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평전: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
김남주 평전: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 | 김형수 지음 | 다산책방
https://www.youtube.com/watch?v=eDi5QQ4Xjlk
: 김형수-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 시집 『가끔 이렇게 허깨비를 본다』,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조드-가난한 성 자들 1, 2』,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흩 어진 중심』 등과 『문익환 평전』, 『소태산 평전』을 출간 했으며 작가 수업 시리즈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 가』로 큰 반향을 얻었다.
목차
책을 내면서
앞 이야기
1장 나는 해방둥이입니다
2장 보리밭을 흔드는 북소리
3장 광주의 빈털터리들
4장 저 푸른 소나무처럼 더 푸른 대나무처럼
5장 파도는 가고
6장 카프카서점을 떠난 뒤
7장 전사
8장 무등산은 옷자락을 말아 올려 하늘을 가려버렸다
9장 마지막으로 별들이 눈을 감는가
뒤에 남기는 이야기
사진 자료
김남주 연보
참고 자료
책 속으로
나는 김남주가 광주에서 청춘을 보내지 않았다면 인생의 궤도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보고는 한다. 그는 일찍부터 침묵을 견디는 일에 달통한 소년이었다. 음지에서 그가 풍기는 내면의 고요함은 이웃들에게 매우 안정감을 주지만, 그의 눈빛에는 수시로 불꽃이 너울대고 있었다. 이는 한없이 고요하게 타오르는 무등산 숯불 같은 인상을 준다. 불꽃의 정체는 무엇일까? 인간이 탐내는, 저마다의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감정을 삭이면서도 소외된 자의 연민과 존엄에 가해지는 모욕 앞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응대하고 마는, 이 한없이 겸손하고 한없이 격렬한 특이자의 정신적 원형은 무엇일까? 나는 그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무등산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_98쪽
어떻게 해야 박정희에게 뼈아픈 한 방을 날릴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좀처럼 해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박석무 선배를 찾아갔으나 그 또한 뾰족한 답이 없었다. 박 선배는 오히려 1년 전에 ‘녹두지’라는 유인물을 제작해서 배포한 이야기를 꺼내더니, 갑자기 신이 올라서 녹두장군 이야기를 밤늦도록 멈추지 않았다. (…) 김남주와 이강은 어떤 수단으로든지 저항해야 한다고 단단히 작정한 터에 역시 역사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를 위해 가장 적절한 행위가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걷는 일 같았다. _164쪽
사람들은 시인의 체온이 담긴 심리학적 매개물, 그 차가운 종이쪽을 만지면서 시인의 형상을 가깝게 호흡하고 친밀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적인 세계의 비천함과 싸우는 행위는 아니다. 김남주는 그러한 행각이 자신을 자기기만의 세계로 휩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늘 경계해 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는 세계를 이탈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해 왔으며, 또한 그래서 그의 강한 의지력은 의식적으로 시를 제쳐두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라는 것을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시대의 낭만적인 감정과 문학 취향을 업신여기는 김남주의 교만은 얼마나 당당한가? _229~230쪽
20세기는 군주와 제국이 몰락하고, 명목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발전한 시기이며, 동시에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군사독재가 발흥했던 시기임을 고려할 때 김남주의 시는 그 한복판을 관통한 매우 역사적인 정신유산임이 틀림없다. 특히 지구의 광범한 영역에서 출현한 저항시의 유산을 가장 폭넓게 소화했으면서도 자신의 대지가 낳은 고유의 어문구조를 가장 실감 나는 시적 성취로 바꾼 매우 보기 드문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열악한 장소, 즉 광주교도소의 특별 사동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 놀라운 일이다. _446~447쪽
