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어울리기/서평

박정희 이야기 -여전히 엇갈린 시선과 평가, 허나 얼마나 오래 갈까

이성근 2017. 11. 12. 20:30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에 대한 의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세우겠다고 밝혀 논란이 뜨겁다. '더팩트' 독자들은 반대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더팩트 페이스북 17.11.12


















박정희 바로 보기 우리가 알아야 할 9가지 진실 저자 송복, 김인영, 여명, 조우석, 유광호, 류석춘, 이지수, 최종부, 배진영, 왕혜숙 외 |기파랑 |2017.10.16.

 

저자: 송복 1937년생. 서울대학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와 신문대학원을 졸업했다. 이스트웨스트센터 장학생으로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사회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사회학으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부터 2002년까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본 저서 외에 조직과 권력, 한국사회의 갈등구조,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등의 학술 모노그래프가 있고,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열린사회와 보수, 일류의 논리등의 일반저서 외에 사회 불평등기능론, 사회 불평등 갈등론, 볼쉐비키 혁명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서의 권위와 불평등등의 편저서와 학술논문 80편이 있다.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이다.

|||청년박정희연구회 부회장. 미디어펜 주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초빙연구위원  연세대학교 교수, 사회학 교수이다. 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연세대 사회학 학사,일리노이대 대학원 사회학 석박사 등의 이력이 있다. 저서로는 전태일 평전의 세 가지 함정(2016), The Korean Economic Developmental Path(2013) 등 다수가 있다.

명지대학교 교수, 정치학   자유경제연구원 연구원 |[월간조선] 기자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목차     

서장 박정희 시대의 왜곡에 대한 ’, ‘어떻게그리고 미래 (송복)

1. 당파성이 죽인 역사와 인물들

2. 왜곡과 진실

3. 실마리: 실용주의 대 원리주의, 교조주의

 

01박정희가 정경유착을 했다고? - 내가 하면 네트워크, 남이 하면 유착? (김인영)

1. 독재와 정경유착: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기적을 폄훼하기 위한 개념

2. 경제성장과 정부-기업 협력 네트워크의 이론화

3. 박정희 정부 산업화와 정부-기업의 협력

4. 정치 근대화 측면에서 본 정경유착

5. 박정희 산업화: ‘유착이 아니라 협력이 핵심

 

02박정희가 원조 친일파라고? - 그렇다면 인도의 간디는 민족반역자 (여명)

들어가는 글

친일의 기준

염치와 정의의 문제

불령선인, 교사 박정희

독립군 토벌? 있어야 토벌을 하지

당시 식민지 청년 지식인들에게 만주국이란

-일협정이 굴욕외교라고?

보다 근본적으로, 친일에 관하여

 

03박정희가 군사문화라는 악습을 퍼트렸다고? - 활력을 불어넣고 북한을 따돌린 진짜 힘, 군사문화 (조우석)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군사문화에서 가능했던 돌진적 근대화

현대적 관료제가 1960년대에 정착한 이유

공무원 봉급 5년 새 3.2배로

효율우선주의의 걸작품 경부고속도로

그리고 우린 체제경쟁에서 북한을 이겼다

사회와 인간의 근본 개조를 추구한 박정희

 

04박정희의 반공이 반()민주라고? - 민주를 지키는 게 반공이다 (유광호)

들어가며

1. 박정희는 왜 반공을 국시(國是)로 했는가

2. 반공은 자유민주 체제 수호의 전제조건이다

3. ‘민주화 투쟁통일운동은 좌익의 체제전복 활동이었다

4. 박정희의 반공정책은 성공했는가

나오며

 

05박정희가 노동자를 착취했다고? - 중산층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요 (류석춘)

1. 박정희 백 년 대 공산주의 백 년

2. ‘착취그리고 한국의 노동자 연구

3. 박정희 시대의 경공업 노동자: 봉제산업의 전태일, 그리고 평화시장의 경우

4. 박정희 시대의 중화학공업 노동자: 조선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의 경우

5. 한계노동생산성과 임금상승: 시계열 통계자료(1963~1999)

6. 맺는말: 노동조합은 고용 세습 버리고 노동보국(勞動報國) 나서야

 

0610월유신이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의 산물이라고? - 북한, 싱가포르, 대만을 보라 (이지수)

1. 응답하라, 흘러간 시간이여

2. 1972년의 입구에서

3. 그해 10

4. 유신의 뒤안길

5. 북한,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의 경우

6. 박정희는 권력을 사유화했나

7. 박정희를 돌아보면서

 

07도덕성으로 박정희를 검증한다고? - 검소, 청렴, 소탈했던 박정희 (최종부)

들어가면서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선 진실을 알리는 것이 혁명

도덕의 나라 조선의 실패

대한민국에만 없는 위인 이야기

권력은 양날의 칼

정경유착만 봐도 박정희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박정희는 탐욕적? 그래서 도덕적 타락자?

박정희와 육영수, 그리고 남겨진 사부곡(思婦曲)

너무도 검소했던 박정희

회고와 증언으로 본 박정희의 청렴함

특권의식과는 거리가 멀었던 소탈함

글을 마치며

 

08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조장했다고? - 지역감정, 호남포비아 괴담의 진실 (배진영)

들어가면서

1. 박정희 이전에는 지역감정 없었나

2. 박정희 이전 정치에서는 지역감정이 작용하지 않았나

3. 지역편중 인사는 박정희 때부터 시작되었고, 박정희 시대에 가장 극심했나

4. 지역불균형 성장정책은 박정희의 지역차별 정책의 소산인가

5.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기 시작한 시초인가

나오면서

 

09-일 국교정상화가 매국(賣國)이라고? - 뭘 모르고 하는 그런 비판이 친일매국 (왕혜숙)

1. 우리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2. 박정희만 한-일 국교정상화 추진했나

3. 일본은 기꺼이 국교정상화를 하려 했는가

4. 국교정상화는 오직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 도입이 목적이었나

5.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6. 결론

 

출판사서평

박정희는 정경유착으로 정치와 경제 모두를 타락시켰는가? 박정희는 친일파였으며 그 연장선 상에서 일본과의 굴욕적인 국교정상화를 강행했는가? 군사문화와 반공과 10월유신으로 분단 고착화와 장기독재를 획책하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면서 자신은 이면에서 부도덕한 영화를 누렸는가 -

 

[박정희 바로 보기]는 사안별로 드러난 왜곡과 감춰진 진실을 조목조목 밝히며 시각을 바로잡아 주는 책이다. 필진에는 이 분야 전문 연구자와 언론인, 저술가 등 10명이 참여했다각론 아홉 편은 글제목부터 직설적이고 도발적이다. “박정희가 정경유착을 했다고?” “박정희가 노동자를 착취했다고?”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조장했다고?” ...

명명백백한 자료를 토대로 다시 세우는 진실은 이런 모습이다.


정경 유착이 아니라 협력또는 네트워크의 모범적 성공사례이다 (김인영, 한림대 교수)

친일이 아니라, ‘원수의 성공을 배워 이기려 했다 (여명, 청년박정희연구회 부회장)

보편적인 군 경험과 기풍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북한을 이기게 한 진짜 힘이었다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

반공이 반()민주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는 게 반공이다 (유광호, 박정희대통령기념대단 초빙연구원)

박정희는 노동을 착취하긴커녕, 기술을 가르치고 일자리를 마련해 준 중산층의 아버지이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

독재와 권력 사유화(私有化)라면 10월유신보다 북한, 대만, 싱가포르에서 찾아라 (이지수, 명지대 교수)

박정희는 도덕적으로 가장 깨끗했던 지도자 (최종부, 자유경제연구원 연구원)

지역 간 호오(好惡)는 으레 있는 것이고, 이를 지역감정으로 악용한 세력은 따로 있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일 국교정상화는 나라와 동포를 살렸고, 무지에서 비롯한 비판이야말로 친일매국행위 (왕혜숙)

 

반박에 재반박만이 능사는 아닐 터. 원인과 경위를 알아야 대책도 세울 것 아닌가. 서장(필자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은 본문 아홉 편 글의 간결한 해제와 함께, 박정희 왜곡을 포함한 분란의 원인을 건국 전부터 뿌리 깊은 당파성’, , 민주화 산업화 세력(보수)과 사회주의 세력(좌파)의 분립으로 진단한다. 민주 대한민국을 지켜 나갈 방도로 경험주의, 점진주의, 실용주의, 도덕주의로 무장한 민주화 산업화 혈맥의 공고화, 민주주의 유지의 비용인 셈치고 보수가 좌파를 더 유연하게 포용하는, 자못 대승적인 처방을 내놓는다.

 

21세기 한국병()의 근원은 박정희 청산 - [박정희 새로 보기]

박정희를 비난하고 그의 시대를 폄하하는 세력의 가장 큰 곤경은, 30여 년을 박정희 청산에 열을 올리고 난 지금 21세기 한국 사회가 건강해지기는커녕 도리어 활력을 잃고 온갖 병폐를 앓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21세기 한국병의 근원이 박정희 모델을 폐기한 데 있음을 상기시키며, 박정희의 검증된 성공모델 중 특별히 7가지를 선택하여 이들을 재조명하고 복구할 길을 모색하는 [박정희 새로 보기: 오늘에 되살릴 7가지 성공모델](이영훈 외 7인 공저)도 함께 출간됐다.

 

여러 조사에서, 청소년과 청년층의 왜곡된 박정희 인식은 스스로 공부해서 얻은 결과보다 대중매체와 인터넷, 교사 선배 친구 등 지인들의 ‘~카더라를 통해 습득되고 굳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바로 보기] [박정희 새로 보기]는 박정희 시대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를 위한 안내서이다. 책 제목이 말해 주는 그대로, 하나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돌아보며 왜곡과 폄훼의 실상을 고발하고 시정하려는 것이고, 하나는 박정희의 검증된 성공에서 미래에 유용할 모델을 되짚어 내려는 것이다.

 

이 두 책을 필두로 [박정희 동반성장의 경제학], [박정희와 노동자의 새벽](이상 가제) 등 연구서와 교양서 시리즈가 이어지며, 동시에 [박정희 시집]을 포함, 그의 저작들의 영인과, 이것들을 풀어 써 모은 [박정희 전집](9)도 준비 중이다. 도서출판 기파랑이 발간하고 박정희탄생100돌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정홍원, 전 총리)()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사장 좌승희)이 지원한다.

 

 

[주간조선] "내가 틀렸고 박정희가 옳았다" 1112

운동권 출신 5인의 평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서울 장충단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 photo 조선일보

1114일은 고()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다. 191711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61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뒤 18년간 한국을 바꿔놓았다. 19791026,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쓰러지기까지 그의 18년은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었다.

 

집권 18년간 그는 무수한 오해와 비난에 시달렸다. 경제개발 종잣돈 마련을 위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단행할 때는 친일파로 매도당했다. 대일청구권자금을 활용해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건설할 때는 몽상가로 손가락질당했다. 정치 비중을 축소하는 유신(維新)을 단행해 중화학공업을 일으키려 했을 때는 독재자로 비난받았다. 하지만 그가 비난을 무릅쓰고 이뤄낸 한·일 국교정상화,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자동차와 조선, 전자공업 덕분에 한국은 1976년부터 경제력에서 북한을 앞질렀고, 세계 10대 경제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집권 18년의 족적이 워낙 거대하기에 그만큼 그림자도 짙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그를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박정희 덕분에 우리는 지금 1인당 GDP 27561달러의 국가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당초 계획되었던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은 돌연 취소됐다. 서울시내에 기념동상을 세우는 일마저 여의치 않다. 주간조선은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때 그를 비판했던, 70대부터 40대까지 운동권 출신 인사 5인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70/ 김세중 전 연세대 교수한국에 산업혁명을 이식한 사람!”

김세중(71) 전 연세대 교수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인류 역사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산업혁명 전후로 나뉘는데, 한국은 박정희 시대 때 산업혁명을 통해 전근대적이고 정태적인 농업사회에서 근대적이고 동태적인 공업사회로 변모했다는 것이 김세중 교수의 주장이다. 박정희에 대한 그의 평가가 처음부터 후()했던 것은 아니다. 1946년생인 김 교수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초··고를 나왔다. 서울사대부고 3학년 때는 레슬링선수로 활동했는데, 부상을 당해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68학번으로 입학했다.

 

당시는 19693() 개헌, 1971년 대학 내 교련수업 반대 시위로 대학 캠퍼스가 한창 시끄러웠을 때다. 그 역시 3선 개헌 반대시위에 누구보다 앞장섰고, 시위 도중 다리를 다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1971년 박정희 정부가 대학에 교련 과목을 신설해 학생들을 상대로 기초군사훈련을 실시하려 했을 때는 반대시위를 주도했다. 반대시위 직후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대공수사를 전담하는 5국에서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조사관이 내 아들도 연세대 학생이라고 이해하는 태도를 보여 심한 고초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1964년 서울 중앙청 앞에 모여든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대. / photo 조선일보

박정희에 대한 그의 생각도 사회 일반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권위적이고 독선적이며 권력욕에 불타는 이미지가 있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던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대한 생각도 회의적이었다.

 

그는 당시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매판(買辦)자본이란 용어가 널리 쓰였다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경제발전 결과 남한이 신()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다고 했다. 하지만 40여년이 흐른 지금 박정희에 대한 그의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생각이 바뀐 단초는 1977년 일본 쓰쿠바대학에 정부 장학생 자격으로 유학을 가면서다.

 

물론 유학 가는 길도 녹록지 않았다. 학생시위 전력 탓에 신원조회 결과 불가판정이 나왔다. 마침 미국에서 돌아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특보로 있던 학과 교수가 ‘1급 공무원 2명의 신원보증을 조건으로 겨우 유학길을 터줬다. 천신만고 끝에 떠난 일본에서 바라본 조국 한국은 정반대였다. 외국에서는 정작 3세계 경제발전의 우등생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한국에만 있었으면 아마 주사파(主思派)’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며 캐나다 맥길대에 유학 갔을 때는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학생들이 한국을 부럽게 바라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원로 정치학자인 그는 쿠데타로 폭력을 동원해 정상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태어난 박정희 정부는 원죄(原罪)가 있다고 한다. 유신으로 태어난 4공화국의 경우,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등 더욱 이질적인 체제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좀 더 거시적 차원에서 박정희 시대를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5·16의 경우, 장준하가 발행인으로 있던 자유주의 지식인의 본산인 사상계(思想界)’마저 권두언 등을 통해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피력했다고 한다. 2공화국 당시는 대학과 술집에서 북한 군가인 적기가(赤旗歌)’를 대놓고 부를 정도로 사회혼란이 극심했다.

