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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by 이성근 2021. 7. 10.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북하우스·/2021.07

 

슬라보예 지젝1949~ 우리 시대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이자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류블랴나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파리8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파리8대학교, 런던대학교 등에서 강의와 연구를 진행했다. 현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교 사회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목차

서문 팬데믹의 삶을 노래하자

 

1부 팬데믹 시대의 증상들

1장 왜 철학자에게 작물 수확에 관한 글을 쓰라고 하는가

2장 코로나바이러스, 지구온난화, 착취: 동일한 투쟁

3장 동상 파괴는 왜 급진적이지 않은가

4장 아버지…… 혹은 그보다 못한

5장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의 섹스

6장 돼지와 인간의 (시원찮은) 멋진 신세계

7장 접촉 금지의 미래는 필요없다

8장 천국에서의 죽음

 

2부 급진적 정치학의 미래

9장 그레타와 버니는 어디에 있나?

10장 맞아요, 붉은 알약…… 그런데 어떤 것?

11장 수행하기 어려운 단순한 것들

12장 전시 공산주의

13장 민주주의의 한계

14장 현재의 정세: 우리의 선택

 

(결론 아닌) 결론 알지 않으려는 의지

부록 권력, 허상, 그리고 외설에 관한 네 가지 성찰

옮긴이 해설 팬데믹을 다시 사유하자

 

출판사 서평

다가올 더 큰 역경 앞에서 우리 모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팬데믹 패닉이후 1, 정지되었던 시간의 의미를 되짚다

 

팬데믹은 모든 것을 바꾼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_본문 중에서

 

201912월에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2년차를 맞이했다.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고, 아직도 팬데믹은 쉽게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20206, 팬데믹 패닉으로 전례 없는 위기의 규모와 의미를 발 빠르게 진단했던 지젝이 초기의 혼란이 지나고 지난 1년간, 끊임없이 지연되고 있는 출구의 시간대를 기록했다. 전작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현실을 강조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드러나는 인종과 계급 차별을 부각하고, 그 위기의 징후를 지구온난화, 환경 파괴, 삶의 디지털화, 새로운 포퓰리즘의 등장과 정신건강의 문제로까지 확대하여 포착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점차적으로 번질 전 지구적 위기(‘퍼펙트 스톰’)를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바꾼 충격이라고는 하지만 동시에 실제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지젝의 통찰은 마치 영화의 플래시백처럼 우리로 하여금 지난 2년의 시간을 돌이켜보게 한다. 그리고 팬데믹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코로나바이러스 피로감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 이 세계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지나온, 그 잃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팬데믹을 더 철저하게 사유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평화롭게 살지도, 손쉽게 죽지도 못한 채 지루하게 이어지는 이상한 삶

출구 없는 시간의 우울증적 구조를 파헤치다

 

백신에 거는 희망과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이 뒤섞인 지금,

우리는 끝없이 늦춰지는 신경쇠약 속에 살아간다.”_본문 중에서

 

출구의 시간대가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다. 2020년 봄만 해도 정부는 2주가량의 봉쇄나 다른 방역 조치가 끝나면 상황은 나아질 거라 말했다. 그해 여름이 지나면서 2주는 두 달이 되고, 1년이 되었다. 2021년 현재, 백신이 개발되고 접종을 시작하며 낙관적인 분위기에 부풀었던 세계가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다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지젝은 팬데믹 초기의 충격을 지배한 감정은 두려움이었지만 뚜렷한 전망이 제시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두려움이 우울증으로 넘어갔다고 진단한다. 명확한 위협이 있을 때 생겨나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면, 우울증은 우리의 욕망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신호다. 그러나 버텨내려는 의지를 상실하게 하는 이러한 우울증적 반응은 팬데믹이 불러온 심리적 충격의 일부일 뿐이다.