어떤 예술이든 작가가 이념이나 기교적 습성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현 존재를 현실 그 자체로 대체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최고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시인의 언어가 당대의 심장에서 솟아야 하고, 또한 그로써 수많은 사람을 역사의 광장으로 부르는 힘을 가지려면, 시인의 자리가 정치적 내전의 시대라고 할 만큼 격렬한 폭발 현장에 육박해 있어야 한다. 20세기를 통틀어 1억 5000만 개의 영혼이 전쟁과 국가 지도자들의 직접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김남주의 시는 그 치열한 지대의 한복판을 포복하였고, 그래서 얻은 ‘백열’하는 정신으로 시대적 관능의 정점에 이르렀음을 당대에 증명했다. _541쪽
만인을 위해 싸울 때 나는 자유라고 외친 순수한 영혼
온 생애를 민중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헌신하였고 자기 시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순수한 시인 김남주(1945~1994)의 생애를 올올이 살려낸 평전이다. 스스로를 ‘전사’라고 칭했던 시인 김남주.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으로 기록된 ‘남민전 사건’으로 10년에 가까운 옥고를 치르면서도 평생에 남긴 시 510편 중 360편을 옥중에서 탄생시킨 그는 대한민국 문학사와 민주화 역사에 뜨거운 상징으로 서 있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생의 궤적을 생생하게 되살려 내어 의미를 되짚어 본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 김형수는 김남주 시인의 고향 해남 땅끝에서부터 학생운동의 도시였던 광주를 거쳐 서울에 이르기까지 시간적 지리적 변화를 따라가며 김남주를 지탱했던 정신적 원형이 무엇이었는지 밝힌다. 또한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발간하는 내밀한 과정과 옥중에서 우유갑과 은박지에 꾹꾹 눌러 쓴 시를 비밀리에 내어 옥중시집으로 출간한 일 등 자신의 안위 대신 오직 국가와 민중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순수한 영혼 김남주의 족적을 선명하게 펼쳐낸다.
저자는 “그의 시에 빚을 진 한 사람으로서” “미천해 보이는 지상에 김남주라는 영혼이 다녀간 사실을 증언”하고자 김남주의 생애를 복원하는 데 오랜 시간 열정을 쏟았다. 군사독재가 사라지고 30년이 흐른 세월에도 우리가 지금 김남주의 불꽃같은 삶과 문학사적 자취를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까닭을, 저자는 여전히 대한민국에 ‘촛불’ 같은 영혼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시인의 곁에서 경험한 일화들과 출간되었던 산문, 가까운 지인들의 취재를 망라해 완성된 이 평전은 김남주 문학의 토대가 된 생애 전반부는 물론이고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자유의 깃발을 위해 민중 문학으로 투쟁하였던 후반부까지 생생하게 그려낸다. 편편이 흩어진 문학사적·역사적 사건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김남주의 삶과 문학, 민주화 투쟁이 어떻게 하나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낸 이번 작업은 지금까지 시인의 생애 경로와 유산을 정리한 결과물 중 가장 결정체라 평할 만하다.
김남주의 삶을 논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의 시인 만큼, 저자는 김남주가 남긴 작품들 중 한국시사에 커다란 족적으로 남은 시들을 중심으로 서사를 펼친다. 《창작과비평》에 투고하여 문단에 등단함과 동시에 지식인 사회는 물론 민주화운동권에서도 화제가 된 「잿더미」를 비롯해 김남주의 자기 기반이었던 농촌 사회와 해결 과제로서의 계급 감정이 드러나는 「종과 주인」, 대학 재학 중에 반(反)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만들었던 김남주의 독보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불린 명곡 〈죽창가〉의 노랫말이 된 「노래」 등을 통해 한국 현대사와 시인의 생애 전반에 제기되는 문학적 정치적 주제들을 빠짐없이 살핀다.
1974년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199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남주의 시는 세상에 스스로 던져져 거대한 힘을 만들어 낸 혁명의 산물이었다. 저자는 다중이면서도 하나의 목소리로 민중의 함성이 되었던 그의 시세계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경로를 밝히는 한편, 김남주의 생애가 시대의 위대한 유산으로서 후대에 온전히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당대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시인의 업적을 현재 시점에서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였다.