 

그는 자율적 개인의 전통이 없고 빈곤이 팽배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어렵다민주주의를 한다 해도 소수 유력자들에 의한 과두정(寡頭政)으로 흐를 위험이 다분하다고 평가했다. 2차대전 후 신생독립한 제3세계 대다수에서 민주주의보다는 군사정권이 오히려 보편적이었다. 그는 “‘사상계는 표지 뒤에 혁명공약을 게재하는 등 적어도 1961년부터 1963년까지는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했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로 대표되는 산업화세력은 김영삼·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세력못지않게 민주화에도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인 중산층 형성이 그의 집권기 때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발전은 국민성이 부지런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박정희가 한·일회담,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 반대를 무릅쓰며 그 장을 깔아줬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중산층 형성이란 그의 최대 업적에 발목이 잡혔다.

김세중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는 한국을 빈곤에서 해방시키고 중산층을 키운 성공의 역설탓에 중산층의 데모에 시달리다 결국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는 결과를 맞았다.” 

  


1972‘10월 유신선포 후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가 격렬해졌다. 사진은 1973102일 서울 서대문 이화여대 입구에서 있었던 시위 모습. /photo 조선일보


60/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박정희 사망 소식에 쾌재를 불렀다

김문수(66) 전 경기도지사가 1979년 박정희 서거 직후 품었던 생각이다. 김문수 전 지사는 1970~1980년대 노동운동계의 대부(代父)였다.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반()박정희 투쟁의 선봉이었던 그는 1994년 보수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그의 반박(反朴) 투쟁은 경북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내에서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다. 그는 당시 사회 교과서에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부정적으로 기술했음에도 박정희가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반감이 일었다고 했다.

 

서울대 경영학과에 70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학내 서클인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길을 걷는다. 이후 청계천 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판잣집에서 노동법을 공부하며 의식화 교육에 전념했다.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대학에서 제적당하기도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두 번째로 제적당한 그는 당국의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이어가며 공장 대여섯 군데를 전전했다. 그때부터 그는 노동운동계의 실질적 리더로 떠올랐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197910·26사건이 터졌다. 그는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사회주의 노선이 가속화될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학생운동 은사 격인 안병직 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도쿄대 교환교수로 갔던 안병직 교수가 일본에서 생각이 바뀌어 왔더라. 그간 나와 안 교수는 자본주의 필망론을 외쳤다. 하지만 도쿄에서 돌아온 안 교수가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동운동 그만하고 딴 길을 찾으라는 충고도 했다.”

 

그때 그는 안병직 교수를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 그는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볼셰비키 비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에 관한 글을 읽은 뒤, 사회주의 이념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출소 후에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패망도 지켜보았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완전한 갈등에 빠졌다고 말했다. 결국 1994년 민주자유당(자유한국당의 전신)에 입당해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한 달간 미국을 방문, ‘자본주의의 본산(本山)’을 경험한 뒤로는 완전한 전향의 길을 걷는다.

 

그에게 박정희란 인물이 새롭게 다가온 계기는 경기도지사(2006~2014)로 재임할 때다.

 

도지사 시절 경기 북부 지역에 고속도로를 놔 달라고 중앙 정부에 요구했다. 생각해 보니 난 박정희의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었다. 당시 경기도 일자리의 약 25%가 자동차산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자동차산업에도 반대했었다. 내가 50~60대에 비로소 알았던 걸 박정희는 이미 1960~1970년대에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박정희 신도시(울산·구미·창원)는 토목공사 전문가들이 만든 신도시를 능가한다며 높은 점수를 주었다.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처음 시작됐을 땐 별것 아니라고 봤지만, 경쟁을 매개로 관민(官民)이 조화를 이뤄 농촌을 잘살게 만든 획기적인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 지도력의 근원을 일본식 교육에서 찾는다.

 

그는 군대라는 조직을 지휘한 경험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박정희의 권위주의 독재에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대치하던 특수 상황, 잦은 선거로 인해 대두될지 모르는 포퓰리즘을 경계해 박정희가 유신(維新)을 단행했다는 의미다.

 

그는 “5000년간 우리 민족이 겪은 가난, 좌절, 절망을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신념화해 산업혁명을 이룬 박정희는 위인이라며 전향하기 전에는 박정희의 공과를 0:10으로 봤지만 지금은 8:2로 본다고 했다. “압도적으로 공이 많은 인물이란 말도 덧붙였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김문수 전 지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동상을 최소 서울 광화문광장과 동대구역광장 두 군데엔 세워야 한다. 그것이 세계사적 위인에 대한 예의다.”

 

50/ 이동호 여의도연구원 부원장내가 알고 있던 게 사실과 달랐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연대사업국장을 지낸 이동호(58) 자유한국당 여의도연구원 부원장의 이야기다. 1979년 경북 경산의 영남신학대에 입학한 이동호 부원장은 민중신학을 공부하며 좌익사상에 눈을 떴다. 1985년 연세대 신학과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면서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속했던 전대협은 NL(민족해방) 계열 주사파 주도로, 전국 각 대학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결성한 학생운동 조직이다.

 

전대협에서 연대사업국장으로 일한 그가 밝힌 전대협의 활동은 대강 이러했다. “북한의 대남혁명 지도기관인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이 전대협에 혁명투쟁 방안 등에 관한 지령을 내려보냈다. 전대협은 북한의 지령을 수수한 뒤 그대로 따랐다. 사실상 북한의 대남적화노선을 전적으로 추종한 셈이다.” 이 부원장은 전대협에 개인적으로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1987년 연세대 조통(조국통일)그룹 소속이었는데, 조통그룹이 연대사업국장을 맡을 차례라 맡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자연스레 싹텄다. 그즈음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정희는 친일파 앞잡이란 부정적 인식이 더 강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인 1990년 초, 학원을 경영할 때 이념적 기둥인 소련이 무너지자 그의 생각은 점차 바뀐다. 1997년 북한 주체사상의 이데올로그인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은 전향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황장엽이 북한 체제를 비판한 글을 정독하며 그동안 알고 있던 게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한다.

 

그 무렵 박정희에 대한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대학 때 책에서 본 것에 따르면, 민중이 열심히 일해도 수탈을 당해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는 사회에 나와 바라본 대한민국은 점점 더 활력을 띠고 있었고 망하기는커녕 일자리도 계속 늘고 있었다그 배경에 박정희의 산업혁명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의 공적으로 한국인에게 숙명과도 같았던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넣은 것을 꼽았다. 수출주도형 경제를 통해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깨웠고, 그 성취를 통해 또 다른 성취도 이뤘다는 것이다. 사회 부문의 대표적 업적으로는 새마을운동을 꼽았다.

 

새마을운동 정신의 핵심인 근면·자조·협동을 보자. 산업도 사유재산도 없는데 근면·자조·협동할 수 있었을까. 박정희는 산업화를 이루고 개개인의 재산을 보장한 뒤 새마을운동을 실시, 국민의식 개혁까지 이뤘다. 민주공화국의 원리를 깨우쳐준 것이다.”

 

그는 “1987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룬 것도 국민소득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며 중산층을 두껍게 해 민주화의 토대를 만든 것도 결국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했다.

5·16군사정변에 대한 그간의 인식도 바뀌었다. 그는 “5·16은 비록 합법성은 결여돼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켰기에 정당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 따라가려면 잠을 덜 자는 수밖에 없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모든 자유를 다 허용한 상태에서 선진국을 따라갈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유신을 통해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고심작이 유신이다. 만약 지금 같은 민주체제였다면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제대로 추진됐을까. 중화학공업은 제대로 됐을까. 요즘 원전(原電) 하나 가지고도 저 난리 아니냐?” 박정희가 정치발전과 경제성장에 있어 효율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다만 그는 2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 사형, 과도한 학원탄압, 언론통제는 박정희의 분명한 과오라고 지적했다.

 

나는 전향 전엔 박정희는 없어져야 할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지금은 공이 8~9, 과는 1~2 정도로 본다. 지금과 같이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는 우리 경제를 박정희 경제모델을 통해 개선해야 한다.”

 

50/ 이강호 한국자유회의 간사박정희는 영웅이다

한때 운동권 핵심간부였던 이강호(필명·54) 한국자유회의 간사는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했다. 1963년생인 이씨는 부산에서 초··고를 나와 서울대에 입학했다. 82학번으로 재학시절 서울대 총학생회 핵심간부를 지내며 한 차례 복역한 적도 있다. 소위 언더라고 불린 지하서클 내 페이퍼팀에서 활동하면서 선전선동용 대자보와 유인물을 작성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한때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했다는 그의 박정희에 대한 인식도 운동권의 통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유신독재’ ‘반민주등 부정적 평가 일색이었다. 다만 PD(민중민주) 계열로서 박정희 집권기를 경제사적 측면에서 사회주의의 전 단계인 부르주아민주주의 단계에서 경제발전을 본격화한 시점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는 정도였다.

그랬던 그의 생각이 180도 바뀐 것은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에서 일하며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간여하면서다. 당시 연설문 작성에 참조하기 위해 들여다본 객관적 지표들이 운동권 시절 대자보와 유인물에 적었던 그것과 전혀 달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그는 과거 운동권 시절 가졌던 생각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좌익친북적 주장과 목소리가 갈수록 증폭됐다특히 노무현 정부 때 이미 사문화된 상태나 다름없던 국가보안법을 굳이 폐기하려던 386운동권 출신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운동권 정권’ ‘전대협 정권이란 생각을 굳혔고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전향이라는 것은 일조일석(一朝一夕) 간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라며 기존에 쓰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쓰는 것과 같은데 내 경우는 15년 정도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지금 그는 박정희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심지어 그는 “‘10월 유신(維新·1972)’마저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사실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를 긍정하는 사람 중에도 유신만은 1인 장기독재를 획책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는 “19717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 맞서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가 ‘4대국 한반도 안전보장과 북한과 협상을 통한 3단계 통일론, 대중(大衆)경제론을 설파했다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이것이 실현됐다면 오늘날 고도성장이 가능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지금과 달리 박정희 체제는 상시적 비상체제였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닉슨독트린 선포(1969) 등 안보위협 요인이 상존했고, 대내적으로는 좌익적 저항운동이 계속되는 등 안팎의 도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용공조작사건으로 치부되는 박정희 정권 시절 ‘4대 공안사건(인혁당·통혁당·해방전선·남민전)’ 역시 그는 실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학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지하서클에서 집중교육을 받았을 때도 이것(4대 공안사건)은 남한 해방운동의 피어린 발자취라고 배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운동권 핵심부로 진입할 때는 선배로부터 너희들도 열심히 하면 윗동네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윗동네가 과연 어디였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지금도 사람 중심과 같이 한때 주사파들이 숙어처럼 쓰던 말이 들릴 때마다 놀란다남로당 간부 출신 셋째형 박상희를 두고 본인도 한때 남로당에 몸담았던 박정희도 좌익적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과 남한 내 좌익세력의 준동은 박정희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변수다. 그는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란 말처럼 북한은 실체적 위협이었다“1991년 소련 붕괴로 공산국가들이 무너진 지금과 당시를 똑같이 보면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악의 여건에서 기대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민주화를 위한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으니 따지고 보면 ()민주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박정희의 공과 과를 얼마라고 평가하는 것은 평론가적인 쉬운 접근이라며 박정희 시대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취의 시대라고 말했다.

 

40/ 이종철 바른정당 대변인민주화를 가능케 만든 경제성장을 이룬 인물

이종철(44) 바른정당 대변인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1972년생인 이종철 대변인은 대구에서 초··고를 나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92학번인 그는 대학 입학 후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1995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19968월 그는 전대협의 후신인 한총련이 주축이 된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에 참가해 시위를 주도했다. 연세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한총련 소속 대학생 5000여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4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구속된 사건이었다. 그는 소위 연세대 사태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돼 19983월이 돼서야 사면을 받는다. 그는 운동권 시절 박정희를 이렇게 생각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일제에 복무한 인물로 장기집권을 통해 민주헌정질서를 무너뜨린 독재자였다.”

 

박정희를 비판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닫게 된다. “주사파로 활동하며 박정희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참 편향되고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좌편향 역사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한민국 역사 바로 알기 사업도 진행했다. 박정희에 대한 공과(功過)를 제대로 평가하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지도자였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현재 좌파진영이 박정희를 왜곡해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한국국제협력단(KOICA)새마을운동관련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2018년부터는 신규 사업을 추진하지 않는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새마을운동요소가 들어간 사업이 ODA 등 개발협력 사업에 선정되기 어렵게 하는 법 개정에 들어갔다.

이 대변인은 정부가 앞장서서 새마을이란 브랜드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박정희와 한국의 정체성을 지우겠다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박정희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은 세계가 주목한 농촌 개발 모범 사례다.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2016년 몽골·베트남 등 33개 개발도상국은 새마을운동글로벌리그(SGL·Saemaul Undong Global League)라는 국제기구를 만들었다. 여기에 가입한 회원국들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새마을정신을 배우고 있다   이 대변인은 좌파진영이 박정희의 과()만 부각시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운동권 간부로 활동했기에 주사파 출신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좌파진영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며 가졌던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이라는 것은 잘 안다. 물론 박정희가 모든 면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로서 리더십이 탁월했고, 뛰어난 역량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박정희 탄생 100주년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는 한국을 근대화한 인물이다. 한때 나는 박정희가 민주헌정질서를 무너뜨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탁월한 지도력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룬 그가 있었기에 훗날 민주화도 가능했다고 본다. 이제는 박정희의 과가 아닌 공에 대해서 재평가할 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소개하고 있는 박정희[朴正熙 ]

생몰: 1917~ 1979

출신: 경상북도 구미

대표관직(경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5·6·7·8·9대 대통령

 

생애 및 활동사항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을 한 다음,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2기생으로 입학, 군문에 들어갔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광복 때까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쟁에 가담했다가, 1946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되었다. 6·25전쟁 동안 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4년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5년 제1군참모장, 1960년 육군군수기지사령관, 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1년 제2군부사령관으로 재직중, 군부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던 1949, 사상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순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육군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운동으로 복역은 면제되었다. 이 때문에 한때 군인의 신분을 박탈당하였다가 6·25전쟁이 일어난 뒤 현역으로 복적되었다.1950년 육영수(陸英修)와 결혼하였다.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85개월간을 집권하였는데, 그의 통치시대는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4·19혁명으로 성립된 민주당정부를 무능·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장교들은 쿠데타 성공 후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 삼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 이를 통해 입법·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하였다.  그 의장은 박정희였다. 이로부터 27개월간 군정이 실시되는데, 최고통치권자인 최고회의의장 박정희는 먼저 구질서의 전면적인 개혁이라는 목표 아래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해체를 포고하는 한편, 용공분자와 폭력배의 검거에 착수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그 해 말까지 3,000여 명의 용공분자와 4,000여 명의 폭력배를 체포하였다.

