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유물에 있다 저자 강인욱|샘터(샘터사) |2017.12.
고고학자, 시공을 넘어 인연을 발굴하는 사람들
저자 강인욱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석사학위를 받은 후,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부경대 사학과를 거쳐서 현재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공은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 북방 지역 고고학으로 매년 러시아, 몽골, 중국 등을 다니며 새로운 자료를 조사하고 있다. 도쿄대, 베이징대, 스탠퍼드대, 노보시비르스크대 등에서 방문학자로 강의 및 연구를 했다.
주요 저서로 《시베리아의 선사고고학》, 《고고학으로 본 옥저문화》, 《춤추는 발해인》, 《유라시아 역사기행》 등이 있으며 역서로 《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외 다수가 있다. 연구 논문과 전문서 집필 외에도 대중 강연과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즐거움과 의미를 두고 있다.
목차
여는 글 _ 유물을 만들고 썼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제1부 -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1장. 사랑과 슬픔
초원의 빛은 어디서 왔을까 | 불씨를 나누는 마음 | 도굴꾼인가 사위인가 | 초원의 왕도 벌벌 떨게 만든 것 | 알타이 얼음공주의 인생 | 영생을 얻는 법 | 고고학자가 말하는 나이 듦의 가치
2장. 욕망과 희망
흙수저와 동수저 | 신의 뜻을 받는 뼈 | 초원의 스키 부대 | 고고학이 증명한 ‘와신상담’ | 황금마스크의 주인은 | 나치에게 이용당한 티베트 불상 | 그 사람 배짱 한번 두둑하네 | 고고학보다 오래된 유물 위조의 역사 | 한민족의 기원은?
3장. 생활의 발견
알타이에는 카펫 옮기는 날이 있다? | 초원 시장의 꼬치구이와 만두 | 최초로 칫솔을 사용한 건 누구일까? | 이누이트의 특별한 속옷 | 발해로 건너간 초원의 악기 | 러시아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발해 | 돼지비계로 대동단결 | 과하마와 프르제발스키말 | 고려장의 진실
제2부 - 고고학자의 노트
1장. 고고학이란
고고학은 인연이다
고고학은 유유상종이다
고고학은 파괴한다
고고학은 사랑이다
AI 시대, 고고학의 미래는?
2장. 고고학자 열전
무협지 영웅이 되어 버린 알타이·몽골의 최초 기록자 : 구처기
유라시아를 집대성한 백과사전 편찬자 : 니콜라스 위트센
비파형동검을 연구하고 홀연히 사라진 고고학자 : 진펑이
고구려 전공한 러시아의 숨은 장미 : 로자 자릴가시노바
고조선에 미친 이국의 학자 : 유리 미하일로비치 부찐
조지 워싱턴이 트라울을 손에 든 까닭은?
닫는 글 _ 진실은 유물에 있다
책속으로
수십 개의 인골을 발굴하고 수백 개의 인골을 본 나도 서로 부둥켜안은 자세로 묻혀 있는 어머니와 아들 앞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세상에서까지 자식을 보듬어 안은 어머니와 그 품의 자식, 그리고 그들의 손을 꼭 쥐게 해서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가족의 슬픔과 고통이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전해졌기 때문이다. (…)
진시황의 무덤처럼 권력을 동원해서 거대한 고분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무덤은 먼저 떠나간 사람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무덤 속 보물도 사실은 먼저 떠난 사람이 저승에서도 편히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은 사람들이 넣어 준 선물이었다.--- p.17~18
불꽃처럼 살다가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의 유해는 독실한 조로아스터교인인 가족들에 의해 조로아스터교 의식에 따라 안장되었다. 동서양을 이었던 실크로드의 후예답게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은 동서양 구분 없이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으니, 실크로드가 낳은 최고의 록 스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p.24
유명한 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는 나이 마흔에 열네 살 연하였던 고고학자 맥스 맬로원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범상치 않은 그들의 결혼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부부는 ‘고고학자는 오래될수록 흥미를 더 느끼니 여자에겐 최고의 남편감’이라는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실제로 크리스티가 85세로 죽을 때까지 이 부부는 금실 좋게 살았다. 게다가 서로의 일에도 큰 도움을 주었으니, 『메소포타미아 살인사건』을 비롯한 그녀의 여러 추리소설에 고고학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p.42
한국에서 숟가락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서울 암사동 신석기 시대 유적지의 8호 주거지에서 흙을 빚어서 구운 흙수저가 출토되었다. (…)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이렇게 이른 시기의 흙수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가히 한국을 숟가락의 종주국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
고려·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우리의 숟가락 사랑은 여전해서 무덤에 꼭 들어가는 물건 중 하나였다. 저승으로 먼 길 가는 고인에게 마지막 밥 한 그릇 드리고 싶은 사랑이 담겨 있는 유물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숟가락은 서로를 아껴 주는 마음을 상징했다. 타지에 간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들은 밥숟가락이나 제대로 뜨냐며 걱정을 하곤 했으니, 숟가락은 가족의 사랑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상징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떠먹여 주던 숟가락이 이제는 바뀔 수 없는 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얼마나 우리 사회가 힘들어졌는지 실감하게 된다.--- p. 49~50
황금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영생 불변을 의미하여 예부터 죽은 자의 명복을 기원하는 데 쓰여 왔다. 하지만 영생 불변한 것은 황금뿐,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황금 마스크를 썼던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찬란한 황금 유물들을 보면 볼수록 역설적으로 우리 인생이 참 덧없이 느껴진다.--- p.67
카펫은 유목민이 죽은 다음에는 죽은 사람의 집인 무덤에도 똑같이 장식됐다. 파지릭 문화에서는 살아생전 유르트(천막)를 장식했던 카펫이 그 주인이 죽으면 무덤 바닥과 벽에도 똑같이 깔렸다. (…)
외형적인 주거 생활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유목민의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있으니, 이사할 때 카펫은 아주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날을 정해 놓고 옮기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따지듯이 1년에 한두 번밖에 없는 날에 카펫을 옮긴다고 한다.--- p.89~90
흉노에서 시작된 꼬치구이는 한나라 때 중국 북방에서만 유행했지만, 이것이 전 중국으로 확대된 때는 고구려가 발흥하던 시기로, 고구려의 꼬치구이가 중국 전역에서 크게 히트를 쳤다. 심지어 서진에서는 고구려의 꼬치구이로 나라가 망한다는 상소문마저 등장할 정도였다(실제로 그 상소문이 나오고 10년 뒤에 서진은 망했다). 고구려의 꼬치구이인 맥적은 고기에 된장 양념을 해서 특유의 노린내를 없애 정착 농경민의 입에도 맞는 음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니, 진정한 고대 음식의 ‘한류’를 일구어 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p.94~95
칼 라이더가 가지고 온 에스키모의 티팬티 2점이 코펜하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끈에는 술이 달려 있다. 즉 그냥 속옷이 아니라 이 팬티만 걸치고 집 안에서 활동했다는 뜻이다. 장식이 달려 있어 일종의 의식용이었던 것 같다. (…)
사실 티팬티는 한국에서만 통하는 명칭으로, 영어로는 G-string 또는 C-string이라고 하고, 그냥 간단하게 string(끈팬티)이라고도 한다. 요즘이야 속옷에 많이 관대해진 사회 분위기 덕에 길거리 속옷 가게와 쇼윈도에서도 볼 수 있지만, 과거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자료로 본다면 이런 선정적인 티팬티의 기원이 19세기 말 그린란드가 되는 셈이다. --- p.99~100 이누이트의 특별한 속옷
찬란한 황금에 혹하지 않고 사소한 토기의 조그마한 변화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고고학은 소박하지만 인간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실제 고고학을 전공하게 되면 수많은 유물들을 일일이 씻고 기록한 후에 비슷한 것들끼리 모으는 등 엄청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한 작업들이 이어진다. 고고학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찾아오면 나는 가장 먼저 발굴 현장과 유물을 정리하는 연구실로 보낸다.
고고학은 신나는 모험이 아니라 퍼즐을 이어붙이는 끈기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소한 단서를 찾는 형사들처럼 고고학자들은 흙구덩이를 비롯한 수많은 발굴 현장에서 토기편들을 찾아내고 있다.--- p.138~139 고고학은 인연이다
고고학이 지닌 경제 규모는 매우 크다. 우리나라의 경우 매년 건설에 따른 구제발굴의 총액이 수천억대에 이른다. 앞으로 남북통일이 이뤄져 북한에 엄청난 건설 사업이 필요하게 된다면 수십 년간 수조원대의 발굴 사업이 매년 진행될 수도 있다. 한참 경제개발 중인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의 신흥경제대국들에서도 문화재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굳이 한국이 아니라도 세계고고학에서 AI가 도입될 날은 머지않았다.--- p.153
알타이와 몽골의 초원 고고학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엉뚱하게도 김용의 무협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의 캐릭터로 유명한, 장춘진인(長春眞人)이라고도 불렸던 도사 구처기였다. 그는 산둥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도교의 도사로서 1219~1222년 사이에 칭기즈칸을 만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거쳐 아프가니스탄 근처까지 여행하고 그 기록을 남겼고, 그중에는 몽골과 알타이의 역사와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기록도 있다. --- p.158
유라시아 역사 기행 저자 강인욱|민음사 |2015.07.
목차
프롤로그: 왜 우리에게 초원의 역사가 필요할까?
유라시아로 향하는 출발점, 한반도
왜 우리는 초원 지역과 쉽게 소통할 수 없었을까
초원로드와 제5의 문명
초원은 잃어버린 낙원일까? * 실크로드에 가려진 초원로드 * 잊힌 세계사의 반쪽, 초원을 다시 보자
1부 시베리아의 전차, 4대 문명을 깨우다
말이 사람의 역사에 들어오다
말, 구석기인들을 먹여 살리다* 먹거리에서 운송 수단으로 * 재갈, 말을 다스리다 * 말, 그 치명적인 유혹
전차, 고대 문명을 뒤흔들다
전차의 기원은 시베리아 초원 * 시베리아 전차 부대와 히틀러 *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숙명의 한판, 카데시 전투 * 전차를 받아들인 히타이트, 메소포타미아를 평정하다 * 최초의 전차전, 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다
전차, 무기에서 교류의 도구로
석가모니는 초원의 후예? * 시베리아 전차인들이 만들어 낸 인더스문명 * 중국판 새마을운동, 잠자는 여전사를 깨우다 * 고구려 소서노와 상나라 부호 * 상나라의 전차, 고조선으로 파급되다 * 시들지 않는 풀이 어디 있을까 * 전차, 무기에서 소통의 도구로
치명적인 말의 유혹에 빠진 초원의 전사들
고대 문명 속 내시 * 기마인과 불임 * 고고학이 전하는 초원 민족의 내시 그리고 에나리스* 집단 보존의 법칙, 초원의 전사들은 어떻게 인구를 유지했나?
알타이 산의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
인류가 가장 사랑한 금속, 금 * 파지릭,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의 나라 * ‘표트르대제 컬렉션’의 탄생 * 황금, 신라를 매혹시키다 * 탐욕의 상징이 된 황금
영구동결대와 초원의 미라
불로장생을 꿈꾼 사람들 * 알타이 고원, 초원에 미라를 선물하다 * 알타이 얼음 공주가 낳은 기묘한 인연 * 전 세계를 감동시킨 한국의 미라
초원의 늑대 인간
유라시아의 동물 숭배 * 늑대, 돌궐과 로마의 조상이 되다 * 초원 전사들의 사랑을 받은 동물 장식 * 성경, 바빌론의 왕을 늑대로 만들다 * 늑대를 야만의 상징으로 바꾼 서양의 소빙기 * 늑대처럼 강인했던 초원의 전사들
초원의 머리 사냥꾼과 고인돌 전사
영생불사의 머리 사냥꾼, 쿠르간 * 적의 머리를 탐한 사람들 * 『사기』에 기록된 머리 사냥의 흔적 * 한반도에도 머리 사냥 풍습이 있었을까? * 고대인들은 정말 잔인했나?
초원 전사들, 사슴돌로 우뚝 서다
서양에 유니콘이 있다면 초원에는 하늘 사슴이 있다 * 사슴 문신을 한 초원의 거석 * 목이 길어 성스러운 짐승 * 한국 문화 속 사슴의 흔적
외계인의 모습을 한 초원의 샤먼
알타이의 돌무덤 * 외계인인가 샤먼인가 * 왕관을 쓴 괴물, 시베리아 남부의 오쿠네보 문화* 사람들은 왜 초자연적인 존재에 집착할까?