전면 봉쇄와 거리두기가 시행되는 와중에 독일의 광장에서, 영국의 해변에서,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고, 정부의 방역 조치에 맞서는 시위가 있었다. 우파 포퓰리스트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과장되었다는 음모론을 설파하고, 일부 급진 좌파는 정부가 이번 위기를 기회로 자국민을 완전히 통제하려고 한다며 팬데믹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다. 지젝은 지난 1년 동안 유럽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를 지배한 삶은 지속된다는 구호, 일상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열망을 일종의 정신병적 징후, 집단적 광기로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징후의 결말은 지젝에게 세계의 또 다른 종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연을 가린다는 이유로 마스크 쓰기를 거부한 아감벤의 시(“사랑이 폐지되었다”)는 지젝에게 와서 정확히 이렇게 비틀어진다. “의료가 폐지되었다 / 자유라는 명분으로 / 이제 자유가 폐지될 것이다. / 생명이 폐지되었다 / 인류라는 명분으로 / 이제 인류가 폐지될 것이다.”

 

영구적인 감염병과 음모론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지젝이 건네는 붉은 알약

팬데믹의 진짜 현실은 무엇인가?

 

이는 우리 모두가 내려야만 하는 선택이다. 무지에의 의지라는 유혹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기꺼이 팬데믹을 사유할 것인가?.”_본문 중에서

 

지젝은 왜 철학자가 작물 수확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며 책의 포문을 연다. 비좁은 막사에서 잠을 자는 농장 노동자 수백 명이 한꺼번에 집단 감염되어 수확하지 못한 작물들이 여기저기서 썩고 있는 사태, “숨을 못 쉬겠다는 조지 플로이드의 마지막 말에 공명하듯 백인보다 더 높은 확률로 바이러스에 희생되는 흑인들, 재택근무가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며 새로운 착취의 형태로 등장하는 현상, 봉쇄 조치로 목숨을 걸고 있을 할 것인가, 일을 하지 않고 죽을 것인가의 선택에 놓인 필수 영역의 노동자들 등 바이러스의 창궐과 함께 표면화된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의료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동력과 분리할 수 없는 팬데믹의 본질을 드러낸다. 팬데믹은 작물 수확처럼 철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제조차 인간의 실존과 직결된 속속들이 정치적인문제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지젝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팬데믹에 맞서 포스트코로나를 상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디지털의 힘을 빌려 비접촉 사회혹은 비대면 사회로 나아가자는 정치권의 새로운 뉴딜 정책은 그 답이 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출구를 모색하는 것은 마치 거리두기가 팬데믹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과거에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간 존재들을 집단적인 네트워크로 연결된 두뇌에 접속시켜 언어를 거치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프로젝트의 허구성 역시 드러난다. 지젝은 우리의 삶뿐 아니라 정신까지 디지털화하려는 팬데믹 시대의 열망은 자본주의 이후를 사고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함을 드러낼 뿐이라 말한다.

 

바이러스만 통제할 수 있다면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인간이 육체를 벗어나 정신화된 혹은 디지털화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포스트휴먼의 미래도 결국 우리의 전망이 될 수 없다. 지젝이 제시하는 포스트코로나 정치학은 오늘의 위기가 수십 년 전부터 지속해온 문제의 발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의 핵심 전망이기도 한 전시 공산주의는 따라서 바이러스에 맞선 인류의 전쟁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착취 체제에 맞선 인류 공통의 싸움이다. 우리가 되찾으려는 일상이 차별과 착취가 온존하는 끔찍한 현실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먼저 모든 것이 달라진 듯 보이지만 결코 달라지지 않는 차별의 시스템에 문제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에 우리는 세계를 너무 빠르게 바꾸려 했다

이제 그 변화를 새롭게 따져볼 시간이다

뉴노멀비대면 사회를 넘어서는 포스트코로나에 대한 급진적 제언!

