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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가덕 눌차 정거마을 국제워크 캠프 -닻거리마을 하얀 골목 만들기 4박5일(12.8.6)

by 이성근 2013. 6. 10.

 

 

가덕 눌차 정거마을을 다시 찾았다. 지난1월부터 6월까지의 습지생태체험마을 만들기 이후 2개월 만이다. 물론 틈틈히 마을을 찾긴했다.  생태체험마을 만들기는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 연장선에서 7월30일부터 8월4일까지 4박5일간 국제워크캠프가 있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처음엔 워크캠프라 하여 '걷는'것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잡았다가 다시 수정하는 헤프닝도 있었다.  

워크캠프란?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인간애를 배우고 타 문화 체험을 통해 다양성과 상호 존중을 배우며, 다국적 젊은이들과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 상호 이해와 협력을 배움으로써 국제화 마인드를 함양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대부분의 워크캠프는 여름(6월~8월)에 개최되며 참가자들은 현지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일을 한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의 자발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워크캠프' 라고 한다.

 

워크캠프는 1920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재건과 화합을 도모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평화운동으로 시작되었고 이러한 의미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워크캠프는 참가자들의 무한한 에너지를 모으고 지구상의 미래를 공유하기 위해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워크캠프는 전 세계 인류의 '평등'을 추구함에 따라 참가자들은 해당 지역의 현지주민들과 동일한 생활수준으로 지내게 된다. 또한 모든 문제 해결은 캠프 참가자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된다. 

 

캠프의 목적

1) 서로 다른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가진 개인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한다.

워크캠프 참가자들은 워크캠프 기간 동안 함께 일하고 생활하면서 일시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다. 워크캠프 내에서 그들은 함께 요리하고, 여가시간을 보내고, 프로젝트를 어떻게 수행할지 토의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기회를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에 생활조건은 아주 기본 적인 수준이며 때때로 개인생활을 보장받지 못할 때도 있다. 다양한 참가자들이 그런 환경에서 함께 생활하면 갈등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음식, 여가시간, 작업방법 등 많은 부분에서 실제로 갈등이 일어난다. 그러나 워크캠프에 참가하는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비폭력적인 갈등해결방법을 통해서 다른 시각과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2) 참가자들은 프로젝트가 개최되는 지역사회와 상호교류를 할 수 있다.

워크캠프에 참가함으로서 참가자 그룹은 그들의 일시적인 생활터전인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많은 국가에서 지역주민들은 외국에서 자원봉사하기 위해 온 참가자들을 신기한다.  그들에게 자원봉사를 하러 외국에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국제워크캠프가 개최됨으로서 지역 주민들은 보다 넓은 시각을 가지게 된다. 대체로 워크캠프 참가자들은 지역주민들과 잘 어울리며 함께 얘기하고 토론을 함으로써 생각을 교류하게 되고 아울러 지역문화를 함께 즐기게 된다.

 

3) 워크캠프는 "말보다 행동하라"를 반영한다.

이것과 관련해서는 실질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 세계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평화로운 협력과 비폭력 갈등해결의 기회를 주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긴 하지만 이것이 지역 사회가 워크캠프를 개최하고자 하는 주된 이유는 아니다.  첫 번째 관심사는 지역사회에 이득이 되는 특정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것이니다. 둘째로, 그 누가 어떻게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지 또한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자원봉사자들은 주어진 임무를 성심성의껏 완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캠프의 의미

국제워크캠프는 자원봉사에 바탕을 둔 일종의 공동체 프로그램으로서 일정한 인원이 한정된 기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사전에 준비된 자원봉사 프로젝트를 공동 협력하여 완수하는 프로그램이다.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다양한 역할들이 포함되어야 하며 또한 다양한 양태의 문화적 갈등이 나타나게 마련인데 이러한 과정들을 자원봉사와 함께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조화로운 삶 속의 자신을 형성해나가게 된다.

국제워크캠프는 자원봉사를 통한 공동의 목표 수행을 통해 목표의식을 배양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견학, 연수, 방문, 관광위주의 국제교류 프로그램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경쟁의식 없는 목표의식을 말하며 이것은 공동체생활의 특성과 함께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며 민주적인 사회성과 공동체의식을 함양시킨다.

국제워크캠프는 교육적인 의도를 포함한 프로그램이기에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공동체생활을 통한 교실밖교육(Non-formal Education)으로서 매우 큰 교육적 효과를 의도하고 있다.