2부 오랑캐를 경멸하는 자, 중원을 얻을 수 없다
오랑캐 사이에서 탄생한 주나라의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와 주나라 * 주나라의 도읍, 기산의 위치를 찾아라 * 고공단보를 괴롭힌 융적은 누구? * 세종은 왜 고공단보를 높이 평가했을까? * 다문화의 저력을 주목하라
오랑캐의 옷을 입은 조나라 왕
흉노와 중원의 틈바구니에서 * 기득권을 누르고 군사 개혁을 이루다 * 고고학이 증명하는 오랑캐 옷의 실체 * 원수는 미워해도 그 장점은 사랑하라
만리장성, 초원과 중국을 가르다
유원지가 된 만리장성의 유목민 거주지 * 농경문화의 산물, 만리장성 * 만리장성의 역설* 소통의 상징이 된 만리장성
제너두와 초원의 파라다이스
『동방견문록』이 꿈꾸는 낙원 * 실체를 드러낸 초원의 낙원 * 세계 제국의 수도 상도 * 환각 속의 지상낙원
치우와 황제의 싸움, 그리고 청동 투구
치우 이야기는 언제 등장했나? * 탁록 전투는 진짜일까? * 구리로 된 머리와 쇠 이마
진시황의 통일에 숨겨진 초원의 힘
변방 오랑캐와 함께 성장한 진나라 * 불운으로 끝난 발굴 * 간쑤에서 발견된 오랑캐의 황금 무덤 * 변방·혼합·교류에서 솟는 새 에너지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아서
내 무덤의 위치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 칭기즈칸의 무덤은 어떤 모습일까? * 화려한 지하 궁전 대신 제국의 지속을 택한 칭기즈칸
아시아의 진주 투바공화국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지로 주목받는 투바 * 투바공화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동상이몽 * 초원의 창조력에 반한 천재들
3부 초원의 천마, 신라에 내려앉다
천마도에 새겨진 초원의 신마
천마도, 기린인가 말인가 * 뿔 달린 말, 초원을 거쳐 고조선으로 * 천마도의 또 다른 비밀 *
천마, 고인을 하늘로 인도하다
아프가니스탄의 금관, 그리고 신라
황금의 언덕, 틸리아 테페 * 전쟁의 포화 속에 사라진 유물들 * 금관의 주인공들은 초원에서 왔다 * 시공을 초월한 신라와 아프가니스탄의 금관
신라 무덤과 알타이 파지릭 문화
적석목곽분, 그리고 알타이 * 새롭게 밝혀지는 증거들 * 북방의 풍습을 좋아하던 신라인들 *
쿠쉬나메, 신라와 페르시아를 잇는 새로운 자료
초원의 보검과 한반도의 세형 동검
스키타이의 군신 아레스 * 흉노의 보검(寶劍) 경로도 * 한반도 고인돌 문화인들의 칼 숭배 흔적 * 일본열도로 간 초원의 동검 장인
황금이 이어 준 초원과 신라
흉노의 황금 유물, 한반도에서 빛나다 * 그들은 왜 황금을 선택했을까? * 동아시아에서 금을 늦게 쓰기 시작한 이유는? * 동아시아의 유별난 옥 사랑 *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 그리고 금
신라 황금 보검의 미스터리
계림로 보검의 주인공은 초원 민족인가? * 황금 보검은 어떻게 신라에 들어왔을까 * 누가 신라인에게 황금 보검을 주었나 * 유라시아 고고학, 신라에서 답을 구하다
가야의 청동 솥과 돼지 국밥
가야인, 초원의 구리 솥을 쓰다 * 초원 사람들의 잔치에 쓰인 구리 솥 * 대마초 흡입에 사용된 구리 솥 * 부산, 초원과 바다를 한품에 안다
4부 고구려, 초원을 탐하다
고구려 무사와 파르티안 사법
무용총 수렵도의 비밀 * 파르티안 사법의 기원 * 고구려로 전래된 파르티안 사법 * 로마군, 승리 대신 비단을 얻다 * 고구려, 상무 정신으로 무장하다
고구려의 꼬치구이와 불고기
초원의 패스트푸드 * 중국을 사로잡은 고구려의 꼬치구이 * 불고기는 어떻게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가 되었나
세계사를 바꾼 고구려의 등자
등자의 기원, 고구려인가 중국인가 * 알타이에서 발견된 고구려 등자 *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아바르족의 등자
고구려, 초원을 탐하다
고구려, 최초의 한몽 동맹을 맺다 * 고구려와 유연제국 * 고구려와 유연의 합동 작전
중앙아시아로 건너간 고구려 사신들
사막 속의 고구려인 * 깃을 꽂은 사신은 신라인?
5부 한국과 초원, 이어지는 이야기
반구대 암각화, 초원과 한반도를 잇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 반구대와 알타이 암각화의 유사성 * 누가 언제 새겼을까? * 북극해와 한반도의 고래 사냥꾼 * 반구대가 사라지고 있다
붉은 머리 사람들과 철릭
붉은 머리 사람들을 찾아서 * 중앙아시아의 유럽인계, 그들은 서양인인가 * 정령, 그리고 철륵족 * 한국의 전통 옷 철릭 * 다문화사회, 초원에서 가르침을 얻다
동아시아를 제패한 초원의 음식 ‘만두’
쌍화점에 간 여인과 회회아비 * 충혜왕, 만두 도둑을 참하다 * 만두 이야기에 담긴 유목과 정주의 만남 * 가족 사랑이 담긴 음식
한글에 숨은 초원의 지혜
글자가 필요 없었던 초원 민족 * 돌궐의 글자를 발견하다 * 한글과 초원문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 돋보이는 한글의 가치
차마고도에 숨은 초원 유목 문화와 고인돌
윈난성은 민족의 용광로, 민족학의 고향 * 다양한 북쪽 문명의 혼재 * 윈난성의 초원 문화가 우리에게 남겨 준 것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한민족 북방 기원론
하얼빈의 러시아 학자가 찾아낸 동북아시아의 초원 문화 * 일본 고고학자들의 운명을 바꾼 러시아 유학 * 일본 학자들이 주장한 한민족 북방 기원론 * 자생설에만 기대는 것도 경계해야
기마민족설, 패전국 일본을 달래다
일본에 ‘기마민족설’이 등장한 배경 * 연합군 총사령부와 기마민족설 * 초원과 교류로 역량 커진 점에 주목해야
감사의 말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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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북쪽에 잊힌 문명이 있다. 발달된 기술과 화려한 황금 문화를 자랑하며 수천 년간 인류 발전을 주도했던 사람들. 스키타이, 흉노, 투르크, 아바르 등으로 지칭되는 수많은 초원 민족들이 그 주인공이다. 말을 타고 유라시아 대륙 곳곳을 누비던 그들은 문명의 전달자이자 기술 발전의 촉매로 인류 문명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착민들은 자신들과 다른 초원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초원에 대한 공포와 몰이해는 ‘야만’과 ‘미개’의 이미지로 탈바꿈했고, 찬란했던 초원의 역사는 정착 문명의 의도된 침묵으로 지워졌다. 우리가 북방 초원 민족들을 ‘오랑캐’라고 멸시하게 된 것도 초원에 대한 ‘중화 문명’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탓이다.
■ 한국 고대사의 미스터리,초원 고고학에서 실마리를 찾다
한국 고대사 관련 유적 중에는 그 계통을 알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일례로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발굴 이후 거의 100여 년간 한국 고대사학계의 미스터리였다.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쌓는 적석목곽분은 4세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200여 년간 지속되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게다가 경주 지역 외에는 한반도 어디에서도 비슷한 무덤을 찾을 수 없다. 적석목곽분과 형태가 유사한 무덤은 남부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에서 발굴된 파지릭 고분군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신라에 적석목곽분을 만든 사람은 시베리아 초원에서 온 유목민일까?
신라와 초원 지역의 관련성을 보여 주는 유물은 이뿐만이 아니다.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황금보검이 발견되었고, 화려한 세공 기법을 자랑하는 신라 금관은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에서 출토된 금관과 계통이 같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곳에서 초원의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신라의 지배층이 북방 초원에서 기원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유라시아 맨 구석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 이토록 많은 초원계 유물이 발견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 ‘한민족 북방 기원설’을 넘어 유라시아 루트를 다시 잇다
우리에게 한민족 북방 기원설은 결코 낯설지 않다. 어릴 때부터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 계통이라고 배웠고, 빗살무늬토기 시베리아 기원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민족 북방 기원설이 일본 제국주의 논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논리를 찾던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한민족의 자체적 역사 발전을 부정하는 ‘타율성론(他律性論)’과 ‘정체성론(停滯性論)’을 주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민족 북방 기원설은 한국 문화의 기원을 한반도 바깥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바로 그 ‘타율성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의 고고·역사학계에서는 한반도와 초원의 교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 왔다. 둘 사이의 관련성을 언급하기만 해도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현재 한국 고고학계에는 한반도에 미친 북방 문화의 영향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분명한 초원 유물이 나왔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무리한 자생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러시아, 중국, 몽골 등 세계 각지에서 초원 지역 고고학 자료가 축적되고, 이념적 · 물리적 장벽이 허물어져 이 지역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자유로워진 지금, 수십 년 전 제기된 북방 기원론을 신봉하거나 그에 대한 무분별한 반론만 펼치는 것이 과연 옳을까?
1부
단백질 공급원에 불과했던 말이 세 가지 마구(재갈, 안장, 등자)의 발명으로 인간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 위에서 먹고 자며 평생 양질의 목초지를 찾아 떠도는 유목의 삶은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정착 농경민들의 삶과는 확연히 달랐다. 때문에 정착민의 눈에 비친 유목민의 모습은 ‘머리 사냥을 즐기는 야만적인 늑대들’이나 “신의 저주가 내린 내시 같은 놈들” 혹은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처럼 왜곡된 이미지로 윤색됐다.
5000년 초원 문명이 이어지는 동안 유목민들은 끊임없이 정착 문명과의 교류를 이어갔다. 전차, 마구 등 첨단 무기를 개발하여 전쟁의 양상을 바꾼 것도, 문명 교류의 교차점으로 각지에 흩어진 문명들을 연결한 것도 모두 초원 유목민들이었다. ‘4대 문명’과는 구분되는 ‘제5의 문명’ 초원이 있었기에 인류의 세계사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2부
중원에 맞서 정복하고 정복당하기를 반복하며 동아시아 역사의 한 축을 구성했던 중국 북방 초원 민족의 역사를 다룬다. 중원에서는 줄곧 초원 유목민들을 ‘오랑캐’라는 이름으로 멸시했지만, 실제로는 북방 유목민과의 교류가 활발할 때 중원의 문화 또한 가장 융성했다. 조나라 무령왕과 진나라 시황제가 중원을 제패할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그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초원의 기술과 문화에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역사에서 초원을 분리하려는 정착민들의 노력은 그칠 줄 몰랐다. 초원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더 크고 단단해졌던 만리장성이 그 명백한 증거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다원일체(多元一體)를 내세워 초원 역사를 끌어안으려는 중국이 문명의 상징으로 만리장성을 내세운 것은 분명한 역사적 모순이다. 초원을 향한 중국의 왜곡된 시선은 유럽에까지 전해져 오리엔탈리즘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사막 위에 세워진 쿠빌라이의 여름 궁전 상도(제너두)가 서양인들 사이에서 지상낙원의 상징이 된 것이 그러한 인식의 발로이다
3부
신라에서 발굴된 다양한 초원계 유물(유적)의 기원을 추적한다.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에서 출토된 것과 계통이 같은 신라의 금관과, 카자흐스탄 보로보예 출토 황금 장식의 실체를 밝힌 계림로 14호분 황금보검, 알타이 파지릭 고분과 형태가 흡사한 신라 적석목곽분까지, 신라 역사 곳곳에서 초원의 흔적이 발견된다. 최근 발견된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 역시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담아 신라와 초원 지역의 관련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신라의 건국 세력이 초원에서 왔다는 주장까지 제기됐지만 그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와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이렇듯 비슷한 유물들이 발견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관련된 역사 기록이 전무한 현실에서 우리가 기댈 곳은 오직 북방 고고학뿐이다.
4부
초원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고 교류와 대결을 반복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그려진다. 강한 초원 국가들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고구려는 초원의 황금 대신 무기나 마구, 전술 등을 들여왔다. 실제로 무용총 수렵도에 표현된 한 고구려 전사는 달리는 말 위에서 뒤를 돌아 활을 쏘는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스키타이 시대 초원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고구려가 유목 세계에 미친 영향 또한 적지 않다. 고구려는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유목국가인 유연과 연합하고, 그들에게 발달된 철제 기술을 전해 주었다. 그중에는 초기 단계의 등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정적인 기마를 돕는 등자의 발명은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무기를 휘두르는 철갑기병의 탄생을 촉진했고, 말 타기에 익숙지 않은 농경 사회 전반에 기마 문화를 확산시켰다. 이렇듯 유목과 농경의 장점을 아울러 부국강병을 이룬 고구려는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대제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5부
려와 조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던 한반도와 초원의 교류를 조명한다.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이 세워지면서 한반도는 초원과 다소 멀어지는 듯했다.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초원 민족들을 ‘오랑캐’라고 멸시했지만 그럼에도 초원과의 교류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려 시대에는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유럽계 종족인 철륵의 옷이 들어와 우리 민족의 전통 의상인 철릭이 됐고, 세종대왕은 초원의 표음문자 전통을 받아들여 우리 민족의 자랑인 한글을 만들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만두 역시 초원에서 기원한 것이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한반도와 초원의 교류가 끊어지고 왜곡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논리를 찾던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에 남은 초원의 흔적을 한민족 북방 기원설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반론들이 제기됐지만 분단과 이념적 장벽으로 북방 지역과의 교류가 끊어지면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지는 못했다.
미지의 땅을 찾아가는 고고학자의 순례기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①연재를 시작하며 한겨레 18.11.23
1550년에 피에르 드셀리에가 만든 지도에 그려진 동북아시아 부분. 하늘을 나는 용과 독수리 머리에 사자 몸을 한 그리핀 등 상상 속 동물이 그려져 있다. 강인욱 제공
고고학 하면 흔히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런데 “미지의 땅”이라는 뜻의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는 서기 2세기에 저술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서>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중세 이후 유럽이다. 당시 유럽에서 항해술과 지도제작술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그들은 제대로 모르는 땅을 공백으로 두기보다는 무서운 용이나 괴물을 그려 넣어 야만과 미개한 땅으로 윤색하곤 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고대의 <산해경>에는 중국 바깥 사방의 사람들을 기이한 형상으로 묘사했다. 우리가 즐겨 읽는 <서유기>에선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서역의 관문을 넘자마자 곳곳에서 요괴와 기이한 풍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묘사한다. 지금 실크로드 일대의 투르판, 누란 등 다양한 ‘오아시스 국가’들이 당시엔 각종 요괴가 출몰하는 괴물의 땅이었고, 사람들의 인상은 그 소설로 결정됐다.