 

낡은 세계는 끝이 났지만비접촉의 미래가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아니며,세계의 또 다른 종말은 가능하다.”_본문 중에서

 

알지 않으려는 의지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결론 아닌) 결론에서 지젝은 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이때, 바이러스의 작동방식을 충분히 알고자 하는 의지보다 오히려 그에 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않는 의지가 확산되는 역설에 주목한다. 지식이 우리의 일상적 삶에 제한을 가하려 할 경우, 사람들이 무지無知에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팬데믹을 알고자 한다는 것은 그 위기의 복잡한 총체성에 눈을 뜬다는 의미다. , 팬데믹에 맞서는 싸움이 포퓰리즘과 음모론에 맞서고, 인종차별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환경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작업과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따라서 낡은 일상으로의 복귀가 포스트코로나에 대한 상상을 지배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안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될 것이다.

 

집단 면역이라는 희망이 좌절되고, 백신 접종률이 높은 나라에서조차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확진자가 다시 늘고 있다. 팬데믹 이후에는 지구온난화와 같은 재난이 우리에게 훨씬 더 근본적인 조치들을 요구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어쩌면 지젝의 예언처럼 진짜 위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고, 우리는 더 큰 재앙에 앞서서 일종의 총연습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과 동일한 시스템이 매끄럽게 기능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 가치 있는 일인지를 묻는 지젝의 제언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다. 세계가 코로나 피로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지젝의 통찰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가 써내려간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우리에게 위기의 징후를 포착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새로운 형태의 삶을 상상하게 하는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선사해줄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2년의 시간을 진지하게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코로나 시대에 대한 가장 철저한 반성문처럼 읽히는 이 책에 담긴 지젝의 주장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낡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대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건설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로 나서야만 한다. 이 건설 작업은 의학적이거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속속들이 정치적 문제다. 우리는 사회적 삶 전체를 새로운 형태로 발명해야만 한다.”_본문 중에서

 

책속으로

우리가 거의 매일 피부로 느끼고 있듯, 진짜 문제는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 삶이 그저 지루하게 이어지며 항구적인 우울증을 유발하고 버텨내려는 의지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p.13

 

철학자가 작물을 수확하는 일을 거론하는 것이 지금 전적으로 타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제안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철학자가 되어야만 한다.”--- p.25

 

도덕적으로 죄의식을 즐길 게 아니라,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진짜 피해자를 욕되게 만들 게 아니라,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죄의식과 피해자 의식은 우리를 움직이지 못한다. 오로지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그리고 각자를 책임 있는 성인으로 대하면서 함께 행동할 때 우리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이길 수 있다.”--- p.50

 

팬데믹의 진짜 문제는 사회적 고립이 아니라 타인과의 사회적 연결망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 팬데믹이 진행되는 기간보다 우리가 더 타인에게 의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p.68

 

공적 영역에서 그레타와 버니가 사라진 일은 더 통합된 목소리가 필요한 이 바이러스 위기의 시국에 걸맞지 않게 그들이 너무 급진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은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감염병의 조건에서 재활성화할 수 있는 포괄적인 새로운 전망을 제안하는데 그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pp.102-103

 

이 글에서 내 목표는 팬데믹이라는 실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쉽게 비판을 퍼부으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이러한 부인을 하게 되었는지 따져보는 것이다.”--- p.110

 

우리는 팬데믹이 모든 것을 바꾼 충격이었고, 이제 어떤 것도 전과 같지 않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맞다. 그렇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실제로 바뀌지 않았다. 팬데믹은 단지 이미 존재했던 것을 좀 더 선명하게 부각시켰을 뿐이다.”---pp.110-111

 

우리는 느닷없이 우리가 매일 이용하던 건물과 사물이 닫힌 채 원래의 기능을 잃고, 그 자리에 그저 정지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 삶에서 우리에게 부과된 일종의 정지 상태epoche’는 아니었을까?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생각을 해야만 한다. 전과 동일한 시스템이 매끄럽게 기능하는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정말 가치 있을까?”--- pp.127-128

 

