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북마을 곰솔과
울리는 만주선 - 남인수
푹푹칙칙 푹푹칙칙 뛰이
떠난다 타관 천리 안개 서린 음 벌판을
정은 들고 못 살 바엔 아 이별이 좋다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하늘은 청황적색 저녁 놀 떠돌고
차창에는 담배 연기 서릿서릿 서릿서릿 풀린다 풀린다
푹푹칙칙 푹푹칙칙 뛰이
넘는다 고량(高粱) 수풀 파도 치는 음 언덕을
허물어진 사랑에는 아 이별이 좋다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한정 없는 동서남북 지평선은 저물고
가슴속엔 고향 산천 가물가물 가물가물 비친다 비친다
푹푹칙칙 푹푹칙칙 뛰이
건넌다 검정 다리 달빛 어린 음 철교를
고향에서 못 살 바엔 아 타향이 좋다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크고 작은 정거장엔 기적 소리 남기고
찾아가는 그 세상은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모른다 모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울리는 만주선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 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⑻남인수의 ‘울리는 만주선’
식민지시대 후반기 한국인의 가련한 처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 치욕과 수모에 이가 갈립니다. 1908년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약 1만가구에 달하는 일본인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지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던 기관이었습니다. 동척(東拓)은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이란 것을 벌여서 한국인 소유의 비옥한 토지, 교통이 편리한 지역의 문전옥답을 모조리 수용하거나 강제 몰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토지상실과 이농현상은 한국의 농민을 일본인 소유토지의 소작인이나 만주농장의 소작인으로 밀어내고 말았지요. 이것이 유랑민 발생의 가장 커다란 배경이었습니다.
먹고살기가 절박하여 가족들을 이끌고 무작정 북쪽으로 떠나던 유랑민들의 행렬은 밤낮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행렬에서는 쉴 새 없이 바가지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동척은 만주로 진출하여 간도와 신경에까지 지점을 설치, 운영했습니다. 그 후 1936년에는 선만(鮮滿)척식주식회사를 만들어 아예 한국인의 만주이민을 정책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일제의 계획적 이주정책은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무려 150만명에 달하는 조선농민들의 등을 떠밀어 만주로 보냈습니다. 거의 절반 가까운 이주농민들이 ‘지팡살이’라는 중국지주의 소작인으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1938년 통계에 의하면 만주에 이주한 각 민족의 숫자는 일본인 50만명, 조선인 105만명, 만주인 3670만명입니다. 이 가운데 일제정책에 의한 최대 피해자는 바로 한국인들이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는 민족주의자라 탄압을 받았고, 중국인들로부터는 일제앞잡이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이런 정황을 소상하게 담아내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가요작품 하나를 찾았습니다. 바로 1938년 서울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울리는 만주선(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이 그것입니다. 이 노래가사에선 그 무렵의 시대 배경과 빛깔, 결코 안정을 허용하지 않던 뒤숭숭한 분위기와 만주일대 농촌 풍경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각 절(節)의 시작 부분은 증기기관차 엔진소리입니다. 이어서 전개되는 노래의 리듬은 열차속도처럼 급박합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생존의 절박한 리듬이기도 했습니다.
선만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만주의 신개척지로 떠나게 된 유랑농민들은 열차의 차창 밖 들판을 멍하게 바라봅니다. 하지만 가도 가도 끝없이 수수밭(고량)만 펼쳐질 뿐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심리적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 근심걱정으로 괴롭기만 합니다. 오죽하면 새로 찾아가는 그 세상에 대하여 ‘나도’를 무려 4차례나 반복하면서 모른다고 도리질을 했을까요. /이동순<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농민신문 201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