근대에 들어서도 주변 지역에 대한 무지와 오해는 계속됐다. 서구에선 제국주의가 발흥해 미지의 땅을 정복해야 할 식민지로 간주했다. 신대륙의 발견 이후 나온 ‘황금의 엘도라도’, ‘실크로드’란 말은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만드는 욕심이 투영된 말들이다. 중국도 고대부터 사방의 이민족들을 ‘이만융적’(동쪽 동이, 남쪽 남만, 서쪽 서융, 북쪽 북적)으로 이름 짓고 오랑캐로 간주했다. 중국은 지금도 동북공정에 이어 일대일로의 정책을 펴면서 중화사관을 더욱 강력히 하고 있다.
지금도 미지의 땅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크게 다르지 않다. 1990년대까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일대는 소련에 포함되어 철의 장막 뒤에 숨어 있었다. 사실 최근까지도 우리는 북한에 이상한 사람들이 산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나. 북한 사람들을 마치 뿔 달린 괴물처럼 묘사하던 포스터들이 내 기억에는 생생하다. 냉전시대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유라시아에 대한 인식은 서유기의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렇듯 고대에서부터 시작된 주변 지역에 대한 굴절된 시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역사 속의 테라 인코그니타
주변 지역에 대한 무지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돌아보면 한국 역사 속에서도 소외되고 무시된 ‘테라 인코그니타’는 너무나 많다. 삼국시대를 이야기하면 경주, 공주, 부여, 평양과 같은 수도와 황금이 찬란한 거대한 고분과 왕관만을 기억한다. 예컨대, 삼국시대 강원도는 어느 나라의 땅이었는지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역사를 수도의 거대한 왕릉과 고분으로만 이해하는 우리의 생각은 최근 활발해지는 남북한 공동 문화재 조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공동 조사 대상이 고려의 수도 개성과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만 집중된 것이다. 반면에 조선 개국의 요람이며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과 접경해 있어 동아시아사적인 의미도 있는 함경도 일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넓게 동아시아사를 놓고 보면 우리 역사와 직간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만주(중국 동북지방), 연해주 지역도 연구에서 소외된 ‘테라 인코그니타’였다. 이 지역들은 선사시대 이래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한국사, 나아가서 동아시아사의 한 축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문헌사료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사에서는 변방으로 치부되었고, 남한 중심의 한국사 연구에서도 소외되었다. 또한, 고조선과 인접했던 흉노-동호, 고구려와 함께 등장하는 오환과 선비, 흑룡강 일대까지 진출했던 부여계통의 두막루, 연해주에서 함경도 일대에 살았던 옥저-동예, 이름마저 생소한 읍루와 말갈 등 수많은 역사가 외면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집단이 차지하는 시공간적 범위와 교류의 범위는 실로 엄청나다.
2011년 미국 알래스카 에스펜버그의 서기 10~15세기 유적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간 허리띠 버클이 발견되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발해 또는 말갈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변방으로 치부된 지역들 사이의 활발한 교류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강인욱 제공
2011년에 바다 건너 미국 알래스카 에스펜버그의 서기 10~15세기대 유적에서는 시베리아에서 베링해를 거쳐 넘어간 허리띠 버클이 발견되었다. 시기적으로 말갈 또는 발해와의 교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사람들은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있는 베링해를 건너가 신대륙의 주인이 되었으니, 말갈이나 발해 사람이 사할린과 캄차카 반도 등을 통해서 알래스카 지역과 교류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신라는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다
신라와 러시아. 도저히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두 나라다. 그런데 이 두 나라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국가를 일으키며 미지의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점이다. 신라의 북방지역 교류는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다. 일찍이 삼한 시기였던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신라 지역에서는 많은 북방 초원 지역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신라에서 갑자기 북방계 유물이 넘쳐나는 시점은 박·석·김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다가 김씨가 단독으로 왕위를 계승하던 때부터였다. 이때 신라는 새로운 통치체제와 함께 중앙아시아의 쿠르간(대형고분), 유리, 황금 등 다양한 북방계 문화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신라는 당시 유라시아 각지에서 발흥한 아바르(흑해 연안), 에프탈(중앙아시아) 같은 신흥 강국들처럼 자신을 흉노의 후예로 자청했다. 당시 신라를 둘러싼 부여, 고구려, 백제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북방에서 내려온 부여계라는 선민의식으로 뭉쳐 있었다. 이들과 경쟁하고 나아가서 주변 가야세력과 차별화된 선민의식이 필요했던 신라는 오히려 더 머나먼 초원 지역과 자신들의 친연성을 강조했다. 삼국에서 가장 늦게 나라를 발달시키면서 오히려 미지의 땅을 자신의 발상지로 하는 신라의 역발상 전략은 주효했다. 신라는 후발주자의 불리함을 적극적인 북방지역 교류로 돌파했다.
이런 신라의 전략은 소련과 러시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럽 변방의 오랑캐로 폄하되던 러시아는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자신들의 변방성을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고자 했다. 20세기 들어 역사가 레프 구밀료프를 중심으로 여러 소련의 학자들은 새로운 역사인식에 기반한 ‘판유라시아주의’를 제창했다. 최근 다시 강성해진 푸틴의 러시아도 구밀료프의 생각을 강화하고 있다. 이 주장은 바로 러시아(또는 소련)의 근간은 유라시아이며, 그 정통성은 바로 칭기즈칸과 같은 유라시아를 제패한 유목국가의 전통을 잇는다는 주장이었다. 서유럽 중심의 사고에서 러시아는 변방에 불과했다. 당시 인식에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는 여느 유럽 국가들이 가진 식민지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자신들이 오랑캐의 소굴(?)이며 황무지로만 생각되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유럽의 변방에서 세계적 강국으로 탈바꿈했다. 실제로 러시아가 차지하고 관리하는 광활한 유라시아는 러시아 국력의 원천이다. 강한 러시아의 상징은 바로 미지의 땅이다.
17세기 서양 사람이 바라본 만리장성. 우리와 반대로 서양인들에게는 장성 남쪽의 중국이 ‘미지의 땅’이었다. 1692년 출판된 니콜라스 빗선의 <북동 타타르지>에서. 강인욱 제공
21세기,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다
온갖 정보가 넘치는 지금도 주변 지역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 지금 우리는 구글맵과 같은 도구로 세상 곳곳을 볼 수 있다. 해외여행은 더욱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배타심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 유럽에는 신나치주의가 부활하고, 일본에선 군국주의가 발흥한다. 여기에 더욱더 강해지는 각국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고대사 이해는 더욱 치우쳐져 간다.
과거에 대한 편견을 깨는 돌파구는 바로 유물에 있다. 미지의 땅에서 편견과 무지를 걷어내는 데 가장 큰 현실적 문제는 부족한 문헌 자료다. 고대 역사 기록은 극히 적고 남은 유물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번 연재로 고고학 자료의 재해석을 통해 한국 고대사의 일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잊힌 여러 유라시아 민족들에게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장을 마련하려 한다.
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
②구석기시대 문명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대형 신전 괴베클리 유적.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념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구석기시대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미개한 원시인이 돌을 깨 돌칼이나 돌망치를 만드는 모습을 떠올린다. 문명은 토기를 사용하며 마을을 일군 신석기시대부터 시작해, 5000년 전 거대한 신전과 도시를 세우고 글자를 사용한 4대 문명에서 꽃을 피운 걸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 이런 선입견을 깨부수는 여러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대형 신전인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괴베클리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2만년 전에 발견된 토기가 그 좋은 증거이다. 구석기시대에서 나왔다고는 선뜻 믿기 어려운 유적이 계속 발견되면서 이제 고대 문명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
극적인 변화를 유도한 대표적인 유적은 1994년부터 지난 20여년간 조사된 괴베클리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인공적으로 쌓은 높이 15m에 너비 300m 정도의 넓은 언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을 발굴해보니 200여개 돌기둥과 돌담으로 만든 원형 제단을 발견했다.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여우, 새 등이 새겨졌는데,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괴베클리 유적은 수십 차례에 걸쳐서 연대측정을 한 결과 1만3000년~1만년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체의 5% 정도만 조사되었으니 대체로 구석기시대 후기인 1만5000년 전부터 이미 사용했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는 금속도 몰랐고 바퀴 같은 운송수단은커녕 제대로 된 마을도 없었던 시절이다. 사냥과 채집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기념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서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것이다. 상식을 깬 발견을 두고 고고학자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괴베클리에 대한 국제적인 공동연구로 다양한 인물 조각상과 해골들이 발견되었고, 그 연대도 확인됐다. 명실상부한 인류 최초의 구석기시대 신전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201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괴베클리 유적의 돌기둥 각각은 고도의 석조기술을 사용하여 티(T)자형으로 세심하게 조각하여서 세운 것이었다. 돌기둥 하나가 보통 10톤 정도이며 큰 것은 50톤이 넘는다. 겉에는 황소, 여우, 새 등이 새겨졌는데, 아주 사실적이어서 유라시아 초원 일대에서 3000년 전에 유행한 동물장식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출처 위키피디아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괴베클리가 나올 때 동아시아에서는 세계에서 최초로 토기를 사용했다. 토기는 빙하기가 끝나고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사용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토기가 1960년대 일본 열도를 필두로 1990년대 러시아 극동지역, 2000년대 중국 송화강 중류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에 고고학자들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토기는 신석기시대가 되어야 등장한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상식이었다. 심지어 토기가 발견된 곳은 세계 문명사에서 변방으로 꼽히던 동아시아지역이었다. 러시아에서 구석기시대의 토기를 처음 보고한 메드베데프 교수는 1980년대 하바롭스크 근처의 구석기시대 유적인 가샤를 발굴할 때 구석기 유적과 함께 자꾸 토기가 출토되어서 고민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그 결과를 발표하자 바이칼 일대에서 발굴을 한 다른 고고학자도 구석기시대 발굴을 하다 토기를 발견했는데, 본인이 실수를 한 줄 알고 발표를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1990년대 러시아가 개방되어 그 연구가 알려졌고, 급기야 2012년에는 중국 셴런퉁 유적에서 2만년 전 토기가 발견되었다는 연구가 <사이언스>에 실렸다. 이제 후기 구석기시대 토기는 상식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지층에서 토기가 발견된 확실한 사례는 아직 없다. 다만, 제주도 고산리에서 비슷한 형태의 토기가 출토된 바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 셴런퉁 유적에서 발견된 2만년 전 토기. 강인욱 제공
공동체로 빙하기 극복한 구석기인
도대체 빙하기가 끝나지도 않은 구석기시대에 이런 문명의 여러 요소가 발달한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3만년 전에 번성했던 현생인류에 있다. 3만년을 기점으로 그 전에 번성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고 현생인류는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이 특별히 미개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적은 현대인과 큰 차이가 없고 신체 구조도 비슷해서 현대인의 옷을 입히면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다만 현생인류는 인간들끼리 서로 접촉하고 소통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여 사회적인 진화를 이룩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공동체를 이루어서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버트 던바 교수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현생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로 노래와 춤, 신화(스토리텔링), 종교(샤머니즘)를 꼽았다. 괴베클리 신전은 각지에 흩어져 살던 수렵민들이 한데 모여서 조상을 기억하는 신전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괴베클리의 돌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여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실제 근친혼의 위험이 없이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적어도 500여명의 사람이 한 집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연구와도 일치한다. 이외에도 2~3만년 전 프랑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 5천개의 장식이 발견된 러시아 순기리 무덤 유적 등은 구석기 사람들의 종교 및 축제 문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1만5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가며 기후가 급변할 때에 사람들은 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주변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빠르게 환경에 대처했다. 반면, 변화에 뒤처지고 소통하지 못했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구석기시대의 토기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단합을 한 증거이다. 다른 어떤 그릇보다 토기는 조리에 유리하다.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불을 사용하여 토기로 음식을 만들어 잔치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메드베데프 교수가 발굴한 토기가 발견된 가샤 유적 바로 앞에는 사카치-알리안이라는 암각화가 있다. 이 암각화엔 다양한 샤먼(주술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런 동아시아의 샤머니즘 종교와 문화는 1만5000년을 전후해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간 현생인류와 함께 건너갔다. 사실, 1950년대 이래로 중국과 신대륙 마야문명의 종교와 문화에서 많은 유사성이 보인다고 지적됐는데, 그 유사성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샤먼(주술사)이 새겨진 사카치-알리안 암각화. 사진 강인욱
4대 문명론은 제국주의의 발명품이다
완전히 빙하기가 끝난 1만년을 기점으로 현재와 같은 따뜻한 날씨가 되면서 사람들은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초기 농사는 우리 생각과 달리 위험한 모험이었다. 초기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체구도 훨씬 작아졌고, 영양 상태도 불량했다. 식량 대부분을 일부 곡식에만 의존했고 흉년에 쉽게 대처할 정도의 농사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까지 각자 떠돌며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었으니 전에 없었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조선 시대 사람들이 아파트에 모여 사는 셈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소통과 공동체 의식으로 극복해나갔다. 괴베클리 이후인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 차탈회위크가 그 상황을 보여준다. 서로 밀집해 집을 만들어 살았던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집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화를 그려서 자신들의 신화를 보존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기억하고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 차탈회위크 유적. 서로 밀집해 집을 만들어 살았던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집 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화를 그려서 자신들의 신화를 보존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기억하고 공동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진 강인욱
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4대 문명만을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4대 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활보할 때 만들어진 것이다. 4대 문명으로 유명한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자기 앞마당처럼 마음대로 조사하던 지역이었다. 문명은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달했고,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미개하게 살았다는 생각은 사실 일부 발달한 선진국이 다른 후진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다양한 연구로 고대 문명은 구석기시대를 거쳐서 빙하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현생인류 공동의 자산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그동안 변방으로만 치부되었던 세계 곳곳에서 인류 문명사를 새롭게 쓸 자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181214
태양의 후예, 시베리아의 아틀란티스를 만들다
③아르카임과 전차 문화
시베리아의 전차부대는 그 월등한 기술로 구대륙 곳곳의 고대 유적과 언어,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 세계 각국의 문화와 유사한 요소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태양의 후예가 남긴 문화가 특정 국가만의 유산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고대 태양의 후예들이 남긴 유산을 극단적으로 자신들의 고대사를 확장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다시 히틀러가 만들어놓은 편견의 틀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럽과 시베리아를 가르는 우랄산맥 근처에는 첼랴빈스크라는 도시가 있다. 우랄산맥에 각종 광물이 풍부했던 탓에 첼랴빈스크는 소련 성립 이후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소련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탱크를 만들면서 본이름보다는 ‘탄코그라드’, 즉 탱크의 도시란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1980년대에 소련은 이 도시 남쪽에 댐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수몰 예정 지역에 유적이 없는지를 조사했다.