아감벤의 판본은 이렇다. 한 사람이 일단 그 당시에는 그에게 별 의미가 없는 듯했던 인간의 얼굴이라는 레비나스의 개념을 찬양하는 데 몰두하게 되면, 곧 이어 그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위협을 부정하는 일로 나아간다. 우리는 맨 얼굴이 아니라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 더 많은 인간성이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p.136

 

요컨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는 십 년이 훨씬 넘게 지속된 것이고,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그 위기를 어느 한도 이상으로 폭발시켰을 뿐이다. 그래서 해결책은 분명 모든 소수 의견을 좀 더 포괄하는, 모종의 더 진정한민주주의에 있지 않다.”--- p.151

 

현실과 꿈의 대립 관계에서 환상은 현실 쪽에 있고, 우리가 트라우마적인 실재와 마주치는 것은 꿈에서다. 따라서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 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꿈(에서 공표되는 실재)을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p.191

 

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현재와 같은 시절에 우리의 지배적 태도는 알고자 하는 의지일 거라 여겨진다.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그 작동방식을 충분히 이해하려는 의지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점차로 목격하게 되는 것은, 지식이 우리의 일상적 삶의 방식에 제한을 가하려 할 경우, 오히려 바이러스에 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않는 의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p.196

 

오늘날의 외설적인 정치적 인물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흠 잡히지 않아야 하는 스탈린적 지도자상과 정반대다. 스탈린적 지도자는 사소한 추행이나 불완전함만으로도 자신의 지위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우리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위엄을 포기하는 일을 밀어붙인다.”--- p.210

 

자연이 살아남을지, 지구상에 자연의 생명체가 살아남을지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자연은 살아남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화할 뿐.” --- p.257

 

코로나 진짜 위기는 오지 않았다

 

그는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 분야에서의 독창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대중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방위적 사유를 전개하는 독보적인 철학자다. 스스로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등으로 부르며, ‘저항혁명’, ‘공산주의논의에 끊임없이 불을 지피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새로운 계급투쟁,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까다로운 주체, 폭력이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천하대혼돈등 다수의 저작을 펴냈다. 실천하는 이론가로서 그의 면모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어, 전작 팬데믹 패닉가디언으로부터 지젝은 이 책으로 역사적 위업을 달성했다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에서 지젝은 초기의 혼란 이후 봉쇄와 해제가 반복되며 팬데믹에 대한 피로감이 깊어지던 지난 1년을 더 첨예한 시선으로 돌아본다. 한국어판에는 서문을 포함하여 특별히 네 편의 원고를 단독 수록했다.

 

코로나 팬데믹 복판에서 내놓은 책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에서 보듯, 지제크의 질문은 이런 식이다. 격리와 봉쇄 정책이 생존으로 축소시키므로 반대한다는 말은 옳은가, 이러한 자유는 노동자에게 이익인가, ‘마스크를 반대하며 시위하는 대개의 포퓰리즘적 뉴라이트는 어떻게 일부 급진 좌파와 조응하는가, 뭐든간 팬데믹은 착취된 자연의 보복 아닌가, 도대체 이 판국에, 그레타 툰베리와 버니 샌더스는 어디로 사라져버렸나?

 

위중의 시대 바깥에 한국이 있지 않고, 다분히 특정 인물을 넘어 기후재앙의 시대와 금융자본주의 사회에 맞선 포괄적 전망의 부재를 경고하는 것처럼 그의 어떤 질문도 한국의 밖에 있지 않다.

 

질문을 사유하는 데 있어 세 가지 전제가 보인다. 첫째, 마치 팬데믹이 뱉어낸 것들 같으나 기실 다 오래된 질문이다. 팬데믹은 이미 내재해온 긴장들을 폭발시킨 뇌관(트럼프처럼)일 뿐이다. 둘째, 팬데믹은 향후 지향할 사회에 대한 각 전망들이 지구적으로 충돌하게 하거니와, 막상 재앙에 맞선 연대보다 대결이 가열되는 사태(미국과 중국처럼)를 목도하게 한다. 셋째, (그래서) 진짜 위기는 봉쇄·격리가 아니라 우리가 다시 움직일 때(미국과 중국에 낀 한국처럼) 온다.