인간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며 시와 혁명을 하나로 이룩하고자 했던 시인의 순결한 고투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를 불태워 민주 정신의 빛을 밝히려 했던 시인의 양심이 이 평전으로 되살아나 지금의 촛불 세대에 귀감이 되어줄 것이다. 김남주의 시와 삶이 하나의 역사로 박제되지 않고,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 노래로 불릴 수 있을 때 우리가 찾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길을 밝히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대학지성 이명아 기자
잿더미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피가 보이지 않는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꽃이다 영혼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 보이지 않는다
육신이 보이지 않는다
꽃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피의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영혼이 깃드는가
핏속에 육신이 흐르는가
영혼이 꽃을 키우는가
육신이 피를 흘리는가
꽃이여 영혼이여
피여 육신이여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육신을 던져 보았는가
죽음의 불길 속에서
영혼은 어떻게 꽃을 태우는가
파도의 심연에서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꽃이다 피다
육신이다 영혼이다
그대는 영혼의 왕국에서
육신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대는 피의 꽃밭에서
영혼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파도의 침묵 불의 노래
영혼과 육신은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던가
숯덩이처럼 검게 타버리고
잿더미와 함꼐 사라지던가
그대는
새벽을 출발하여
폐허를 가로질러
황혼을 만나보았는가
황혼의 언덕에서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난파선의 침몰을 보았는가
승천하는 불기둥을 보았는가
침몰과 불기둥은 무엇을 닮고 있던가
꽃을 닮고 있던가
피를 닮고 있던가
죽음을 닮고 있던가
그대는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새벽을 기다려보았는가 그때
동천에서 태양이 떠오르자
서천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죽어버린 별
죽으러 가는 별
죽음을 기다리는 별
그대는 달과 별의 부활을 위해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려보았는가
그대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보았는가
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보았는가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동토(凍土)를 녹이던가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봄의 중턱에서
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잡초는 어떻게 뿌리를 박고
박토에서 군거(群居)하던가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가시처럼 번식하던가
곰팡이는 왜 암실에서 생명을 키우며
누룩처럼 몰래몰래 번성하던가
죽순은 땅속에서 무엇을 준비하던가
뱀과 함께 하늘을 찌르려고
죽창을 깎고 있던가
아는가 그대는
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대는 아는가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꽃이여 피여
피여 꽃이여
꽃 속에 피가 흐른다
핏 속에 꽃이 보인다
꽃 속에 육신이 보인다
핏 속에 영혼이 흐른다
꽃이다 피다
피다 꽃이다
그것이다!
불
불이 아니면 안된다고 자못
핏대를 올리는 녀석들이 있다
놈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적당한
아주 적당한 간격을 두고
불 앞에서 불과 타협한다
불을 노래하는 녀석들이 있다
놈들의 주둥이를 비틀어라 그들의 눈은
사슬에 묶인 시인의 간과 닮고 있지 않다
날개도 없는 주제에
불을 버리고 산을 넘는 녀석들이 있다
놈들을 쏘아라 농부가 논둑에
말뚝을 박듯 그렇게 다부지게
불기둥을 박고 그들을 쏘아라
고무로 만든 새총으로도 떨어뜨릴 수 있다
불의 위선자들 가련한 휴머니스트여
머리 덜 깬 친구여 오 불행한 천사여
제발 좀 순조로워라 열기 속에서
타오르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불은 산이 되어 너를 기다린다
불은 바위가 되어 너를 기다린다
불은 거꾸로 걷는 활자가 되어 너를 기다린다
불은 비뚤어진 꽃잎이 되어 너를 기다린다
불은 불결한 나체가 되어 너를 기다린다
불은 노동자의 절단난 팔이 되어 너를 기다린다
불은 농군의 굶주린 얼굴이 되어 너를 기다린다
불은 겨울의 이빨이 되어 너를 기다린다
불은 약탈이 되어 너를 기다린다
불은 끝나지 않는 고난이 되어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신화(神話)가 되어 너를 기다린다
예술지상주의
예술지상주의 그것은 애초에
이승은 떠남의 세계였고 현실은 네미씹이었다
그에게는 예술지상주의자에게는
문명은 파괴되어야 할 적이었고
자학과 광기와 절망이 삶의 전부였다
그에게는 나이도 없었다
예술이라면 제 애비도 몰라보는 후레자식이 예술지상주의였다
염병할! 그놈의 사후의 명성이란 것도
그에게는 부질없는 무덤이었다
예술이라면 예술 아니 모든 것이
저주해야 할 대상이었다 쓰레기였다
부르조아 새끼들의 위선이 거만이 구역질나서 보들레르는
자본의 시궁창 파리 한복판에서 악의 꽃을 키웠다
랭보는 꼬뮌 전사의 패배에 절망하여
문명의 절정 빠리를 떠났다
시에다 똥이나 싸라 침을 뱉고
대한민국의 순수파들 절망도 없이
광기도 자학도 없이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자르르 교양미 넘치는 입술로
자본가의 접시에 군침을 흘리면서 예술지상주의를 한다
에끼 숭악한 사기꾼들
죽으면 개도 안 물어가겠다
그렇게 순수해가지고서야 어디 씹을 맛이 나겠느냐
농민
공기와도 같은 것
공기 속에 보이지 않는 산소와도 같은 것
물과도 같은 흙과도 같은 것
질소와도 같은 것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는 것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
흔해 빠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으면서도
내가 없으면, 일 분 일 초도 없으면
세상은 순식간에 죽음의 바다, 나는 농민이다.