그 조사 중에 말과 전차를 함께 묻은 전사의 무덤이 발견됐다. 연대를 조사해보니, 무려 4천년 전으로 그동안 발견된 전차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스탈린 시절에 전차를 생산하던 도시가 알고 보니 세계 최초의 전차를 생산한 지역이었다는 역사적 우연에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다행히 건설사업은 중단되었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4천년 전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하던 세계 최초의 전차부대 도시 아르카임이 역사 속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카임의 전경. 출처: 즈다노비치(2001), 강인욱 제공
아르카임 복원도. 강인욱 제공
아르카임을 만든 사람들은 유라시아 고고학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안드로노보 문화라고 한다. 아르카임의 도시 형태는 마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샤먼의 토루를 연상시키는 원형 아파트 같다. 전체 도시는 직경 150m로 그 안에 2열로 모두 46개의 집을 만들었다. 도시 중심에는 제사와 집회를 여는 광장을 만들었다. 집들 사이에는 도로를 만들었고 목축 동물을 두는 축사와 무덤은 도시의 바깥에 따로 두었다. 아르카임은 마치 고대 근동의 문명과 마찬가지로 관개시설과 방어 성벽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전차부대를 운영했다. 또한 도시 주변에는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도시 주민들은 발달한 청동기술과 다양한 생산기술을 보유했다. 마치 현대의 신도시같이 여러 시설을 구획하여 살았던 아르카임에는 2천명 정도의 사람이 살았다고 추정한다. 게다가 그 주변에서는 70개 이상의 이러한 도시들이 발견되었으니, 적어도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주변의 도시들도 대부분 항공사진을 조사해서 발견된 것이니 실제 규모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태양의 후예’가 발명한 전차
4천년 전에 세계 최초의 전차를 발명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발굴된 인골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유럽인 계통으로 인도-이란인 또는 아리아인의 선조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들은 특히나 태양의 기호를 좋아해서 토기와 각종 유물에 태양의 빛을 상징하는 ‘卍’(또는 ‘?’) 기호를 많이 넣었다. 아르카임 유적의 평면형태도 태양을 모방해서 구획한 것이다. 그들이 태양의 상징물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들이 발명한 위대한 무기인 전차의 바퀴에 있다. 전차의 바퀴는 무겁게 나무를 잘라서 만들던 수레바퀴를 개량해서 마치 자전거 바퀴처럼 얇은 바퀴살을 만들고 차축을 끼운 것이다. 이 거대한 발명으로 느릿한 탈것에 불과했던 수레가 쏜살같은 속도로 초원을 달려가는 탱크로 탈바꿈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바퀴는 태양의 형상과 비슷했기 때문에 전사를 태양을 지고 달려가는 불의 전사로 표현했고, 그들은 자신을 태양의 후예로 자처했다.
솔로비요프가 복원한 4천년 전 시베리아 전차 모습. 강인욱 제공
아르카임 사람들은 3800년 전쯤에 갑자기 자신의 도시를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후환경이 변해 시베리아에서 목축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대신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구대륙 일대로 퍼진 이들의 전차 문화로 세계사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원전 1274년 고대 근동의 람세스가 이끄는 이집트의 전차부대가 히타이트와 카데시에서 세계 최초의 대륙 간 세계전쟁을 벌인 것도 아르카임의 전차 문화가 전달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차 문화의 확산은 현대 유럽 언어들의 기원과도 연관이 있다. 데이비드 앤서니는 <말, 바퀴, 언어>에서 기원전 20세기경부터 동유럽에서 서쪽으로 빠르게 퍼진 인도-유럽어는 시베리아에서 기원한 전차가 유럽으로 확산하면서 그들의 언어도 함께 퍼진 결과라고 보았다. 전차라는 고대의 고급 기술이 퍼지기 위해서는 전차를 만드는 기술은 물론 목축과 말을 조련하는 여러 기술도 필요하다. 그러니 관련된 여러 전문용어와 언어들도 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도-유럽어의 또 다른 일파는 불교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범어)이다. 산스크리트어 역시 전차 문화의 확산과 연관되었다. 인도에 전차를 전파한 사람들은 기원전 15세기에 ‘아리안족’이라고 불리었고, 세계 최초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리그베다’를 남겼다. 인도 초기 불교에서 태양족의 후예인 석가모니의 상징으로 전차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전차 바퀴는 불교의 도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태양의 후예가 남긴 유산은 조로아스터교와 힌두교의 태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시베리아 전차의 확산 경로와 유적 범위. 강인욱 제공
고대 시베리아의 전차는 중국과 만주 일대로도 유입되었다. 중국 상나라의 무덤과 요동지역의 고조선 비파형 동검 문화에서도 전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한반도까지 그들의 전차가 들어온 흔적은 전혀 없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산이 많고 초원이 없는 우리의 지형 때문에 시베리아의 전차를 만들었던 문화와 한국의 청동기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일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것이 고고학 아닌가. 2016년에 이들과 한국의 관계를 증명해줄 한국 최초의 청동기가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기원전 13세기로 한반도의 청동기 사용 시기를 무려 400년 이상 앞당긴 획기적인 유물이다. 이 정선 아우라지 출토의 청동기는 돌로 만든 목걸이 장식 중 몇개를 마치 포일로 감싸듯 장식한 것으로 한반도와 만주에서 비슷한 장식이 발견된 예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장식은 고대 시베리아 전차부대의 강력한 청동무기를 만드는 제련술인 ‘세이마-투르비노’ 스타일에서 흔히 보인다. 아르카임 근처의 무덤에서도 이렇게 돌과 청동기로 만든 목걸이는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주로 여성과 아이들의 장신구에서 많이 사용된다. 비록 시베리아의 전차가 한반도로 이어진 증거는 아직 없지만 그들의 발달한 청동기 제련기술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음이 증명된 것이다.
만주 비파형 동검 문화에서 사용된 전차 복원도. 랴오닝성 박물관 소장, 강인욱 제공
태양의 후예와 히틀러
4천년 전 구대륙을 뒤흔든 문명의 주역인 태양의 후예는 그동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엉뚱하게도 히틀러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우월한 아리안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하고 고대 전차부대인들이 사용했던 태양의 상징을 나치당의 심벌(하켄크로이츠)로 사용했다. 물론, 히틀러 자신은 하켄크로이츠가 사실은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점은 몰랐다. 히틀러의 그림자 때문에 그동안 서방에서는 태양의 기호가 새겨진 고대 전차 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금기시되어왔다.
다행히도 1990년대 이후 시베리아의 발굴 자료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재평가되고 있다. 시베리아의 전차부대는 그 월등한 기술로 구대륙 곳곳의 고대 유적과 언어,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 세계 각국의 문화와 유사한 요소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태양의 후예가 남긴 문화가 특정 국가만의 유산이 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신나치주의나 투라니즘(튀르크인 중심주의)에 아르카임 유적을 이용하고 있다. 고대 태양의 후예들이 남긴 유산을 극단적으로 자신들의 고대사를 확장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다시 히틀러가 만들어놓은 편견의 틀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3800년 전 덴마크에서 발견된 태양의 전차. 강인욱 제공
태양의 후예들의 문화가 구대륙 일대로 전파될 수 있었던 비결은 초원을 배경으로 하는 성공적인 목축, 발달한 청동 제련기술, 세계에 보편적으로 통할 수 있었던 태양과 불의 숭배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거친 환경에 적응한 이들의 문화는 각지의 문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을 특정 국가의 역사로 귀착시키거나 자국의 위대함으로 국한하는 것은 변방에서 문명의 꽃을 피운 이들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행동이다.
사람들은 흔히 고대의 문명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아틀란티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아틀란티스만큼 잘못 알려진 역사도 없다. 아틀란티스는 원래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이 처음 말했다. 플라톤은 이집트 신관의 입을 빌려서 당시 바다로 무리하게 진출하던 아테네를 경고하기 위한 우화로 잠깐 이야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아틀란티스가 실제 지중해나 대서양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왔지만, 전혀 그런 증거는 없다. 게다가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가 활동한 주 무대는 바다가 아니라 고대 근동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며, 배나 항구 대신에 강력한 전사와 도시가 등장한다. 플라톤의 이야기에서 무대가 바다라는 것만을 제외하면 4천년 전 시베리아에서 발달해 유라시아 전역을 호령했던 전차 문화와 일치한다. 어쩌면 사라져버린 아틀란티스는 바로 고대 시베리아에서 발달한 태양의 후예들이 아니었을까. 19.1.4
최첨단 부엽공법, 고대 동북아를 진보시키다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① 역사학과 자연과학의 융복합
7세기 오사카 사야마이케 저수지 제방
흙 사이 나뭇잎 등 넣는 부엽공법
앞선 풍납토성·벽골제 기술과 똑같아
낙랑 출신이 만든 안휘성 제방도 동일
고대 과학기술 전파와 교류 보여줘
우리민족제일주의 역사관 시대 지나
매년 우리 땅 유적발굴만 1500건
공학 등과 융합하고 시야도 넓혀야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풍납토성의 단면에 부엽층의 흔적이 뚜렷하다. 발굴 당시의 단면을 떼어 전시하고 있다. 풍납토성은 부엽공법뿐 아니라 회를 황토에 섞는 방식의 증토축성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권오영 교수
‘식민사학 대 민족사학’, ‘국뽕·환빠 대 친일·사대’라는 도식적인 구도로 한국 고대사를 해석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21세기의 한국 고대사는 우리의 조상들이 과거에 주변의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나름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는지를,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1년 동안에 이루어지는 유적 발굴조사 건수는 매년 1500~1800건 정도에 달한다. 출토되는 유물의 양은 짐작조차 어려울 정도이며, 새로운 빅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국 고대사 연구의 성패가 좌우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땅에서 발견된 자료로 하여금 우리 역사를 말하게 하려면 역사학적 방법론만으로는 금방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자연과학과 공학, 의학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연구방법론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 고대사에서도 융복합적 연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버렸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도 종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넓어지게 되었다. 한반도만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고대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이 포함된 동북아시아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서 도출된 내용들은 ‘우리민족제일주의’와는 다른 모습을 띨 것이다. 대한민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외국 국적 주민의 수가 176만명을 넘어서서 전체 국민의 3.4%를 차지하고, 곧 다문화 가정의 인구수가 74만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현재의 역사 연구는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
과학실험으로 ‘증토축성’ 증명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이 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군대는 기수와 말이 모두 철제 비늘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긴 쇠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 그리고 단병기로 무장한 보병으로 구성된 연합부대였다. 동북아시아 최강의 기계화 사단인 것이다. 꼬박 7일 동안 이어진 공성전 끝에 고구려 군대가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성문을 불태웠다.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백제의 개로왕은 기병 수십명을 거느리고 풍납토성을 탈출하여 남쪽에 있는 몽촌토성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고구려 군에게 생포되었고 결국 한강 건너 아차산으로 끌려가서 살해당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녀 8천명이 고구려에 포로로 끌려갔다. 죽음을 앞에 둔 개로왕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도림이라는 요승의 꾐에 빠져 몸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반성하였을 것이다.
이 비극이 일어나기 몇년 전, 바둑을 좋아하는 개로왕에게 바둑의 고수인 승려 도림이 접근하였다. 그는 순식간에 개로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고 국정에 깊숙이 간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도림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고 잠입한 고구려의 고급 스파이였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유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권하였다. 이 말에 넘어간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증토축성”(烝土築城)하고 그 안에 각종 건물을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강에서 큰 돌을 캐서 무덤을 만들어 아버지의 유골을 장사하고, 사성(蛇城)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가난해져서 국가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서 장수왕에게 보고하자 장수왕은 백제를 급습하였다.
도림의 사주에 의해 백제가 실시한 토목공사는 국고를 거덜낼 정도였는데, 그 기술은 증토축성이라고 표현되었다. 증토축성이란 수수께끼 같은 표현을 풀기 위하여 많은 역사학자가 도전하였다. 증토를 “흙을 찌다”라고 이해하고 판축(판자를 양쪽에 대고 그 사이에 흙을 넣어서 단단하게 다져 담이나 성벽 등을 쌓는 일)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석하거나, “증”이란 글자에 “모으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많은 흙으로 쌓았다”는 해석도 나왔지만 선뜻 수긍하기 어려웠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연구실에서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외국의 사례를 비교하는 방법이 효율적이었다. 왜냐하면 개로왕의 증토축성 바로 직전에 대하(大夏)라는 나라에서도 완전히 동일한 표현인 증토축성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13년 지금의 오르도스(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곡류하여 ? 모양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대하의 왕성을 축조하기 위해 10만명이 동원된 대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당시의 역사를 전하는 <진서>에서는 흉노족 출신인 대하의 왕, 혁련발발의 명령을 받은 기술관료 질간아리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적의 강력한 공격에도 허물어지지 않을 철옹성을 쌓기 위해 무자비하고 끔찍한 방법을 택하였다. 일정한 구간의 공사 책임자를 정하고, 감리하는 인물로 하여금 쇠송곳을 들고 공사 중인 성벽에 온 힘을 다하여 구멍을 뚫게 한 것이다. 2~3㎝ 정도 깊이로 구멍이 뚫리면 그 구간의 책임자를, 뚫리지 않으면 감리자를 성벽 안에 처넣어 죽이면서 공사를 진행하였다.