 

책엔 지난 2월치 <한겨레> 칼럼 꼭지뿐만 아니라 다른 꼭지에서의 유사한 논거들도 담겨 있다. 일찍이 마스크를 반대하는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시를 지제크(과거 둘은 같은 책을 쓰기도 했다)는 비튼다. “의료의 이름으로 자유를 폐지한다면, 결국 의료도 폐지될 것이다. 삶의 이름으로 인간적인 것을 폐지한다면, 결국 삶도 폐지될 것이다.”(아감벤) - “자유의 이름으로 의료를 폐지한다면, 결국 자유도 폐지될 것이다. 인간적인 것의 이름으로 삶을 폐지한다면, 결국 인간적인 것도 폐지될 것이다.”(지제크) 책에서의 번역은 좀 다르니 비교해볼 만하다. 또한 사유의 경로가 될 것이다./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여기, 피할 수 없는 질문...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가?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를 읽고

한때 매혹적이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광채가 사라지는 사상가가 있는가 하면, 유행을 타는 듯 보였으나 세파에 시달리고 고난을 겪을수록 다시 펴보게 되는 이도 있다. 내게 슬라보예 지젝은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더욱 그러하다.

 

석학이라 여겼던 조르조 아감벤 같은 이가 온갖 고상한 논리를 동원해 마스크 쓰기 싫다는 투정이나 늘어놓을 때에 지젝은 함께 자가 격리를 견디고 있는 동료 인간들에게 사유의 실마리를 풀어놓느라 안간힘을 썼다. 팬데믹이 시작되자마자 몇 달만에 나온 저작 <팬데믹 패닉: 코로나19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2020)<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이택광과 공저, 비전C&F, 2020)은 초유의 사태 속에서 생각의 길을 잡아나가는 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되는 개입이었다. 적어도 그 국면에서는 지젝이야말로 인류에게 철학의 존재 이유를 확인시켜준 거의 유일한 철학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개입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장기화하는 만큼 지젝의 개입도 끝날 줄 모른다. 며칠 전에 그의 신작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2021)가 나왔다. 영어로는 작년 말에 출간된 책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백신 접종이 진행 중인 지금 읽어도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슬프게도 팬데믹 국면이 크게 바뀌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사태의 핵심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해선 안 될 물음 -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가?

지젝의 다른 저작들이 그렇듯이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도 주제를 압축하기에는 관심의 방향도 종잡을 수 없이 다채롭고, 다루는 소재도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 위기를 연결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인간의 두뇌를 디지털 네트워크에 직접 접속하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망상을 해부하는가 하면 미국과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 벨라루스의 민주화 시위, "흑인의 삶은 소중하다" 운동 같은 이질적인 정치적 흐름들을 넘나들며 분석의 칼날을 들이댄다. 직접 읽어보지 않고는 특색과 성취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힘든 책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내가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 책의 중요한 메시지는 "과연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가?"라는 물음이다. 어쩌면 현 시국에 이런 물음은 동료 시민들에게 짜증만 유발할지도 모르겠다. 팬데믹이 만 2년을 향해 가는데도 도무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 나아지겠거니 했지만, 곳곳에서 변종 바이러스가 출몰한다. 늦어도 올 연말이면 끝나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만, 4차 유행 시작과 함께 이는 '지나친' 낙관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펜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가"라 묻는다면, 너무 잔인하거나 물정 모른다고 타박이나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눈치라고는 보는 법이 없는 이 철학자는 주저하지 않고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궁극적 선택은 이렇다.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팬데믹이 우리가 새로운 '포스트휴먼'의 시대(인간됨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지배적 인식과 관련한 '포스트휴먼')에 들어서고 있다는 신호 중 하나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이는 우리의 심리적 삶과 관련된 선택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론적' 선택이며,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과 맺는 모든 관계에 결부된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163)

 

그리고 그가 권하는 답 역시 냉정하기 이를 데 없다. 위로보다는 도전을 강권하는 주치의의 목소리다.