7월30일 부산시청 광장에서 집결한 이들은 차편으로 가덕도 눌차 정거마을로 들어 왔다.  그들은 의외로 초면의 서먹함을 지우고 쉽게 하나가 되었다.  물론 게중에는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들도 있어 정거마을에서의 일정이 끝나도록 안타까움을 가지게 하기도 했지만 뒤돌아 보니 그들 스스로가 주어진 미션에는 최선을 다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정거마을에는 러시아 2명, 체코 1명, 독일 1명, 대만 2명, 인도네시아 2명을 포함하여 한국대학생 9명이 참가 했다. 원래 일본과 프랑스에서도 참가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합류하지 못했다.  첫날은 오리엔테이션으로 마을 주민과의 만남을 비롯하여 지기나라와 자기 소개 및 일정 공유, 방 배정에 따른 생활수칙과 역할 분담이 있었다.

소개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의 등장은 마을을 술렁이게 했다. 

정거생태마을 만들기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었다.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영어로 소통이 이루어 졌다.   

이철희 통장이 강서구 천거동 사무장을 비롯 마을 집행부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첫날 첫 밥, 김치를 빼고 캠프 참가자들은 정거마을 부녀회가 제공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ㅣ

자유시간 공통의 주제로 진지하게 각자의 의견을 나누는 참가자들  

바다로부터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

마을회관에 붙은 참가자들의 소개글들

주민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내일의 작업을 준비한다,

1일차

7. 30(월)

- 가덕도 눌차 정거 마을

(오리엔테이션, 자기소개, 주민들과 만남)

가덕도

2일차

7. 31(화)

- 정거 마을(생태마을)만들기 (1일차)

가덕도

3일차

8. 1(수)

- 정거 마을(생태마을)만들기 (2일차)

가덕도

4일차

8. 2(목)

- 정거 마을(생태마을)만들기 (3일차)

- 가덕도 눌차만 걷기

가덕도

5일차

8. 3(금)

- 낙동강 일대 역사·문화 탐방(용원 망산도 허황후도래지> 김해 김수로왕릉> 국립김해박물관> 을숙도 에코센터

 

낙동강 하구 일원

 

첫날 밤이  지나고 본격적 '작업'이 시작됐다.  기존 벽면 페인트 제거 작업이 있었다. 다소 어둡고 칙칙한 골목이 이들의 등장으로 새 옷을 입기 시작닥했다. 하지만 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수고를 기특하게 여기고 고맙게 여긴 주민들의 지원이 골목에서 피었다.  나중에는 '배가 불러서.."라는  하소연까지 할 정도였다. 페이팅은  꼬박 이틀에 걸쳐 이루어 졌다.  마을 전체를 온통 흰색으로 물들였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었지만 예산과 시간의 문제로 그 작업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연결되기를 희망해 본다. 예컨데 부산은행 사회봉사팀 등이 추가로 마을의 변화에 동참하는 차원 정도라고  할까.   

 참가자들은  진짜 열심히 일했다.

마치 자기 집을 단장하듯

 너무 더운 한낮은 피하고

 오후 들어 재개된 작업, 마을의 묵은 때가 벗겨지듯 마을이 변신하기 시작했다.  

 페인트 칠은 자원봉사로 참여한 페인트 전문가의 조언과 현장 지도 속에 이루어 졌다.

 원래 일정 골목만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칠하다 보니 작업은 더 늘어 났다.

 작업 이틀째

 태풍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불볕더위는 여전했다.

 오후들어 마무리가 되고 있다.

페인트 칠하기 전후의  골목이 확연히 달라 졌다.

흰구름처럼 산뜻해진 골목

 

바다로부터 몰려온 하얀파도가 골목으로 몰려들오 온 것 같다.

 

그들이 가덕도에 간 까닭은? 부산일보 12.8.4

지난 1일 오전 부산 강서구 가덕도 정거마을. 주민 12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한적한 어촌마을이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위 속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페인트통을 들고 마을 곳곳 담벼락을 하얗게 칠하고 있다. 어라, 그런데 모두 영어를 쓴다. 이들의 정체는?

 

세계 각지 청년들이 모여 환경, 건축 등 다양한 분야 자원봉사 활동을 펼치는 '워크캠프' 소속 청년 16명이 그 주인공이다.