백제 풍납토성에 관한 표현인 ‘증토축성’이라는 말의 비밀은 통만성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에서 풀렸다. 북방유목민족인 흉노의 나라인 대하가 5세기 초에 세운 통만성(중국 오르도스)의 흰색 성벽은 아직도 단단하게 서 있다. 권오영 교수
오사카 번영의 씨 뿌린 백제 기술자
그로부터 1500년의 세월이 흘러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질간아리가 쌓은 통만성을 발굴조사하였다. 질간아리의 끔찍한 방법이 효험이 있었던지 통만성은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었다. 중국의 학자들은 성벽의 흙을 채취하여 과학적인 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석회 성분이 인위적으로 섞여 있음이 밝혀졌다. 석회에 물과 황토를 섞어 버무리면 석회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열을 발산하는데, 그것이 마치 흙을 찌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증토축성의 비결은 석회에 물을 섞어 일종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2012년 필자는 증토축성의 문제를 오랫동안 추적해오던 고대 성곽 전문가인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과 함께 중국 산시성 위린시(섬서성 유림시) 인근에 위치한 통만성 조사에 나섰다. 황량한 오르도스 벌판에 우뚝 솟아 있는 하얀색의 통만성은 정말 장관이었다. 일반적인 토성과 달리 성벽이 흰색을 띠는 이유는 석회가 섞여 있기 때문임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성벽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단단하여 손으로 내려치면 손에 상처가 날 정도였다.
당시 필자는 고대 성곽의 축조기술을 과학적, 공학적으로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었다. 고고학자, 토목공학자, 역사교사, 과학교사와 함께 진행한 학제적 협업 연구 덕분에 역사학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답사에 동참하였던 고등학교 과학교사는 석회를 이용한 축성기술의 발열반응에 주목하여, 귀국하자마자 자신이 지도하던 과학반 학생들과 곧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석회에 물을 부어서 일어나는 화학작용, 석회와 황토의 비율에 따른 강도의 차이를 멋지게 실험으로 증명해낸 것이다.
젊은 과학도들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 가지 실험을 더 하였다. 투명한 아크릴판으로 상자 여러개를 만들고 토목구조물의 통수성을 실험한 것이다. 나무 잎사귀를 전혀 넣지 않고 점토만으로 채워진 아크릴 상자, 잎사귀층과 점토를 교대로 쌓은 아크릴 상자에 같은 조건으로 물을 부으면서 내부에 스며든 물이 어느 정도 배수되는지를 비교한 것이다. 점토로만 쌓은 경우는 그 내부에 스며든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꿀렁꿀렁한 상태에 처하게 된 반면, 나뭇잎을 층층이 넣어준 상자는 그 층을 통하여 배수가 원활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아크릴 상자가 토성의 성벽, 제방의 제체(본체)라고 한다면 구조물의 안전성을 좌우하는 데에 잎사귀층의 존재 여부가 큰 영향을 끼침을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잎사귀층을 부엽층, 그리고 그 공법을 ‘부엽공법’이라고 부른다.
중국 오르도스 통만성 답사를 다녀온 고교의 과학반 학생들이 실험실에서 부엽층을 황토에 넣을 경우 배수가 잘돼 성벽이나 제방이 튼튼해진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권오영 교수
부엽공법은 토성, 제방, 선착장 등의 대규모 토목구조물을 만들 때 발휘된 고대의 최첨단 토목기술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김제 벽골제를 발굴조사할 때 최초로 그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당시에는 부엽공법이란 공법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주목받지 못하였다. 1999년 서울 풍납토성의 성벽 절개조사 과정에서 부엽층이 확인되면서 부엽공법이 다시 주목되었다.
오사카에는 사야마이케(狹山池)라는 거대한 저수지가 있다. 주변의 논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리관개시설인데 그 혜택을 받는 몽리면적이 최대 17.9㎢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이다. 1988년부터 발굴조사가 실시되면서 부엽공법을 발휘하여 제체를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제체의 안팎으로 물을 흐르게 하는 목통도 발견되었는데, 그 벌채 연대가 616년임을 알게 되었다. 조사가 점차 진행되면서 이 제방의 축조가 백제계 기술자들에 의해 진행되었음도 밝혀졌다. 이로부터 10년 뒤 풍납토성 성벽의 조사에서 부엽공법이 확인됨으로써 백제의 기술자들이 일본에 정착하여 수리관개시설의 확충에 종사하였음이 명백해진 것이다. 요도가와(淀川)와 이시카와(石川)라는 큰 강의 범람으로 사람이 살기 어렵던 오사카 일대를 현재와 같이 번화한 곳으로 만든 기초공사는 백제계 기술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 오사카부의 사야마이케박물관은 7세기 초에 축성된 오사카의 저수지인 사야마이케의 제방을 두부처럼 떼 와서 전시하고 있다. 제방에도 부엽층의 흔적이 뚜렷하다. 권오영 교수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약사동(울산) 제방도 부엽공법으로 만들어졌다. 권오영 교수
국가 장벽 넘나든 고대 과학기술자
부엽공법이라면 왕경이란 인물을 빠뜨릴 수 없다. 그의 조상은 원래 중국의 산둥(산동)지방에 거주하다가 낙랑으로 이주하였는데 대대로 과학기술자 집안이었다. 기원후 1세기 초 무렵 왕경은 지금의 안후이(안휘)성 일대인 여강 태수로 복귀하여 작피(芍陂)라는 거대한 제방을 수리하여 수해를 막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작피는 현재 안풍당이라고 불리는데 발굴조사 결과 부엽공법이 발휘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왕경과 풍납토성, 그리고 사야마이케를 통하여 최고의 과학기술자가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넘나들며 활동하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부엽공법은 풍납토성에서 벽골제를 거쳐 가야와 신라, 그리고 일본으로 전래되면서 고대 동북아시아 수리관개시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착취하는 상징물이 아니라 풍요롭고 윤택하게 해주는 농업유산이란 측면에서 안풍당과 벽골제, 그리고 사야마이케를 연속유산의 형태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 중이다.
황남대총과 풍납토성, 벽골제나 의림지 같은 거대 토목구조물 앞에서 증토축성이나 부엽공법 등 성 쌓는 방법이나 그 과학사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강사나 해설사를 만나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고대의 토목구조물은 역사교육의 중요한 소재이면서 동시에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을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이다. 우리의 역사, 문화재 연구와 교육이 인문학적인 범주에만 머물지 않고 과학과 공학의 도움을 받을 경우 종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다. 나아가 한반도를 벗어나 외국의 유사 유적과 비교할 때, 한국 전통 과학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역사 연구와 교육은 문헌에 고고학적 자료를 더하고, 여기에 자연과학과 공학적 분석을 추가하면서, 주변 지역과 비교하여야 함을 말해준다. 이렇게 세월은 바뀌고 있다.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최근 연구 성과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가 주변국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사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18 한겨레
고대 동아시아 잇던 유리구슬을 부수다
②해상 실크로드와 고대 한국
신라·백제 유적지에서 쏟아지는
유리구슬 뿌리 찾아 베트남 답사
고대 해상왕국 부남의 ‘오크에오’
공방 유적지에서 찾은 유리구슬
화학분석 결과 “한반도 출토와 동일”
백제·신라가 왜에 동남아 물품 보낸
고대 기록을 실증적으로 확인해
신라와 백제 무덤에서는 많은 양의 유리구슬이 나오고 있다. 한반도에서 나오는 유리구슬은 대부분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의 활발한 교역을 잘 보여준다. 사진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유리구슬 등 유물들. 권오영 교수 제공
호찌민시를 출발한 지 6시간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목적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6명분의 트렁크를 싣고, 현지 가이드와 기사를 포함하여 총 8명이 탄 차는 너무 좁아서 옆사람의 존재가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교량에 올라 메콩강의 물줄기를 여러 번 건넜지만 또다시 나타난 커다란 물줄기 앞에서 우리 차 기사는 화물선에 올라타기 위한 긴 차량 대열에 합류한다. 저녁식사 시간을 훨씬 넘긴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끼엔장성의 성도인 락자에 도착하여 짐을 풀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답사단은 다시 출발하였다. 한국을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이지만 아직까지 이룬 성과는 아무것도 없다. 답사의 유일한 목적지인 오크에오는 7세기까지 존속하였던 고대 해상왕국 부남(扶南, Punan)의 거점도시 중 하나이며,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 항구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43년 백제의 성왕은 부남의 물자와 생구(노예)를 왜에 보냈고 다음 해에는 인도 북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탄자를 보내주었다. 553년에 왜는 약물을 보내달라고 백제에 요청하는데, 아마도 동남아시아산 약재를 원했던 것 같다. 598년에는 신라가 동남아시아산 공작을 왜에 보내주었다. 641년에는 백제 사신이 동남아시아의 모처에서 온 사신을 물에 빠뜨리는 사고가 일본에서 발생했다. 6~7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진기한 물품을 여러차례 일본에 공급해준 셈이지만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부남에 대한 국내의 정보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어서 “캄보디아에 소재하던 고대 왕국”, “코친차이나에 있던 왕국” 정도의 설명이 전부였다.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 학자들은 오크에오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로마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금화, 불교와 힌두교의 신상, 중국 거울 등이 발견되었고, 이곳이 동양과 서양을 잇는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한 항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적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도 생소하였다.
2015년 1월 유리구슬을 찾아 나선 한국 답사단이 현지에서 우연히 만난 베트남 학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 넷째가 권오영 교수. 최종택(오른쪽 끝) 고려대 교수 제공
바다를 넘어 온 유리구슬
필자의 흥미를 끈 또 하나의 주제는 유리구슬이다. 한반도의 고대 무덤에서는 좁쌀만한 유리구슬이 엄청나게 발견된다. 출토량의 추산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경기도 오산의 한 유적에서만 7만5천점이 발견되었고, 충남 아산의 무덤 1기에서 2281점이 발견될 정도로 많은 양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대의 유리구슬은 수십만점에 이를 것이고, 전체 매장량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유리구슬 중 절대다수는 한반도 외부에서 제작된 뒤 수입된 것이다. 인도-태평양 유리구슬이라고 불리는 이런 부류의 유리구슬은 명칭 그대로 인도와 태평양 일대의 여러 공방에서 제작된 뒤 바다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는데 최근에는 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최대 생산지는 아리카메두 등 인도의 동해안 일대, 말레이반도와 타이, 베트남이며 한반도는 주요 수입국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낙타와 오아시스, 카라반이라고 불리는 대상을 떠올린다. 사막과 오아시스의 길을 통한 동서교섭, 그리고 그 북방에서 이루어진 초원길의 교섭이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엮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이 바닷길이다. 기원 1세기에 그리스 상인이 작성한 에트루리아해 항해기, 중국의 <한서>를 종합해 보면 이미 이 시기에 유럽과 아라비아, 인도와 벵골만,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바닷길이 개통되어 사람과 물자, 정보와 지식이 이동하였다. 벵골만을 거쳐 말레이반도에 도달한 인도 상인과 선원들은 좀 더 안전하고 경비가 적게 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말레이반도를 따라 남하하여 말라카해협을 우회하는 항로가 아니라 좁고 긴 반도가 더욱 잘록해진 끄라 지협(육지가 좁게 형성된 곳)을 이용해 반도의 동해안과 서해안을 육로로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그 결과 끄라 지협의 동과 서에서 수많은 항구도시가 번성하였다. 끄라 지협을 이용하여 중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항구가 오크에오였다. 항로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오크에오는 고대 바닷길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로 부각되었고, 이 항구를 장악한 부남은 해상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오크에오는 당시 최고로 번성한 국제항구이자 유리구슬의 집결지, 그리고 생산지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유리구슬이 한반도로 들어왔을 것이란 가설을 세운 필자는 오크에오 답사를 준비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고고학자 2인, 미술사학자 2인, 그리고 필자의 지도를 받는 대학원생 1인과 필자를 포함한 6인은 2015년 1월 인천공항을 출발하였다.
동남아시아의 고대 해상왕국이었던 부남의 항구도시 오크에오에서 출토된 유리구슬들. 신라와 백제에서 나온 것들과 성분이 같은 것으로 확인됐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
한국-베트남 학자의 공동 발굴
답사 3일째 되는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오크에오에 도착하였지만, 사전 준비와 정보의 부족으로 무엇을 찾고 무엇을 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필자만 믿고 답사에 동행한 단원들의 불만에 초조해진 필자의 눈에 저 멀리 가건물의 지붕이 보였다. 가 보니 벽돌로 만든 고대 건축물의 하부구조를 전시하는 야외전시관이었다. 지붕 아래 건너편 모퉁이에서는 아낙 몇몇이 모여 있었는데, 그중 한명은 선 채로 다른 여성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성공적인 답사를 위한 일념으로 그곳으로 향하니 출토된 토기편을 세척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감독하는 여성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오크에오 유적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이 오크에오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이 왔다. “저는 호찌민대학교의 고고학 전공자입니다. 오크에오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있습니다. 그저께 우리는 이 근처에서 유리구슬을 만들던 공방을 발견하였습니다.” 흥분한 필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할 수 있는지요?” “네. 같이 가시지요.”
