던대, 로마대에서 공부했다. 좌파 시사주간지 뉴소사이어티부편집장을 지냈고, 선데이타임스탐사보도팀에서 4년간 일했다. 타임스뉴욕 특파원, 뉴욕타임스』 『옵서버』 『펀치』 『스펙테이터등 유명 신문·잡지 프리랜서로도 활동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는 케임브리지 대학 맥도널드고고학연구소에서 협동연구원을 역임했고, 하버드, 케임브리지, 버클리, UCLA, 시카고대, 런던대 등에서 강의했다. 생각의 역사: 불에서 프로이트까지IDEAS: A HISTORY: FROM FIRE TO FREUD』 『생각의 역사: 20세기 지성사THE MODERN MIND: AN INTELLECTUAL HISTORY OF THE 20TH CENTURY』 『메디치의 음모THE MEDICI CONSPIRACY』 『히틀러의 죽음THE DEATH OF HITLER』 『저먼 지니어스THE GERMAN GENIUS를 비롯해 문화사 및 지성사를 다룬 열두 편의 논픽션을 펴냈으며, 매켄지 포드라는 필명으로 일곱 권의 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메디치의 음모2006년 비컨 어워드, 거대한 단절로 미국 도서관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다른 작품들도 역사, 과학, 스릴러 등 여러 분야에서 수상하며 전 세계에서 2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목차                 

작가의 말  나치스만큼 사악한 아즈텍인

서문  기원전 15000년에서 기원후 1500년까지, 인류 역사의 특별한 시기

 

1부초기 아메리카인은 구세계 인류와 어떻게 다를까

  1장 아프리카에서 알래스카까지: 유전자, 언어, 석기에 나타난 위대한 여정

  2장 아프리카에서 알래스카까지: 신화, 종교, 암석으로 밝혀진 유구한 시대의 재난

  3장 시베리아와 샤머니즘의 근원

  4장 사람 없는 땅으로

 

2부구세계와 신세계의 자연은 어떻게 다른가

  5장 화산대와 트럼펫 서멀

  6장 뿌리, 종자, 가축의 이례적인 분포

  7장 부권, 번식, 농경: ‘몰락

  8장 신세계에서는 없었던 네 가지 현상: 쟁기질, 가축몰이, 젖짜기, 말타기

  9장 재난과 희생의 기원

  10장 마약에서 알코올로

  11장 옥수수, 신세계 인류를 만들다

  12장 향정신성 열대우림, 그리고 환각제의 독특한 분포

  13장 담배와 코카, 초콜릿이 있는 집

  14장 야생: 재규어, 바이슨, 연어

 

3부왜 인류는 구세계와 신세계에서 다르게 진화했는가

  15장 에리두와 아스페로: 12000킬로미터 떨어진 최초의 도시

  16장 대초원, 전쟁 그리고 새로운 인류

  17장 재규어의 날

  18장 구세계에서 유일신의 출현과 희생 의식의 폐지

  19장 민주주의, 알파벳, 화폐의 발견과 인간성에 대한 그리스 개념의 발전

  20장 주술사로서의 왕, 세계수 그리고 상상의 뱀

  21장 피 흘리기, 인간 제물, 고통, 축하연

  22장 수도원과 중국 관료, 이슬람교도와 몽골인

  23장 날개 달린 뱀, 다섯 번째 태양 그리고 네 개의 지역

 

발문주술사와 양치기: 거대한 단절

부록 1신세계에 대한 끝없는 논쟁

부록 210만 혈연 집단에서 190개 주권국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발전의 몇 가지 유형

 

 

출판사 서평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해온 두 세계, 신세계에는 환각성 식물에 크게 영향받아 주술사가 출현했고 구세계는 양치기로 상징되는 가축 사육으로 나아갔다

 

왜 라틴아메리카는 포악하고 저열한 사회로 취급돼왔는가

그동안 많은 서구 지식인은 신세계 문명을 폄훼하고 경시해왔다. 쇼펜하우어는 아메리카인들을 가리켜 삶의 의지를 지닌 주체로서의 인간이나 포유동물이 아닌, 뱀이나 조류와 같이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메리카 민족의 무례함과 무지 또한 놀랄 일이 아니고, 아메리카의 주민을 세계의 다른 사람들보다 1000년 정도 어린, 미성숙한 사람들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마누엘 칸트 또한 인디언들은 문명을 이룰 수 없다고 간주했으며, 헤겔은 자신의 사상 체계 속에 아메리카를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했다. 신세계의 달력이 당시 서양보다 더 정교하고, 훨씬 방대한 규모의 도시를 이뤘으며, 더욱 발전한 기술을 가졌다는 사실은 무시당했다. 그 배경과 연유는 알려 하지 않은 채, 인간 제물과 폭력적 제의를 비난할 따름이었다.