 

"탈인간(포스트휴머니티)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낡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대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건설하는, 힘들고 고통스런 길로 나서야만 한다. 이 건설 작업은 의학적이거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속속들이 정치적 문제다. 우리는 사회적 삶 전체를 새로운 형태로 발명해야만 한다." (위의 책, 166-167. 강조는 원저자의 것)

 

왜 낡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가?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전체가 이에 대한 강력하고 입체적인 논변들인데, 내가 보기에 그 중에서도 핵심은 펜데믹 국면의 위기 상황이 결코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생긴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은 이전에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위기가 팬데믹 국면에 우리 턱 앞에서 폭발했을 뿐이다. 어떤 위기들인가? 내 나름대로 몇 가지 줄기를 잡아 정리해보면, 이렇다.

 

첫째, 팬데믹과 함께 흔히 '비대면'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미래 자본 축적의 복된 가능성을 보고 '디지털 뉴딜'의 깃발까지 흔들어대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혼돈과 디스토피아의 검은 그림자에 경악한다. 재택근무가 일상화할수록 집 안까지 회사의 명령 체계에 점령당하고, 비대면 수업이 장기화할수록 계급-계층에 따른 학습 능력 격차가 더욱 커진다. 팬데믹 전에는 회사와 학교에 가기가 그토록 싫었지만, 이제는 많은 이들이 하루빨리 이 사태가 끝나 다시 가정과 회사, 학교가 분리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바이러스 비상 사태 때문에 갑자기 닥친 일이 아니다. 이미 준비되고 무르익어가던 경향이 '혁명적 위기'(?!)를 맞아 작렬하는 것뿐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론의 실체인 디지털 네트워크화는 공장과 사무실 담벼락을 넘어선 자본-노동 관계의 시공간 확장을 내포하고 있었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모든 교육 체계의 격동을 예고했다. 이 필연적 경향이 드디어 때를 만났을 따름이다. 이제는 누군가처럼 '디지털 뉴딜'의 깃발에 편승하든가,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대변혁을 타진하든가,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았다. 좋았던 옛날(정말 좋았었는지는 의문이지만)로 돌아갈 길은 막혀 버렸다.

 

둘째, 바이러스 대유행과 함께 흉하게 드러난 또 다른 심각한 질병이 있다. 경제-사회적 불평등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소리 소문 없이 일자리를 잃고 영세 자영업자는 코로나 2년째를 견디지 못해 멸종해 가는데, 어느 나라든 디지털 산업과 연관된 초거대 자본은 팬데믹 시기에 오히려 전대미문의 엄청난 이윤을 벌어들이고 있다.

 

시야를 일국을 넘어 지구 전체로 확장하면, 더욱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조스가 조만장자라는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진화하는 그 순간, 최빈국들은 외채 이자를 상환하느라 코로나19 대응을 포기해야 할 처지다. 마스크를 참지 못하는 자본주의 중심부의 일부 시민들이 '저항'이라는 말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동안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콜롬비아 같은 나라들에서는 진짜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이들이 목숨을 건 봉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런 경제-사회적 불평등 역시 펜데믹의 산물이 아니라 그 전부터 지구상을 지배하던 단단한 구조다. 그러나 팬데믹이 이 구조를 둘러싸고 전혀 새로운 상황을 연 것만은 분명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불평등이 더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최후통첩을 인류에게 전했다. 더 이상 있어도 없는 듯 치부하거나 미래의 숙제로 미루고 미룰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세 자영업자나 택배 노동자, 돌봄 노동자의 처지를 그대로 두고서는 봉쇄 혹은 준봉쇄를 반복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이제는 정치인과 언론의 식상한 탄식만이 아니라 '긴급한' 조치들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평소에는 수탈 대상이 되거나 방치될 뿐이던 남반구 국가들에 대해서도 더는 그런 대우를 지속할 수 없다. 그렇게 버려졌다가는 이들 지역에서 언제 또 델타와 람다의 뒤를 잇는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존 지구 질서는 백신 유통을 비롯해 외채 상환에 이르는 모든 방면에서 전복돼야 한다.