조상 대대로 농민이다.
천 · 지 · 현 · 황 삼라만상이 생긴 이래 으뜸가는 농민이다.
보라
이글이글 검게 탄 얼굴 나를 보라
보라
무릎까지 빠진 대지의 기둥 나를 보라
더는 빠질 수 없는 밑바닥 인생 나를 보라
나는 쩍쩍 벌려진 가뭄의 논바닥이다
나는 수마와 모기와 거머리에 할퀴고 뜯기고 빨린 상처투성이
나는 천 년을 하루같이 일하고 가을이면 빈손으로 그득한 쭉정이
아 가난한 나는 천국이 그의 것이나니
나는 찢어지게 행복한 똥구녁이 아닌가
물건과도 같은 것
물건에 붙어 다니는 꼬리표와도 같은 것
삼등열차에 실려 가는 상품과도 같고
새벽이면 하역장에서 매겨지는 가격과도 같은 것
흉년에도 10원 풍년에도 10원
값은 고하간에 규격 미달 반팽이 나는 농민이다.
읽을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다.
화물차에 실려 도시의 잡담에서 밟히고 뭉개지는 배추포기이다.
도시의 어금니에서 씹히는 보리알이고
도시의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의 쌀이고
자본가가 통째로 삼킨 안 뽑힌 터럭의 통닭이다.
뿐이랴! 네놈들 인육의 시장에서 매매되는 노예이다.
나는 부재의 사모님 저택에서
애비고 애비의 큰놈이고 작은놈이고 마구 올라탄 식모살이다.
나는 네놈들이 막걸리와 고무신짝으로 벌여 놓은 선거판에서
쿠데타 치다꺼리나 해 주는 99%의 국민투표다.
그리고 내가 물건이 아니라 꼬리표가 붙은 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고자 할 때
대지의 주인이고 내가 만든 쌀이며 옷이며 집이며
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자 할 때
그때마다 네놈들이 멋대로 갖다 붙이는 이름이다 딱지다.
폭도고 비적이고 공비고 역적이다.
역사에 부치는 노래
빛이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세상이 갈 길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섬광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어둠의 세계와 싸우며
밝음의 세계를 열었으니
역사는 그들을 민중의 지도자라 부르기도 하고
시인은 그들을 하늘의 별이라 노래하기도 한다
소리가 소리를 잃고 침묵 속에서
세상이 무덤처럼 입을 봉하고 있을 때
천둥처럼 땅을 치고 하늘을 구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세계와 싸우며
하늘과 땅을 열었으니
역사는 그들을 민족의 선각자라 부르기도 하고
시인은 그들을 대지의 별이라 노래하기도 한다
오늘 밤 우리는 여기 모였다 어둠을 밝히고
역사의 지평선으로 사라져 간 그들을 부르기 위해
오늘 밤 우리는 여기 모였다 침묵을 깨치고
강 건너 저편으로 사라져 간 그들을 노래하기 위해
김시습
정여립
정인홍
최봉주
김수정
허균
이필제
김옥균
김개남
전봉준
그들은 지금 우리와 함께 여기 있다
민족이 해방을 요구하고
나라가 통일을 요구하고
민중이 자유와 평들을 요구하고 있는 이 시대에
무심
아침 햇살이 은사시나무 우듬지에서 파르르 떨고
산골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는 내 귀에서 맑다
나는 지금 어머니를 따라 산사를 찾아가고 있다
어머니 그동안 이 고개를 몇 번이나 넘으셨어요
니가 까막소 간 뒤로 이날 이때까장 그랬으니까
나도 모르겄다야 이 고개를 몇 차례나 넘었는지
옥살이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자식을 보러
감옥을 찾은 적은 없었으되
정월 초하루나 팔월 보름날 같은 날이면
한 번도 빠짐없이 절을 찾으셨다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두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실은 나도 모를 일이다
자식이 보고 싶을 때
감옥 대신 절을 찾으셨던 어머니의 그 속을
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어머니 그 절이 나오지요
그래그래 하면서 어머니는 숨이 차는지
공양으로 바칠 두어 됫박 쌀차둥이를 머리에서 내려 놓고
후유후유 한숨을 거듭 쉰다
니 나왔은께 인자 나는 눈감고 저승 가겄어야
니 새끼가 너 같은 놈 나오면 그때는
니 예편네가 이 고개를 넘을 것이로구만
풍진 세상에 남정네가 드나들 곳은 까막소고
아낙네는 정갈하게 몸 씻고 절을 찾아나서는 것이여