 

과연 아메리카는 유럽에 비해 미개한가? 서구의 시각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무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렇다면, 신세계와 구세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거대한 단절은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고고학·인류학·종교학·기상학·언어학·우주학 등 거의 모든 학문을 망라하여 통섭한 답이다.

 

권두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그간 신세계의 문명과 기술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해온 구세계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들에게 신세계는 잔인하고 비열한 사회이고 도덕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추하기 그지없는 문화를 가졌으며, 심지어 나치스만큼 사악한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피터 왓슨은 이러한 인식을 인지하고, 초기 인류에게서 발견된 유사성부터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전한 신/구세계를 비교·대조하여, 서로의 차이성과 유사성을 발견하는 작업을 이어간다. 이 작업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반구에는 많은 집단이 있었고 문명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나 그것을 실패한 사회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구세계 문명은 각기 다른 조건에서 환경에 적응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의 풍요가 가져온 문명의 빈곤, 자연의 빈곤이 가져온 문명의 풍요

기원전 15000년 아메리카 대륙이 단절되었고,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16500년의 단절이 비로소 끝나게 된다. ‘서문에는 그 순간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 항해일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인도 제국으로 가고자 한 콜럼버스와 그의 동료들의 항해가 잘 드러나 있다. 콜럼버스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신대륙에 발을 디딤으로써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가던 두 세계의 평행 발달은 곧 끝나버렸다.

 

1부에서는 최초의 아메리카인들이 신세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추적한다. 또한 그 경험은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나아가 유라시아 구대륙에 남겨진 이들과 어떻게 차별화되는지를 살펴본다. 기존 서구의 시각과 비교할 때 거대한 단절이 두드러진 것은, 처음에 두 세계의 사람들이 얼마나 비슷했는지 검토하며 둘의 발전 양상을 추적한다는 점이다. DNA 분석 결과 두 세계 사람들 사이에 유전적 차이는 거의 없었고, 사용 언어도 흡사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동일한 유형의 치아 구조를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2부에서는 지리·기후·동식물군을 비롯하여 신세계와 구세계 자연의 차이를 설명한다. 세계를 /로 나눌 수 있는 데에는 엘니뇨와 몬순이라는 기후적 요인, 산맥과 평야라는 지리적 요인이 주요했다. 그로 인해 생물학적 차이가 생겼고, 결국 신세계와 구세계는 각각 수렵-채집’ ‘유목-농경문명이 달리 발전하게 되었다. 저자는 초기 인류의 정착, 생산 혁명, 종교의 발전 등을 통해 신/구세계의 차이를 설명한다.

 

구세계에서는 몬순이 약화되면서 초기 인류가 집단을 형성하고 관개 기술을 개발하여 도시국가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인류는 정주하여 농경사회를 이루고, 가축을 사육하면서 생산 혁명을 이뤄낸다. 비로소 성교와 출산의 신비를 이해하게 된 초기 인류는 황소 숭배와 같은 초기 신앙에서 벗어난다. 인류는 쟁기나 수레 등의 도구를 사용하면서 2의 생산 혁명을 이룩했고, 그와 함께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모권에서 부권으로 성 권력이 이동했으며, 종교적 차원에서는 항정신성 물질보다 알코올에 의존하게 되었다.

 

반면 신세계의 자연은 매서웠다. 엘니뇨는 더욱 빈번해졌고, 화산 분출이나 재규어의 습격은 예측할 수 없었다. 아울러 신세계는 풍요로운 환경 덕분에 수렵-채집 방식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으므로, 구세계와 달리 곡식 재배를 통해 농경을 업으로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편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공격과 더불어, 신세계에는 구세계보다 열 배 이상 많은 종류의 항정신성 물질이 있었기에 샤머니즘이 크게 발전했다.

 

특히 재미난 것은 자연환경이 문명에 미친 영향이다. 하루 다섯 시간 미만의 노동만으로도 충분했던 신세계의 풍족한 자연환경으로, 주술사들은 영혼 여행이나 제의와 같은 잉여적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곡물 재배나 목축을 통해 식량을 확보해야 했던 구세계에서는 도자기, 야금술과 관개 시설, 건축술이 발전했고, 교역을 통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문명이 발전했다. 자연의 풍요가 문명의 빈곤을, 자연의 빈곤은 문명의 풍요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3부에서는 거대한 두 문명을 발전시켜온 사람들에 대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찰한다. 거대한 단절은 책 전체에 걸쳐, 초기 인류가 살았던 자연환경이 인간은 물론, 종교 풍습, 사회 구조, 상업 및 산업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밝히고, 나아가 어떠한 사상으로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주었는지 탐구한다. 분명 초기 인류는 지구상의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상호작용은 무척 중요하다.