 

군사정부는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발표하였으며 부정축재자에 대한 가차없는 조사를 실시하였다. 사회기풍을 바로잡기 위하여 댄스홀·고급요정 등 모든 환락가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으며, 비밀댄스홀에서 춤을 즐기던 남녀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최고 16월의 징역을 선고하였다.

 

쿠데타 1개월이 못 되어 전국적으로 보안관계 범법혐의자의 검거수만도 35,000여 건에 달하였다는 사실은 군정 초기에 얼마나 철저한 구악일소작업과 강력정치가 진행되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군사정부는 국민운동본부를 설치, 생활간소화·가족계획·문맹퇴치사업을 벌이는 한편, 친선방문외교·초청외교 등 적극외교의 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군정 초기의 집권세력 내부에는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에 주도권쟁탈전이 벌어져 일련의 반혁명사건이 꼬리를 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파는 완전히 거세되고 박정희 중심의 주류세력이 실권파로 정권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군정 후반은 민정이양을 둘러싼 공방으로 전국이 소란하였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이양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1월부터 시작된 정치활동재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서는 이른바 ‘2·27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복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8조치로 군정연장을 계획하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하는 등 번의를 거듭하였다. 그 사이 군정은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저질러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단일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대통령취임사를 통해 박정희는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3공화국의 박정희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일국교정상화였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기간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지양하고 자립경제확립을 위한 기반구축을 목표로 한 제15개년계획은 당시 후진국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인 연평균 7.1를 책정하였다. 그러나 계획 자체의 졸속과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부족으로 제15개년계획은 전반적으로 실적미달이었다.

 

·일국교정상화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진되었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대일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이미 군정기간인 1961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 한·일회의가 열렸다.

 

이와 함께 실무교섭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박정희는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일본수상과 회담하는 등 한·일문제 타결에 열의를 보였다. 이같은 대일자세는 친일외교’·‘흑막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박정희정부의 대일저자세시비는 제3공화국 의회 벽두에 대통령국회출석결의안 등으로 논란될 만큼 국민의 대일감정을 자극하였다.  특히 한국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문제와 이른바 ·오히라메모(·大平memo)’로 결정된 6억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여론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일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국민간의 공방은 ‘6·3사태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일으켰으나 박정희정부는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일을 성사시켜 결국 19656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일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고성장·수출드라이브·산업기지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졌으며, 이와 함께 점차 독재성향을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3선개헌으로 나타났다.  197210월 박정희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막강한 것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독재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야당과 재야세력에서 광범위하게 대두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대통령긴급조치로써 탄압하였다. 유신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긴급조치에 걸려 투옥당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여론도 한국의 강압정치를 비난하였으나 박정희는 굽히지 않았다.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정부는 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빈부격차를 가속화시켰고, 황금만능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한편,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국가안보면에서 빈틈없는 태세를 구축한 것은 박정희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박정희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간 밀사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는 1979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절정을 이루던 때, 10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측근의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하였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났다.

 

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저자 한홍구|한겨레출판 |2014.01.

 

저자: ‘걸어 다니는 한국 현대사라 불리는 이 시대 대표적인 역사학자이다. 한겨레21에 연재된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감춰진 현대사를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전달해서 지적 만족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대한민국사를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올바른 역사관이 무엇인지 역설한 바 있다.

1959년에 출생하여 서울대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걸어 다니는 한국 현대사라 불리는 저자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일명 김일성 전문가이다. 그는 꿈꾸는 권리조차 박탈당했던 한국 현대사의 금기들을 통쾌하게 고발해온 논객으로 유명하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원회) 민간위원을 역임했으며, 평화박물관 이사,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한국 현대사를 왜곡하고 헌법정신을 훼손했던 사람들을 기록한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 작업에도 앞장서고 있다.

 

논문으로 상처받은 민족주의등이 있으며,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역사이야기'를 연재하였고, 지은 책으로 대한민국사1~4,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읽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공저),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공저)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특강,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공저), 직설(공저), 유신등이 있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통령이 군림하는 나라에서 근현대사를 공부한 죄로 여기저기 역주행의 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며 임시정부 건국 강령과 제헌헌법의 주요 내용을 외치고 있다.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 전투경찰 없는 세상을 꿈꾸고, 어디 존경할 만한 보수 한 분 없을까 두리번거리고 있다.

 

목차

추천사고은(시인)

여는 글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저자 서문

프롤로그 -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

 

1부 헌정의 파괴

1 유신 전야, 1971년의 대한민국

2 친위 쿠데타의 준비, 풍년사업

3 박정희와 일본 - 유신의 정신적 뿌리

 

2부 헌법 위의 한 사람

1 국회 안의 꼭두각시, 유정회

2 윤필용 사건

3 김대중 납치 사건

4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5 인혁당 재건위 사건

6 대통령 저격 미수와 육영수 여사의 죽음

7 장준하 의문사

 

3부 금기, 저항, 상처

1 금기의 시대와 청년문화

2 여공애사

3 동일방직 노동조합 인분 사건

4 반도상사 노동조합과 중앙정보부

5 도시산업선교회 마녀사냥

6 기자들의 각성, 자유언론실천선언

7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8 ‘무등산 타잔의 비극

 

4부 유신의 사회사

1 조국 군대화의 그늘

2 베트남 파병이 남긴 것

3 기지촌 정화운동

4 유신의 다른 이름, 새마을운동

5 통일벼와 식량증산정책

6 원자력발전과 핵무기 개발 사이

7 강남공화국의 탄생

8 중학교 입시 폐지와 고교 평준화

 

5부 유신체제의 붕괴

1 10?26의 서곡, YH 사건

2 남민전 사건

3 김형욱의 실종과 죽음

4 부마항쟁, 불길이 치솟다

5 1979.10.26. 운명의 날

 

에필로그 - 도청에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광주, 그 장엄한 패배

부록1 - 박근혜 후보에게 드리는 공개장

부록2 - 신유신의 밤

 

출판사 서평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던 시대

1부 헌정의 파괴에서는 우선 1970년대 초반의 풍경을 통해 1972년 비상계엄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이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수구논객 조갑제마저도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그야말로 느닷없는 느낌을 받는다며 시인한, 박정희의 종신집권 야욕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유신의 원인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2부 헌법 위의 한 사람에서는 법과 인권,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을 소개한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게 했던 유정회와 같은 제도에서부터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장준하 의문사 사건, 민청학련 사건과 초유의 사법살인을 자행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오직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무리수가 자행되었으며, 이러한 사건들이 결국은 어떻게 박정희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살펴본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진정한 영웅, 공순이

3부 금기, 저항, 상처에서는 그 시대 민초들의 삶을 조명한다. 특히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 세칭 공순이들의 눈물겨운 삶과 투쟁의 역사를 복원한다. 그들은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이다. 오빠나 남동생을 공부시키고자 꽃다운 나이에 도시로 나와 최소한의 인권마저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던 게 그들이다. 또한 그들은 1970년대 내내 노동운동을 책임졌다. 대학생들조차 변변히 데모를 하지 못했던 유신의 마지막 순간 YH 사건을 통해 철옹성 같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단초를 연 것도 그들이다. 3부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동일방직 노조, 반도상사 노조의 상황 등을 통해 당시 노동운동의 모습을 전한다. 더불어 언론운동의 흐름도 살펴본다. 농성 중인 대학가에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을 정도로 신뢰를 잃은 언론인들도 부끄러움을 종식하기 위해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선다. 유신체제의 탄생 이후 숨죽였던 저항의 불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4부 유신의 사회사1970년대의 사회상을 전한다. 조국군대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 사회가 병영화되는 가운데 벌어진 베트남 파병, 새마을운동, 기지촌 정화운동, 강남 개발 등의 모습을 통해 미시적 영역에까지 드리운 독재의 그늘을 확인한다.

 

급격히 붕괴된 유신체제, 갑자기 찾아온 봄

5부 유신체제의 붕괴YH 사건에서부터 10.26까지를 다룬다. 가발 수출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YH무역의 폐업에, 이를 막아달라며 YH 노동자들이 당시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신민당사에 들어간 일이 유신정권의 몰락을 향한 신호탄이 될 줄은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197989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98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판결, 104일 김영삼 의원 국회에서 제명, 1016일 부산대 유신반대 시위 시작, 1018일 부산에 비상계엄 선포, 10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그간 곪아온 유신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봄은 오래 가지 않았다. 10.26 이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를 이어가고자 했던 전두환의 야욕에 김재규는 국부를 죽인 패륜아가 되었으며, 죄 없는 광주시민들은 폭도가 되었다. 여전히 유신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출판사 서평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던 시대 

1부 헌정의 파괴에서는 우선 1970년대 초반의 풍경을 통해 1972년 비상계엄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이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수구논객 조갑제마저도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그야말로 느닷없는 느낌을 받는다며 시인한, 박정희의 종신집권 야욕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유신의 원인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2부 헌법 위의 한 사람에서는 법과 인권,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시대의 주요 사건을 소개한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게 했던 유정회와 같은 제도에서부터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장준하 의문사 사건, 민청학련 사건과 초유의 사법살인을 자행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오직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무리수가 자행되었으며, 이러한 사건들이 결국은 어떻게 박정희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살펴본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진정한 영웅, 공순이 

3부 금기, 저항, 상처에서는 그 시대 민초들의 삶을 조명한다. 특히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노동자, 세칭 공순이들의 눈물겨운 삶과 투쟁의 역사를 복원한다. 그들은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이다. 오빠나 남동생을 공부시키고자 꽃다운 나이에 도시로 나와 최소한의 인권마저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던 게 그들이다. 또한 그들은 1970년대 내내 노동운동을 책임졌다. 대학생들조차 변변히 데모를 하지 못했던 유신의 마지막 순간 YH 사건을 통해 철옹성 같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단초를 연 것도 그들이다. 3부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동일방직 노조, 반도상사 노조의 상황 등을 통해 당시 노동운동의 모습을 전한다. 더불어 언론운동의 흐름도 살펴본다. 농성 중인 대학가에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을 정도로 신뢰를 잃은 언론인들도 부끄러움을 종식하기 위해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선다. 유신체제의 탄생 이후 숨죽였던 저항의 불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4부 유신의 사회사1970년대의 사회상을 전한다. 조국군대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 사회가 병영화되는 가운데 벌어진 베트남 파병, 새마을운동, 기지촌 정화운동, 강남 개발 등의 모습을 통해 미시적 영역에까지 드리운 독재의 그늘을 확인한다.

 

급격히 붕괴된 유신체제, 갑자기 찾아온 봄 

5부 유신체제의 붕괴YH 사건에서부터 10.26까지를 다룬다. 가발 수출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YH무역의 폐업에, 이를 막아달라며 YH 노동자들이 당시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신민당사에 들어간 일이 유신정권의 몰락을 향한 신호탄이 될 줄은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197989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98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판결, 104일 김영삼 의원 국회에서 제명, 1016일 부산대 유신반대 시위 시작, 1018일 부산에 비상계엄 선포, 10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그간 곪아온 유신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봄은 오래 가지 않았다. 10.26 이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를 이어가고자 했던 전두환의 야욕에 김재규는 국부를 죽인 패륜아가 되었으며, 죄 없는 광주시민들은 폭도가 되었다. 여전히 유신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책속으로

유신시대는 일제가 키워낸 식민지 청년들이 장년이 되어 사회를 운영해간 시기였다. 이 시기는 친일잔재 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 친일잔재를 청산하려던 세력이 거꾸로 친일파에게 역청산당한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참혹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박정희를 사령관으로 하는 병영국가는 그가 청년기를 보낸 시절 만주국의 국방 체제나 일본의 총동원 체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황국신민으로 태어나 황국신민으로 자라난 친일파박정희의 진면목은 청년장교 시절보다도 만주국이나 쇼와유신의 실패한 모델을 다시 살려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유신체제의 폭압성은 박정희의 지도력 부족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된다. 박정희는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따라 복잡해진 사회구성을 더 이상 최소한의 형식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방식으로는 이끌어나갈 수 없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의 퇴행은 박정희가 체질에 맞지 않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틀을 벗고 젊었을 때부터 익숙한 일본식 모델을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 들고나온 것을 의미했다.---p.23

 

유신의 원인을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는 논쟁이라 부를 것도 없이 싱겁게 결론이 내려졌다. 절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박정희가 내세운 위기란 과장된 것이고, 실제 위기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헌정 중단과 같은 비정상적인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데 거의 이견이 없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13권짜리 전기를 쓴 수구논객 조갑제조차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그야말로 느닷없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특별선언문 어디에도 왜 이런 엄청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고 인정했다. 유신체제 출현의 근본 원인이 박정희의 종신집권 야욕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박정희에게 종신집권의 야욕이 없었다면 유신과 같은 독재 체제가 튀어나와야 할 역사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p.30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크게 약진한 것은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에게 강력하고 도전적인 야당이 포진한 국회란 당파 싸움과 국론 분열만 일삼는 비능률적인 공간이었다. 박정희는 몰래 유신을 준비하면서 국회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박정희가 고심했던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회에서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등 대도시에서의 참패, 즉 여촌야도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도록 해버렸다. 그리고 소선거구제 대신 중선거구제를 도입하여 도시에서도 여당 후보가 야당과 동반 당선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여권이 언제나 3분의 2에 가까운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p.59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 당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았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 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p.77

 

박정희의 집권 18년 중 절반 이상인 120개월가량이 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또는 긴급조치였다. 유신시대는 1973년에 몇 달과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이듬해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될 때까지의 몇 달 만을 제하곤 쭉 긴급조치의 억압과 공포가 지속된 시기였다.---p.97

 

박정희 정권 시절 최악의 공안조작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토대로, 2007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1심에서 490억의 배상판결을 받았고, 상당한 액수를 가집행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자가 과잉계산 되었다며 배상액수를 대폭 삭감하였고, 국가는 이를 토대로 배상금을 받은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251억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혁당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p.116

 

20세기 후반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수구진영 일각에서는 산업화 세력이란 말로 자신들을 포장하면서 민주화도 산업화가 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한다. 또 일부에서는 박정희를 산업화의 아버지,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떠받들기도 한다. 과연 이 땅의 민주화와 산업화는 누가 이룬 것일까. 민주화와 산업화 두 과제에서 정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면서도 주역으로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은 노동자, 특히 공순이란 이름으로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들이며, 그 강고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의 선봉들이다.---p.165

 

사람들 사이에동아일보보는 맛으로 산다는 말이 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19741216일부터 몇몇 회사가동아일보로부터 광고 동판을 회수해가기 시작했다. 당시동아일보의 광고 효과는 매우 컸기 때문에 광고를 한번 실으려면 현금을 주고도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동아일보에서 광고주들이 사정은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를 취소하고 동판을 회수해간 것이다.동아일보는 처음에는 예약된 광고를 앞당겨 싣거나신동아,여성동아같은 자매지의 책 광고를 실으며 버텼지만, 광고의 98퍼센트가 해약되자 1226일 광고면을 백지로 발행했다. 영향력과 발행 부수에서 단연 1위를 자랑하던 신문에서 광고가 사라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광고탄압으로 자유언론의 목을 죄려 했지만, 정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로 언론인 홍종인이 1228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라는 제목의 의견광고를 실은 것을 시작으로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중앙정보부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었고,동아일보구성원들로서는 차마 받기에 가슴 아픈, 정말 가슴 아픈 성금과 격려광고에 목이 메었다.---p.226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이들 중 실제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자는 극소수라 하더라도, 유격대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을 잠재적 베트콩으로 보고 총을 겨눴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 광주학살의 주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던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p.272

 

19791018일 아침, 조간신문을 집어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부산에 18일 자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하도 비상사태다’, ‘긴급조치다’, ‘위수령이다등 특별조치를 남발했지만, ‘비상계엄이란 말에는 각별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계엄법에 따르면 비상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지난여름 YH 사건이 터진 뒤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떨어지고, 2주일 전인 104일에는 급기야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는 소동까지 일어나는 등 정국은 계속 요동치고 있었지만, 비상계엄은 참으로 느닷없었다. 7년 전 1017일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유신체제는 꼭 7년 후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종막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틀 전인 1016일 부산대학에서 일어난 작은 시위가 5만 군중이 참여하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발전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또한 비상계엄을 불러온 이 시위가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태풍을 불러올 나비의 날갯짓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것이 바로 197910월의 부마항쟁이었다.---pp.383~384

 

김재규는 5·16과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내란에 동행했으면서도 결국 이 내란을 종식시켰다. 김재규의 행동을 내란 목적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은 전두환의 내란이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말로 국민들에 대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524일이었다.