그가 안내한 곳은 바나나밭 한가운데였고 울창한 밀림과 잡초, 그리고 물웅덩이로 뒤덮인 곳이었다. 후퇴할 여유가 없던 우리는 지표면을 뒤져서 유리구슬을 찾기로 했다. 과연 10분도 안 되어 알록달록한 유리구슬 8점과 푸른색 유리 파편 1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방안지에 유리구슬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대던 필자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 말을 이었다. “이 구슬을 한국에 가져가서 과학적 분석을 하고 공동으로 논문을 씁시다.” “네. 좋습니다.” 필자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공주대학교의 김규호 교수에게 즉시 전화를 걸었다. “오크에오에서 유리구슬 샘플을 확보했습니다. 분석해주실 거지요? 물론 공짜로요.” “네. 좋습니다.” 오크에오 유적 관리를 책임진 현지 공무원의 허가증을 받고 반출된 작은 유리편 9점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주대학교에 유물을 보낸 지 며칠 뒤. “권 교수님, 어떡하죠? 제대로 분석하려면 유리구슬을 부수어서 가루로 내야 하겠는데요?” 남의 나라 유물을 가루로 만들 수는 없기에 포기하려고 했지만 결국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피치 못하게 유리를 파괴해야 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곧 답신이 도착하였다.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2015년 1월 오크에오 유리구슬 공방 유적지에서 한국 답사단이 찾은 유리구슬. 베트남 당국의 허가를 얻어 한국으로 가져온 뒤 화학적 분석 결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과 성분이 같음을 알아냈다. 권오영 교수 제공
베트남 오크에오 유적지에서 가져온 유리구슬의 형태적 특징. 권오영 교수 제공
모든 유리는 주제(산화규소, 즉 실리카(SiO₂)가 주성분), 융제(용융점을 낮추기 위해 첨가되는 물질), 안정제, 착색제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유리에서 주제는 큰 차이가 없으나 융제, 안정제, 착색제의 화학조성은 원료의 산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신라 고분에서 자주 발견되는 유리 용기는 형태만으로 로만 글라스인지 사산조 페르시아 글라스인지 구분할 수 있으나, 작은 유리구슬 연구는 화학적인 분석 없이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발견된 인도 태평양 유리구슬 중 가장 많은 부류는 안정제로서 산화알루미늄(Al₂O₃)의 비율이 5%를 넘고, 산화칼슘(CaO)의 비율은 그 이하인 고(高)알루미나 소다유리이다. 특히 백제고분에서 발견된 유리구슬은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한다.
분석 결과, 오크에오에서 채집한 유리구슬의 성분은 이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한번의 분석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으나 동일한 화학조성이 의미하는 바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출토되는 인도-태평양 유리구슬이 오크에오에서 제작되었거나 아니면 제3의 장소에서 제작된 뒤 오크에오와 한반도, 일본열도에 공급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 성왕이 일본에 보낸 물품 중에 유리구슬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음은 물론이고, 고대의 한반도가 섬처럼 고립된 곳이 아니라 바닷길을 통하여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라비아와 연결되었음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중국 동해안까지 연결된 바닷길이 백제와 신라인들의 해상활동에 의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확장된 점이 밝혀짐으로써, 훗날 등장할 장보고의 해상활동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 뒤 베트남의 학자(응우옌티하)와 수차례의 논의와 상호 방문을 거친 결과 오크에오 유적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다. 올해 12월26일부터 한국과 베트남 공동조사단이 1개월간 발굴조사를 하기로 전격 합의한 것이다. 국내의 문화재 조사 기관(대한문화재연구원)과 호찌민대학교, 오크에오 유적관리소, 서울대학교가 함께하기로 했다. 유라시아 동서교섭의 상징적인 유적을 우리 손으로 직접 조사하게 된 것이다.
현재도 사용되는 오크에오 주변의 운하. 권오영 교수 제공
오크에오를 넘어 말레이반도로
2016년 1월 필자는 낭아수국(狼牙脩國·랑카수카) 조사단을 조직하여 말레이반도 답사에 나섰다. 중국 양나라의 천재 화가 소역(훗날의 원제)이 자국에 온 세계 각지의 사신들을 그리고 기록한 <양직공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과 함께 낭아수국의 사신이 등장한다. 낭아수국은 말레이반도에 소재한 해상왕국이지만 국내에서 더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1년 전의 오크에오 답사와 동일한 난항(조직 구성, 경비 조달, 답사지역 결정)을 딛고, 답사단은 싱가포르와 페낭섬을 경유하여 말레이반도 서안의 숭아이바투로 향하였다. 최근 이곳에서 말레이시아 고고학 최고의 발견이 이루어졌다는 막연한 정보만 지닌 상태였다.
답사 4일째 되는 날, 드디어 숭아이바투에 도착하였지만 막막할 뿐이었다. 밀림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달리던 필자의 눈에 우연히 간판 하나가 지나쳤다. 로마자를 이용하여 말레이시아어를 표기하였는데 숭아이바투, 고고학 등의 의미인 것 같았다. 차를 돌려 접근하였다. 철망 사이로 히잡을 쓴 여성 한명이 보였다.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숭아이바투 유적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이 숭아이바투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이 왔다. “저는 말레이시아 과학대학의 고고학 전공자입니다. 숭아이바투 유적을 발굴조사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전공은 인도-태평양 유리구슬입니다.” 1년 전 오크에오의 데자뷔였다.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에 웅크린 외톨이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여러 이웃을 둔 해상실크로드의 일원이었음을 밝히려는 큰 그림의 한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18.12.2
사람얼굴 막새기와 백제와 고대 베트남을 잇다
③고대 해상실크로드 중심 다낭
다낭 지역의 고대국가 참파
풍납토성과 같은 기와 출토
중국 동진·동오도 동일 문양
한반도 서남부의 대형 옹관묘
베트남 중부·중국 광둥·광시성
일본 규슈지역에서 동시 유행
포타시유리도 같은 지역 퍼져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교류 증명
옹관에 시신을 매장하는 문화는 고대 베트남 중부지역과 중국 남부, 한반도 서남부, 일본 규슈지역에 퍼져 있었다. 중국과 베트남은 옹관을 세워서 사용했다. 사진은 참족의 유적에서 나온 옹관을 호이안의 사후인문화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모습. 권오영 교수
영산강 유역에서 나온 대형 옹관을 발굴 당시의 모습대로 전시하고 있다. 전남 나주박물관. 권오영 교수
2018년 1월27일 오전 베트남 호이안의 한 호텔에서 잠을 깼다. 이른 아침부터 호텔 안팎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23살 이하 챔피언십 결승전인 우즈베키스탄과 베트남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와 대형 텔레비전이 설치된 카페 앞으로 모여들었다. 붉은 옷에 국기를 몸에 감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기가 벌어진 중국 장쑤(江蘇)성은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 따뜻한 곳이지만, 이날은 웬일인지 폭설 탓에 경기장 상태가 엉망이었다. 평생 이런 눈을 처음 보았을 베트남 선수들에게 미끄러운 운동장과 추위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경기는 막상막하였고, 필자도 어느덧 베트남 시민들과 한데 어울려 “베트남 꼬렌(파이팅)!!! 박항세오(박항서의 베트남식 발음)!!!”라고 외치고 있었다. 연장 후반 막판에 한 골을 먹으면서 안타깝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베트남 시민들의 얼굴은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오히려 필자가 더 큰 아쉬움을 삼키며 답사를 속행하였다.
중·베트남 세우고, 한반도는 눕힌 옹관
2011년의 통계를 보면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남성과 혼인하여 귀화한 전체 여성 중 중국과 베트남 출신이 각각 34%로 두 나라를 합하면 68%라는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다. 중국 출신 여성 중에는 우리 동포(조선족)와 한족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실상은 베트남 출신 여성의 비율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인을 파병한 나라는 대한민국이었다. 희생자 역시 미군 다음으로 많아서 5천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베트남은 대한민국이 두번째로 수출을 많이 한 국가이자, 국내 최대 기업의 휴대폰 생산기지이다. 지난달에는 이 기업의 대표가 베트남을 방문하여 베트남 총리와 함께 대규모 투자계획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베트남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정보, 특히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는 매우 낮은 수준이다. 여기에는 역사학계의 책임도 크다. 현행 고등학교 교과목 중에는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이 있는데, 그 교과서의 내용은 대부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만 집중할 뿐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서술은 매우 인색하다. 현재 대학교에서 베트남의 역사를 교육하고 연구하는 교수는 2~3명 정도에 불과한데, 그나마 모두 근현대사 전공일 뿐 고대사나 고고학 전공자는 한명도 없다. 베트남에 대한 우리 역사학계의 관심은 베트남전을 둘러싼 현대사를 제외하면 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세기 후반 다이비엣(大越)국 리(李)왕조의 리롱뜨엉(李龍祥) 왕자가 고려로 망명하여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사실이 추가된 정도다. 하노이를 방문한다면 다이비엣 역대 왕조의 왕성이자 리롱뜨엉이 출생하였다고 전해지는,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한 탕롱(昇龍)성을 방문해볼 만하지 않은가?
“다낭과 호이안 일대의 베트남 중부에서는 참파(Champa), 혹은 임읍(林邑)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였다. 함안 2년(372) 정월에 백제와 임읍의 왕이 각기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해 6월에 백제왕 여구(근초고왕)를 진동장군영낙랑태수에 봉하였다.”
일본 규슈 지역의 옹관 모습. 비스듬하게 묻은 게 특징이다. 권오영 교수
백제가 중국의 동진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체결한 이 사건은 한국 고대사에서는 상식 중의 상식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임읍에 대해 궁금증을 갖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기원전 111년, 한나라 무제가 베트남 북부에 설치한 3개의 군(이른바 교지삼군) 중 가장 남쪽에 있던 일남군의 외곽에서는 사후인(Sa Huynh: 기원전 6세기~기원후 2세기 사이에 번성한 금속문명) 문화를 기반으로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일파인 참(Cham)족이 성장하고 있었다. 베트남 중부에서 발전한 사후인 문화는 청동기와 철기 등 금속기의 사용, 대형 옹관의 존재, 작은 유리구슬로 구성된 장신구의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대형 옹관은 베트남 중부-중국 광시(廣西)성과 광둥(廣東)성-한반도 서남부-일본 규슈(九州) 북부를 무대로 발전하였다. 베트남과 중국의 옹관이 곧바로 세워두는 방식인 데 비하여 한반도는 눕히고, 규슈는 비스듬히 두는 방식이다. 옹관의 형태도 같지는 않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신을 대형 항아리에 모신다는 관념은 동일하다. 공교롭게도 이들 옹관묘의 분포 범위를 따라 포타시(Potash) 유리가 퍼져나갔다. 포타시 유리는 융제로서 포타시(칼리: 칼륨화합물)를 사용하여서, 고(高)알루미나 소다 유리와 화학조성이 다른 부류이다. 기원후 3세기 이후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대유행한 고알루미나 소다 유리가 부남이란 해상왕국과 관련이 있다면, 그 이전에 유행한 포타시 유리는 사후인 문화, 옹관묘 분포권과 관련되어 있다.
참파산 침목이 백제 거쳐 일본으로
사람 얼굴을 조각한 수막새도 옛 베트남 지역에 있던 참파, 한반도의 백제, 중국의 동진·동오 유적지에서 나오고 있다. 사진은 참파의 왕성이었던 짜끼에우에서 나온 수막새들. 권오영 교수
중국 난징에 있는 육조박물관의 인면 수막새기와. 권오영 교수
백제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인면 조각의 수막새 조각. 권오영 교수
참족(짬족)은 마침내 기원후 2세기 말 건국에 성공하는데 이것이 임읍, 즉 참파(짬파)이다. 참파는 남쪽의 부남과 경쟁하면서 마침내 372년 동진과 정식 국교를 맺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참파의 왕성은 현재 다낭시 외곽에 있는 짜끼에우(Tra Kieu) 유적이고, 종교적 성지는 미선(My Son) 사원, 무역항은 호이안(Hoi An)이다.
짜끼에우성은 평지에 축조된 장방형의 성인데, 중국과 인도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어서 해상무역으로 번성한 참파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수막새기와가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그 원형은 육조(동오, 동진, 송, 제, 양, 진)의 도성이었던 건강성(현재의 장쑤성 난징)에 있다. 건강성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얼굴을 표현한 동오-동진 대의 수막새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동북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백제 왕성인 풍납토성에서 그 영향을 받은 수막새기와가 발견되었다. 참파와 백제의 왕성에서 육조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 동시에 출현한 것이다.
미선 유적은 7~13세기 무렵에 축조된 40기 정도의 힌두교, 불교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는 베트남 전쟁 중에 미군의 공습에 의해 파괴된 사원도 있는데, 전쟁이 끝난 뒤 복구작업 중 불발탄이 폭발하여 희생자가 발생하는 비극도 있었다. 미선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미선 유적을 조사한 프랑스 학자들은 사원을 장식하던 수많은 조각상들을 떼어서 다낭 시내의 참(Cham)조각박물관에 보관, 전시하였다. 그중 압사라(Apsara: 힌두교식 신화에서 등장하는 물의 요정)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참파와 고대 한국은 서로 접촉이 없었을까. 372년 동진에서 양국의 사신은 서로 조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파와 동북아시아의 관계는 그 뒤에도 지속된다. 595년 일본 오사카 앞바다의 아와지섬(淡路島)에 침목이 표류하다가 도착하였다. 침목은 고급 목재와 향목으로 사용되었는데 참파가 주요 생산지이다. 이 침목은 백제를 경유하여 일본열도에 유통되던 물품으로 추정된다. 침목은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귀한 목재로 취급되었는데, 역시 참파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641년 일본에서 백제 사신과 분쟁을 겪었던 곤륜(崑崙) 사신도 참파의 사신일 가능성이 높다. 736년에는 참파 출신의 승려 불철(佛哲, 佛徹)이 나라(奈良)의 다이안지(大安寺)에 거주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범어와 임읍악(참파 음악)을 전해 주었다.