구세계에서는 잉여 생산물을 교류하기 위해 문자가 발전했고, 이로 인해 기록 문화가 발달하여 도서관과 학교가 세워졌으며, 나아가 법과 정치 체제가 수립되었다. 한편 농경과 목축, 그리고 전쟁을 겪으며 자연이 가진 신성성은 제거되기 시작했다. 즉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에 의한 죽음을 경험한 구세계 인류는, 죽음을 생명의 순환이 아닌 소멸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전쟁의 혼란 속에서, 기원전 900~기원전 200축의 시대Axial Age’가 도래했다. 무한한 욕망이 발현되는 전쟁에서 벗어나 종교와 철학이 발전한 축의 시대가 중요한 이유는 개인의 부상에 있다. 연이어 민주주의의 발전, 정교政敎 분리, 합리성을 중시하는 과학과 철학의 발달 등은 구세계에서만 나타난 발전 양식이었다.

 

신세계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원후 1000년 무렵 신세계에서도 많은 문화가 번창했고 또 스러졌다. 그러나 구세계와 비교할 때 그 발전 동력은 달랐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엘니뇨로 인한 지진·해일·허리케인·화산 등의 자연현상으로, 신세계의 자연은 인간이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구세계의 자연과 달랐다. 구세계에서는 농사의 풍요를 비는 것이 전부였지만, 신세계에서는 성난 자연을 달래야만 했다. 천문학의 발달, 정교한 달력 체계, 강력한 계급 구조가 자리잡았고, 환각제의 힘을 빌려 더욱 생생해진 종교적 체험은 성난 자연을 달래기 위한 방식으로 발달했다. 이 과정에서 거대한 자연의 분노에 맞서려면 개인화보다는 집단화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구세계 지식인들이 잔인하다며 비난했던 희생 제의도 이런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산과 닮은 피라미드, 용암을 닮은 피 흘리기 의식 등은, 집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호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신세계에서 나타난 이 같은 조직적인 폭력과 고통의 관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며, 톨텍·아즈텍·잉카·마야 문명이 발전하면서 전쟁으로 이어져 더욱 증폭되었다. 공양물의 유한성을 경험한 신세계 사람들에게 다른 집단과의 전쟁이란,

 

책속으로

관찰하게 될 영토는 지구 위의 거대한 개체인 모든 반구다. 회의적인 견해를 지닌 순수주의자들은 이러한 비교에 무수한 변수가 작용하므로 무의미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이 비교 작업은 두 반구 사이에 서로 다른 문명의 궤적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구세계와 신세계 간의 장기적이고도 중요한 차이에 대하여 유익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충분한 근거가 될 것이다. --- p.27

 

제럴드 바이스는 페루 동부의 또 다른 부족인 캄파 족 주술사들도 바니스 테리옵시스 혼합물과 담배즙을 사용했음을 밝혀냈다. 주술사는 아야우아스카를 통해 캄파 족의 영적 세계와 접촉했으나, 공급된 환각제를 아껴두었다가 자신의 영적 세계에 빠져드는 경우도 빈번했다. 의식은 주로 어두워질 무렵에 시작되었고 아야우아스카가 집단적으로 소비되는 경우도 있었다. 주술사는 영혼 비행을 체험하거나 질병 치료를 위해 노래 부르는 것을 주도하지만, 이런 경우 주술사는 영혼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은 상태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 p.298

 

대부분의 지역에서 재규어는 제의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그 모습은 주로 으르렁거리는 입이나 송곳니가 강조되었으며, 때로는 인간을 공격하거나 인간과 성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재규어는 물, (재규어의 포효는 천둥소리 또는 신의 노여움을 암시했다), 정글, 어둠, 동굴과 관련되었으며, 지하세계의 영주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많은 부족에게 재규어는 동물의 주인인 동시에 비인간계를 통제하는 존재였다. 한편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의 몇몇 예술품에서는 재규어가 환각성 덩굴 식물을 핥고 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묘사는 초기 인류와 재규어의 친밀한 관계(두려움과 존경)를 증명하는 것으로, 주술사들은 이 포악한 동물을 길들일 책임을 지고 있었다. --- p.320

 

헤겔,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다른 연구가들도 지적했지만, 신세계는 유라시아와 달리 동-서 방향보다는 남-북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 방향성은 그 자체로 발전을 지연시켰다. 우선 상대적으로 식물(이에 따라 동물과 문명까지)이 확산되는 속도를 더디게 했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서 많은 종의 진화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그 흐름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p.663

 

Serenade - Della Reese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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