 

박정희의 맨얼굴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 저자 유종일, 김상조, 이정우, 박현주, 박섭 외 |시사IN|2011.10

 

목차

발간사 역사적 바른 평가를 지향하며

추천의 말 폭압에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며

서문 객관적이고 엄정하고자 했다

 

1부 거시경제   

1장 경제성장 신화의 허와 실 _유종일

박정희는 과연 성공 신화의 주역인가

경제성장 신화에 가려진 어두운 이면

양극화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

우리 시대 진보에 관한 성찰

 

2장 개발독재가 키운 두 괴물, 물가와 지가 _이정우

경제학자의 책임이 크다

한국의 지가地價는 왜 이렇게 높은가?

박정희 시대 지가 100배나 뛰었다

물가物價 수준으로는 이미 선진국

물가상승 책임에서도 박정희는 금메달

성장 집착과 과욕이 키운 화근

 

2부 통제경제의 실상    

3장 재벌 중심의 왜곡된 구조 _박헌주

왜 재벌 중심의 근대화 전략 택했나

국유기업처럼 통제하다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이 치른 비용

인간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게 근본 원인

 

4장 외환위기의 뿌리 _김상조

개발금융체제의 특징

민간기업 자금 조달과 운영에 직접 개입

개발금융체계와 기업의 설비투자

재벌의 독점적 지배력 확대의 폐해

재벌로 흥하고 재발로 망하다

박정희 체제는 외환위기의 뿌리

 

5장 산업정책, 협력에서 저항으로 _박섭

들어가는 말

수출지향형 공업화

중화학공업화

협력에서 저항으로

맺는 말

 

3부 성장의 그늘    

6장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의 성장 _윤진호

잊지 말아야 할 노동자, 농민의 역할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쌓아올린 수출입국

전방위적인 노동통제에 나선 국가

노동의 사회화와 노동운동

노동운동과의 충돌로 정권 붕괴

 

7장 농업, 압축성장 속의 압축쇠퇴 _조석곤

두 개의 얼굴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

압축쇠퇴: 박정희 정권 아래 한국 농업의 성과

고미가정책과 새마을운동이 농촌을 바꾸다?

도시에 비해 현저하게 생명력 상실한 지역으로 전락

 

8장 복지 없는 성장 _신동면

박근혜 의원의 추도사

자본주의체제에서의 사회복지정책이란?

박정희 정권의 사회복지정책

사회복지가 발달하지 못한 정치경제적 이유

말 그대로 꿈으로 끝난 복지국가 건설

 

출판사서평

많은 사람이 말한다. 대한민국이 가난을 면한 것은 오로지 박정희 덕분이라고. 뇌보다 강한 것이 위(밥통)라고 했던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배고픈 설움을 뼈저리게 경험한 나이든 세대일수록 이 말을 거의 신앙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다. 이 믿음 아닌 믿음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박정희식으로 머리를 깎고 성장제일주의(747공약)를 부르짖으며 집권해 4대강 토목사업을 밀어붙이는 것은 바로 박정희 신화라는 단단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얼마나 강하던지 박정희 군부 독재 치하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 가운데서도 박정희가 경제만큼은 잘 했다고 머리를 끄덕이는 사람이 적지 않은 지경이다. ‘하면 된다는 매우 불온한 경구로 포장된 박정희 신화는 역사 바로 잡기, 민주, 도덕성, 인권, 청렴과 같은 가치에 재를 뿌리는 악의에 찬 힘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대한민국의 오래된 신흥종교는 한 번도 제대로 검증된 일이 없다.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면서도 밝은 곳으로 끌려 나와 정체를 드러낸 일이 없다.

 

모두 경제학을 전공한 쟁쟁한 국내학자 8인이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에 나섰다. 그들은 소총을 분해하듯 박정희 신화의 부품들을 하나하나 떼어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들의 야심에 찬 작업을 모은 책이 바로 박정희의 맨얼굴이다.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200910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에 즈음해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이사장 함세웅)가 지원해 한국경제정책연구회에서 과제를 수행했다. 1차 연구 결과는 2009119일 열린 박정희 시대 바른 평가를 위한 학술대회에서 발표됐으며, 그 뒤 계속 보강 연구를 진행하고 두 명의 학자 원고를 더 보태 이번에 책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발간사에서 이 책이 친일 매국과 독재 체제가 형성한 온갖 부정과 불법을 송두리째 타파하는 변혁의 원동력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는 추천사에서 전태일 열사와 같은 노동자의 희생 없이 어찌 고도성장이 가능했겠느냐라며 박정희 혼자서 그 공을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모든 논문의 편집 책임을 맡은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객관적이고 엄정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유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는 재벌과 비대한 토건 부문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과 정부 통제 아래 이들 부문에 자금을 지원하는 관치 금융이란 왜곡된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는 결국 재벌-토건-경제 관료를 축으로 하는 3각 특권 성장동맹을 낳았고, 이 동맹은 성장지상주의 이데올로기를 한국 사회에 전파하며 지배력을 강화해왔다. 박정희 향수란 바로 이 성장 이데올로기의 한 표현이다. 박정희 경제는 언젠가는 운명적으로 환란과 같은 파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경제였다는 것이 유 교수가 내린 결론이다.

 

유 교수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 7명이 매긴 성적도 그리 후하지는 않다. 그들에 따르면 박정희 경제는 후대에 부담을 안기는, 한계가 분명한 구조였다. 땅값과 물가를 폭등시키면서 조급하게 추진됐고(이정우), 특정 계층 즉 재벌과 결탁한 방식의 통제 체제를 만들었고(박헌주), 금융의 재정화 과정을 통해 관치금융을 구조화했으며(김상조), 초기에는 산업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냈으나 정권 말기에는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박섭),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위해 억압적 정책을 실시하고 일상적 노사 개입을 강행했으며(윤진호), 농업을 압축 쇠퇴시켰고(조석곤), 기업의 이해가 과도하게 반영돼 복지가 도외시됐다(신동면)는 것이다. 보수 언론이 수 십 년간 덧칠해온 두터운 화장을 지우자 드러난 박정희 경제의 맨얼굴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오늘날 한국 경제가 안은 복잡하고도 어려운 문제들의 뿌리를 더듬어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우리가 지금 밥술이나 먹고 사는 것은 오로지 박정희 덕분이란 말을 들으면 영 의심스럽거나 화가 막 치미는 이들에게도 강추다. 정색을 한 토론회 석상에서건 술자리에서건 성장지상주의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밥술이나 먹게 된 것은 오로지 박정희 덕분이라는 말을 들으면 믿어지지 않거나, 화가 치미는 이들을 위한 책 

전태일 열사가 나도 인간이다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한 비극은 당시 노동자의 비참했던 실정을 웅변한다. 이들 노동자의 희생 없이 어찌 고도성장이 가능했겠는가. 박정희 혼자 그 공을 차지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의 추천사중에서

 

양극화와 재벌 독주는 박정희의 유산

오늘의 심각한 사회문제인 양극화와 재벌의 독주, 그리고 경제의 불평등은 바로 박정희 개발독재의 산물입니다. 독재자는 늘 자신을 지지하고 협력하는 세력만을 구축합니다 () 이런 단순한 사실을 왜곡하는 이들은 박정희의 아류입니다.

민족을 배반하고 일본에 아부하여 부와 권력을 유지했으면 친일매국노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을 살상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면 반민주 독재자일

뿐입니다. 반민족적이며 반민주적인 행위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감추려는 것은 새로운 유형의 친일매국이며 독재를 옹호하는 반민주 죄악입니다. - 함세웅 신부의 발간사중에서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5.16에서 10.26까지 저자 조희연|역사비평사 |2007.08


저자: 조희연 1956년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남가주대학교(USC)에서 한국학 객원교수와 영국 랑카스터대학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BC)에서 교환교수를 지냈고, 비판사회학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이며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 성공회대학교 통합대학원장과 민주주의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Inter-Asia Cultrual Studies : Movement(Routledge 발행)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198822개 진보적 인문사회과학연구단체의 연합체인 학술단체협의회 창립에 적극 참여했으며, 1994년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참여연대 창립에 주도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1999년 이재정 성공회대 당시 총장(전 통일부 장관)과 함께, 시민운동가 재교육기관인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을 설립하고 2007년 아시아 사회운동가 재교육과정으로서의 MAINS(아시아비정부기구학과정), 민주주의연구소, 민주자료관, 인권평화연구소, 아시아NGO정보센터, 민주사회정책연구원 등을 설립하는 등 현재 성공회대학교의 진보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2003'문화일보' 여론조사에서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같은 해 '시사저널'이 시민운동가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사회에 대한 냉철한 시각으로 진보적인 시각에서 정치와 사회를 분석하며, 그러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연구하는 지식인이다. 참여연대의 창단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한국사회과학연구소 회원 겸 연구기획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 이후로 사그러든 한국의 지식사회에 한국사회의 성격에 대한 논쟁, 최장집, 임지헌 비판 등을 계속하여 침묵하는 한국사회를 논쟁의 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계급과 빈곤, 현대 한국 사회운동과 조직,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한국의 국가·민주주의·정치변동,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에서 정상성에 대한 저항으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지구화 시대의 국가와 탈국가, 동원된 근대화등 다수의 편저와 논문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 박정희를 다시 읽기 위하여

 

15·16군사쿠데타, 개발독재시대의 개막

개혁과 통제의 이중주, 쿠데타정권의 초기정책

식민화된 군인에서 정치군인으로

민심을 얻기 위한 경제개발 드라이브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빰친다

스페셜 페이지박정희 시대의 미국

 

2장 한일회담의 진통 속에서 개발의 돛은 올라가고

군사정권의 첫 위기, 한일회담 반대투쟁

수출 아니면 죽음을

일석이조의 베트남 파병

3선개헌으로 가는 길

스페셜 테마반독재 진영은 경제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3장 개발동원체제의 성공의 위기

극단적 반공체제의 강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3선개헌, 장기독재의 길을 열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 경부고속도로 개통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유신 전야의 총체적 위기

새로운 돌파구, 남북대화와 복지정책

스페셜 테마박정희 시대의 부패

 

4장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체제의 등장

유신쿠데타, 체제의 파시즘적 재편

2의 한국전쟁, 중화학공업화

독재가 길어질수록 저항도 거세지고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의 명암

청년문화의 등장

스페셜 테마애국과 성()

 

5장 긴급조치 9호와 민주주의의 암흑기

긴급조치 9호의 시대

권력 엘리트의 도덕적 균열

경제적 집중과 중복투자의 한계

긴급조치 9호와 저항운동

노동자와 농민, 저항의 주체가 되다

선도하는 국가, 신세대의 출현

스페셜 테마공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

글을 맺으며- 민주화 이후에 박정희를 다시 본다는 것

시대정신을 둘러싼 경쟁

보수적으로 박정희를 읽는다는 것

진보적으로 대안모델을 찾는다는 것

부록 : 주요 사건 일지

참고문헌

이 책에 쓰인 사진의 출처

 

책속으로

당시 5.16 주도세력의 71%는 농촌 출신의 중하층이었다. 또 야당 인사의 41%가 지주 계급인 반면 군정 인사의 26%만이 지주 계급이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마치 진보 여당과 보수 야당의 대립 구도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특히 민정당 등의 야당이 지주적 기반을 잇는 보수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일부 혁신계 인사들은 박정희의 진보적 이미지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p51 중에서

 

박정희를 버린 국민은 그의 군대식 일사분란한 리더십을 버린 것이다. 대중들은 그 리더십의 결과 자체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지닌 강권적 성격은 이제 수용할 수 없는 상태로 변화해버렸다. 만일 지금 박정희의 리더십을 다시 살리고 싶다면, 그의 왕국이 바로 그 리더십의 부정적 측면 때문에, 또한 그 리더십이 성취한 성장의 모순 땜누에, 그리고 그 리더십이 성장의 모순에 응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붕괴되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p236 중에서

 

이 책에서는 개발동원체제(developmental mobilization regime)라는 개념으로 박정희 체제를 규정할 것이다. 한국의 개발동원체제가 지닌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반공주의였다는 점에서 박정희 체제는 '반공주의적 개발동원체제'였다. 또한 군인이 주도한 국가 주도의 동원체제였다는 점에서 '군대식 개발동원체제'이기도 했다.

 

개발동원체제는 위로부터 사회를 조직하고 재편하며 아래의 '동원'을 이끌어내는 체제이다. 국가가 단순히 정책 집행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사회를 재편하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에 대한 일종의 국가적 '기동전'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사회의 반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에 대해 역작용하는 체제이다. 12-13

 

진보 담론이 강조하듯이 박정희 체제는 폭력적, 폭압적이었지만, 최근에 등장한 '대중독재론'에서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새마을 운동의 지지자들이 보여주는 '열광'이나 강렬한 동의의 측면도 존재한다. 또한 미국에 의존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측면도 존재한다. 경제정책조차도 하나의 측면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심지어 박정희 자신도 하나가 아닌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14

 

5.16 군사혁명위원회는 반공을 '1의 국시'로 내세우면서, 4.19혁명 이후의 혼란과 국가안보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명분 아래 다양한 조치들을 발표했다.