 

셋째, 코로나19 대유행은 기후 위기 가속화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둘은 인류의 의식-무의식 속에서 서로 뗄 수 없이 얽히기에 이르렀다. 신종 바이러스 확산과 기후 위기의 연관성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의 지적이 있다(가령, 안드레아스 말름,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우석영 외 옮김, 마농지, 근간예정] 참고). 하지만 코로나 원년인 2020년부터 유독 기후 위기가 세계 곳곳에서 충격적인 재난으로 가시화되고 있기에 둘 사이의 모종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굳이 '과학적' 설명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한데 더 중요한 지점이 있다. 펜데믹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후 위기를 바라보는 많은 시민의 시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종 바이러스 확산이라는 자연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각국은 전에 없던 사회적 선택을 단행했다. 공장 가동을 중단시키고, 의료 체계 전체를 마치 공공부문인 듯 움직이고, 일회적인 보편적 기본소득 비슷한 정책을 펼쳤다. 지젝이 "전시공산주의"(133-139)란 생경한 이름을 붙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낯선 결단이었다.

 

이 경험을 겪고 난 뒤에 우리의 인식은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전시공산주의"라고나 할 그 조치들은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귀에 군살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말들과 달리 전혀 '실행 불가능'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럼 바이러스 대유행에 맞서 이를 실행할 수 있다면, 기후 위기라는 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재앙 앞에서는 왜 비슷한 선택을 할 수 없는가? 아니, 왜 이제까지 우리는 그런 선택을 꿈도 꾸지 못했던가? 팬데믹 이후에 분명해진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었음에도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전부는 아니고 다수도 아니겠지만 어쨌든 상당수 시민들이 이 사실을 간파하기 시작했고, 일단 풀려난 이 과정을 돌이키기란 불가능하다. 여러모로 우리는 펜데믹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꿈꾸는 것이야말로 대파국으로 가는 편도 차선에 몸을 싣는 일이다.

 

유토피아적 대안만이 현실적인 시대

이런 지젝의 시대 인식은 지금 한국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가령 내년 봄까지 계속될 대통령선거 국면을 생각해보자. 벌써부터 여러 후보가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각 후보가 야심찬 공약을 내세울수록 이에 대한 비판도 활발히 제기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유토피아적'이라는 낯익은 비판도 있다.

 

코로나19-이후 시대에 '유토피아적'이라는 이 비판 논거는 과연 동료 시민들의 선택에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를 읽고 난 뒤라면, 이 물음에 그리 긍정적인 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없는 곳)라는 딱지가 '비현실적'이라는 의미를 지니려면, 우선 '토피아'(있는 곳)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있는 곳''없는 곳' 사이의 너무 먼 거리, 그것이 이른바 '유토피아적' 대안들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지금 돌이킬 수 없이 붕괴하고 있는 것은 바로 '토피아'. 팬데믹 이전의 일상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벨 에포크'(좋았던 시절)처럼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향수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문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보다도 오히려 '향수' 쪽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토피아'에 닻을 내린 지향과 노력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이다. 역설적으로 '유토피아적' 대안만이 현실적일 수 있다. 이런 대안만이 지젝의 다음과 같은 요청으로 향하는 출구일 수 있다.

 

"이는 우리 모두가 내려야만 하는 선택이다. 무지에의 의지라는 유혹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기꺼이 팬데믹을 사유할 것인가? 팬데믹을 생화학적 건강 문제만이 아니라 자연에서 우리 인간이 점유하는 위치와 우리의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포괄하는 복잡한 총체성에 뿌리를 둔 어떤 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 이 선택으로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일상성을 만들어내는 결정을 해낼 것인가?" (위의 책, 202-203. 강조는 원저자의 것)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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