*"인자 오냐" 그뿐이었다, 내가 옥문을 나와 십 년 만에 고향 집을 찾았을 때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은/ '어디 몸 상한 데는 없느냐' '고생 많이 했지야' 이따위 말씀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어머님의 속을 알지 못한다. 무심(無心), 이 한마디의 말 속에 내 어머니의 속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희로애락에 들뜨거나 호들갑스럽지 않은 내 어머니가 때로는 부처님 같기도 하다.
신춘 덕담
통일로 가는 길에서
우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얼핏 보아 겉으로는
우리인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우리가 아닌 것이 있으니
나락 속의 피 같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우리가 가려내야 합니다
주머니 속의 칼 같은 것 있으니
그것을 우리가 찾아내야 합니다
귀신몰이 굿이라도 한바탕 벌여서
돈귀신에 홀려서 남과 북을 왔다 갔다 하는
재벌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선무당 불러서 칼춤이라도 추게 해서
재벌 귀신과 한패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독불장군 총 든 장군 그 목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통일로 가는 길에서
정작으로 해야 할 일은
휴전선 팔백 리 삼팔선 따라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걷어내는 일입니다
부러진 날개의 새 피 묻은 B29는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로 보내고
그 자리에 영변의 약산 진달래가 피어나게 해야 합니다
녹이 슨 캐터필러 소련제 탱크는
압록강 뗏목에 실어 시베리아로 보내고
그 자리에 지리산 철쭉꽃이 만발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평화의 마을에서
남남북녀가 통일의 초례청에서 맞절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날 우리가 마셔야 할 술은
조니워커도 아니고 보드카도 아닙니다
남녘의 쌀막걸리이고 북녘의 옥수수술입니다
그런 날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켄터키의 옛집도 아니고 볼가 강의 뱃노래도 아닙니다
아리 아리랑 아라리요 몽금포 타령입니다
그런 날 우리가 추어야 할 춤은
고고도 디스코도 아니고 마주르카도 아닙니다
도라지 타령에 더덩실 보릿대춤입니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1
여러분 일어나 주십시오
광주 교도소 3사 하에 계신 여러분
일어나 잠시 철창가에 서 주십시오
오늘은 그날입니다 3년 전
1980년 5월 그날입니다
그날이 오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는 날입니다
우리 주먹에 증오의 힘 모아지는 날입니다
오늘은 그날입니다 여러분
자유 달라 벌린 입에 압제자가
미제 총탄을 먹인 바로 그날입니다
오늘은 그날입니다 여러분
밥 달라 벌린 입에 착취자들이
미제 수류탄을 먹은 바로 그날입니다
오월은 그날입니다 여러분
통일의 노래 부르다가 어려쁜 처녀들이
미제 대검에 그 하얀 젖가슴 난도질당한 바로 그날입니다
오늘은 그날입니다 여러분
독재 타도 외치다가 피 끓는 청년 학생들이
미제 총칼에 그 붉은 가슴 벌집투성이가 된 바로 그날입니다
생존권 보장하라 아우성치다가 노동자 농민들이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능지처참으로
미제 트럭에 실려 어둠 속으로 끌려간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입니다 오늘은
1980년 5월 그날입니다 오늘은
학살에 치를 떨며 광주 시민들이 들고일어선 바로 그날입니다
선생과 학생들이 책가방을 내던지고 횃불을 들고
새벽을 향해 밤으로 일어선 바로 그날입니다
신부와 목사가 성경책 대신 십자가 대신
주먹을 치켜들고 일어선 바로 그날입니다
화이트칼라 사무원들이 서류철을 내동댕이치고
팔소매 걷어붙여 일어선 바로 그날입니다
직공들은 철공소에서 망치를 들고 일어서고
농부들은 들녘에서 낫과 호미를 들고 일어선 바로 그날입니다
운전사들은 거리에서 차를 세워 일어서고
아가씨들은 술집에서 주먹밥을 뭉쳐 일어선 바로 그날입니다
어머니들은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일어서고
할머니들은 우리 새끼들 다 죽인다아 군인들이!