첫째, 부정축재자와 부정선거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발표했다. ...

둘째, 쿠데타세력은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규정한 구정치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활동 규제방안을 마련했다. ... 기존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가 해산되고 재조직되는 과정을 밟았다. 예컨대 노동조합 연합조직은 19618월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 재조직되었다. ...

셋째, 사회정화를 지향하는 다양한 국민적 캠페인을 벌였다. ...

넷째, 523일에는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이후 정기간행물 1,200여 종을 폐간시키고 언론사를 통폐합하는 등 대대적인 언론출판 정화조치를 취했다. ...

다섯째, 일련의 개혁조치에는 경제 개혁에 관한 것도 포함되었다. (ex/ 농가부채탕감, 부패 연루 기업인 숙청) ...

여섯째, 국가폭력의 제도적 장치로서 반공법을 전격적으로 제정했다. 23-28

 

쿠데타 세력이 단행한 개혁 조치들은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동안 국민들이 공분을 느끼고 있던 사안에 대해서는 민간정부가 할 수 없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하여 쿠데타세력의 차별성을 확보했다. 이는 동시에 자신들이 목표로 하는 '국가와 사회의 군대식 재구조화' '쿠데타세력의 주도권 확보'라는 성격도 함께 갖고 있었다. 29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저자 전재호|책세상 |2000.05.   

저자: 전재호는 1963년 서울생으로, 1982년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1984년 부총학생장으로 학내외 민주화 투쟁에 전념했다. 그후 서강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 <마르크스의 리카도 노동가치론 비판>으로 1990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중 하버드-엔칭 연구소HAVARD-YENCHING의 박사과정생 지원 프로그램을 발견, 1995년 방문연구원VISITING FELLOW으로 선발되어 1997년 여름까지 캠브리지에 머물렀다. 역사학, 인류학, 고고학을 접한 하버드와 MIT의 수업들은 민족주의 연구에 대한 다양한 접근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이후 가톨릭대, 국민대, 서강대, 여수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남북한의 만족주의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민족주의와 역사의 이용 : 박정희 체제의 전통문화정책> <5·18담론의 변화와 정치변동> <박정희로부터 역사를 구출하자 : 박정희의 '영웅 만들기'를 비판한다> <지구화 시대의 한국민족주의 :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경제민족주의 담론 비교 연구> 등이 있고, 최근 다니엘 부어스틴의 <탐구자들SEEKERS>을 공역했다.

 

목차

001. 책을 쓰게 된 동기....(8)

002. 들어가는 말....(11)

1..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인가?...(19)

1.. 박정희에 대한 상반된 평가...(23)

2.. 민족주의란 무엇인가?...(29)

3.. 결론...(34)

2.. 박정희 정권의 반동적 근대화...(35)

1.. 민족적 민주주의와 한국적 민주주의 - 박정희의정치관...(38)

2.. 민족 중흥과 조국 근대화 - 박정희의 경제정책...(57)

3.. 상무정신과 영웅의 부활 - 박정희의 역사관...(85)

3.. 박정희 신드롬 비판...(109)

003. 맺는 말 - 박정희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하여...(118)

004. ...(126)

005. 더 읽어야 할 자료들...(137)

006. 감사의 글...(146)

 

지난 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우리 사회에는 '박정희 신드롬'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 신드롬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박정희가 한국의 경제발전을 성공시킴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고양시킨 국가적 공로자라는 점과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1인 지배체제를 공고히 한 독재자라는 상반되는 평가이다. 이러한 양 측면을 분리하여 어느 한 면만을 과장하는 식의 평가가 일반적인 가운데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는 박정희와 그 정권의 사고의 이면을 추적하면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한다.

 

저자는 박정희 정권의 사고가 19세기 말 독일의 '반동적 근대화'를 이끈 사고와 유사하다고 보고, 이를 '반동적 근대주의reactionary modernism'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반동적 근대주의란 전통적/전근대적 사고와 근대의 기술이 기묘하게 결합된 측면을 지적한 것으로, 이를 규명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의 정치관, 경제정책, 역사관 등을 면밀히 고찰하고, 이러한 것들이 모여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효과적으로 실용되었음을 간파한다.

 

책속으로  

우리는 박정희 시기를 긍정적인 측면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숱하게 행해졌던 인권 유린, 민주주의 파괴,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그 시기의 또다른 얼굴이다. 박정권은 북한 공산당의 남침 야욕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말로 국가 안보를 위해 경제 발전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들에게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도, 노동자의 권익도 희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박정희의 독재는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박정권은 군사 쿠데타의 군정 지속을 정당화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것과는 다른 민족주의 개념을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 첫 시도가 19623월에 발간된 박정희의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제시한 '행정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다. 이는 국민들이 스스로 다스려나가는 힘을 길러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임시 정책으로 행정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행정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인 국민에 의한 통치에 대한 유보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지니고 있다. --- p. 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박정권에 대한 평가는 공정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찬양으로 일관되어 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박정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에 기여한 점을 '공정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평가는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단적으로 박정권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고통을 가해서 자신의 개인적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시대의 절대군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권의 근대화를 반동적 근대화로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 p.123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저자 김재홍|책보세 |2012.01

 

저자 김재홍(金在洪)1950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고교를 마쳤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정치학)를 취득했다. 1971년 문리과대학 대의원회 의장으로 반독재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제적당한 후 강제입영 조치되었다. 1978동아일보기자로 입사했으나 1980년 광주시민항쟁에 대한 자유언론보도운동으로 신군부 세력에 의해 강제해직되었다. 198287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강사 및 서울대학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88동아일보에 복직하여 정치부 차장을 거쳐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93년 관훈언론상을 수상했으며, 199596년 미국 하버드대 니만펠로십을 수료했다.동아일보를 퇴직한 2001년부터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했으며,오마이뉴스논설주간을 겸임했다.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2004년 제17대 국회에 진출하여 문화관광위 법안심사소위원장,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국회 정치커뮤니케이션연구회 대표의원을 역임했다. 그 밖에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국가안보회의 사무처 정책자문위원, 통일부·국방부·중앙인사위·국정홍보처 정책자문위원을 지냈다. 현재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민주평화복지포럼 정책홍보위원장 겸 대변인, 서대문발전위원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1982), 한국정치와 현대정치사상(1987), 군부와 권력(1992),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1992), 1: 정치장교와 폭탄주(1994), 2: 핵 개발 극비작전(1994), 박정희살해사건비공개진술: 운명의 술 시바스(1994), 박정희살해사건비공개진술: 대통령의 밤과 여자(1994), 박정희의 유산(1998)이 있다.


목차

여는 글 / 프롤로그

 

1장 주색잡기로 찌든 독재자의 밤

정인숙 피살사건에 얽힌 박정희 권력집단의 엽색행각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박정희와 그들만의 향연

박정희의 연이은 국민 사유재산 강탈 사건

표현과 일상의 자유마저 짓밟은 가위질 정권

김재규는 왜 쓰러진 박정희를 확인사살까지 했을까

, 그 얘긴 하지 마!”

이틀 걸러 사흘마다 벌어진 밤의 향연

유신정권의 최후를 지켜본 두 여인

 

2장 박정희 살해는 정당방위였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체포 작전

청와대 경호실 호랑이 1작전 불발

박정희 살해, 미국이 개입했을까

10.26 전야 김영삼 제거공작

10.26, 권력투쟁 드라마의 종합세트

박정희가 살아있는 한 자유민주주의 회복은 불가능

각하하고 나하고 같이 없어져야겠다는 생각도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보다보다 안 돼서 혁명했다

김재규 최후진술 대통령 희생, 국민 모두를 위한 것

 

3장 박정희, 고문과 테러의 더러운 전쟁

더러운 전쟁의 시작, “옷을 다 벗으세요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박정희의 공포통치

김대중 납치, 김영삼 초산테러, 법관과 언론인 겁박

타임지에 각하 사진을 게재하라

 

45.16쿠데타, 권력은 총구에서

스라소니박정희에게 물린 호랑이이한림

정치군인 전두환이 박정희의 후예가 된 사연

 

5장 친위대장들의 권력게임

군사정권의 친위대장들

공포정치의 상징, 남산과 빙고호텔

대통령의 그림자, 경호실장

청와대 경호실장 대 중앙정보부장

 

6장 윤필용 사건과 하나회

용의 역린을 건드린 한마디, “퇴진

실체를 드러낸 군내 비밀사조직 하나회

 

7장 배신과 변신의 달인 박정희

거듭되는 배신과 변신, 기회주의자 박정희

박정희 정권의 검은 거래 독도밀약

 

출판사 서평

혈서로서 대일본제국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일본군 장교로 입신한 박정희가, 4.19혁명정신을 짓밟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지도 어언 반세기가 지났다. 1961년 민주정부를 뒤엎고 총으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가 18년간 일인독재 철권통치를 자행한 끝에 그의 심복인 김재규의 총탄에 비명횡사한 지도 벌써 32년이 지났다. 한 세대가 지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박정희 망령이 아직까지도 우리 현실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형국이다. 반면에 민주혁명의 대의로써 박정희를 처단한 김재규는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후 아직까지도 그 명예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는 집권 이후 언론을 손아귀에 넣고 정보와 여론을 통제한 가운데 스스로를 근대화와 산업화의 아버지로 포장함으로써 결국 우리 역사에 긴 허위와 망령의 그림자를 남겼다. 그렇게 날조된 신화로 민심이 오도된 나머지 그에 대한 역사적 단죄가 아직까지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박정희가 역대 가장 훌륭한 대통령’ 1위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그의 딸이 유력 정당의 대세로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과연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를 묻게 되었다. 역사인가? 국민인가? 어떤 세력인가? 아직 단죄도 이루어지지 못한 마당에 누가 그를 용서할 계제도 아니거니와 설령 그가 용서를 받았다 해도 그를 역사 속에 자숙시킬 일이지 그를 영웅으로 둔갑시켜 정치적으로 팔아먹을 일이 아니다. 그건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죄악이자 국민에 대한 기망欺罔이다. 그런데도 이승만을 국부로 옹립하려는 바로 그 세력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단죄를 가로막은 채 그를 우상화하여 정치사회 헤게모니의 영구 장악을 획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박정희 유신정권이 어떻게 망조가 들어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권력 핵심부에 있던 인사들의 육성증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정당방위였다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면서, 박정희의 후예인 신군부집단이 김재규를 군사법정에 세워 단순살해범으로 처형한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것일 뿐더러 역사적으로도 부당한 처사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어 혁명의 이름으로 5.16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들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민주국민을 상대로 한 더러운 전쟁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더불어 박정희 정권 친위대장들의 권력게임, 윤필용 사건과 하나회에 관한 기술을 통해 당시 독재정권이 어떻게 작동하고 국가권력이 어떻게 사유화되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극단적인 기회주의자의 길을 걸어온 박정희의 역정을 통해 그 놀라운 변신술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서라면 배신도 밥 먹듯이 하는 그 실체를 밝히고 있다. 박정희는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현실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재이기 때문에 이 책의 의미는 그만큼 무겁다 할 것이다.

 

박정희와 친일파의 유령들 저자 한상범|삼인 |2006.02  

지은이 한상범은 1936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60년 조선대 전임강사를 거쳐 1961년부터 동국대에서 42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불교인권위원회 대표, 한국법학교수회 회장을 역임하며 일제 잔재 청산과 인권 개선에 앞장서 왔으며, 2004년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최전선에서 독재시대 인권 유린의 망령과 싸웠다.

 

그는 학문적 입장과 생애의 궤적이 일치하는 드문 지식인으로, 국내 법학계의 대표적인 '반골'로 통한다. 평생 동안 '권력자들의 도구로 쓰이는 법과 법관'에 대해 혐오를 표시하고 그것과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는 군사독재 시절 1964년 한일협정 반대, 19693선 개헌 반대, 1972년 유신 반대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매년 30~40편에 달하는 인권 관련 논문을 발표하면서 글쓰기와 행동 양쪽에서 활발한 현실 참여를 해왔다.

 

그의 학문은 헌법 안에서 인간의 기본권과 시민사회의 자유 영역을 넓히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지은 책으로는 인간의 권리(1977), 시민사상과 민중의 복권(1979), 현대 인권론(1987), 일제 잔재 청산의 법이론(2000), 현대법의 역사와 사상(2001), 박정희, 역사 법정에 세우다(2001), 우리 사회의 일제 잔재를 본다(2001), 금서, 세상을 바꾼 책(2004,) 화 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2004),살아 있는 우리 헌법 이야기(2005) 등이 있다. 그는 한글운동에 대한 공로로 1994년 한글학회의 표창을 받았고, 일제 청산의 공로로 2000년 외솔상을, 2005년에는 4월혁명상을 받았다.


목차     

여는 글

 

1부 한국의 친일파는 무엇으로 사는가 

1. 친일파들의 일제 한국 지배 축복론 한승조의 친일 망언에 대하여

2. 일본 극우를 대변하는 신판 친일파

3. 한국 친일파의 정신 구조와 계보를 해부한다

4. 미일의 한국정책의 역사와 우리의 입장

5. 되풀이 되는 역사, 되풀이 되어선 안 되는 역사

6. 전쟁국가로 가는 일본, 놀아나는 한국 수구

 

2부 끝나지 않은 친일과 독재의 시대  

1. 개혁이 필요한 서민이 개혁의 주체가 되자

2. 정보 공작, 청산해야 할 독재의 잔재

3. 일본 극우와 한국 친일파, 그들의 공생관계

4. 야스쿠니 참배가 왜 죄악인가?

5. 친일 군사독재의 정치 세뇌가 남긴 잔재

6. 무법천지 친일파 세상은 이랬다

7. 매카시스트의 생트집과 억지

 

3부 박정희 찬양을 멈추어라   

1. 역사를 위조하는 반역자의 후손들

2. 개혁을 방해하는 전략과 전술들

3. 뿌리 뽑아야 할 고문의 악습

4. 매카시즘의 역사와 한국의 개혁

5. 박정희 찬양을 멈추어라!