 

'워크캠프'는 전세계 70개국을 무대로 환경과 교육, 사회 등 총 6개 분야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는 국제 봉사단체. 1920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젊은이들의 평화운동으로 처음 시작됐고, 1999년 국제워크캠프기구(IWO)가 조직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활동을 시작했다. 매년 여름 전국 10~12곳에서 지역 시민단체와 함께 2~3주간 일제히 캠프를 연다.

 

부산 시민단체 '녹색도시 부산21'과 협력해 열린 이번 부산지역 캠프는 지난달 30일 시작돼 오는 10일까지 2주간 진행된다.

 

5일까지 1주일 동안은 가덕도 정거마을에 캠프를 마련하고 벽 페인트 칠하기를 비롯한 정거마을 꾸미기와 가덕도 생태탐방 등을 실시한다. 6일부터는 동구 산복도로 텃밭 만들기 등 산복도로 르네상스 일손 돕기, 삼락둔치 맹꽁이 모니터링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간다.

 

이번 캠프에 참여한 청년들의 국적은 한국을 비롯해 독일과 러시아, 대만, 인도네시아, 체코 등 다양하다.

 

김효진(26) 씨는 워크캠프에 네 번째 참여하는 베테랑. 참가할 때마다 새 친구를 사귀고, 소소한 일이라도 남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해 계속 참여하게 됐단다. 대학 졸업 전 뜻깊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 캠프에 지원했다는 장성일(27) 씨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나라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캠프에 대한 생각은 외국인도 마찬가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왔다는 대학생 리사(20) 씨는 더위에 연방 물을 들이켜면서도 단순한 관광지 순례가 아닌 한국의 일상적인 삶을 엿볼 수 있어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다며 눈을 반짝였다.

 

구슬땀을 흘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30여 분 동안 일한 뒤 가진 약간의 휴식시간. 휴식시간이 왔는데도 페인트칠을 멈추지 않은 독일 출신 니콜(19) 씨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주민들로부터 듣는 "감사하다"는 말에 힘이 솟는단다. 마을을 환하게 해줘서 고맙다며 마을 주민인 오초자(71) 할머니가 시원하고 맛난 아이스커피를 타왔다. 커피를 맛있게 마신 이들은 다시 페인트칠을 하러 마을 곳곳을 누볐다.  글·사진=윤여진 기자

 

사실 부산일보의 기사는 아주 크게 실릴 예정이었지만 정치기사로  인해 뒤로 밀려 난 것으로 알고 있다.

페인트 칠은 이틀로는 부족해 사흘이 소요됐다.  몸에 묻은 페인트 자국을 지우는 참가자들

 작업완수 기념촬영

 

갈맷길 5-2 코스 눌차만 들레길 탐방에 들었다. 

국수봉 구간 탐방에 든 참가자들

지역의 역사를 들려주는데 언어의 장벽이 많았다.  그럼에도 3일간의 작업 끝 나들이는 이들을 즐겁게 했지만 무성하게 자란 여름풀들은 이들의 행보를 어렵게 했다.  갈맷길 관리의 부재였다.

갈맷길 탐방에는 부산지역 중고등학교 자원봉사자도 동참했다.

정거마을이 품은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 이 마을 혹은 주변 해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과 의미 등

 

정거마을 외국인의 등장은 이들이 최초가 아니다. 예전에 몰몬교 선교사들이 대거 들어 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아무튼 여러가지 시설물들이 갈맷길 중간중간에 들어섰지만 여름풀이 무성하게 자란 길은 중간중간 길이 사라지기도 했다.  갈맷길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길은 지켜지기도 하지만 관리되기도 한다.  방치할 경우 묵정밭처럼 된다. 

전체 탐방코스는 약 9km의 눌차만 둘레길 걷기였지만 국수봉 둘레길 걷기로 줄였다.  저녁에 수행할 마지막 미션준비를 위해서 였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그늘에서 쉬고 있던 주민들이 수고했다며 노고를 치하한다.

이들이 3일간 흘린 땀방울의 결실로 마을이 훨씬 밝아졌다.  애초 마을 폐인팅 제안은 지난 6월 주경덕 개발위원장이 제안함으로써 시작됐다.   마을의 외형적 변화를 통해 마을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였다.

높은 파고로 인해 주민들이 갯일을 나기지 않고 모처럼 그늘에서 쉬고 있다.

개인적으론 마을 전체를 흰 색 페인트로 도배를 했으면 했지만, 일정과 예산상 골목에 만족해야 했다.