현재는 베트남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참족 남성의 모습. 베트남 민족학박물관. 권오영 교수
참파는 8세기 후반~9세기 전반에는 환왕(環王), 9세기 후반 이후에는 점성(占城)이라 불렸다. 점성은 바다를 통해 이슬람 세계와 연결되었으며, 중국의 무역 도자를 중개하였다. 호이안의 각종 박물관에는 그 흔적이 전시되어 있으며,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거주하던 시가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과연 고려와 조선의 상인들은 호이안을 방문하였을까? 혹시 그들의 활동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못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젊은 세대가 다낭과 호이안을 방문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파는 10세기 이후에 베트남 북부의 다이비엣, 캄보디아의 진랍(眞臘: 크메르)과 치열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캄보디아 시엠립의 앙코르와트에는 수리야바르만 2세와 전투를 벌이는 적군으로서 참파 군대가 묘사되어 있다. 참파는 영토와 중심지의 변화를 겪었지만 쉽게 망하지 않고 1832년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우리와 너무 비슷한 베트남 역사
A는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유사 이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으며 한편으로는 문화적 영향도 많이 받았다. 13세기에는 몽골군의 침략을 받는 큰 위기를 받았으나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쌀을 주식으로 하며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중국 세력의 팽창으로 인해 점차 영토를 상실하고 현재는 반도로 밀려났으나, 한때는 현재 중국 영토의 일부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 땅에 있는 고대의 영토에 대해 고토란 의식을 지니고 있고, 중국과 역사분쟁, 영토분쟁을 겪고 있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자존심이 강하며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다. 근대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해방되었으나 곧 남과 북이 분단되어 내전을 겪기도 하였다. 당시 전쟁의 참상과 양민학살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A는 어느 나라인가? 대한민국이기도 하고 베트남이기도 하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이렇듯 유사하다는 사실이 인정된다면, 한국사 연구에서 베트남에 대한 비교 연구가 필수적이지 않을까? 아직도 한국 고대의 대외관계사는 한-중 관계, 한-일 관계가 전부이고, 근대 이후에야 그 범위가 확대된다고 믿는 역사학자가 많다. 최근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장을 발판으로 우리의 활동무대가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역사 속의 우리 이웃이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일대일로로 상징되는 중국의 팽창주의적 국제 전략을 모방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방식은 유라시아 각지에 분포하는 다양한 우리의 이웃들과 상호 존중과 신뢰를 토대로 서로 발전하는 길이다. 그 첫번째 대상이 베트남임을 우리의 역사와 현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에 대한 깊은 이해는 대한민국이 정치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의 돌풍은 현재도 진행형이지 않은가! 박항세오!!! 베트남 꼬렌!!! 18.12.15
백제 땅 함평서 나온 토기에 왜 백인 얼굴이?
④고대 다문화사회
고대 한반도에 외국인 정착 많아
경주엔 아랍인, 함평엔 백인 흔적
남해안 야요이계 토기·왜계 고분은
일본인들도 많이 거주했다는 증거
순수한 단일민족이란 주장은 허구
민족 있은 뒤 역사 진행된 게 아니라
역사 진전되면서 한민족도 형성돼
전남 함평의 백제시대 마을 유적지에서 나온 토기에는 큰 코에 주걱턱을 가진 승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백인 계통의 승려로 추정된다. 권오영 교수 제공
기원전 109년 위만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한의 대군이 출진하였다. 해군 총사령관 격인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넜다. 그는 3년 전에도 누선장군으로서 해군을 지휘하여, 육군인 복파장군 노박덕(路博德)과 함께 남월국(현재의 중국 광둥성, 광시성, 베트남 북부에 해당)을 공격하였다. 기원전 112년에 시작된 침략전쟁은 기원전 111년에 남월국의 멸망으로 종료되고, 그 땅에는 훗날 영남칠군이라 불리는 7개의 군이 설치되면서 한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누선장군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복파장군과의 경쟁 과정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 무제의 큰 책망을 받은 터였다. 게다가 산둥(산동)반도를 출발할 때 5만명에 이르던 수군은 중도에 대부분 도주하여 7천명밖에 남지 않았다. 왕검성 공방 과정에서 또다시 육군 사령관 좌장군 순체와 알력이 생겨 누선장군은 죄인 신분으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남월국과 위만조선은 쌍둥이 운명
한의 동방에 위치한 위만조선과 남방에 위치한 남월국은 역사의 시작과 종말이 쌍둥이와 같은 동일운명체였다. 한의 지방관리였던 조타(趙?)가 재지인(현지인)들과 힘을 합쳐 남월국을 세운 것이 기원전 203년, 역시 한의 지방관리로 기록된 위만이 재지인들과 힘을 합쳐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이 기원전 194년이었다. 한과의 사이에서 우호적인 관계와 적대적인 관계가 교차되면서, 결국 한 무제의 대군에 의해 왕성이 함락되고 군현이 설치된 것도 동일하다. 침략의 선봉에 선 누선장군도 동일한 인물이었고, 그의 운명마저 동일하였다.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위만조선의 역사는 가장 연구가 미흡한 분야이다. 그렇다면 남월국을 통해 위만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유추할 수는 없을까? 중국 광둥(광동)성 광저우(광주)시에서 발견된 남월국의 왕궁과 정원, 관청, 왕릉은 ‘남월국의 유적’이란 명칭으로 2008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 등재된 상태이다. 현지에 보존된 남월국 궁궐과 관청의 위용을 보면서 아직 찾지 못한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그려본다.
베트남의 뿌리인 남월국은 고대 중국에 항거하다가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멸망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대국가인 위만조선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갔다. 현재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에 있는 남월국의 궁궐과 관청 터. 권오영 교수 제공
중국 한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기 전 남월왕이었던 조말의 무덤에서 나온 옥의. 권오영 교수 제공
위만의 손자이자 위만조선 마지막 왕인 우거왕의 무덤은 소재불명이지만, 조타의 손자이면서 남월국 2대 왕인 조말(趙?)의 무덤은 이미 발견되었다. 잘 다듬은 돌로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에서는 옥의(玉衣)를 입은 남월왕의 시신이 많은 부장품과 함께 발견되었다. ‘문제지새’(文帝之璽)라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도 발견되었다. 문제의 ‘제’(帝)는 황제를 의미하며, ‘새’(璽)는 황제의 도장을 뜻한다. 문헌기록에는 남월국이 한의 외신(外臣)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남월왕릉의 발견으로 인해,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이른바 ‘외왕내제’(外王內帝)의 국가였음이 밝혀졌다. 우리 역사에서 발해와 고려가 ‘외왕내제’를 표방하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남월국의 사례를 통해 위만조선도 ‘외왕내제’의 국가체제였을 가능성을 그려본다.
남월 문제의 무덤에 대한 중국의 공식 명칭은 ‘서한남월왕묘’(西漢南越王墓)이다. 서한의 외신이었던 남월왕, 그것도 왕릉이 아니라 왕묘로 격하되어 있다. 이는 남월국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사의 귀속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갈등을 연상시킨다. 남월국의 영토는 현재 중국과 베트남에 걸쳐 있었으며, 월남이란 국명이 남월에서 유래하였음을 고려한다면 그 역사의 귀속에서 현재의 베트남을 빼는 것은 곤란하다.
남월국의 고토에 세워진 7개의 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성이던 광둥성 광저우시에 세워진 남해군, 광시(광서)성 베이하이(북해)시의 합포군, 그리고 베트남 하노이의 교지군이다. 위만조선의 고토에 세워진 4군을 놓고서는 위치와 성격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남월국을 통해 위만조선을 보듯이, 영남칠군을 통해 한사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교지-합포-남해-낙랑-김해-북부 규슈로 이어지는 경로는 고대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의 간선이다. 이 길을 통하여 동남아시아의 물품이 동북아시아에 유통되었다.
내년 1월4일이면 베트남 하노이의 루이라우 토성 발굴조사단이 출국한다. 이 성은 교지군의 유력한 후보이다. 낙랑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하여 이 유적을 주목하던 필자는 마침내 고려대학교 문화유산융합연구소, 가경고고학연구소와 함께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15년간 진행될 장기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 학계의 시각은 훨씬 넓어질 것이며, 조사에 참여하는 젊은 학문후속세대의 앞으로의 활동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경주 구정동 방형분(네모무덤)에 있던 부조. 터번을 두르고 폴로 채를 든 서역인이 조각돼 있다. 권오영 교수 제공
신라 원성왕릉일 가능성이 큰 경주 괘릉의 무인상. 터번을 두르고 수염이 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권오영 교수 제공
항시와 항시국가
남월국과 교지군, 합포군, 남해군, 임읍(참파), 부남(푸난), 낭아수(랑카수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해상교역이다. 남월왕릉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베트남, 인도, 파르티아(현재의 이라크와 이란)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섞여 있다. 교지군과 합포군, 남해군은 모두 항시(항만도시, 항구도시)에 해당되며, 임읍과 부남, 낭아수는 항시가 발전한 항시국가이다. 항시와 항시를 연결하는 해로를 통해 유럽과 아랍,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중국과 연결되었다.
우리는 흔히 백제와 가야에 대해 해상왕국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해상교역은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항로 위에서 번성한 항시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에는 크고 작은 포구가 있다. 사천의 늑도는 작은 섬이지만 섬 전체에 걸쳐 낙랑, 제주도, 일본의 유물이 발견되어 이곳이 해상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나주, 가야의 김해, 일본의 쓰시마(對馬), 이키(壹岐), 후쿠오카(福岡)와 가라쓰(唐津)도 대표적인 항시였다. 백제와 가야의 국가적 성격을 항시국가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동남아시아의 항시와 항시국가에 대한 이해가 백제사와 가야사 연구를 더욱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고대 해상실크로드의 복원을 위해서도 동남아시아 항시와 항시국가 연구는 필수적이다.
경남 사천의 늑도에서 나온 일본 야요이계통의 토기. 늑도는 낙랑과 제주, 일본 물건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이곳이 고대 해상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권오영 교수 제공
그런데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해는 다문화사회로 급속히 진입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웃과 공존하는 방법,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비 방안을 알려준다.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물들이 한국 사회에 들어와 정착하는 사건은 고대에도 비일비재하였다. 김해와 부산의 고대 마을 유적에서는 야요이계 토기가 다량 출토되어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알게 해주는 경우가 많다. 남해안에 점점이 분포하는 왜계 고분은 해상활동에 종사하던 왜인 중 일부가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여 묻힌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의 취락인 함평의 한 마을 유적에서는 승려의 얼굴을 그린 토기가 한 점 출토되었다. 삭발한 머리, 큰 코에 주걱턱을 한 이 인물은 승려, 그리고 백인종이었음에 틀림없다.
중국-한반도-일본열도를 오가며 정치외교적인 업무나 교역에 종사하던 인물 중에는 출생한 지역과 자신이 복무하는 대상이 다른 경우가 흔하였고 부모의 국적이 다른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고구려 사회에는 수많은 말갈인과 돌궐인이 고구려 국민으로 존재하였으며, 중국의 격변기에 난을 피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도 많았다. 통일신라 왕릉 앞에는 서역인의 모습을 묘사한 무인석이 서 있고, 경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흙인형(토용) 중에는 서역인의 복식과 얼굴을 한 경우도 있다. 한창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경주 월성에서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을 무대로 동서교역에 종사하던 소그드인의 복장을 한 작은 흙인형(토우)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고대의 한국이 이미 다문화사회를 경험하였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한국사의 시작부터 한민족이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서 민족사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며 한민족이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주장도 허구이다. 민족이 먼저 출현하고 역사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역사가 진행되면서 현재의 한민족이 형성되었다. 민족은 역사의 산물이고 현재도 미래에도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는 평창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던 남자 아이스하키팀의 백인 선수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나고 자랐으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택하였다. 반대로 국민적 영웅인 쇼트트랙 선수가 러시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하는 모습도 이미 보았다. 국민과 민족이 반드시 동일한 실체가 아니란 점, 민족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만 인정한다면 한국인의 인종적 스펙트럼이 다양해지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순수하고 단일한 우리민족”의 역사가 이웃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점철된 항쟁의 역사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이웃에 대한 경계와 적대감은 극대화된다. 단지 어머니의 국적이 대한민국이 아니고, 생김새가 약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친구 사이가 파탄나는 요즘 현실을 보면, 민족의 순수성과 단일성을 강조하였던 한국 고대사 교육의 현재를 반성하게 된다.