6. 정의가 유린되지 않는 사법제도를

7. 전두환은 박정희의 정통 계승자

 

4부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1. 법의 세계와 민중의 세계 전쟁과 독재의 시련 속을 살아온 법학자의 소견과 전망

2. 일제 잔재가 독재 권력에 이어져 온 한국사회의 모순 구조 과거청산의 문제와 과제

3. 과거청산의 의의와 우리의 자세

 

닫는 글 우리에게 남겨진 과거청산과 민족 자주의 숙제들

부록 과거청산운동 백서 - 정계와 법조계의 과거청산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출전

       

출판사 서평       

독재 권력의 추악한 병폐에 맞서며  

지난주(2006214), 유신 시절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최종길 교수 사망 사건에 대해 법원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최종길 교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뒤집은 것이다   이는 국가가 조직적으로 은폐 조작한 사건에 대해 소멸 시효 등을 이유로 면책을 주장할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또한 30년 넘게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던 국내 의문사 1사건이자 박정희 독재가 자행한 공작 정치의 사실 관계가 법원에 의해 확정되었다는 점에서도 한국 사법부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판결로 기록될 것이다.

 

최종길 교수 사건이 일어난 1973년은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한 저항이 분출하던 시기였다. 당시 체제 수호를 담당하고 있던 중앙정보부가 위기의식을 조성해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대규모 간첩 사건을 발표했고, 이 과정에서 최 교수를 빨갱이로 몰아 사건을 조작했다. 이는 박정희 군부 독재가 조작한 공작 정치의 전형이었다   이번 판결에는 4년 전인 20025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를 인정한 조사 결과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2002년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중심에는 위원장 한상범이 있었다.

       

학자가 흥분한다고?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결연한 싸움의 기록  

지은이 한상범은 학문적인 입장과 삶의 실천이 일치하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특히나 헌법학자로서 그는 권력자들의 도구로 쓰이는 법과 법관을 혐오하며 그것들과 평생을 다해 싸워 온 국내 법학계의 반골로 통한다   한상범의 비판은 단호하고 날카롭다. 모호한 수사법으로 자신의 주장을 포장하지 않는다. 자신을 공격하는 약삭빠른 처신으로 세상의 탁류 속을 헤엄쳐 오는 이들에게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학자가 흥분한다고? 불의에 대해 분개하고 정의를 주장하여 소리치는 것이 잘못이라면, 그런 사람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는 학자인가? (6      

박정희 찬양을 멈추어라  이 책은 평생을 다해 일제와 독재 잔재의 청산을 위해 싸워 온 그의 최근 기록이다. 친일파와 그 아류들, 박정희 독재와 그것이 남긴 찌꺼기를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고자 고투한 지은이의 정신이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1부에서는 한국 친일파의 계보를 추적하여 정신 구조를 해부한다. 그리고 일본 극우와 손을 잡고 그들을 대변하는 한국 신판 친일파의 정체를 밝힌다 

2부에서는 친일과 독재의 잔재가 남긴 야만과 폭압을 고발한다. 특히 반드시 청산해야 할 독재의 잔재로 정보 공작의 역사와 그것이 남긴 폐해를 분석하고,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매카시즘의 생트집 수법을 조목조목 따진다. 그리고 과거 청산과 개혁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절박한 문제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3부에서는 박정희를 찬양하는 박정희 신도들, 특히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광증을 비판한다  

4부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지켜지는 법의 세계를 염원하며 개혁의 과제를 말한다.

 

그리고 과거청산범국민위가 2005년에 발간한과거청산운동 백서의 글을 부록으로 실었다. 일제 잔재의 뿌리가 가장 깊게 박혀 있는 법조계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사법개혁의 시도와 진정한 과거청산을 위한 근본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친일파와 그 아류들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고자 하는 법학자의 외침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와 민족 반역자들에게 고하는 준엄한 경고이다. 오늘날 일본의 극우 세력과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는 한국의 극우 보수 세력에 맞선 결연한 싸움의 기록이다. 친일 군사독재의 정치 세뇌가 남긴 잔재를 역사의 박물관에 보내려는 선언이다. 정의가 유린되지 않는 사법제도를 갈망하는 법학자의 제언이다. 그리고 과거 청산의 의의와 과제를 함께 고민하자는 동지의 강직한 바람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망령들에게 고함   

역사는 과거에 대한 정당한 기억이어야 한다. 한국의 현대사는 이 명제에서 얼마만큼이나 당당한가? 일본 제국주의와 군부 독재에 기생하여 이웃과 민족을 팔아먹은 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니, 역사를 위조하는 반역자의 후손들은 오히려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하며 큰소리를 쳐왔다. 그들의 정신과 태도를 비호하며 지원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이지 않으나 더 강력히 존재하고 있는박정희와 친일파의 유령들이다.

 

나는 불의에 분노하는 데서 개혁은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나보고 학자이고 교수인 사람이 너무 흥분하고 점잖지 못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 그런 사람에게 나는 당신은 폭정에 짓밟힌 청년 학생을 위해 가슴을 쥐어뜯고 울어본 일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폭정에 대해 항의를 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209)

 

진실은 밝혀야 하고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한다. 그 진통을 겪지 않고서는 역사에 대한 정당한 기억을 성립시킬 수 없다. 그것의 과정이 아무리 지난할지라도 친일파와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왜곡한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보는 것은, 앞으로의 날들을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길을 에둘러 가서는 안 된다. 반세기 이상을 떠돌고 있는 친일파와 박정희의 유령들에 맞서는 칼날이 무디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불의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 감금, 고문, 학살당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개혁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실감해야 한다. 왜냐하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교묘하게 진화하고 있는 유령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친일과 독재 잔재를 청산하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오롯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개혁의 시작이다. 지은이의 외침이 독자들에게 생각과 행동을 움직이게 하는 울림이 있기를 기대한다.

 

책속으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전향을 거부해 타살된 이들의 죽음이 사회적·정치적으로 사건화함으로써 전향제 폐지에 작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해서 빨갱이 공세에 시달렸다. 간첩과 빨치산을 '민주 인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정을 할 정도로 무모한 사람을 국회의 동의까지 받아서 대통령이 임명해 공직에 앉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임명 동의를 한 국회의 정치적 책임부터 따져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전력이 좌경이란 딱지가 붙은 사람은 불법하게 때려죽여도 좋다는 법리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항의하는 극우 인사와 언론에 맞서 아무리 극악한 범죄자라도 법의 보호를 받는 인물이고, 무엇보다 사형을 해도 법에 다른 절차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더욱 놀라운 것은, 빨갱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전쟁 전후에 좌익 혐의만으로 집단 학살한 불법 범죄를 되풀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은 법치주의를 거부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나더러 학자의 탁상공론이라고 했다. 이런 이들과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 본문 106~107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저자 박근호|회화나무 |2017.04.05

원제 韓國經濟發展論 高度成長えざる

 

저자 박근호는 1962년 목포 출생. 조선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가나가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방문교수를 지냈고, 현재 일본 시즈오카대학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사논문을 다듬어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전쟁을 펴냈으며, 그 후 비교경제발전론으로 연구영역을 확장하면서 베트남전쟁이 아시아경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왔다. 주요 저서로 박정희의 개발독재와 정책 없는 성장: 베트남전쟁의 영향을 중심으로, 아시아경제와 미국의 개발모델전략: ‘인도모델에서 한국모델, 베트남전쟁과 동아시아의 기적등이 있다.

 

목차

추천의 글

한국어판 서문

저자 서문

 

서장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1- 아시아 나라들의 발전경로와 공업화

 

11960년대 초기의 아시아경제

11960년대 초기의 한국경제

2절 아시아 나라들의 발전경로와 공업화

3절 미국의 대외원조정책과 아시아 중시

 

2장 전환점, 1965

1절 동아시아경제와 외향형 경제발전

2절 동아시아의 수출지향공업화와 미국시장

3절 인도의 공업화 정체와 한강의 기적

 

2- 정책 없는 고도성장

 

3장 고도성장의 시대로

1정체에서 한강의 기적으로

2절 고도성장과 정부의 역할

 

4장 수출정책의 과대평가 : 수출계획 FIT&GAP 분석

1절 과감한 수출정책

2절 제13개년수출계획 Fit&Gap 분석

3절 수출주도형 성장의 실상과 허상

 

5장 전자산업과 정책 없는 발전

1절 전자산업의 발전과 특징

2절 정부의 산업정책

 

3- 고도성장의 보이지 않는 손

 

6장 수출주도형 성장과 바이 코리아 정책

1절 경이적인 대미수출확대

2절 경이적인 수출성장의 요인 : 의류제품을 중심으로

3절 미국의 바이 코리아 정책

 

7장 전자산업의 진흥과 바텔기념연구소

1절 한국의 산업진흥과 한국판 바텔기념연구소

2절 전자산업의 진흥과 바텔기념연구소

3절 전자산업과 미국의 직접투자

 

8장 미국국가안전보장과 쇼윈도전략

1절 베트남전쟁과 한·미관계의 변용

2절 미국안전보장전략과 한국모델

3절 미국의 직접적인 역할

 

종장 한국의 고도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참고 문헌

도표 목록

찾아보기

옮긴이 후기

 

출판사 서평

 

서장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한국의 산업정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립되었고, 행정적 결정이 어떠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한국 산업정책의 전체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정책형성 절차를 분석하고 의의를 평가하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지금껏 한국의 산업정책 실태는 대체적으로 단편적인 정보에 기초해 추론되어왔기 때문에 산업정책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명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이 당시 관료들의 회고록이나 증언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산업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경향 역시 다분했다.

11860년대 초기의 아시아경제

박정희 정권은 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62년부터 이를 실행했다. 이는 미국정부에게 쿠데타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특히 지원과 원조를 확보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급조된 것 이었다.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제개발계획이 아니라 쇼핑 목록에 불과하다는 평가였다. 이렇게 실시된 여러 가지 정책들도 파산 직전에 놓여 있던 한국경제를 구하지는 못했다. 존슨 정권이 한국을 최대의 실패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2장 전환점, 1965

미국의 대외전략(이른바 로스토노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1966년 미국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원조그룹을 통해 적극적인 원조가 제공되면서 절대적인 외자부족에도 불구하고 자본재 및 수출용 원자재 등의 수입을 급속하게 증가시킬 수 있었다. 반대로 발전도상국의 경제발전모델로 제시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판단되었던 인도는 대인도채권국회의와의 관계 단절이 외환부족의 방아쇠가 되어 계획산업을 위한 시설자재나 기계수입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 인한 계획의 파행이 인도경제의 위기를 구조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는 아시아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 미국정부의 전략에 의해 성장의 명암이 좌우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3장 고도성장의 시대로

해외자금 조달계획과 실적만 보면, 정책방침과 실적이 상충적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정부가 대외의존적인 체제로부터의 탈피를 목표로 정책을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자의존 경향은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되었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자금조달의 대외의존도가 감소되고 있었지만, 한국은 대외의존 체제로부터의 탈피라는 방침과 달리 해외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현저하게 강화되었고, 한국의 대외의존 체제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4장 수출정책의 과대평가 : 수출계획 FIT&GAP 분석

13개년수출계획의 수립과 실시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3개년수출계획의 시안은 19641230일에 수립되었지만 재수정을 거듭하면서 최종 계획안은 1965316일에야 확정되었고, 720일 경제장관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계획의 실시가 매우 늦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한국의 수출정책을 평가할 때 긍정적으로 지적되곤 하는 과감성과 거리가 먼 것이다. 3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한 최대의 요인은 미국이 단독으로 수행한 기적적인 공헌덕분이었다.

 

5장 전자산업과 정책 없는 성장

한국의 전자산업은 60년대 후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해나갔지만, 이 시기에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육성계획이 명확하게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전자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부터였는데, 전자공업진흥법은 19691월에 가서야 제정되었고, 이를 기초로 전자공업진흥 8개년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각종 지원 제도와 같은 구체적인 실시방안들이 제출되는 등 본격적인 육성·지원이 시작된 것은 그 이후였다. 이는 한국의 전자산업이 본격적인 지원정책이 실시되기도 전에 이미 성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정부의 역할에 대한 과도한 평가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6장 수출주도형 성장과 바이 코리아 정책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해서만큼은 바이 아메리칸 정책을 완화해 적용하고, 심지어 우대정책을 실시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른바 바이 코리아(Buy Korea) 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미국정부는 19655월 열린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한국과의 무역을 우대하는 정책을 강화해나갔고, 한국의 안보 및 경제발전과 관련해 별도의 각서를 체결했다. 각서에는 북한이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군사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는 한반도정세와 전망을 고려할 때 한국이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명기되어 있다. 한국의 안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의 경제적 도약과 군사력 강화는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이었다.

 

7장 전자산업의 진흥과 바텔기념연구소

KIST의 설립은 미국정부의 아이디어였다. 1966125일 박충훈 상공부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전자산업 육성에 힘을 싣겠다는 방침을 몹시 서둘러 발표한 것은 바텔기념연구소가 먼저 전자산업을 중요산업으로 선정했기 때문이었다. 특징적인 사실은 196738일에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심의, 검토된 전자공업육성방안이 한국정부에 의해 독자적으로 작성, 입안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방안은 실제로 산업실태조사보고서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치하고 있어서 사실상 바텔기념연구소가 정책을 수립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8장 미국국가안전보장과 쇼윈도전략

아시아에서는 60년대 초까지 인도 중시=무역 및 경제원조의 중점이라는 도식이 성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의 확대와 함께 무역 및 경제원조 등이 한국에 집중되었고, 공업화를 경제개발의 중심에 둔 한국모델이 설계되었다. 미국 측은 계획수행 능력을 갖춘 안정된 정권이야말로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어 한국모델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정부가 한국모델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안정화시키고 나아가 장기화시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 이것이 로스토노선이었다.

 

종장 한국의 고도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텔기념연구소의 특별한 지원이 없었다면, 한국의 기술혁신은 기대할 수 없었다. 베트남전쟁이 확대되면서 한국은 미국의 안보전략에서 반공주의의 보루라는 대단히 중요한 변수가 되었고, ‘비공산주의국가의 쇼윈도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른바 외향적 개발정책전략이라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인도모델에서 한국모델로 경제개발모델이 전환된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 간의 국제적 분업관계 역시 이로 인해 형성된 것이었으며, 한국은 소위 한··일 삼각무역구조 속에서 고도경제성장과 수출지향형 공업화를 위한 조건들을 정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장기집권의 기반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긴밀했던 한·미 간의 정책협조는 한국을 반공주의의 쇼윈도로 삼기 위한 미국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김재규 평전 저자 문영심|시사IN|2013.10

 

저자: 문영심-27년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썼다. 수백 편의 방송 원고 중 2006년에서 2011년까지 매달렸던 물은 생명이다’(SBS 다큐)를 대표작으로 여긴다. 유신 말기에 청춘을 보낸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렇듯이 유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을 괴로워한다. 다큐멘터리의 사실 성과 소설적 재미를 결합시켜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김재규 평전)을 썼다. 간첩의 탄생을 쓰면서 민주주의는 법 치가 제대로 돼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고, 이 책을 통해 상식을 배반하고 법치를 무시하는 공안권력을 고발했다. 강원도 양 구로 귀촌 후에는 야생화 탐사에 재미를 붙이며 살고 있는데,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연이어 예민한 주제의 책을 쓰게 됐다. 저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돌(2010),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김재규 평전)(2013), 간첩의 탄생(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 작 사건의 진실)(2014)

 

목차

추천사 김재규 장군에게 빚을 지고 있다_함세웅 신부

추천사 왜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는가_강신옥 변호사

민주주의의 역설, 김재규의 역설

 

1

1. 잠행

2. 해서는 안 되는 말

3. 중독

4. 채홍준사

5. 호랑이 꼬리 밟는 일

 

2

1. 막다른 골목에서

2. 민주주의를 위하여

3. 총소리

4. 우리 같이 살자

5. 코드원

 

3

1. 남한산성7호특별감방

2. 유신이 끝났다고?