주민들은 굴양식장에서 작업하면서  바라본 마을이 새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했다.   어찌보면 반바지 차림의 마을 변화인 것 같다.  관심있는 단체나 기업, 행정에서 옷도 입혀줄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으면 해 본다. 

달이 뜨고 태풍의 비켜간 먼 바다로부터 너울이 일렁이는 저녁  

캠프 참가자들이 자국의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하기로 했다.

대만 친구들

러시아와 체코참가자들이 불판에 음식을 준비 중이다.

음식을 만드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시식의 시간, 주민들이 궁금해하며

맛을 본다.  먹을 만 하네,  맛있네 

식판 하나 가득 5개 국의 음식이 담겼다. 내 입맛에는 스프처럼 생긴 오른 쪽 하단 체코 친구가 만든 요리가 간간하면서도 먹을 만 했다.  

주민들이 물러 간 다음 공식적으로 주류가 나왔다,  맥주와 먹걸리였다.  러시아 친구들이 특히 잘 마셨다.  주는 족 완 컵으로 들이키는 모습에 한국참가자들이 신기해 하기까지 했다.

정거 화이팅

유난히 막거리를 좋아했던 러시아 참가자 리사

대만 참가자들은 그들의 국적을 말하지 않는다면 국내참가자로 안다. 

조촐한 막걸리 뒷풀이는  참가자 모두에게 지구촌 식구로서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4일간의 낮과 밤이  흐르면서 참가자들은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잠시 빠져나와 통장집으로 간다.

보름달이 은은한 밤이었다.  병어회를 안주 삼아 마을의 이런저런 이야기며 앞으로의 일들을 나누었다.  마을에서 일고 있는 미묘한 기류도 감지하며 ....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녹색도시부산21 주승철 국장이며, 송부장의 노고를 격려하며... 

정거에서의 마지막날 주승철국장이 대자로 뻗어 잔다.  하마 봉창이 밝았는데,,,

봉창이 밝았다 해도 일곱시가 못 되는  시각이다.  하늘이 무더운 하루를 예고한다.

그렇지만 건너다보는 마을의 색깔은 부족하나마 흡족하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이름 남기기

마을에 볼거리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마을 집행부들이 4박5일간의 일정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들어올때와 마찮가지로 나갈때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둡고 칙칙했던 골목길을 밝게 만든 이들이 들어왔던 골목을 통해 다시 나서고 있다.  내년에는 2주간 통으로 정거마을에 머물 수 있도록 제안하기도 했다.  정거생태마을 만들기에 다양한 그릅들이 동참하고 흔적을 남기면서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25인승 버스를 이용하여 낙동강 하구 생태문화 탐방에 든다.

가덕대교 위를 지나며 차창 넘어 마지막으로 눌차 정거마을을 건너다 본다.  진우도를 코 앞에 두고 건너다 보기만 했다. 

11시 조금 넘어 가락국의 시조이자 금관가야의 문을 연 김수로왕릉에 도착했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안내로 각 건물의 존재이유와 의미 등을 들었다.  

원래 '허황후의 초행길과 낙동강하구의 만남' 이란 주제로  특강을 준비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시집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현장이 진해시 용원에 있는 망산도라는 곳이다. 삼국유사 가락구기에 의하면 유천간 등이 아유타국 공주 허 황옥을 기다린 곳이며, 허 황옥 일행이 타고 온 돌배가 뒤집힌 곳의 흔적이 유주암이다. 그 유주암이 있는 곳을 망산도라 하고, 길건너 1km 지점에 유주비각이 있다.

 

가야는 자국 역사를 남기지 못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분을 통해 밝혀진 가야사는 신라,백제,고구려와 용호상박하는 위치에 있었고, 이들 나라들 간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지혜롭게 살았던 나라라 볼 수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청동기 유물인 동복(청동솥)과 호형대구(虎形帶鉤: 청동혁대), 말재갈, 말목가리개, 마갑 등의 철재마구류들은 삼국지 위서동이전(중국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시대를 기술)의 ‘변진(弁辰)’조의 기록을 증명하기도 한다. 나아가 가야의 지배자들이 기마민족 출신임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그 연원을 부여로 추정하고 있다. 김해에서 출토된 동복은 북방의 특정한 동알 집단에서 제작된 것으로 중국의 길림성 북부와 흑룡강성 남부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부여의 옛땅이다. 오늘날 북만주의 송화강 유역에 해당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가 최인호는 다큐식 소설 ‘제4의 제국’을 통해 일본 건국의 주역이 가야인이라고 한다,