예로부터 해상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는 인도와 아랍, 중국 상인 등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 이들 외지 상인들은 현지 사람들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으며, 페라나칸이라고 불리는 그 후손들은 오늘날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독특한 다문화사회의 바탕이 되고 있다. 교역을 위해 말라카를 방문한 중국 상인들의 모습이 말라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권오영 교수 제공
싱가포르는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공존하는 다문화사회다. 싱가포르 페라나칸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페라나칸 혼혈인의 다양한 얼굴들. 권오영 교수 제공
공존의 페라나칸 문화
이 점에서 다양한 인종의 혼혈과 문화의 접촉을 일찍부터 경험한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동남아시아의 고대 항시국가들은 교역을 위해 내방한 인도 상인과 재지인의 결합을 통해 발전하였다. 인도 상인의 역할은 훗날 중국, 일본, 타이, 유럽인들이 대신하였다. 외지의 남성과 현지의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일컫는 페라나칸(Peranakan·프라나칸)은 말레이어로서 “현지에서 태어난 아이”란 뜻이다. 처음에는 다양한 외국인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모든 혼혈인을 의미하였으나, 15세기 이후 중국 남부의 남성 노동자들이 동서 교섭의 최대 거점인 말라카(믈라카)로 몰려들면서 중국계 페라나칸의 수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인도계, 중국계와 함께 페라나칸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각자의 고유한 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페라나칸 남성은 바바(Baba), 여성은 논야(Nonya)라고 부른다.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피낭,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맛볼 수 있는 논야 요리는 중국과 말레이의 음식문화가 결합되어 탄생한 새로운 음식문화이다. 페라나칸 문화는 주방용 도자기, 지갑과 신발 등의 장신구, 복식 등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휘하면서 동남아시아 문화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상징하고, 문화상품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고대 한반도에도 중국계, 일본계, 북아시아계, 중앙아시아계 페라나칸이 존재하였고, 현재는 동남아시아계 페라나칸이 급증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기회를 주지 않고, 한국 문화에 동화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다문화사회를 경험한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보면서,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문화가 절묘하게 버무려진 한국판 페라나칸 문화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이웃에 대한 폐쇄적 마음을 버리고 사회 구성원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한국 고대사 연구와 교육이 절실한 때이다. 18.12.30
신라 황금유물의 계보는 중앙아시아
⑤사카와 오손의 땅으로
톈산산맥 일대 유목문화지역의
기원전 6세기 대형고분 쿠르간
기원후 5세기 신라 고분과 유사
키르기스 훈 무덤의 황금 마스크
나뭇가지 무늬는 신라 것과 동일
카자흐스탄에서 나온 훈 보검은
경주 계림로 출토품과 쌍둥이
카자흐스탄에 있는 사카 시기의 대형 고분. 신라에 비해 대략 800~900년 정도 빠르지만, 크기나 내부 구조가 신라 것과 유사하다. 권오영 교수 제공
지난번 연재(④고대 다문화사회―백제 땅 함평의 토기에 그려진 백인 얼굴)에서 다루었듯이 고조선과 남월국은 거의 같은 시기에 한의 동방과 남방에서 발전하던 고대국가였다.
기원전 3세기로 시점을 고정시키고,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 서북에 걸쳐 있던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면 우선 흉노가 나타난다. 흉노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돌아가면 월지, 오손, 강거가 등장하는데,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땅이 이들의 활동무대였다. 계속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현재의 티베트로 가면 강(羌), 윈난(운남)성으로 가면 전(?), 구이저우(귀주)성으로 가면 야랑(夜郞), 광둥(광동)성으로 가면 남월, 푸젠(복건)성으로 가면 민월(?越)이 나타난다. 이렇게 수많은 세력이 한을 둘러싸고 때로는 평화적으로, 때로는 긴장 속에서 복잡한 상호 관계를 맺어 나갔다. 한국사를 동북아시아의 범주에 가두면 당시의 역사는 한나라와 고조선의 관계만으로 축소되며 이렇게 다양한 집단의 움직임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유라시아적인 시각에서 한국사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2천㎞를 달려 카자흐스탄 남부와 키르기스스탄으로 뻗어내린 톈산(천산)산맥은 만년설로 뒤덮인 높은 산, 깊은 계곡, 수많은 강과 연못을 형성하였다. 제티수, 혹은 세미레치예라고 불리는 톈산산맥 일대는 목축과 농업에 유리한 혜택받은 땅이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과 중국, 그리고 키르기스스탄으로 나뉘어 있으나 고대에는 국경선 없이, 사카(Saka), 오손(Wusun, 우순), 훈(Hun)과 투르크(Turk)가 차례로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 사카는 기원전 8~7세기부터, 오손은 기원전 4세기부터, 훈은 기원전 1세기부터 이곳에 등장하여 선행 종족을 교체하였고, 투르크족은 5세기 이후 현재까지 이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
고조선 시기 유라시아의 각 민족 및 나라의 배치도. 김호동 교수의 2016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의 도면에 가필. 권오영 교수 제공
별이 된 초원 연구의 영웅들
사카는 스키타이와 유사한 기마민족으로서 인종적으로는 이란 계통의 백인과 황인종이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오손의 인종적인 실체는 분명치 않은데 초기에는 사카, 후기에는 훈과 공존하다가 5세기 전반이 되면 역사에서 사라진다. 훈은 러시아와 서양 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인데, 좁은 의미로는 흉노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집단, 넓은 의미로는 3~5세기 유라시아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기마민에 대한 통칭이다. 사카와 오손의 전성기는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과 시간적으로 평행하고, 훈과 투르크는 삼국시대에 해당된다.
이들이 발전시킨 황금문화는 한국 고대사와 무관하지 않다. 사카족의 쿠르간(유라시아에 분포하는 대형 무덤)은 시신을 안치한 목관을 통나무로 결구한 덧널(목곽)로 감싸고, 다시 그 위에 강돌을 덮은 뒤에 흙으로 밀봉하는 구조이다. 4~6세기에 신라의 왕릉으로 채택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흡사하다. 훈의 금제 장신구나 무기에는 보석을 박아 넣는 감옥기법, 작은 금알갱이를 붙이는 누금기법이 특징인데, 역시 신라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이런 까닭에 많은 연구자들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러시아 남부에 널리 분포하는 쿠르간과 황금문화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필자 역시 유라시아의 황금문화에 주목하였으나 막상 접근할 방법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수소문 끝에 2012년 가을, 드디어 중앙유라시아 전문가인 장준희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유학한 장 박사를 만난 필자는 비로소 학문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으며, 우리 둘은 오랜 친구처럼 의기투합하였다. 마침내 2013년 1월에 대규모 답사단을 꾸려서 제티수로 떠났다. 60대의 노학자부터 20대의 젊은 학생을 망라한 답사단은 톈산산맥의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중요 유적을 밟아나갔다. 키르기스스탄의 촐폰아타 암각화, 이식쿨 호수 주변의 사카 쿠르간, 정략결혼으로 오손의 왕에게 시집간 한나라 공주의 비극이 서려 있는 적곡성, 웅장함과 부유함으로 삼장법사 현장을 놀라게 했던 서돌궐의 쇄엽성, 부라나의 미나레트(이슬람식 탑)까지 선사에서 중세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을 보면서 답사단은 탄성을 연발하였다.
최대의 성과는 누르무한베토프 박사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소비에트 시절에 알마티시 인근의 이식지역(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와는 별개의 지역임)에서 사카 왕자의 무덤을 발굴조사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고고학자이다. 황금인간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무덤을 발굴한 이후에도 여전히 발굴 현장을 지키면서 학계의 원로로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장 박사와 친분이 깊던 누르무한베토프 박사는 우리 답사단을 오랜 친구처럼 살갑게 맞아주었고, 이식 쿠르간 박물관장이자 자신의 제자인 굴미라 여사에게 양국의 상호 협력을 당부하였다. 답사단은 이식 쿠르간 박물관과 사카 시기 쿠르간을 공동조사하기로 정식 협약을 맺었다.
예상치도 못한 뜻밖의 성과를 안고 귀국한 장 박사와 필자는 제티수 답사 성과를 함께 소개하였다(<한겨레> 2013년 2월18일치). 그런데 한창나이인 장 박사가 갑자기 지병으로 타계하면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충격을 가라앉힐 시간을 보내고 2015년 봄, 이식 박물관을 다시 방문하였다. 누르무한베토프 박사는 장 박사의 부재를 애통해하면서도 우리를 따뜻이 대해주었고, 양국의 공동조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거듭 약속하였다.
황금인간이 출토된 카자흐스탄 사카 시기 쿠르간(대형 무덤)의 모형. 권오영 교수 제공
카자흐스탄의 국보인 황금인간. 사카 시기의 왕자 무덤에서 나온 황금옷과 머리 관을 복원한 모습. 권오영 교수 제공
황금인간이 된 사카 왕자
다시 용기를 얻은 필자는 귀국 후, 주변의 연구자들과 함께 ‘유라시아유적발굴조사단’(단장 조상기)을 결성하였고, 이 조직의 카자흐스탄팀(마한문화연구원, 대한문화재연구원 주축)은 마침내 2016년 6월11일 알마티시 인근의 오르닉 쿠르간 조사에 착수하였다. 한국팀을 반갑게 맞이한 누르무한베토프 박사는 공동조사의 성사를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면서 환영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배낭을 머리맡에 챙긴 뒤 잠자리에 든 박사는 편안히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양국 발굴단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고인의 뜻을 받들어 발굴조사를 예정대로 진행하였다. 공동조사의 두 주역은 비록 고인이 되었으나, 그 유지를 받들어 2018년까지 사카 쿠르간에 대한 조사는 지속되었다. 국적은 다르지만 양국의 우호협력과 공동조사의 초석을 놓으신 초원의 영웅, 두 분의 명복을 빈다.
이식 유적은 지름 20~120m에 이르는 쿠르간 150기로 구성되어 있다. 경주에서 작은 고분이 지름 20m, 단독분으로 가장 큰 봉황대고분이 지름 82m, 두 기가 합쳐져서 가장 크게 된 황남대총의 길이가 120m란 사실과 비교된다. 경주평야에서 지상에 봉분이 남아 있는 것이 158기란 점도 우연이지만 비슷하다. 따라서 이식 쿠르간과 경주 고분군은 매우 흡사한 경관을 보이고 있다.
1969년에 이식 유적의 동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중형급 쿠르간의 조사가 진행되었다. 봉토를 걷어내고 중앙에 있는 목곽을 조사하니 이미 오래전에 깡그리 도굴당한 상태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남쪽에서 전혀 도굴되지 않은 또 하나의 목곽이 발견되었다. 목곽 내부에는 키 165㎝, 연령 15~18살 정도 되는 남성이 묻혀 있었는데 모자와 상의, 허리띠와 신발은 온통 순금제 장식으로 뒤덮여 있었고, 허리춤에는 금으로 장식한 철제 단검을 차고 있었다. 모자의 높이가 무려 60㎝가 넘을 정도로 길고 뾰족하였는데, 이런 모자야말로 스키타이와 사카 등 유목기마민족의 상징이다. 이란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유적에서도 뾰족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사카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황금인간’이라고 명명된 이 왕자는 카자흐스탄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신라 왕족=북방유목민’ 단정 말고
유라시아로 역사 시야 넓혀야
카자흐스탄과 한국팀이 2017년 공동 발굴조사한 라하트 쿠르간. 대한문화재연구원 제공
한국과 카자흐스탄이 공동 발굴조사한 라하트 쿠르간. 권오영 교수 제공
무덤의 구조와 황금문화라는 공통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신라 왕릉이 떠오른다. 문제는 황금인간의 연대는 기원전 6~5세기 무렵이어서, 기원후 5세기에 전성기를 맞는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카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오손과 훈의 무덤에 관심을 갖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오손의 쿠르간은 사카 쿠르간보다 규모가 작고 부장품이 적어서 현지 학자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였고 비교할 만한 자료도 드물었다. 반면 훈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신라의 금제품과 비교할 만한 것이 많았다. 당나라 이태백이 태어난 키르기스스탄 토크마크 인근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훈의 황금 데스마스크에는 3개의 나뭇가지를 묘사한 무늬가 선명했고, 머리에 쓰는 관의 장식은 새가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이었다. 3개의 나뭇가지는 신라 금관의 솟을장식 그대로였고, 관 장식 역시 신라의 새날개형 장식의 판박이였다. 이 유물들은 3~4세기 제티수에 자리잡았던 훈이 남긴 것들이다. 경주 계림로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화려한 보검 역시 카자흐스탄의 보로보예란 곳에서 출토된 훈의 보검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삼국시대의 허리띠 중에서 유독 신라만 숫돌, 향주머니, 손칼 등을 주렁주렁 늘어뜨린 형태인데 이는 이동이 잦은 기마민족의 특징이다. 신라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는 로만글라스 용기는 유라시아 초원길을 통해 들어온 것이 분명하며,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컵과 똑같은 것이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훈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경주 계림로 고분에서 나온 보검(왼쪽)은 키질벽화(중앙)와 카자흐스탄 보로보예 유적에서 나온 것(맨 오른쪽)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권오영 교수 제공
같은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카자흐스탄 카라아가치(왼쪽)와 경주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잔(오른쪽). 박천수 경북대 교수 제공
신라시대 황남대총(왼쪽)과 사카 시기의 이식 지방의 고분(오른쪽) 내부의 구조와 황금 부장품이 유사하다. 권오영 교수 제공
왜 신라만 유목지역 고분과 유사한가
무덤의 구조는 사카 쿠르간과 유사하고, 유물은 훈의 유물과 유사한 신라 고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왜 고구려, 백제, 가야가 아닌 제티수 지역의 고분문화를 닮았을까?
필자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사카와 훈 사이에 존재하였던 오손에 주목하여야 한다는 점, 쿠르간 문화의 시간적 하한이 훈에 의해 기원후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있고, 그럴 경우 신라 고분과의 시간적 격차는 많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나아가 제티수 지역만이 아니라 유라시아 동부의 다양한 쿠르간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절감하게 되었다. 알타이 지역(러시아, 몽골, 카자흐스탄, 중국의 국경선이 교차하는 알타이산맥 주변)의 파지리크 쿠르간은 구조적으로 신라 고분과 가장 비슷한데 축조 세력을 월지로 보는 연구자가 많다. 신라 금관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금관이 출토된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아 테페도 월지나 사카와 연결짓는 견해가 있다. 결국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과 금제 유물은 유라시아에 널리 분포하는 쿠르간과 황금문화에서 그 계보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신라 왕족이 흉노의 일파라느니, 북방 유목민이라느니 논란은 많지만 아직 실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유라시아의 쿠르간과 황금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도 2015년도부터 카자흐스탄과 몽골 일대의 쿠르간 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작년에는 그 성과를 모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카자흐스탄 초원의 황금문화>라는 중요한 성과를 출간하였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은 ‘황금인간의 땅, 카자흐스탄’ 특별전(2018년 11월27일~2019년 2월24일)을 개최하고 있다. 우리 역사와도 관련 있는 카자흐스탄의 문화에 흠뻑 취해볼 좋은 기회이다. 2019,1.12
돌로 거대한 산을 만든 베스샤티르 쿠르간의 모습. 권오영 교수 제공
Deo Ti Gheria Maria
출처: 다음 블로거 시 하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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