3. 민주주의를 해야 국가 안보도 튼튼하다

4. 그의 행위는 정당방위다

5. 우리 남편은 죄가 없어요

6. 변호인단의 변론을 거부합니다

7. 장군들의 야간 외출

8. , 얘기하지 마!

9. 사형! 사형! 사형!

10. 당신이 제일 보고 싶다

 

4

1. 인권변호사

2. 질문 같지 않은 질문

3. 시퍼렇게 젊은 친구들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4. 우리는 그에게 빚진 게 있다

5.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 전두환

6.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5

1. 포로가 된 장군

2. 그들이 살아야 민주주의가 죽지 않는다

3. 먹구름과 천둥

4. 할 일을 하고 먼저 갑니다

 

4심의 전망

참고자료

 

출판사 서평

1026 34주년을 앞두고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가 나왔다. 그동안 1026과 관련한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김재규와 1026에 대해 철저하게 드러난 사실만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한 책은 없었다. 이 책은 강신옥·안동일 등 김재규 변호사들이 34년간 고이 간직해온 자료와 기억, 가족의 증언, 김재규와 운명을 함께 한 박흥주·박선호 등 5명의 충직한 부하들이 남긴 이야기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경기대학교 김재홍 교수가 어렵사리 입수한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 진술, 그 외 방대한 자료들의 토대 위에 있다. 이 책은 김재규 변호사들이 검증한 최초의 10·26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다.

 

27년간 텔레비전 다큐멘타리를 써왔으며 등단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 문영심은 그녀의 이력에 걸맞게 이 책에서 다큐의 사실성과 소설적 재미를 결합해냈다. 그녀의 책 속에서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은 인간의 체취를 물씬 풍기며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책을 읽는 내내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나 희곡을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작가는 그동안 밥을 벌려고 방송작가로서 일하는 동안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오지 않았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유신 말기에 청춘을 보낸 작가는 이 책을 쓰는 1년여 동안 매일처럼 유신의 악몽에 가위 눌려야 했다.

 

김재규. 1976124일부터 19791026일까지 34개월 동안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사람. 그는 197910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해 살해하고 1980524일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심장을 쏴버린 박정희의 오른팔. 유신을 허물어 버린 유신의 핵심.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엉성하고,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치밀하게일을 저지른 사람. 모순으로 가득한 그의 행동 탓에 그동안 그와 관련해 너무나 많은 구구한 억측과 오해가 뒤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작가가 이처럼 혼란스런 그의 언행을 따라가면서 떠올린 핵심 단어는 역설이다.

 

대한민국 권부에 총성이 울린 것은 세 번이었다. 박정희가 나라를 지키라는 군대를 이끌고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쳐들어와 초병을 죽이고 5·16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이 맨 처음이다. 그 박정희를 김재규가 총으로 쏘아 살해한 사건이 10·26이다. 그 뒤 군부의 전두환·노태우 일파가 다시 군을 이끌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 12·12 쿠데타이다. 내란죄는 국토를 참절하고 국헌을 문란케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성립하는데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는 두말할 나위 없는 내란죄다. 그러나 김재규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으려고 움직인 흔적도 없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군사독재를 끝내려고 거사를 했는데 내가 집권하면 역시 군사독재가 되기 때문에 나는 집권할 생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전두환·노태우는 나중에 내란죄로 기소돼 각각 무기징역과 12년형을 받았지만 사면됐다. 박정희는 기소조차 되지 않고 국립묘지에 묻혔다. 내란죄를 저지르지 않은 김재규만 사형당했다. 김재규는 내란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도 못 되고 내란죄로 처형된 셈이다. 김재규 사건 자체가 우리 역사의 모순이며 역설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전두환의 합수부가 주도한 군사법정이 의도한 대로 김재규가 단순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박정희를 살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받아들이게 된 데서 우리 현대사가 일그러지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박정희에 저항했던 민주화 세력이나 정치인조차 김재규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폄하했다. 혹시라도 그가 민주화의 공을 독식할까 두려워해 탄원서에 서명하는 것조차 꺼렸다. 당시 모두가 그가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사형당하는 것을 방치하고 말아 신군부가 다시 등장할 빌미를 주지 않았는지 저자는 의심한다. 김재규가 민간법정에서 법의 보호를 받으며 공정한 재판을 받았다면, 김재규가 말하고 싶었던 진실을 자유로운 언론이 국민에게 알렸다면 우리 역사는 지금과는 훨씬 달라지지 않았을까.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도 피를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여기게 되지 않았을까. 저자가 새삼스럽게 10·26을 끄집어내 햇빛 아래 말리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저자는 김재규 33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김재규가 부마항쟁으로 전쟁터처럼 변한 부산 시내를 암행했을 때 우연히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게 됐던 사람이다. 그는 작가에게 그 날 김재규와 박흥주가 최루가스에 맞아 초주검이 된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나중에 신문을 보고 자기가 만난 사람이 김재규란 걸 알고 언젠가 시간을 내 고인에게 인사나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뒤늦게나마 고인의 빈소를 찾게 됐다고 작가에게 털어놓았다. 30여 년 전에 딱 한 번 만난 사람의 마음속에도 당시 김재규의 절박함과 고뇌는 잊을 수 없을 만큼 뚜렷하게 각인됐던 것이다.

 

김재규를 직접 만나본 이들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국선변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김재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던 인권 변호사도 당연히 처음에는 그를 변호하는 데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를 만난 지 30분 만에 자신의 생각이 180도 바뀌는 것을 의식하며 당혹스러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마치 오래 전에 떠나보낸 연인을 그리듯 고인의 묘를 찾는다. 거사 30분 전에야 겨우 김재규의 뜻을 전해들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신군부의 갖은 유혹과 협박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 한마디도 김재규를 비난하지 않고 묵묵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단순히 김재규의 인품이 고결해 그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작가는 당시 그들은 박정희가 왜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또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재규밖에 없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정보부를 채홍사로 삼아 한 달이면 열흘이나 여자 연예인이나 여대생들을 강제로 끌어다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이며 부마사태를 야당의 사주를 받은 뽀이들이 저지르는 난동쯤으로 받아들였던 박정희와 그를 에워싼 군상들. 이 책은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야수이자 괴물이었다는 걸 분명히 말해준다. 저자는 김재규를 둘러싼 이 같은 역설과 모순에 분노하는 이들이 있는 한 김재규가 그토록 원했던 제 4, 즉 정당한 문민의 재판은 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이 그 시작이 되기를 희망한다.

 

김재규는 과연 민주화운동 유공자인가 17. 11.12 ㅍㅍㅅㅅ

방송작가로 활동하던 문영심 씨가 쓴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편의상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파트는 유신헌법 체제하의 대한민국 제4공화국에서 김재규가 1026일 박정희를 살해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두 번째 파트는 김재규가 연행된 이후에 3심을 거쳐 최종적으로 사형되기까지의 공판 과정과 시대상을 다룬다. 마지막 파트는 김재규 사망 이후, 현대를 배경으로 당시 김재규를 변호하던 변호인단이 김재규의 33주기에 묘역을 찾아 참배하는 장면을 담았다.

 

미리 밝히는 바이지만, 주로 연구자들이 쓴 평전 몇 권 정도만 접해본 내 기준으로는 굉장히 조악하고 신빙성이 떨어지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굳이 다른 분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중간의 공판과정은 당시에 변호에 참여한 여러 변호사들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되어 그런지 꽤 신빙성 있고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전반부는 거의 아동용 위인전기 수준으로 김재규라는 인물을 평면화해서 그의 고뇌와 생각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풀어냈다.

 

차라리 행동묘사 정도로 그쳤으면 좋으련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김재규의 속마음을 작가의 짐작으로 처리하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따옴표를 사용해서 줄글로 옮겨 놨으니까. 문영심 작가가 밝히길 다큐멘터리의 사실성과 소설적 재미를 결합시킨 평전을 쓰고 싶어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하는데, 돈이 아까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그래도 서평으로 남길 부분은 꽤 있어 보여서 간단하게 세 부분으로 정리를 해볼까 한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게 됐나



나고 자란 곳이 대구라 친척 어르신들은 물론 지역 어르신들이 박정희의 향수에 강하게 젖어있다 보니 어릴 때 접한 김재규라는 인물의 범행동기(?)는 대략 배은망덕한 김재규가 열등감과 권력욕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아 박통의 총애를 받던 동료를 죽이고, 박통마저 배신 때리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했다정도의 내용이었다. 크면서도 그에 대해서 생각을 바꿀 계기도 없었고, 나서서 그런 인식을 바꾸자는 사람도 딱히 없었다 보니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 하나는 확실히 바꾸게 됐다. 김재규는 그런 이유로 박정희를 쏜 것이 아니었다.

 

책의 전반부를 보면 김재규는 사육신인 충의공 김문기의 18대손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절사에 가서 할아버지! 옳다고 믿는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할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자손으로 남게 도와주십시오.’라고 속으로 외칠 정도로 의협심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식으로 심히 손발이 오그라들게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뒤의 공판기록과 옥중에서 남긴 기록들 일부를 보면 딱히 그런 식으로 평면적인 의인이라고 서술하긴 힘들 것 같다.

 

무엇보다 김재규는 군인 시절에는 현재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령부를 만들고 후에는 중앙정보부 부장으로서 박정희 정권에서의 각종 용공사건 등을 조작해내던 당사자가 아닌가. 문영심이 서술하는 것처럼 의협심에 의해 민주주의를 위해 제 한 몸 바친 건아라는 식의 해석은 좀 곤란한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그가 박정희를 쏜 이유는 2부의 공판기록 부분을 그의 입으로 더 확실히 서술되는데, 김재규는 부마항쟁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300만을 쏴 죽여도 괜찮았는데 우리나라에서 100, 200만 쏴 죽이는 게 뭐 문제가 있습니까.’라는 차지철을 발언에 박정희가 강하게 동의했다는 부분을 인용한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승만과 달리 하야 의지가 전혀 없으며, 영구집권을 노리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쏘지 않으면 적어도 20년은 독재 상황이 유지되고 캄보디아 사태와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염려되어 박정희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본인의 행위를 통해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다시 도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행위를 10.26혁명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가 혁명을 일으키려던 것은 아래의 다섯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1.자유민주주의 회복

2.더 많은 희생을 방지

3.적화 방지

4.혈맹인 우방 미국과의 관계회복 및 협력증진

5.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로서의 악명을 걷어내고 위신 회복

 

책의 전반부에는 지속적으로 박정희에게 미국의 압력이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김재규는 지속적으로 미국의 요구에도 어느 정도 부응하기 위해 야당 의원 탄압의 수위를 낮추고 유화책을 펴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한다. 이에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하자며 미국의 압력을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하고 야당 의원 탄압을 더 강화해야 된다는 식의 주장을 되풀이한다.

 

김재규가 꼽은 5가지 혁명 이유를 볼 때 이것이 가장 큰 목적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아직 김일성이 건재하고 공산 국가들이 붕괴하기 전이라 체제 경쟁에서 남한이 북한을 압도하지는 못하던 상황인데 박정희가 유신을 통해 외형적으로도 완전히 독재체제를 구축해버리자 미국이 손을 떼면 다시금 6.25를 겪을 수 있다는 중앙정보부장의 나름대로의 판단이었을 거란 얘기.

 

후의 재판 과정에서도 본인의 변호인단에 포함된 인권변호사들 중에 이 재판을 본인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좌파) 변호사가 있다며 불쾌감을 표출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보수 우파로 생각하고 있던 점을 볼 때 그는 박정희 정권에 부역하고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이나 박정희 개인에 대한 추종이라기보단 유신 이전 대한민국 체제에 대한 수호 의지를 가진 일종의 국가주의자가 아니었을까란 생각도 든다. 어찌 됐건 앞서 기술한 것처럼 개인의 열등감과 권력욕에 의한 배신이라는 당시 신군부 세력의 프레이밍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던 행동인 셈.

 

특히나 자연인 김재규의 자연인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은 살해 이후에도 여전했는데, 재판 중에도 각하라는 경칭을 계속 사용하고 궁정동에서 연예인들을 불러 접대한 일이 공판 중에 변호사의 입을 통해 발설되자 이를 담당했던 부하직원(박선호)에게 그 부분에 대해 증언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등 박정희 개인에게 모욕이 가해질 만한 일은 철저히 차단하였다.

 

출처: SBS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정희의 무덤에 올라탈 정도로 자신이 타락하진 않았다고 밝혀 개인적 연원에 의해 배신을 했다는 주장은 꽤 부당하다고 보인다. 김재규는 저러한 이유로 박정희를 죽였고, 그것은 공판 과정에서도 일관적인 증언으로 나타난다.

 

 

김재규 및 공모자들에 대한 재판에 관해

책에서는 김재규 및 공모자들의 공판에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데, 여기서는 앞부분의 전지적 작가시점 대신 공판 과정의 대화와 증언을 상세히 옮기고 그에 대해서 평자로서 평을 남기는 식으로 글을 진행해간다. 이 부분에서 나타나는 당시의 재판과정은 졸속 그 자체라 할 수 있는데, 19791026일 박정희가 살해된 이후 각종 고문을 포함한 혹독한 심문과정을 거쳐 1979124일에 1심 첫 공판이 열린다.

 

문제는 14일 동안 총 9번의 공판이 진행되어 1218일 결심공판에서 사형판결을 내리는 기염을 토했다는 것. 흉악한 연쇄살인을 저지른 유영철의 경우도 1심 첫 공판이 200496일에 열리고, 3달 후인 20041213일의 결심공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14일 만에 김재규 포함 8명의 내란죄 사건을 8차 공판까지 거치면서 충분히 검토한 후 사형판결을 내린 것을 보면 현재 대한민국 판사들이 얼마나 게으르고 군기가 빠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당시의 공판과정에 곁들여 재판장 밖의 12.12 사태와 긴급조치 9호 해제 등을 꽤 적절히 설명해준다. 10.26 이후 급격한 민주화 무드를 틈타 전두환이 권력 공백기의 실권을 잡음으로써 김재규는 더더욱 살려둬서는 안 되는 인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당시에 전두환의 전횡을 막으려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밀어내기 위해 수사권을 쥐고 있던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김재규와 공모해 박정희를 암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12.12사태를 일으켰다.