 

가야의 기원

금관가야 성립의 한 축인 허황후의 도래는 여전히 미스테리가 많다, 그 누구도 정확히 단정짓지 못하고 추정 한다, 전하는 말을 쫒아 그 초행길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가락국의 왕이 된 수로는 이듬해 궁궐을 새로 짓는 등 내치에 힘쏟는데, 그때까지도 마땅한 배필이 없어 신하들이 배필을 맞아들일 것을 청하게 되는데 그 상황을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已來 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 選入宮闈 俾爲伉儷. 王曰 朕降于玆 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 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 就乘岾[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國也]. 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入闕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 而迎之. 旋欲陪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返達后之語...

건무(建武) 24년 무신년(서기 48년) 7월 27일, 아홉 간들이 입궐하여 뵙고 말씀을 올렸다. “대왕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청컨대 신(臣)들의 시집가지 않은 딸들 가운데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서 궁궐로 들여 배필로 삼으소서.”

 

왕이 말하기를,

“짐(朕)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에 의한 것이다. 짐의 짝이 되어 왕후가 될 사람도 역시 하늘에서 명하실 것이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고 하고는,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는 서울의 남쪽에 있는 섬이다. 승점은 임금의 가마가 닿을 만큼 가까운 언덕이다.]으로 가게 하였는데,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 모퉁이로부터 붉은 돛을 단 배가 꼭두서니빛 깃발(旗)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향해오고 있었다....이렇게 시작하는 허황후의 도래 이야기는  실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사실을 해석하는 방법과 내용이 여러 가지다.

(중략) 선사고고학 분야에서는 일대에 서식했던 육지달팽이를 통해 그시절을 추적하기도 하는데, 그때 한반도 주변은 상상을 초월한다. 신석기 시대는 온난화와 해수면의 상승이 가속화되면서 현재의 한반도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고 참나무 위주의 낙엽활엽수림이 퍼지면서 온난대성 중소형 동물이 번성하게 된 시기이다. 최종빙기에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120m 이상 하강하여 황해는 육지로 중국과 연결되었으며 대한해협을 통해 일본열도와도 연결되었다.

그래서 김해평야는 과거에는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낙동강 중유역의 대륙 분지와 같은 곳이었다가 고김해만이라고 하는 바다로 변했으며, 다시 현재와 같은 하천(낙동강)의 하류역으로 변화해 왔던 것이다.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위치한 현재의 김해평야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20,000년∼18.000년 전 쯤의 매우 추운 시기로, 김해평야에는 자갈층(충적층기저역층)이 퇴적되었다. 이후 기후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실트질 점토층, 모래 자갈층도 계속 퇴적되었다.

약 10,000년전 무렵이 되면 기후는 계속 따뜻해지고 해수면도 계속 상승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4,100년전 무렵에는 김해평야의 안쪽인 대동면 예안리 유적지 부근 일대까지도 바다였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즉 이 무렵의 바다 범위는 산지·구릉지와, 그에 접하는 선상지(성곡저평야), 평야내 독립 구릉을 제외한 거의 전지역이었으며, 적어도 양산까지가 바다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과, 김해 각지에는 수가리패총, 범방 죽곡패총, 북정패총, 농소리패총, 금곡동 율리패총 등 신석기시대의 해수산 패총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김해만의 안쪽에 위치하는 김해 예안리 유적지는 사주에 입지하며, 이 사주가 적어도 신석기시대 후·말기 이전에 형성·육화되었던 사실도 아울러 밝혀졌다. 금관가야가 성립·전개되는 시대 무렵에는 다시 김해 평야각지에 해수산 패총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들 패총에 근접해 만들어진 당시의 무덤에서도 조개를 부장하거나 조개를 무덤바닥 시설에 이용한다던지 어로 관련 도구가 출토되는 등 바다 관련 현상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삼한·삼국시대에도 신석기시대처럼 바다를 무대로 활발한 어로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배경에는 해수면의 재상승과 바다 범위의 확대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해수면고도, 바다의 범위 등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7세기 무렵이 되면 고김해만의 안쪽인 예안리유적지의 부근일대가 이전까지는 바다였다가 배후습지성 소택지로 전환해 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유적지 일대에서 바다는 물러가게 됨과 동시에 낙동강은 보다 많은 토사를 운반해 퇴적함으로서 마침내 고김해만은 쇠퇴·소멸해가게 되면서 운반 퇴적된 토사로 이루어진 삼각주가 육화해 현재의 김해평야의 골격이 완성되어 가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에 보이는 낙동강 하류 역화한 김해지역의 모습이 이 무렵의 상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김해지역이 평야 농업지대로서 본격화하는 것은 이보다 더욱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로서 일제는 쌀의 증산과 수탈을 목적으로 낙동강변에 제방을 쌓고 수로를 정비하고 저습지를 간척해 삼각주를 본격적인 평야농업 지대로 전환시킴으로서 촉발된 것이다.