목청에 피를 토하면서 꼬꾸라지면서 일어선 바로 그날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그날입니다
3년 전 5월 그날입니다
그날이 오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자유 만세 부르다 죽은 그 사람 그 얼굴이 그러워지는 날입니다
통일의 노래 부르다 죽은 그 사람 그 목소리가 그리워지는 날입니다
생존권 보장하라 외치면서
무기와 함께 쓰러진 그 사람 그 이름을 불러 보고 싶은 날입니다
그 사람 그 얼굴 기리기 위해
그 사람 그 목소리 기리기 위해
그 사람 그 이름 기리기 위해
일어나 우리 함꼐 묵념합시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모으며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주먹에 증오의 힘 모으며
2
여러분 이제 앉아 주십시오
앉아서 잠시 제 말씀 들어 주십시오
5월 그날 누가 가장 잘 싸웠습니까
압제에 반대하여 자유를 위해
착취에 반대하여 밥을 위해
학살에 반대하여 밥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누가 과연 최후까지 싸웠습니까
가장 잘 배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소리쳐 주십시오
가장 많이 아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소리쳐 주십시오
가장 많이 가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소리쳐 주십시오
오월 그날 착취와 압제와의 싸움에서
무기를 들고 최후의 그날까지
승리 아니면 죽음을 외치며 싸운 사람은
가장 잘 싸운 사람은
여러분처럼 배운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아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가진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받는 공장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일 년 삼백예순날
쉬는 날 하루도 없는 들녘의 농민들이었습니다
가장 험하게 일하고 매일처럼
가장 천하게 일하고 매일처럼
천 길 굴속에서 빠져 죽는 광부들이었습니다
만 길 하늘에서 떨어져 죽는 현장 인부들이었습니다
배운 것이라고는 여러분처럼
부잣집 담밖에 넘을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여러분처럼
니기미 씨팔! 좆같은 세상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여러분처럼
손 달리고 발 달린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몸 팔아 상품으로 팔아 쾌락의 도구로 팔아
배운 자들 아는 자들 가진 자들 좋은 일 시켜 주고
하루 세 끼 겨우 빌어먹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최후까지 싸우게 했겠습니까
선생들은 학생들은 책가방을 던지고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기는 했지만
목사들은 신부들은 십자가를 던지고
주먹을 불끈 쥐고 한길에 나서기는 했지만
화이트칼라 신사들은 서류뭉치를 던지고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길가에 나서기는 했지만
무기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종이 비둘기밖에 날릴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가슴에 십자가밖에는 그을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대지에 무릎을 꿇을 줄밖에 몰랐습니다 그들은
여러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가진 것 없는 노동자 농민들로 하여금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들로 하여금
아는 것 없는 부랑아들로 하여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최후까지 싸우게 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선생이나 학생들처럼 뒤돌아봐야
은행에 부어 놓고 온 적금 따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목사나 신부들처럼 뒤돌아봐야
그림 같은 집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화이트칼라 신사들처럼 뒤돌아봐야
느긋하게 발 뻗고 쉴 수 있는 방 같은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앞으로 전진해야 싸워야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 무기를 들고 최후까지 싸워야
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진 자들만이 배운 자들만이 아는 자들만이
독점으로 누릴 수 있었던 것
자유 밥 평화 행복 그따위 것들을
그들도 한번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처럼 그들도 뒤를 돌아봐야
잃어서 아까울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잃을 것은 압박과 가난의 쇠고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