 

12·12 직후 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정승화. 출처: 동아일보

 

그런데 당사자인 김재규가 재판 과정에서 10.26이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던 터라 그 사실이 새어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었다. 언론통제권을 쥐고 있던 신군부에서는 김재규를 개인적 야욕으로 패륜을 저지른 배신자로 몰아갔고, 그게 아직도 남아 대부분의 뇌리에 박혀 있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규에 대한 구명이나 명예회복에는 야당 정치인들도 앞장설 수가 없었는데, 신군부의 위협 때문이라기보단 민주화운동을 통해 시민의 힘으로 쟁취했어야 할 민주화를 부역자의 손에 의해 거저 얻은 꼴이 되어서라고 저자는 평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선 해방의 원인을 태평양 전쟁을 통해 일제가 패망한 것이 아니라 범민족적인 광복 운동의 결과로 꼽는 국사책의 관점과 비슷해 보인다고 할까.

 

민주화운동을 통해 유신이라는 당시의 절대 악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김영삼, 김대중 같은 인물들도 절대 악의 심장인 박정희가 정권 내부자의 총격에 의해 급작스레 사망한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 상황에서 김재규는 상고심인 2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의 전원합의체 상고기각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사형에 처해진된다.

 

재밌는 건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당시의 대법원에서도 8:6으로 6명의 대법관이 사법살인에 반대해 결국 석 달 뒤에는 모두 법복을 벗어야 했다는 부분이다. 그 시절에도 그 정도의 양심을 지키는 법관이 있었다는 사실에 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당시에 김재규를 기소했던 검사는 조선 시대 경국대전에나 나올법한 대역죄시해라는 대한민국 형법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적 단어를 구형하는 자리에서 내뱉는 미개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의 시국사건에는 항상 얼굴을 비추던 쟁쟁한 인권변호사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김재규와 공범들을 변호했지만, 법정에서 진술의 녹취마저 불법적으로 허락하지 않는 상황에서 별달리 방법은 없었을 것 같다. 그렇게 10.26은 끝이 나고,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에 의한 제5공화국이 도래하게 된다.

 

10·26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출처: 동아일보

 

김재규에 대한 역사의 평가

김재규는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이후 변호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3심 재판은 끝났지만, 역사라는 4심 재판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신군부의 전두환-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대역죄인으로 굳어졌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도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김재규 개인에 대한 민주화 유공자(?)로서의 재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 유신정권은 물론 유신정권에서 이어진 신군부의 부도덕성을 다시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김재규 개인의 판단으로 보자면 5.16 이후부터 유신 전까지의 박정희는 어느 정도 긍정하고, 유신 이후의 영구집권을 노리는 박정희를 부정하는 현 대한민국의 (어느 정도 양식 있는) 권위주의 우파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재규의 주된 활동 기간이라고 봐야 할 유신 이전의 박정희와 김재규의 모습은 하나도 책에 포함되어 있질 않다. 목적성을 가진 의도적인 편집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김재규 개인의 삶을 포착해서 입체적인 인간상을 그려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동용 위인전같이 김재규를 평면적이고 올곧은 사람으로 압축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저자는 10.26의 역사적 의의와 김재규 본인이 밝힌 혁명의 이유와는 전혀 관련 없는 박정희의 권력형 성 상납 장면을 전체 책의 비중에 비해 과도하게 많이 할애했다. 김재규의 재평가가 이루어지려면 박정희가 좀 더 절대악이 되어야 하기도 하고, 그 반작용으로 김재규는 더욱더 평면적인 의인이 되어야만 하기에 저자는 본인의 정치적 목적성에 의해 되려 재평가하고자 하는 인물을 작위적으로 박제하는 모순을 저지른 것이다.

 

5·16 직후 박정희와 김재규. 출처: 동아일보

 

작가는 전근대적인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식의 유교적 인물관을 이식하기 위해 김재규라는 인물을 가정적이고 의로운 신파극의 주인공으로 그려 버렸다. 권위주의라는 거악을 몰아내기 위해서 저 정도가 대수냔 얘기가 나올 수도 있는데 이게 진영이 바뀌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부모 노릇을 제대로 했냐는 식의 미개한 얘기와 달라질 게 없다.

 

이보다 좀 더 노골적인 부분도 있었다. 10.26과는 정말 별다른 관련이 없는 박지만과 박근혜의 비행을 김재규가 증언하는 형식을 빌어 의도적으로 부각한다는 점이다(이 부분을 읽다가 과연 이게 정말 김재규라는 인간을 재평가하고 탐구하기 위해 쓴 평전이 맞는지 의구심이 마구마구 들었음).

 

저자는 이 정도면 독자들도 김재규를 다르게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고 쓴듯하지만 이런 서술방식과 서술내용, 그리고 저자의 목적의식을 토대로 판단하자면 기존의 김재규에 대한 선입견 정도는 사라지게 할 수 있겠으나 이 평전을 읽고 김재규가 이런 사람이다라는 일말의 확신을 가질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팩션(Faction) 느낌으로 가볍게 읽기엔 좋을 듯도 하지만 평전이라는 이름을 달기는 좀 부끄러운 책이 아닐까 한다.

 

책과는 별개로 약간의 의견을 덧붙이자면, 김재규가 당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박정희 사망 이후 본인이 나서서 혁명위원회를 조직해 유신의 잔당을 설거지할 계획이었다는 포부를 재판 중에 밝히기도 하고 ‘4·19혁명을 말아먹은 것처럼 10·26혁명을 말아먹지 않기 위해서는 당시 대통령이던 최규하가 자신을 석방시키고 같이 손을 잡아 설거지를 마쳐야 민주주의가 정착한 대한민국이 온다는 식의 얘기도 했다. 책에 실린 증언이라던가 옥중 기록 일부를 보면 자신을 예수에 비유하기도 했고.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바람 없는 천지에는 꽃이 피겠나는 본인이 좋아하는 법문 구절인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필 수 없고, 이슬 내리지 않는 곳엔 열매도 없다(無風天地無花開 無露天地無結實)’에서 유래한 건데 본인의 행위를 바람 혹은 이슬에 비유하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영웅주의에 심취했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깊은 친교 관계였던 박정희를 죽인 죄책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박정희 사후 자신의 행위를 더 대국적인 무언가로 포장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됐건 그의 행위로 인해 유신독재가 끝났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의는 있으나 그를 민주화운동 유공자라거나 의사리고 하기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박정희 머리통 속에 박혀 있는 총알이 주는 의미 김재규=의인 17.10.26 브레이크뉴스

박정희 암살당한 10.26 '올해로 38주년'...당시 국군서울지구병원장 김병수 장군의 증언

1026. 1979년 당시 오늘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을 암살한 날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망, 땅 속에 매장 되면 뼈가 존재한다. 특히 두개골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박정희도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사살되어 절명(絶命), 국립묘지에 묻혀 있으니 그 뼈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10.26은 올해로 38주년. 박정희의 사망은 정치적인 독재와 장기집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10.26 관련 취재과정에서 10·26 당시 국군 서울지구 병원장이었던 김병수 장군(예비역 준장·의학박사)을 직접 인터뷰할 수 있었다. 김 장군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사망을 최초로 확인했던 의사였다. 김 장군과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박 대통령의 사망을 확인했던 내막을 시간대별로 작성했다. 아래는 필자가 김 장군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1인칭 호칭) 박정희 사망의 실제 상황이다.

 

"*197910261957분경퇴근한 후 서울 동부 이촌동에 있는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당직 군의관인 송계영 소령으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환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모시고 왔다고 말했다. 나는 청와대와 가까운 데 위치한 병원(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비서실장이 모셔온 환자가 과연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이 물려왔다.

 

*2020분경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당직 군의관에게 환자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미 사망했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이미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날 불렀느냐?”고 호통쳤다. 그러나 대통령 비서실장이 모셔왔다는 것 때문에 죽은 사람이 누구인가는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신은 1층 응급실에 모셔져 있었는데 경호원(나중에 안 사실인데 중앙정보부 요원 유성옥 외 1)이 들어가지 못하게 제지했다. “나는 이 병원 원장인데 무엇 때문에 못 들어가게 하느냐?”강경한 어조로 말해도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나는 집무실로 가서 계급장(준장)과 명찰이 부착된 군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응급실로 내려갔다. 그 경호원은 계급과 이름이 확인되자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응급실 안에는 또 다른 경호원이 있었다. 온몸이 시크 커버로 덮여진 환자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려 했을 때 그 경호원은 누구인지 알 필요 없다며 위압적으로 강압적인 어투로 말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나 사망진단서는 내가 끊어야 한다. 사망 원인을 알아야만이 사망진단서를 끊을 수 있다.”그 경호원은 죽어 있는 사람의 얼굴을 시트로 가리고 반쪽씩 보여주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더라도 피묻은 얼굴의 반쪽씩만을 보여주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맞힐 수 없다.

 

그의 얼굴과 머리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는 총에 맞았는데 총알이 왼쪽 귀 부분에서 오른쪽 광대뼈 방향으로 뚫고 들어가 있었다.

 

총상이구나!”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경호원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이 사람이 누굽니까?”

알 필요 없어!”

 

얼굴 부위를 요리조리 뜯어보았으나 끝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이었고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만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아마 북한에서 온 밀사인데, 차지철 실장이 총을 쏴서 죽인 게 아닐까라고 상상했다.

 

이때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됐나?”

실장님 죽은 사람을 무엇 때문에 여기 데리고 왔습니까?”“아무튼 잘 모셔달라” “누군지도 모르는데 잘 모시라니요?”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2030나는 경호원에게 상처가 머리에만 있으냐?”고 물었다. 그는 가슴에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가슴도 보자고 말했다.

 

죽은 사람은 오른쪽 심장 부분에 총을 맞아 피가 가슴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의 배 부분을 보는 순간 그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의사는 환자의 환부를 보면 자신이 치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다.

 

나는 1974년부터 박 대통령의 건강을 돌봐왔기 때문에 몸 부위를 잘 알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배 부위에 하얀 반점이 있었는데 그 반점을 보는 순간 죽은 사람이 박 대통령임을 확실하게 확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경호원에게 죽은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임을 알았다는 기색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너무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 시간은 몇 초쯤이었을 텐데 굉장히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주검의 실체를 확인한 직후의 충격이었던 셈이다.

 

*2040분경나는 대통령의 사망을 최초로 확인한 의사였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했다. 보안 유지가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통령을 진료할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그러나 병원 지역의 경호는 보안사령부 관할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죽었더라도 그 시신을 경호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경호원은 내 곁에 바짝 붙어 다니면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진료부장실로 들어가서 전두환 사령관한테 전화를 걸었다.

중요한 분이 사망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누구냐?”

모르겠습니다.”

나는 나를 감시하는 경호원 때문에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보안사령관에게 박 대통령 죽었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 실패 한 것이다.

1차 시도에서 실패한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2050분경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지 보안사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내 책상 위에 전화벨이 울렸다. 보안사령부 참모장 우국일 준장의 전화였다. 그는 내 말에 대답만 해다오.”라며 질문을 던졌다.

작고했나?”

.”

차 실장이냐?”

아니오

코드1(대통령을 칭하는 은어)이냐?”

나는 전화를 받고 , 아니오, 라는 세 마디만을 답했을 뿐이다. 이때 경호원이 무슨 통화를 했느냐?”고 추궁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일 없나?’해서, ‘’, ‘신변에 위협이 있느냐?’해서 아니오’, ‘잘 지키니 걱정 마라해서 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보안사령부가 대통령의 사망을 확실하게 알았던 시간은 바로 그 때였다. 나는 보안 유지를 위해 비상 소집된 이들 중 몇 사람만 지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귀가시켰다. “별일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2120분경나는 응급실에 있는 시신의 상처 크기, 총상 부의의 x-레이 촬영을 마치고 시신을 병원 내 대통령 방으로 옮겼다. 경호원들은 나를 꼼짝도 못하게 지키고 있었다.

 

*10270120분경: 국무위원들이 박 대통령의 사망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 최규하 국무총리, 신현확 부총리, 김치열 장관, 김성진 장관, 김계원 비서실장 등이 함께 왔다. 이들은 슬피 울면서 애도하고 돌았갔다.

 

*0130분경:국무위원들이 나간 후 보안사에게 나를 감시하던 중정 요원들의 체포 작전을 개시, 두 사람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체포작전은 이상연 보안사 감찰실장이 지휘했다.

 

*02시경:박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듣고 둘째딸 근영 양이 찾아왔다. 그녀 역시 통곡했다. 그녀를 따라온 경호원들은 보안사 요원들이었다. 나는 박 대통령 시신에 새 옷을 갈아입히기 전에 얼굴 왼쪽 부위에 박혀 있는 총알을 빼내려 했으나 가족들이 반대해서 그냥 두었다. 그들은 아버지 얼굴에 칼을 대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10·26때 맞은 총알이 지금도 얼굴 속에 남아 있다.

 

*03시경:박 대통령의 시신을 청와대로 옮겼다. 근혜 양도 박 대통령의 시신을 붙들고 대성통곡했다.

 

*07시경:10·26때 현장에서 사망한 차지철 경호실장 등의 사망을 확인하는 중에 경호원 박상범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그를 구명했다." 박정희 마지막은 이처럼 비극적이었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을 추모하는 행사의 한 장면. ©브레이크뉴스

모든 살인사건은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박정희의 머리통 속에는 아직도 총알이 박혀 있을 것. 김 장군은 박정희 얼굴 왼쪽 부위에 박혀 있는 총알을 빼내려 했으나 가족들이 반대해서 그냥 두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하니 박 대통령의 시신에는 10·26 때 맞은 총알이 지금까지도 얼굴 속에 꼭꼭 박혀 있을 것. 그 총알은 한국 현대정치의 비극을 웅변해주는, 박정희의 생명을 빼앗은 한 조각 쇳덩이이다.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탄압을 마무리한 증거품이다. 그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사형 당한 김재규. 그가 박정희를 제거함으로써, 정국불안으로 예상됐던 수많은 시민들의 희생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들 다수는 박정희의 폭정을 벗어났다. 박정희 두개골 속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 실탄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향해 김재규=의인(義人)”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나날이 늘고 있는, 합리적 증거다./문일석. 시인.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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