일제시대 낙동강의 대치수사업으로 위로는 대동수문을 설치하여 강의 흐름을 구포, 사상 쪽으로 흐르도록 하고 아래로는 녹산수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의 조수를 막아 김해평야의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수리사업을 전개하였다. 낙동강 하류지역은 강 상류로부터 운반되어온 유사가 퇴적되어 김해 쪽은 충적토 지대로서 삼각주가 형성되어 김해평야 일대는 물론 구포, 사상지역에도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는 강변 저습지였다.

이러한 물난리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하여 낙동강제방을 쌓기 시작한 것은 1931년부터였다. 동․서 양안의 하상을 낮추고 하폭을 넓히기 위하여 축제용 토량을 강변의 하천부지에서 채토하여 임시 철로를 가설하여 바퀴가 달린 궤짝에 담아 운반하였다고 한다. 제방이 완공되기 전인 1933년 8월에 있었던 두 차례에 걸친 대홍수와 1934년 7월에도 대홍수가 몰아닥쳐 제대로 굳어지지 않은 제방이 터지면서 홍수는 삽시간 구포, 사상 쪽과 김해 삼각주 일대를 완전 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한 역사를 가진 김해평야도 부산시와 김해시의 경쟁적 개발로 1970년대만 해도 면적은 1만3천㏊에 달했지만 하지만 지금은 강서지역 5천450여㏊와 김해지역 1천500여㏊를 합쳐서 6천950㏊만 남아있다. 30여 년 사이에 절반가량이 사라져 버린 셈이다.

 

아름다운 인연 열린세계

최근 허황후의 이야기는 다문화가정과 남녀평등문제나 여성권익 신장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현실적으로 산업인력의 유입과 국제결혼을 통해 정착하는 외국인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 본다면 이미 2000년 전 아름다운 인연의 열린세계를 허황옥과 김수로가 예고 했음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부족연맹으로 치부되었던 가야사에 대한 시각교정도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가야의 역사는 2,000년 전 남쪽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1,400년 전 북쪽 내륙지역에서 마감되었다. 흔히 6가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삼국유사'를 저술한 고려시대 일연스님의 생각일 뿐이다. '삼국지'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의 문자 기록과 가야의 고고학 자료를 보면, 12개국 정도가 각각의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무려 600년 동안이나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독립국들이었다. 가야가 망하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통합되기 100년 전이었다. 100년 먼저 망한 것과 600년 동안 역사를 함께 했던 것 중 어느 쪽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 지는 분명하다.

보통 가야사는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 5만군의 가야 공략 사건을 전환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데, 전기가야에는 김해의 가락국, 후기가야에는 고령의 대가야, 아라국은 전·후기 모두에 큰 세력이었다. 전기에는 남해안의 동래 김해 창원 마산 함안 고성 사천 진주 등이 바다로 전해지던 선진 문물을 바탕으로 번성하였고, 후기에는 고령 합천 창녕 함안 의령 산청 거창 함양 등 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가야문화의 꽃이 피었다.

 

아무튼 이들에게 낙동강 하구의 생성과 역사문화의 원류를 들려주는 차원에서 망산도며 김해 코스를 마련했다. 

식후 을숙도 에코센터를 방문한다.

이용주 센터장이 직접 안내를 맡았다.

 

 

 

하루만에 주마간산 식으로 낙동강하구역의 역사문화와 생태적 이해를 돕기위한 코스였지만 기억에 남기를 희망한다.  

이들은 주말 이틀간의 휴식 후 산복도로로 들어 간다.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노래출처: 다음 블로그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Nicolas de Angelis [Quelques Notes Pour Anna]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